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같이 빛나리 - 제14,15,16장
제14장
생과 사의 길목
1. 이동 교회
교역자 수양회가 끝나는 7월 27일 새벽이었다.
이성옥 전도사는 초조했다. 교회와 집안 일이 염려되었다. 시간만 연장하며 앉아 있는 것은 별 유익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다. 추국원, 정우덕, 하종숙 전도사들도 나와 있었다. 새벽기도회를 끝내고 갔으면 좋겠지만 그런 여유가 생기지를 않아 모두들 길을 떠났다.
이성옥 전도사는 그의 시무 교회 합천읍 교회를 향하여 길을 재촉하였다. 거창에서 합천까지는 백리길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솟기 전에 길을 줄여야 하겠기에 그의 걸음은 뛰는 듯 빨랐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새벽기도를 끝내고 올 것인데, 너무 급히 서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일기도 하였다.
주 목사의 말씀이 생각났다.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피난을 간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요. 난 중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위해서만 일해야 합니다.”
뜨거운 말씀입니다.
“우리 서로 어디 있든지 연락을 합시다. 그래야 피차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서로 기도로서 도웁시다. 기도는 최상의 도우는 방법입니다.”
주 목사의 무거운 그 말씀이 이 전도사의 가슴에 뿌듯이 안겨왔다.
나올 때,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살며시 나온 것이 썰물 뒤의 갯벌처럼 허전해 왔다.
이 전도사는 복잡한 마음을 정돈하면서 부지런히 걸었다. 권변재를 오를 때엔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시장기를 느꼈다. 권변재를 넘어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움찔하였다.
강 기슭에 진녹색 복장의 괴뢰군들이 쫙 깔려 있는 것이었다.
“늦었구나”
어떻게 해 볼 묘안이 나오지를 않았다.
“주님! 저를 보호하여 주소서!”
기도 밖에 딴 길이 없었다.
그는 기도를 올리면서 줄곧 아래로 치달렸다. 교량을 통과하는데도 그들은 부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신에 흥건히 땀이 배어왔다. 주께서 그를 지켜 주신 것이다.
그는 무사히 한 고비를 넘기고 줄곧 신작로 길을 걸었다. 허리를 펴고 활발하게 걸었다. 합천으로 무사히 들어섰다. 교회에 들어가니 가족들과 교인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교인들은 이 전도사의 모습을 보자 반가워 소리쳤다.
“아이구 조사님, 살아오셨군요!”
“그래 어떻게 지냈습니까?”“우리 조사님 돌아가셨는 줄 알았어예!”
여집사 한 분이 눈믈을 글썽이며 말을 씹었다.
“교인들은 다 무사합니까?”
“피난 많이 갔습니다.”
그날 밤이었다. 여집사 두 분과 남집사 한 분이 찾아와서,
“남은 제직들은 우리 뿐입니다. 우리도 피난 가입시더!”
이 전도사의 머리에 문득 주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피난을 간다고 안전한 것도 아니고 난 중에 있다고 반드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전도사는 순간,
“나는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하고 힘을 주어 말했다.
“교인이 없는 교회를 지키면 무엇합니꺼? 교인들이 다 피난간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 아닙니까? 내일 모두 피난가라고 순경이 통고해 왔심더. 조사님도 같이 가입시더.”
“그래도 남을 사람은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지키고 있다가 인민군 오면 순교를 하지요.”
“참 조사님도 어리석은 소리를 하시네. 인민군이 와서 죽이면 순교가 되지만, 미군이 폭격해서 죽어도 순교가 됩니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억지로 죽음을 택할 필요는 없다.
“날이 밝으면 인민군이 쳐들어옵니다. 난 오다가 인민군을 보았습니다.”
이 전도사는 집사들에게 오면서 목격한 인민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다음 날 새벽기도회 시간을 한 시간 당겨 가졌다. 교인들은 피난 준비를 하여 교회당으로 나왔다.
교회당은 군청 옆에 있다. 군청을 순경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는데, 아침이 되자 순경이 뛰어다니며 피난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이 전도사는 하루 사이지만 주 목사님 생각이 간절하였다. 거창이 합천보다 먼저 당할 것만 같았다. 주 목사님의 신변이 염려스러웠다.
그때, 거창에서 부산으로 파난가는 거창읍 교회 신자가 들어왔다. 이 전도사도 주 목사님 소식을 알게됨이 무엇보다 반가워서,
“주 목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다급히 물었다.
“교회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전도사는 교인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교인은 어린아이까지 합쳐서 모두 열 아홉명이었다. 피난민들의 행렬이 길을 메웠다. 교인들을 거느리고 떠나는 이 전도사의 일행은 이동교회였다.
초계까지 갔다. 합천과 창령의 경계선을 알리는 적포철교를 건너야 했다. 부지런히 걸었다. 사람 홍수에 밀려 길이 잘 전진되지 않았다.
적포 철교까지 무사히 왔는데, 철교를 건널 수가 없었다. 순경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건너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왔다. 7월 29일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밤을 이곳에서 지내야 했다. 인가 가까이에서 지새우게 되었다.
이성옥 전도사는 꿈을 꾸었다. 꿈에 주 목사님이 나타났다. 흰 두루막을 입고 평상시처럼 살며시 웃으신다. 무엇인가 말씀을 하시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잠을 깬 이 전도사는 허전한 자신을 느꼈다.
‘주 목사님은 이미 순교하셨구나, 나를 뒤따르라고 일러 주시나보다.’
이렇게 생각한 이 전도사는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날이 밝고 있었다. 교인들을 불러 모아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해가 돋기 전에 아침밥을 지어 먹고, 모두들 길을 떠났다. 철교를 건널 수 있었다. 강둑을 지나 얼마를 걸어갔다. 부산으로 가야 산다고 생각하고 부산쪽으로 계속 걸었다. 조그만한 교회당이 보였다. 이 전도사는 교인들을 데리고 교회로 들어갔다.
텅 빈 교회당이었다. 건평 10평 정도의 작은 교회당이었다. 여기서 밤을 지나기로 하였다. 모기가 말이 아니었다. 피난민에겐 모기가 문제 될 수 없었다.
7월 30일 날이 밝았다. 주일이었다. 주일 예배를 교회당에서 드렸다. 광야 교회 같았다. 광야 40년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였다.
나그네 길의 인생, 그러나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이 시간은 참으로 흐뭇하고 위로를 받는 시간이었다.
예배 때마다 쏟아지는 은혜, 심령들은 만족과 평안을 누렸다. 이 전도사는 그 밤에 기도하며, 내일의 행진을 위해 잠을 청했다.
다음 날 길을 떠났다. 대구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가다가 많은 위험을 겪었다.
8월 2일에는 청도 뒷산 기슭까지 왔다. 거기서 3일 밤을 민가에 방을 얻어 비교적 편하게 지냈다.
8월 4일 토요일이었다.
“내일 주일 예배만 보고서 떠나도록 합시다.”
이 전도사는 이 곳을 떠날 것을 교인들에게 말했다. 이 전도사는 밤 늦게까지 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꿈이었다. 주 목사님이 또 흰 두루막을 입고 나타나셨다.
“······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꿈을 깬 이 전도사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한참 생각하였다.
‘주 목사님이 먼저 천당가셔서 나를 오라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뜻인가?’
이 전도사는 엎드려 기도하였다. 힘이 솟아 올랐다.
8월 5일, 주일 새벽이었다. 기도회를 마치고 자유롭게 기도하는데 한 여신자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조사님, 큰일났습니다! 저 아래 새까맣게 올라옵니다.”
이 전도사는 침착하게 말했다.
“방에 들어가 기도하시오. 내가 나가서 살피고 오겠오.”
“지금 방 주인이 예수쟁이에게 방 빌려준 걸 후회하고 있어요.”
밖에 나가 보니 인민군이었다. 간밤에 주 목사님 나타나 말씀하신 것은 용기 잃지 말고 잘 싸워 승리하라는 것인 줄로 생각하였다.
그때, 인민군 네 명이 밀어닥쳤다.
“무엇하는 사람이오?”
“교회 전도사입니다.”
“모두 데리고 이리 나오시오?”
교인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괴뢰군들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죽는구나. 예수님을 담대히 전하고 죽으리라.’
이 전도사는 마음에 각오를 다지며 따라갔다. 그들은 일행을 산기슭 소나무 아래에 머물게 하였다.
그때 동리 쪽에서
“국군이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전도사는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주님,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든지, 아니면 담대히 순교할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
아래쪽에서 인민군들이 위로 올라왔다.
“전원 전투 준비!”
“골짜기를 이용하여 엎드려!”인민군들은 골짜기로 뛰었다. 이 전도사 일행에게 총질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이 전도사 일행은 삶의 긴 숨을 내쉬었다.
죽음이 눈앞까지 왔다가 사라졌다. 죽음이 목숨의 줄을 끊을려고 가위를 들었다가 그냥 도망친 것이다.
‘살았다!’
이 전도사의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피난이 필요 없음을 그때야 느꼈다.
성경 말씀이 떠 오른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46:1-3)
이 전도사는 교인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돌아섰다.
“갑시다! 피난이 필요 없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피난처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합천으로 돌아갑시다. 교회로 돌아갑시다.”
이 전도사의 말에는 힘이 솟았다. 모두들 아래로 내려왔다.
찬송이 영혼 손에서 쏟아진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게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가
마산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주경효는 6·25동란이 터지자 거창이 위험할 듯하여 아버지 주 목사님을 모시러 거창에 갔다.
“아버지, 누님 계신 마산으로 가십시다. 거창은 위험합니다. 괴뢰군들은 기독신자들을 미워하고 목사님들을 잘 죽인답니다.”
경효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괜찮다. 너나 그냥 있지, 뭘 할려고 여기까지 왔냐?”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서요.”
경효는 힐끗 아버지를 치켜보곤 시선을 내리 깔았다.
“녀석. 그래, 내가 교회를 버리고 어디로 갈상 싶더냐?”
주 목사님은 효성이 어린 아들의 얼굴은 잠시 더듬다가,
“온 길이니 동생들이나 데리고 가거라.”
속삭이듯 말했다. 경효는 아무리 아버지와 함께 가기를 졸랐지만 허사였다.
다음 날 경효는 경세, 경은이 조카 정신이를 데리고 거창을 떠났다.
삼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길에서 전투원들에게 붙들렸다.
전투대장이,
“웬 아이들이냐?”
하고 노기띤 어조로 물었다.
“마산으로 피난 갑니다.”
경효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피난을 가?”
“나는 마산에 있는데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가 동생들만 데리고 갑니다.”
“지금, 인민군이 곧 이리로 올 것인데 피난을 가다니?”
“보내 주십시오.”
“안돼!”
큰일이었다. 이 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어떤 변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머리가 찡해지면서 아득함을 느꼈다.
“대장님, 난 목사 아들입니다. 인민군을 만나면 안됩니다.”
“목사 아들이라니, 주남선 목사가 우리 아버지입니다.”
“거창읍 교회에서 계시는 주 남선 목사가 우리 아버지입니다.”
“뭐? 주남선 목사님 아들이라고?”
“예!”
경효는 전투대장이 아버지를 아는 듯한 기미를 보이는 것 같아 반가웠다.
“주 목사님은 내가 잘 알지. 그 분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야!”
전투대장은 그가 주 목사님을 알게 된 경위를 이야기 하였다.
