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남목사님이 백목사님에 대하여 가지는 열등감과 시기심의 배경
▶신사참배 시기
-남목사님은 일제의 협박과 고문을 피해 쫓겨다닌 분으로 홍택기가 비판한 박형룡과 같은 경우고
-백목사님은 그 시기에 교회를 개척하고 전교인이 고향 현지에서 신사참배를 승리하게 지도했고
-남목사님은 이 시기에 거창지방에 있지 아니하여 주남선목사님과 아무런 연고가 없던 시기고
-백목사님은 이 시기에 주목사님 가정이 생존하는데 목숨 걸고 끝까지 양식을 공급했었고
▶해방 후
-남목사님은 주목사님의 옆에서 부목으로 심부름 하는 정도였고
-백목사님은 주목사님이 가야 할 전국 부흥회 강사를 대신 보내는 정도였고
-주 활동지역인 거창지방의 전체 교역자와 교인들의 시선과 존경은 백목사님에게 다 쏠렸고
-남목사님은 무식한 백목사님에 비하여 신학문과 신학 지식이 훨씬 앞섰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고
그 외에도
-거창읍교회의 핵심 교인들조차 백목사님에 대하여 개인적인 존경과 순종이 극진했고
-1948년 공비가 거창을 점령하던 사건에서 그런 거창읍교인들의 신앙 행적이 드러났으며
-1949년부터 본격화 된 국기배례 사건이 백목사님 목회지가 중심이 되어 큰 성공을 했고
-거창을 방문하는 교계 지도자나 출옥성도들이 속속 백목사님을 찾아 그 골짝으로 향했고
▶전쟁 기간에
-백목사님이 목회한 3개 교회들은 인민군 치하에 예배당 안에서 계속 예배를 드렸으나
-남목사님은 숨어다니고 피해다니며 그들 속에서 신앙 자유를 가지지 못했고
-지역에서 나온 3명의 순교자가 모두 개인적으로 백목사님에게 은혜를 받아 순교자가 되었고
-3개월 점령 후 남목사님은 해방이 되었으나 백목사님은 그런 상태로 2년을 지속했으며
▶부산서부교회의 후임청빙
-피난 정부 앞에 있는 서부교회가 고신 중심지이자 가능성이 큰 교회인데 백목사님을 청빙하자
-남목사님은 고신 수뇌부 7명이 연명으로 거듭 청빙하는 백목사님에게 극도로 반감을 가집니다.
▶고신 내의 위상
-고신 지도부의 총애와 신망을 받아 백목사님은 실력으로 고신 내 최고 목회자로 급부상하고
-남목사님은 주목사님의 후임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행정실무가에 그치게 되자 크게 낙망합니다.
-고신의 이후 탈선기에 있어 백목사님은 고신 수뇌부 전체와 맞서 그들의 죄를 책망한 위치였고
-남목사님은 그 수뇌부들의 뒤에서 소식을 엿들으며 그들을 자극하여 싸움을 돋구는 처지입니다.
▶고신과 결별 후
-남목사님은 목회 실패가 평생 이어져 가는 곳마다 위축되고 원목에서 개척으로까지 떨어졌으며
-백목사님은 곧 바로 부산 제일의 교회가 되어 전체 고신을 눌렀고 거창집회의 전국 최대화와
서부교회의 규모가 서울 이외 전국 최대화가 되고 주일학교의 세계 기록을 가지게 되자
신사참배 출옥성도와 고신의 지도부와 원로들이 모두 백목사님을 존경하고 만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자 과거 백목사님을 고신에서 제거할 때 핵심 역할과 모략가가 드러났고
고신 내에서도 고신이 잘못 판단하여 제거한 분들을 되돌리자는 운동이 일어나는 분위기를 보자
백목사님의 이름만을 두고는 남영환의 이름이 그 책임의 제일선에서 또는 전부라 할 정도입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남목사님으로서는 백목사님 사후 내분으로 분열되는 공회를 지켜보며
과거 모든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 자기 한 사람에 대한 현재 비판과 훗날 역사를 염두에 두고
위글로 모든 것을 덮으려 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전형적인 역사왜곡이며 전화위복을 꾀하는 간신의 최후 반격이니 고신에게 큰 짐을 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