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창2:7, 사람의 창조 - 백영희 삼분론 (고신 언론 코닷)
(고신언론: 코람닷컴)
2분설인가 3분설인가에 대한 공개 질의
천헌옥 목사
2분설이냐 3분설이냐는 신학교 시절부터 늘 해결되지 못하고 평생 숙제인양 얼버무려왔다.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2분설을 지지하지만 간혹 3분설을 주장하는 분을 만나면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론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발전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즉 3분설을 주장하는 분들에 의하면 대개 몸과 혼(마음)은 죄를 짓지만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는 극단적으로 나아가 단체 자살이나 범죄를 죄의식 없이 행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여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필자는 어떤 분에게서 이런 메일을 받았다.
몸과 혼이라 할 때 "혼"은 마음을 말합니다. C 목사님 평생 설교 중에 "혼"이라는 표현은 10% 미만입니다. 거의 전부는 "마음" "생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몸과 마음은 죄를 짓는다. 이 마음을 전통 교리에서는 영혼이라 혼이라 영이라고 표현한다. 몸과 마음은 죄를 짓는다. 그런데 마음 안에는 죄를 짓지 않는 존재가 하나 더 있다. 마음과 영은 다르다. 마음은 죄를 짓고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 몸과 마음은 죄를 짓고, 마음 안에 죄를 짓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죄를 짓지 않는 부분이 사람의 주격이며 영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삼분설이다. 박윤선 목사님은 마음 안에 죄를 짓지 않는 생명의 씨가 있다고 말한다. 박 목사님은 죄를 짓지 않는 그 생명의 씨와 마음을 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모순이 나온다."
박윤선 목사님이 죄를 짓지 않는 부분을 마음의 어느 한 부분으로 봤고, C 목사님은 바로 그 부분을 "영"으로 표현하고 그 영은 마음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법적으로는 우리는 완전 의인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죄를 짓는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쉬지 않고 우리는 죄와 싸우고 죄에게 졌을 때는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이 편지 내용을 두고 독자들(특히 신학교수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드린다.
첫째는, “몸과 마음(혼)은 죄를 짓는다. 그런데 마음 안에는 죄를 짓지 않는 존재가 있다. 마음과 영은 다르다. 마음은 죄를 짓고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부분인데 과연 이러한 3분설이 합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합당하다면 3분설론자들의 회개는 전인적(인격적)인 회개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는, “박윤선 목사님은 마음 안에 죄를 짓지 않는 생명의 씨가 있다고 말한다. 박 목사님은 죄를 짓지 않는 그 생명의 씨와 마음을 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다.”라고 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분에게 직접 배운 적도 없고 또한 그러한 주장의 글을 읽은 적도 없다. 혹 우리 선배 어른들의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를 확인해 줄 수 있는 분이 있어 “죄를 짓지 않는 생명의 씨”에 대해서 어떤 해명이라도 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2012년 0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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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 의견
이영인
[2012-05-18]
인용 된 이메일 본인입니다.
주은 중 평안을 기도하며
윗글에서 인용하신 "이메일"의 발송자입니다. 댓글을 통해 이메일의 경위나 윗글의 일부 표현에 대해 적으려 하다가, 목사님의 연구적인 자세와 윗글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고 생각되어 목사님께 개인 메일을 따로 올렸습니다.
C 목사님의 설교는 600페이지 182권 분량이 전부 공개되었고, 고신도서관의 요청에 따라 1980년대부터 제가 그 설교록을 수십 권 보내 드렸습니다. 그 동안 C 목사님이 말하지 않은 내용만 출처 없이 인용 되고 비판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료 제시만으로 비판자들은 비판을 취소하고 끝이 났습니다. 제대로 연구나 비판이 되어져 본 적이 없어 아쉽게 생각합니다.