지리산 공비 토벌 때의 일이었다. 그는 총상을 입고 거창으로 후송되어 임시병원에 입원되었다. 그때의 임시병원은 거창 유치원이었다.
침대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는데, 주 목사님이 아침 저녁 찾아와 위로해 주시며 성경 말씀을 들려 주셨고 위하여 기도해 주셨다. 그는 퇴원되어 다시 전투부대로 배속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그 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주 목사님의 따뜻한 사랑과 친절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나면 꼭 찾아가 인사라도 드리려 생각했는데, 동란이 터지고 전쟁을 하게 되니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오늘 주 목사님의 아들을 만나게 되니 감개무량하여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주 목사님의 아들이라니 내가 도와 주어야 하겠군.’
전투대장은 마음으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빨리 뛰어가 저쪽 재를 넘어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 내가 직접 인도할 수는 없고, 사람을 한 사람 같이 보낼 터이니 지시를 받고 지름길을 통하여 마산으로 가거라.”
대장은 장정을 한 사람 안내자로 세워 주었다. 경효는 동생들과 조카를 데리고 장정의 지시대로 산을 넘어 지름길을 타고 무사히 전쟁터를 벗어나게 되었다.
경효는 아버지의 힘이 이렇게 널리 뻗어 있는 일에 대하여 또 한번 가슴에 흐뭇함을 느꼈다.
3. 뱃길에서
하종숙 전도사는 26일 새벽, 초조한 마음으로 교회로 돌아갔다. 그는 온양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괴뢰군이 곧 쳐들어 올 것인데 그냥 있으면 죽는다. 빨리 서둘러 가족들과 함께 위천쪽으로 향하였다.
위천 교량이 파괴되어 있었다. 낙동강 물줄기가 검푸르게 뻗어 흘렸다. 마음은 뛰고 싶지만 강물이 길을 막았다. 나룻배가 왔다. 피난민들이 배에 올랐다. 밀물처럼 사람들은 먼저 오르려고 떠밀었다.
하 전도사는 딸을 태우고 배에 올랐다. 아직 가족이 다 타지 못하였다. 그러나 배는 강기슭을 떠났다. 배가 강 중간에 이르렀을 때, 비행기 소리가 났다.
미 전투기가 강물쪽으로 낮게 오더니 기관총을 난발하는 것이었다. 수면에 떨어지는 총탄이 빗방울 떨어지듯 했다.
당시 인민군들이 주로 민간인복을 입고 거동을 하였다. 미 전투기가 날아와서도 민간인들은 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미 조종사들은 민간인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폭격을 가하는 일들이 많았다.
비행기에서 폭격이 가해지자 배를 타고 있던 피난민들은 요동하기 시작하였다. 배가 좌우로 끼우뚱하다가 그만 뒤엎히고 말았다.
사람들은 물 속으로 쏟아졌다. 하종숙 전도사도 물에 빠졌다. 하 전도사는 헤엄을 쳤다. 사람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때 하 전도사 귀에
“아부지, 살려 주세요!”
비명이 들려왔다. 하 전도사는 헤엄을 쳐서 나오다가 뒤를 돌아 보았다. 땅이었다. 헤엄을 칠 줄 모르는 딸이 물에서 허우적거리며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
하 전도사는 돌아섰다. 땅을 구하기 위하여 딸 가까이로 헤엄을 갔다. 딸의 몸을 떠밀면서 돌아서 강둑을 향해 손발을 놀렸다. 그러나 그에겐 힘이 없었다.
둘이 동시에 거센 물을 헤치고 나오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강둑으로 나오지 못하고 하 전도사는 기진하여 물 속으로 잠겨 들었다. 있는 힘을 다 모아 헤어나오려고 했지만 물 속에 잠긴 채 영영 떠오르지 못했다.
하 전도사의 생명은 그것으로 다한 것이다.
4.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
7월 26일, 수양회를 은혜롭게 마친 박기천 전도사는 신앙의 확신을 얻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가 시무하는 교회는 개천교회였다. 그는 전일 위천면 면사무소 직원으로 있었다.
마태가 세관에서 부름을 받았듯이, 그는 면사무소에서 부름을 받았다.
전도를 받은 그날부터 열심이었다. 위천 교회를 출석하면서 교회 봉사를 잘 하였다. 더욱 은혜를 받자 견딜 수 없었다.
면사무소에 안장 사무를 보고 월급을 받는 평범하고 뜻 없는 생활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없었다. 뜨거운 그의 가슴은 복음 전파의 길을 재촉하였다.
그는 별로 많은 성경 지식을 갖지 못했지만 열심히 독학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했으며, 노회 전도사 시취를 갖지 못했지만 전도사의 길을 나선 것이었다.
어렵고 힘겨운 좁은 길을 뜨거운 가슴으로 걷고 있었다. 백씨가 몹시 언짢게 생각하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기천이 자식은 예수를 믿더니 영 정신이 돌았어! 돌지 않아야 그렇게 좋은 면서기 자리를 마다하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조사 짓을 해?”
백씨는 괜찮게 살았지만 동생을 동와 주지 않았다. 농촌 교회 목회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기쁨으로 그 어려움의 길을 걸어갔다.
6.25 사변이 일어나기 직전에 개천교회로 옮겨 목회를 하였다. 가족은 아내와 아들 하나, 단 세 식구였다.
거창 수양회를 마치고 돌아온 박 전도사는 피난 갈 것을 아예 생각도 내지 않고 열심히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며 교회에서 기도하였다.
8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인민군은 거창에 본부를 두고 마을마을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산주의 정치가 시행되고 있었다.
8월 27일 지방 행정위원을 뽑는 선거가 있다고 공고가 붙었다.
8월 27일은 주일이었다. 박 전도사는 8월 20일 낮 설교시간에,
“·····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기독신자들은 투표에 참석해서는 안됩니다. 주일에는 세상 선거 투표에 신자들이 참가할 수 없습니다. 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외쳤다. 설교를 듣던 한 청년이 이 사실을 내무서에 고발하였다. 다음 날, 무장한 인민군이 나타나 박 전도사를 내무서로 연행하여 갔다.
내무서는 거창읍에 있었다. 명덕학교를 그들이 내무서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무서에서 인민군은 점잖게 타일렀다.
“투표하는 일에 협조하여 주시오.”
“못합니다.”
“왜 못한단 말이오?”
“주일이기 때문에 못합니다.”
“투표만 하면 되지 않겠소?”
“그래도 안됩니다. 그날은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만 합니다.”
박 전도사는 내무서에 갇혀 한 주일을 보냈다.
“이제 선거는 끝났오! 그러니 잘못했다는 말만 한마디 하면 내보내 주겠소!”
인민군이 다시 도전하여 왔다.
“안됩니다. 나는 결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기독신자면 누구나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자들도 다 투표에 가담했단 말이오.”
“그러나 약해서 그렇지 그들이 잘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할 것입니다.”
“할 수 없군!”
인민군은 박 전도사를 끌고 다니며 내무서 밖의 일을 시켰다. 뙤약볕이 뜨겁게 내리 쬐이는 뜰에서 박 전도사는 일을 하였다.
그 곳에서 200여명의 사람들이 같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인민군들의 비위를 거스린 군민들이었다. 신자는 박 전도사 혼자였다.
9월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인민군들은 200여명의 사람을 인솔하여 진주로 가게 되었다. 재판을 받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박 전도사도 끼어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비지땀을 흘리며 일행은 인민군들의 총 끝에 움직이고 있었다. 함양을 지나서 생초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진주 쪽에서 한 때의 인민군들이 이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를 하고 있는 패잔병들이었다. 그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이쪽 인민군들은 200여명의 일행을 돌아서게 하였다. 다시 거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행렬은 어수선하였다.
인민군들의 당황하는 품이 심상치 않았다. 끌려오는 양민들은 기회를 보고 있었다. 재판이고 무엇이고 없다. 이제는 총살형이 기다리고 있을 뿐임을 양민들은 알고 있었다.
“뛰자!”
그들은 소근거렸다. 그들은 요행이 묶여있지 않았다. 함양읍으로 들어섰다. 함양읍에서 인민군들은 삽을 거두었다. 수십 자루의 삽을 양민들에게 들렸다.
합양읍에서 나와 목현 쪽으로 집어 들었다. 이미 양민들의 가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내리고 있었다.
길을 멈추게 하였다. 바로 신작로 아래 모를 심지 않는 논이 있었다. 인민군들은 양민들에게 삽을 주면서 구덩이를 파게 하였다.
이때, 총성이 귀를 멍멍하게 했다. 장정들이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필살의 탈주였다. 그러나 이 때 박 전도사는 끝까지 침착하게 행동하더라고 뒤에 사라온 사람이 증거해 주었다.
살아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박 전도사는 조금도 그 몸이 흐트러지지 않고 인격적으로 최후를 기다리는 있는 자세였다고 한다.
9월 28일 수복 후, 남영환 전도사는 황보여한 전도사(지금은 함양교회 장로로 고아원 원장(와 함께 박 전도사의 시체를 찾기 위해 현장으로 갔다.
현장은 비참하였다. 여러 곳에 구덩이가 있었는데 시체가 가득가득했다. 시체는 부패해 있었다.
물이 고인 구덩이에는 시체가 물에 불어 제재소 안에 갔다둔 나무둥지처럼 보였다. 까마귀들이 벌써 눈을 다 뽑아 먹어버려 구멍만 두 개나 있었다. 냄새가 지독하였고 벌레와 파리가 득실거렸다.
시체를 한구 한구 치우며, 박 전도사의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숨이 훅훅 막혔다.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땀이 전신에 흥건히 젖어 들었다. 그 많은 시체를 다 뒤졌지만 박 전도사의 시체는 없었다. 결국 시체를 찾지 못하고 두 전도사는 그냥 돌아왔다.
12월 어느 날이었다. 박 전도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남영환 전도사는 시체가 있다는 곳으로 찾아갔다. 목현 뒤산이었다.
골짜기를 올라가 능선의 한 소나무 밑에 반반히 누운 시체가 있었다. 시체는 상한 곳이 없이 그대로 있었다. 산까마귀도 그의 눈에 접근하지 않은 채 살포시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남 전도사는 박 전도사의 시체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동역자의 승리적 모습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하나님은 순교자의 시체마저도 보호해 주셨구나!’
이상한 일이었다. 어찌하여 이렇게 구별된 죽음을 죽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더기로 죽어 같은 구덩이 속에서 썩지 않고 이렇게 동떨어진 곳에 시체가 있는 것이 어인 일인지, 그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아는 자가 없다.
며칠 후,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의 장례는 거창 시찰장으로 성대하게 치루게 되었다. 이날 주례는 산 순교자 주남선 목사가 집례하였다.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가 인민군에게 끌려가던 날, 네 살 난 아들 래영은 발가벗고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마지막 길인 줄 모르고 멍하니 아버지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래영이,
26년의 세월이 흘렀다.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의 외아들 래영이 자라 30세.
고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연구과에 입학하여 2학년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도사가 된 것이었다. 그는 지금 부산 반여동 장산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일을 보고 있다.
5. 순교자 배 추달 집사
배추달 집사는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이 별세하고 그는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일찍 복음을 받아 예수를 믿었기에 추달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생활을 하였다.
당시 화양리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곳에서 이십리 밖, 관기리에 교회가 있었다. 관기교회였다. 추달은 어머니와 관기교회를 출석하였다.
추달은 학교를 하지 못했고 집에서 한글을 좀 익혔다. 집이 가난하여 먹는 문제가 항상 염려였다.
