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異端의 正體(이단의 정체) - 한종희목사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않는가?
-1부 독립 교회-
한종희 목사
<1부 동립교회의 이단사상>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않는가?
Ⅰ.서론
하나의 이단을 놓고서 이것을 규명하는 일은 심히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칼빈주의적 신앙의 사수와 철저한 본분 이행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고 있다면, 우리가 그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이단에 대하여서는 그 모순을 신속히 규명하고 지적하여, 그것이 진리와 복음에 미치는 손상을 막아야 하며, 또한 이단에 대하여 참된 고백을 분명하게 제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책에서 하나의 이단을 구명하고, 또 그 이단에 대하여 참된 고백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문제를 제시함에 불과하고 결코 완성된 것은 못되는 줄로 안다.
그 이단이란 바로 “거듭 난 영혼은 추호도 범죄하는 일이 없고 범죄할 가능성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롬 7:14~25과 요일 3:9을 근거하고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고 간판을 예외 없이 걸고 회집하고 있는 실정이다.
Ⅱ. 사건과 비판
1.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는가?
(1) 이상한 교리
“거듭 난 영혼은 죄짓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날로 늘어가고 있다.
10여년 동안에 이 주장은 대단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왔으며,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약 100여 교회 이상은 이 교리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도 과히 틀림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들은 대담한 생각으로서 그들의 교리를 침투시키고 있다. 수 많은 순진한 양들이 여기에 현혹되고 포섭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내막은 전연 공개되지 않고 있어 그들에게 넘어가고 잇는 사람을 구해내지 못하고 보고만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서울과 부산, 거창, 대구에도 많이 있다.
또한 이 교리에 동조하고 그들과 교제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으며,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간판을 그대로 걸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교인들이 그리로 넘어가서 포섭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10여년 간의 침묵을 깨고 조심스럽게 붓을 들게 되었다.
(2)막연한 지식
한편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교리를 갖지 못하고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하여 왔을 뿐이다.
중생한 새 사람은 범죄치 아니하나, 다만 중생한 새 사람 안에 같이 있는 옛사람이 범죄할 뿐이라고 배워왔던 것이다.
다음에 어떤 주석에서 한 대목을 적어 보겠다.
신자의 인격은 성경 말씀대로 보아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으니, 곧 옛사람과 새 사람이다. (엡 4:22~24). “새 사람”은 거듭 난 생명 (거듭 난 생명이란 것은 영혼 전체가 아님) 이니 그것은 범죄할 가능성도 없다. 신자라도 혹시 불행히 범죄하게 되는 것은 옛사람의 요소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식은 아주 막연한 것이다. 영혼을 두 가지 다른 이질적인 주체자 (선과 악)로 쪼개지 못하는 이상 그러한 것이다. 영혼은 결단을 내리는 하나의 독립 인격자이다. 물체가 아닌 영이다. 양적으로 취급하여 쪼개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중생한 영혼을 놓고서 어떤 부분은 옛사람이고, 어떤 부분은 새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인간론에 대한 칼빈주의의 체계적 지식이 전연 용납하지 않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더욱이 중생한 영혼에 있어서 새 사람의 부분은 선을 행하고 옛사람의 부분은 악을 행한다고 한다면 영혼은 벌써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질적인 독립 인격으로 세포분열을 한 셈이 된다. 한 사람 속에 두 개의 상반된 주체자가 각기 다른 성질의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생한 신자가 범하는 죄 문제에 대하여서는 우리들이 물려받은 칼빈주의적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미해결로 남아온 것이다.
그래서, 또한 필자는 우리 자신의 교리를 위하여 오래 동안 생각하여 오던 것을 하나의 의견으로서 교회 앞에 공개하는 바이다.
(3) 과연 한종희 전도사가 이단자였던가?
1961년 5월에 필자는 제천읍 남천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중에 중생한 영혼이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한다면 이단이 되는 것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중생후에도 여전히 그 중생한 새 사람이 실족하여 불행하게도 범죄에 빠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그 교회 당회장이던 백영희 목사는 필자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이단과 동질의 이단자로 정죄하여 그 교인들로 하여금 필자에게 인사도 나누지 못하게 했다.
필자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1962년 2월에 “중생한 후에는 무엇이 범죄하는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롬 7~8장을 중심하고서 200자 원고지 450매에 달하는 글을 쓴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은 손질을 더하여 책으로 발간해 많은 사람에게 읽히면 유익이 크겠다고 격려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생각하여 오늘까지 침묵을 지켜온 것이다.
오늘에 와서 여러 가지 사정을 검토하여 보니 이것을 공개하면 그들과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동시에 유익이 크게 있을 것으로 믿어져서 붓을 들게 되었다.
(4) 백영희 목사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경북노회(합동측)는 1968년 3월 제 82회 정기 노회에서 달성교회 문제에 관련되어, “백영희씨 일파의 가르치는 교훈은 칼빈 주의 신학에 배치되는 이단설임을 규정하기로 하다”라는 결정을 내린 일이 있다(경북 노회록 참조).
그리고 1964년도에 박 윤선 교장은 부산 총회 신학교에서 전 학생들에게 상기 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공포한 일이 있다.
“거듭 난 자의 영혼이 범죄치 아니한다고 한다면 율법을 무의미하게 만드므로 반율법주의의 모순에 떨어지며 따라서 이단이 되는 것을 모면할 길이 없다.”
(5) 고 김 현봉 목사에 대하여
이 분은 필자를 정죄하는 교리의 발설자이다.
필자는 1959에서 1962년 사이에 한 동안 그와 깊은 교제를 가진 바 있었다. 그 분은 필자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셨고, 필자도 그 분이 인도하는 산상 집회에 5, 6차 참예하며 따랐고, 이모저모로 그 어른을 깊이 알게 되었었다.
과연 그는 소문대로 지대한 감화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경건, 극기, 헌신은 그 예를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정도였다.
현재 그는 고인이 되고 없으나, 그의 감화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현역 교역자가 수백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 명륜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이 병규 목사, 그리고 부산서부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백영희목사는 다 고 김현봉목사의 감화를 받은 이들 가운데서는 대표적인 분들임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사실이다.
결국, 고 김현봉 목사는 가고 없으나, 그가 생존시에 가르친 교리와 감화는 수 많은 독립 교회를 묶어서 하나의 교리 속에서, 하나의 정신 속에서 생활하게 하는 결과를 낸 것이다.
2. 이단자의 특색 (그 일반적인 정의)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교리가 전반적으로 달라서가 아니다. 비록 교리의 한 부분일지라도 그것이 기독교의 체계적 신조와 기독신자의 본분 이행에 치명적 손상을 끼치게 될 때에 이단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첫째로 이단의 특색은 자기들만이 우월한 성경 해석자라고 하는 교만이다. 좀 심하면 선지와 사도의 위치에 접근하려고 한다. 다른 모든 학자들보다 자기가 더욱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自信)에 넘친다. 그러므로 이단자들은 공고백이나 신조의 비중을 대수롭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자기의 해석을 전통적인 교리사에 비추어 비교 연구하는 조심성이나 성실성은 전연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단자들은 그가 지배하는 교회 앞에서는 카리스마적 존재로 군림하며 굉장한 교권을 행사하게 된다. 거의 절대에 가까운 교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한다. 당회니, 제직회니 하는 것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이다. 특수 은혜를 누린다고 하는 그 지도자의 말이면 그대로가 제직회 및 당회의 결정이 되고 있다. 지도자 혼자서 공고백을 대신하고, 순전히 독자적으로 신조와 정치조항을 작성 집행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 어떠한 이단자도 예외는 없었다.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아니한다”고 믿는 자들의 교회는 대개가 독립교회를 표방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어느 교단이나 신학교의 영향도 받지 않고 있다. 신학이나 정치의 독자적 권위의식을 갖고서 독자적인 걸음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교회 내부를 살펴보면 장로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장로 자격자가 없다는 것이다. 장로제도가 교회를 망쳐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장로가 있는 경우에도 이름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십일조를 목사 개인에게 직접 바치게 하고, 공공연히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과 같이 이단자의 특색은 그가 지배하는 교회에서는 성경해석의 독점, 신조 및 정치조례 작성을 독점하며, 여기에 경제권까지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오는 것은 무엇일까? 이단자의 방자한 생활, 어마어마한 그 어떤 죄악도 억제할 아무런 제도나 대책이 전연 없다는 점이다.