윗글에 인용된 것은 천 목사님과 다른 대화를 하다가 간단히 설명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그래도 직접 인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용 된 내용은 교리 설명의 극히 일부임을 분명히 합니다. 신학을 모르는 목사님이니 신학을 아는 곳에서 연구나 비판을 해 주신다면 크게 배울 기회이므로 천 목사님의 연구 촉구에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코람데오 개설 직후부터는 코람을 통해서만 고신을 읽고 있는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영인
[2012-05-18]
글 중에 오해 소지
"신학을 모르는 목사님"이라는 표현은 천 목사님이 아니라 "C" 목사님을 지칭합니다. C 목사님은 초등학교 5학년만 마쳤고 고려신학교는 별과로 마쳤으니, 오늘 고신의 학문 수준에서 볼 때는 "신학을 모르는 분"이라고 표현해야 객관적일 것 같았습니다.
천헌옥
[2012-05-19]
이인영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인영 목사님 감사합니다.
직접 방문해 주시고 인용한 메일을 굳이 본인이라고 밝혀 주신 것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소신은 2분설입니다만 목사님 외 간혹 3분설도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기에 좀 더 명확한 성경적 해답을 얻고자 이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몸을 만드신 뒤 생기를 불어 넣으셨는데 그 생기가 과연 영혼인가? 아니면 영과 혼인가? 영을 불어넣으셨는데 영이 몸과 만나면서 혼이 생겨난 것인가? 저는 이 문제부터 짚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계속 의문으로 남는것은 마음은 죄를 짓고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영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과연 회개가 전인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물론 이목사님께서 누누히 밝혔듯이 C목사님은 회개를 많이 강조하셨다고 했는데 어차피 몸과 마음은 죽어 썩어졌다 부활할 것이고 영은 주님 품으로 돌아갈 것이라면 죄를 짓지 않는 영은 회개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박윤선 목사님의 죄를 짓지 않는 생명의 씨에 대해서도 정확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역사적이거나 기록적인 면에서 남아있는 증언을 들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공개질의를 한 것입니다.
이 글은 누구를 정죄하거나 비난할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며 순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 부분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정리를 위한 것임을 양해 하시면 합니다. 다시 한 번 코닷을 방문하시고 친히 댓글로 연구적 자세에 대한 응원의 글을 남겨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영인
[2012-05-19]
저희 기본 입장 몇 가지
1. 일반 삼분설과 다릅니다.
아폴리나리스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삼분설과 저희 삼분설은 그 출발과 구성 그리고 본질적 주장이 다릅니다. 이런 점에서 이분설 삼분설의 역사적 토론에 대해서는 저희와 무관할 정도라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아폴리나리스는 삼분설 자체로 정죄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했기 때문이고, 죄의식 없는 범죄나 집단 자살에 이른 유파의 우스운 주장은 저희 삼분설의 내용에 근접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저희는 정통 이분설을 고신에서 엄하게 배웠고 그렇게 확신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저희는 1950년대 고려신학교 3년 과정의 강의안을 지금까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 과거이며 또한 저희가 발전을 해야 한다면 우리 교계의 가장 모범적인 50년대 고신의 자료는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신에서 고신을 통해 배운 것 중에서 중생 후의 범죄와 성화 문제를 두고 저희는 일부 미진한 부분을 봤고 그 해결 과정에서 구성한 것이 저희의 삼분설입니다. 고신의 이분설이 있다면 저희만큼 오랜 세월 잘 파악한 곳은 없을 듯합니다.
저희 삼분설에 대해서는 이왕이면 가장 가혹한 비판을 원합니다. 그래야 저희가 회개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빨리 고치는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비판 받을 만한 것이 없다면 수준 높은 고신의 검토를 통해 저희 입장의 완성도는 높아질 기회만 있을 듯합니다. 따라서 저희에게 유익할 것밖에 없습니다. 만사 저희 입장이 이렇습니다. 다만 일반 삼분설의 선입견은 배제해 주십사 하고 요청합니다.
2. 짐승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만물은 물질로 되어 있고 사람은 영을 함께 가졌으니 사람만 영적 존재입니다. 저희 삼분설의 출발에 해당하는 전제입니다. 짐승은 만물 중의 하나이며 물질로만 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몸과 사람의 몸이 물질이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수준과 정도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같습니다. 과학은 물질 세계를 상대하며 비록 까다롭다 해도 짐승이든 사람이든 마음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이므로 이론적으로 오늘 현실적으로도 과학이 손을 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두고 과학이 영의 세계를 손 대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희의 이 입장은 1960년대부터 확고하게 밝히고 나왔습니다.