추달이 뼈가 굵어지자 남의 집 일을 도와 주었다. 머슴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의 가슴에도 배움에 대한 염원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추달은 남의 집 머슴으로 있었지만 교회생활을 부지런히 잘 하므로써 교회에서 일찍 집사로 임명이 되었다. 관기교회 집사로서 그는 열심으로 신앙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1950년 3월이었다. 거창에서 주남선 목사가 성경학교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관기교회에도 날아왔다. 소식을 들은 추달집사의 가슴이 뛰었다. 배우고 싶었다. 성경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돈이 별로 들지 않아 좋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신앙 문제에 대하여는 어느 부모보다 열정적이었다.
“가서 공부를 하도록 해라.”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추달 집사는 거창으로 가서 성경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학생이 된 추달 집사는 너무나 기뻤다. 처음으로 노트에 글을 썼다. 성경을 체계있게 배우는 일은 그의 가슴을 흐뭇하게 하였다.
날이 갈수록 그의 가슴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는 기도 시간을 많이 가졌다. 감격할 뿐이었다.
머슴살이로 천대 받으며 지내야 했던 그가 성경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찬일이었다. 남영환 전도사가 주로 학과를 가르쳤다.
성경학교의 수업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6·25동란이 터졌다. 성경학교는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방학식 날, 주 목사님의 설교에 추달 집사의 마음은 더욱 뜨거워졌다.
신앙으로 살되 바로 살아야 하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졌다. 주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인격자가 되고 싶었다. 산 순교자 주 목사님의 행동 하나 하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울렸다.
신앙의 길은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품위를 한결 높혀 준다고 생각하였다.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추달 집사는 계속 성경을 읽었고 노트를 훑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인민군들이 묘산으로 몰려 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순경들이 피난을 가라고 호령을 했다.
화양리 사람들은 봇짐을 꾸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추달 집사도 어머니와 함께 피난에 나섰다.
피난민들은 낙동강 철교가 있는 합천과 창녕의 경계선까지 갔다. 적포철교가 파손되어 끊어져 통행이 중지된 것이었다. 건너 갈 수가 없었다. 화양리 사람들은 그만 되돌아오고 말았다.
화양으로 돌아온 날은 금요일 오후였다. 그날 밤, 가정에서 추달 집사와 교인들은 구역 기도회를 가졌다. 예배는 정운택 선생이 인도하였다.
정운택 선생(현재 부산시 이사벨여고 교사)은 당시 묘산국민학교 교사였다. 정 선생은 하동 사람으로 사범학교 졸업 후, 묘산국민학교에 첫 발령이 나서 와 있었다.
기도회를 마치자 인민군이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 선생은 배추달 집사와 함께 뒷산으로 도망갔다. 배 추달은 24살이었는데, 다섯 살은 아래로 볼 정도로 몸이 가늘고 뼈대가 가늘었다.
얼굴이 검고, 죽은 깨가 조금 깔아져 있었다. 그는 관기교회 청년 집사였다.
정 선생과 배추달 집사는 뒷산 깊숙이 들어갔다. 계곡에 숯을 굽던 굴이 있었다. 숯굴에 자리를 정했다.
다음 날, 종일을 숯굴에 있다가 밤이 되어 내려와 먹을 것을 얻어서 올라갔다.
며칠을 지내니 배 집사 어머니가 걱정을 하여 아들을 타일렀다.
“내려와서 집에 있거라. 뒤는 어찌되든 그냥 지내보는 거지.”
“안되요. 정 선생이 그러는데 잡히면 큰일난데요. 괴뢰군은 지독하답니더.”
줄곧 배 집사는 정 선생과 함께 숯굴에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주일의 일이었다. 정 선생과 배 집사는 마을로 내려와서 정 선생 사촌 누나집에 들렸다. 이 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정 선생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부인들이 몇이 참석하였다.
예배가 끝나고 나자 인민군을 앞세우고 지방 치안대원들이 들이 닥쳤다. 그들은 인부동원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예배를 끝낸 이 집 마루에는 청년이라곤 두 사람 뿐이었다. 정 선생과 배추달 집사였다. 치안대원 중에 정 선생을 잘 아는 분이 있었다. 해서 정 선생은 차마 가자하지 못하고 배추달 집사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따라갑시다. 일을 해야 하겠는데······”
“안됩니다.”
“안되다니?”“오늘은 주일이빈다. 주일은 일을 못합니다.”
“예배는 끝났지만, 주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주일이 다 뭐냐? 지금은 전시야! 나라를 구해야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음은 죄가 만항서 그렇습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들여야 합니다.”
“이 새끼 아주 악질이구나!”
그들에게 명령 불복종은 곧 죽음의 길이다.
“가자!”
배 추달 집사는 그들에게 끌려 내무서까지 갔다.
“저 벼 한 가마를 방앗간까지 져다 주고 가!”
“못합니다.”
“그렇게 해! 그러면 내일 부역을 면해 준다.”
부역이란 탄약을 지고 영산까지 가는 일이였다. 화양에서 영산까지는 백리길이었다. 백리 길을 탄약을 지고 가는 일이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일 부역을 하겠습니다.”
배추달 집사는 주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 탄약을 지고 전쟁터를 나갈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인민군은,
“그럼 벼 지고 가는 일은 그만 두고, 저 돼지를 몰고 따라가자.”
내무서 앞 미루나무에 매어 둔 돼지를 가리켰다.
“그럴 바엔 벼를 지고 가지요. 돼지를 몰고 가자 함은 나를 시험하는 일ㅇ비니다.”
그러자 다시 인민군은 비를 가지고 왔다.
비를 추다 집사에게 주면서
“자, 그럼 이 마당이나 좀 쓸고 가라!”
“안도비니다. 주일에 마당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쓸라고 명령하심은 나를 시험하는 일입니다.”
“좋아! 그럼 이 비를 받아 들기만 해! 그럼 용서한다.”
“그것도 못합니다. 내가 비를 받으면 마당을 쓸라 할 것이고, 마당을 쓸면 돼지를 몰라 할 것이고, 돼지를 몰면 벼 지고 가자 할 것이고, 그러면 잡일을 다하게 될 것이니 나는 주일을 범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비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썅, 이 간나새끼!”
인민군의 부릅 뜬 눈알이 금시 뚝 삐져나올 것만 같다.
인민군은 추달 집사를 내무서 안으로 끌고 가 유치했다.
다음 날, 인민군은 추달 집사를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끌고가서 총을 쏘았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스물 네 살의 젊은 청년 집사 배추달은 수교를 당한 것이었다.
관기교회 이대형 집사가 배추달 집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시체는 두개골과 가슴에 총을 맞은 흔적이 있었다. 두개골에 총을 맞았지만 그의 시체는 험하지 않았다.
타박상의 상처처럼 보였고 얼굴은 평화롭게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치 찬란한 무엇을 바라보듯 황홀경에 빠진 듯,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이대영 집사는 교회에 알리고 배 집사 어머니에게 통지하여 배 집사 시체를 그곳에 가매장 하였다.
새 옷을 갈아입히고 창호지로 곱게 덮어 관도 없이 가마니에 싸서 묻어두었다. 인민군들의 눈이 두려워 정식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가매장을 해 둔 것이었다. 그 날, 배추달 집사가 끌려가던 뒷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정 선생은 치안대원들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윤용환이란 사람의 헛간에 숨어 십오일을 지냈다. 그러나 치안대원들에게 발견되어 끌려가는 몸이 되었다.
저녁 무렵, 허술한 틈을 타서 담을 뛰어 넘었다. 뒷 산을 향하여 뛰었다. 무사히 숲 속에 숨을 수 있었다. 그날부터 나무 뿌리를 파 먹고, 송피를 벗겨 먹으면서 야생동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20일이 지났다. 얼굴을 숲 밖으로 내밀고 마을 쪽을 살피니 인민군들의 행렬이 삼거리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후퇴하는 듯 보였다.
일직이 해가 저물 무렵, 고령 쪽에서 유엔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살았구나!”
정운택 선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정 선생은 수복 후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가 금융조합 서기 일을 봤다.
그 해 12월 중순. 남영환 전도사는 관기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 주간에 순교자 배추달 집사의 이야기가 나와 장례를 하도록 주선을 하였다.
관을 준비하여 묘산국민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무덤을 팠다. 교인들이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가마니가 그대로 나왔다. 가마니에 응겨붙은 흙을 털고 가마니를 풀었다. 시체가 창호지에 싸인 채 나왔다.
수분이 빠지고 곱게 말라 있었다. 창호지도 그대로 있었다. 창호지를 풀었다. 시체가 하나도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창호지에 총 맞은 가슴과 등 쪽에 노란물이 번져있을 뿐 시체는 깨끗했다. 관에다 그대로 넣었다. 흰 꽃상여에 관을 실어 청년들이 메었다.
순교자 배추달 집사의 장례는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성대히 진행되었다. 남영환 전도사가 모든 장례를 집례하였다. 배추달 집사의 관은 그의 집이 있는 화양리 뒷산에 고이 안장되었다.
배추달 집사는 전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간절한 소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황양에 교회당을 세우는 일이었다.
배추달 집사는 머슴사경 받은 것 가운데서 푼푼이 떼어 주인 집에 맡겨 둔 것이 있었다. 순교 후 주인집에서 내어 놓은 것이 벼 한 섬 반과 돈 15만환이었다. 주인은 배추달 집사 모친에게,
“이것은 추달이 머슴사경 중에 화양에 교회 짓는다고 별도로 맡겨 둔 것입니다.”
벼와 돈을 내밀었다.
이 사실은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부산 남교회 한명동 목사는 이 소식을 듣고 화양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당 건축을 서둘렀다.
다음 해, 화양에는 교회당이 서게 되었다. 아담한 교회당이 화양리 마을 중아에 찬란한 십자가 종각을 우뚝 내밀고 서게 되었다.
제15장
1.꿈과 현실의 사이
9월 14일 밤이었다.
주 목사님은 발목을 삐은 이후 심방을 별로 하지 못했다. 보행이 부자유스러워서였다. 교회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날 밤도 주 목사님은 교회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 현장엔 바닥이 눈물로 흥건하였다. 그의 기도는 주 앞에서 드리는 진실과 간절함이 있었다.
며칠 째 계속되는 기도에 그는 피로해 있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자정이 지나고 시계는 두 시를 육박하고 있었다.
기도를 드리던 주 목사님은 정신이 몽롱하게 흐려옴을 어렴풋이 느꼈다. 겹친 피로와 긴장이 스르르 풀리면서 수렁으로 빨려드는 것이었다.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혼자 뿌연 안개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분별할 수 없는 어떤 지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안개구름이 그를 덮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키가 유독 큰 미군 장성이 하늘로부터 상장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두 팔이 안개구름 속에 나타나 이 키 큰 미군 장성에게 상장을 수여하는 것이었다. 그 키 큰 장성은 맥아더 장군이라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주 목사는 눈을 떴다 그는 텅 빈 교회당 마루에 어두움을 깔고 자기 혼자 앉아 있음을 발견하였다.
“꿈이었구나!”
“맥아더 장군이 하늘에서 상을 받다니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주 목사는 계속 맑은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였다. 유엔군과 국군의 승리적 투쟁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시간에 미 제10군단 원정대는 함포사격 지원부대와 로켓함, 상륙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가지고 인천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 때가 9월 15일 새벽 2시였다.
