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같이 빛나리 - 제1,2,3장
해와같이 빛나리
저자 서문
한상동 목사님의 권유로 주남선 목사님의 전기작업을 착수한 것이 1971년 9월의 일이었다. 일생을 산 순교자로, 순교 일념으로 사신 주 목사님의 생애를 정리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기록으로 남겨 둔다는 것은 보람된 일이므로 기쁨으로 이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다 보니 대단한 작업이었다. 우선 연고자들을 찾아 만나는 일이 큰 부담이 되었다.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 많은 시간을 내어 쏘다닌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뛰어 보았다. 자료 수집에 4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야기 배열에는 많은 참고 서적이 필요했다.
지역의 정확한 기록을 위하여 거창을 네 번이나 갔다. 그리고 합천, 함양의 여러 교회들을 다 순방하였다. 평양 형무소를 제외한 모든 곳을 다 둘러 보았다.
집필에 들어가면서 특별 기도 주간을 정하고 기도하였다. 할 수 있는 대로 주 목사님 외의 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일념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꿈마다 주 목사님이 나타나시는 것이었다. 생전에 나는 주 목사님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꿈마다 나타나시는 주 목사님은 나에게 그의 독특한 장점들을 다 보여 주셨다. 그의 옷을 입으신 모습이며, 걸음걸이, 사람을 대하는 부드러운 얼굴 모습, 그리고 그의 말 음색까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의 붓글 솜씨까지 다 보여 주셨다.
평양 형무소 일들을 집필할 때 였다. 나는 밤마다 평양 형무소에서 살았다. 형무소의 모든 광경을 선명하게 구경한 것이다. 하도 신기해서 나는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가 평양 형무소에 대하여 대화하였다. 한 목사님은 형무소의 구조를 잊고 있었다. 내가 꿈에 본 것을 이야기 할 때 기억이 살아나 세밀한 도움을 주었다.
집필이 중간 쯤 진행 되었을 때부터 한상동 목사님은 몹시도 초조감을 보이면서 출간을 기다리셨다. 그런데 결국 목사님 별세 후에야 완성이 되어 출간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 작업을 위해 주 목사님 자녀분들이 성심으로 뒷받침을 해 주셨다.
자녀들은 자신들의 가정 이야기가 공개되는 것을 계면쩍게 생각하였지만 주 목사님은 한 가정의 아버지이기 전에 한국 교계에 큰 비중을 지닌 분이시며, 그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기꺼이 출판이 되어졌다.
이제 책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신앙으로 살았으며, 어떻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 주었는가를 잘 깨달아 그 신앙 산맥을 이어가기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979, 9.20
저자 심군식
머리말
고려 신학대학장 오병세 박사
외국 격언에 “담배와 사람의 좋고 나쁜 것은 연기가 피고난 다음에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 나라에서 쓰는 격언인데, 담배가 타서 재가 되고 사람이 죽어 화장하여 재가 되고난 다음에 그 담배와 사람의 참된 가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주남선 목사님이 별세한지 25년, 이제 기다리던 주 목사님의 전기가 나오게 됨을 늦게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 주 목사님은 “오직 믿음”(Sola fide)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믿음을 빼 놓으면 흠모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일관한 어른이었다.
필자가 주 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1946년 9월 고려신학교의 개교 때 부터이다. 주 목사님은 늘 한복을 입고 다니시는 것이 그 특색이었다. 검은 가운을 입으실 때도 양복을 입지 않으시고 한복 위에 가운을 입으셨다. 주 목사님은 부태가 나는 분은 아니고, 여윈 어른이었지만 악수하실 때 젊은 사람의 손이 아프도록 꼭 잡으셨다.
그 어른의 설교에는 많은 사투리가 섞여 나오고 웅변은 아니었으며, 부흥사도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한 가지 특색이 있고, 강한 무기가 있었으니 곧 진실이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 등은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 어른에게 시원스럽다든지, 훤하다는 것은 없어도 그에게서 참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어른은 평화스럽고, 말씀은 조용히 하였으나 어려움이 올 때에는 강철같은 신앙의 소유자였다. 참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주 목사님은 자신을 나타낸다거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선전효과와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너무나 자기 선전에 급급하는 이 시대에 주 목사님 같은 분이 사모가 된다. 그는 실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분이었다.
고려신학대학의 전신인 고려신학교의 두 분 설립자 중에 남은 한 분인 한상동 목사님이 별세하신 해에 주목사님의 전기가 나오게 된 것도 뜻이 있는 일이다. 그동안 고려신학대학 안에는 주남선 목사 기념관이 건립이 되어, 그의 신앙의 유산을 기념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목회자요, 문인인 심군식 목사님의 역작을 통해서 주 목사님의 생애와 그 신앙의 열매를 자세히 알 기회를 갖게 되어 독자 여러분과 함께 기뻐한다.
이 책을 읽고 독자 여러분도 다같이 주남선 목사님의 신앙의 대열에 가담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드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한다.
제1장
손가락 자르는 소년
1. 신안 주씨의 역사
주남선 목사.
그의 젊은 날의 이름은 주남고였다.
주남고는 1888년 9월 14일, 거창군 읍내면 동동 2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안 주씨 한학자 주희현씨와 최두경 여사와의 사이에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거창에는 주씨가 많지 못했다. 많은 성은 유, 신, 장씨이며, 김, 박, 이씨 성도 꽤 많았다.
그러나 주씨는 별로 없어서 씨족을 많이 찾는 지방에서 주씨는 외로운 처지였다.
주씨는 본관이 많지만 신안에서 갈라진 것으로 신안 주씨를 가장 정통으로 본다.