사람 안에만 있고 짐승에게는 없는 부분, 물질이 아닌 부분, 과학이 손을 댈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곳, 중생된 우리만 가진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기나 하는 것일까? 마음 안에 있는 듯한데 마음일 수는 없고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분명히 인간 속에 있어야 할 부분, 중생된 우리에게는 없어서 안 될 부분, 그 부분만 "영"이라고 일컫습니다.
저희는 마음을 물질로 봅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영 때문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60년대부터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의 유전공학이 동물복제니 인간복제니 무슨 발표를 해도 그들은 물질계만 상대하는 것이고 몸과 마음이 근본적으로 물질인 이상 과학이 과학의 영역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두고 영의 세계를 가진 교회로서는 아무 혼란스러울 것이 없다는 것이 저희 입장입니다.
3. 평소 생활에서 필요한 부분입니다.
롬8:1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부분, 요일5:18에서 악령이 만질 수도 없는 부분, 우리는 이런 면을 가졌으니 중생된 영 때문입니다. 중생은 우리 속에 마음이 아니라 이 영만 중생이 되었고, 롬8:16에서 이 영이 성령과 함께 우리의 마음과 몸을 향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불신 때처럼 또 죄를 짓지 말고 살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신사참배 6년 동안 죄를 지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중생된 영이 그 마음에게 계속 외쳤을 것이나 그 마음이 연약하여 고통 속에 그들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목회자나 성도들의 죄 짓는 마음 속에 상황도 같을 것입니다. 바로 이 영은 한 번 중생이 되면 우리 안에서 다시 받은 생명의 씨가 되어 우리의 몸과 마음 전체를 성화 시키려고 죽는 날까지 투쟁합니다. 투쟁의 성과는 성도마다 달라도 그 투쟁의 씨는 누구에게나 다 있으니 롬7장의 바울의 심리적 갈등은 오늘 우리도 매일 겪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죄를 미워하고 필적하는 존재, 그 것은 마음이나 마음 속에 일부가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별도의 존재니 그 존재가 중생된 영이며, 우리 마음에는 중생 후에도 늘 악령이 들어 와서 불신 때처럼 여전히 죄를 짓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마음 안에서는 이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중생된 영과 악령이 죽는 그 순간까지 생사 건 전쟁을 벌입니다. 일단 한 번 중생된 사람이 다시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지옥을 가는 일은 없으나, 그대신 평생 벌이는 그 투쟁으로 인해 우리 각자의 천국의 모습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천국에 간 우리의 차이 문제는 이 건과 별도로 이미 주요 교단 신학교 내에서 비록 소수설이지만 정식으로 제기가 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별건으로 했으면 합니다. 영이 중생된 것은 모든 성도에게 이미 주어진 구원이고 이제 우리는 심신의 성화는 자신의 평생 투쟁의 대상이니 저희 삼분설은 중생으로 인해 영은 안심하고 우리의 전력은 심신의 회개와 성화에 기울이자는 실천적 실무적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입니다.
4. 참고로
저희의 이런 입장은, 1950년대 고신에서 철저하게 배우던 중 중생과 성화의 부분에서 일부 난제가 발견되어 이를 오랫동안 숙제로 삼았고, 고신에서 분리 된 후 1960년대 초반부터 오늘의 이런 입장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희는 이 것을 전통의 정통신학 입장에도 일부 있을 수 있는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여 완성도를 높인 깨달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수된 교리만 완전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발전 자체를 마치 거부하는 듯한, 과거와 조금이라도 틀리면 정죄부터 하고 보는 분들 때문에 신학에 관한한 거의 무지에 가깝던 저희 쪽에서 세계 교회의 넓은 세계를 직접 참고하고 싶었습니다. 정죄 받을 정도인지, 하나의 대안일 수 있는지, 보다 나은 깨달음이 있는지, 여전히 과제로 두고 천천히 접근해야 하는지.