모든 이단사(異端史)와 교회사 및 우리 당대의 경험이 증거하는 대로 이단자는 대개의 경우 방자한 생활을 하고, 육체를 쫒아 사는 것이 특색인 것이다. 몰론 경건파 가운데서는 예외도 있다.
이단자의 둘째 특색은 독선과 배타적 성격이다.
첫째로 은혜의 독점이었다. 독선과 배타적인 것은 은혜독점의 필연적 결과로 따르는 것이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이단자는 반드시 독선과 배타적인 경향으로 흐른다.
독립교회를 표방하고 있는 교회도 이 점에 있어 예외는 아니다.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아니한다고 하는 이들의 형편을 보면, 독선과 고집, 그리고 남을 정죄하고 비방하는 버릇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제외한 모든 신학교를 유치한 것으로 돌리며 전 교회와, 목사와, 교수들을 속화, 타락한 자로, 무능 무지한 사람으로 돌려 버리는 것이 예사이다. 바로 이것이 다른 교단의 교인들을 유인하는 큰 무기로 쓰이기도 한다.
그들 교회에 호기심을 가지고 처음 그들을 접촉하면 일차적으로 세뇌작업을 당하게 된다. 처음에는 자기들의 교리를 단도직입적으로 주입시키지 아니한다. 우선 모든 선입주견에서 절단시키는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에 강단은 일시에 교리의 논쟁장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가차 없는 공격, 부정, 정죄가 감행된다. 자기들의 우월함을 선전하고, 상대되는 자들을 정죄하여 절단시키고, 마지막으로 자기들의 교리를 집어 넣는다.
그러므로 이단자에게 일단 사로잡히면 여간해서 이탈하여 나오지 못한다. 이 위에 또 자기들을 떠나면 영영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가장 무서운 협박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구원에서 이탈하는 것으로서, 멸망과 동일시 되고 있다.
이단으로 이름은 나지 아니하였어도 이상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구석에 깊이 숨어서 실제로는 이단자의 행세를 하고 있는 자들도 더러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이단자의 특성 때문에 특별히 유의할 점이 있다. 즉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단자에게 넘어가는 자는 초기에 바로 잡지 못하면 그를 구출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단자의 자기 선전이 끝나고, 세뇌작업이 끝나고 나면, 그 때는 이미 돌아오기 어려운 것이다. 교주를 유일한 성경 해석자로 말세에 은혜를 독점한 선지자로 알고서야 어떻게 그 구원과 교주에게서 떠나올 수가 있겠는가? 그 누가 구원을 버리고 멸망을 받으려 하겠는가? 그러므로 시초에 바로잡아야 구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몇 차례 이단자에게로 넘어간 자를 돌이켜보려고 힘써 본 일이 있다. 이단교리가 잘못된 점을 명확하게 손에 쥐어주듯 가르쳐 주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였었다.
이단자의 셋째 특색은 이색적인 성경 해석이다. 전통적인 것이나 보편성을 띈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자들에게 호기심을 가지는 자들은 비교적 적극적 성경의 소유자들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열 처녀 비유를 백영희 목사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열 처녀를 다 구원받은 교인으로 보는 것이다. 기름준비 못한 다섯처녀는 단지 선한 행실이 없어 상급받지 못하는 것으로만 보고, 천국구원에 참예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전통적인 해석에 비하여서 그 얼마나 새롭고 매력적인가! 인간은 누구나 쉽게 구원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또 고전 3:15은 벌거벗은 자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열 처녀 비유 해석이 위험하게 보이지 않고 도리어 호기심을 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열 처녀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오늘날까지 그 비유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 지니고 있던 구원의 긴박성은 다시는 찾아볼 길이 없는 것이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경고는 모든 구절에서 완전히 씻겨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해석은 성경 전체를 뒤엎고 마는 것이다.
일이 이쯤 되고 보면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누가 상급을 받고자 하는 단순한 마음만으로서 박해와 악형을 이기면서 믿음을 지킬 것인가! 그 누가 자기 생명과, 재산과, 아내와, 자녀를 버리면서까지 계명을 지키고 가진 고문을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경건을 고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신기스러운 해석도 하는 것이다. 1962년 겨울, 서울 삼각산 기도원에서 고 김현봉 목사는 창 22장에 있는 이삭 제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왜 아버지가 이삭을 결박하였을까? 하니 칼로 찌를 때에 아들 이삭의 몸이 움찔하면 하나님께 제물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삭은 예수님의 모형이므로 결박하지 않고 그냥 찔려도 순수히 아버지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자원하여 죽음에 임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이 집회는 독립교회 교역자 수양회 집회였다. 침실에서 교역자들 간에 새김질하는 토론회가 있었다. 그 때에 백영희 목사는 고 김 목사의 해석에 감탄하는 표시를 하며 지지하고 나섰다. 필자는 반대하며 말하기를, “이삭이 죽지 않고자하여 어거지를 썼어도 제사에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지 아들하고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백영희 목사는 말하기를, 그럴 수 없는 것이, 이삭이 자발적으로 죽음에 임하지 아니하는 것을 아버지가 강제로 죽였다면 살인죄가 되므로, 하나님이 열람하시는 제물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필자는 또 답하기를 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규정하는 것이니, 이미 이삭을 제물로 하는 번제를 하나님이 명하셨으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지 못하면 도리어 죄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경건의 밑천을 찾기에 급급하다. 혹 어떤 이들은 그들 가운데서도 상당한 경건에 이른 수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미 그릇된 교리로 뚝이 터졌으니. 많은 생명이 위태로운 것은 면할 수 없는 일이다. 또 고 김현봉 목사는 그의 생존 말기에 중대한 교리적 발언을 하여 그를 알고 있는 삶들의 세계에 크게 파문을 던진 일이 있다.
즉 공자도 착한 교훈과 행실로 구원 얻었을 가망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신앙고백에 비하여 그 얼마나 대담하고 엄청난 발언인가? 이로 인해 고 김현봉 목사는 박 윤선 목사와 진지한 격론이 있었다. 그 후 수그러진 것을 보았으나, 완전히 고쳤다는 확증은 얻지 못하였었다. 필자는 1962년 겨울을 고비로 그 어른과 영영 친교를 끊었으므로 그 후의 일은 잘 모르고 있다.
가령 고 김 현봉 목사가 생존시에 그토록 대담한 성경 해석을 버리고 고쳤다고 하여도 그런한 사건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교훈에는 변동이 없는 것이다. 고 김 현봉 목사의 경건, 극기, 헌신은 그 유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진리와 복음에서 탈선된 신학입장은 우리가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고 김현봉 목사의 입장은 오리겐(Origen)의 만인 구원론에 가까운 것이다.
3.“독립교회”의 이단설
거듭 난 영혼은 죄짓지 아니한다고 하며 신자가 거듭 난 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중생자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아니한다고 한다. 즉 영혼이 범죄치 아니하였으니 하나님께 노를 살 것도 없다. 또 자신이 회개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행위문제를 다음과 같이 가볍게 다루는 경향도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구원을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둘로 완전히 나누어서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기본구원은 중생으로 받는 것을 말하고 건설구원은 거듭 난 영혼이 행한 선행으로 받는 상급을 두고 말한다.