신안 주씨의 시조는 주 잠이었다. 그는 본래 중국 송나라 신안현 사람으로 위대한 성리학자 주 자의 증손이었다.
송나라가 외적의 침범을 받고 있는데도 권력자들은 당쟁만 일삼고 있으므로 울화가 치밀어 아들 여경을 데리고 고려로 망명하여 와서 나주 땅에서 살았다. 아들 여경은 고종 때, 은사지 벼슬에 올랐고, 여경의 아들 주 열은 문과에 급제하여 원종 때, 충청, 경상, 전라도의 안찰사로 나가 크게 공을 세웠다.
주 열은 문장이 좋고, 글씨가 뛰어났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므로써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충렬 왕 때에는 1품 벼슬인 지도 검의 부사를 지냈다.
그가 죽고 그의 세 아들로 인하여 주씨가 웅천과 전주파로 갈라졌다가 구한말에 와서 주석면씨의 노력으로 본래의 신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나주 주씨는 그 시조를 다르게 여기고 있으며 주 잠의 후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2. 서북 경남의 중심지 거창
주목사가 태어난 거창은 경치좋고,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
소백산맥이 남서로 뻗은 능선을 타고 가야산, 덕곡산, 지리산 등의 이름있는 높은 산들이 거창을 둘러싸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창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이라 불렀다. 신라, 백제, 가야 삼국은 종종 이곳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신라 문무왕은 663년에 백제를 격파하고 이 주변에 거타주를 두어 다스리기도 하였으며, 경덕왕 16년에는 전국에 아홉 주를 두고 군과 현의 명칭을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그 때 이곳은 거창군이 되었다.
이조 태종 때에는 거제와 가소를 합하여 제창이라 부르다가 세종조에 거제는 고도로 돌아가고 거창현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3월, 지방행정 구역을 변경함에 다라 안의 일부와 삼가 일부가 합하여져서 거창군이 되었다.
지금 이 곳은 농사가 잘되어 곡창을 이루고, 산지에는 사과과수원이 많고, 특수재배로서는 인삼, 송이버섯 등 특산물이 나와 주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여주고 있다.
그러나 1888년대에는 밭 농사와 천수답에 생계를 맡기는 정도였기에 가뭄만 계속되면 흉년을 면하지 못하였다.
3. 민란과 흉년의 1888년
주남고 소년이 태어나던 1888년은 불안한 시대였다.
그 해 삼남지방에는 대 흉년이 들었고 관서 지방의 의주 일대는 큰 수해로 많은 인명을 잃었고 전국은 식량 부족으로 난관에 빠져 있었다.
흉년이 들자 곳곳에 화적떼들이 일어나 그 횡포가 심하였다. 국고는 바닥이 났고 흉년으로 화적떼가 횡행하여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고종 황제는 8월 19일에 좌의정 김병시에게 유지를 내려 이 난국을 지혜롭게 타개해 주기를 바랬다.
서북 경남 거창에도 이 시대적인 격랑은 예외 일 수 없었다. 흉년에 먹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농가에서 어린 남고는 엄마의 치맛자락에 감싸여 배가 고파 보채었다.
그런 가운데도 세월은 흘러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식량이 없는 농가에서는 가을철에 주워 놓은 아주까리 잎사귀와 도토리 등으로 연명을 하여갔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으나 봄은 사람들을 더욱 허기지게 한다. 동네 아낙네들은 날이면 날마다 들과 산에서 살았다. 쑥을 캐고, 산나물을 뜯었다.
남고 어린이는 엄마의 저고리 등에 매달려 들로 산으로 다녔다. 철없는 어린 것은 배고픈 것도 잊은 듯 엄마의 등이 좋아 방긋방긋 웃음만 날리는 것이었다.
아가는 걸음마를 배우면서 송피죽과 도토리 묵으로 배를 채웠고, 파리한 모습으로나마 무럭무럭 잘 자랐다.
진달래, 철쭉이 피고지는 봄이 여러차례 지나갔다.
4. 아버지의 운명 앞에서
주남고 소년의 형제는 삼 형제였다. 위로 형이 있었고 아래로 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형 주남재는 이미 어린 나이에 백부 댁으로 입양되어 양자로 갔고 집에는 그와 동생 남수만이 부모님 슬하에 있는 셈이었다.
남고는 설상 장자의 위치에 있었다. 어린 남고 소년은 남달리 총명하였고 말 수가 적고 조용하였다. 희생 정신이 강한 그는 매사에 남이 하기 꺼려하는 일에 잘 나서곤 하였다. 자기가 해를 볼찌라도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는 착한 마음은 그의 생활에 뚜렷이 나타났었다.
남달릴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엔 우애가 깊은 소년이었다. 남고 소년은 여섯 살 때 서당에 들어 갔다. 아버지가 한학자였기에 교육열이 대단하였던 것이다.
무슨 일에나 열중하기를 잘하는 소년 남고는 공부에도 그러하였다. 종일 벽을 바라보고 글을 암송하는 날이 많았다.
아들의 글 읽는 모습을 바라보고 아버지는 혼자 말로,
“남고는 앞으로 반드시 한 자리 할꺼야.”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성공을 보지도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남고 소년이 15세 되던 해 였다. 아버지는 모진 병에 걸려 약 한첩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숨을 모우는 것이었다. 남고는 차마 아버지의 마지막 고통의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으로 뛰어나간 그는 부엌으로 달려가 식칼을 잡아 쥐었다. 아버지의 운명을 지켜보던 남고는 불현 듯 언젠가 이웃 어른들이 주고 받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숨이 넘어가는 운명의 순간에 사람의 피를 마시면 다시 얼마간은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소년 남고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자식은 부모의 피를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난다. 자식에게 피를 주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그 부모가 숨을 모운다. 이 절박한 순간에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부모를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도우고 싶었다.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남고는 칼을 쥐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남고를 본 순간 만류할 사이도 없이 남고는 칼로 왼쪽 무명지 손가락을 싹둑 잘랐다.