이런 배경 때문에 저희 쪽에서는 세상 학교의 공부를 무시하다 시피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 서울대 영문학과, 서울대 독문학과, 연세대 영문학과 등을 거친 젊은 인재들의 해외 유학을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교계에서 폭넓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이론을 구성한 C 목사님은 신학에 무식한 분입니다. 그러나 성경만은 거의 다 외웠던 분입니다. 최근 합동교단의 박희천 목사님이나 침례교 피영민 목사님과 같이 소속 교단의 정상급 신학자들이 설교에 관한 한 C 목사님을 세계적이라거나 칼빈에 견줄 정도라고 직접 표현하는 바, 그 분의 설교는 성경을 떠나지 않는 부분 때문이며, 한 편으로는 정통 신학이 아닌 듯하지만 그 내용은 철저한 개혁주의라는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발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개를 드리는 이유는, 고신에서도 평소 배우고 지나가는 삼분설들은 저희 입장과 다른 것을 주로 대상으로 하고 혹 저희 입장이 일부 거론된 경우를 전해듣는 바, 기본적으로 저희 입장이 제대로 반영된 경우를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곳의 천 목사님 제안에 따른 글에도 같은 사례가 반복이 될까 우려함입니다. 저희대로는 성경 전체를 다 살펴 문제가 없다는 단정에서 발표한 것이니 저희 입장을 비판해 주시되, 정말 죄송하나 좀 신중해 주시기를 요청할 따름입니다.
이 곳은 양심적 고신인들의 모습을 대거 뵙는 자리이니 말씀 드리지 않아도 그리 하실 줄 아나 지금까지 타인의 삼분설로 저희의 삼분설을 비판한 과거만 가진 개인 입장을 두루 살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저희 입장에 대한 비판은 많을수록 가혹할수록 저희를 더욱 잘 보실 수 있는 상대방의 눈을 빌려서라도 저희를 돌아볼 수 있고 잘못이 있으면 얼른 고치는 큰 복일 것이라는 생각뿐입니다.
정태홍
[2012-05-19]
이런 삼분설은 더 더욱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RPTministries의 정태홍 목사입니다.
http://www.esesang91.com/
일반 삼분설과 다르다고 하시면서도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
성경적 지지를 받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1) 짐승은 물질로만 되어 있다
2) 마음은 물질로 본다.
3) 롬 8:1 이 어느 한 부분만 정죄하는 것인지요?
요일 5:18 이 어느 한 부분만 만질 수 없다는 것인지요?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성경구절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
이런 논의에 가장 중요한 초점이 무엇일까요?
삼분설로 가는 이유와 그 목적이 무엇인지
교회사에서나 종교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삼분설 이분설의 논의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논하는 그룹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느냐?
그렇게 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들을 사용하느냐?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언필칭 영성주의자들은 개혁주의의 가면을 쓰고 있으나,
실제로는 신비주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흐름에 변질되어가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 있습니다.
이영인
[2012-05-21]
연구나 비판에 참고하시도록 주은 중 평안을 기도합니다.
천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이 교리의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다음 몇 가지 안내를 드립니다.
천 목사님께서 약간 말씀하신 것처럼 삼분설이 배경이 되어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된 유파를 걱정하신 경우나 정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영성이 아니라 신비주의로 가는 것을 경계하시는 말씀들은 저희가 자주 듣는 내용입니다. 충고의 말씀은 고마울 따름이고, 변명이 될지 해명이 될지는 궁금하지만 이번 글은 저희 삼분설 연구에서 무관한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 몇 말씀 올립니다.
1. 세례 학습 문답지
- "회개" 관련 부분입니다.
30번 (회개) 회개는 기본회개와 평생회개 두 가지
31번 (기본회개) 하나님 배반했던 자가 예수님을 믿어 돌아옴이니 중생과 신앙 시작
32번 (평생회개) 범한 죄를 낱낱이 회개하고 고쳐 말씀대로 사는 노력을 죽을 때까지 힘씀
33번 (행동록) 사람의 일생동안 행동한 것이 하나님의 행동책에 빠짐없이 기록됨
- 저희 문답지는
세례와 학습자가 동일한 문답지를 사용합니다. 다 그렇겠지만 신앙 신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토씨 하나까지 신중하게 간추린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도 알아야 할 최소한이며 평생에 외우고 묵상할 내용입니다. 저희 삼분설은 이 "회개" 분야의 문답을 고려한다면 앞서 소개한 정도의 그런 우려에는 무관할 듯합니다.