구원은 기본구원론만으로도 천당 가는 데는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즉 건설구원은 상급 정도이므로 있으면 좋고 없어도 천당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실로 거듭 난 영혼은 범죄치 않는다고 말하려면 필연적으로 구원을 이와 같이 나누어 말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중생자에게 있어서 행위나 율법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한 벗어날 수 없는 본분으로 말하지 않고, 한낱 상급으로 말하여, 율법이나 선행은 있으나 없으나 그만인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들은 실제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거듭난 자는 거듭 남과 동시에 죽는 시간까지 간음, 살인 거짓말을 계속하는 생활 속에 있어도 천당가게 하는 기본구원에는 추호도 염려가 없다고 한다.
다만 건설구원 (상급)이 없어 서운할 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확실히 중생자와 율법의 관계는 아주 약하여지고만 것이다. 중생자는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을 받았다고 말해서 그리 과할 것이 없을 것 같다.
이래서 박 윤선 박사는 이러한 교리를 비판하여 반 율법주의에 빠지는 이단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율법에 대해서는 뒤에 제 2부에서 깊이 다루고 있지만, 율법의 사명은 중생 전에는 몽학 선생으로 사람들을 가르쳐 죄인임을 알게 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며, 중생 후에는 기독신자에게 하나님 섬기는 표준이 되어 주는 것이다. 즉 중생자가 하나님 앞에 마땅히 행할 본분 이행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율법을 단순히 상급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께 마땅히 행할 본분(本分)으로 말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서에 보면 제 3문에, “성경에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이 무엇이뇨?” 여기에 대한 답은 “사람의 하나님을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본분이니라”고 하였다.
본분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거듭 난 자에게 요구하시는 요구가 절대성을 띈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분이라는 말과 상급이라는 말과는 그 거리가 하늘과 땅같이 먼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본분과 상급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을 둘로 쪼개 놓고서 건설구원을 상급에 국한하고 본분을 말하지 아니함은 심히 괴악한 일이다. 확실히 반율법 주의의 모순에 빠짐을 면할 길이 없다.
실로 성경에서는 율법의 요구를 중생자에게도 변함없이 절대성을 띈 요구로 표현하고 있다.
마 3:8의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마 7:18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 25:14~30의 달란트 비유에 있어서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5:41~43은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신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와 같은 구절들이 증거한다.
또 행위(본분)의 절대적인 요청은 “멍에를 멘 종”으로 (마 11:29) “의의 종”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롬6:19,20), “여인의 정절”로 (계 14:4) 계시되었다.
멍에 멘 소나, 봉건사회의 종이나, 동양사회에서의 여인의 정절은, 다 그 당시 사회적 행위의 절대적인 요청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즉 중생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피할 수 없는 본분을 말한다.
4. 독립교회의 이단설의 모순성
“거듭 난 영혼은 범죄치 않는다”고 말하고 보면, 중생한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경우에 “그 죄는 무엇이 범하는가?”하는 것은 큰 과제로 남게 된다.
고 김현봉 목사는 영혼이 아닌 이성이 범죄한다고 하였다. 이일로 서로 만났을 때에 필자가 묻기를, “그렇다면 그 이성은 어떠한 이성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하였더니 답이, “내가 말하는 이성은 짐승에게 있는 정도의 이성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자기의 말에 이렇게 해석을 붙였다. “영혼이 없는 짐승에게도 본능이 있고, 또 습관이 있다”고 하였다. 결국 몸에 있는 본능과 몸에 밴 습관이 죄를 짓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물론 모순된 말이다. 단일 인격체인 인간 속에서 영혼과 별도로, 영혼의 허락도 없이, 몸 스스로 본능을 따라서 악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벗어나기 위해서 별 수 없이 마귀가 거듭 난 자 속에 있어서 몸과 본능을 시켜 죄되는 행위를 저지른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백영희 목사의 말). 물론 이러한 말은 공개적인 것은 아니고 은밀히 취급하고 있었다. 지금은 고쳤는지 모르겠다.
백영희 목사가 수년간 중생자 안에서 범죄의 책임자로서 인격적 요소를 거듭 난 영혼을 제외하여 놓고서, 찾으려고 무한한 애를 썼던 일은 지금도 필자의 기억에 새롭다. 중생자의 영혼을 제외하고서, 범죄의 주체자격인 인격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하니, 영혼을 여러 개로 나누어 보는 도리 밖에는 없었다. 그리하여 마음, 이성, 의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죄짓는 자로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합당치 못하여, 결국 사람 안에 이성적인 실존은 단일 인격체로 영혼만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중생자 안에서는 중생 후에 짓는 죄를 책임질 인격적 실존을 찾지 못하고, 중생자 밖에서 찾게 되었다. 중생자 밖에서는 마귀 밖에는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중생자의 영혼은 범죄치 않고, 마귀가 중생자의 몸을 부려서 죄를 짓는다”고 해결을 짓고야 말았던 일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서 중생자가 범한 죄는 마귀가 책임을 지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이것을 성경 해석에 적용하여 보자.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에 있어서 “육신”의 인격적 요소는 마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물론 중생자의 영혼이 자기 몸이 범한 죄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 그 책임이란 무엇인가 하니 자기 몸이 마귀에게 쓰이지 않도록 깨어 지키지 못한 책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말은 크게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에게 마귀의 미혹을 경계하고 있다. 이 말은 곧 마귀는 성도라도 유혹하려고 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말이다. 유혹은 인격적인 실존만이 그 대상이다. 임의자에게만 해야 할 일, 해서는 안될 일 두 가지 일이 있고, 두 개의 길이 있다. 이렇게 두 개의 일, 두 개의 길을 놓고 어느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도덕적인 실존에게만 미혹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귀가 성도를 미혹하는 경우에 중생자의 어느 부분을 미혹하겠는가?
그것이야 물론 중생자의 영혼이다. 그러나 중생자의 영혼은 범죄하는 일이 영원히 없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니, 미혹의 대상도 되지 못하므로 결국은 중생자 안에 있는 마귀를 미혹한다는 말이 된다. 결국 중생자 밖에 있는 마귀가 중생자의 육신에 거하는 마귀를 미혹한다는 말이 된다. 마귀가 마귀를 미혹한다던가 마귀가 마귀로 더불어 싸우는 일은 없다고 예수님이 단정을 내리신 바 있다.
이것 뿐인가? 결국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중생자 안에 있다고 하는 그 마귀에게 경계하여 너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신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계하시거나 권유하시겠는가!
성경에는 그런 예가 전연 없다.
5. 사람은 중생 후에도 범죄한다.
칼빈주의는 사람이 거듭 난 후에도 그 영혼이 범하는 일이 있는 것으로 본다.
여기에 대하여 명백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
시 41:4 “내가 주께 범죄하였으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이것은 거듭 난 성도의 고백이니 거듭 난 영혼도 범죄하는 일이 있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영혼이 낙망함은 불신앙의 죄이다. 거듭 난 영혼도 이렇게 낙망 하는 일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고후 7:1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거듭 난 자의 영혼도 죄를 다시 범하는 데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지상에서 완전 성결이 없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소요리 문답 제37문답도 역시 유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신자가 죽을 때에 무슨 유익을 받느뇨?” “신자가 죽을 때에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며.......” 이 문답은 성경을 바로 깨달은 문답이니 거듭 난 영혼일지라도 세상에 머물려 있는 동안은 불행히도 시험에 빠져 범죄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어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거듭 난 후에도 거듭 난 그 사람이 여전히 범죄하는 일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아니한다고 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요일3:8, 9과 롬 7:14~25을 들고 있다.
요일 3:8, 9을 참고로 적는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이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그러나 그들은 요한일서를 곡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음 성구를 보라.