붉은 피가 치솟는다.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떨어뜨렸다.
진한 피가 한 입 고인다.
“아버지!”
남고는 목메인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의식을 잃은 채 한 입 고인 피를 꿀꺽 삼킨다. 계속 피는 입으로 흘러 들어간다. 아버지는 피를 계속하여 마셨다.
“아버지!”
부르는 남고를 아버지는 빤히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말을 할려고 하였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계속 입을 우물거리드니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남고 소년은 아버지의 시체 위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우는 것이었다.
“아버지!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버리고 가십니까?”
참았던 슬픔이 강물처럼 넘쳐 흘렀다. 울고 또 울었다.
남고 소년의 이 효성어린 아름다운 이야기는 거창 온 마을에 널리 널리 퍼졌다.
훗날 남고 소년이 거창 군수에게서 효자상을 받게 된다.
5. 어머니를 위하여
남고 소년은 편모 슬하에서 네 살 아래인 동생 남수와 그렇게 자랐다. 부지런하고 착실한 남고는 어머니를 도우며 집안 일을 잘 돌보았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는 몹시 중한 병에 걸려 기침을 심하게 하며 자리에 몸져 누워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이라 끼니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처지였기에 약 한 첩 제대로 쓰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목에는 담이 끓고, 신열이 많이 나면서 기침이 나는 것이다. 남고는 밤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 머리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며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발자 남고는 이웃 노인을 찾아갔다.
“할아버지! 담이 끓는 데는 무슨 약이 좋심껴?”
노인은 측은한 생각으로 남고를 바라보고는,
“모친이 많이 편찮으시다면서.... 그래 기침을 많이하냐?”
“예, 신열이 나면서 담이 끓고 기침을 많이 합니더, 너무 심합니더”
“담이 끓고 기침하는데는 엄나무가 제일인데....”
“엄나무가 예?”
“그래, 엄나무 껍질을 벗겨 다려먹으면 나을 거야.”
“감사합니더.”
남고는 집으로 돌아와 망태기에 낫을 챙겨 넣어 어깨에 메었다.
산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엄나무 껍질을 벗기려가는 것이다. 엄나무란 오갈피 나무과에 딸린 낙엽고목으로 전나무 소나무처럼 줄기가 굳고 굵으며, 높이 자라는 나무이다. 재목은 집안 살림에 쓰는 모든 가구를 만드는데 쓰이고, 껍질은 한약 재료에 많이 쓰이는 것이다.
남고는 이 엄나무를 구하기 위하여 덕유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계곡을 가로질러 능선에 올라서다가 나무를 발견하였다.
망태기를 내려 놓고 낫을 들어 껍질을 벗겼다. 어머니의 병을 고친다는 일념에서 열심히 껍질을 벗겼다.
가을 햇살이 따갑게 쏟아진다. 이마에 구슬땀이 솟는다. 눈앞이 어지러워지면서 팔에 기운이 빠진다. 찬밥 한 덩이 제대로 먹지 못하는 몸이기에, 일이 지나치면 이렇게 현기증이 나는 것이다.
남고는 눈을 감고 얼마를 멍하게 앉아 있었다.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흘렀다.
계곡 쪽에서 산 꿩이 운다.
남고는 다시 손에 힘을 주어 낫을 움직였다. 오후 늦게야 한 망태 캐어 산을 내려왔다. 종일을 굶었지만 배고픈 줄을 몰랐다.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밟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왔다. 부엌에 들어가 솥을 씻고 엄나무 껍질을 부었다.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댕겼다.
밤을 지새우며 약을 다리는 것이다.
잠시도 부엌을 떠나지 않고 불을 지폈다. 닭이 홰를 치며 울 때에야 약을 떠내어 방으로 들어갔다.
약 사발을 어머니 머리곁에 놓고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남고는,
“어머니, 약 드이소!”
나직이 말을 한다.
남고 소년의 두 눈엔 눈물이 빙그르르 돈다.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 뼈만 앙상한 어머니가 주검처럼 묵묵히 누워 있었다.
“어머니! 약을 다려 왔심더!”
힘주어 말하는 남고 소년의 두 번째 목소리에 어머니가 멍히 눈을 뜬다.
“일으켜 드릴까예?”
남고 소년은 몸을 굽혀 어머니를 부축하려 한다.
“약이 어디서?”
“제가 산에가서 캐와서 고운 것 아닙니껴, 엄나무 껍질입니더. 가래 기침에는 제일 좋은 약이라 캅니더!”
어머니는 남고 소년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일어나 꿀꺽꿀꺽 약을 마셨다.
“빨리 일어나셔야지예.”
“그럼예, 오래 오래 사셔야지예.”
남고 소년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 방울이 방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엄나무 약을 먹은 이후 어머니의 병세는 차도가 있었다. 밖에 나와 움직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지는 못하였다.
낮에는 밖에 나가 일을 하시며, 별로 아픈 표를 내지 않았지만 밤만되면 고통을 심하게 당하는 형편이었다. 남고 소년은 계속 엄나무 껍질을 벗겨와서 삶은 물로 단술을 만들어 어머니께 드리기도 하였다. 어머니의 병은 점차로 나아 건강이 회복되었다.
