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광수씨의 구원론과 신약의 구원론 - 구원론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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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최근 다락방 전도 운동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운동을 지지하
고 따르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적지 않은 반면 또한 동시에 이 운동에 대한 우
려의 목소리 역시 적지 않다. 이미 교단적인 차원에서 상당한 우려의 목소리가
고신측과 고려 신학교에 의해 공식적으로 표명되었고, 대한 예수교 장노회(합동
측) 총회의 의뢰를 받아 총신 신대원의 세 교수의 연구 결과가 총회 신학부에 제
출되었고, 그 연구 결과를 그대로 수용하기로 결정된 상태이다(기독신보, 7월 27
일짜 기사 1면, 9면). 한편 7월 24일에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다락방 운동에
관한 공개 토론이 있었다. 비판적인 입장에서 총신 신대원의 서철원 교수가 미혹
의 영, 천사 동원권, 사탄 결박권등을 지적하면서 이런 내용들은 김 기동 목사의
주장과 흡사한 것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입장을 변호
하기 위해 나온 류광수씨는 자신의 신앙적 신학적 뿌리는 개혁주의적 보수신앙이
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이 사용한 표현들이 용어상 문제점이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잘못된 것들은 서 교수가 지적한 대로 수정하겠다고 했다.1) 그러나 자신의 주장
의 김 기동씨의 귀신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축하면서, 오히려 귀신에 대한 그의 관심은 복음전도 현장에서 비롯된 것이라
고 강조했다.
대체적으로 지금까지 류광수씨의 주장에 대한 비판은 주로 위에서 지적
된 대로 미혹의 영, 천사 동원권, 사탄 결박권과 함께 사탄 배상설, 재영접설 (구
원론) 등에 관한 것이다.2) 그 외에도 다른 문제들이 제기됐으나 이러 것들이 비
판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최근 비판적인 주장들에 대한 류광수씨 측의 반응
역시 만만치 않다. 류광수씨가 한 잡지사와 한 대담에서 자신의 문제는 신학적인
사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용어상 혹은 표현상의 문제로 돌렸다 (교회와 신앙 23
[1995, 12월호]: 132-33). 그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회관에서 개체된 토론에서 한
편으로는 자신의 신학과 신앙이 개혁주의적 보수적임을 누차 강조하면서 그의 가
르침에 잘못된 사상이 있다면 고치겠다고 했다. 물론 그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고
치게 될 내용을 말하지 아니했다. 그날 출구에서 배포된 다락방 운동을 전적으로
1). 본글에서 유 광수씨를 “목사”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유 광수씨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고, 그가 1991년 11월 26일 부산 노회 제 133차 임시노회에서 목사직을 면직 처분을
받은 이후 아직 해벌이 되지 아니했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하여 “목사”란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점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2). 박 진규, 류광수 다락방 전도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 “류광수 씨의 ‘다락방 교리’와 김기동
귀신론과의 유관성,” 교회와 신앙 21 (1995, 8월호): 99-103; ...“류광수 씨의 신학은 과연 건전한
가” 교회와 신앙 24 (1995, 11월호):108-119; 석 원태, 연구보고서: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다락방
전도 운동의 신학성 (1995); 서 철원, 김 길성, 박 용규, 연구보고서: 류광수씨 다락방 운동의 몇
가지 신학적 문제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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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호하는 무료 책자는 비판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제기됐던 비판들에 대한 반격
을 가하고 있다.3) 이 책자는 지금까지 제기된 비판들에 대한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반박이라기보다는 류광수씨의 주장이 문제가 없고 타당하다는 선언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의 비판이 타당성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회개하고 자숙해야 한다는 것이다.4)
이러한 비판과 반박의 상황에서 본 연구의 초점은 구원론에 있다. 류수씨
의 구원론에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지적되었다. 비판하는 자들은 류광수씨가 믿
는 단계와 영접하는 단계를 구분하고 있다고 비판을 하고, 이에 반박하여 류광수
씨 측에선 이러한 구분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한다(다락방 전도란 무엇인
가?, 69, 80쪽). 본 연구는 류광수씨가 주장하는 구원론의 입장을 간략하게 제시
하고, 신약의 관점에서 그의 구원론의 한계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본인이 그의 구
원론에 초점을 두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효과적인 전도에 관한 그의 장점
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원론이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둘째로, 성
경이 교훈하고 있는 균형 잡힌 구원론의 제시는 한국 교회에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류광수씨의 균형 잃은 구원관
허만혁 목사는 류광수씨의 구원론을 변호하며 그의 구원론은 “철두철미
전통적인 신학에 근거한 것이며, 구체적이고 종합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근거로 류광수씨가 엡 2:1-10을 자주 사용하는 사실을 들어, 구원은 과거 문제 해
결(허물과 죄에서 해방), 현재문제 해결(사탄 권세에서 해방), 미래 문제 해결 (천
국 가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한다(다락방 전도란 무엇인가? 69, 80
쪽). 본인은 사실상 이 요약이 류광수 씨의 주장을 잘 반영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관이 허만혁 목사가 주장하는 대로 “철두철미 전통적인 신학에 근거
한 것이며, 구체적이고 종합적”이라는 데는 본인은 이의를 제기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곧 검토하게 될 구원에 관한 류광수씨의 진술들은 구원이 무엇인
가 정의하기 위한 의도로 주어진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5) 이러한 의도는 그
는 자신의 가르침대로 독자들이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바라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와 함께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주장을
보자. 그는 전도기초훈련에서 구원을 엡 2:1-6에 근거하여 세 가지로 설명한다
(113쪽): (1) 죄에서 해방된 것 (1절), (2) 현재 사단의 권세와 그 운명에서 벗어나
는 것 (2절), (3) 내세에 천국보좌에 앉는 것 (6절).6) 그는 이 세 가지는 예수님을
3). 허 만혁, 다락방 전도란 무엇인가세계 복음화를 위한 다락방 전도 훈련원, 1996)
4). 위에 책, 제 3부: 다락방 전도에 대한 비판과 반박, 60-87쪽
5). 그가 사용하는 표현들은 “구원이란 어떤 것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어떤 것
입니까”등 이다.
6). 여기서 주목할 것은 3번째 항목으로 그는 미래적 구원으로 “내세에 천국 보좌에 앉는 것”을 엡
2:6절을 들어서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엡 2:6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본문은 분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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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하는 “즉시 해결되는 것” 이라고 한다 (현장 복음 메시지, 제 28과). 그는 비
슷하게 구원의 복을 4가지 지적한다: 원죄, 자범죄, 조상의 죄에서 해방, 세상의
짐과 사단의 권세에서 즉시 해방, 지옥의 권세에서 영원히 해방됨, 이 땅에서 여
러 세대에 증거를 보임 (115쪽).7) 비슷하게 그는 구원을 또 다시 4 가지로, [사
탄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즉시 신분의 변화(요 8:44→요일 3:2), 사탄의 권
세에서 해방(엡 2:4-5),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롬 8:2), 지옥에서 해방(계 14:9; 요
14:3)으로 이해한다.8) 구원에 관한 동일한 주장이 그의 복음편지에 그대로 나타
난다 (8, 12쪽). 그의 같은 주장은 그의 전도 훈련 교제에 잘 반영되고 있다
(18, 28쪽--“우리의 구원은 마귀의 손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그는 구원이란
“사단의 손에서 해방되는 것,” “죄에서 벗어나는 것,”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 받
는 것”이라고 말한다(전도기초훈련, 106쪽).
위 사실들은 그가 구원을 주로 죄 용서와 사탄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정의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구원관의 핵심적인 초점은 사탄으로부터의 구원에
있다. 이 사실은 그는 구원의 부정적인 측면, 즉 사탄으로부터의 구원을 너무 지
나치게 강조한다는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석 원
태, 연구보고서, 33쪽; 박진규, 류광수씨의 신학은 과연 건전한가? 12-13쪽). 분명
히 신약 성경은 구원의 한 측면으로 사탄으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한다(행 26:18;
고후 4:4-6; 엡 2:1-5; 갈 1:4; 골 1:13-14; 딤후 2:26; 히 2:14-15; 요일 3:8). 그러
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원의 한 요소이지 전부는 아니다. 그렇지만 류광수씨에
게서 이 요소가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사탄
으로부터의 구원을 주장하는 것 자체는 성경적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
만 이것이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지나치게 강조하고, 다른 면들을 말하지 않지
않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풍성한 구원의 성격을 빈약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류
광수씨의 이러한 관점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부분에서 제시된 것이기 때
문에 위험의 심각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있다. 차라리 그가 구원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려는 의도가 없이 구원에 관한 진술을 했다고 하면 오히려 좋았을 뻔했다.