요일 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렇게 나간 이단자들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서도 말로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였다(1:6).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면서도 하나님을 안다고 거짓을 말하였다(1:4). 저들은 형제를 미워하므로서 어두운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빛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1:9). 이런 형편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미혹을 받아 실족할 위험성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2:7)고 경고하고 있으며, 요한일서 서신을 밝혀 이유를 밝혀 말하기를, “나의 자녀들아 네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전연 중생 후에 중생한 영혼이 범죄하느니, 하지 않느니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요일 3:8, 9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아니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단자와 참 성도를 대조적으로 말하여 이단자들을 지적하여 참 성도들이 속지 않게 하려 함이다. 참으로 성도는 계명을 지킨다. 형제를 사랑한다. 이단자들처럼 습관적으로 죄 가운데 살거나, 형제를 미워하거나, 계명을 거역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중생한 영혼이 간혹 실족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요일 2:1 하반에서 언급하고 있다. 참 성도는 간혹 시험에 빠져 불행히도 범죄하게 되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거기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혹시 범죄하는 일이 있음을 전제하였을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계속하여 말하기를, “누가 죄를 범하면”이라고 하였다. 또 요일 1:8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다. 이 말은 보아서도 사도 요한은 거듭 난 성도라도 범죄하는 일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으니, 3:8, 9의 말은 다만 습관적으로 이단자들처럼 범죄치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칼빈주의 계통의 주석가들 사이에 전연 논쟁없이 받아지고 있는 것이다.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않는다”고 하는 또 다른 성경적 근거로 그들이 내세우는 성구는 롬 7:14~25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간 그러한 생각이 건전한 것인가 생각하여 보겠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러한 생각은 성경 본문과는 전연 관계없는 잘못된 생각이다.
롬 7:14~25은 13절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선한 율법이 사람을 죽였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단연코 부정하고 있다. 사람을 죽인 것은 죄라고 하였다. 선한 율법은 숨은 죄를 드러내고, 계명은 드러난 죄가 더욱 더 심히 죄되게 하는 것이 그 본래의 사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13절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7:14~25은 어떤가?
이것은 13절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변의 연속이다. 13절에서 일부 답변을 하여서 죄가 사람을 죽이되 연장으로서 율법과 계명을 사용하여서 죽였다고만 말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간단하게 원칙적으로만 말하고서는 만족하지를 못하였다. 그는 계명이 죄가 심히 죄되게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의 체험을 독자들과 함께 극적으로 회상하기를 원하며 현재동사 어법으로 말한 것이 바로 7:14~25인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죄 아래 팔려 있는 죄의 종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다스림 밑에 속하여 철저히 죄만 짓고 있는 모습을 누차 강조 되풀이 하고 있다. 아무리 자기를 다스리고 있는 주인인 죄를 벗어나보려 하나 전연 불가능한 것을 말하고 있다. 아무리 계명을 지켜보려 하나 결과적으로는 죄 아래로 사로잡혀 가는 것을 볼 뿐이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이 이상의 다른 뜻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에서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아니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끄집어 내고 있는 것이다.
롬 7:14~25은 사람이 거듭나면 그 영혼이 범죄를 하느니 하지 아니하느니 하는 문제는 전연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단지 주인인 죄와, 종인 바울이 서로 싸우는 모습일 뿐이다.
어느 종이 주인에게 자원하여 순종하겠는가!
바울은 원치 아니하면서도 죄에게 굴복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계명을 통하여 죄가 죄되는 과정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그 계명을 지키려 할 때에 더욱 더 그 계명 때문에 죄인으로 드러났을 뿐이었다.
바울은 여기에서 죄 아래 팔려가서 죄의 속박 밑에 종살이 하고 있는 처참한 인간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선한 율법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고, 사람이 지은 그 죄가 그 사람으로 죽였다는 것을 바울 자신의 과거 체험을 극적 표현법인 현재동사 어법으로 말하고 있다. 이 롬 7:14~25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말하고 있으니 그것을 참고할 것이다(육에 속한 사람).
6. 중생한 새 사람이 범죄한다
한국 교계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거듭 난 후에 옛사람이 범죄한다고 하는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칼빈주의의 표준적인 해석이 아닌 것이다.
(1) 사람은 중생 전이나 후에나 단일 인격체 그대로 있다. 중생 이후라고 해서 옛사람, 새 사람이 따로 나누어질 수는 없다.
전통적 칼빈주의는 인간의 구성을 몸과 영혼 둘 뿐인 것으로 보고 있다. 몸은 흙으로 지으셨고, 영혼은 하나님이 별도로 지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죽을 때에는 몸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영혼은 그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였다.
사람에게 이 두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본능이 있으나, 이것은 몸에 있는 것이다. 식욕과 이성간의 정욕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몸과 함께 생겨났다가 몸이 흙으로 갈 때에 같이 사라지며,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가 부활할 때에는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나올 것이니, 본능이 제거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마 22:30, 고전 6:13). 짐승은 영혼이 없으나, 그 몸에 본능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다 본능은 몸을 떠나 독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몸에 속한 것임을 확증하고 있다.
영혼은 하나의 단일체로서 존재한다. 영혼은 지성적이고, 의지적이며, 감정적이고 창조성, 임의성을 띄고 있는 자유자이다. 둘이나 셋으로 쪼갤 수 있는 물질도 아니며 어떤 양적인 실존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 난 영혼을 놓고서 어느 부분은 거듭난 새 사람이고, 어느 부분은 옛사람 그대로의 부분이라는 표현은 너무도 막연하고, 위험한 것이다. 더구나 거듭 난 사람이라도 새 사람은 범죄치 않고, 옛사람이 범죄한다고 하는 해석은 더욱 위태로운 것이다.
(2) 중생한 새 사람의 단일한 인격성 전체가 선악을 막론하고 결단을 내려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되어진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다. 다만 중생자의 범죄에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첫째로, 마귀의 유혹이 측면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마귀의 유혹은 몸과 영혼에 있어서 영혼만이 그 대상이다. 마귀는 영혼이 하나님 편을 택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육체적 욕심을 택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생 전후를 통하여 변동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깨어 근신하므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도록 항상 권면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항상 거듭 난 사람 인격 전체를 상대로 하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라고 한다. 근신하고, 묵상하고, 기도함도 역시 중생자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몸이나 본능은 마귀의 유혹의 대상이 아니다. 근신, 기도, 묵상도 몸이나 본능과는 전연 무관한 것이다.
중생자가 시험에 빠질 때에 단일 인격 전체를 대상으로 시험에 빠졌다고 한다. 결단코 옛사람이 시험에 빠지고, 새 사람은 초연히 있다고 말하는 곳은 없는 것이다. 더욱이 몸이나 본능이 시험에 빠졌다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중생자가 시험에 빠졌다고 할 때에는 영혼은 물론이요, 그 몸까지 포함한 완전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계명도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갈 5:24)에 한계선을 쳐놓는 것으로 성립되었었다. 창 2:17은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말하여 주고 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그러나 다윗은 한계선을 넘어 이웃의 아내까지 취하여 채웠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하나님께서 금쳐 놓으신 한계선의 욕망(passion)을 채우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적용 자체는 죄가 아니고, 그것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은 선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금욕주의는 비성서적인 것이다. 중생자라도 이웃의 아내를 보고 본능적인 욕망이 선(腺=Gland)의 작용 따라 발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물론 이것을 단연코 막으신다. 이 때 중생한 영혼은 기로에 서는 것이다. 어느 편을 택할 것이냐? 그것은 순전히 영혼의 자결(自決)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좇기로 결단하면, 요셉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몸에서 일어난 음욕을 단연코 물리쳐 버릴 것이다. 결단코 영혼의 허락 없이는 책임성 있는 윤리적 행동이 저질러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교리 문제로 필자가 1962년 8월에 이 상근 목사를 부산 고려신학교 연구실로 찾은 일이 있었다. 이미 나는 200자 원고지 450매에, “중생한 후에는 무엇이 범죄하는가?” 이러한 표체로 논문을 보내 놓고 답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한 달만에 부산으로 오라는 편지를 받고 화전민을 상대로 하여 개척 전도를 하고 있던 제천군 금성면 구룡리를 떠나 부산을 찾아 갔었다.