제2장
장터에서 얻은 복음
1. 복음을 받고
거창은 군수가 정사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 무렵 군수는 부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부사는 종 삼품관으로 지방행정 전체를 도맡아 사법 행정까지 손을 댔다.
이 부사 제도는 1895년까지 있다가 없어졌지만 그 후 얼마동안 군수가 부사의 세력으로 행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주남고는 한학자의 집안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한학에 능하였기 때문에 19세에 벌써 등용되어 군수 밑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거창 군수가 나들이를 할 때 주남고는 군수를 모시고 다니며 안내역을 하였고, 관청 안에서는 특별 비서역할을 하였다.
주남고 청년은 진실하고 얌전하며 성실하였기 때문에 군수의 총애를 받았다.
관청 안에서 주남고는 부러움의 댓아임 되었고, 거창 사람들은 주남고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주남고에게 특별히 친한 사람 두 분이 있었다. 그들은 오 형선과 조재룡이었다. 그들은 연령적으로는 차가 있었지만 우연히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 우연이란 것이 묘한 우연으로 복음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866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로부터 44년 후인 1908년에 거창에도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것이었다.
어느 거창 장날의 일이었다.
지방을 다니며 전도하는 분이 있어 장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을 기회로 전도강연을 하였다. 전도인은 사과궤짝을 엎어 놓고 그 위에 서서 무성영화 변사식을 전도강연을 하는 것이었다.
이 전도강연을 유독 흥미있게 듣는 분이 셋 있었는데 바로 주남고, 오형선, 조재룡 등이었다.
오 형선은 황해도 사람으로 한학을 많이 하였지만 서울에서 신학문도 익힌 사람으로 서울서 기독청년 회관에 출입을 하면서 기독교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는 금광을 하기 위하여 거창에 내려왔고 거창군 남하면 양향리에 금광을 개업하였다.
또한 조재룡은 지방의 장터를 찾아다니며 담뱃대를 파는 사람이었다. 그는 안의에 가서 조정섭씨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거창 장날이 되면 꼭꼭 찾아와 전도강연을 하는 전도인에게 세 사람은 모두 호감을 가졌다.
어느 장날, 주남고가 오형선과 조재룡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 저 전도인을 한 번 만나서 좀 물어 봅시다.”
그랬더니 두 사람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셋은 조용한 장소에서 그 전도인을 만났다
주남고가 말했다.
“선생님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를 믿으면 죄 없이함이 되고,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죽으면 천당가게 되지요?”
조재룡이 입을 열었다.
“예수를 잘 믿을려고 하면 어떻게 하여 됩니까?”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찬송을 배워야 합니다.”
이 때, 조재룡의 얼굴에 어둠이 지나갔다.
그는 담뱃대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안 끊고는 안됩니까?”
조재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은 힘이 들겠지만 점차적으로 끊어야 되지요.”
“찬송을 좀 가르쳐 주시오.”
주남고는 전도인에게 매달렸다.
찬송가를 몇 개 배우게 되었다. 오형선과 조재룡은 제법 잘 불렀는데 주남고는 찬송가가 잘 되지 않았다.
주남고는 예수를 잘 믿어보고 싶었다. 시간만 나면 오형선과 조재룡을 찾아 갔다.
오형선은 금광 직원들에게 복음은 전하였는데 직원 중 박창호가 받게 되었다.
1909년 5월.
금광 사무실에서 주남고, 오형선, 조재룡, 박창호 등이 모여 찬송을 불렀다.
찬송을 부르다가 조재룡이
“담배 한 대 피우고 부르자.”
하고 말했다.
모두들 담뱃대를 허리춤에서 뽑아내어 담배를 쟀다.
불을 붙이고 담뱃대를 빨면서 서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오형선은 술이 보통이 아니었다. 한 말을 지고는 못가지만 마시고는 끄덕없이 다니는 위인이었다.
“목이 컬컬한데 한 잔 마시자.”
그들은 찬송을 부르다가 술을 마셨다.
그런식으로 얼마를 지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래도 예수를 잘 믿으려고 하면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주남고가 먼저 제의를 하였다.
“예수를 믿을려고 하면 잘 믿어야지, 이런식으로 해서 되겠습니까? 담배와 술을 끊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돈을 모아 집을 하나 사서 주일마다 모이도록 합시다.”
모두 그게 좋겠다고 응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금광 사무실에서 주일마다 보여 예배하고 뒤에 돈이 마련되면 집을 사서 별도로 모이도록 의견을 모았다.
어느 주일의 일이었다. 웅양교회 안덕보란 분이 금광 사무소로 찾아왔다. 그는 웅양교회의 집사였다.
거창 금광 사무실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안 덕보는 오형선과 전부터 안면이 있는 처지였다. 안덕보 집사는 예배를 인도하고 생각이 나서 건축연보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모두 찬성하고 연보하는 일에 힘을 합하였더니 25원의 연보가 거두어졌다.
2. 거창읍 교회의 시작
25원의 돈으로 죽전에 있는 초가삼간을 한 채 살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주일이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도니 것인데 이것이 거창읍 교회의 모체가 된 것이다.
그 후 호주 선교사 맹호은, 길아각 목사 등이 거창에 와서 교회를 지도하며 전도를 하였다.
안개속처럼 흐릿했던 신앙의 세계가 서서히 선명하게 되어졌다. 주남고는 선명한 신앙세계가 보여지자 열심을 내었고 드디어 가창 군수의 비서관직을 그만 두었다. 그는 자유업으로 신앙생활에 주력하고 싶었던 것이다. 낮에는 잠업 실습소에 나갔고 밤이면 교회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가정을 도우는 일도 중요하고 농촌을 부강하게 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교회를 부흥케 하는 일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주남고 청년의 가슴에는 복음에 대한 불씨가 솟고 있었다.