그의 한쪽으로 치우친 구원관이 “절두철미 전통적인 신학에 근거하고 종합적”라
고 간주될 수는 없다. 그의 구원관은 오히려 균형을 상실한 축소된 구원관을 제
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중에 언급하게 될 구원에 대한 성경의 구체적인 증거는
류광수씨의 좁은 구원관이 보완되고 수정돼야 함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류광수씨는 구원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는 구원을 이미 받
은 사람 중에 영의 사람이 있고, 육의 사람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그에게
독특한 주장이라기보다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주장이다. 구원받았으나 여전
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신자들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 sunhvgeiren) 그와 함께
천국에 앉히였다 (sunekavqisen)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미래적인 구원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다 (부정과거 시재 주목).
7). 류광수, 현장 복음 메시지 (서울: 도서 출판 예수 생명, 1993) 서론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8). 위에 책, 서론과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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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육의 사람은 육에 속한 신자요(요 3:1-3),9) 영적 유산을 모르고, 불신앙, 불순
종, 사랑이 없으며, 육신적인 일에 끌려다닌다, 반면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
를 나타내고, 새 능력을 얻는다(현장 복음 메시지, 제 24과). 그러나 신자의 일부
를 “육의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성령을 떠나서는 정의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신자 곧 성령이 내주하는 자(롬 8:9) 혹은 성령 세례를 받은자인데
(고전 12:13) 이렇게 성령으로 특징지워지는 신자를 육의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류광수씨 역시 성령의 내주를 구원받은 상태로 본다는 사실은
그 역시 신자를 성령과 관련하여 정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현장 복음 메시지,
제 36과; 전도기초훈련, 60, 118쪽). 그는 성령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의 영혼 속
에 거한다고 본다(전도기초훈련, 192쪽).10) 그에게 신자가 소유하는 생명과 성령
은 동일한 개념이다(복음편지, 13, 16쪽--“롬 8:2에서는 생명이 곧 성령이며...”).
그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이 우리 영 가운데 거하는 것을 구원으로
본다(10쪽).
그에 의하면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7가지 권세를 부여받았다. 이
일곱 가지는 (1)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롬 8:14), (2) 기도 청구권(요 16:24), (3)
사탄 결박권(막 3:14-15),11) (4) 천사 동원권(출 14:19; 왕하 19:35; 히 1:14),12) (5)
9). 인용된 성경구절은 고전 3:1-3을 요 3:1-3으로 잘못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글 개역 성경
이 고전 3:3에 두번 사용된 “육신적“ (sarkikov")란 형용사를 ”육신에 속하여“로 번역한 것은 불
행스러운 일이다. 표준 새번역 역시 이것을 ”육에 속한“으로 비슷하게 번역했다. 이러한 문제있
는 해석에 근거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자를 육신에 속한 신자와 영에 속한 신자로 구분한다.
그러나 구원은 성령과 육 (savrx)의 관계에서 볼때 육의 영역에서 성령의 영역으로의 전환이기 때
문에 육의 영력에서 성령의 영역으로 옮겨진 신자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바람직한
표현이 아니다 ((롬 8:8-9). 구원받은 신자는 본질적으로 성령을 소유한 자로서 성령에 소속된 자
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신적“ (sarkikov")이라는 말과 ”육신에 속한자“ (ejn sarkiV)를 성경이
구분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전 3:3; 롬 8:8). 신자는 아직도 육신적인 죄의 요소를 다 벗지
못했기 때문에 ‘육신적이’라고 불릴 수는 있어도 육신에 속한자로 불릴 수 없다. 이 표현은 성
령을 소유하지 못한 불신자를 가르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10). 그러나 같은 쪽에서 그가 성령의 내주를 “예수 새생명으로” 본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왜냐
하면 신자가 가지게 된 새 생명과 성령의 내주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오해가 그의
다른 글에도 나타난다 (복음편지, 13쪽: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자는 자신의 능력과 전혀 관계 없
이 그 속에 성령이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생명입니다”).
11). 구원받은 신자가 사탄결박권을 부여받았다는 주장은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본
인이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류광수씨가 귀신을 쫗아내는 권세를 사탄 결박권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것은 귀신을 쫐아내
는 권세이다 (마 10:1; 막 6:7; 눅 9:1). 복음서 어느 곳에도 제자들이 사탄을 결박하는 권세를 예
수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증거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강한 자 사탄을 결박하는
것과 더 강한 자 예수님의 귀신 축출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 사탄보다 더 강
한자이기 때문이다. 이 연관성은 예수님의 귀신 축출을 설명하는 강한 자 결박의 비유에 잘 나타
난다(마태 12:29; 눅 12:21-22). 예수님에 의한 사탄 결박에 관한 내용들은 본인의 박사 논문,
Matthew"s Concept of Jesus" Holy War against Satan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Gadarene
Demoniac Story (Philadelphi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96) 제 4장 D 항목에서 자
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248-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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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복음화의 권세, (6) 축복권과 저주의 권세, 그리고 (7) [그리스도] 대행권이
다 (전도기초훈련, 44-45쪽). 위에 항목중 3-4번은 많은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본
인은 별도로 여기서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은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 이 문제에 대해 류광수씨는 서로 상충되
는 답을 제시한다. 그 내용을 보자. 먼저 그는 “예수이름으로 구원받는 단계”를
다섯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아는 단계, 믿는 단계, 영접하는 단계, 시인하는 단계,
나타내는 단계 (전도기초 훈련, 63쪽; 현장 복음 메시지, 제 3과). 구원의 5 단계
구분은 그의 주장 전개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상반된 주장에 의하여 부인되기 때문에 본인은 이 표현 자체를 두고 지나
친 비판을 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위에 주장과는 다른 이해를 제
시하고 있는 그의 글을 보자. 여기서 그는 믿는 단계와 영접하는 단계 입으로 시
인하는 단계를 각각 구분하고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이 셋이 긴밀하게 연결된 유
사한 개념으로 본다. 한 곳에서 그는 요 1:12을 들어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린다”고 했다(현장 복음 메시지, 제
42과). 다른 곳에서 그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같
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전도훈련교재, 10, 15쪽).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을 분명히
지식으로, 마음으로, 입술로 시인하고 영접한 자를 뜻한다”는 그의 정의는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한다(복음편지, 13쪽; 전도기초훈련, 114쪽). 그가 “믿는 다는 말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에서 성경 구절을 요 1:12, 계 3:20, 롬 10:9-10, 마
10:32-32를 같이 인용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전도기초훈련,
90쪽). 이뿐만 아니라 그는 구원받는 다섯 단계로 제시한 것을 이미 구원받은
신자가 “항상 기억하고 생활화해야” 할 5 가지 사실로 제시하고 있다(전도기초훈
련, 121쪽, 복음편지, 18쪽).13) 이러한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그가 말한 구원받는
5 단계는 잘못된 명칭이며, 그가 한 다른 주장들에 의하여 부정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 항목은 수정되거나 삭제돼야 한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믿음과 중생과의 관계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믿음을 중생의 결과
로 이해한다(요 1:12-13). 그러나 그는 믿음, 즉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영접하
는 것이 중생을 가져오는 것으로 본다. 그는 전도 대상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
를 시인하고 영접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다음, “시인하면 그의 영혼 속에 성
12). 그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때 천사동원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가 기도할 때 천사를 동원하신다는 뜻으로 말한 것으로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우리는
기도로 천사들을 사용할 권세가 있다”고 진술한다(현장 복음 메시지, 제 41과). 그는 또한 다른
곳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움직이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한다 (사명자 가
이드, 13쪽).
13). 전도기초훈련, 63쪽과 121쪽을 비교해보면, 그는 이 두 곳에서 동일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사실은 그의 주장이 서로 모순됨을 보여준다. 같은 책앞에서 구원의
다섯 단계로 제시한 것을 그는 뒤에서 이미 구원받은 성도가 기억하고 살아야 할 사실로 제시하
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이 서로 상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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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이 내주하신다. 그러면 그는 새로운 생명으로 중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전도
훈련교재, 15쪽).14) 앞 진술에서 우리는 예수님 시인⇒ 성령의 내주⇒ 새로운 생
명으로 중생의 도식을 얻게 된다. 우리는 분명하게 그가 예수님을 시인하는 믿음
이 중생에 우선하거나 혹은 중생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는 다른 곳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곧 중생의 방법으로 믿음을 말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전도기초훈련, 119쪽; 복음편지, 16쪽).15) 그의 이러한 이
해는 그 자신의 주장에 비추어 볼 때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인간의 영은 타락으
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떠나 죽었고 사탄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나 타인의 노력으로 영을 살릴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어서
중생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전도기초훈련,
105-107쪽). 믿음이 중생에 우선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
관과 인간의 전적은 무능력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적인 구원론을 반영하기보다는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 구원관에 가깝다.
