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4:1-17 //
제4장. 광야시험장
이 예수님 시험 받으심, 마4:1-11, 막1:12-12, 눅4:1-13
1. 예수님 시험 받으시는 이유
1) 대속에 역사를 의 행하심이니 곧 택자 전부를 대신하여 수시하신 것이다.
(1) 창3:15절에 예언하심
전쟁이 시발되는 것이다. 여자의 구속은(옛 사탄)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마귀)는 여자의 후손에 발꿈치를 상하게 하리라 하심은 예수그리스도로 마귀는 전패하고 예수그리스도는 박해 당하실 것을 예언하심 머리 상한다=전멸시켜서 승리는 못한다는 말이요 발꿈치를 상한다=좀 해를 줄 것이요 승리는 못한다는 말씀이다.
(2) 눅1:29-34 마리야의 거부는 잉태 전 악령의 거부요(방해)
마2:16, 헤롯에 박해는 정식투쟁 전 악령의 방해요
(3) 광야시험은 첫 아담이 인류 대표로 동산에 마귀와 싸워 패전한 결과로 영원 사망하게 된 십자가 고난을 그 대신 벌을 받아 청산하려니와 인간을 시험적으로 승리한 마귀는 그대로 있는 고로 택자의 대속주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택자를 대신하여 마귀와 싸움을 앞으로 시작하신 제1차 전쟁하신 것이다. 하나님에게도 이 싸움을 앞으로 계속하였던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도 골1:21에 말한 1.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과 또 빌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하신 전쟁입니다.
∴ 지상교회는 전투교회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매 승리하신 고로 우리도 승리하게 됩니다. 요16:33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 을 받으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셨다.
해석
그때 여인의 후손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서 또 한번 싸움을 할 것 말했다. 이 사탄은 많은 선지자들을 해하였고 또 마리아에게 의심을 주었지 남자를 모르는 자가 잉태하리요 하였다. 그리고 헤롯에게 이 마귀는 또 들어가서 예수님 죽일려고 싸웠고 또 예수님을 시험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최후 승리를 하셨다. 우리의 싸움도 계속하나 승리할 것이다.
(4) 우리의 대제사장인 고로 우리를 체휼하시기 위하여 수시 하신 것이다.
체휼은 자비와 긍휼 보다 조금 다르나 자기가 친히 경험하고 동정한다 말이요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한다 말이다.
∴연약한 죄인들이 담대히 지성소에 갈 수 있다.
해석
예수님께서 친히 땅위에 오셔서 우리 모든 시험을 낱낱이 마귀에게 받아 실지로 경험해 보셨는 고로 우리시험이 얼마나 어려운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5) 세상 임금인 마귀 정복하고 택자를 빼앗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6) 이 시험은 싸움이니 그리스도교 전쟁에 근원이며 또 전투교회에 싸움의 표본이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재림 때까지 마귀도 시험에 방법도 동일하니 예수님에 만고에 승리요 표본이 되는 것입니다(성신의 사람 외는 전부가 다 마귀의 백성이다.). 이런 고로 마귀 백성은 안팎에 꽉 차 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나 밖에서 평안할 수 없다. 그러니 싸움은 언제나 있는 줄 알아야한다. 예수님 십자가 못 박힌 고로 우리에 우리의 시험을 면케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로 최고에 사랑하는 사람 만들기 위하여 원수까지 사랑하는 최고사랑의 사람 만드셨다.
마4:1-4.
2.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시기 마4:1-11
1)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으신 때 또 성령님에게 이끄심을 받으신 때 여기 성령의 인도하심은 마태복음에 이끌려 라고 기록했고, 마가복음은 몰아내신 이라고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성령에 충만하사 또 이끌려 라고 기록 되였다. 여기는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끌려서 꼼짝 못하고 끌려가신 것이다. 그저 감동 여는 정도에서 우리는 만족하지 말고 우리도 성령의 감화에 붙들려 죽는 자리까지라도 꼼짝 못하고 끌려갈 만한 영감을 얻기까지 구하여야 한다. 또 영원한 자유를 위하여 자유 아니할 때(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자유 얻기 위하여 제 마음대로 할 때)죄짓는 때는 시험치 않는다. 성령님께서 금하지 아니하시고 허락하신 일이다. 성령이 허락지 아니하면 마귀는 시험하지 못한다.
2)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악령이 와서 시험한다. 여기에 시험한 마귀가
(1) 형체를 가지고 왔는지
(2) 심령적으로 와서 시험했는지
(3) 바리새교인을 통해서 시험했는지
(4) 사탄의 정상 그대로 입고 나타났는지 이 4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 넷째가 자연스럽다. 예수님은 사탄의 정체 그대로 나타나도 잘 보시고 통화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마귀라는 말의 뜻은 훼방자이라는 뜻이다. 마귀는 언제나 하나님과 성도가 접근됨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 마귀의 하는 일이다. 또 의를 행하려 할 때 하나님 뜻 안에 두려할 때 방해하고 성공일 우려할 때 실패케 하고 성공 보려 할 때 방해하고 긴장하려할 때 충성하려할 때 진리운동과 성화 되는 회개운동의 방해한다. 화목과 단결을 하려할 때 방해한다. 항상 방해하는 것이다. 마귀와 상호 관련성(마귀와 승리에) 성령이 의에 행실을 권면하는 것 만치 악마의 방해는 그만치 있는 것이다. 여기 성령의 역사와 마귀의 시험한 순서와 시일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① 성령이 광야까지 인도만 하시고 후에는 예수님 혼자 금식하시고 금식하신 후에 마귀는 와서 시험했다는 설이 있고,
② 성령이 광야로 이끌어신 후에 40일간은 성령님이 고난과 희생으로만 구속 사업을 완성할 그 성격 그대로 40일 간 주리게 하시고 동행하신 후 성령은 예수님을 혼자 두시고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해석도 있다.
③ 성령님이 광야로 이끄시고 늘 같이 계셔서 금식도 하게 하시고 또 마귀도 40일 후만 아니고 40일간 틈틈이 각양시험을 하였고 주님은 이기셨고 최후 40일 말에 3대 시험이 있었다고 한다.
눅2:1-2에 보면 있다. 눅3:1-2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으시더니 날수가 다하니 주리시더라
평가
이상은 설 중에 신앙경험을 보나 본문을 보나 세번째가 유력하다. 언제나 신앙에는 마귀가 따라다니나니 배는 물에 있나니 배가치는 물 없는 때는 아무가치가 없다. 언제든지 성령의 역사에게는 악령의 시험과 같이 있어야 되는데 배에 물이 들어오면 안 되는 것 같이 성신은 안에서 만들고 마귀는 밖에서 해할려고 한다.
3) 우리의 영육이 시험을 받는 때
(1) 진리의 신과 진리와 동행할 때 동행하고 난 후 할라할 시(마귀가 시험하려 할 때는)
(2) 하나님과 친밀하여질 때 친밀하여 질려 할 때 친밀하여진 때 반대된 때
(3)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려할 때. 받을 시 받은 후.
(4) 큰 승리와 성공을 계획할 시, 승리와 성공 되는 중에 하고 난 후,반대 시
(5) 평안과 만족과 소원성취 시. 반대 시
(6) 곤궁한 시 환란 시 - 반대 시
(7) 승리에 성공에 욕심이 있을 때, 또 고난을 면하려 할 시 또 식욕의 시 안목에 정욕 시 각 욕심에 극열할 때 무시는 낙망 비애로 그것이 없을 때 우리에게 낙망과 비애로 우리에게 시험한다. 마귀는 연시로 시험한다. 천당 가면 예수님 만나니 좋고 마귀 안 만나니 좋고 죄 없으니 좋고 진리와 의만 있으니 좋다.
요의
이상을 악마는 시기, 훼방, 방해 등으로 유혹한다. 그 방법은
1. 대선은 소선으로 소선은 무로 뒤에서 당기는 법이 있고(게으르고 뒤떨어지게 하는 시험함)
2. 과분한 욕심과 탐심을 일으켜 지나치게 하는 유혹도 있다(앞서 가게 하는 것). 전자는 겸손으로 유혹함이니 실현 발휘와 발육과 장성을 막고 또 하나님 신망을 빈약하게 하여 실패케 하고 지나친 겸손 이 죄요 과분한 겸손한 죄나 교만한 죄나 꼭 같다. 후자는 허영에 교만으로 유혹함이니 반드시 과분한 욕망이기 때문에 미달이 따라오고 만다. 여기서 악마는 先在 감사하는 마음 제하고 후 불만 불평, 원망 시비의 사람이 되게 하며 은혜와 선의 탐심 죄 범하게 된다. 이것은 교만한 자가 받는 시험이다. 제 정도와 분수에 알맞게 옳은 욕심에 서로 니르야겠는데(하나님의 뜻 이루는 일이든지) 자기 힘에 적당하게 맞아야겠는데 과분하게 욕심을 내니 실패될 것 밖에 없다. 제 능력 제 사정 제 입장에 지내치면 욕망이니 실패되면 마음에 감사가 없어진다. 감사가 없어지면, 불만불평이 생기고 이 불만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면, 언제든지 원망과 시비가 생긴다. 우리는 은혜에 탐심과 죄에 나가니 지나친 욕심으로 그에게 만족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 한 냥중 받은 자나 두 냥중 받은 자나 감사한 것인데 도리어 원망과 시비를 품는다. 은혜와 선에 탐심을 품는 자 많다. 이제 은혜생활 하는 자에게 마귀는 세상 것도 겸해 살아야한다. 과분한 욕심 일으켜서 감사가 떨어지게 하니 하나님과 이별이 된다. 그 다음에는 불만과 불평을 품으니 마귀와 합하고 원망시비를 품으니 죄에 빠진다. 또 이 미달을(은혜에 자기의 분수에 지나치게 하니 이는 탐심이 된다. 또 이 미달을 기어코 달성하려 할 때에 목적 달성에 욕심에 열심할 때 수단과 방법을 마귀는 비뚤어지게 하여 마귀는 실패케 한다. 선한 욕심도 지나치면 해가 되거던 하물며 악한 욕심이리요.