하늘에는 짙은 안개구름이 꽉 끼어 있어,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처음 격파 지역은 월미도였다. 새벽 5시 정각에 월미도에 폭격이 가해졌다.
5시 30분에 제3대대는 17척의 상륙정에 올랐고, 9대의 탱크가 3척의 상륙정에 실려졌다. 상륙시간은 5시 30분이었다. 공중 폭격이 시작되었고, 함포 사격이 동시에 가해졌다.
6시 25분에 맥아더 장군은 매킨리호 지휘대에 나타났다.
오전 7시 50분에 월미도는 완전히 점령되었다. 월미도에는 북괴군 제226 독립 해병연대 제 3대대와 제918포병 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살육 당하고 1백36명만 포로로 잡혔다. 오후 5시 30분 인천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인천상륙 작전은 기적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2. 환란 때의 교역자 생활비
9월 15일,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되자, 북괴군은 한풀 꺾였다. 남부 전선의 적은 보급로가 끊어졌고, 완전히 오합지졸이 되었다.
9월 23일, 미 제 23연대와 제38연대는 철수하는 북괴군 4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괴군 제9사단과 2사단과 4사단이 합천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미23연대와 38연대는 진주와 김천 가도를 막고 적을 봉새하였다. 미 F15 전투기는 합천과 거창에 흩어진 적병 머리에 폭탄을 퍼부었다.
9월 25일, 미 제38연대는 합천에서 거창으로 들어가면서 북괴군 패잔병 소탕전을 가했다. 북괴군은 차량과 중장비를 합천과 거창 사이에 버리고 도보로 도망하였다. 산을 타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거창 시내로 들어가 민간인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이날 오후 늦게 미 공군은 거창을 맹렬히 폭격하므로 파괴시켰다.
북괴군은 이날 제 2,4,9,10사단이 거창에 집결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미 제2사단의 반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특히 미 공군의 폭격은 극심한 타격을 가해 주었다. 적은 거창 시내를 점령하고 온갖 힘을 기울였지만 무모한 일이었다. 9월 27일 밤까지 버티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엔군의 우수한 전투력은 그들의 사기를 여지없이 꺾고 말았다.
적은 트럭 17대, 오토바이 10대, 대 전차포 14문, 야포 4문, 박격포 9문, 탄약 3백톤을 유엔군에게 노획 당했고, 4백50명이 생포되었으며, 2백 60명이 사살당했다.
거창 시내는 북괴군의 시체가 흉측하게 깔렸다. 북괴군 사단장 최현은 나머지 잔병들을 데리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2천 500명의 북괴군은 거창 시내를 빠져 27일 밤에 산을 타고 줄행랑을 치게 되었다.
9월 28일 아침, 해가 돋자 미 제38연대는 거창에서 전주로 행군을 시작하였고, 제28사단도 남원을 거쳐 전주로 올라갔다. 미 제28연대와 제9연대는 고령·삼가 지역을 소탕하였다.
무서운 전쟁이 휩쓸고 간 거창 시내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시민들이 나와 폭격을 당한 집을 일으키고, 파괴된 길을 손보았다. 흩어진 시체들을 산으로 옮겨 매장하였다.
남영환 전도사는 개평 지방을 순회 심방하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주 목사님과 남 전도사는 폭격이 심한 그 전쟁 중에서도 지방을 나누어 순회를 하였던 것이었다.
주 목사님은 함양 지방을 순회하였고, 남 전도사는 거창 일대와 합천 지방을 돌아 보았다. 남 전도사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떠날 때, 식량이 없는 것을 보고 떠났다.
평화시에도 식량이 모자라 어려움을 당했는데, 전시에는 오죽하겠나 싶어 염려를 하면서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집에 들어서니 가족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가족들은 무사했다. 얼굴은 보니 배고픈 상이 아니었다. 제법 얼굴에 기름끼가 돌고 있었다.
“굶어 죽지는 않았군!”
남 전도사는 신통한 생각이 들어서 허공을 향해 말을 던졌다.
“굶어 죽기는요, 전보다 더 부요하게 된 걸요. 년말까지는 식량 걱정 안해도 됩니더.”
부인 박명순 여사가 반색을 하며 남 전도사의 가방을 받았다.
너무나 생각 밖의 일이어서,
“어떻게 된거요?”
하고 물었다.
“뭐가요?”
“식량이 없었을 터인데·····”
“염려 말아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하셨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을 굶기시겠어요? 교인들이 전보다 사랑이 더 맣아져 교역자 가정 도우는 일에 전력을 쏟고 있어요.”
남 전도사는 말없이 부인의 말에 정신을 주고 있었다. 지방 교회에서도 식량을 가져왔다고 했다. 가조 교회에 전쟁중인데도 식량을 지고 왔다 했다.
주 목사님은 가지고 오는 성도들의 정성어린 식량들을 감사히 받아 자신의 양식으로만 삼지 않고, 두 전도사의 가정에도 적당히 분배하여 준 것이었다.
모든 일에 세밀하고 자상하신 주 목사님이었다. 평화시대 보다 전쟁시에 주 목사님과 전도사들의 생활은 더 나은 편이었다. 환란이 올 때, 교인들의 신앙은 더욱 두터워지기 마련이다.
세상 것에서 신령한 면으로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었다. 평화시엔 현세적이지만 전시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내세적이 된다.
사람이 내세적일 때, 신앙은 바른 궤도에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교역자를 섬기는 일이 신앙의 고저와 관계 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라 할 수 있을까?
3. 뜨거워진 청년들
괴뢰군이 북쪽을 향해서 퇴집하자 거창은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주 목사님은 제직회를 열고 우선 급한 것부터 일하기로 의논하였다.
“파손된 교회당을 수리해야 하겠습니다.”
주 목사님 제의에 제직 중 한 분이 즉시 말을 받았다.
“교회당 수리도 문제이지만 사택부터 수리해야 하빈다.”
주 목사님은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아무리 사택 수리가 급하지만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교회당을 수리해야 합니다.”
결국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운 경제사정에서도 교회당 수리를 말끔히 했다. 그 다음 사택을 손봤다. 유치원 건물이 폭격으로 불타 버렸기 때문에 다시 육간 목조건물로 세우고 기와를 덮었다.
12월이 저물어갔다. 신년도 예산을 세워야 했다. 예산위원이 정해지고, 예산을 세우게 될 때, 예산안을 목사님께 상의하였다.
주 목사님은 예산위원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못해 사면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영환 전도사님은 곧 목사 안수를 받게 될 것이니, 남 전도사님을 원 교역자로 세워 일 할 수 있도록 예산을 세우십시오.”
예산위원들은 의외의 말에 당황하였다. 허나 주 목사님은 자신의 앞날을 대강 짐작 하시듯 담담히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좀 휴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남 전도사님을 원 교역자로 세우도록 주선을 하십시오.”
그러나 당회원들과 예산 위원회에서는 여전히 주 목사님의 생활비를 책정하여 예산을 세웠다.
그날 밤, 청년회 임원회가 모였다. 회장 원영봉 집사는 임원회 석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내놓았다.
“우리는 다 죽었다가 살아 난 사람들이 아닙니까? 전과 같은 태도를 버리고 뜨겁게 일해야 하겠습니다.”
원 집사는 전쟁시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다. 와보니 집은 불타버리고, 구둣방을 하고 있었는데 가죽도 다 타고, 구두 두 켤레 만들 가죽만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주 목사님과 남 전도사의 구두를 맞추어 드렸다.
원 집사는 전쟁을 겪고 나서 과거의 미온적 교회 봉사가 부끄럽게 느껴져 임원회를 열고 열심히 쏟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만 살기 위하여 피난을 간다. 숨어다닌다 했지만 우리 목사님과 전도사님은 생명을 내어 놓고 난 중에서도 주님을 위해 일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목사님이 말씀이면 무엇이나 순종해야 됩니다. 또 목사님의 계획이 실행되도록 힘을 모두어야 합니다.”
회원들은 모두 원 집사의 뜨거워진 가슴을 이해하는 듯,
“옳습니다. 우리가 힘을 냅시다.”
의견을 모두었다.
1951년 1월. 청년회 단독 사업으로 지산 교회에 전도사를 파송하였다. 월천 교회를 개척하고, 이백원 전도사를 보내어 일하게 했다.
교회는 은혜가 흘러 넘쳤고, 청년들의 열심은 교회를 더욱 뜨겁게 하였다. 청년회장 원영봉 집사는 3년 후인 1954년 1월 5일, 장로로 피택되어 장립을 받았다.
4. 진찰을 받고
1951년 새해로 접어들자 주 목사님의 몸은 눈에 뛰이게 초췌해 보였다. 그래도 목사님은 좀체 누우시지 않고 계속 심방과 기도 생활에 힘을 쏟았다.
2월 1일 밤, 부산 영도 교회에서 임시노회가 모인다는 통지가 1월 30일 오전에야 전달되어싿.
주 목사님은 남영환 전도사의 목사 안수를 생각하였다. 안수 받는 몇 분이 있어 같이 안수를 받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날, 남영환 전도사는 서산 교회 집회인도를 위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남 전도사는 안의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쉬었다가 길을 떠났다.
얼마를 가다가 남 전도사는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오므로 몸을 돌려 바라보니 추국원 집사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추국원은 당시 거창읍 교회 집사였다.
“조사님, 목사님이 부르십니다.”
“뭐 할려고?”
“임시 노회시 목사 안수를 받으시랍니다.”“빨리 갑시다.”
남 전도사는 돌아서서 추 집사의 자전거에 몸을 답았다.
죽전 사택에 들어가니 목사님께서 노회 가실 준비를 하고 남 전도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 조사님 같이 부산으로 갑시다. 비상시에는 비상법으로 노회가 목사를 안수를 할 수 있으니 내일 밤에 안수 받도록 합시다.
남 전도사는 멍멍 할 뿐이었다.
“전보를 쳤습니다. 가시면 됩니다.”
남 전도사는 선걸음에 주 목사님 뒤를 따랐다. 거리에 나왔지만 자동차는 없었다. 날씨는 몹시 쌀쌀하였다. 찬바람이 귓부리를 때리고 지나간다. 거창 시내를 빠져 마산 쪽으로 난 길을 그들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군용 트럭이 한 대 오고 있었다. 장작을 가득 싣고 있었다. 손을 들었더니 시원스럽게 태워 주었다.
겨울 해는 짧았다. 그들이 마산에 들어섰을 땐, 밤이 이슥했다. 따님 주경순씨 사택에 들려 밤을 쉬었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야 했다. 오후 늦게야 기차가 출발하였다.
영도 교회에 들어서니 임시노회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목사 안수식만 남아 있었다. 남영환 전도사는 예정한 안수일보다 일년 늦게 안수를 받은 것이다.
다음 날. 2월 2일. 주 목사와 남 목사는 복음병원 차로 부평동에 있는 큰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 최의선 선교사의 소개로 가게 된 것이다.
최의선 선교사는 전직이 의사였다. 그는 처음 한국에 나와서 선천 미동병원 원장일 보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무료진료를 해 주었고 자선에서 힘썼다.
어느 날, 싸움을 하여 심한 부상을 입고 찾아온 청년이 있었다. 최원장은 친절히 치료를 해주고 퇴원할 때,
“앞으로 싸움하지 말고, 착한 사람 되시오.”
하고 타일러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드리는 소문은 그 청년이 나가서 살인을 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최 원장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육신 병, 고쳐주어도 영혼 병 고쳐주지 못하니 불행한 일 생깁네다.”