구원에 관한 그의 글과 설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쉽게 불려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말은 그가 설교 중에 반복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예수님을 영접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표현이다.16) 우리는 이미
그가 모든 문제 (과거-현재-미래) 해결의 관점에서 구원을 이해한 사실을 그의
구원 정의에서 보았다. 이러한 표현은 그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마 11:28
절을 인용하며 “이 예수(생명)를 영접할 때 모든 문제 해결”이 된다고 한다(전도
기초훈련, 64, 124쪽, 복음편지, 19쪽). 구원받은 신자들이 “영적으로 완전한 해방
과 자유를 얻었습니다.”란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복음편지, 17쪽).
우리가 위에서 본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과거문제, 현재문제, 내세문제까지
“즉시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계속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갈 5:16-18; 빌 1:6).17) 그러나 그의 지
14). 같은 책 10쪽에서도 그는 비슷한 주장을 한다: “예수를 主라고 시인하게 만들고 예수 그리스
도를 영접하게 하면 그는 새롭게 태어난다 (롬 10:9-10).”
15). 그는 여기서 3 문장을 나열하고 있다: “① 내가 예수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예수 생명이 내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②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위로부터 난다)는 말입니다. ③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요 3:14-16)”. 우리는 위에 세 문장에서 2번과 3번의 관계를 문맥
적으로 생각해 볼때, 3번에서 ‘방법’이란 말은 2번에서 언급된 물과 성령으로 거듭는 것과 관련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인용한 요 3:14-16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하고 있
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중생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6). 본인은 필라델피아에서 1995년 2월 6일-9일까지 개체된 집회에서 류광수씨의 설교를 기회를
가졌다. 이 때 4일간의 집회에서 본인은 그가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받는다”고 반복
적으로 말하는 것을 인상깊게 들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란 진술과 함
께 사용되었다. 그 때 본인이 한 메모를 확인할 결과 이러한 표현이 여러번 등장하고 있다.
17). 그는 구체적으로 계속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고 있으나, 이 두 성경 구절
을 인용한 점을 보아 구원의 성화적인 측면을 염두에 둔 것 같이 보이나 성화는 그의 구원 정의
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을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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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친 강조가 이미 해결됐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
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 구원이 다 완성된 것 같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가 나중에 성경적인 구원관을 제시할 때 보겠지만 불신자가 믿음으로 예수님
을 순간 그가 경험하는 구원은 완성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도 취하는 입장은 독특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신자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성화적인 구
원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 ‘교제’란 의
미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구원을 속죄와 영생에 국한시키고 신자의
삶를 구원과는 구별된 ‘교제’로 제시하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현장 복음 메시지,
제 20과; 전도기초훈련, 76쪽):18)
구원과 교제는 다르다. 구원은 속죄와 영생을 의미하나 교제는 매일 매
일의 관계나 사귐을 의미한다. [사탄은] 우리의 구원은 막을 수 없으나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능력과 축복은 막으려고 시도한다. 교제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
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그의 생명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우리가 그리스도
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이 말씀 바로 다음에 그가 제시하는 성경구절들은 전통적으로 구원의 성
화적인면과 관련된 것들이다. 아래 그의 증거들을 이를 뒷받침한다. 성숙한 그리
스도인은 신령한 말씀의 젓을 사모하며(벧전 2:2),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계속
적으로 받으며(벧후 1:4), 자기를 위하지 않고 주를 위해 살며(고후 5:15), 땅에 것
을 생각하지 않고 위엣 것을 생각하며 살며(골 3:1-3),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인으
로 다스리도록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이에 순종해
야 한다(현장 복음 메시지, 제25-26과). 뿐만 아니라, 신자는 사탄의 세력에 대항
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계속적으로 싸워야 한다(제 31과). 그는 또한
예수님을 영접한 새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라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가르
친다(전도 훈련 교제, 6, 10쪽).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행하시는 성화의 역사에 대
하여 인정한다(복음 편지, 16쪽). 그는 구원받은 신자가 싸워할 세 가지 싸움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 “속이는 사탄과 싸워야” 하는 것, “세상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것을 든다(전도기초훈련, 124쪽). 신자들은 그의 “모든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자신의 주인 (Lord)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현장 복음 메시지, 제 20, 28과). 사실상 그는 아주 강하게 신자
의 모든 삶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함을 역설한다고 볼 수 있다(복음편
지, 14, 18쪽).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그의 진술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성화적
구원 혹은 성화 구원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신자
의 삶을 구원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매일 매일의 관계나 사귐을 의미하는 교
거로 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의 글을 근거로 해서 말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18). 아래 인용문 둘째줄에 주어 [사탄은]는 전도기초훈련에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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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이나 조직 신학을 바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성
화란 말 대신 교제란 말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할 것은 자명하고, 더욱이 그가 말
하는 교제는 결국 구원의 성화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화를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로부터 분리시키는 예상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성화가 구
원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부인이 된다면 이것 역시 적지 않은 비판을 면할 수 없
을 것이다.19)
성경의 균형 잡힌 구원관
신약 성경의 구원관 제시는 자연스럽게 류광수씨의 구원론이 가지는 한
계점을 드러낼 것이다.20) 우리는 앞에서 그의 구원론은 편협하고 종합적이지 못
하고 균형을 상실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를 입증하는 성경의 구체적인 자료를 제
시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신약 성경의 구원론을 논하고자 하는 것
이다.
신약의 구원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우리가 전제하고 들어가야 할
것이 있다. 성경의 한 책 또는 한 구절에만 근거하여 구원관을 확립하는 것은 바
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한 부분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아니고,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다른 부분의 가르침을 허용하지 못하는 배
타적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어느 한 부분에 기록된 구원에 관한 가르
침은 구원에 관한 모든 가르침이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원에 대한 부분적
이지만 적절한 가르침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복음서가 한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
하여 얼마나 서로 독특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가르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만
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복음서들의 가르침 중 한 복음서의 것만 고집하
고 나머지 것들은 배척한다면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관
한 다른 가르침들을 희생시키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4
복음서의 가르침은 상호 보완적이고 보충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들의
19). 본인이 류광수씨가 쓴 책들이 그 자체내에 여러 가지 서로 모순되는 진술들을 담고있는 사
실을 감안해 볼때,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성급하게 그의 진술들을 했다고 보인다. 사실상 위
에서 인용된 글은 대부분이 성화 구원과 관련된 구절들과 연결이 되어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성
경구절들이 성화가 아닌, 교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이것이 파생할 수 있는 예상
치 않은 결과를 숙고한 것 같지 않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 그가 참으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신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점진적인 성화를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에서 분리하지 아니
할 것이다. 그가 설사 성화를 구원의 중요한 요소를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믿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주장은 성화를 구원으로 부터 분리시키는 위험을 초래한다. 그렇기 때
문에 그가 “구원을 속죄와 영생”으로 정의한 것은 너무 제한된 이해로 성화의 자리를 박탈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은 시정되야 된다.
20).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성경 구절들에 대한 심층적인 주해를 제시해야 할 것이나, 그렇게
하면 성경 여러 부분의 가르침을 반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경의 다양한 가르침을 반영하고자 성
경의 나열과 함께 간단한 설명으로 주해를 대신하고 있음을 독자들은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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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 모두가 존중되고 경청돼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제와 이해가 신약
의 구원관 파악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약의 구원론은 어떠한가? 신약의 구원론은 과거, 현재, 미래의
관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먼저 우리가 주목하는 ‘구원하다’ (swvzw)란 단어가 모
두 세 시제로 사용됐음 볼 수 있다. 이것은 한 구원이 세 가지 각도에서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묘사하는데 이 동사만 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한 용어
들이 사용되었다. 구원의 세 가지 관점에서 신자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과거적),
구원받고 있는 혹은 구원을 이루어 가야할 사람(현재적 혹은 현재 진행형 구원),
구원받을 사람(미래적 혹은 최종적 구원)으로 불 릴 수 있다. 구원에 관한 다양한
묘사를 해주는 성경의 자료를 세 가지 각도에서 관찰하고자 한다:
가. 이루어진 과거적인 구원
우리는 신약에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묘사가 아주 다양하고 풍성함을
발견한다. 구원은 그 자체가 풍성하기 때문에 신약 성경은 이를 한 단어만 사용
하여 설명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제시할 성경 구절과 그 간단한 설명은 이러한
특성을 잘 반영한다.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성경 구절들은 대부분 구원을 부정과거 시제나 현재 완료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하
고 있다. 이것은 이미 주어진 구원의 확정적인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점에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일부 성경 구절
들은 이미 적용된 구원의 묘사와 함께 동시에 계속 진행되는 구원 혹은 미래적
인 구원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구원은 어느 관점에서 보든지 한 구원
이며, 다양한 시각은 한 구원의 본질적인 모습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를 염두에 두고, 아래 내용을 보자:
요 5:24 믿는 자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았다 (metabevbhken --현
재 완료 수동형).