약1:14-15 시험은 욕심에 끌려 미혹하리니 욕심이 잉태하니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지라. 그른즉 성패는 일시적인 안전의 것으로 표준 못한다.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되였느냐, 아니 되였는가 하는 데 있다. 그 뜻을 맞추기 어려우니 후퇴하면 게으름이나 낙망이나 이런 것으로 퇴보 말고 겸손자의 주의는 (게을과 낙망을)앞으로는 계획을 하되 감과 분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충성 다하고 되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또 은혜를 구하며 전진할 것이다.
해석
그때 그 일을 충성 다하고는 어디까지 되던지 감사하고 감사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겸손한 자는 자기 유혹보다 넘어갈 때 교만이 나와 꺽는다. 교만한 자는 다섯가지 분발 되였는데 10가지 계획하여 그것을 이루 고저 달성의 방법에 수단 방법을 안 가려 행하나 아니 될 때 원망 시비 낙망에 이르려 죄를 짓는다. 우리의 계획을 아니할 수 없어하나 하나님의 뜻 찾는 데는 그의 충성만 다하고 들리고 들리고 그것에 심을 씨를(심을)것 아니라 그저 충성만 다할 것이다. 만일 충성하지 않았으면 안심 못함. 마귀는 우리의 겸손도 허영의 교만심도 잘 이용하여 마귀 자기 뜻을 이루는 자인지 알아야한다.
해석
마귀는 아주 우리의 모든 것을 살펴본다. 성공욕. 免苦욕, 식욕, 정욕, 안목의 정욕, 기타 각 욕이 극열시 악마는 이용하려고 매수를 잘한다. 만일 실업 당하는 자에게는 직업을 주어 시험, 직장을 주었으니 감사함으로 실패다. 그 직장 없어도 하나님의 유익이 있어도 유익하게 되 주실 그 은혜를 감사해야 만사가 합력하야 유익하게 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마귀도 감당 못한다. 마귀는 하나님 신뢰하는 자에게서 자신을 신뢰하는 것으로서 주위와 경위로서 신뢰케 할 뿐 이는 제일 앞에 두 워 하나님도 자기도 간 곳 없고 현 주위와 경우가 제일의 위치에 두어 이가 전부를 주장하고 여기에 집결 되여 00(全前?) 신앙 좋다는 여기에 맞추워 동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과 자기가 주의와 경우를 이용하여 사지 못하고. 이용을 당하는 것이 생명 없는 자이다. 혹 생명 있다면, 빈약한 자이다. 자기가 이와 같이 할뿐 아니라 이웃이 이와 같이 주장하고 설복을 시켜 만 더는 일도 있다. 이것은 생명 없는 자의 썩는 냄새다. 생명 있는 자는 바다 중에 무염(소금 없는)으로, 무염으로 염천에 무열로 엄동의 체온으로 罪 中 義도 구금 중 자유로 비애 중 허락으로 악 중선으로 殺풍경 중 사랑으로 가난한 중에도 부요하던 때와 같이 만족으로 사는 자이다. 勝時의 비결은 私를 버리고 주님으로 전부를 삼는데 있다.
해석
우리가 살 때 주이와(주위와) 경우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무대요 그것이 우리의 생활에 거기는 환경 경우가 주장이 되면, 자기보다도 앞서고 그것이 주인이 되여 교만, 그 환경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되고 있다. 말씀이다. 굶어 죽을 지경이라 해서도 인격이 변동되지 아니하여야 한다. 경우를 자기보다도 하나님보다도 앞에 두고 따라가는 자는 생명 없는 인간이다.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 계시고 나있고 다음에 경우가 있어야 되지 이상에 말씀이여 나오나 마귀의 시험인 고로이다. 자기와는 정체가 주위와 경우에게 삼켜지 말라. 이용을 못하면 할 때까지 싸우던지 이용을 당하지 말라. 아무 경우가 와도 주님은 그 경우를 삼키고 말 것이다.
3. 예수님 시험받으심 마4:1-10.
이 시험에 각 사는(사람은?) 각이 하게 해석함이다. 물질 명예, 영광으로 해석하고 경제 종교 정치로 해석도 하고 희생을 피하는 것과 자기 자랑하는 것과 마귀께 경배케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마귀가 이 시험하는 목적은 천국 건설을 실패케 하는 것이니
① 고난 없이
② 인간의 뜻과 힘으로,
③ 급속히 하라는 주장에 유혹이다. 특히 3가지 시험은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이니
a. 물질로
b. 혈육의 힘으로
c. 마귀에게 굴복하여 무난이 충성하라는 유혹이다(시험에 3가지는 안일주의 인간주의, 자아주의다.).
1)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주리신지라. 마4:2 눅4:1-2을 보면, 성령님에 인도하심과 마귀의 시험을 겸하여 받으시면서 40일 간 금식하신 고로 육은 심히 주리신다고 하셨고 심령의 상태는 기록해 있지 아니하였으나 1차 2차 3차에 시험을 보아 주님의 심령에는
(1) 저주아래 있는 인생에 곤경을 구하고저 하시는 자비심과
(2) 모든 택한 자 백성에 구주 되신, 사역을 완성코저 하시는 간절과(요4:7 참고)
(3) 천년 왕국과 무궁한 천국건설(요14:1 참조)에 승리로 택자를 구원코저 면곤시키고저 하시는 사랑의 마음은 마5:6- 그대로 의에 주리시고 목말라셨던 것이다. 요4:31-34에도 제자들이 정오 12시 시장하실 때 음식을 드렸으나 주님은 내 양식은 여기 있다 하시고 사마리아 여인 구원에 열중하셨던 것이다. 금일도 주님은 우리에게 이 마음을 얼마나 원하실까요. 주님의 이 모든 사역은 전혀 객관인 아버지 뜻과 미래를 위해 한 전혀 희생으로만 성립할 수 있는데 악마는 이것도 잘 알고 인생의 안일성과 현실주의 인 無神, 무망인 막살 인생인 줄 알고 주님을 시험하였던 것이다. 그놈은 오늘도 이점에서 우리를 깔본다. 그뿐 아니라 마귀는 지혜로운 자같으면서도 어리석고 간교하고 미련한 자이다. 언제나 이용물을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놈의 앞길은 영원한 실패인 것이다. 금일도
① 의식주 빈궁에서
② 모든 물질에 궁핍 시
③ 육신 편으로 모든 곤경 시.
2) 1차 시험 - 물질로 구원하라는 시험 :3-4
(1)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아들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 아들이어든(하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아들 됨은=의심나게 하려함이라 어거스틴은 의심나게 한 것이라고 했다. 만일이라는 원어는 아니라고 하는 말씀인데 의심을 품은 것이 아니고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귀는 잘 아는 고로 간교하게 인간을 꿰어 자극성을 일으키려함.
※ 즉, 권리이용을 아니하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로구만 하면서 하나님 아들이어든 한번 권능을 사용하라 하는 충격에 괴약한 버릇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나 또 허락하신 일이 아닌 일을 하나님이 하게 하려 할 때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자에게 마귀는 가서 네가 이런 일은 할 수 있느냐고 명용 일에 충격을 하여 이용하는 법이 많다. 여기에도 그러한 수단이다. 언제나 마귀는 비신자적이며 간교한 것이다.
마4:3-4
(2) “명하여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자행과 안일과 물질로 구원하라는 유혹이다.
해석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것 자행하는 일은 실패다. 또 예수님이 돌로 떡 만드는 일만 하면 십자가 아무 소용이 없다. 물질로 구원시키라 하였지만 초대교회에 물질 구제가 있었지만 제자들이 나중에는 집사들에게 맡기고 그것도 나중은 패하였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 또 영육이 굶주려 있는 민족에 대한 자비심은 친히 기근을 체휼하실 때 더욱 느끼는 심리를 이 기회에 이용하여 마귀는
① 영 구원을 육 구원으로
불가견의 영혼은 가루고 직견인 육신 문제 들고 나온다.