새로 개척된 거창교회를 더욱 발전시키고 큰 교회로 확장시키고 싶은 마음이 주남고 청년의 가슴을 눌렀다.
주일이면 거리에 나가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가림없이 교회당으로 인도하였다.
열심히 찬송을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쳤다.
그러나 찬송만은 여전히 잘 되지 않고 힘이 들었다. 하도 힘들게 찬송을 가르치며 땀을 흘리고 있기에 뒤에서 이 모습을 본 어떤 노인이,
“그만하고 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하게!”
측은한 듯 말을 던졌다.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때는 이미 주남고 청년은 담배도 술도 깨끗이 끊은 다음이었던 것이었다.
거창읍 교회는 이렇게 발전되어 갔고 믿는 사람의 수가 날로 더하여 갔다.
3. 첫 기도 응답의 체험
1911년 9월. 주남고는 잠업 실습소를 수료하게 되었다. 수료식 날, 주 남고는 전 학생 중 모범생으로 상을 받게 되었다. 매사에 적극성을 지닌 그는 변함없는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그해 12월에는 맹호은 선교사에게서 학습을 받았고, 다음 해인 1912년 6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고 진주로 내려가 잡업 강습소에 들려 다시 잠업 강습을 받았다.
가난한 농촌과 교회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 이 특수기술 노동으로만 가능한 줄 안 까닭에 이 일에 힘쓴 것이다.
그 해 9월, 만 3개월의 강습을 받고 거창으로 돌아온 주남고는 본격적인 양잠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누에를 기르면서 동민들에게도 사육법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는 어엿한 누에사육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누에의 품종은 그 수가 많았으나 그 특성은 비슷하였다. 누에는 습기에 약하며, 사람의 손을 많이 필요로 했다.
남고 청년은 많은 누에를 사육하였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토실토실 살이 올라 한 방 가득히 자라고 있었다. 앉을 자리마저 빼앗긴 그는 그래도 누에가 자라고 있는 것에만 마음이 흥겨웠고 대견스러웠다.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가을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종일을 비가 내렸다.
비는 며칠을 계속 내리기 때문에 마른 뽕잎을 줄 수 없게 되었다. 누에는 배가 고파 야단이었다. 뽕잎 줄기까지 누에는 파먹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축축한 뽕잎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물뽕잎을 먹은 우에는 머리를 축 내리며 그만 시들어갔다. 푸른 똥을 싸며 맥을 잃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전멸 될 수 밖에 없다.
친구들이 와서 보고는 조롱의 말을 던지고 갔다.
“기술자도 별 수 없군.”
그는 가슴이 답답하였다. 일손을 멈추고 멍이 시들어진 누에들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 앞이 캄캄해지며 어지러웠다.
그는 다른 방으로 갔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외쳤다.
“사랑하는 주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살려 주옵소서!.....”
그의 기도는 애절하였다.
구슬땀이 이마에 송알송알 맺혔다. 땀방울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흐른다. 뜨거운 물도 땀방울과 함께 어울려 흘러 내리는 것이었다.
그는 주 예수를 믿은 이후 처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올린 것이다. 몇 시간이고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부르짖었다.
그가 누에 때문에 골방에 앉아 기도한다는 소문은 마을에 번졌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비웃고 있었다.
“어리석은 일이야, 누에가 다 죽어가는데 기도를 하다니......”
“글세 말이야, 기도를 하면 죽은 누에가 살아날까? 참 내.....”
그러나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주께서는 구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주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가슴이 밝아 오는 듯 하여싸.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평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불안하고 답답하던 마음이 후련해 지면서 기쁨이 찾아왔다. 그는 기도를 마치고 누에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렇게 머리를 떨어뜨리고만 있던 누에들이 머리를 힘있게 들고 열심으로 뽕잎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기적이었다. 그는 주 예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을 확실히 믿었다.
누에가 다시 생기를 얻어 살아났다는 그 자체보다 자신의 미미한 존재를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자신의 존재성을 인정해 주셨다는 그 사실 앞에 감격의 눈물을 쏟은 것이다.
누에가 좋은 성적으로 결실을 얻었다. 계속된 비 때문에 모든 누에가 다 전멸되었으나 유독 남고 청년만이 좋은 결실을 얻었으므로 그 성적은 상부에까지 보고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해 총독의 상장까지 받게 된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특별 기도를 올렸고 응답을 받아온 것이었다. 이 누에 사육은 훗날 그의 목회 생활에도 산 체험을 준 사건이 되어졌다.
4. 신앙의 오름 길에서
1914년 주 남고는 집사가 되었다.
거창읍 교회에서 집사 임명은 이해에 처음으로 했다.
이때 같이 집사 임명을 받은 사람은 황보기, 최봉성, 이평군 등이었다.
그 해 4월 16일, 죽전 맹호은 선교사 댁에서 제1회 제직회를 모이게 되었다.
교회가 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교인들도 많아졌다. 주남고 집사는 가사를 돌보면서 밤이면 성경 읽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고 교회 봉사에 더욱 열을 내었다.
그해 5월 10일. 주남고 집사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부는 합천 가야사람, 남병현씨의 둘째 딸 남술남 규수였다. 남병현씨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딸을 믿는 총각외엔 결코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주장을 해 왔다. 그런 중 거창읍 교회에 좋은 총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중매를 넣은 것이다.