내가 연구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어떤 말씀이 있을까 기다리고 있는데 그 때 첫마디로 던지신 말씀은 평생에 있을 수가 없었다.
“거듭 난 새 사람이 범죄치 않고, 그 무엇이 범죄한답디까!”
그 때 나는 그 얼굴 표정과, 음성과, 그리고 표현에서 필자의 생각을 옳은 것으로 단정짓고 있는 사실을 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나는 내가 관계하던 스승 및 선배님들에게서 지옥 갈 지독한 이단으로 정죄되어 말할 수 없이 심신이 지치고 괴로운 가운데 있을 때였었다.
(3) 많은 유력한 학자들도 영혼을 단일 인격체로 전제하고서, 교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겠다.
알렉산더 로스 박사의 요한일서 주석은 유력한 것이다. 그는 화란 자유대학 교수로, 스톤하우스 박사가 편집한 신국제 주석에 요한일서 주석을 투고한 것이다. 그 책 185페이지에서 요지 3:9의 주석을 보면 거듭 난 사람의 영혼을 단 하나로 전제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명의 씨가 자라다가 간혹 방해를 받아 중단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중단은 일시적일 뿐이고 새 생명은 곧 다시 계속 자라되 추수 때까지 계속된다.”
단지 하나의 영혼이 거듭 났을 때 거듭 난 영혼으로서는 극히 유치하고 무식하고 연약하여서 계속 자라지 못하고 자주 실족하고 범죄에 빠진다는 말이다.
Ⅲ. 성경의 증거
1. 죄의 성립
죄가 인체 안에서 어떠한 과정을 밟아서 성립을 보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여 보는 일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롬 7:5은 죄가 인체 안에서 성립되는 과정을 분명하게 말하여 주고 있다.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 중에서 우선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정욕”은 헬라 원어로 τ? παθ?ματα인데 “욕정”을 의미한다. 한글 새 번역이나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욕정(passion)으로 번역하여 헬라 원문의 뜻을 잘 살리고 있다.
“욕정”은 무의식적인 욕망이요, 욕심은 의식적인 욕망이다.
이 욕정은 우리 몸의 지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여기 본문에서 욕정은 우리 몸의 지체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지체”의 헬라 원어는 μ?λεσιν인데 한글 개역 성경 본문 “지체”는 아주 적중한 번역이다. 그러나 한글 새 번역 성경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우리 몸의 지체들”이라고 번역하였다.
지체는 손, 발, 입, 배 등을 말한다. 식욕의 욕정은 몸 전체가 아니고 몸의 한 지체, 소화기에서 일어난다. 석류를 보는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입 안에 이상한 자극을 느끼게 되며, 침이 사정없이 나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예가 된다.
생리학적으로는 이러한 국부적 발작을 선(腺=Gland)의 작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입에서 침이 나오고 쓸개에서 소화액이 분비되는 것이 다 여기에 속한다.
그 누구도 침의 담즙을 내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 없다.
다만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다.
남녀간 이성 사이에 있어 발작하는 욕정도 식욕과 같이 몸의 한 국부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순간적으로 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과 지체에서 일어나는 욕정 두 가지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비교하여 보고자 한다.
(1) 욕정은 의욕, 작정, 계획, 추진 이러한 과정이 있기 전의 상태이다. 그러나 욕심은 의욕, 작정, 계획 추진이 함께 하는 것이다.
(2) 전자는 본능적인 것이고, 후자는 인격적인 것이다.
전자는 도덕 전의 것이고, 후자는 도덕적인 것이다.
전자는 순간적인 상태에서만 성립되고, 후자는 시간의 장단에 구애 없이 성립된다.
그런데 롬 7:5 본문에 “죄의 정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욕정을 죄의 욕정이라고 말하는가?
욕정 자체가 본래 약한 것인가?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욕정 자체는 지극히 선한 것이다.
일반 동물과 함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욕정은 오직 둘 뿐이니 식욕과 음욕이다.
이 두 욕정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벌서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으며,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고 하시므로서 두 욕정 자체도 선한 것임이 드러났다.
하나님은 이 두 욕정을 창조하셨으며, 이것들을 근거삼아서 인류역사를 지정된 지점까지 연장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당대의 수명은 식욕으로, 대의 연속은 음욕으로 이어가시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는 이토록 선한 것이 어떻게 하여 악한 것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롬 7:5 본문에 “율법으로 말미암는”은 바로 대답인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는”은 헬라 원어로 δι? το? ν?μον인데 이 가운데서 δι?는 전치사로서 원인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율법으로 말미암아 욕정이 죄가 된다”는 말이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은 율법으로 나타나셨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못하게 요구하시고 금지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금령 때문에(δι?) 욕정 중의 식욕은 제한되고 말았다.
따라서 제한된 식욕은 죄가 되고 허락된 식욕 충족은 선이 되어졌던 것이다.
어거스틴도 죄의 성립 과정을 말하면서 이러한 뜻으로 말하고 있음을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3편, 3장, 10절에서 인용하고 있다.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다.
신자라도 몸에 거하는 동안은 욕정을 벗어날 길이 없는데, 이 욕정 자체는 죄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일어난 욕정을 의식적으로 수락하거나 행동으로 옮겼을 때에는 죄가 된다고 말하게 된다(While he admits that believers, so long as they are in the body, are soliable to concupiscence that they can not but feel it, he does not venture to give this deasease the name of sin. He is concented with giving it the name of imfirmity, and says, that it only becomes sin when either external act or concent is added to conception or aprehention; that is, when he will yields to the first desire. -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 p. 516 (Translated by H. Beveridge).
2. 두가지 생활양식
롬 7:6은 두가지 생활양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것은 의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바울은 의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낡아빠진 것이므로 버리라고 권하고 있으며,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새롭고 성공적이니 권하고 있는 것이다.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하여 볼 과제는 두가지 생활양식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구약 성경의 진의를 모르고, 의문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편이므로 기독신자들 가운데서도 유대인들과,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온 이방인들 중에서는 유대교식으로 의문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 성경에서 얼마라도 찾아볼 수가 있다.
롬 10:2,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유대인)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당시의 신학적 전통을 따라 자신들이 법조문을 지킨 의를 내세우면서 이것을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고후 3:6~8에서 모세의 직분을 의문의 직분이라 말하고, 사도 자신들의 직분은 성령의 직분이라고 한다.
의문의 직분은 사람을 죽이는데서 그치고, 영의 직분은 사람을 살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법조문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이것으로 구원을 받으려 하는 것은 죽는 결과로 그칠 뿐이다.
구체적인 실예를 하나 들어보자.
유대인 기독신자들 가운데는 여전히 할례를 고집하는 일이 있었다.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이것은 초대교회를 통하여 오래 계속하여 교회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 같다. 과연 주님의 보혈과 상관없이 순전히 율법 아래 있으면, 그 때의 율법은 의문이 되고, 의문은 사람을 죽일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복음과 함께 역사하는 성령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살려서 율법을 능히 지키게 하며 율법의 요구를 완성케 한다(롬 8:4).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능히 따라가게 한다(계 14:4). 다음과 같이 바울의 고백을 하게도 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 21).
롬 2:27~29에서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을 대조적으로 말하면서 여기에 의문과 성령을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표면적 유대인은 법조문을 따라서 단지 양피를 벰으로 육신에 할례를 받은 것으로 그친 자를 말하고 이면적 유대인은 성신의 역사로 마음에 할례(중생)를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다. 전자는 가짜 유대인이요, 후자는 진짜 유대인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초대교회 기독신자들 가운데는 단순히 양피 벤 가짜 할례를 가지고도 기독신자가 되는 양으로 또 이러한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것이다.
