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다시 살필 삼분론 - 벌콥의 이분설에 대하여
다시 살필 삼분론 - 벌콥의 이분설에 대하여
1.교회사에서 본 입장
1)삼분설의 기원이 그리스 철학이라는 주장
이분설이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나올 수 있었듯이, 삼분설도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나올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 서로가 연구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이분설이던 삼분설이던 스스로 철학을 근거했다면 그렇게 보아주면 될 것이고, 본인이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할 때는 성경만 가지고 살피는 것이 옳습니다.
말씀이라는 뜻이 헬라어 로고스이며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기 전 "로고스"라는 사상은 그리스 철학에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두고 그리스 철학에 근거를 두고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는 수많은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상이 그 정도라고 알아두면 되는 것이고, 그러나 요한이 하나님께 붙들려 기록하라는 성경을 한 자씩 써내려 갔다고 알고 있는 사람은 왜 "로고스"라는 단어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을까를 연구하는 것이지, 요한이 요한복음을 당시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받아 인용했다고 해버리면 요한복음의 저자 성령이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로 직행되어져 버립니다.
문화는 물과 같이 아래로 흐른다고 전제를 해놓고 이스라엘보다 앞선 문화를 가졌던 구약 이스라엘 주변국과 신약의 그리스 등의 문화가 성경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면서 성경자체를 이분설학자들이 삼분설에 대한 비판처럼 그대로 하는 경우가 많고 그때마다 이분설학자들은 표현이 동일 또는 유사하다고 그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매도라면서 반론들을 합니다. 그 예로 성육신, 할례 등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받은 삼분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을 모르고 성경만 가지고 연구한 결과가 인간은 세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고 발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아폴로나리스는 예수님의 인성을 삼분론으로 설명하면서 이단이 되었다면.
삼분설로 이단이 된 아폴로나리스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성을 가졌다는 점을 부인하여 이단이 되었지, 삼분설 자체가 잘못되어 이단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분설 입장을 가진 사람 중 수많은 이단이 나왔습니다. 이단이 이분설을 말했다는 것과 이단이 가진 이분설은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따라서 천주교는 이단이었으나 천주교의 이분설은 옳다고 생각하여 종교개혁시에도 이를 고수했습니다.
잘못된 삼분설이 아니라 바로 본 삼분설이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 볼 일이며, 이분설이 교리사 2천년동안 정통의 입장을 가졌지만 잘못된 이분설이 감추어져 있었는지 다시 한번 살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어느 학자들이 얼마만큼 어떻게 지지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최소한 교회역사에서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교리에도 보충할 점이나 또는 조정될 교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천주교와 다른 우리 개신교의 근본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2.인성의 구조적 요소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성경이 이분설을 압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성경이 이분설을 압도적으로 설명하는지 삼분설을 압도적으로 설명하는지에 대하여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이분설의 관점으로 깨닫는 이분설학자들에게 성경 전부가 이분설로 보일 것이며 성경을 삼분설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성경 전부는 당연히 삼분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니까 이분설이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 보이는 몸, 그 몸 속에 움직이는 자기 마음, 이렇게 둘이 느껴지기 때문에 모든 성경을 둘로 보게 되고 그렇다면 성경 전부는 이분설에 대한 성구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확립되는 데에도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쉽게 깨달아질 수 있었다면 그렇게 걸리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확실한 교리가 그렇게 오랜 세월 수 없는 논쟁을 통해서 정립되는 데에는 성경이 압도적으로 예수님은 특수한 그러나 사람일 뿐이었다고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가장 단순히 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몇 되지 않는 성구를 통해서 신인양성일위의 예수님을 깨닫고 보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일뿐이었다고 보이는 그 많은 성구가 신인양성일위의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로 요약하고 나서 다시 성경을 보니까 모든 성경은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그후 오늘까지 정통 교회의 일관된 교리로 1500여년을 넘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몸과 마음으로만 보는 것은 불신자도 동의하는 쉬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영이라는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은 불신자는 알 수 없고 믿는 사람도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분설만 횡행하는 것이고 또 이분설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 삼분설을 찾는 사람도 잘못 더듬어 이분설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결과로 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2)인성은 하나의 인격주체이며 이중의 주체가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에 대하여
인간이 몸과 영혼 둘로 되어 있는데 실은 단일 주체의 한 인격체로 존재한다는 이분설의 입장에 대하여 인성을 둘로만 나눈 것은 서투런 것이라 할 수 있고, 단일 주체의 한 인격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좀더 정확한 첨언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몸과 마음(혼) 그리고 영, 셋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셋은 하나의 단일 인격체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단일 인격체라는 말은 흔히 이분설학자들의 단순 논리로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몸, 마음, 영이 하나되어 의의 생활도 하지만 때로는 영은 빼놓고 몸과 마음이 악령에 움직여 죄의 생활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죄를 짓던 의를 행하던 우리는 둘 중에 한 가지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지을 때 몸과 마음이 하나의 단일 인격으로 죄를 짓듯이 몸과 마음이 영에 붙들려 의를 행할 때에도 하나의 단일 인격으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일 인격이란 꼭같은 몸과 마음이 영 또는 악령과 합하여 단일의 사람으로 단일의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좀 더 세밀한 구별이 필요할 것입니다.