최 원장은 자리를 내어 놓고 본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였다.
해방이 되자 선교사가 되어 한국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그는 고려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이 최의선 선교사의 소개로 주 목사와 남 목사는 진찰을 받았다. 남 목사는 폐와 심장이 좋지 못했다.
“한 1년간 요양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사의 말이었다. 주 목사님에게는 위장이 좋지 못하다고 하면서 휴식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의사의 심각한 표정으로 봐 심상찮은 병세인 듯 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주 목사의 병은 간암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남 목사는 거창으로 돌아가고 주 목사는 쳐졌다. 주 목사는 부산의 뜻있는 목사들을 찾아 만나 상의하였다.
자신은 더 큰 병을 안고 있으면서도 남 목사를 염려하고 동정을 바랐던 것이다.
목사는 십만 환을 마련하여 가창 남 목사 앞으로 우송하였다.
“너무 무리하게 일하지 말고, 이 돈으로 약을 사 가지고 쉬면서 일하시오.”
돈과 편지를 받아 쥔 남 목사는 주 목사님의 따뜻한 인정과 자신보다 남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애에 뜨거운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주 목사님은 마산으로 가서 주경순 집사의 집에서 머물렀다. 얼마간 요양을 하면 회복이 될 거라는 생각에 휴식을 가졌다. 그러나 며칠을 쉬었지만 몸은 더욱 피로하였고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다.
제16장
해와 같이 빛나리
1.신앙의 동지가 그리워
이인재 전도사가 제2문창 교회에 집회 인도차 왔다. 이인재 전도사는 집회 주간에 시간만 있으면 주 목사님께 들렸다.
주 목사님은 이 전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조사님, 이번 집회시 철야기도를 좀 못하더라도 내 곁에 와 있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전도사 역시 주 목사님 곁에 있고 싶었다. 주 목사님 옆에 있으면 세상의 염려나 걱정이 일지 않았다.
집회를 끝마친 이 전도사는 돌아가지 않고 며칠을 주 목사님 곁에서 지냈다. 주 목사님은 주경순 집사 댁에서 한 달 가까이 지냈다.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회복의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가야 하겠다. 죽어도 집에 가서 죽어야지······’
주 목사님은 불현 듯 거창으로 도아가고 싶었다. 교회가 그리웠고, 돌보던 지방 교회 교인들이 보고 싶었다. 거창에서 사모님이 오셔서 거창으로 올라가실 준비를 갖추었다.
2. 거창으로 올라가는 날
부산에 자동차 연락을 하였다.
박병호 전도사가 차를 몰고 왔다. 박병호 전도사는 자동차 면호증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재건 교회 전도사 일을 보았으나 고려신학교에 입학하므로 교회 시무를 옮겼다.
초량 35번지에 소재한 은혜 교회를 맡았다. 한부선 선교사가 6·25사변으로 본국에 들어갈 때, 그의 자동차를 고려신학교에 맡기고 갔다. 교단적인 급한 일이 있을 때 박병호 전도사를 통하여 이 자동차를 이용하곤 했다.
자동차를 몰고 박 전도사가 주경순댁으로 왔다. 자동차에서 한상동 목사님과 한명동 목사님이 내렸다. 두 한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감사합니다. 원로에 와 주셔서·····”
주 목사님의 얼굴에 괴로운 미소가 지나갔다.
주 목사님은 부축되어 자동차에 올랐다.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회복되어 다시 만나 뵙기 바랍니다.”
두 한 목사님, 조수옥 집사와 아는 얼굴들을 뒤로 하고 자동차는 서서히 미끄러져 나갔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는지 모를 그리운 얼굴들. 보내는 사람들은 한 사람을 보내지만 떠나는 사람은 모두를 두고 떠나간다. 보내는 사람은 한 사람을 잃는 슬픔이지만, 떠나는 사람은 모두를 잃어버리는 슬픔에 젖는다.
주 목사님의 눈시울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양볼을 흘러내렸다. 딸의 집이 점점 멀어진다. 이제는 영영 다시 들릴 수 없을지도 모를 딸의 집을 한 번 더 눈에 담아보는 주 목사님이었다.
자동차는 신마산 역을 지나 시외로 빠지는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자동차에는 사모님과 딸 주경순 집사가 합승하고 있었다.
주 목사님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병호 전도사에게 말을 던졌다.
“박 조사님, 수고가 많습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먼 거리를 자동차를 몰게 되었으니 참 고맙군요.”
박 전도사는 계면쩍게 웃어 보이면서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 뿐인걸요. 하여튼 목사님 몸이 빨리 회복되셔야 하겠는데 걱정입니다.”
“나는 이제 틀렸어! 하지만 박 조사님은 몸이 건강해서 참 좋습니다.”
주 목사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통증이 오는지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다시 얼굴을 펴고 눈을 떳다. 그의 눈길이 운전대를 쥔 투박한 박 전도사의 팔목에 멎었다.
“박 조사님, 건강이 보뱁니다. 무리하면서도 뛰는 것만 잘하는 건 아니야. 쉬는 것도 주님의 일이란 걸 이제야 나도 알았어! 쉬는 것도 주님의 일이야.”
느릿느릿 목에 힘을 넣어 말했다.
자동차는 함안으로 들어갔다.
군북으로 해서 의령으로 빠지려는 것이다.
목사님을 위해서 비교적 좋은 길을 택하였다. 장거리 여행이었다.
주 목사님은 음성을 낮추어 말을 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순교를 했는데, 나같은 사람은 순교도 되지 않았어. 순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되지······· 나는 원하고 원해도 허락지 않으시니 안되더군, 결국 내가 원치도 않은 약사발을 들고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니 섭섭하다면 이보다 더 섭섭한 일이 어디 있을까?····”
주 목사님은 다시 눈을 살며시 감았다.
자동차는 의령으로 들어섰다. 의령을 지나 삼가에 이르렀다. 사막에서부터는 주 목사님의 시찰구역이다. 수 없이 다닌 낮익은 길이었다. 교인들의 집을 차장 심방한 길이었다.
차를 멎게 하고 교인들을 불러오게 하여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 길인 줄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신앙의 격려를 했다.
합천에 들어가자 날이 저물었다. 다시 올 수 없는 합천이었다. 그 밤을 합처넹서 쉬었다.
죽음이 눈 앞에 가까워 질 때, 생에 대한 애착은 이렇게 짙어지는 것인가? 모든 것이 아수비고, 그리움으로 가슴에 밀려왔다. 주 목사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접견하고 기도하며 격려하였다.
아침이 되어 다시 자동차는 출발하였다. 묘산에 들어가 교인들의 안부를 묻고 만날 수 있는 분들을 다 만났다.
바울이 밀레도를 떠날 때, 장로들에게 권면하듯, 만나는 성도들을 주와 및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고 석별의 눈물을 삼켰다.
자동차는 거창으로 들어가 죽전 사택 문 앞에 멎었다. 주 목사님은 사택 방으로 들어가 눕게 된 것이다.
3. 찾아드는 교역자와 성도들
주 목사님이 거창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삼 군 각 교회에 알려졌다.
매일처럼 교역자와 성도들이 죽전으로 몰려들었다. 귀찮을 정도로 사람들은 몰려왔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찾아오는 문안객들에게 조금도 언짢은 기색없이 친절로 대변하였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염려하여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버지! 자꾸 편찮으신데 사람들이 올 때마다 일어나시어 말씀을 하시니 이래 가지고는 참말로 안되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내가 하는대로 두어라. 그분들이 찾아온 것은 내 한 사람 얼굴 볼려고 온 것 아니겠나? 내가 그 분들을 반가워 하지 않으면 그분들의 섭섭함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허지만 아버지는 병중이 아니십니까?”
“내가 내 병을 잘 안다. 내가 다시 회복될 것이란 걸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절망적인 말을 하시면서도 목사님의 얼굴엔 절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밝고 평화로웠다. 병문안 온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오히려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
위천교회 백영희 전도사가 왔다. 그는 일제수난시부터 주 목사님을 극진히 위한 분이다. 세상이 다 외면하고 적대시한 주 목사님의 가족들을 그는 음성적으로 도왔다.
승복을 입고 배낭에 쌀을 감추어 다니며 그릿 시냇가의 까마귀 노릇을 한 것이었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을 가장 존경하고 신앙의 선배로 우러러 보았다.
백 전도사가 머릿쪽에 앉자, 주 목사님은
“백 조사님, 아래쪽에 앉으시오. 얼굴이나 좀 보개.”
많이 가늘어진 음성이 실낱같이 이어져 나왔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의 초췌한 얼굴을 보자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지난 날의 얼굴이 그리웠던 것이다. 형편없이 여윈 주 목사님의 모습은 다시 옛 얼굴을 가져올 상 싶지를 않았다.
“아무데도 가지 말고, 내 옆에 좀 있어 주시오.”
언제나 사랑과 정이 담뿍 담긴 주 목사님의 말은 울적한 백전도사의 마음을 따사롭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틀동안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 곁에 있었다.
백 전도사는 차마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는 상남 교회 집회를 맡아 있었다. 그날 밤부터 가지도록 된 집회도 연기하고 싶었다.
“목사님, 사실은 함양 상남 교회 집회를 가지도록 되어 있지만 그만 두겠습니다. 사람들을 보내어 사정에 의해 연기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차마 목사님을 곁을 떠날 수가 없군요·····”
백 전도사는 말을 흐렸다. 주 목사님은 백 전도사의 말 뜻을 알아차리곤,
“안됩니다. 백 조사님, 가셔야 해요.”
말에다 힘을 넣었다.
“그렇지만 목사님께서 이렇게 편찮으신 못브을 보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백 조사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먼저해야 되오. 주님의 일을 해야지···”
주 목사님은 머리맡에 놓인 자신의 성경책을 내밀었다.
“백 조사님, 이걸 가져 가시오. 난 이제 성경을 읽지 못하게 되었어. 이것은 백 조사님이 나보다 더 필요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성경을 받는 백 전도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격류처럼 쏟아져 내렸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빨리 가시오, 힘있게 주님의 일을 해야지요. 젊고 건강하니까. 열심히 해야지요.”
백 전도사는 주 목사님이 주시는 성경을 가슴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사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잡숫기 어려우시더라도 죽물을 좀 드십시오.”
“·······”
목사님은 말없이 백 전도사를 바라 보았다.
주 목사님의 후미진 눈 언저리에 흥건히 물기가 고이는가 하더니 주르르 귓바퀴로 눈물은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백 조사님······· 잘 가시오·········”
돌아선 백 전도사의 등 뒤를 향하여 아련히 말을 보내는 것이었다.
4.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1951년 3월 23일, 오전.
주 목사님은 장로들을 불렀다. 장로들은 목사님 주위에 둘러 앉았다. 주 목사님은 말할 힘조차 없지만 느릿느릿 입에 힘을 모으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납니다. 나에게 대한 기대와 미련을 다 잊으시고 교회를 신앙으로 잘 이끌어 가십시오. 나의 후임으로는 남 목사님을 보도록 하십시오.”
장로들은 모두 묵묵하였다. 주 목사님의 이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마음은 장로 중 아무도 없었다. 주 목사님의 그 순교적 신앙 산맥을 이어 줄 사람은 현재로서 남 목사 뿐임을 장로들도 잘 알고 있었다.
“목사님, 그 문제에 대하여는 안심하십시오.”
장로 중 한 분이 입을 열었다.