롬 7:14~25의 체험담은 의문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표면적인 유대인 바울의 체험담이 극적 표현(현재동사 사용)으로 서술된 것이다. 의문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 얻으려던 생활양식은 오늘날 이방인으로써 기독신자 된 우리로써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곡해로 지금도 이러한 예가 간혹 있다. 불교의 참선, 적선사상에 젖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유대인들처럼 받아들이는 경우에 의문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려드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자의 생활양식은 성령을 좇아서 사는 새롭고 성공적인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로마서 8장에서 상술하고 있는 것이다. 롬 7:14~25의 생활은 롬 8장의 생활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어서, 전자는 의문 하의 생활이요, 후자는 성령을 좇는 생활인 것이다. 만일에 롬 7:14~25을 바울의 중생 후의 체험담으로 본다면 많은 난제를 남기는 결과가 되고, 의문을 좇아 살던 바울의 체험으로 본다면 롬 6, 7, 8장의 문맥이나 체계에 있어 아주 명확하여지는 것이다.
3. 율법의 이중적 사명(롬 7:7~12)
롬 7:7~12에서는 율법이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묻고 답하고 있다. 율법이 죄냐?는 물음에 율법은 지극히 선한 것이라 답하고 있다.
율법이 선한 이유는, 율법은 본래부터 큰 사명을 띄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율법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사명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롬 7:7~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12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 여기 본무에서는 율법은 사람에게 죄를 알려주는 사명을 띄고 있으므로 그것은 선하다고 한다. 율법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여, 무지한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더욱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롬 3:20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이 타락한 이후로는 율법의 사명도 바뀌어져서,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리는 것이 사명이었다. 그리고 또 죄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는 것이다(롬 3:19).
(2) 그러나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고, 그 위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는 율법의 사명은 결코 율법의 본래적 사명은 아니다.
율법의 본래적 사명은 이렇게 어둡고 위협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율법의 본래적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지위, 그리고 실행해야만 하는 의무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었다. 그가 받은 율법은 피조물인 그에게 하나님의 이중적 요구를 명확하게 지시하여 주고 있었다.
그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지켜 나가야 하는 낮고 천한 지위였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임의로 행하는 자로 지음 받았으나, 자기 임의로 행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행하는 낮고 천한 지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낮은 지위도 하나님의 강권이 아니고 인간 스스로 자원하여 나가야만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원토록 낮은 자리에 있어 하나님을 높여 예배해야 함을 율법에서 배워야만 하였다.
이러한 율법의 본래적 사명은 중생한 자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율법의 본래적 사명 가운데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피조물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종으로써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지시하여 주는 것이었다. 즉 영원토록 하나님을 기쁘게 할 책임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런고로 아담은 항상 그가 받은 율법 앞에 서서 율법앞에 서서 율법이 지시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며 그대로 낮은 지위를 지켜 자발적으로 영원토록 경배를 드리며, 자발적으로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겨야만 했었다.
이러한 율법의 본래적 사명은 제 이차 창조를 거쳐 구원받은 기독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율법의 이중적 사명을 기독신자의 중생 전후에 관련을 지어서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기독신자가 중생하기 전에는 율법의 소극적인 사명에 부딪치게 된다. 즉 율법은 사람에게 죄가 있음을 아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율법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면 인간은 영원토록 다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흑암에 빠질 뻔 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이 비록 사람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할지라도 율법 그것은 지극히 선한 것이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또 하나님의 심판에 가두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더 큰 목적은 그리스도에게로 그 죄인을 인도하는 일이다.
갈 3:23, 24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말하여 주고 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의 소극적 사명에 대한 오해
사람이 이러한 명확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율법을 오해하는 수가 많다. 즉 그 오해가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중생한 기독신자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적극적 사명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하여 보겠다.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율법이 하는 일이 하는 일의 낮은 지위를 알려 경배, 예배를 계속하게 되며, 또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려 영원토록 하나님을 위하여 있음과 하나님을 섬길 것을 지시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 성구들은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오, 둘째는 그와 같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니라.”
십계명의 용어는 주로 부정적인 것을 쓰고 있다. 즉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 하나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살인치 말라. 간음치 말라. 도덕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이러한 부정적인 표현은 율법의 몽학 선생으로서의 사명을 나타내기 위함인 듯하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율법을 적극적인 표현으로서 말하고 있다.
눅 6:27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고전 16:22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신약에 와서는 확실히 중생하므로 성령이 내주하여 새 생활로 돌입한 자에게 실천의 항목으로서 계명이 주어지므로 부정적 용어가 아니고 적극적인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적극적 사명에 대한 오해
사람이 자기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율법의 적극적 사명(몽학 선생)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하여 한 말이었음은 앞에서 이미 알아본 일이다. 이것을 모르고서 율법의 적극적인 사명을 무시하여 버리고 중생자는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왕왕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재 창조를 하나의 방편으로 하여서 이루시려는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재 창조를 받은 자로 하여금, 다시금 하나님 예배와 찬양을 하게 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일이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하였고, 또 수차 이 사실을 강조하여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고후 15:5 “저가 코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풀어주신 일이 없고 도리어 멍에를 메워 주셨던 것이다.
마 11: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과연 중생한 자에게 메워지는 율법은 아주 가벼운 짐이요, 수월한 짐이다. 구속받은 감격을 안고, 복음의 평안의 신을 신고서 메고 가는 짐인 탓이다. 고로 중생한 자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협, 칼 앞에서도 굴하거나 약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걸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 이차 창조를 받은 중생자는 에덴 동산에서보다도 더욱 중한 멍에를 메고 하나님께 매이는 것이 사실이다.
롬 14:7, 8을 보라. 여기 보면 중생자는 사는 일도, 죽는 일도 이제는 오로지 주님을 위하여서만 영위한다고 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사랑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는 구약에서 이러한 사실이 실현된 것을 얼마라도 보고 있다.
히 11장과 계시록의 성취인 신학시대 교회사에서도 많이 보고 있다.
이리하여 중생자에게서는 율법의 적극적인 사명이 성취되어 성도는 필연적으로 죄에서 해방을 받는다고 하며, 율법의 요구는 성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를 본다고 한다(롬 8:3, 4).
이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자는 더 이상 율법의 멍에에 매이지 않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사상인 것이다.
4. 찬송가의 후렴 (롬 7:14~25 해석의 서론)
찬송가에만 후렴이 있는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도 후렴같은 것이 붙어다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롬 7:14~25은 사도 바울의 체험담인데 적지 않은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찬송가의 후렴 이상으로 생활에 붙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즉 실족하여 범죄할 때마다 이 본문으로 돌아가서 위안을 받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같은 위대한 사람도 별 수 없이 끝내 죄를 끊지 못하고 그 속에서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나 같은 범인(凡人)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는 이 본문은 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을 다시의 체험담으로 여기고 이것을 찬송가의 후렴같이 범죄할 때마다 생활에 응용하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이 본문을 놓고 과연 그럴까? 하여 말할 수 없는 갈등과 고통 속에서 해매던 시절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니까 6.25가 터지던 해이다. 박 윤선 목사는 자기의 주석으로서 요한계시록을 첫주석으로 1949년에 출판하였는데 나는 그 주석에 있는 설교를 처음부터 모조리 타이프 용지에다 복사를 하였다. 어느 때에 군인으로 갈지 모르니 설교도 듣지 못하고 주일도 없는 격전지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한 준비였었다.