3)"혼"과 "영"의 복잡한 원어를 연구해 볼 때, 이는 기능의 다른 각도를 말한 것일 뿐이다.
모든 학자들이 혼과 영을 가지고 별개의 것이라는 삼분설과, 동일체의 다른 표현이라는 이분설이라는 각도에서 원어의 문법적 의미를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문법적 의미를 아무리 복잡하게 설명한다 해도 성경이 조직신학서로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접근 방법 자체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적 논리에서 이분설이냐 삼분설이냐는 것이 도출되는 것이며, 원어적 의미와 그 연구는 보충적 사례에 그칠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혼"과 "영"을 원어적으로 설명해 봐야 별개의 존재인지 동일체의 다른 표현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어 절대주의를 근거로 출발하는 조직신학계에 원어 만사주의를 벗어나서 성경의 전체적 입장에서 큰 원칙을 도출하고 세부 성경 구절 전부가 그기에 배치되는 것이 없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즉, 원어를 몰라도 성경연구의 제일 깊은 분야 중에 하나라는 교리를 연구하는데 불편이 없는 것이라야 바로 성경의 보편성이 증명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원어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이해가 교리 규정에 절대적이란다면, 그리스 모국어를 구사하는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교리에 밝을 것입니다. 외국인이 아무리 잘한다 해봐야 자기만 모르는 서툰 외국어 구사자에게 나아 보이는 것이지 그 모국어의 어감까지 체득한 수준의 해석이란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3.여기서 벌콥 등의 주장처럼 인성은 이분적일 수 없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1)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안 믿는 사람이 몸과 마음으로 살고 있으며 이 마음을 이분설학자들은 영, 영혼, 혼, 또는 마음이라고 하면서 여러 이름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범죄하여 죽은 것이 있는데 몸이 죽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마음 즉 영혼이 죽었다는 말입니까? 불신자도 영혼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 죽은 것이 없습니다. 영혼의 일부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는 마음 안에 제일 신령한 부분이 죽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영혼은 일부 사망이지 전부 사망이 아닙니다. 또한 영혼이 몸과 같이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등의 일부 사망을 말해야 하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죽으면 마음이 죽지 마음의 일부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은 죄로 죽어 있는 부분이 있고 중생되어 살아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 그 안에 있는 마음, 이 둘은 우리가 신불신자간에 확인되는 부분입니다. 마음 안에 있지만 불신자에게는 죽어있고 그가 예수를 믿을 때 다시 살아나는 부분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영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몸, 마음, 영 셋이라고 해야 하며, 다만 이분설학자들이 그렇게 복잡한 기능적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마음에 해당되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며 어는 것이 영에 해당되는 영의 다른 표현인지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기본적이고 너무도 확실한 골격적 교리를 구성한 다음 원어적으로 한 단어 한 단어를 비교해가며 마음에 해당되는 것인지 영에게 해당되는 것인지를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2)죄로 죽은 것은 마음의 부패뿐이라면, 오늘 성도들 성직자들의 부패는 미중생을 증명한다
죄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움직이던 모든 면이 단절되고 전적 부패하게 되었다고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중생 후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진단해 본다면 믿은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 마음의 부패한 면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덜 죽은 것일까? 덜 살아난 것인가? 죽었던 것이 살았다가 또 다시 죽었다가 다시 사는 반복의 연속 중에서 한 단면들이 표시되기 때문일까?
이분설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앉고 있는 것은 죄의 결과, 사람이 범죄로 완전히 죽어버린 것과 성도의 중생, 죽었던 우리를 살려 살아난 우리에 대하여 전혀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설명을 해갈수록 수많은 모순이 나타나기만 한다는 점입니다.