해석
보이는 일과 보이지 않는 것을 바꾸고 보이는 일을 위하여 보이지 않은 일을 희생시키는 것이 마귀의 법이다. 또 현재 일을 위하여 장래 일을 희생시키는 것 역시 마귀 법이다.
②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도리로 고난으로 하실 줄 마귀는 아는 고로 現急的인 물질과 안일로 구하라 해야 하나님과 진리를 가리우거나 혹은 다음으로 두라는 시험이다.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인 것인 즉 진리 버리고 물질 취하라 하고, 성신 와서 굶겨 40일이나 지냈는데 이제 떡 되게 하라는 것이 유혹이다.
∴먼저 물질로 구원해오고 진리로 알게 하겠다. 하는 자 잘못이다. 기독교 구원은 진리와 물질이 다 있어야 하는데 교회 시험할 때도 물질로 시험함.
③ 고금을 물론하고 하나님과 진리보다 물질을 앞세우고 영혼보다 육신을 앞세우고 하나님 뜻보다 자기 뜻 앞세우고 하는 이는 다 마귀의 부패성에 유혹이다. 오늘도 믿는 신자들이 의식주를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④ 금일도 성도의 특권은(믿음, 사랑, 소망, 기도, 성결)로 육신 중심과 물질중심으로 사는 생활은 다 마귀의 유혹에 빠진 시험이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다 물질만 있으면 구원되는 줄 안다. 그 권리를 주장한다면 마귀에 시험에 든 사람이다(옆으로 보면 같으나 앞으로 보면 틀린다.).
중심=주가 된다. 제일로 여기는 것 된다. 물론 육신 첫째로 여기고 영혼을 다음 중심=주가 된다. 제일로 여기는 것 된다. 물론 육신 첫째로 여기고 영혼을 다음으로 여기는 것 또는 영혼 제일로 여기는 자 육신 다음으로 여기나니 선후가 다르다.
롬7:에 보면 4가지 법이 있다.
a. 마음의 법
b. 내 속에 법
c. 행동의 법
d. 지체 속에 있는 법
4가지 주권과 행사가 있단 말씀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속기 쉽다. 우리들은 특권을 가지고 마음의 법과 영혼 제일주의로 살지만 행동과 일치되게 살아야겠다. 현재의 무대가 형통해지니 불경 하는 것 같이 자기 육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 믿는 사람이 많다. 육신주의다가 자본으로 넓은 사람이 많다. 기도의 특권을 가지고 자기의 육신주의로 살면 멀리 마귀의 시험에 들어있는 인이다.
(3) 기록하였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마4:4 눅4:4
하나님의 말씀순종과 희생으로만 사람은 영육이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록하였으되”-이 말씀은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하고 인용하신 것이다. 마귀의 역사를 승리하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항하면 그는 적과 하나님과 그 말씀과 싸우나니 필승한다(이때는 구약전부가 合部되여 있으므로 주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시험을 당해 싸울 때 언 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워야지 내 말 가지고 싸우면 못 견딘다. 어떤 군경이나 법관 앞에서 시비를 하던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대항하여야지 내가 직접 시비하면 내 말씀은 인간대인간이니 못 견딘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처음부터 성경 말씀가지고 싸워야지 성경말씀을 모르게 쓰면, 성경 달라고 하여서 보고 대응하는 자 되어야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신8:3절의 있는 말씀이다. 사람은 떡을 꼭 먹어야 살 줄 아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을 먹여서라도 살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쌀밥만 먹고 살았지만 수수나 옥수수 나를 먹여서라도 살릴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는 인들에게 흙을 먹고 살아라 하였으면 흙 먹고도 살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고로 사람의 사는 것이 식물에만 매인 것이 아니다. 물질이나 직업이나 꼭 자기에 현재에 관계를 가진 것 그것을 가져야 된다는 우려를 말아야한다. 알기는 쉬워도 믿기는 어렵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꼭 보편 은혜로 나는 이 식물이 아니면 죽지 이 직장이 부(?)업 아니면 죽지 하나 사람이 떡 안 먹고도 하나님이 살리면 산다. 직업도 이 직업 아니면 못산다. 하여서 죄를 범해가면서 그 직업을 붙잡을 라고 하지만 사람은 그 직업을 옮길 수도 있고 또 다른 식물을 주어서도 먹고 살게 한다. 하루 한 끼만 하나님이 허락 하셨으면 한 끼 먹고 살아야하지 공연히 범죄 하면서 먹지도 못하는 것 가지고 애를 쓸 것 없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나니라”
이는 사람의 육신에 사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 순종에 있고 더욱 사람은 영육으로 되여 있는 중 주격인 영은 더욱 말씀으로 사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사람은 꼭 물질이 있어야 사는 줄 알아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나니라. 다만 이 말씀 순종으로만 사나니라.
여기에 주의할 것 중 하나는 “모든 말씀”이라는 ‘모든’에 대한 것이다. 요6:63- 주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였고 계22:18-19에는 가감을 엄금 하였다. ∴우리는 전 성경말씀을 알도록 또 양식을 삼도록 또 양식이 되여지도록 힘써야 한다. 곧 영이요 생명이니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신구약 성경이다.
① 육신주의를 영혼주의로 물질주의를 하나님 명령 순종주의로 주님이 대적하실 때에 마귀는 패전하였다.
② 물질시험이 첫째 시험이다. 이를 이김에는 사람의 사는 것이 하나님 말씀 순종에 매인 줄 확신함에 있는 것이다. 이 원리를 알면 마귀 시험에 안 들어간다. 원형0(과?)정이 하나님 말씀 순종하면 복 받고 거역하면 망한다.
③ 마귀는 지고도 끝까지 따라오는 것과(마귀는 하루 백 번 넘어져도 광(0)망 안 한다. 우리의 앞길에 제일 복된 것을 방해한다. 그러니 마귀가 방해 하 거 든 이것이 가치 있는 줄 알고. 자본을 많이 넣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은 마귀는 싫어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과 함께 하시는 일은 막는다. ∴신망인만 하면 이긴다. 주님이 영혼도 생명도 물질도 다 내 놓고 순종만 주장하니 마귀는 잘 알고 제일 요긴한 순종을 제이차 시험에서 방해했다. 떡 만들라하는 것은 육신 구하라 하는 것이고 40일이나 굶었으니 나중은 죽을 것인즉 예수님은 이것도 주장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으로만 산다고 하였다. 떡 만드는 것을 반대했으니 육신 생명 구할려고 하지 않으셨고, 하나님 말씀 즉 순종주의로 살았다.
1차 시험에는 ①물질주의 ②생명주의 ③영혼주의 ④하나님 말씀순종주의 4가지 중 하나님 말씀 순종만은 하나님을 위한 것임으로 주님은 물질주의로 살려고 하니 주님은 생명 말했고 마귀는 생명 말하니 주님은 영혼주의의 말씀하시고 마귀 영혼주의를 말하니 주님은 하나님 말씀 순종주의로 나갔던 것이다.
※마귀는 잘 알고 제일 요긴한 순종을 제2차 시험을 말씀했던 것이다. ∴우리는 마귀가 많이 방해할수록 승과가 많고 하나님이 기뻐 동행하시는 줄 알고 투자를 많이 하고 시간도 넉넉히 잡아야 한다.
3) 2차 시험 마4:4~6
혈육의 힘으로 자력으로 구원 사역을 이루게 하시는 시험.
눅4:9-12, 마4:5-7
(1) 네가 만일 하나님의 자이어든- 마4:3 해석 참조
“뛰나리라.”
① 택자를 구원코저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 욕망 심에 잘못된 방법을 소개하는 유혹이다. 뛰여내려도 죽지 아니하리니 그것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 믿으리라 하는 말씀이다. 이 둘째 시험을 종교 시험 또는 명예시험이라고도 한다. 이는 사이비하나 마귀가 이 방법 내쓰니 순종하면 마귀께 보 종 된다.
② 제일 시험 결론에 神言 순종으로 구원은 성립된다고 하신 고로 간사한 마귀는 이 순종을 꺾기 위해 自 주장으로 시발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위 능을 보이라 그리하면 다 믿으리라하는 그런 시험이니 自 主된 시험인즉, 마16:22 자기 부인과 정반대되는 시험이요 또 마귀에게 순종하는 것이 된다. 마귀는 언제든지 자기를 나타내도록 한다.
③ 십자가 죽음과 고난 제거와 3년간 장기간이 아닌 즉시 속기간에 된다는 시험이다. 이는 인간의 안일성과 조급성을 유혹함이니 이도 자주장을 만드는 시험이다.
④ 이적을 구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되는 일이 아닐찌라도 그들의 비유를 맞추니 잘되지 않겠느냐 하는 시험이다. 인간비유를 앞두는 시험이다. 유대인들의 심리 이용하면 잘될 것이라 함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나 하나님의 뜻 차지다.