행 15:11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같이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swqh"nai --부정과거 수동형 부정사).
롬 5:9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다 (dikaiwqevnte"--부정
과거 분사 수동형)
롬 5:10 신자들은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화목 되었다 (kathllavghmen--
제 2부정 과거 수동형)
롬 6:2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다 (ajpeqavnomen
--제2 부정 과거 능동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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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6:17-18 죄의 종이였던 신자가 죄에서 해방되어 (ejleuqerwqevnte" --부정과거
수동형 분사) 이미 의의 종이 되었다 (ejdoulwvqhte --부정과거 수동형)
롬 8:24 신자는 구원을 받으면서 (ejswvqhmen-- 부정과거 수동형) 부활의 소망를
가지게 되었다.21)
고전 1:2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거룩함을 받았다
(hJgiasmevnoi"--완료 수동형 분사).
고전 6:11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이미 씻김을 받고, 성결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았다 (ajpelouvsasqe ajllaV hJgiavsqhte ajllaV ejdikaiwvqhte --세 동사 모두 부정
과거 수동형).
엡 2:5, 8 에베소 성도들이 은혜로 구원을 이미 받았다 (sesw/smevnoi --현재 완료
수동형 분사).22)
엡 4:30 이미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으나 (ejsfragivsqhte --부정과거 수동형) 구속
의 날은 오지 아니했다.23)
골 1:13-14 하나님께서 골로새 성도들은 어둠의 권세에서 이미 구출하여
(ejrruvsato --부정과거 능동형)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에 옮겼다
(metevsthsen --부정과거). 이로 인해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지금 현재 구속곧
죄 사함을 소유하고 있다 (e[comen --현재시제).24)
골 3:1, 3 신자들은 이미 죽었고 (ajpeqavnete --제 2부정 과거 능동형), 그리스도
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고 (sunhgevrqhte--부정과거 수동태), 살아난 생명 (새 사
람)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지금 숨겨져 있다 (kevkruptai --현
재 완료 수동형).25)
21). 구원을 이미 받았으나 부활의 소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함은 구원의 미래적 요소인 부활이 아
직도 소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음을 가르친다. 이것은 구원의 과거적인 면 (already)와 미래적인
면 (not yet)를 말한다. 이러한 이중 관점은 신약 구원론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22). 바울은 이 구원를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는 사건으로
뿐만 아니라 (엡 2:1, 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으로 (엡 2:10) 설명한다.
23). 여기서 구속의 날은 주님의 재림시 있을 구원 완성의 날을 말한다. 이것도 롬 8:24에서와 같
이 이미 이루어진 구원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말한다.
24). 이 구절은 과거의 구원과 현재적 구원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구속 곧 죄의 용서를 지금 가
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구원의 현재적 측면을 말한다.
25). 골 3:3과 3:9-10의 평행적인 관계이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신자의 죽은 것은 그의 옛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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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9-10 이미 옛 사람을 벗었고 (ajpekdusavmenoi --부정과거 분사),26) 새 사람
을 입었으며 (ejndusavmenoi -- 부정과거 분사), 이 새 사람은 이미 창조되었고
(ktivsanto"-- 부정과거분사), 새로와지는 중에 있다(ajnakainouvmenon --현재 수동
태 분사).27)
딛 3:5-7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한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하심을 통해 이미 구원
하셨고(e[swsen--부정과거),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함심을 받아(dikaiwqevnte"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 영생의 소망을 소유한 상속자가 되었다.28)
히 12:22-24 신약 신자들은 시온산,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
이미 도달했다(proselhluvqate --현재 완료 능동태).
벧전 1:18-19 이방인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그들의 과거 헛된 행실
에서 이미 구속을 받았다(ejlutrwvqhte --부정과거 수동태).
벧전 2:10 하나님의 원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 신자들은 이미 긍휼함을 받아
(ejlehqevnte"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 이제는 그의 백성이다.
계 1:5-6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고 (luvsanti --
부정과거 능동형 분사), 우리를 하나님께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았다 (ejpoivhsen
--부정과거 능동형).
위 내용들과 다른 성경 구절들을 토대로 하여 구원의 다양한 묘사를 요약
신자의 생명은 그의 새 사람을, 각각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3절에 불분명하게 진
술된 내용이 9-10절에서 구체적으로 더욱 분명하게 설명된 것으로 보인다.
26). 우리말 개역 성경은 이 부분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라고 잘못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은
이미 벗어진 옛 사람을 벗어야 할 것 처럼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에 번역되어 논란을
일으켰던 표준 새번역은 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표준 새 번역은 옛 사람은 벗어져야 하고 새
사람은 입혀져야 할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요.” 이 번역은 두 부정과거 두 분사를 명령법으로 간주한 사실에 근거한다.
문법적으로 이러한 해석이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많은 역본들이 이를 지지하지 않고 있다
(ASV, KJV, NKJV, NIV, RSV, NRSV, REB, NAB, NASB, NJB).
27). 본문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 (옛 사람을 이미 벗음과 새 사람을 이미 입음) 뿐만 아니라, 현재
진행형 구원 (새 사람을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으로 계속적으로 새로와지고 있음)을 동
시에 언급하고 있다.
28). 바울은 여기서도 우리가 이미 이루어진 구원 (중생, 새롭게하심, 칭의, 상속자됨)과 동시에 미
래적 구원 (영생)을 언급하고 있다. 과거에 이미 시작된 구원은 앞으로 완성될 미래적인 구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본문에서 언급하지는 아니했지만 사실상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
어주신 것도 이미 이루어진 구원에 속한다 (ejxevceen--제2 부정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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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보자. 여기서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과거적 구원에 초점을 두고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미 주어진 구원은 죄의 용서(골 1:14; 엡 1:7; 계 1:5-6), 하나님과 화목
(롬 5:10), 칭의(롬 5:9; 고전 6:11; 딛 3:7), 사탄의 나라에서부터 구출(요 5:24; 골
1:13; 갈 1:4), 죄에 대하여 죽고 죄의 종에서 해방 받아 의의 종이 됨 (롬 6:2,
17-18), 거룩함(고전 1:2; 6:11), 성령을 부어주심과 성령의 인치심(고전 12:13; 엡
4:30; 딛 3:5-7),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창조(롬 6:2, 6; 골
3:1, 3, 9-10; 엡 2:1-5), 중생의 씻음(고전 6:11; 딛 3:5), 긍휼하심을 받은 하나님
의 백성됨 (벧전 2:10), 천상 예루살렘 성에 도달함(히 12:22-24; 엡 2:6), 하나님
의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심(계 1:6)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과
거의 구원은 다양한 면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풍성한 구원을 류광수씨처럼 죄 용서와 사탄으로부터의 구원으로
만 제한하여 정의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풍성한 모습들을 무시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본인은 류광수씨가 이렇게 풍성한 구원들을 모르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그가 제시
한 구원의 정의는 구원의 풍성한 측면을 반영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
다. 바로 이점에서 그의 구원관이 종합적이고 철두철미하게 성경적이기 위해서는
그의 구원 정의는 재고돼야 하고 교정돼야 한다.
나. 현재적인 구원
현재적인 구원은 구원의 현재적인 면 혹은 계속 진행되는 구원의 측면을
말한다. 이 구원의 근본적인 기초는 이미 주어진 과거의 구원이다. 이 구원은 이
미 시작된 구원이 가지는 현재적 상태 혹은 현재 진행적인 의의와 관련된 것이라
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원을 별개의 구원이 아닌, 같은 구원의 본질
적인 다른 면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구원의 현재적 측면을 반영하
는 성경 구절들을 보자:
요 3:16, 36; 5:24; 6:54; 10:28; 요일 5:11-13 믿는 자들은 현재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롬 6:12-13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난 신자들은 자기들의 지
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롬 8:9 성령이 자기 속에 내주하는 신자는 육신의 영역(ejn sarkiV) 에 더 이상 있
지 않고, 성령의 영역 속에 있다(ejn pneuvmati).
롬 8:12-13 성령의 영역 속에 있는 신자는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되고 성령으
로 몸의 죄악된 행실들을 계속적으로 죽여야 한다(ajpoqnhv/skein --현재 능동형
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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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8 구원을 받고 있는(sw/zomevnoi" --현재 수동형 분사) 신자에게 십자가
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후 2:15 신자들은 구원을 받고 있는 자들(sw/zomevnoi" --현재 수동형 분사) 이
다.
고전 15:2 너희가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다(swv/zesqe --현재 수동형).
고후 3:18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계속적으로 변화되
고 있다 (metamorfouvmeqa --현재 수동형 시제).
고후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나기 위해서 계속적으
로 죽음에 넘겨지고 있다.
고후 4:16 신자의 옛 사람은 계속적으로 후패해지고(diafqeivretai --현재 수동
형),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ajnakainou"tai --현재 수동형).