총각의 나이가 열 살이나 위였다. 허나 예수 잘 믿는 총각이란 이유에서 남병현씨는 주저하지 않고 딸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당시 남병현씨는 한학자였고 살림도 넉넉하였다. 결혼식은 시골에서 보기드물게 신식으로 교회당에서 거행하였다. 흰빛 사과 꽃이 활짝 핀 고갯마루를 꽃가마가 넘어올 때 온 거창읍 교회 성도들과 마을 사람들은 신랑 신부에게 축복을 빌었다.
신혼 생활이 계속되면서도 주 집사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다.
그해 3월. 주 집사는 진주로 갔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하여 경남 성경학원을 찾아간 것이다. 그의 가슴에 주 예수님으로 열이 올라 있었다.
29세 청년의 가슴은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불타고 있었다.
성경은 배우면 배울수록 확신을 주었다. 먼저 자신이 은혜를 받아야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주남고 집사는 열심으로 성경을 공부하였다. 드디어 1919년 경남 성경학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그해 2월 28일. 본 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다. 장립을 받은 주 장로는 더욱 부지런히 교회 일에 전념하였다.
제3장
선동자 삼형제
1. 독립운동의 배경
1910년 8월 29일. 한·일 합병 조약문이 공포됨으로써 대한 제국은 조선으로 개칭되었으며, 일본 통감부는 총독부로 바뀌면서 조선통치의 기본 방침을 무단 정치로 나타내게 되었다.
총독부는 공무원들의 복장을 통일시켰다. 경찰관과 모든 공무원들에게 금테두른 모자를 쓰게하고 군복 비슷한 복장을 하므로써 조선 사람들을 억압하게 되었다.
헌병 사령관이 경찰을 총지휘하게 되니 이는 헌병경찰이었다. 그들은 무례한 자들로 구성되었고, 조선 사람을 짓누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의 이 악랄한 정치에 반대하여 곳곳에서 애국지사들이 힘을 모우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일본인들은 기독신자들을 두려워하였다. 그 이유는 기독신자들 뒤에는 미국과 영국인들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한 음모를 생각해 냈는데 이것이 데라우지 총독 암살음모 사건이었다.
1911년 12월 28일. 서울과 의주 사이를 연결하는 경의선 철로 개통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날 총독이 참석하게 되는데 신민학회와 배일 사상의 중요 인물들이 총독을 암살하기로 음모한 것이 사전에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 없는 거짓이었다. 신민회의 창설자는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 애국사상이 투철한 사람을 엄밀히 택하여 조직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장차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육기관을 세우고 정치, 문화, 경제 등 각 방면의 진흥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민족운동은 제 2세들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어야 한다고 먼 미래를 바라보는 그들이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총독암살 음모사건은 순전히 일본인이 꾸며낸 허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허위 음모를 한국인들에게 덮어 씌운 신민회 간부들과 기독교 중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9월, 전국에서 지식층과 기독교 지도자 600여명을 검거 투옥시켰다. 그들은 죄없는 이들 한국 지도층의 사람들을 혹독한 고문으로 괴롭히며 치사자까지 내었다.
1912년 6월에 그들 중 105인을 경성지방 법원의 공판에 넘겼으며 9월에는 전원 유죄판결을 내려 5년 내지 10년의 징역형을 내린 것이다.
평화로운 한국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모진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을 무렵, 한국의 평화를 도와 주어야 할 구라파에서는 전쟁이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1914년 7월 28일. 새벽 세계 제1차대전이 발칸 반도에서 터졌다.
전쟁은 비참한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T.W. Wilson)은 1918년 1월, 세계 열강에 14개 조항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특히 세계 약소민족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었다. 세계 1차 전쟁은 그 해 11월에 월슨 대통령의 알선으로 휴전 조약을 체결하므로써 끝이 났다.
이 세계적인움직임에 돛을 올리고 자주독립을 찾기 위해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독립만세가 이 땅에 메아리치게 되었다.
독립 만세는 교회가 먼저 부르게 되었다. 3·1운동을 처음 계획하였던 민족대표 중 대부분이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방 교회가 앞설 수밖에 없었다.
평양 남산현 교회와 장대현 교회에서는 서울보다 한 시간 앞선, 1919년 3월 1일 오후 한 시에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를 부름으로써 이 나라 제일 첫 번째 독립 만세 사건이 되었다.
서울은 오후 두시에, 이리하여 독립 만세의 함성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2. 거창 지방의 독립운동
독립만세운동은 각 지방 도, 군, 읍, 면, 리, 동으로 파급되었다.
도별에 따라서 날짜가 달랐다. 남부 지방의 전라도와 경상도는 3일 이후에 시작되었다.
경상남도는 3월 3일에서 4월 29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것은 전국에서 가장 오랜 시일동안 운동이 계속된 것이다.
3월 3일은 부산과 마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정도였고, 11일에 부산진 광장에서 만세시위가 시행되었다.
12일부터 각 지방으로 만세운동은 번져 갔는데, 합천이 18일, 거창과 산천은 20일에 거사가 시작되었다.
거창군 가조면 양기리 시장에서 독립만세 사건이 터져 4명이 순국하고 나머지 분들이 투옥되었다. 거창읍에서도 독립운동 사건은 교회가 주동이 되었으며, 주남고 장로 형제분들이 선동이 되었다.
남고 장로의 백씨 남재씨는 민족주의자로서 성경이 강직하고 정치에 밝았다.
그의 제씨 남수씨도 투철한 애국청년으로 뒤에 거창 의용군으로 뽑혀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하다가 순국하였다.
남고 자올 삼형제는 이때 뜻을 합하였고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선동하였다.