⑤ 사술자 되게 하는 시험이니 초자연적 행사를 하나님의 명령에 의지하고 그 영광이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고 혹 자랑 함으로 사욕적으로 하게 하려하는 시험이다. 고금에 이적에 권능 받은 사람들이 이적의 시험에 들었던 것이다.
“마4:5-7”
(2)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도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① 이 성구는 시편91:12. 말씀인데 거기 문맥을 보면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종 자에게만 한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마귀는 이 성구를 하나님 순종에 반대인 자기 私意대로 하는 일에도 발을 붙들어 주시리라고 합니다. ∴성경은 원리에 합하게 해석을 할뿐 또 합하게 인용을 하여야 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원리에 그릇 되이 성경을 해석 인용도 한다. 해, 부가 명하지 않는 것을 예수님은 혼자 하였다면, 이는 마귀에게 미혹 받음인즉 우리가 아무 데나 성구를 집어다. 부치면 안 된다. 믿는 것도 원리에 합하게 믿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귀의 유혹이다. 성구를 함부로 갖다 붙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마귀의 말이 된다. “와치타워”는 원리를 떠나서 성구를 주어다가 대조를 시키니 이단이다. 성경 가운데 있는 말만 빼앗기고 말할 수 있다. 제일처음 성경연구는 문리적으로 해석하고, 다음은 역사적인 해석을 가하고 또 복음의 원리 구속의 대한 것을 연구하고 또 이 말씀을 해주신 원리를 찾고 그 다음을 단절적으로 하고 성경을 윤곽적으로 체계적으로 하지 않으면 얼마안가 이단된다.
② 하나님의 뜻은 불고하고, 네가 주장하여 시작한 일과 너에게 이미 있는 힘으로 능력으로 무슨 뜻이든지 목적만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여 방법 好何를 궁구하고 부족한 것은 채워서 성공하게 하신다는 유혹이다. 온 천하 인간의 심리를 맞추워 할라고 하여도 아버지 뜻 아니면 헛일이다.
③ 복음도 지위 운동으로 전파 또는 성공되리라 하니 복음 위해 정반대입니다. 시위 운동에는 하나님의 협조하시는 간악과 외식적의 협조로 미워하시는 하나님이다.
해석
아버지와 연결되지 않은 까닭에 시위 운동도 전파도 반대함.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여론을 하나님과 연결보다 인간의 협조를 하나님의 허락보다 보이는 성사를 이면을 잡고, 일하는 자는 다 외식 자요 마귀와 부패성에게 다 유혹 받은 자다(교회도 아무리 광고를 해도 그것관계가 없는 것이다. 만사 하나님과 운동하여야 한다. ∴모든 일은 보이는 데서 해결할려고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데서 하라.
④ 결론과 평가
금일 성도도 순종하는 생활로만 따라가려 할 때, 악마는 네가 라고 한 것 같이 내 속에서 내 마음같이 내 속 부패성에서는 역사한다. 마귀는 부패성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제 마음 같이 여긴다.
a.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여 그 사랑만 믿고, 自 주장 홀로 시작한 그 일에도 기도만 하면 도와 줄 줄로 믿는다.
b. 하나님의 뜻과 분은 불문하고 자기의 기존의 능력으로 시작하면 부족은 하나님 능력으로 도와주워 성사하는 일이 많으리라고 한다.
c. 자기 뜻대로의 시위 전력 기이한 행사들로 영원구원과 복음 성공 될 줄로 택자에 행복 될 줄로 믿는 자 많으나 이는 모두가 사이비한 악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유자재하지 말고 모든 일을 순종해서만 시작하고 하여아니하면 다시 시작하여야할 것이다. 불신자같이 생존경쟁 법칙 같은 데서하면
d. 될 줄 아나 택불택은 아주 입장이다. 하나는 사망이요 하나는 생명이니만치 존재도 향방도 결과도 다르다.
해석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합하여 행하라 말이다. 하나님 뜻에 모든 것이 귀정되여 있다.
마4:7~11
e. 인간 대한 주장이냐 하나님께 대한 주장이냐 구별하는 것 먼저 인간 편만 또 먼저 인간 힘만 먼저 선한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 편과 하나님 뜻과 하나님 일을 다음으로 계산하고 생각하는 것은 다 시험이다. 범사를 보이지 않은 면 곧 하나님과 관계되는 그 면과 그 점에서 해결과 결정과 성과를 맺어야한다.
f. 사람들은 성공을 목적할 때, 방법과 순서에 있어 목적과 방법과 주의와 경우를 하나님 뜻보다 먼저 생각하기 쉽다. 이는 마귀의 법이다. 성령의 성공의 법은 첫째로 하나님 뜻 생각하고, 그 일에 성패보다 먼저 하나님 찾아 생각하고 다음에는 순종이냐 자 주장인가를 구별하여 순종의 길만 택하였으면 조만간 성공이 될 줄 믿고 보이는 것이 실패가 되어도 낙망이 없다.
⑤ 사술자 되게 하는 시험이니 초자연적 행사를 하나님의 명령에 의지하고 그 영광과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고, 혹 자랑 감으로 사욕적으로 하게 하려하는 시험이다. 고금에 이적에 권능 받은 인들이 이적에 시험에 들었던 것이다. “마4:5~7, 11
해석
믿음의 사람들은 벌써 일을 시작할 때 신구약 성경에 딱 들어맞으면 그일 행할 때 성공 못해도 낙심 안 한다. 또 은밀 의지가 하나님께 있으매 아무리 실패를 하여도 하나님 뜻만 찾지 여기에 하나님의 뜻 모르는 데는 여기저기 밀어가면서 하나님 뜻과 섭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면 의심 없이 실패나 성공이나 낙심 않고 믿고 나가야 한다.
(3) “예수님 가라사대 또 기록하였으되 주 너희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하시니라”
① 또 기록되었으되
또 기록되었으되 라는 말씀을 주의하여야 한다. 성경은 단편적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고 부분을 전체에 비추워 보아 그 바른 뜻을 취하여야 한다. 그러나 성경을 한 부분만 오해해서 가르치면 마귀가 기뻐한다. 예수님은 성경에 한 부분을 보시고 이것을 또 기록하였으되의 부분 곧 다른 부분의 참조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귀가 성경가지고 꾀였으니 잘못된 해석은 큰 이단이다.
② 주 너희 하나님을(창조주)
a. 너희 주여 또 하나님이니 그에게 대하여 자주장과 독단의 행위는 할 수 없고 순종할 뿐이요
b. 하나님 뜻 아닌 일을 시작하여놓고 하나님께 도우라는 간 구나 명령이나 할지라도 도움을 얻지 못할 뿐
c. 은혜와 도움을 기도하여 받는 일이 있는 그것조차도 당신이 주권적 의지로 시은함이요 또 求得함도, 주권적 의지로 계약해 놓은 그 법에 순종 기도의 응답인 것이다. ∴ 그도 순종뿐이요 하나님께 명령이나 자행에 협조에 하나님으로 상대한 인간으로는 아닌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인이니 피조물이 순종했지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순종한 것 없고 하나님 독단이 시작했지 피조물이 시켜서 한일이 어디 있더냐. 또 하나님 뜻 아닌 일을 하여놓고 이것도 와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
“주 너희 하나님을”-창조주가 피조물을 부리지 어찌 피조물이 창조주를 도우라고 명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은혜를 빼뜰 때 전부가 당신의 능동적으로 은혜를 빼들지 피동적으로나 순종으로 은혜 빼드는 법은 하나도 없다. 은혜는 당신이 주고 싶어 주는 것과 내가 알고 받는 것은 순종하여 받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다.
③ 시험치 말라하였나니라
신종하라 하였나니라 하는 말과 같은 말이다. 본문 시험하는 것은
a.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것을 구하는 것이 시험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구하라고, 하지 않은 것이 시험받는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이)
b. 마귀가 사람을 시험할 때 필요 없는 것을 꾀이듯이 인도 필요 없는 것으로 시험한다. 우리가 사욕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시험하는 것이다.
c. 시험은 순종의 반대이다. 시78:18-20, 믿지 않은 것이 시험이요 자기의 탐욕대로 하는 것 하나님 시험하는 것이다. 하나님 권능 믿지 않는 것이다. 일언으로 말하면 절대적으로 순종만 하여라.
결론: 둘째 시험
악마는 꾀이기를 하나님 자인 만치 자주장하라 인간에게 시위를 보이라 혈육 투(0)하라. 인간에게 보일 때 주님은 절대 순종과 시위 무용과 하나님만 신망하여라 하는 대답을 할 때에 마귀는 실패한 줄 알고, 3가지 답 중에 하나님 신망은 마귀가 방해하려고 제 3시에는 공작을 꾸몄다. 순종을 방해하는 인은 하나님을 전적 신망만 할 때 달아난다.