고후 5:17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는 지금 새 질서에 소속된 새로운 피조물
(kainhV ktivsi") 이다.29)
엡 4:24 신자는 계속적으로 옛 사람을 벗고(ajpoqevsqai --제 2부정과거 중간형
부정사), 새 사람을 입어야(ejnduvsasqai --부정과거 중간형 부정사) 할 책임이 있
다.
엡 6:10-20 신자들은 아직도 역사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골 3:2-12 신자들은 땅의 것인 옛 사람의 부패하고 죄악된 모습을 버리고(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 악의, 훼방, 더러운 말), 위에 것인 그리스도를
닮은 새 사람의 모습을 계속적으로 입어야 한다(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
음, 관용).
빌 2:12-13 신자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계속적으로 이루어감으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나타나야 한다(katergavzesqe -- 현재 중간형 명령법).
딛 2:11-12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는 경건치 않은 것들과 세상적인 욕망
을 부인하고,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09 ?한다.
29). ‘새로운 피조물’ 이란 표현은 갈 6:15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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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7:25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가는 자들을 그리스도는 항상 구원하
실 수 있다(swv/zein --현재 능동형 부정사).30)
벧전 2:2 우리는 구원에 이르도록(eij" swthrivan) 계속적으로 성장을 해야한다. 이
를 위해 부정적으로는 각종 죄악된 성품을 제거해야 하고(악독, 궤휼, 외식, 시기,
비방), 긍정적으로는 말씀의 신령한 우유를 사모하고 마셔야 한다.31)
롬 8:16; 갈 4:6; 요일 3:2 현재 신자들의 법적인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위에 언급된 성경 구절들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는 구원의 과거적 측면과 현재적 측면 사이에 인간의 역할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한다. 우리가 구원의 과거적인 측면을 이야기 할 때,
인간은 구원의 시작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피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구원을
선물로 받는 수혜자이지, 구원에 기여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의 시작과
관련하여 인간은 전적으로 피동적이기 때문이다. 구원과 관련되어 사용된 동사들
이 수동형으로 쓰인 것은 이 사실을 잘 반영한다. 그러나 시작된 과거적 구원의
계속적인 진행과 관련하여 우리가 현재적인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구원
받은 신자의 역할이 현재 진행형 구원에 있어서 능동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한 구원을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구원의 시작, 진행, 완성. 구
원의 시작(과거적 구원) 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 또한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구원의 완성에 있어서도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구원의 완
성은 육체의 부활로 주어지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
러나 구원의 중간 진행 과정에서 인간은 아주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 이 사실은
현재진행형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을 하라”는 명령법이 등장하는 사실에 잘 반
영된다(롬 6:12-13; 8:12-13; 골 3:2-12).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은 구원을 주권적으로 이루어가는 성령 하나님의 계
속적인 구원 적용을 위한 내적 역사에 대한 반응이다. 신자 속에 주권적으로 구
원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내주하는 성령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역사하신다. 이 역
사는 시작된 구원이 온전하게 진행되는 것이다(빌 2:12-13). 사실상 현재 진행형
구원에 있어서 개인적인 능동적 역할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자들 사이에 영성
혹은 성화의 차이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일으키는 욕망을 따라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예수님의 모습을 계속적으로
닮아가는 정도에 있어서 성령의 욕망과 뜻을 거역하고, 죄악된 육신의 욕망을 따
라 사는 자보다 현격한 진보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 교회에서 가장 등
30). 본문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관련되었다. 그의 계속적인 중보과 그의 계속적인 구
원(구원 적용의 의미에서) 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31). 계속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하라는 권면을 받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
녀들이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유아들이다(2:2). 이들은 구원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하심을
이미 맛본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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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되는 부분이 현재 진행형 구원인 것 같다. 이 사실은 대체적으로 교회 설교
강단에서 구원과 관련하여 인간의 행위를 말할 때, 대부분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
는 것은 이 점을 반영한다. 만일 성도들에게 “당신의 행위가 구원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행위는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가
르침 받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답은 만일 우리가 여기서 구원의 시작 이전과
관련하여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아주 성경적이고 옳은 대답이다. 이 대답의 정확
성은 어디까지나 구원의 시작이전에 제한된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경건하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완성인 육체의 영화로운 부활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의
완성에 있어서도 인간의 행위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행위가 구원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대답을 현재 진행형 구
원의 과정에도 확대하게 될 때,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현재 진행형 구
원과 관련하여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는 구원의 명령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든다. 본인은 신약을 연구하면서 신약이 구원의 직설법을 이야기
하는 이상으로 구원의 명령법 (성화 구원을 이루며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강
조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32) 이것은 구원이 시작된 이후에 성도의 삶
에 있어서 그의 삶과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증거한다. 성경
은 그 어디에서도 구원받은 성도가 아무렇게나 른살아도 괜찬다고 하지 않는다(마
7:21-23; 고전 6:9-10; 엡 5:3-5; 갈 5:19-21; 계 21:8). 우리가 중생이 선행되지 않
는 칭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닮아가는 성화적
삶으로 인도하지 않는 칭의를 생각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 시작된 구
원은 우리 속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신자의 능동적인 노
력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진행돼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현재적 구원은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요소만을 언급하지
않고, 과거의 시작된 구원의 현재적 상태도 말한다. 이미 자기 속에 구원이 시작
된 사람은 영생을 지금 현재 소유하고 있다(요 3:36; 요일 5:12-13). 그는 법적으
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가지고 있다(롬 8:16; 갈 4:6; 요일 3:2). 그는 성령의
영역아래 있고, 그 속에 성령이 내주한다(롬 8:9). 그는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
라 새로 지으심을 받는 피조물이다(고후 5:17).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하
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 보여주는 현재적 상태는 결코 불변하는
성격을 본질적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작된 구원의 결과이기 때문에 시
작된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한 구원의 현재적 상태는 취소되지 않는다. 성경은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가 현재 누리는 구
원의 축복은 상실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에 의하여 단번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은 자가 계속적으로 누리는 것이 신자의 영생이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수여 받은 자가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자
녀된 신분이다.33) 물론 이 부정적인 측면은 단번에 주어진 모든 죄의 용서이다.
32). 본인은 현제 이러한 관점으로 “구원, 신앙, 그리고 삶” 제목으로 책을 기획하고 있다. 이 책
은 상세하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시작된 구원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신자의 능동적인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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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은 자가 계속적으로 누리는 것이 성령의 영원한 내
주이다 (요 14:16; 롬 8:9; 고전 3:16).
셋째로, 시작된 구원(과거적 구원)의 현재적 상태는 신자들의 계속된 노
력을 통해서 구원이 계속적으로 진행돼야 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성경 신학
자들은 이것을 각각 구원의 직설법과 구원의 명령법이라고 한다.34) 구원의 직설
법이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서술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시작하신 구원을 말한다. 여기에 우리가 앞에서 생각했던 과거적인 구원과 그 구
원의 현재적 상태가 포함된다. 구원의 명령법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
원에 대한 합당한 반응으로 성령의 주권적인 뜻과 인도에 따라 구원을 이루어 가
야 할 우리의 책임을 말한다. 예를 들면, 모든 죄의 용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현재 누리고 있는(구원의 직설법) 신자는 죄를 다스려야 하고, 죄의 능력을 약화
시켜야 한다(구원의 명령법). 죄의 용서는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라면, 죄의 능력
으로부터의 자유는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죄악된 육신의 영역에서 성령의
영역으로 단번에 옮김을 받은(구원의 직설법) 신자들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면
안되고 반듯이 성령의 욕망을 따라 살아야 한다 (구원의 명령법). 신자의 주인은
그 속에 거하는 죄가 아니라, 내주하는 성령이기 때문에 (구원의 직설법) 성령의
인도와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구원의 명령법).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
을 가진(구원의 직설법)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성
품을 닮아야 한다(구원의 명령법). 신자 속에 구원을 적용하기 시작하신 하나님께
서 그 안에서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계속적으로 역사하고(구원의 직설법)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구원의 명령법). 이
와 같이 구원의 직설법과 구원의 명령법은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이 구원의 본질적
인 요소인 것이다. 구원의 시작(구원의 직설법)에 있어서는 신자들 사이에 개인
적인 차이가 없으나, 구원의 현재 진행 과정에(구원의 명령법) 성령의 역사에 대
한 개인적인 반응의 차이에 따라 개인별로 성화(예수님을 닮은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구원의 명령법이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이해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관점에서 류광수씨의 구원론에 조명해 볼 때, 그의 구원론이 얼
33).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서 법적으로 의로운 신분을 신자를 그의 자식
으로 입양하는 것(수양: adoption)도 포함한다.