거창교회 오형선 장로와 고운서씨를 거창, 합천 지방의 조직 책임자로 맡기고 교회 청년들을 선봉으로 주민들을 일깨워 독립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3월 20일경 거창은 지역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다.
3. 평양 신학교에 입학
주남고 장로는 복음 전도에 대한 열심이 가슴을 태웠다.
“신학교에 가자!”
그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 올 때마다 더욱 간절하게 자신을 향하여 다짐하였고 기도 할 때마다 이 문제를 앞세웠다.
복음을 전하다가 죽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하였다. 먼저 전도사 시취를 받기로 하였다. 신학교에 입학 하려면 전도사 시취에 합격해야하기 때문이다.
1921년 3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모이는 경남노회에 참석하여 전도사 시취에 응시하였다. 그 날 함께 전도사 시취를 받은 사람 중에는 주기철 전도사도 있었다.
그 해 일곱 사람이 전도사 시취에 합격을 하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울렁이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평양으로 올라 갈 준비를 서두르는 것이다. 평양 신학교, 말만 듣던 평양 신학교에 가게 되는 것이다. 평양 신학교는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들이 교육을 담당한 보수주의 신학교였다. 한국에 이러한 신학교가 설립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신학교 교장은 나부열 박사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평양으로 올라갔다.
시험은 힘들지 않았다.
그는 이미 대구 형무소에 있을 때, 신구약 성경을 암송해 두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33세의 중 늙은 학생으로 입학이 되었다. 주기철 전도사도 함께 입학이 되었는데 그는 24세의 청년이었다.
둘은 전도사 시취때부터 알게 되었으므로 신학교에서는 친숙하였다. 같은 영남 사람이요, 성이 같다는 이유에서 더욱 친근하였는지 모른다.
신학 공부는 보람이 있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색다른 어학 때문에 고충은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익숙되어 갔고, 재미가 있었다.
학기 시험을 치고나니 곧 방학이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한 학기를 마치게 된 것이다. 짐을 꾸리고 기숙사를 떠날려하니 아쉬움에 코가 찡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심으로 가사를 돌보며, 전도를 하며 교회를 봉사하였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등교하지 못하였다. 경제적 사정 때문이었다.
그 해 10월, 교역자로 시무하던 오형선 장로가 사임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 당회와 제직회에서는 주남고 전도사를 시무토록 하자고 결정하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모교회 전도사로 일보게 되었다.
4.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운동 사건
나라없는 민족은 서러웠고, 힘이 없는 백성은 슬펐다.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으려는 간절한 소망은 2천만 민족의 염원이요, 주남고 장로의 애절한 소원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지하조직을 통하여 우리나라 각 지방에까지 연락이 미쳤다. 지리산은 서북 경남 독립운동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만주 군정서에서 독립군의 의용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 운동이 비밀리에 시행되고 있었다. 만주 군정서는 상해 임시정부 소속기관이다.
한국에서 만주로 이주해 간 우리 민족들이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부민단이란 조직을 가졌다.
이것은 흉년으로 인하여 자금이 결핍되고 원주민들과도 알력이 있으므로 한 민족의 정신적 단결과 상호 협조를 위하여 조직된 단체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부민단은 한족회로 발족되었다가 임시군정부가 되어 임시정부 소속 군정서가 된 것이다.
군정서에서는 비밀조직을 통하여 국내에 의용병과 군자금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 일은 성공리에 진행되어 거창 지방에까지 손이 닿게 되었다. 1922년 8월 이 일에 주남고 전도사가 책임을 맡아 거창지방 책임자로 비밀리에 모집운동을 시행하였다.
주남고 전도사 제씨 주남수씨는 독립군의 의용병에 지원하였다. 남고 전도사는 오형선 장로, 고운서 전도사, 김태연씨 등과 상의하여 모금운동에 나섰다.
나라를 위하여는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굳은 결의로 동지들은 먹는 것, 잠자는 것을 잊고 뛰었다.
그러나 이 일은 어느 정도 성사 될 무렵, 민활한 일본 고등계 형사진에 의하여 단서가 잡혔고, 주동자 전원이 검거된 것이다.
검거되어 대구 형무소까지 넘어간 애국 지사들은 다음과 같았다. 주남고, 이덕생, 김태연, 고운서, 이사술, 이성두, 백기주, 이태홍, 진도출, 주남수, 정장현, 이갑수, 오형선, 한성진 등 14명이었다.
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포승에 묶여 처참하게 경찰서로 끌려갔다.
거창 경찰서에서 조서가 꾸며지는 동안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경찰서 별실 시멘트 바닥은 이들 애국열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몇 번이나 많은 물로 시멘트 바닥을 씻어 내어야 했다.
5. 옥고 2년
조서가 다 꾸며지자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전원을 의성 경찰서로 압송하였다.
의성 경찰서에서의 고문은 더욱 혹독하였다. 손가락 사이에 나무토막을 넣고 누르고, 손등을 구둣발로 짓뭉갰다. 이 고문 이후, 주남고 전도사는 장지뼈가 부러져 휘청했고 출감 후에도 계속 글을 잘못썼다 한다.
주남고 전도사의 글씨는 명필이었다. 허나 고문 후 장지가 휘어져 글씨가 엉망이 되었고, 설교 원고를 쓸 때마다 한참씩 장지를 만지곤 했다 한다.