둘째 시험
① 하나님 뜻 아닌데 뛰여나리라 하였고 이것이 자주장이고, ② 사람들에게 시위하라 이는 모든 사람에게
③ 혈육 투쟁은 죄인 구원에 보혈의 은혜 말씀의 은혜와 성신의 은혜로 된다. 믿고 소망하는 것을 마귀는 시험하였나니 순종보다 신망이 앞선다. 반드시 마귀가 방해하는 데는 귀한 것 있다.
마4:11
4) 3차 시험
한번 마귀에게 굴함으로 구원하라 하는 시험이다. 천국을 세상나라와 바꾸라는 시험이다. 현실을 초월하라(마4:8-10 눅4:5-8,) ①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라대”
a. 미래 있는 천국 영광에 소망을 현실인 세상영광으로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는 시험이다.
b. 현재의 영광이 여차히 아름다우니 이것부터 먼저 취하고 다음으로 천국을 취하라는 유혹이다. 또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 이만하여도 만족지 않으냐 하는 유혹이다. 오늘도 신자에게는 이와 같은 마귀에 꾀임에 있고 또 꾀이고 있는 일이 많다.
② “가라대 만일 내게 업드려 절하면 이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인생이 범죄한 후로부터 만물은 저주아래 있게 되였고 마귀의 권세 아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주권적으로 주인공이면서 사탄에게 일단 위임을 시키는 것이다.
a. 만일이라고 함은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미술이며 또 사람들은 언제나 한번 실수 한번 범죄는 경한 줄 아는 고로 아담도 꾀였다. 한번 같은 것은 별 큰일이 아니니 마귀에게 한번 순종만 하고 굴복하고 한번 양보만 하면 천하를 얻는 대 수입이 있다고 하였다.
b. 1차 2차 시험까지는 물질을 주인으로 둘째는 자아를 주인으로 제3자같이 꾀이던지 최후는 할 수 없어 물질주의와 자아주의에 주인 되는 사탄이 나타나 굴하라고 한다. 실상은 1차 2차 시험도 마귀에게 순종하도록 유혹하였던 것이다. 물질주와 자아주는 마귀의 종도 못되고 종의 종된 천한 자이다. 물질과 자기를 초월하고도 마귀 종도 될 수 있다. 유일신에만 복종 치 않은 종교는 다 마귀의 종교이다. 기독교에도 사이비 이단 종교들이 많다(한번 양보하면 일어나기 어렵다). 신사참배에 사죄와 승리 두 가지가 있나니 그 시에는 굴복하였으나 다시 들어가서 회개하는 자는 승리이다. 어떠한 범죄라도 그 범죄한 것을 이제라도 범죄 할 수 있고 범죄 안하고도 이길 수 있고 할 때 회개하고 이기면 과거에 범죄 한 것 이길 수 있다. (마귀는 1차에는 물질 보내고 2차에는 인간 보내고 3차에는 마귀가 맞다. 1차 물질로 구원하라고 했고 2차는 전력으로 구원해라 하고 3차에는 마귀로 구원하라고 했다. 이제는 그 시기가 지나면 회개는 되였지만 승리는 안 된다. 그러니 그 시기 놓치기 전에 회개할 것 우리가 어떤 죄악이든지 다시 지을 수 없는 죄를 회개하면 승리가 된다. 또 다시 지을 수 없는 죄짓고 회개하면 회만 되니 사함만 받지 승리는 안 된다.
c. 하나님 버리고 저를 믿으면 멀리 바라보는 것 보다. 현재 보이는 것 주겠노라 하는 유혹이다.
d. 금일 성도도 보이지 않는 것 천국 위해 수고와 소망하는 것 보다. 보이는 세상 행복이 낫지 않으냐고 마귀는 꾀인다. 보이지 않은 천국보다. 보이는 세상이 우리마음에 관심 있게 되는 것을 먼저마귀가 주장되는 것과 부패성의 결과이다. 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고 의지하는 것 보다. 보이는 모든 피조물들 곧 이 세상 권세를 믿고 의지함이 더욱 확실하고 든든치 아니하냐고 이렇게 보이고 생각나게 하는 것은 또 마귀의 시험인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세력과 이세상것은 불구하고 그 나라와 그 의만 구하는 자에게 는 마귀가 고비를 장치 못한다.
마4:9-11
③ “사탄아 물러가라”
a. 상종하시지 아니하심.
이 현 세상과 보이는 권세를 신의망 하라는 그 유혹에는 상종치도 아니했다.
상종하지 아니한 것은 이 세상 권세를 신의망 하라는 까닭이다. 보이는 권세는 마귀가 내게 절하라는 말이다. 범죄 한 이후에 인간들은 이 피조물에게.
b. 3번 승리하시고는 명하실 때에 3패한 마귀는 꼼짝 못하고 복종한다. 물러가라 명함은 승리 후 첫 호령이다. 이제야 그놈은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물질 초월 자아 초월 현실 초월 하고 나니 마귀는 꼼짝 못하고 물러간다.
c. 고후13:5,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믿음을 확증하라 하심과 같이 각자는 이 세상일은 믿고 신망하면서도 스스로 속아 하나님과 천국만 신망하는 줄로 속기 쉽다. 시험하고 확증하여야할 것이다.
-천국만 소망은 별세 곧 죽음이 즐거워야 확증되고
-하나님만 믿는 믿음은 환경과 피조물의 세력에 동하지 않아야 한다. 동요됨은 벌써 피조물을 의지한 증거요 하나님만 신의 하였다면 하나님이 부동하니 그도 부동일 것이다.
④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섬기라” 하였다.
a. 하나님께 受 不受가 문제가 아니고
b. 하나님 그에게만 영광 돌리고 그만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고 그만 위하여 생사간에 존재한 것이다 하신 때 사단은 다시 유혹할 도리도 찾지 못하였다. 사탄을 최고로 이기는 방법은 이해든 불이해간에 생사간에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 당신만 믿는 것이 제일이다. 일생을 병신이면 일생 강하면 일평생 도덕이면, 일평생 멸시천대 억울하고 일평생 종노릇이면 일평생 옥중이면 일평생 맞고 찍기고 포악에 잔인 주님이라도 주님 주신 십자가이니 그대로 무언중에 알아 가며 그 중에 인간으로 측량 못할 일을 하늘(00)의 호흡으로 숨쉬고 그리스도의 위로와 사귐으로 갈증을 면하고 소망만 배불리는 것이 최고봉이다. 레바논 산과 사자 굴과 표범 산에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걸음 입니다(아3:7절 참조). 다만 자기의 생사 전부는 주인 영광으로만 있나니라(인간이었지 되던지 하나님의 영광 주의 그만 의지하고 그가 무엇으로 채우던지 하늘에 호흡으로 숨 쉬고 말은 땅에 이치로 해석을 하니 도무지 갑갑해 못 견디겠는데 하늘에 이치는 해석하니 숨이 잘 쉬인다는 말 만족은 예수님 한 분으로서만
5) 완전 승리
① 사탄은 물려가고
② 천사는 와서 수종 들더라
③ 사탄의 첫 전터는 성도의 심령이니 여기서 승, 마귀 축출하면
④ 1차 패전한 마귀는 성도의 생활 환경과 경우로 전터 삼고, 여기서 성도가 이기면 쫓겨나 이웃과 만물 속에서 나에게 화살을 겨누고 내가 패하면 겨누고 또 심령에 주입한다.
⑤ 물질 힘 피조물의 힘 사탄의 힘에 이긴 자에게는 고금을 막론하고 사단을 물리쳐 간다. 천사는 수종든다.
왕상19:5-7 왕하6:16-19. 도단성 불병거로 엘리사를 지켰고 행12:7 주의 사자가 베드로를 옥중에서 해방시켰고 계시록에는 모든 복음 운동에 천사들이 간접적인 협조를 하였다.
마4:10 (본문 해석이 아니고 요리 중 하나다.)
성경관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우리는 성경관을 바로 가져야 한다.
1. 성경의 권위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의 뜻은 신구약 66권의 전부는 하나님의 입에 기운(영감 된 말씀)이라는 뜻이니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인 성경이라 하는 말씀이다(시편33:1참조). 벧후1:19-22 우리에게 더욱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화광불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하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변화산에서 눈으로 본 것보다. 더욱 확실한 예언이니 주 재림하시기까지 이 말씀에 주의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두운데 등불 빛은 어두운 곳에 정 반대편 밝은 빛이 비취인 것과 같이 범죄한 인간에게 이 신구약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아니하실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마5:18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 다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 율법이라고 하면 모세의 오경만이 아니고 전 성경을 가르침이니 시82:6의 너희는 신들이며 하신 말씀을 요10:34-35에 인용하시면서 율법에 기록하였으되 라고 하였다. 이것은 시편을 율법이라고 하셨으니 마5:18을 법에 일점일획이라는 그 말은 전 성경은 문자 문자마다 영감으로 되어 정확무오하며 매 획마다 권위 있는 것을 가리킴이다. ∴ 성경은 萬全영감인 권위를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축자영감을 말하는 것이다(성경은 독자적인 권위성이 있다. 성경을 바로 믿는 것은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한다. 성경말씀대로 하는 자를 누가 방해하지 못하고 깨트리지 못한다.),
“사도들은”
(1) 복음의 사상들은 성경을 정당시하며 거기에 근거하였고 고전15:4 행,8:35, 17:3, 26:22, 롬1:17, 3:4, 10 4:17 갈3:10 밷전1:16 이 절수들을 참고해보면 전부 사도들은 성경에 근거했다.