34). 우리는 바울 서신에 구원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롬 1-11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직설법 (the indicative of salvation), 12장 부터는 구원의 명령법(the
imperative of salvation)으로 윤리적인 권고와 권면을 제시한다(12:1). 갈 1-4장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의 실재 (직설법)를 말하고, 5-6장은 그 구원의 실제에 참여하고 있는 자가 어떻게 살아
야 하는지를 윤리적으로 권면을 담고 있다(구원의 명령법). 엡 1-3장은 구원의 직설법을 4장 부
터는 그 명령법을 말한다. 골 1-2장은 그리스도안에서 풍성한 구원의 실재를 3-4장는 이에 따른
윤리적 권면(구원의 명령법)을 담고 있다. 살전 1-3장은 구원의 진술을 다루고 나머지는 윤리적
권면(구원의 명령법)을 담고 있다. 사실상 바울에게 있어서 신자의 윤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서 그리스도안에서 은혜로 주신 구원에 대한 반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삶을 다루는 윤리
는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구원의 명령법적인 성격을 본질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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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 구원의 현재적 혹은 현재 진행적 면에서 그 취약점을 가지고 있는 가를 쉽
게 파악할 수 있다. 그가 구원받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원을 너무 편협하게 정의했을 뿐만 아
니라, 현재 진행형 구원의 본질적인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점진적인 성화의 구
원을 이미 시작된 구원의 연속선상에서 보지 아니함으로 성화 구원의 위치를 약
화시키고 말았다. 더욱이 그의 글과 설교를 들으면 그의 강조점이 너무 지나치
게 과거적인 구원에 있기 때문에, 그의 독자와 청중들은 그의 글과 설교를 대할
때 구원이 주어지는 순간 그것이 다 완성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 물론
그는 신자가 구원을 받는 순간 구원이 완성되는 것으로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러
나 구원의 진행과정으로 현재적 구원의 측면을 성경이 강조하는 것만큼 부각시키
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구원론이 그의 글과 설교를 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오해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위에서 제시
한 대로 그의 구원 이해는 시작된 구원의 현재 진행의 필요성을 강조점을 받아들
려 그의 용어와 구원의 정의를 수정해야 된다고 본다.
본인은 그의 구원론의 한계점은 구원론에 관한 한국 교회의 풍토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본인의 이러한 인식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임을 밝혀둔다. 우리가 구원을 단회성과 점진성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강한 면이 구원의 단회성이고, 놀랍게도 약한 면
이 구원의 점진성이다. 아마도 한국 교회가 구원론 중 가장 잘 가르치는 요소가
있다면 단회적인 구원일 것이다(소명, 중생, 칭의, 죄의 용서, 하나님의 자녀로 입
양). 우리는 자주 입버릇처럼 “죄 용서를 받아 지옥의 형벌을 면제받고, 천국을
보장받았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순종과 봉사를 통해서 상을 받는 것뿐이
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이 시작된 이후부터 구원의 완
성 시까지 계속 진행되는 구원의 점진성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은 소수인 것은 당
연할지 모른다.35) 구원의 점진성을 강조하면, 마치 구원의 단회성을 부인하는 것
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본인은 과거에 구원의 점진성을 설
교 중에 강조하다가 오랫동안 목회하신 분에게 마치 본인이 잘못된 구원관을 가
르치는 것처럼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구원의 단회성이 구원의 전부인 것
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는 본인이 구원의 점진성만 아니라, 구원
의 단회적인 성격도 가르치는 것을 나중에 알고 더 이상 비판하지 아니했다. 이
러한 경험이후 본인은 목회자들을 가르칠 때에 조심스럽게 구원의 점진성을 다루
고 있다.
구원의 점진성 혹은 구원의 중간 진행과정에 대한 이해 부족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행위의 중요성에 대한 오해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흔히 한
국 교회는 “신자들은 많은데 신자들의 삶이 없다”는 말을 한다. 이 현상은 아마
도 한국 교회의 균형 잃은 구원론이 낳은 자식일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
35). 예를 들면, 옥한음 목사나 박 영선 목사같은 분들은 구원의 단회성과 함께 구원의 점진성을
균형되게 강조하고 있다. 본인은 이 분들 외에도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을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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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살아야 할 것과 관련된 것이 구원받은 신자의 행위와 삶이다. 점진적 구원의
관점에서 삶과 행위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않거나 가르치더라도 성경이 강조하는
만큼 역설하지 않기 때문에 “신자의 성숙한 삶”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얼마
나 한국 교회가 어떤 행위로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힘주어 강조했는가! 선행, 율법
의 행위, 도덕, 수양으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얼마나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가르쳤는가! 힘을 주어 열성적으로 구원을 최초로 받는 과정에 있어서 행위가 얼
마나 무가치한지 한국 교회는 강조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원이전의 인간 행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큰 목소리
로 말한 한국 교회는 구원의 시작 이후, 곧 구원의 진행과정에 있어서 신자의
행위와 삶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정작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했
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도들이 무엇을 암시적으로 배웠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존귀하고 고귀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자로 합당한 삶과 행
위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깨닫기는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구원의
시작 이후에도 구원의 시작 이전 에와 마찬가지로 행위는 여전히 중요하지 않다
는 인식을 심어주지 않았겠는가? 본인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점진적
구원 과정에 있어서 삶과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힘주어 말할 때, “저는 오랫
동안 예수님을 믿었는데 구원 시작 이후의 행위가 이렇게 중요한지 처음 알았습
니다” 하는 고백을 종종 들어왔다. 이 때 본인은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개
혁주의 신학의 가르침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바로 하지
못하고 퇴보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한국 교회는 점진적인 구원에 대해 범한 침
묵의 죄 혹은 강조하지 아니한 죄를 버리고 회개해야 할 때이다. 시작된 구원과
완성될 구원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새롭게 현재 진행형 구원의 절대적 필요
성을 성도의 삶과 관련하여 바로 증거해야 할 것이다. 이미 시작된 구원은 현재
진행형 구원의 기초와 원인으로 뒤에서 이 구원을 밀어주고, 완성될 구원은 앞에
서 이것을 이끌어 주기 때문인 것이다.
다. 미래적인 구원
미래적인 구원은 시작된 구원이 진행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완성될 구
원을 말한다. 앞에서 지적했던 것과 같이 우리가 받는 구원은 어디까지나 유기적
으로 연결된 하나의 구원이다. 한 구원의 세 얼굴이 과거적 구원, 현재적 혹은
현재 진행형 구원, 미래적 구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래적 구원은 구원이 시
작되면서 신자들에게 소망으로 주어졌다. 이것은 또한 시작된 구원뿐만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구원의 최종 목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
(already)이나 진행되는(in progress) 구원의 미완성적인 측면이다(not yet). 이러
한 기본적인 이해와 아울러 관련된 성경구절과 간단한 설명을 보자:
요 4:14; 6:27; 6:40; 12:25 신자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요한
은 이 영생의 미래적인 측면을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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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5:9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종말론적인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
다 (swqhsovmeqa --미래 시제).
살전 1:10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마지막 진노에서 신자들은 구출할 것이다
(rJuovmenon --현재 능동형 분사).
롬 6:22-23 성화의 결국인 영생은 미래적이다
갈 6:8 신자의 영생 수확은 미래적이다 (qerivsei --미래 시제 ).
딛 3:7 신자는 이미 영생의 상속자이나 아직 영생을 상속받지 못했다.
고전 3:15 행위의 가치를 결정하는 주님의 날에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롬 14:10; 고후 5:10 신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아니했다.
엡 1:14 성령으로 상속을 보증 받았지만 아직 상속은 받지 아니했다.
고전 6:9 하나님 나라의 상속은 미래적이다 (엡 5:5; 갈 5:21).
약 2:5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아직 상속받지는 못했다.
롬 6:6, 12; 7:24; 8:11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이미 살아난 신자는 아직도 죄
의 몸 (sw"ma th"" aJmartiva"), 곧 죽을 몸 (sw"ma qnhtov")을 가지고 있다.
롬 7:17-20 죄에 대하여 죽은 신자 (6:2) 속에는 여전히 죄가 거하고 있다.36)
롬 8:23-24 아직 몸의 구속, 곧 몸의 부활이 아직도 미래적 소망으로 남아있다.
고전 15:44 성령의 성전인 신자의 몸 (고전 6:19)은 여전히 성령에게 100% 사용
되는 신령한 몸 (sw"ma pneumatikovn)이 아직 되지 않았다.
고전 15:49-50 신자의 몸은 하늘의 사람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아직 입지 아니했
다. 그의 육체가 부활을 입게될 때, 그리스도의 형상을 최종적으로 입게 될 것이
고, 또한 하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다.
36). 본인은 롬 7:14-24에 반복적으로 언급된 1인칭 “나”는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신자를 가르키는
것으로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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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20-21 낮고 천한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이다.