이 문답지는 저희 교단이 인쇄하고 발표한 유일한 신앙 신조 문건입니다. 저희는 대외 발표나 문건을 거의 생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첫 신앙에게 꼭 심어야 할 내용이라 하여 요약했고 인쇄한 것입니다. "회개"에 대하여 성도가 알아야 할 행동을 4줄에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의 삼분설에 대해서는 일단 경계보다는 우호적으로 이해적으로 접근해 보셔도 되지 않을까요?
- 세례를 베풀 때
문답은 설명 드렸으나 실제가 궁금하실 듯합니다. 저희는 세례나 직분 관리를 두고 저희보다 엄한 경우를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거의 모든 생활이 고신의 초기 모습을 가집니다. 고신 시기에 저희는 주로 주남선 목사님을 통해 신앙의 철저함을 익혔기 때문이고 세례 학습의 신중함과 철저함을 포함합니다.
세례를 받으면 성찬을 참여하는데 불신 결혼을 하면 제사 문제 등으로 성찬 때마다 죄를 먹고 마심이 되거나 그 참여를 구조적으로 못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결혼 전의 여반과 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청년들은 죄 문제를 고려해서 세례를 미루어 왔습니다. 세례의 시기는 별건으로 하고 여기서는 "C 목사의 주장은 회개가 필요없다는 식이라"는 일반적 비판에 대해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2. "집사 자격"의 경우
- 직책이 중해질수록 죄를 철저히 따집니다.
세례 후에는 각종 직분 문제가 있고 집사직이 일반적입니다. 저희는 다음 13가지를 다 충족 시켜야 집사로 임명합니다. 믿는 사람이 지킬 기본은 세례 때 기본적으로 배웠을 것이나 중한 직분을 맡으려면 일반 교인 이상으로 더 많은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덕면까지 고려하고 있습니다. 집사 조건 13가지는 우리 생활 속에 흔한 죄를 특별히 지목한 것입니다.
- 집사 자격 13 가지
*전도하여 믿음의 식구가 있고
*주일 성수 잘 하고
*십일조 계속하고
*신덕이 있고
*교회를 잘 받 들어야 하고
*술 담배 끊고
*계(다노모시)하지 않는 사람
*여수거래 깨끗 해야 하고
*우상 섬기지 말고
*교회나 이웃 사회에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
*가정에 불미스런것, 뚜렷이 있으면 그것이 없어야하고
*십계명 지키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28세된 남녀로 결혼 한자.
- 실제 적용 문제
물론 적용에 애매한 사안들도 있습니다. 실제 적용이 문제인데 대개 타 교단 집사 임명률과 비교하면 30 - 50%에 그칩니다. 최근에는 주변 타 교단 교회와 경쟁을 한다면서 임명률을 높이는 경우도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죄 문제에 엄하고 중요해질수록 그 기준은 대폭 상승합니다. 제가 있는 교회는 주일 오전 출석 180명 이상에 집사님이 25명입니다. 저희 교단 재적 1만 명 교회의 집사님이 600명이었습니다. 사실 죄 문제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고 교회는 최소한의 직분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애매한 문제는 과제로 넘기고 넘어 가는 수도 있으나 주일의 경우는 1년에 1회만 출근하는 직장이라 해도 후보에 들지도 못합니다.
- 주일 계명 하나의 경우
저희 교단에는 공직자나 좋은 직장을 가진 분들이 희귀합니다. 과거 모든 시험이 주일이었습니다. 첫 신앙이나 타 교단에서 오신 분들 중에 주일 시험을 통해 직장이나 자격증을 가진 정도고, 일반적인 저희 교단 교인들은 공무원이 거의 없고 교사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단 전체적으로 농사나 노동이나 막장사 하는 분들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최근에 주5일근무제 때문에 저희는 실질적으로 큰 덕을 보고 있습니다. 최소한 저희 삼분설과 죄 문제를 두고 연구하실 때는 왜 이 삼분설은 죄와 그토록 피터지는 투쟁을 하는가? 이런 전제가 되어야 마땅한데 왜 우리는 그 반대로 오해를 받는지 늘 안타까웠습니다.