(2) 그들의 생활 원리를 성경에 비추워 설명했다. 롬8:36, 11:8 (3) 성경을 영감의 말씀이라고 했다. 히3:7성경은 성신에 감동함이 아니고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4) 성경을 인용할 때에 그가 말씀하시되 라고 하는 것이다.
히1:5 그러면 성경말씀 인용하면 아무데 가령 시편 몇 장에 말씀했으되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되 하였으니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5) 성경 인용할 때 말씀한 이를 말하지 아니하고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말함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고 하는 말씀이다. 롬15:10 고전6:16 갈3:10 엡4:18
2. 원시교회 성경관은 어떠하뇨?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전 성경은 축어적 영감교리를 가졌다. 이 사실은 정통교리를 그대로 받지 아니하는 학자들도 부인하지를 못했다. 혹은 사람이 말하기를 축자영감이 몇 가지만 달리 해석하면 된다고 하나 그는 모르는 말이다. 전 성경을 예수님이 하나로 보고 성경에 일렀으되라고 하였다.
3. 교부들도
(교부라 말은 교도들의 신앙사상이 정통이면서 교회건설의 유명한 인물들을 가리켜 교부라 함)
속사도교부라 함은 사도 다음에 계대한 자를 속사도 교부라 하고 그 속사도 다음 계대자 되는 것 교부 개함) 개혁주의 교회도 교부들도 다 만전영감을 믿는다. 만전영감설=모든 성경이 완전무결하게 성신으로 감동된 성경이다.
4.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합리적 증거
(1) 성경은 깊고 오묘하고 초자연적 일들이 기록되여 있으니 사람의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이니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깊고 오묘 또 초자연적이라면, 인간이 이제까지 나타나지 아니할 것을 말한 것이다.
(2) 66권 성경은 1600년 간 36인 절솔(00)이요 서로 통하지 아니하고 각이한 입장과 시대와 사상에서 기록한 계시에도 불균 하고 내용이 하나이다.
(3) 심판 축복 파괴 건설 전부를 獨團에 말씀한 것이 그대로 이루워졌으니 하나님의 말씀이요 천지를 지으신 이와 이 성경을 기록한 이는 같은 이다. ∴고등비평가들이 여기는 머리를 숙인다. 주전500년 전부터 고등비평가들이 논평하였는 고로
(4) 인간의 영혼을 살리는 것도 있다.
(5) 불변과 정확무오를 보아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 불란서 과학자회에서 1862년에 성경 중 반대되는 과학적 사실들이 51권(0000)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성경이 옳고 잘못 되였다고 할 자를
(6) 성경도덕도 인간으로는 상상 못할 높은 교훈이 기록 되여 있다.
(7) 인간에 책 중에서 빼여서 기록한 것이 없다.
5. 성경의 독자적 권위
행20:32 4:4,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고
요6:23 영과 생명이 되고
벧전1:23 우리를 중생케 한 씨, 25절 세세토록 있는 말씀
시편33:6-9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성경은 이렇게 권위가 있다.
마4:12-17
제3부 갈릴리 전도
갈릴리 가버나움에 거하심
마4:12-17. 막1:4-15, 요1:35-36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시기 전에 유대에서 개인 전도를 하신 일이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없다. 이유는 공관복음의 전도는 갈릴리 전도를 예수님 의 성령의 역사. 聖力의 인격적 출발로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종교적으로 교만한 유대인보다. 겸손한 이방인의 갈릴리를 더욱 돌아보신 것이다.
해석
12절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를 물러가셨다가”
(1) 예수님의 수세 당시 11개월 후에 된 일이니 주후 27년 12월 28년 4월경에 된 일이다.
(2) 분봉왕 헤롯이 제수 취함을 책망하다가 투옥된 것이다. 눅3:15-19.
(3) 순교는 대소 죄간 다 좋고 일반이다. 적은 죄까지 용납 지 아니함으로 싸우는 것이 더욱 더 좋다.
※혹이 말하기를 세례 요한이가 이방인들은 아내를 3천명이나 가지고 있는데 자기 제수 얻은 것에 간섭하여 가치 없는 죽음을 할까하는 성질도 가지지만 이는 사소한 죄를 목 베이기까지 하면서 지적한 사람이다. ∴앞으로 우리가 시험 당할 때 너 예수님 안 믿는다고 하면 죽인다 하는 것에는 생명을 내놓아도 지극히 사소한일에는 예사로히 여기기 쉽다. 그러나 지극히 사소한 죄에도 용납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는 똑똑한 진리로 시험하다가 나중에는 사이비한 것으로 시험하니 이 사소한 것이야 하다가 실패 당한다. 예수님과 동행은 단절과 견집에서 일을 끊고 나가메 굳게 잡아 나가야한다. 최고로 끊기 어려운 자리까지 나가야한다.
(4) 예수님께서 갈릴리 전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전에도 하셨다.
(5) 갈릴리 전도에 관하여 마태복음은 전체의 반 4:12, 9:1절까지 14장을 소비하고 있고, 마가복음은 전체의 반 1:14, 10:1까지8장을 소비하고 있고, 누가복음 조금 적으나 4:14-9, 51절을 소비하였으나 요한복음은 거의 승낙하였다.
(6)예수님이 피하심에 대하여
① 위험을 피하심으로
② 안일로
③ 비겁으로
④ 무협동의 냉정으로도 보여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하여 물러감으로
물러가신 이유
-동지의 동정보다 진리로 하나님의 뜻(마4:14)대로만 동정하시는 예수님이시다. 가시는 것이 예언 성취였다. 이 마4:14절은 이사야 선지에 예언 성취다. ∴동지가 귀한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귀하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박해도 안 당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불필요하고 박해를 받을만한 때가 아닌 고난은 받지 아니하는 것으로 고행주의가 아닌 것을 보겠다. 하나님의 뜻 아닌 배고픔은 고생 받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 아닌 배고픔은 고생 받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 아닌 고생 당하는 것은 고행주의니 이단이다. 기독자는 하나님 뜻대로 그 계명 지키면서 최소한도로 하나님의 계명 어기는 죄에 빠지는 데는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죄 되지 않은 입장이라면 충성하여야 한다(계명 아닌 순종).
-하나님의 뜻 아닌 것은 복음 방해인 고로 피하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진리 아닌 충돌은 도리어 손해이다.
-옥중 요한이 보낸 사람 문답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또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 있도다.” 하신 대답은 순전히 지상에서는 천부의 뜻 복음 전파와 미래적으로는 승리하는 하늘에 복만 주장하시니
※우리는 땅위에 취미가 하나님 뜻 이루는 것이 유일의 취미가 되여저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워지는 것이 자기의 유일의 소원이다. 이 말 한마디들을 때 성도의 위로가 되며 성화가 되여져야 한다. 이 신앙 하나만 가지면 서양에서 이루워지던지 하나님의 뜻만 이루면 기뻐하는 것은 그 일에 나도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선지자 대접한 것이 내가 대접 못해서 기뻐하면 동참.
a. 땅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워지는 것으로 자기의 지상의 기쁨이 되여야 할 것. 그러면 통일될 때 그 복이 내 복된다. 우리에게 제일 큰 복 받는 것은 타 교회 부흥되는 것 보다 우리 교회 부흥만 타구역보다 내 구역만 부흥되는 것을 원하는 자는 복이 적은 것이다.
∴서양에서 큰 일한 것을 내가한 것같이 기뻐하면 그는 그 복에 동참한다.
∴오늘밤의 큰 복 덩어리 하나 마련했다.
b. 실족지 않은 자 복이 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실족지 않았다. 땅위에 하나님의 뜻 이뤄지는 것 누구를 통해 이루워 주든지 제일 기뻐하는 자 유일의 복이다. 마4:13, 13절 스블론과 납 달리
-이 성은 유대 지방에 있어 열국의 침략으로 전쟁의 침해를 많이 입었다.
-예루살렘에서 먼 곳이라 문화가 많이 뒤떨어졌고
-이방인으로 혼잡 된 곳이다.
-납달리 지방이 복음 전도에 발상지가 된 것은 야곱의 예언이 응한 것이다. 창49:21에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 같음이여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리로다.”라고 하였다.
해석
창49:에 보면 야곱이 12 자제를 놓고 예언한 것이 이루워진 곳이다.