또한 일경은 머리에도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의성 경찰서에서의 고문은 다른 곳에서 받은 고문의 몇 갑절 더했다. 머리를 너무 많이 때렸기 때문에 정신이 얼얼하고 멍청하게 되었다. 그들이 머리를 혹독히 때린 이유는 정신 이상이 되라고 한 처사이다. 정신이상자가 되면 독립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받은 고문으로 출옥 후에도 주남고 전도사는 종종 머리가 띵하게 아파온다고 말씀하시며 한참씩 눈을 감고 멍하니 앉아 있곤 하였다.
의성 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대구 형무소에 넘어갔다.
대구 형무소에서도 고문은 계속되었다. 대구 형무소에서 1년을 미결로 있는 동안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인간으로써 차마 견딜 수 없는 혹독한 나날을 보냈다.
고문의 형태는 차마 이루 다 글로 쓸 수 없지만 그 주 한 방법은 엄지 손가락 두 개를 질긴 노끈으로 한데 묶어 대들보에 매어다는 것이었다. 무거운 몸이 손가락 두 개의 힘으로 공중에 매달려 견디어 내기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손가락이 끊어지는 아픔과 고통은 표현하기 어렵다.
밤이면 물을 먹이고 싸늘한 시멘트 바닥에 앉혀 팔을 뒤로해서 다리에 얽어 묶어 놓고는 전신에 고통을 주기도 하였다. 이 극악한 형벌을 어찌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극악한 고문을 감행한 것인가?
사람으로 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일본 경찰들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하여 나타난 악마의 화신이었다.
주남고 전도사, 그는 이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기도와 성경 읽는 일에만 힘썼다. 대구 형무소 1년의 세월 속에 신구약 성경을 거의 암송하였다 한다.
1921년 3월 4일. 재판에서 징역 1년의 선고를 받았다.
그는 진주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포승에 묶여 진주 땅으로 들어설 때, 감개가 무량하였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성경학원을 찾아오던 6년전의 일이 생각났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 백성, 특히 조상 대대로 미신과 우상숭배에 사로잡혀 죽음처럼 살아가는 이 민족에게 참 삶의 길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성경학원을 찾아 왔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아무런 죄가 없으면서도 몸은 포승에 묶여 감옥에서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자동차에서 내려 형무소로 들어 갈 때. 핏기 없는 시민의 얼굴들이 연민의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피골이 앙상한 처참한 주남고 장로의 모습.
1년 동안 경찰서와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겪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잤다.
햇빛을 보지 못한 파리한 그의 모습은 해골에 거죽만 씌운 것 같았다. 목숨만 붙은 송장같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동정어린 눈길을 주었다.
진주 형무소의 실팍한 철문이 열리고 간수의 인도를 따라 주 남고 장로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침울한 감방,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정해진 감방에 들어서자 둔한 금속성 소리를 내며 쇠문이 닫혔다. 형무소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주남고 전도사. 그는 원망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고 사는 그에겐 원망이 없었다. 아무리 심한 고문을 하여도 입을 열 줄 모르는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의 신본주의의 철저한 신앙, 애국 애족의 강인한 사상은 어떤 고문이나 형벌로도 꺽을 수 없었다.
그 어둡고 침울한 감옥안에서도 그는 기도와 성경암송으로 하나님과 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의 열풍도 믿음으로 견디어 내었다.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갔다.
가을이 가고 추위를 몰고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감옥의 겨울은 춥다. 난방 장치가 있을 리 없고, 따뜻한 침구가 있을 리 없다. 오돌오돌 떨면서 이 추위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허약한 그의 몸은 추위를 이겨내기엔 너무나 지쳐 있었다.
1921년 12월 28일. 가출옥이 허락되었다. 어쩐 일인가? 아직 3개월이 더 남아 있는데 웬 일인가? 아마 몸의 허약함과 그의 모범스러운 인감됨에 일인의 마음이 움직여졌던지 출옥이 허락된 것이었다.
주남고 전도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출옥으로 그리운 고향의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2년 만에 돌아 온 집은 남의 집 같았다. 집을 떠날 때 3살 되었던 경중이 벌써 5살의 개구쟁이로 자라 있었다. 밖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왔다는 소리에 뛰어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뼈만 앙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눈만 깜박이고 있다.
포승에 묶여 거창 경찰서를 떠날 때, 전송나온 엄마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자던 둘째 아들 경도가 말을 익히고 있었다.
벌써 3살이 되었구나, 주 장로가 경중이와 경도를 양팔에 와락 안으면서 그들의 볼을 비비니 하염없이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고생을 했나?”
자신이 당한 고난보다 어린 것들이 가여워 더욱 슬펐다.
보다 더 마음 쓰리고 아픈 것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때다. 방에 누어 있다가 아들이 왔다는 소리에 겨우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시는 어머니!
주남고 전도사는 뛰어가 어머니 앞에 쓰러졌다.
어머니는 아들이 검속되어 가던 그날부터 얼마나 마음을 많이 상하셨던지 귀도 멀어지고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보행도 잘 하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어머니 앞에 눈물을 쏟으며 주 장로는 얼마동안 쓰러져 울었다.
마당에 서 있는 아내를 보았다. 만사에 불평을 할 줄 모르는 착한 아내. 흙일 길쌈과 바느질, 어느 하나 꺼려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며 신앙으로 현실을 견디어 나간 충실한 여성, 그녀는 한국의 훌륭한 여성이었다.
주 장로는 몸이 회복될 여유도 없이 다시 가정을 돌보며 교회 봉사하는 일에 열중했다. 특히 어머니를 모시고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다.
자신의 건강보다 어머니의 병환을 위하여 애타게 부르짖었다.
기적적으로 어머니의 병환은 낫게 되었다. 귀도 밝아지고, 눈도 잘 보이게 되었다. 주남고 장로는 참으로 효성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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