3. 담임목사 2년 시무투표제도
- 42년된 제도
1970년부터 저희는 42년째 매 2년마다 모든 담임 교역자는 주일 오전 출석의 전체 교인의 무기명 투표로 목회자의 연임과 사직을 결정합니다. 장로는 22년째입니다. 담임목회자가 25% 이상의 반대를 받으면 투표 확인과 동시에 그 교회에서 자동 사직이 됩니다. 퇴직금을 비롯한 일체 조건은 교회가 독자적으로 결정합니다.
- 목사의 죄를 절규함
이런 제도를 시행하게 된 이유는 교인이 모르고 짓는 죄보다 집사 같은 직분 가진 교인의 죄와 허물이 교회를 더 망치고, 그 모든 죄보다 담임 목회자의 죄는 많고 중하고 폐해가 심각하다는 결론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면이나 강단의 협박에 눌린 교인의 심리를 고려하여 4분지 1의 교인이 반대를 했다면 절반 이상의 반대로 계산하였고, 이 모든 결정은 교인 쪽에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교역자회에서 결정하고 시작했습니다. 물론 교단의 지도력이 약화되면 곳곳에서 별별 문제는 생기지만 42년째 시행 중이면 대세적으로는 저희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제도의 필요성
42년간 시행하면서 사직의 기준과 강제 적용 등 많은 면에서 조정과 시행착오를 20년을 거쳤습니다. 여전히 일부 이견이 있으나 이제 고정이 되었습니다. 교회자유의 원칙에 따라 교단과 교회마다 기준은 다를 수 있다고 보지만 큰 틀에서 보면 별로 손 댈 것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는 천사처럼 보일 때 직책을 시작하나 마16:23에서 베드로는 앉은 그 자리에서 교회의 반석이었다가 사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70번씩 7번이라도 죄를 짓고 돌아설 수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만 예외겠는가? 2년 기간을 둔 것은 2년 동안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혼란과 당사자의 자진 회개나 소신의 기회를 고려한 것입니다.
4. 교회 회계의 3인 원칙
- 한 회계 3인의 분임
저희는 목사 장로가 회계를 맡고 있는 교단 회계에까지 한 회계에 3인의 공동 회계 원칙을 엄하게 고수합니다. 성경과 역사와 저희를 돌아볼 때 교회의 제1 도적이 목사요 제2 도적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교단 회계에 목사조차 지출과 장부와 수입 회계를 3분 시켜서 사전에 횡령을 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교단 본부에서도 이렇게 하기 때문에 각 교회에서 회계별 3분원칙을 적용해도 교인들이 의심하느냐고 항의하지 못합니다.
- 우리는 유다가 될 수 있음
12제자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팔았고 나머지는 배신했습니다. 그들만 죄인이고 오늘 우리는 깨끗한가? 그럴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해 회계마다 3명을 맡기고 수입 보관 지출을 나눈다면 비록 완벽하지는 않으나 저희 교단 분위기에서 3명이 짜고 해 먹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만일 3명이 짜고 사고를 친 경우가 적발이 되거나 그럴 우려가 있었다면 또 다른 더 혹독한 장치를 했을 것입니다. 교단 본부의 최고 중책들을 우리는 이렇게 죄를 두고 상대한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면 합니다.