“놓인 암사슴은” 복음을 가지고 험한 길에 가는 일에 대한 비유이다.
“아름다운 소리를” 복음을 가리킨 것이다(사52:7).
⑤ 이 예언은 1700-1800년 전에 야곱이 예언한 것을 기록을 3,400년 후(주전 1400년)에 모세가 기록하였다. 본 절에서도 계시기관은 여럿이나 원 계시자는 하나님 한 분이시니 표시되고 있다.
⑥ 또 예수님께서 마5:18절과 눅16:17절에 예언 필성을 말씀하신 그대로 여기서도 예언 성취를 볼 수 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자기의 비행에 대하여 떨리고 또 말씀 순종에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신 기록이 납달리에서 첫 전도가 시작되였다. 우리는 무심히 보나 하나님께서는 납달리에서부터 복음 전파 될 것을 주전 1400년에 야곱이 납달리라는 자에게 손을 얹고 축복하기를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 같다고 하였는데 그 다음 예수님 땅위에 오시여서 복음 증거를 납달리에서가진 핍박이 있어도 험한 납달리에서부터 복음 전도가 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알 것은 하나님은 한번 선 파하면 이루워지지 않는 법이 없으니 그대로 이루워진다. 하나님의 사람 야곱의 일을 모세를 통하여서 몇백 년 후에 기록하게 하고 몇천 년 후에 예수님을 통하여서 몇백 년 후에 기록하게 하고 몇천 년 후에 예수님을 통하여 실시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포하고 그대로 실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님은 한번 말씀했으면 천인만인이 어떠타 해도 동요되지 않는다. 우리도 이 성경말씀에 말한 것이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조금도 동요될 것 없이 믿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기 몇 번 계시를 나타냈나 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계시니
a. 야곱을 통해서
b. 모세에게 기록으로
c. 예수님의 전도시 행함으로 예언 완성이 된다. 과거는 형식 그 다음은 문서 그 다음은 실행으로 되어져 있는 것이다.
가버나움
a. 이 땅은 갈릴리 호수서 북편에 있었던 공업도시였다.
b. 지금은 그 위치도 찾기 어렵다고 한다.
c. 이는 가버나움의 불신앙을 예수님이 꾸짖은 그대로 이루워 진 것이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 행하였으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노니 소돔 땅이 견디기 쉬우리라. 마11:23~24
d. 여기서 우리는 배울 것이 몇 가지 있다.
시공세계의 존속도 하나님의 말씀의 합치됨에 있는 원리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지금은 그 존적까지 어데로 갈지 모른다고 한다. 이것 보니 망한 지가 오래 되였다. ∴우리는 여기서 배울 것이 무엇이요.
e. 또 진리에 불합치 된 것은 한번 진리로 경고시키기 위하여 있는 이유도 볼 수 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셨는데 한번 기회를 주시어서도 안 들으니 진멸하였다. 너희가 하나님에게 복종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여부를 알고 난 다음에 복종하지 않으면 멸망시킨다.
f. 하나님이 권고하실 때에 불성 범죄의 것은 물 인을 막론하고 조만 세상 멸망과 우 하나님의 공의 심판 결정의 형벌이 있는 이유를 보인다. 이는 범죄 한 인생이 첫 죽음, 둘째 죽음 있는 교리와 동일한 것이다.
※예수님 말씀하신 것이 가버나움아 네게 행한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심판 때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악한 고로 정죄심판이 결정된 것이다.
g. 우리는 이 예언성취에서 오늘 사람이 무시하는 성경말씀 그대로 최후에는 통일될 때에 인생들은 다 놀랠 것이다. 의인들도 죄인들도 다 놀랠 것이다. 의인들도 죄인들도 다 놀랠 것이다. 마25:37-44. 거기 보니 의인들도 죄인들도 다 놀랬다. 전체는 말씀 하나도 이루워진다. 천지도 없앨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한 획도 없앨 수 없다. 천지는 파괴도 건설도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이 말씀은 획 하나도 없앨 수 없는 권위 있는 말씀이요 불변의 말씀이다. 우리가 은혜의 축복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변의 말씀으로 성취되심이 큰 은혜이다. 만일 이 말씀이 틀리고 어 누리가 있다고 하면 누구를 의지하며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그러나 이 반석같이 든든한 이 말씀은 아름답다. ∴이 말씀에서 있다면 있는 것으로 산다. 사는 것으로 복되리라 복된 것으로 믿는 것이 복자라. ∴이 말씀의 신실 성 권위성 아는 것 만치 믿는다. 이 말씀은 하나도 여지없이 이루어 나간다.
마4:14-17. 회개에 대해서.
회개는 무엇인가. 빨트는 말하기를 회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최고의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초보의 역사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아무런 자의식이 없는 기계적인 것을 말한다. 우카이프 박사는 말하기를 구약의 회개라는 원어(수비)라는 말은 70번은 사람의 행위로 기록했고 16번만 하나님의 행위를 기록 되였으니 회개에는 사람에게 대한 것이 많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것인가. 회개는 유기적과 같다.
∴회개케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요 그 회개케 하시는 은혜를 받아서 회개하는 책임은 나에게 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전체 회개역사를 자기에게는 노력이 없이 기계적으로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한번만 우리에게 감동과 능력을 주시면 한번 받은 은혜와 능력으로만 생각해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에게 주는 시식과 선천적인 의식으로 내가 스스로 깨닫게 하시는 것 인고로 외부적으로 볼 때에는 자기혼자 회개하는 것같이 보이고 또 그 회개의 원동력은 순전한 은혜로 되여지는 것이다. 엡2:1에 보면 우리에게는 의가 터럭만치도 없는 것을 보인다. ∴회개는 자기의 노력을 통하여 하는 것 같이 보여진다. ∴우리는 그런 은혜가 없던 것이 하여지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내가 받은 은혜를 배반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회개를 하는 것이 내가 받은 은혜를 보장하는 것이요 감당하는 것이다. ∴먼저 회개에는 지식적으로 그 불의함과 의로움에 양면을 발견하여야 하고
① 자기와 하나님을 발견하고
② 하나님의 행위와 자기의 행위 발견하고
③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와 자기의 계획과 목적을 발견하여함을 올바른 지식과 비판을 가져 자기의 계획과 목적보다 하나님의 것은 참되고 올바른 것을 발견한 자 되야 한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감정이 필요하다. 지식으로 깨달은 것이 마음으로 탄식이 되고 범죄 한 것이 미워서 못 견딜 수 있게 되여야 한다.
∴이런 순서로 지식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탄식하고 감정으로 원통히 여기며
∴우리는 가슴치며 마음을 찢는 고통 가져야한다. 벌써 감정에서 지식에서 회개를 가지고 감정에서 회개 가져야한다. 회는 자기의 지식적으로 잘못된 것을 알고 개는 이것은 옳다 하고 우 자기 감정으로 회개 이러야 한다. 자기 감정에서 어느 것은 미워하고 어느 것은 기뻐하며 나를 미워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서며 자기는 던져버리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가운데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이 진로가 빨라야 한다. 어떤 이는 회는 빨리 하고 개는 오래 동안 안 하는 이가 있다. 회도 개도 빨리 해야한다. 그것이 분립 될 수 없다. 그 다음은 의지로 나가야한다. 감정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1년이고 2년이고 의지의 그릇에 담겨있어야 한다. 이렇든 자이니 위험하고 이렇든 자이니 더럽고 위험천만한 자라 동시에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깨끗해졌고 살았고 서있는 그 행복을 기억하고 있어야한다. 바 울은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하노라 나로 충성되게 한 은혜를 감사하여 자기의 과거는 이렇든 자인 것을 회는 끊지 않고 과거의 회를 잃지 않은 자리에서 도로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함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하여 내가 이제는 회와 긍휼로서 합하여 새 출발로 나가서 개된 데서 교만하지 아니하고 회와 개와 합작하여 감사함으로 걸어간 것이 바울의 신앙이다.
∴ 17- 우리들의 긍휼과 사랑이 넘치도록 주셨다고 하셨다.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먼저 믿게 하시고 은혜주시고 열매 맺게 하시고 모든 의의 원천이 되는 그 원천으로서 얼마든지 모든 인에게 수도 철관으로 줄 수 있는 것 말했다. ∴우리는 의지에 그릇에 담아놓고 현재라는 구멍으로 통과시켜야 한다. 우리는 과거는 따로 두고 미래도 따로 두나 회와 개도 따로 두어 회는 과거의 개는 미래에 두고서 희망하면 아니 된다. ∴언제든지 회개는 행으로 행함은 현재의 것이다. ㄴ. 회개는 현재를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 기억하고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기본적 회개는 이미 하였지만 성화 적 회개는 평생 하여야한다.
