시일: 1982.3.15. 월새
제목: 받은 복음과 다른 것을 듣게 될 때에는 철저히 "구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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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처음 듣는 것이 있을 때는 "숙제"로 두고 연구해야 합니다.
신앙의 사람은 어디 간다고 해도 피동이 안됩니다. 벌써 자기에게 깨달아진 주장이 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 들은 것이면 "이것은 처음 들은 것이라" 하여 그것을 특별히 기억을 해 두고 또 동그라미를 쳐 둡니다. 왜?
자기가 나쁜 것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나쁜 것을 듣고 잊어 버려는데도 그것은 버려지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 들어 있다가 언젠가 나옵니다. 그 나쁜 것이 언젠가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서 성공할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이지 절대 떠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감각도 이것이 한번 들어와서 담기면 그것이 사그러지는 줄 알아도 자기에게 보여지지 않을 뿐이지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기에 처음 들은 것은 그것에게 동그라미 표시를 해 둡니다. 그렇게 표시를 해두고도 누구에게 물을 만한 사람이 없고 또 자기 이상으로 가르칠 사람이 없어 모두 후배 뿐이면 성경에 묻고 기도해서 묻고 또 묻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것을 바로 알아두려고 애를 써서 묻는 때에 그것 하나로 그 사람을 단정합니다.
이 사람이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쳤는데 이것은 참 옳고 바른 것이구나, 그런데도 내가 몰랐구나, 이 사람에게는 앞으로 배울 것이 있겠다 하는 것을 판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아 이것은 잘못됐구나, 이 스승은 스승이 아니라 나를 미혹한 인간이로구나 하여 그 하나 잘못됨으로 딱 줄을 쳐 버립니다.
또 자기에게 이제까지 배운 것과 정 반대의 것이 나왔습니다. 정 반대의 것이 나왔으면 이것은 더 합니다. 반대의 것이 나왔으니까 이렇게 갑이라고 하는 것 배웠는데 이 갑이 아니라 을이다 이러니까, 을이라 하니까 그만 거기 따라서, 아 이것은 을이라 하여 을을 인정했다가 또 병을 만나면 병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든지 따라가고 인정하는 것은 신앙의 창기입니다. 신앙의 지식적 창기입니다.
그런 자는 마귀라는 놈이 제 보배로 여깁니다. 왜 이것은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2.보수성을 가지고 고쳐 나가는 것이 옳은 법입니다.
사람에게 "개정(改正)이 좋습니다. 고치는 개정, 고칠 개자 바를 정자. 고쳐서 개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은 보수하는 기초 위에 있어야 합니다. 보수는 그것을 지켜 보호한다 말입니다. 묵은 것을 보수하는 보수성이 있으면서 보수성을 가지고 개정이 되어 나가야 되지, 뿌리없이 자꾸 개정해 나가는 그 인간은 그것은 아무짝도 못쓸 인간입니다. 그까짓 거야 천명이 있어봤자 그 뭐 상대할 것도 없습니다. 그 상대할 것도 없고 그것은 있어봤자 없는 것 한가지입니다. 앞으로 고쳐 나가는 것, 새 것을 취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보수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 위에 있어야 됩니다.
보수성만 가지고 개량성이 없는 사람은 미개인 야만인이 되어지기 쉽고 또 보수성없이 개정성 개량성 이것만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은 속화인이라 못쓸 사람입니다. 속화인이라 쓰지 못할 사람이 돼버리고 맙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속화성이 심합니다.
내가 언젠가 언제 어떤 사람을 보고 아 참 야 그거 잘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돈을 벌려면 여자들을 꾀우는 물건을 만들어야 되지 남자들에게 대한 물건을 만들면 헛일입니다. 남자들은 보수성이 있기 때문에 뭐 새 것이 나와도 그렇게 잘 혹 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색깔만 하나 달라도 와 하고, 실나끈만 몇 낟개 달리 달아도 와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자로 상대해서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다 돈을 벌고, 남자를 상대해서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다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 사업이 보수성을 가지고 개량성을 가진 사업이라면 이것이 제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이제까지 들은 것과 정 반대의 것이 나왔다면, 예를 들어 이렇게 가르치니까 이거다 싶어 또 받았습니다. 또 딴 데서 말하니까 그것을 다 받아 들였습니다. 이것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꺽어 놓은 화초와 같은 고로 꽃도 마르고 그것이 무슨 열매를 맺겠소 열매는 감감합니다. 열매를 의례히 못 맺습니다.
3.새것을 배워 과거 배운 것을 버리게 되면, 과거 전부를 버리게 됩니다.
자기 배운 것과 새로 배우는 것이 다를 때에는, 배울 것을 버리고 과거 것을 취해도 안되고 또 과거 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해도 안됩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지금 여기서 결정되기 때문에 요 두 가지를 두고는 심히 심사해야 됩니다. 처음 만든 것보다 다음에 들은 것을 더 신중히 심시해야 됩니다. 왜? 과거에 배운 것과 정 반대 것이 나왔으니까 과거에 배운 것을 버리면 과거에 배운 그 전부가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네가 누구에게서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생각하라’ 그 말한 것은 그에게 배운 것 하나가 틀렸다 하여 버리게 되면 그 사람을 져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배운 것은 다 져버리게 된다 그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하나를 부정하면 과거에 배운 모든 것이 부정이 되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요 하나로 보는 것이지만, 끝은 하나 나왔지만 거기 모든 과거에 배운 것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요거 부정하면 모든 것이 부정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 새로 배워 가지고 과거와 정 반대 되는 것이 나왔었는데 새것을 취하고 과거 배운 것을 버렸다면, 하나 버린 것이 모든 것을 다 버린 것 되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라 그 말입니다.
4.말이란 생각나는 대로 퍽 퍽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동이 없어야 권위입니다.
이러니까 다를 때에는 놓고 뗍니다. 다를 때에는 이것을 심각한 문제로 두고 자기가 성경을 상고해 가지고도 연구하고 자기가 들을 만한 사람에게도 가서 연구하고 자기가 이제까지 배운 모든 지식을 가지고 파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반드시 옳게 가르킨 것이라고 하면 자기가 몰랐지 가르킨 그 속에 있다는 것이 증거가 될 때에 아 자기 이미 배워논 것에 대해서 확신이 되고 더 강해지고 만일 그것이 새로 배운 것이 이것이 정 반대인 이것이 옳고 과거에 배운 그것이 잘못됐다 했을 때에는 심사해서 그리 됐다고 했을 때에는 이것만이 아니라 정 반대로 가르치는 이것이 좋다 이래 볼 때에는 자기가 이제까지 배운 그 모든 것을 다 이별에 붙이게 됩니다. 모든 것을 의문에 붙이고 의문에 붙이고 연구를 해야 됩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이라 하는 것은 신중하게 나가는 것이지 성경 보고 아무나따나 생각나는 대로 퍽 퍽 말하고 이런 줄 알면 안됩니다. 한번 말을 했으면 그 뒤에 그것이 변동이 없어야 되는 것이 제일 권위인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전자로 두시지 안했기 때문에 자꾸 그 자기의 아는 것이 바로 알지 못했어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겨졌고 문제가 생겨짐으로 연구 과제가 생겨졌고 연구 과제가 생겨짐으로 전문적으로 바로 자꾸 나아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몰랐어도 진보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역사에 속한 것도 있고 자기가 모른 것을 말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파괴적으로 나가는 것도 있습니다. 건설면에 속한 것인지 파괴면에 속한 것인지 이것도 또 구별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생활은 전체가 구별 없으면 다 죽고 망합니다. 구별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