5. 공개 된 자료를 볼 때
- C 목사님 녹음된 설교 10년의 5천개 중에
회개하라는 말씀이 집중적으로 들어 간 설교가 2791개이며
나머지 2200개 설교에도 회개 내용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른 부작용은 좀 안심해 주시고, 마음의 일부 또는 마음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온 우리의 중생을, 우리의 마음과 분리해서 볼 수 있느냐는 문제로만 접근하면 학문적 이론적 연구의 대상은 될지언정, 죄의식 없는 사람을 만들거나 신비주의로 가는 문제점을 우려할 상황은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먼저 언급하신 두 분의 글에서 본질적인 문제를 말씀하신 부분은 소위 "연구"에 해당되는 부분이고, 또 이 곳은 천 목사님께서 고신 안에 신학인들께 연구를 제안하신 자리여서 비판을 받거나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입장에 있는 제가 먼저 글을 적는 것은 순서가 아닐 것 같습니다. 진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연구하시는 분들께 제가 심부름 하는 입장으로 제공해야 할 부분을 중심으로 일단 이 곳에 오겠습니다.
주은 중 평안을 기도하며
이영인 올림
이영인
[2012-05-26]
연구 과정에 드리는 몇 말씀
시간이 좀 갔다고 생각하여 지적 된 부분에 한하여 조심스럽게 저희 입장을 한 가지씩 간단히 소개합니다.
1. 창2:7에 대하여
- 기록의 생략
성경은 요21:25에서 최소 기록의 원칙을 말씀했고 딤후3:15-17에서 목적 기록을 말씀합니다. 따라서 창2:7이 인간 제조 과정의 종합보고서는 아니라고 우선 전제를 해 봅니다.
- 창2:18의 흙
창2:19에서 짐승도 흙으로 만들었고 전3:21에서 그 짐승들도 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는 짐승에게 마음 생각 욕심 감정 연구 정서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2:7의 "흙"을 몸만 말한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몸과 마음은 물질로 되었다고 보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창2:7, 19에서 사람도 짐승도 마음 부분을 만든 것은 생략 또는 "흙"에 포함을 시켰다고 본다면, 그리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라는 부분은 사람에게만 해당된 것이니 삼분설의 "영"에 관련된 것으로 보면 훨씬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여기서는 흙이 몸만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포함한다는 면만 일단 설명하고 싶겠습니다.
- 짐승과 불신자
짐승과 불신자와 신자를 비교한다면 짐승과 불신자는 심신으로만 산다는 점에서 같고 우리는 중생 때문에 다른 존재입니다. 그런데 중생된 부분을 이분설처럼 마음의 세계로 본다면 마음의 일부는 살고 일부는 죽어 있는 상태로 봐야 하는데 영혼불가분성에 문제가 됩니다. 마음을 불가분의 존재라고 고수한다면 우리는 중생되는 순간부터 마음으로 어떤 죄도 짓지 않는다는 위험한 발상에 나가거나 아니면 마음 전부가 중생했다 현실에서 죄를 지으면 다시 죽게 되는 일을 반복한다는 중복 중생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저희는 마음은 짐승에게도 있고 근본이 물질 존재이므로 마음은 종합체로 봅니다. 불가분의 존재는 영에게만 해당되니 이 영만 중생에 해당되고 심신은 평생 죄와 의로 반복합니다. 또 마음의 일부는 순종하고 일부는 거역하는 복잡성도 있습니다.
불신자와 짐승이 함께 가진 것은 몸과 마음이니 이 심신은 흙이라는 물질 존재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 없이 심신으로만 살고 있습니다. 성도는 불신자와 달리 마음 속에 중생된 영을 가졌고 이 영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불신자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자고 성화 운동을 벌이고 있다면 중생과 성화와 영의 불가분성 등 모든 교리의 애매한 부분이 명료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 전인 회개
이 문제는 이분설일 때도 동일하기 때문에 이 대화에서 적용될 사안은 아닐 것 같습니다.
- 참고로
저희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하심은 생략이니 사람의 가장 외부에 있는 몸만 표시했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할 때 그 이면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과 영도 당연히 함께 만들었으며, 몸과 마음과 영을 동시에 만든 다음 하나님께서 아담을 붙들고 움직이는 역사를 시작했으니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요20:22을 참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을 만든 부분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음은 영계의 창조는 창1-2장에서 언급하지 않고 마25:34에서 설명했습니다. 창1-2장은 우리가 아는 오늘 이 세상을 만든 것만 간단히 기록했다고 보며 2:7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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