마4:17
회개는 자기에게 속한 것과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찾아서 자기에게 불의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로운 것을 바꾸워 가지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한말로 말하면 그 목적과 방편이 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은 소극적 면과 적극적 면이 있으니 하나님에게 대적이 되여 있는 그것을 꾸어버리고 있는 그것이 소극적의 회개요 하나님과 합치되어 있는 것이 적극적 회개이다. 예. 하나님은 흰데 나는 검으니 이것은 검은 것을 끄는 것이 소극적 회개요 하나님의 흰 것같이 내가 히 여 지려고 하는 것이 적극적 회개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다른 점을 찾는 것이 회개의 지식이요 하나님과 같은 점을 찾는 것이 회개의 지식이다. 진리와 성신으로 중생 되지 않은 사람과 중생 된 인은 구별 있다. 중생 되지 아니한 인은 그 깊은 속까지다. 부패하여 있기 때문에 불의 한 것으로도(하나님 뜻에 만족지 아니한)기쁨을 누리고 살 수 있다. 예, 중생 되지 아니한 사람은 돈만 가지고도 권세만 가지고도 어느 동안은 인간적 행락 가지고 자기 깊은 속까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중생된 사람은 아주 다른 것은 진리와 성령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과 자기와 가까워지는 것으로 평강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과 자기와 딱 들어맞을 때 그 속에 기쁨과 평강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불안과 두려움이 생겨진다. 어떠한 높은 자리에 나가도 두려움만 생긴다. 중생 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 되는 일과자기의 높아지는 것으로 평강이 온다. 그러나 중생된 자는 자기에게 손해 가고 자기가 낮아지는 것을 원하고 또 주만이 높아지고 주만이 유익 되게 하는 것이 중생 된 자의 본성이다. 우리가 불의 한 세상 것으로 높아지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만으로 행하여 의로운 일로서 높아지는 것도 이것이 당연하지만 외부에는 기뻐도 내부에는 자기 심령 속에 눌림을 받는다. 의로운 일을 하고도 주로 거기서 그 의로 높아지고 자기는 낮아질 때 깊은 속에서 평강이 온다. ∴고후11:23에 바울이 저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다.
19절에 너희는 지혜로운 자들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쁨으로 용납하느냐.
30절에 또 말하기를 내가 부득불 자랑할건데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주 어리석음이요 정신없는 일이요 그는 아주 미련한 일이 되여지는 것을 바울은 말했다. ∴자기의 장점을 생각하여 높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자기에게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지혜 있는 일이 되겠다. 이것은 바울이 체험에서 증거한 말이다. 그럼으로 옳은 일을 하고도 자기를 유익하게 하며 높일 려 는 그 심령 속에 평강이 없어지고 불의한 일을 할 때와 의로운 일을 할 때 자기를 높이고 평강 있는 것이 중생 되지 않은 자들이니 왜 어떨 때는 평강이고 어떨 때는 불안일까? 중생 된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닮아서 중생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 꼬목을 들기 어려우나 그 원리를 들어서 왜 어떤 때는 평강이 오고 어떤 때는 불안이 오느냐 이는 하나님의 진리로서 하나님과 배치되는 것은 흘러버리는 그 원리에서 이두가지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 세밀한 것은 자기에 심령으로는 확실히 지적을 하여 어떤 때는 그 혼이 불안을 느끼고 어떤 때는 평강을 느낀다. ∴우리의 지식보다 영혼은 영리하다. ∴내 지식이 평가하지 못하나 내 영혼은 이해한다. ∴내 영혼이 평안한 때는 하나님과 나와 합해지는 자기를 위함이고 영혼 평안은 하나님을 위할 때이다. ∴중생 되지 않은 영혼은 자기를 삣고 헐고도 평안하고 중생 된 자는 자기를 높이고도 평안한때도 있다. ∴이 중생 된 영은 순결하고 참된 것이 본성인데 우리는 너무도 뒤숭숭하여 마구잡이로 끄으러다 맞추는 고로 우리 심령은 눌린 곳에 있게 된다. ∴우리가 내 심령의 평강과 자유로 걸어가는 데 는 어데 까지냐 진리와 성령으로 합해지는데 까지 여기 나가는 데는 자기를 끊어버리고, 희생의 길로 나가는 자리까지 이 길은 죽는 길이다. 자기도 끊어버리는 자리에 나가야 중생 된 자는 기뻐 뛰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먹고 나니 자기 일을 자기가 하고 염려와 수고가 생겨졌으니 하나님의 기쁨과 평강을 다. 빼 끼 고 이제는 자기가 자기 기쁨 평강을 구하여야 되나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벗고 오라고 했다. ∴우리가 이제껏 자기가 이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중생 자는 불안 온다. 삼상7: 참조, 하나님 말고 대신 위하는 것이 무엇이뇨? 요일5: 끝에 여자들아 너희자신을 지켜 우상을 면하라 ∴자기를 이기고 나오면 내가 이기게 하겠다. ∴제일 어리석은 것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하여 노고도 그 옳은 일을 한 것 말할 때는 정당히 말하되 자기를 위함이냐 하나님을 위함이냐 이제 하나님을 위함이면 그 영혼이 뛰놀고 자기를 위함이면 그 영혼은 저 밑에 떨어진다. 또 이 영혼은 즉시 하나님에게 매를 맞는다. 내 중생 된 생명에게 하나님은 욕을 하시니 내 심령 속에서는 불안을 가지게 된다. 역하7:13. 그 길을 돌아설 때 비로소 영혼이 되였고 제할 수 있다. 시34:18 마음이 상한 자도 가까이 하시고 구원하신다. 그 말은 소극적 회개이다. 자기가 범죄 하여 하나님과 다른 것 하나님은 흰데 자기는 검었다. 자기의 더러운 것 상한 것 찾아 가지고 나설 때에 하나님은 가까이 하신다. 시54:10도 그 말씀이다. 147:3도 여전히 그러하다. 상한 것을 가지고 온 자에게 고쳐주신다. ∴한말로 결론을 지을라고 하면 자기에게 하나님과 대립되는 그 더러운 것 그것을 하나씩 찾아서 자기의 가치를 떨어트려 자기 가치를 바로 평가하여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 계명 순종하기 위해 자기를 흘러버리는 것이 중생 된 자가 자유 할 수 있다. 말씀이다. ∴중생된 우리는 나를 북돋우고 호위하고 높이는 것이 평강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들어내고 하나님만이 높이는 것이 우리의 평강이다. 하나님만이 자존자인데 하나님만이 높이는 것이 우리의 평강이다. 하나님만이 자존 자인데 하나님 한 분 외 하나님과 대립될 나는 다른 것이 설라는데 해와가 죽었나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중에 서지고 그밖에 섯는 것이 하나님의 일원론인데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개립으로 설라다가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했다. ∴모든 것은 돌아가는 것이다. 일원론으로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중생 된 자는 하나님께 배치되는 것은 깨트리고 나도 헐고 나야 평강이 온다. 하나님 뜻대로 세워야 평강이 온다. ∴여기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자기를 심사하여 자기를 헐고 깨트리고 나야 평안 오니 그 속에 하나님의 진리로만이 기쁨 온다. 마치 계란의 생명은 보이지 않으니 그 보이지 않은 생명에게 그 계란이 완전히 삼키어야 병아리가 된다.
∴0(?)볼 수 없는 나, 즉 중생된 자에게 완전히 삼키워야, 거기서 평강이 온다. ∴ 한 말로 말하면 불신자는 저 잘난 재미로 살고 신자는 저 못난 재미로 산다. 불신자는 어쨋건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만 평강인데 신자는 자기를 헐고 깍고 세우는데 평강이 온다. 악령은 어떤 대상에도 그 사이에 끼우나니 자기가 어떻게하여 볼까 할 때에는 악령에 사로 잡히는 것이다. 악령에 감화는 먼저 기쁘고 후에 불안이요 현재 속한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먼저 불안하고 나중에 기쁘고 영원에 속했다. 말씀이다.∴옳은 일을 하고도 그 심령이 하나님을 높이지 않았으면 그 심령은 불안 온다. 심지어 죄를 지어놓고도 주의 의로 맞추려 할 때는 평강 온다. 불의 한 것을 말씀하여도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면 평강 오니 이 자기 속에 상한심령 부패한 심령을 캐낼 때에 평강 온다. 말씀이다. ∴성령은 언제나 나와 같이 계시니 언제나 신자는 자기 헐어버리는데서 평강이 온다. ∴단둘이 만나는데도 어찌하여 나는 낮아지고 헐어지고 하나님만이 유익하고 높아질까 하는 이것이 평강 오는 것이다. 이제 자기를 한번 헐어 봅시다. 언제든지 저 잘난 자로 살지 말고 내가 얼마나 간교하고 독하고 이기주의자이고 저만 높이는 자인지 발견하라. 자기가 자기를 바로 볼 때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이 겸손한 자이지 공연히 자기를 의로 하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겸손에 껍데기 가지고 나오는 자는 교만한자이다. 이제 자기를 들고 나오면 얼마나 자랑할 것이 있는지 내 영혼이 머리를 들지 못하니 세상 애착을 끊지 못하고 하나님께 마음이 없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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