빌 1:6 이미 시작된 구원은 그리스도의 날에 완성될 것이다.
살전 5:9 최종적인 구원은 아직도 소망으로 남아있다.
살전 5:23 주님의 재림의 날에 신자는 온전하고 흠이 없게 될 것이다.
살후 2:14 신자는 그리스도가 이미 들어간 그의 영광을 아직 얻지 못했다.
히 2:14 신자는 아직 최종적인 구원을 상속받지 못했다.
히 9:28 그리스도의 재림시 신자의 구원 완성이 있을 것이다.
히 4:1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은 신약 성도에게 아직도 미래적이다.37)
벧전 1:5, 9, 13 말세에 계시될 구원을 위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
호를 받는 신자들은 아직 믿음의 최종적인 결과인 영혼의 구원에 이르지 아니했
고 (9절),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최종적인 구원을 받을 것이다 (13절).
롬 16:20 사탄이 아직 신자들의 발아래 짓밟히지 아니했다.
계 20:10 신자의 최종적인 구원은 사탄이 불못에 던져지기 전에 불가능하다.
위에 언급된 성경 구절들의 가르침 중 네 가지 중요한 점을 보자. 첫째로,
이미 시작된 신자들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사
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구원의 완성을 연결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에서 잘 증거
되고 있다(빌 1:6; 살전 5;23; 살후 2:14; 히 9:28). 이 가르침은 신자가 죽을 때 그
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준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죽을 때에 일어나는 일은 점진적인 구원 과정의 중지이다. 천국에 가 있는 성도
마저 그들의 구원 완성의 날인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신자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됨이 없는 구원의 완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재림시 몸의 영광스러운 부활로 완성될 신자의 구원은
사탄과 그의 세력의 완전한 제거 이전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자는 사탄과
그의 악한 세력들을 제거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만이 그를 완전히 패배시킬 수
있고, 제거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와 그의 천사들을 불못에 던질 때가 그가 이 땅
37).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신자들은 천상 예루살렘에 도달했다(히 12: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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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날이다. 그 이후에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되는 것
이다 (계 21:1). 그 날이 오기까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계
속적으로 신자들을 위협하고 그들에게 반격을 가할 것이다(벧전 5:8; 고후
11:14-15).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
하고 힘써 싸워야 한다(고후 10:3-5; 엡 6:11-16; 약 4:7).
셋째로, 미래적인 구원은 시작된 구원의 미완성적 요소들을 전제하고 그것
들이 미래에 완성될 것을 증거하기 때문에 신자들의 삶에 종말론적인 긴장을 제
공한다. 구원을 이미 받은 신자가 처해 있는 불완전한 상황은 그의 구원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오는 긴장인 것이다. 신자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인 동시에 구원을 받지 못한 자이다. 신자는 시작된 구원과 완성된 구
원 사이에 긴장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 신자 속에 내주하
는 성령은 신자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이며 (already), 동시에 아직 받지
않은(not yet) 최종적인 구원의 보증이다. 신자 속에 죄와 성령이 동시에 거한다
는 사실은 구원의 시작(성령의 거주)과 구원의 미완성(죄의 거주)을 지적한다. 신
자의 영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죽었던 상태에서 살아났지만 (내적인 부활),
아직도 신자의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수여 받지 못했다 (외적인 부활).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혀진 신자는
(already) 여전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아니했다 (not yet). 죄와 그 모든 결과
인 정죄와 사망으로부터 단번에 구원을 받은 신자 속에는 여전히 죄와 죄성이 아
직도 완전히 제거되지 채 잠복하고 있다.
넷째로, 미래적 구원은 이미 구원받은 신자의 종말론적인 현주소를 제공한
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아직 미완성된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완성될
것을 지적함으로 한편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완성될 구원의 소망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을 권면하고, 다른 편으로는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아니했기 때문에 이미
받은 구원이 완성된 것처럼 착각하지 않게 한다. 하나님께서 신자 속에 시작한
구원를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 자신이 완성할 것이니, 그날이 이르기까지 구원
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현재 계속적으
로 이루어야 할 구원은 이미 시작된 구원의 미완성적인 측면들이다. 다시 말해서
미래적 구원은 한편으로 우리가 힘써 이루어야 할 구원의 요소들을 지적한다. 사
실상 구원의 명령법은 구원의 미래적 혹은 미완성적 요소들에 근거하여 주어진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왜 신자들은 그들의 지체들이 죄에게 이용되지 않
고 의에게 드려질 것을 권면 받는가? 신자 속에는 아직도 죄가 거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몸의 죄악된 행실을 계속적으로 죽여야 하는가? 죄
성이 아직도 신자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왜 신자들이 왜 자신의 행위를 신중
히 해야 하는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설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들
이 왜 끝까지 사탄의 세력을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가? 세상 끝 날까지 사탄과 그
의 세력들이 반격하기 때문이다.
라. 신약의 구원관의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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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위에서 본 신약 구원론의 세 가지 본질적인 모습을 도표를 사용하
여 설명하고자 한다. 도표는 여러 가지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제공하는 장점을 가
지면서 동시에 사실을 과장되게 표현할 수 있는 약점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그
림을 볼 필요가 있다. 아래 도표는 신약의 구원론이 제시하는 과거적, 현재적, 미
래적인 삼중 관점을 잘 반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공되는 것이다. 도표와
함께 그 설명을 보자(다음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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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구원 과정 도표
도표 설명:
타락한 인간의 모습: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사탄과 죄의 지배에 완
전히 종속되어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그는 점점 더 깊이 사탄과 죄의 종속에
빠진다. 이 종속에서 인간은 자기의 힘이나 어떤 노력으로도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타락을 기점으로 하여 화살표 방향으로 검은 색의 분량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그려준다. 또한 타락한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창조적 이상과 정반대 된 삶이다. 창조시 인간의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의 형상으
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면, 타락
후 인간의 죄악된 삶은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하고 사탄, 죄, 옛 사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요 8:44; 고후 4:3-4; 엡 2:1-2; 딤후 2:26).
구원의 시작: 죄와 허물로 그 영이 죽고, 사탄과 죄의 종속된 상태에 있
는 인간은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개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
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을 시작하시는 것이다(마 19:25-26; 요 3:5). 구원의 시작
에 있어서 인간은 신생아의 탄생의 경우와 같이 전적으로 피동적일 수밖에 없다.
단회적인 구원:
(중생, 죄용서, 칭의[의인의 신
분], 입양[하나님의 자녀됨])
구
원
의
시
작
점진적 구원: 성화
(예수님을 더욱 더
닮아감)
점점 더 죄와
옛사람을 벗음
창
조
타락
중생⇒개종
(신앙+회개)
재림⇒
몸의
부활
⇒구원
의
완성
사탄, 죄, 옛사
람의 지배 증가
죄의 세력이
점진적으로
약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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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에 근거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죽었던 사람의
영을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중생 시킬 때, 인간은 비로소 새 생명을 가진 존
재로 탄생하게 된다. 이 생명의 최초 활동이 개종이다. 복음 속에 제시된 그리스
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개종이다. 중생으로 새 생명을
가진 자가 믿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영접하게 될 때 법적인 신분 문제의
해결을 단번에 보게 된다.
단회적 구원: 이것은 구원의 시작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더
욱이 새 생명으로 살아난 개인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으로
부터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원을 단회적인 구원이라고 부
르는 것이다. 여기에 법적이고, 개관적인 신분에 관련된 것들이 포함된다. 죄 용
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에 근거하여 죄의 정죄와 사망의 형벌로부터 단번
에 벗어나는 것을 말하고, 의의 신분은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화목된 관계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의 자녀됨은 의로
운 신분을 가지게 된 신자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입양하는 것을 말한다.38)
죄 용서, 칭의, 하나님의 자녀됨은 중생의 결과로 예수님을 최초로 영접하는 시점
에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단회적인 구원이라고 불렀다. 이것
들은 과거에 중생한 신자들에게 단번에 주어진 것으로 이것들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구원의 시작부터 구원의 완성시점까지 영원히 불변한다. 이러한 구원의
영원 불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직사각형을 사용하여, 그 왼쪽은 구원의 시작에
접하게 하고, 그 오른편은 구원의 완성과 연결시킨 것이다.
죄 용서, 칭의, 하나님의 자녀됨은 모두가 신자들의 개관적인 신분과 관련
됐다는 사실에 좀더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초기에 부여받은 것들인데, 이것들은 신자들의 내적인 성품이나 성격에 영향을
받거나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 도표를 좀 더 주목해보자. 세 가지 축복
이 주어지는 시기는 예수님 영접의 초기 시점이다. 이 시점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속에 있는 죄악성의 분량을 보자. 구원의 시작 시점 이전과 구원의 시작
바로 이후에 죄의 분량을 보면, 그 분량이 동일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
게 된다. 이 죄의 분량은 검정색으로 표현되었다. 신자가 단번에 죄 용서를 받은
시점에 그 속에는 여전히 구원 시작 이전에와 같은 죄의 분량이 있다. 의로운 신
분을 부여받을 시 신자는 구원의 시작 이전과 같이 여전히 성품 면에서 의롭지
않다.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가진 신자들은 여전히 성품 면에서 하나님의 자녀
의 합당한 성품을 가지지 아니했다.