그날 오후. 주 목사님은 그의 곁에서 염려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앉은 남 목사에게,
“남 목사님, 예배 인도를 하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수요일인데·······”
하고 말을 떼면서 눈을 껌벅거렸다.
“예, 가야 하겠지만······”
“가세요. 교인들이 모여 드는데 목사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빨리 가세요.”
“예, 목사님. 예배 인도하고 바로 오겠습니다.”
남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남 목사는 하늘을 보았다. 찌푸린 날씨가 3월이라곤 하지만 쌀쌀한 바람이 아직 머물고 있었다.
해가 졌는지 벌써 안개처럼 어둠살이 깔리는 듯 했다.
남 목사는 교회를 향하여 발을 옮겼다.
남 목사를 교회로 보낸 다음 주 목사님은 둘러 앉은 가족들에게 신앙을 격려하고 만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평화로운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
1951년 3월 23, 오후 6시.
평생 소원 순교이었는데, 순교 직전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수 없이 넘기시다가 자택에서 가족 친지들이 보는 거운데 눈을 감았다.
향년 64세.
길지 못한 생애였지만 너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그 몸에 지니고 살다 갔다.
거창에서 태어나,
거창에서 자라고,
거창에서 예수 믿어 학습과 세례를 받고,
거창에서 집사되고 장로 장립을 받고,
거창에서 전도사되고 평양신학하고,
거창에서 목사 안수 받고,
거창에서 검속되어 대구, 진주, 부산,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거창에서 6·25 수난을 겪고,
거창에서 숨지니 그는 거창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 그 어떤 위인들의 생애와 비교하여 모자람이 있을까?
한국이 낳은 세계적 위인, 누가 이 침묵의 성자를 존경하지 않으리!
그는 한국의 남단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 주었다.
그가 보여준 하나님은 사랑이요, 긍휼이요, 자비요, 진실이요, 불변이었다.
순교는 죽는 것만이 아니고 살아서도 그 생활이 순교일 수 있다는 순교의 다른 의미를 보여 준 사람. 그는 이 땅에 와서 하나님만 보여 주고, 하나님만 증거하다가 갔다.
그는 기도의 위력을 보여 준 사람이다. 평양 형무소에서 주야로 간절히 부르짖던 그의 기도는 다 이루어졌다.
특별기도 제목으로 정하여 기도했던 6개 항목이 그대로 다 이루어짐을 보고 그는 눈을 감았다.
첫째, 말세의 바벨론 우상 제국이 파괴되도록 기도하였는데, 우상 제국 일본은 원자탄 두 개로 파괴되었다.
둘째, 이 땅에 참 신앙의 자유를 달라고 기도하였더니 8·15해방으로 신앙의 자유가 왔다.
셋째, 조선의 자주 독립을 기도하였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완전 독립국이 된 것이다.
넷째, 이 땅에 세워진 모든 신사가 불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더니 그대로 신사는 다 불탔다.
다섯째, 조선 교회 지도자 교양을 위하여 수도원을 설립하고 새로운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기도하였는데, 1946년 9월 20일, 한상동 목사와 함께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여섯째, 거창에 성경 학원 하나 설립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은 그대로 이루어져 1950년 4월 10일에 성경 학원이 설립되었고 거기에서 영광스럽게 배추달 집사같은 순교자가 나왔다.
주 목사님의 기도는 이 땅에서 그가 눈 감기 전에 다 이루어졌다.
그의 일생에 한은 없다.
주 목사님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 기도에 응답을 다 받은 복의 사람이었다.
남영환 목사는 수용일 밤 예배를 인도하시다가 주 목사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위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백영희 전도사는 집회 삼일 째 되던 날 부고를 받고 울었다.
‘집회는 뒤로 미루어도 되는데····’
눈이 붓도록 백 전도사는 울었다.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지!”
주 목사님의 그 한마가로 가슴을 찡하게 때린다.
‘주님의 일을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시던 어른····’
백 전도사는 거창을 향해 달렸다.
5. 빛난 장례식
주 목사님의 별세소식은 부고에 실려 전국 교회에 배달되었다.
듣는 이마다 애석함에 눈시울을 적셨다.
장례는 7일장으로 경남 노회장으로 정하였다.
조문객들이 구름 떼처럼 밀려왔다. 하루 쌀 한가마니와 돼지 한 마리씩이 조문객들을 위해 제공이 되었다. 장례식까지 모든 금전 출납을 백영희 전도사와 조수옥 전도사가 맡았다.
노회 임원들이.
“노회장이니 조의금 들어오는 것은 모두 사모님께 드려 유족들의 생계를 돕도록 하고 장례식은 간단히 하자.”
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백영희 전도사는.
“아닙니다. 앞으로 유족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장례식을 거대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이 자녀들을 분명히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의인의 자손이 걸식하거나 못사는 법은 없습니다. 이번 장례를 통하여 한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도록 합시다.”
말을 잘랐다.
조수옥 집사는 백전도사의 말에 덧붙여,
“그렇습니다. 조의금은 들어오는대로 다 씁시다. 장례식을 빛냅시다.”
하고 찬성을 했다.
“옳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주경순 집사가 다시 말을 받았다.
노회 임원들은 더 이상 우기지 못하고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장례식을 이끌어 가기로 하였다.
조수옥 집사는 마산 인애원에 있던 광목 여러 필을 가지고 왔다. 또 거창 박애원에서 광목을 가지고 왔다. 그 광목으로 수십 벌의 두루막을 만들었다. 삼베로는 두건을 수없이 만들었다.
1951년 3월 29일.
장례식 날이 왔다. 전국 각지에서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모사들은 흰 두루막을 입고 두건을 쓰게 했다. 전도사들은 두건만 썼다.
발인식 예배가 끝나고 상여가 나갔다. 동네를 빠져 들 길에 들어섰다. 구름이 꽉 끼어 있는 하늘에서는 3월 하순인데 진눈개비가 슬슬 뿌리는 것이었다. 먼 산 중허리에 진나 밤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초봄인데도 겨울을 연상케 했다.
찬바람이 벌판을 쓸었다. 상여 앞에서 만사를 든 청년들이 줄을 지었고 뒤에는 흰 옷 입은 찬양대원들이 섰다. 상여 뒤에 유족들과 흰 두루막을 입은 목사님들이 줄을 지었다. 다음은 두건만 쓴 전도사들, 그리고 뭇 성도들이 줄을 이었다.
긴 장례의 행렬이었다. 거창이 생기고 처음있는 거대한 장례식이었다. 장례의 행렬을 바라보는 불신자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고였다.
공동 묘지로 향하는 길이 사람으로 덮혔다. 이인재 전도사가 소리를 외쳤다.
“개선 장군이 들어가신다. 개선 장군이 들어가는 길이 휜히 트였구나!”
하관식 예배시에 이약신 목사는 독창을 했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찬송은 초 봄의 싸늘한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참석한 성도들의 귓가에 따뜻한 인정처럼 감격으로 소록소록 담겨졌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 믿음 좋은 성도들의 장례는 그 장례식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법이다.
조객들과 거창 시민들로 산이 덮혔다.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산에서 마련한 음식만 해도 돼지 세 마리에 쌀 세가마니가 불에 익혔다. 밥 그릇, 국 그릇이 모자라 바가지를 사용하기까지 하였다. 거창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거창이 생기고 처음이다!”
그럴 수 밖에.
주남선 목사야말로 거창이 생기고 처음 인물이었다. 이 이후, 또 다시 거창에 이런 인물이 태어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거창이 울고, 한국 교회가 소리내어 울어야 했다.
그 후 1973년 5월 15일, 자녀들의 정성에 의하여 거창 시내가 내다보이는 아담한 동산에 주 목사님의 묘소가 새로 마련되었다.
조각가 신춘범씨가 정성을 기우려 3개월 동안 파고 다듬어 십자가 묘비와 무덤을 덮는 돌ㄹ판을 만들었다.
대리석 십자가 묘비 뒷 면에는 다음의 성구가 새겨져 있어 묘소를 찾아오는 성도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준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13).
6. 그 뒷 이야기
한명동 목사님은 주 목사님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 한 주간이 지나돌고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주 목사님의 별세는 그에게 너무나 큰 슬픔이었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주 목사님을 잃은 허전함은 시간이 흘러도 가시지 않고 오래토록 그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정말 아까운 분을 잃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한 주가 동안 출입을 삼가고 주 목사님의 인간됨을 되새김하면서 기도와 명상을 보냈다. 뒷 날, 한명동 목사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너무 서운했어! 지금도 주 목사님 생각하면 무엇인가 주는 것이 있어요. 신학교 이사회 관계로 그 먼 길을 여비 한 푼 드리지 못하는데도, 통지만 하면 꼬박꼬박 참석하셨으니! 그 충성심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목탄차 타고 다니시며 너무 무리하셨어! 아무리 부산쪽으로 교회시무 이동 하시라고 해도 빙긋이 웃기만 하시고 응하시지 않았으니····· 참으로 모범스러운 목회자요, 충성된 주님의 일꾼이였어!”
남영환 목사는 주 목사 별세 후, 주 목사님 유언대로 거창읍 교회 위임 목사가 되었다.
그 해 7월 10일에 위임식을 가졌다. 백영희 전도사는 고려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대단한 뜨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지금은 서부교회 목사로 큰 교회를 이끌고 있다.
백영희 목사는 주 목사 별세 직전에 유물로 받은 성경을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그 때 일을 종종 회상하고 있다.
주 목사님의 큰 아들 주경중씨는 주 목사님께서 1946년 9월 26일에 설립한 박애원 원장으로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1953년 3월에는 거창 고등학교를 창설하고 재단 이상장이 되기도 하였다.
주 목사님의 둘째 아들 경도씨는 일찍이 일본에 들어가 있었고, 해방 후에도 일본에서 사업을 하였다. 지금도 재일 교포로 큰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
주 목사님의 딸 경순 집사는 부친 별세 후에도 동생들의 교육 뒷바라지를 위해 열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주 목사님 별세시 고등학생이던 아들 경효는 마산 고등학교 졸업하고 도일하여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나왔다.
그 후 주 경효씨는 서울 중앙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아 교회를 봉사하고 있으며, 무역진흥공사, 체신부, 재무부, 경제담당 무임소장관 보좌관을 지냈고, 동국대학에서 강의도 맡았다.
정부 부처와 학계에 머물던 그는 한국 조폐공사 이사도 지냈으며, 지금은 한국 화재보험협회 감사로 일한다. 그는 유독 모친과 함께 부친 투옥 후 고생을 많이 하였기에 지금도 그 때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경세 씨는 마산 호산나원 원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한국 화재보험협회 부산지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은씨는 의사 윤창동 씨와 결혼하여 의사의 부인으로 다복하게 지내고 있다.
한편 주 목사님의 사모님 남술남 여사는 그 후 자녀들의 지극한 효성을 받으며 평안히 여생을 보냈다. 자녀들은 장성하여 가정을 가지고 사업체를 이끌어가면서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자, 서로 어머니를 모시려 하였다.
그러나 딸 주경순 집사가 혼자였기에 제일 만만히 지낼 수 있어 마산에 머물렸다.
일본에 있는 아들 경도씨가 돈을 보내어 어머니를 위해 아담한 2층 양옥집을 마련하였다. 그 곳에서 자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동경 올림픽대회 땐 경도씨의 주선으로 일본을 구경하였다.