이렇게 열심을 내고 있을 때인지라 나에게 걸것은 바로 롬 7:14~25에 있는 바울 사도의 체험담이었다. 계시록을 보고 초대교회와 중세사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신앙에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었다. 구약에 있는 성도들의 승리담, 그리고 예수님의 교훈(마 10:34~39)은 절대적인 권위로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나는 촌음도 그 억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감옥에서 막 출감하신 여러 교역자들의 감화는 여기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모든 교훈과, 바울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죄악에 빠져 있었다는 체험담 사이에 끼어서 말할 수 없는 갈등 속에서 방황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필자는 하는 수 없이 바울서신 전체를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교훈과 비교하여 보았다. 사도 요한의 서신과 구약과도 비교하여 보았다. 이 연구는 촬스 하지의 조직신학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을 탐독하기에 이르렀고, 신학교 입학 전에 헬라어를 공부하게 되었으며, 많은 주석들을 열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10년이 넘은 1961년 6월에 이르러 나는 롬 7:14~25 해석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것은 이 체험담은 결단코 중생 후의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어느 면으로 보아도 중생 후의 것이 될 수 없음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내가 꼭 10년 동안은 스승으로 모시던 백 영희 목사도, 롬 7:14을 중생 후의 것으로 보고, 이것을 놓고 다른 성경과 조화를 찾다가 결국 오늘같이 저렇게 장로회 본통교회에서 멀리 떠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성화교리 작성에 있어서 암초였으며, 필자의 성화생활에 장애물이던 이 난해절을 신간을 걸려서 생각하여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5. 육에 속한 사람 (롬 7:13~25)
바울의 셋째 질문 (7:7~12)에 답하면서 이러한 말을 한 일이 있다. 즉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7:10). 이렇게 말하고 보니 마치 율법이나 계명이 사람을 죽이는 것 같이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선한 율법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고 죄가 사람을 죽인 것을 강조하여 말하게 된 것이다.
13절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나를 죽인 것은 죄입니다.
죄가 그 선한 것을 방편으로 하여 내게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죄로서의 본성을 드러낸 것이며 계명 때문에 죄는 더욱 악한 것이 되 었습니다.”(새 번역 성경).
13절을 한글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보니 본문의 뜻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다. 선한 율법이 바울을 죽인 것이 아니고 죄가 바울을 죽였다고 한다. 다만 죄가 바울을 죽임에 있어서 율법과 계명을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여기 문답은 바울 자신을 제 일인으로 하고 있으며 25절까지 이대로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4절 본문을 유심히 보면 두 문장에 있어 주어가 하나는 복수이고 하나는 단수인 것이다. 여기에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의문(법조문)으로서 구원을 받고, 이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상태에 있었으므로 율법은 신령한 것이라는 정도의 지식은 다 갖고 있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가 바로 이런 뜻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실제 체험에 있어서는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에게 팔려가서 죄의 종살이를 하고 있었으며, 죄의 멍에와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못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쓴 체험을 말하고자 할 때에는 복수를 쓰지 않고, 자신 개인을 들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
“육신에 속하여”와 “죄 아래 팔렸도다”는 이 체험이 중생 전의 것임을 확증하여 주는 말이다.
그러면 먼저 “육신”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바울은 육신을 성령에 대조하여 쓰고 있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거듭 나기 전 사람을 육신에 속하여 사는 자로 말하고 중생하여 사는 자를 성령에 속하여 사는 자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이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인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로마서에서만도 수차 하고 있다.
바울은 롬 8:5~9에서 육에 속한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과 대조하여 더욱 명백하게 구분을 지어 말하고 있다.
(1) 육신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고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8:9).
(2)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전연 할 수도 없는 자라고 한다(8:7).
(3)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자라고 한다(8:8).
(4) 육신에 속한 자는 사망에 속한 자라고 한다(8:6).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사망에 속한 자를 어떻게 중생한 바울로 볼 수가 있겠는가?
바울은 또 중생하지 못하여 성령은 없고 오직 육에 거하는 자를 놓고 말하기를, “자기의 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라 하였고(빌 3:19), 또 말하기를 “이와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배만 섬기는 자라”고 했다(롬 16:18).
구약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을 보게 된다. 노아 홍수 배에 사람들이 멸망받은 이유를 말할 때에 “육신에 속하였음이니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창 6:3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여기에서도 하나님을 떠났을 때의 사람을 놓고 육에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육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아 때와 같으리니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는데.”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다가 노아 홍수 때의 사람들이 망했다는 말은 중생하지 못한 육체에 거하는 자의 생활상 전부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육에 거한다.” “육에 속하여 있다”는 바울의 표현은 극히 그 뜻이 제한되어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로마서 38장에서는 틀림 없이 그러한 것이다.
마음으로 생각할 것은 죄 아래 팔려 있다는 표현이다.
죄 아래 팔린 육신에 속하여 있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일이다. 만일 성령에 속하거나 성령에 거하면 죄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다(8:1, 2)
바울은 기독신자를 놓고 말할 때에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의만을 행하는 의의 종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롬6:22).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그러므로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있다는 체험담은 어느 면으로 보아도 중생하기 전의 바울을 놓고 하는 말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놓고 바울이 중생한 후에 더욱이나 이 로마서를 기록하는 그의 성역 말기에 있어서의 체험담이라고 보는 이들이, 이렇게 보는 이유로서 제시하는 것을 검토하여 보면 전연 무근한 것이다.
촬스 하지는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① 7~13절에서는 과거동사를 사용했으나 여기에서는 현재동사로 바뀌어진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장의 흐름이나, 성격, 혹은 내용을 전연 도외시하고서 하는 말이다. 여기에서야말로 과거에 체험한 것을 현재에서 바로 앞에 보듯이 생생하게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반드시 현재동사를 써야만 하는 자리인 것이다.
② 이 내용의 죄성같은 고민은 불신자에게는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한편 맞으면서도 틀린 말이다. 물론 불신자는 이러한 죄성의 고민이 없다. 그러나 이 체험은 불신자의 체험이 아니고 바리새인이었으며, 예수님 부활하신 때까지도 의문으로 구원을 얻어보려던 바울 자신의 체험인 것이다. 율법을 지켜 그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던 바리새인이면 누구나 다 일반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일이다. 아니 이것은 유대인 사회에 아주 보편화된 체험이었던 것이다.
③ 25절은 그리스도의 현재의 심장을 잘 말하고 있는 점도 든다. 이 말도 맞으면서 틀린 말이다. 물론 기독신자에게 25절과 같이 비슷한 체험과 고백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롬 7:14~25에서 말하고 있는 마음의 법은 육신에 사는 자의 고백이고 성령에 사는 자의 고백이 아님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이 체험담을, 바울이 중생 후에 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던 성역 말기의 것으로 보는 학자는 어거스틴, 제롬, 루터, 칼빈, 멜랑톤, 베자, 니그렌, 크로솨이데, 델리취, 하지, 빨트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중생 전에 바리새인으로서 법조문을 지켜서 자신의 의로 구원받으려던 시절의 체험담으로 보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오리겐, 크리소스톰, 그로티우스, 마이어, 데 웨테, 올솨우센, 가데트, 벤겔, 스튜아트, S.H. 데니.
이제 우리는 둘 중에서 어느 편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15~25절, 여기에서는 14절에서 이미 말한 사실이 한 사람의 체험담을 통하여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 분명한 사실만을 지적하여 보자.
(1) 원하는 선은 행해보지 못하고 싫어하는 죄만을 행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15절). 이것은 두 말할 것 없이 바울이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있는 까닭인 것이다.
(2) 미워하는 것만을 행하는 그것은 바울이 아니고 죄라고 한다(17절). 이것은 당연한 말이다. 죄 아래 팔려가서 해방받기 전이므로 주인은 바울이 아니고 죄이니, 그 책임을 주인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3)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오직 행하는 것은 악 뿐이라고 한다(17~19절). 이 말도 당연하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가서 죄에게 종살이 하는 바울인지라, 오직 주인에게 포박 당한 채로 죄만을 짓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종의 신세이다.