죄와 죄성의 분량에 있어서 구원시작 전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구원
의 시작이 결국 무엇이 근본적으로 가져왔는가? 죄에 대한 태도와 관련하여 한가
지만 말하면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가던 죄인이 중생의 결과로 말미암아 마음
38). 조직 신학에서는 이 세 가지를 칭의의 관점에서 본다. 칭의의 부정적인 측면은 죄의 용서이
고, 그 긍정적인 측면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다. 그러나 이 셋이 동일한 것이 아니고, 상호 긴
밀하게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개념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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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변화 (마음의 할례)를 받아 죄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가기 시작하
게 되었다는 것이다. 죄에서 하나님에로의 획기적인 방향 전환 시점에 신자 속
에 있는 죄의 분량이 동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신자 속에
있는 죄와 죄성의 요소들은 점차적으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 엄청난 방향
전환의 시기는 중생의 시점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시기는 개종 때이다. 이 때 영
원불변하는 단회적인 구원이 선물로 받으면서 신자들은 바로 이 구원 때문에 그
의 구원 이전의 과거 삶과는 근본적으로 반대가 되는 살수 있게 된 것이고, 또한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점진적 구원과 연
결되는 것이다. 단회적인 구원은 점진적인 구원의 원인이요, 뿌리요, 기초이다.
영적인 충돌(전쟁)에서 죄의 능력 약화: 신자는 구원을 받으면서부터
영적인 충돌 혹은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이 영적인 전쟁은 구원이 시작된
것을 증거하고 동시에 그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고 진행 과정 중에 있음을 보
여준다. 이것은 죄가 중심이 되어 있는 옛 사람과 새 생명이 중심이 된 새 사람
과의 싸움이다. 구원받은 신자를 계속적으로 다스리고자 죄와 신자의 구원을 완
성하고자 인도하시는 성령과의 싸움이다. 우리는 위에 도표에서 ‘영적 충돌의 감
소’란 말을 썼다. 이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가 신앙적인 성숙을 향해 가면서 옛
사람의 승리가 줄어들고, 예수님을 닮은 새 사람의 승리가 많아지는 것을 표현하
기 위함이다. 신앙 생활의 초기에는 아무래도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횟수 보
다 패배하는 횟수가 더 많다. 그러나 신앙의 점진적인 성숙이 되면서 죄와의 싸
움에서 승리하는 횟수가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구원의 시작 초기에 많았던 영
적 충돌은 점차적으로 신앙의 정상적인 성장을 거칠 경우 점차 줄어들게 되고,
구원이 완성되는 날에는 영적인 충돌이 완전히 제거된다.39) 이 시기 이전에 구원
을 이미 받았다고 생각하는 성도가 이 영적 전쟁이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에게 구원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
다.
점진적인 구원: 단회적인 구원이 중생된 신자의 개관적인 신분에 관계된
단번에 주어진 구원이라고 하면, 점진적인 구원은 중생된 신자의 성품과 관련된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구원이다. 이것은 단회적으로 주어진 구원이 신자 속에서
성품 변화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성품 변화는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아니
하고, 성령의 역사에 대한 신자의 순종적인 반응에 비례하여 일어난다. 단회적인
구원이 죄의 용서, 의인의 신분, 하나님의 자녀됨을 가져온 것이라면, 점진적인
구원은 그 계속적인 열매로, 계속적으로 죄와 죄성을 뽑는 것이며, 의인의 성품을
가지는 것이며, 아버지를 닮은 자녀의 품성을 입는 것이다. 이 구원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 두 면은 항상 동행한다. 검정색으로 그
려진 ‘죄와 옛 사람을 벗음’ 부분은 점진적인 구원의 부정적인 측면을 말하고, 이
것과는 반비례로 그 위에 빨강색으로 그려진 ‘점진적 구원’ 부분은 그 구원의 긍
정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여기서도 점점 더 줄어지는 검정 부분은 죄의 능력과
39). 영적 충돌의 완전 제거는 성도가 개인적인 종말인 죽음을 경험할 때도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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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의 점차적인 감소, 옛 사람의 점차적인 벗음을 가리킨다. 부정적으로 점진적
인 구원은 이러한 것들의 감소를 가져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점진적인 구원이
부정적으로는 죄, 옛 사람을 벗는 것과 관련된 사실은 이 구원이 타락의 결과의
반전임을 보여준다. 점진적 구원은 타락의 결과를 반전시키는 것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책과 죄악성(부패성)이 인간에게 왔다. 죄책은 단회적인 구원으로 단
번에 제거되었고, 죄악성은 단번에 제거되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인 구원으로 점
차적으로 제거되는 것이다.
점진적인 구원의 긍정적인 측면은 빨강으로 도색 되었다. 빨강은 그리스도
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가 계속적
으로 적용될 때 점진적인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점진적인 구원은 인
간의 단순한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거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에 철
저히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빨간 색 부분이 구원 초기에는 죄의 많
은 분량에 비하여 적다가, 나중에는 정반대로 빨간색 부분이 많아지고, 검은 색
부분이 줄어드는 모습을 본다. 이것은 신자가 구원시작 초기에는 예수님의 성품
을 닮은 모습보다 오히려 옛 사람을 더 많이 닮은 모습을 가졌으나, 성령의 계속
적인 구원 적용으로 말미암아 나중에는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점점 더 많아지고,
타락한 아담을 닮은 옛 사람의 모습은 점점 더 감소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는 이것을 가리켜 영적 성장 혹은 성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점전적인 구원의 과
정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
도표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점진적인 구원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
은 우리가 앞에서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점진적인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
인 역할이다. 중생한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죄 용서, 동일한 의의 신분,
하나님 자녀의 동일한 신분을 선물로 받았다. 이렇게 동일한 법적인 조건에서 출
발한 신자에게 점진적 구원 과정에 있어 자신의 역할에 따라 엄청난 개인차가 있
다는 것이다. 죄를 벗고 의를 입은 정도,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정도는
내주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각 개인의 반응 차이로 말미암는다. 개인적인 성화
의 차이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반응의 차이와 밀접하게 관련 되어있다. 이것은
점진적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
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 오래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성
도가 있을 것이고, 믿은 지 오래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성을 상대적으로
적게 가지고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화의 상대적인 차이는 중생된 신
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단회적인 구원과 대조될 뿐만 아니라, 동등하게 주어질
완성될 구원(육체의 부활)과도 대조된다. 구원의 시작과 그 완성에서 전적으로 피
동적인 신자는 그 중간 과정에서는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점진적
혹은 성화적인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주권적
인 역사와 인도에 대한 반응의 성격을 가진다.
구원의 완성: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 점진적 성
장 단계를 거처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완성되는 것을 말한다. 구원의 완성은 개
인의 종말에 오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온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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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믿는 신자들이 그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단번에 변화되는 부활을 입게될
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때 영적인 전쟁은 끝이 나고, 죄는 신자 속에서
단번에 완전히 제거되고 신자는 예수님의 형상을 완전하게 입게 된다. 구원의 시
작 이후에도 여전히 죄의 몸 혹은 죽을 몸을 가지고 있었던 신자는 마침내 성령
에게만 완전하게 사용되는 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신령한 몸).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류광수씨의 구원론과 성경의 구원론을 살펴보았다. 우리
는 그의 구원관이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론보다 훨씬 더 축소되었고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의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약한 부분은 구원의
중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점진적인 혹은 현재 진행형 구원이다. 만일 그가 구
원을 정의할 때 너무 좁게 죄용서와 사탄으로부터의 구원으로 국한하지 않고, 성
경이 제시하는 대로 폭넓게, 균형 있게 했더라면 이러한 문제점은 극복될 수 있
었을지 모른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철저하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 사실을 그의 전도 원리와 그 실제에 적용하고, 구원받은 신자들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삶을 점진적인 구
원의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하지 않고, 단순히 교제 혹은 사귐의 차원으로 축소시
켰다는 사실이다. 본인은 점진적인 구원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을 제공함으로 시
작된(과거적) 구원과 완성될(미래적) 구원을 바른 위치에 세워놓고자 한 것이다.
본인은 류광수씨가 그의 구원관에 있어서 약점을 보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다. 본인은 또한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도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한
구원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바로 이해하고 가르침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 있
어서 보다 더 성숙한 신자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본인은 이러한 기대와 소망
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했고, 또한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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