육 남매 자녀들은 그들의 가정마다 ‘어머니의 방’을 마련해 두었다. 언제나 어머니가 오시면 그 방에 모시는 것이었다. 자녀들은 어머니를 서로 모시려고 선의의 쟁탈전까지 벌였다.
주경효 장로는 어머니가 서울 오시자 ‘어머니의 방’에 어머니를 모시고 안마도 해 드리며 노쇠하여 여윈 어머니 다리도 주물러 드리면서
“우리 어머니 세계최고 미인이다!”
하고 소리치며, 어린 자녀들과 함께 웃었다.
주 장로는 그의 자녀들이 보는 눈앞에서 어머니를 업고 이방 저방을 다니기도 했다. 이 광경을 본 주 장로의 중학생 아들이,
“아버지! 뒷날 우리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이 많아지면 아버지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해 드리는 것 만큼 해드리겠습니다.”
하고 환하게 웃는 것이었다.
효자 효녀는 유전인가 보다. 남 여사가 마산에서 노병으로 눕자, 일본에서 아들 경도씨가 비행기로 날아오고, 거창에서 큰 아들 경중씨와 지방의 자녀들이 급히 모여 들었고, 경효 장로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남여사는 서울 성심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했다.
남여사는 말년에 자녀들의 지극한 효성에 둘러싸여 호강을 하시다가 1973년 7월 24일 아침,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7월 26일 오전 9시에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주 목사님의 유골이 묻혀 있는 거창읍 묘소의 대리석 십자가 아래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의인은 죽어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나고, 의인의 자손들은 땅 위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
의인의 자손들은 땅위에서 오늘도 남기고 간 부모들의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자녀들까지 의롭게 사라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인생은 가고 역사만 남는다.
인생이 인생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근본된 생을 살아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지구가 존속하는 한 남아있을 역사에 아름답고 흐뭇한 기록을 수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의롭게 살다가야 하지 않을까?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다.
그러나 현세의 축복과 내세의 상급은 의로운 생활의 결과인 것이다.
제17장
버릴 수 없는 이야기들
-낙수일화는 그 시기를 잘 측정할 수 없어 별도로 모았다-
1. 김중근 집사와 주일
거창읍 교회에 김중근 집사가 있었다. 그는 해방 후 트럭을 한 대 구입하여 운수업을 했다. 당시 거창군에서 트럭은 김 집사가 가진 것 한 대 뿐이었다.
어느 토요일, 김 집사는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거창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산 주 경순 집사 집에 들렀다. 주 모사님은 그 때, 몸이 편찮아 마산 딸 경순 집사 댁에서 좀 쉬고 있었다.
김 집사가 그 곳에 들렸을 때는 해가 기웃기웃 했다.
“목사님 가보겠습니다.”
김 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 목사님은,
“김 집사님, 아무래도 자고 가야 하겠습니다. 해가 다 됐는데 지금 가면 잘못하다가 주일 범하겠어요.”
하고 만류하였다.
“안됩니다. 하룻밤 자면 손해가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목사님 봉급 3배나 손해를 보게 될 겝니다.”
김 집사는 퉁명스러히 대꾸했다. 주 목사님은 그런 김 집사에게 말했다.
“김 집사님, 그래도 주일을 범하면 안됩니다. 주일을 범하면 더 많은 손해를 봐요. 육적, 영적 다 손해 보는 거야. 그러니 주일을 보고 가시오.”
허나 김 집사는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김 집사는 거창으로 향하였다. 가다가 기어이 자동차 고장이 났다. 다음 날, 그러니까 주일 날 오후 늦게야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기어이 주일을 범한 김 집사는 주 모사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후회를 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그 후 김 집사는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어 두고 두고 주 목사님 이야기를 했다 한다.
2. 충성 겸손
임시노회나 정기노회는 부산에서 주로 모였다.
교통이 불편한 때인지라 거창에서 부산 나오는 일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불참한 일이 없었고, 별로 늦게 참석한 일이 없었다 한다.
손명복 목사님이 영도 교회에서 모인 임시노회에 일찍 참석했더니 벌써 주 목사님이 와 계셨다. 하도 놀라워,
“어떻게 이리 빨리 오셨습니까?”
손 목사님이 물으셨다.
“도라꾸로 왔어요. 걸어 나오는데 용케 도라꾸를 만나서 태워 주길래 빨리 왔지요.”
그 겸손과 충성된 모습을 26년이 지난 지금도 손 목사님은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루는 손 목사님이 주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생활비를 얼마나 받습니까?”
주 목사님은 피식 웃으면서,
“많이 받지요.”
말씀하는 그 입모습엔 무거운 자족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 한번도 주 목사님은 자신의 생활비에 대하여 말해 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3. 심부름 다 해주고
주 목사님이 마산이나 부산으로 나가시는 날은 교인들과 지방 교역자들이 온갖 심부름을 다 맡겼다고 한다.
“목사님 성경 한 권 사다 주이소?”
“나도 예.”
“나는 성경 찬송 한 질 사다 주이소!”
“신 한 켤레 사다 주이소.”버선, 양말, 비누, 옷까지 부탁을 했다.
무리한 부탁을 받고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맡아 주었다. 사가지고 돌아오셔서는 장바닥 같이 사온 물건들을 펴놓고는,
“이것이 아무개 집사 것.”
“이것은 누구 것.”
낱낱이 이름을 적어 본인들에게 돌려 주었다고 한다.
4. 흉내 내는 지방 교역자들
삼군 지방 전도사들은 주 목사님을 흠모한 나머지 그의 생활태도를 흉내 내기까지 했다 한다.
주 목사님은 가방을 항시 들고 다녔다. 가방을 오른편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는데 전도사들 중에는 그대로 본 받은 이들이 많았다.
주 목사님이 식사를 하시다가 밥을 남겨 놓는 날이면, 즉각 나머지 밥을 먹어치우는 전도사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주 목사님의 신앙 인격을 그대로 소유하고 싶은 한 염원에서였다.
주 목사님의 걸음 걸이, 앉는 모습, 심지어는 기도체까지 본받는 이들이 있었다. 이는 주 목사님의 은혜를 자신도 받아 보려는 사모의 정에서였다.
마치 엘리야의 은혜를 엘리사가 계승하려는 거룩한 욕심처럼, 지방 전도사들은 주 목사님의 뒤를 다투어 따랐다.
5. 대리 집회 인도
언제인가 그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거창읍 교회에서 삼군 교회 제직 사경회를 연 때가 있었다.
강사(이대영 목사인 듯 함)가 오기는 왔으나 갑자기 편찮았다. 통지서를 내었으니 삼군(함양·거창·합천)에서 교역자를 위시하여 제직들이 모여들었다.
강사가 자리에 누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주 목사님은 강사 목사님과 상의하였다.
강사 목사님은 주 목사님을 서시라고 부탁했다. 주 모사님은,
“그럼 제가 강사 목사님의 원고를 대신 전달하겠습니다. 준비 해 오신 설교 원고를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어색할 뿐입니다. 사울 왕의 갑옷이 다윗에게 거추장스럽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목사님의 것을 가지고 하십시오.”
강사 목사님의 말대로 주 목사님은 자신의 것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그 밤부터 한 주간을 금식 철야 기도를 시작했다. 금식으로 계속 집회를 인도한 것이다. 놀라운 은혜가 내렸다. 백영희 목사님은 그 때 받은 바 그 은혜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의 어린 신앙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강사를 오게 해 놓고, 대신 주 목사님을 세워 힘있는 증거를 하게 하셨을 것이라고요.”
6. 외유내강
주 목사님 사택에는 매일처럼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들락거렸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가난한 목사 생활 가운데서도 꼬박꼬박 대접을 했다.
어떤 땐 식량이 없어 밥을 짓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교인들이 알까봐 사모님은 빈 솥에 물을 붓고 물만 끓였다고 한다.
어느 목요일 오후, 강주선 전도사가 주 목사님 사택에 찾아왔다.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밤을 함께 지냈다.
옛부터 시골에서는 잠을 잔 손님에게 아침밥을 먹여 보내는 것이 상례였다. 강 전도사는 일찍 떠날 것이었는데 실례가 될 것 같아 밥 때를 기다렸다.
밥상이 들어오는데 외 상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주 목사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남에게 대하여는 한없이 부드러우신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7. 인내의 의미
안동에 집회 인도로 가시는 길이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탔다. 그러나 기차는 떠날 줄을 몰랐다.
아침 8시에 기차를 탔는데 옛날이라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기차는 죽치고 앉아 떠날 줄을 모른다. 함께 탄 한명동 목사님이 주 목사님께,
“목사님, 집으로 들어 가십시다. 이 기차 하는 꼴 보니 언제 떠날는지 모르겠군요.”
하고 말하자,
“날 염려하지 마시고 들어가십시오. 타고 있으면 언제인가는 떠나겠지요.”
그냥 주 목사님은 앉아서 기다렸다.
기차는 밤 늦게야 떠나게 되었다.
종일을 기차 안에서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앉아서 견뎌낸 것이었다.
8. 저절로 머리고 숙여져
해방 직후 손양원 목사가 한참 부흥회를 인도하고 다닐 때의 일이다.
오종덕 목사는 어느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 한가지 있단 말입니다. 부흥사로 전국을 누비며 다니는 손양원 목사는 만나도 별 그런 생각이 없는데, 주남선 목사를 대면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야.”
9. 마산 문창교회 집회 때
해방 후 주남선 목사님은 마산 문창 교회에서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인도하신 일이 있다.
윤봉기 전도사는 통지를 받고 먼저 문창 교회에 갔었다. 아직 주 목사님은 오시지 않았다. 윤 전도사는 구마산 역으로 주 목사님 마중을 나갔다.
기차에서 내리시는 주 목사님을 보는 순간 윤 전도사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출옥 후, 처음 대면이었다. 아직 옥고의 여독이 그냥 얼굴에 깔려 있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윤 전도사는 주 목사님의 가방을 받으면서,
“목사님!”
하고 울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 있었지만 나오지를 않았다. 주 목사님은 윤 전도사의 손을 꼭 쥐어 주시면서,
“윤 조사 참 반갑군!”말을 흐렸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윤 전도사는 겨우 이 말 한마디로 하고 싶은 그 많은 말을 대신하였다. 주 목사님의 눈시울에 눈물이 번졌다.
“윤 조사, 난 감옥에서 하루도 윤 조사를 빼고 기도한 일이 없었어요. 어떤 땐 하루에 세 번이나 윤 조사 위해 기도하였지요.”
주 목사님은 눈 가에 번진 눈물을 손수건을 꺼내어 닦았다.
문창 교회에서의 집회엔 은혜가 많았다. 낮과 밤 집회를 손양원 목사님과 교대로 인도하였다. 집회 중 주 목사님은 금식을 하였다.
금식을 하시는 걸 안 윤 전도사가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 감옥에서 고생을 하시고 아직 그 여독이 풀리지도 않았는데 또 금식을 하십니까?”
윤봉기 전도사의 말을 듣던 주 목사님은 빙그레 웃음을 얼굴에 담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한 마디도 설교를 할 수 없는게 내지요.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전적 하나님께만 매달립니다. 금식은 기도를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내가 금식하는 일에 과히 염려하지 마시오.”
주 목사님의 음성은 금식을 하는 사람 같잖게 처렁 처렁 맑았다.
집회에는 은혜가 넘쳤다. 마치는 날, 주 목사님의 얼굴엔 광채가 나는 듯 훤하였다. 금식을 한 표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윤 전도사는 혼자 생각하였다.