(4) 바울 자신에게는 선은 원하는 상태에서 그치고 자기는 죄 가운데 상주한다고 한다. 법조문을 지켜 자신의 의로 구원 얻으려던 바리새인이면 누구나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즉 선을 행하여 보려고 노력만을 했던 것이다(21절).
(5) 22, 23절, 아직 중생하지 못하여 죽어 있던 자의 마음이 몸의 지체에서 발작하는 욕정에 기울어져 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이미 7:5에서 한 말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계명과 몸의 욕정 두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욕정 편을 좇아가기 마련이다. 항상 이러한 것이다. 이것을 말하여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체험은 기독자라도 근신하지 못하여 실족하므로 범죄에 빠질 때 겪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 22, 23절이 독립된 구절로서가 아니고 6~8장 안에서 전후 문맥에 제약을 받고 있어 극히 제한된 의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6)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죄가 율법과 계명을 사용하여 바울을 완전히 하나님의 정죄에 가두어, 지옥 문턱까지 끌고 갔을 때에 비로소 구주를 찾고 있는 부르짖음인 것이다. 그 이상 다른 아무것일 수도 없다. 이것은 13절에서 제시된 문제에 대한 설명의 결론이다.
(7) 비로소 죄로 완전히 죽은 자가 구주의 품에 안기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8) 끝으로 체험담에 결론을 짓는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
6. 영에 속한 사람 (롬 8:1~9)
여기에서는 율법이 죄인을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지 못하던 것을 성령께서는 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죄에서의 해방이 단지 법정적 선고(칭의)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죄된 생활에서 해방이 되며, 하나님께 종이 되어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 섬기는 것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8장 전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다만 성화에 관련되는 문제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육에 거하지 않고 영에 거하는 사람의 특성을 요약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영에 속한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은 자이다(8:2).
(2) 영에 속한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다(8:9).
(3) 영에 속한 사람은 육을 쫓아 살지 않고 그 안에 계신 성령을 좇아 산다(8:4).
(4) 영에 속한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놓여 나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다시 하나님께 종이 되며(6:22), 의에게 종이 되어 의만을 행하는 자가 된다(6:18).
(5) 그러므로 영에 속한 사람에게서는 율법의 요구가 실제적으로 성취된다(8:4).
(6) 영에 속한 사람은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 생명에 속하게 된다(8:6).
결론적으로 생각하여 볼 점은 롬 7:14~25에서 말하고 있는 육에 속한 사람과 여기 롬 8:1~9에서 말하고 있는 영에 속한 사람이 그 얼마나 대조적인가 하는 점이다. 전자는 중생 전에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서 살던 자의 체험이고, 후자는 그 반대의 것임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 전자 후자가 다 절대성을 의미하는 용어인 “종”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두 개를 대조적으로 말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뿐이다. 만일에 영에 속한 사람의 경우만을 독립적으로 말할 때에는 본분을 말하고자 할 때에만 절대적인 용어 “종”이 합당하고 어떤 특정인의 생활이나 체험을 말할 때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중생한 사람도 실족하여 범죄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롬 8:1~9은 중생한 자가 실족하여 범죄함을 부인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마귀에게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를 대조적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점과 전술한 것은 같은 경우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사도 요한은 중생자가 절대적으로 죄 짓지 아니한다는 듯이 절대적인 용어를 쓰고 있으나, 그 말의 참 뜻은 다만 중생자가 마귀에게 넘어가서 교회에서 나간 이단자들 같이 습관적으로 범죄치 아니한다는 것 뿐이지, 결단코 실족하여 범죄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 요한도 실족하여 범죄하는 일은 중생자에게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요일 2:1).
Ⅴ. 결론
1. 사도 바울의 성화 정도
바울의 성화 정도를 규명하는 것은 롬 7:5~8:9 해석에 열쇠가 되는 고로 이것을 결론으로 대신코자 한다.
성도가 세상을 떠나갈 때에는 완전히 거룩함을 받는 것으로 누구나 다 믿고 있으니 여기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이 없으나, 바울이 로마서를 쓰던 그의 성역 말기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성화에 말하였던가에 대하여는 생각하여 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서 7:14~25에 있는 바울의 체험담이 중생 후의 것이냐 혹은 그 전의 것이냐를 분간하는데 크게 참고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서를 쓰던 그의 성역 말기에 있어서는 그의 성화는 상당한 수준에 달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이 그의 여러 서신서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 많은 간증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바울의 성화 정도를 알아보는 일은 과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실족함을 예방 조치하여 주심
고후 12:7에 의하면 바울이 너무도 큰 은혜를 받았으므로 그가 교만하여질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교만하여지지 않도록 하시려고 육체를 찌르는 가시를 주었었다고 한다. 교만은 방종과 실족의 원인이다. 겸손하면 근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계속하여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울을 낮추시어 겸손케 하여 주시고, 근신케 하여 범죄에 빠짐을 막아 주시고 또한 계속 능력 가운데 머물게 하여 주셨다고 한다. 범죄하고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일은 없고, 계속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세 가지 범죄의 원인에서도 그는 깨끗하였다
첫째로 이성간의 욕정에서 보면 그는 아주 깨끗하였다.
고전 7:1~9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절제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절제 못하여 범죄하느니 결혼하라고 권하고 있다.
즉 누구나 불같이 타는 욕정을 절제하는 은혜를 받지 못하여 마귀의 시험에 빠지면 범죄하게 되는 것이니 차라리 결혼하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하므로서, 자기는 욕정을 인하여서는 실족하지 않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불같이 타는 욕정을 절제하지 못했더면 결혼했어야만 했던 것이 아닌가?
요셉도 이 점에 있어서 성결할 수가 있었다.
다윗도 많은 징계와 함께 철저히 회개한 후에는 다시는 욕정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왕상 1:1~14을 보면 다윗이 늙었을 때에 그의 잠자리를 위하여 절색의 미인 아비삭이 수종들었으나 다윗은 끝내 동침하지 아니하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둘째로 바울은 생활비 때문에 범죄하거나 실족하는 일이 없었음이 그의 많은 간증에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그는 독신이었다.
그는 사례금을 받지 않고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친히 노동을 하였다.
그는 빌립보 교회로부터 여러 차례 선교비를 받았다(빌 2:16~18).
그는 범사에 자족하기를 배웠다.
그는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었다.
셋째로, 그는 죽지 않고 살겠다는 욕망 때문에 시험에 드는 일도 없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가 최후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수차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결박에 직면할 것을 알려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기어코 올라갔었다.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할 것이므로 강권하여 못 가게 하였으나,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하였으며, 결박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노라고 하였다.
그는 항상 계속하여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일단 맡겨 버리고 생사를 불구하고 살아갔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의 이와 같은 승리는 자기 개인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다고 기탄 없이 말하고 있다.
롬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범죄치 않고 이겼던 것이다.
고후 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딤후 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바울이 주님을 만난 뒤, 아라비아를 거친 후부터 최후의 날까지, 중단 없이 그리고 시험에 빠지지 않고, 불사조와 같이 충성하엿을 뿐이다.
다만 그에게 걱정이 있었다면 너무 은혜를 크게 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생각할까 하여 간증을 못한다고 하였다(고후 12:6). 또한 하나님께서도 바울에 대하여 걱정을 하셨다면 바울이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가 교만하여질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예방하여 주셨기 때문에 그는 끝까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지속하였으며, 바울은 이것을 크게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고후 12:8~10).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서 7:14~25에서 말하고 있는 그의 체험은 결단코 중생 후에, 더 나아가 로마서를 쓰던 그의 성역 말기의 것이라 볼 수 없고, 그 이전의 것으로 보는 것이 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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