‘이적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저럴 수가 없는 것이다.’
윤 전도사는 더욱 주 목사님의 신앙을 부러워하였고, 자신도 주 목사님과 같은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였다.
10. 승리자를 모셔와야 한다.
해방 후 한국 교회들은 어지러웠다. 신사참배 문제로 지도자들은 권위를 잃고 강단에 서기마저 주저 주저 하였다.
경주 지방에 양화성 목사가 있었다. 경주 제일 교회 목사였다. 경동 노회장으로 유능한 붕이었다. 허나 시국 인식 문제로 해방이 되자 권위가 없어졌다. 양 목사는 윤 봉기 전도사를 만났다.
“지금에 와서 목회를 안 할 수도 없고 목회를 할려니 권위가 없고, 어쩔 수 없는 입장이외다. 허니 승리자를 모시고 와서 집회를 하므로써 모든 과거의 불미로움을 씻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오. 윤 존사님은 주남선 목사님과 친한 사이이니 부디 우리 경주 지방으로 좀 모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윤 전도사는,
“내가 모시고 올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가셔서 말씀을 해 본시지요.”
하고 양 목사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난 주 목사님을 모시고 올 면목이 없습니다. 윤 조사님이 수고를 좀 해 주십시오.”
양 목사는 윤 전도사를 세 번이나 찾아와 졸라댔다. 그 무렵 주남선 목사님은 영도 뒷산에서 집회를 인도하시고 거창에 돌아가 계셨다.
영도 뒷산에서는 십일간 집회를 인도하셨다. 교역자들과 장로들의 집회였다. 모두들 은혜를 받고,
“우리가 내려 앉자. 목사 장로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한다.”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일 주일 집회를 끝내곤 장로들은 돌아가게 하고, 목사와 전도사들은 남아 계속 집회를 하였다. 마지막 삼 일 동안은 전체 목사와 전도사들이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주남선 목사님은 이 집회를 인도하시면서도 전 기간을 금식하였다. 집회를 끝마치고 거창으로 돌아온 주 목사님을 윤봉기 전도사가 찾아왔다. 윤전도사는,
“목사님, 피로하시겠지만 경주 지방 집회를 한 주간 허락하여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하였다.
9월 중에 집회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경동 노회에서는 이 집회를 통하여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가 다 내려 앉자.”
양화성 목사가 앞장을 섰다.
“두 달 동안, 강단에 서지 말고 자숙합시다.”
이렇게 그들은 신사참배 한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 자복하였다.
11. 궤변의 어느 장로
주 목사가 거창 경찰서 유치장에 구검되었을 때, 함께 구검된 장로가 있었다.
모진 고문에 견디지 못한 장로는 시국을 인식하겠다고 항복을 하고 석박이 되었다. 이 장로는 교회에 돌아와 교인들 앞에 설 면목이 없었지만 교묘한 말로서 자신을 변호한 것이다.
장로는 교인들 앞에서 비위살 좋게 말을 뱉았다.
“나는 교회를 생각하고 가정을 생각하여 시국을 인식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 목사는 달라요. 어떻게 되었든 말았든, 자기가 편하면 된다는 그런 심보였습니다. 여러분! 교인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 아는 그가 목사입니까? 나는 주 목사의 신앙을 의심합니다. 어째서 자기 혼자만 생각하고, 유치장에서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까? 나는 교회를 위하고 가정을 위해서 이렇게 시국을 인식하고 나왔습니다. 신사참배 그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이라고 교회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천당에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사상이 아닙니까? 자기가 지옥으로 가드래도 다른 사람을 위하고 노력하고 격려해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 기독신자의 할 일 아니겠습니까?”
말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변호하는 기술에 따라 옳게 보이는 법이다. 장로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교인들이 그 말에 긍정을 하였다. 계속 이 장로는 교인들을 찾아 다니며 이런 식으로 설득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으로 소유한 신자들은 그의 잘못을 꾸짖었다.
“왜 그런 엉터리같은 말을 하고 다니는 거요? 시국을 인식하고 나왔으면 부끄러워 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지, 그래 잘못을 정당화 하려는 것은 또 한가지 더 악을 행하는 일인 줄 모르십니까? 신사 참배는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하고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어려움을 참고 고난을 겪고 계신 주 목사의 신앙을 의심하다니, 당신이야 말로 기독신자가 아닙니다!”
12.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
주 목사님은 어린아이들을 자기 자녀 이상으로 사랑하였다. 거리에 나갈 땐 항시 손수건을 들고 나갔는데, 길 가에서 노는 어린이들의 코를 닦아 주고 눈곱을 일일이 다 Ep 주시는 것이었다.
어떤 땐, 손수건을 미쳐 준비하지 못하여 두루막 자락으로 아이들 코를 닦아주어 두루막 자락이 얼룩지기까지 하였다. 더러워진 손수건과 콧물로 얼룩진 두루막을 빨면서 부인이,
“세상에 남의 아이들 콧물까지 닦아 주는 사람이 어디있담.”
하고 푸념을 토하면,
“미안하오.”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주 목사님이 거리에 나서면 장난꾸러기 어린이들까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주 목사님은 어린아이들을 그의 온유한 몸짓으로 교회에 인도하였다. 많은 어린이들이 주일이면 교회당으로 밀려와 말씀을 들었다.
13. 독립운동 유공자를 찾아서
마산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경효가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아버지 주 목사님은 아들을 데리고 심방에 나서기도 하였다.
어느 겨울 방학 때였다. 경효는 주 목사님과 함께 심방길에 동행하였다. 냇가를 건널 때 외나무 다리에 올랐다.
옛날 시골의 시내는 보통으로 외나무 다리였다. 곡예사처럼 외나무를 밟고 건너야 했다. 경효는 뛰어가듯 다리를 건넜다. 허나 주 목사님은 몇 발자국 딛지 못해 그만 냇물에 빠지는 것이었다. 경효는 뛰어가 아버지를 부축하였다.
“아버지 왜 그러십니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구나.”
주 목사님의 하체는 극히 힘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일경들의 고문에 하체가 멍들었고, 오랜 형무소 생활로 잃은 힘이 되돌아 오지 않아서 그러했던 것이다.
주 목사님은 함양군 서상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부자로 사는 어떤 분의 집에 들려 혈색 좋은 노인과 긴 시간 담소하는 거시었다.
그 분도 3·1운동 당시 주 목사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유지였다. 그 집에서 나와 오형선 장로의 집으로 갔다. 오 장로 부인이 자루에 밤을 한 되 가량 넣어 주어 경효는 가지고 오면서 신바람이 났다.
오 장로 역시 독립운동 유공자였다. 주 목사님은 시간이 나면 옛날이 그리워 독립운동 동지들을 만나서 담소를 나누곤 하였다.
14. 제비 같은 사람
주 목사님이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있던 1943년도의 일이었다. 전국에는 가뭄이 심했고, 특히 거창에는 논, 밭이 뜨거운 태양열에 타들고 있었다.
이때, 거창 거리의 불신자들 입에는 이상한 말이 나돌고 있었다.
“곡식에도 해를 주지 않고, 사람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제비같은 주남고 목사를 가두어 욕을 보이니 하늘이 노하지 않을 수 있나? 변고여! 이는 확실히 변고라고····”
“그러기 말이여, 이런 가뭄을 맞아도 싸지 싸!”
이렇게 가뭄을 주 목사님 박해로 인한 하늘의 노함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5. 죽도록 충성하라
주남선 목사님의 생활 표어는 ‘죽도록 충성하라’였다. 목사님은 이 표어를 교회당 안에 써 붙였다. 주 목사님은 그의 표어대로 평생을 충성으로 사시다가 가셨다.
참으로 죽도록 충성한 주님의 조잉다.
그 후, 이금도 목사님이 거창읍 교회를 시무하시게 되고, 이 표어를 교회당 화단 돌비에 새겨 넣었는데, 주 목사님 자녀들이 대리석 돌비에 이 표어를 새겨 세울 것을 의논하여 일을 추진 중에 있다.
16.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신다
주 목사님이 일경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신 것을 친히 목격한 자녀들은 분한 생각으로 마음에 의분이 솟아 올랐다.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까?’
그 생각으로 가슴이 꽉 메었다. 경찰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업혀 나와 집에서 치료를 받을 때, 자녀들은 너무 아버지의 모습이 처참하여 모두 울었다. 주 목사님은 어린 자녀들을 달래면서,
“울지 마라. 이것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다.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생이기에 값있는 고생이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직 신앙이 어린 자녀들은,
‘이렇게 안 믿으면 예수님을 못 믿는 것인가?’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겼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던 주경순은 그곳에서도 조선 사람이란 이유에서 설움을 많이 받았다.
‘나라 없는 설움은 이렇게 큰 것이구나···’
가슴 깊이 맺혀졌다.
기숙사에 한국 학생 7명이 있었으나 고생을 견디지 못하여 5명은 되돌아가고 2명만 졸업을 하게 되었다.
주경순은 그곳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비록 내가 여자의 몸이요, 너희 나라에서 공부는 할 망정 아버지의 원수는 꼭 갚고야 말 터이다!”
하고 굳게 다짐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원수는 그들 자녀들의 손으로 갚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셨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라고 하신 성경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17. 눈물의 사람
주 목사님의 기도에는 눈물이 있다. 언제나 그의 기도는 꾸밈이나 의식이 없고 눈물과 진실만이 있었다.
새벽기도 4시에 교회로 나가 아침 9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는데 그의 기도자리엔 항상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 마루가 얼룩졌다.
교회당을 청소하는 사찰은 아예 주 목사님 기도자리 옆에 걸레를 준비해 두었다. 주 목사님의 눈물을 닦기 위한 특별 걸레였다.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그는 자신의 어떤 수단이나 꾀를 생각해 내지 않았다.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께 해결을 맡기는 것이었다.
밤을 밝히며 기도하였다. 금식을 하며 기도하였다. 금식은 간절히 기도 드리는데 좋은 효과를 주었다.
주 목사님을 바로 아는 성도들이나 후대의 사람들이 주 목사님의 눈물을 선지자 예레미야 같다고 한 것은 과장된 말이 결코 아니다.
주남선 목사 약력
1888. 9.14. 거창 동동 28번지에서 출생
1897. 서당에서 한학 수학
1908. 5. 기독교에 입신
1911. 9. 진주잠업실습소 졸업
1912. 6. 맹호은(호주선교사)선교사에게 수세
1914. 1. 거창읍 교회 집사
1919. 2. 진주 경남성경학원 졸업
1919. 2.28. 거창읍 교회 장로장립
1921. 3. 평양신학교 입학
1921. 9. 거창읍 교회 전도사 시무
1922. 8. 신한보(지하독립신문) 사건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운동 사건으 로 검거, 대구·진주 형무소에 구금
1924.12.29. 진주형무소에서 가출옥
1925. 3. 권서일 시작
1930. 평양신학교 졸업
1930. 9.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
1931. 2.22. 거창읍 교회 위임 목사
1940. 7.17.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구금
1941. 7.11. 평양형무소 입감
1945. 8.17. 조국해방과 함께 출옥
1945. 8. 경남노회 노회장 피선
1945. 9. 거창읍 교회 다시 시무
1946. 9.20. 고려신학교 설립초대이사장
1948.12. 고려고등학교 설립초대이사장
1950. 4.10. 거창성경학교 설립, 교장
1951. 3.23. 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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