.3)인성의 구조는 사람의 타락과 중생으로 그 양단의 수평 비교에서 아주 환하여 집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 중생된 사람과 중생되지 않고 죽어 있는 사람, 그 차이점의 가장 본질적인 것은 몸과 마음은 기본적으로 같으나 영의 죽음과 중생입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영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연결되던 계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영은 부동이며 마음은 영 대신 악령이 붙들고 마음껏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전적 부패를 보이는 것이며, 중생된 사람은 자기 속에 영이 살아 하나님과 다시 연결이 재개되어 전적 부패했던 마음 속에 말씀의 새 은혜가 부어져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4)중생된 사람에게는 다시 범죄하지 않는 요소가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중생후 재범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로 난 자 마다 범죄치 않는다"고 하셨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으니 한번 중생되면 다시는 범죄하지 않는 것과 중생후에도 범죄하는 이 두가지 면을 성경은 단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은 중생후 다시 범죄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범죄하는 것이며 영이 범죄하지 않는 것이니 이 영이 우리의 주격이며, 이 면을 볼 때는 재범이 없는 영이라고 하겠으나 우리의 심신은 중생후에도 죄를 짓고 있으니 당연히 중생후 범죄에 우리는 해당이 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는 "삼분론"에서 자세히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5)사람과 짐승은 몸과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짐승에게 없는 영은 따로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을 비교해 본다면 바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몸도 마음도 그 수준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몸만큼 탁월한 기능을 두루 가진 짐승은 없습니다. 짐승은 어느 한 부분은 인간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기능을 가졌으나 어떤 짐승과도 사람을 비교할 때 전반적인 육체의 기능 전부를 비교한다면 단연코 인간의 육체는 최고의 성능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짐승의 육체가 다른 점은 같습니다.
마음 역시 사람의 것과 짐승의 것은 수준의 차이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2-3세의 어린아이가 가진 마음의 정도와 똑똑한 짐승과를 비교하면 다른 점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능은 그 이후로도 계속 발달을 하여 탁월하게 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없습니다.
기억, 계획, 감정, 인지, 판단, 의지까지 다 그러합니다. 심지어 개가 주인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주인의 눈치까지를 보고 미안해 합니다.
철학이나 사상이 없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철학과 사상에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무엇이냐는 것을 분해하여 그 원소적 성분을 도출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원소적 성분까지를 두고 짐승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전혀 개발이 되지 않고 전혀 향상 또는 이용을 주지 않아서 그 형성된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짐승에게는 그 원소적 요소 또는 가능성조차도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찾고 천국을 소망하는 영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있고 이것이 사람과 짐승을 요소적으로 구별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본질적 차이점입니다. 동시에 천사와 인간의 차이를 비교해본다면 천사와 인간은 영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천사와 인간의 차이점을 비교한다면 천사는 육인 몸과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과 계획 등의 기능은 마음 뿐이 아니고 영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음만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물들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 때 사람들을 가르쳐 "육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영은 죽고 육으로 된 마음과 몸 둘로만 살고 있었습니다. 물질로 된 인간으로만 살았습니다.
4.여러 논점이 되는 성구들
1)이분설에 근거가 된다는 창2:7의 성구: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라는 말씀에서 이미 물질로 된 것만으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영적인 존재가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이라고 성경은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적인 존재가 없는 육의 상태에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죄지어 영이 죽은 상태로 심신만 남아 있는 사람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도 이런 의미에서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영육을 함께 가진 참 사람, 영은 죽고 육으로만 된 사람, 짐승에게도 있는 마음만 가지고 있는 육체가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 예수 믿기 이전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창2:7 말씀은 죄를 지어 영이 죽었기 때문에가 아니고 처음 인간을 만들면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한 것입니다. 영까지 들어가야 완전한 인간이지만, 사람이 볼 때는 흙으로 된 심신만으로도 사람이라고 볼 것이니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하나님은 오른 손이 없지만 하나님의 오른손이라고 인간 차원에서 표현할 수 있듯이, 또한 하나님은 후회함이 없으시나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한다고 인간이 볼 때의 관점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창2:7이 이분설의 절대적인 근거이며 성경이라는 것도 이분설의 선입관이 있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성구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심신을 만드셨고 또한 그 과정을 일일이 다 설명하는 설명서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사람이라 할 때는 그 속에 영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넣어셨을 것이고, 그러나 사람으로는 물질로 만든 물질의 심신만 알고 접할 것이니 그 한 부분만 들어 표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과 마음과 몸으로 된 인간을 만드실 때 물질로 된 심신만을 표현하시되, 사람에게 있는 영적인 존재, 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아닌 사람의 요소는 물질로 만들었다는 이 면을 특별히 말씀하는 것으로 본다면 오히려 이 성구의 해석이 전체 흐름에도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2장은 천지를 다 만드시고 이제 사람을 만들어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만물을 맡기는 과정을 간단히 기록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음을 먼저 말씀했고 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 그 존재가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육이 없는 인간의 상태에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인 몸과 마음, 그리고 영으로 된 인간을 완성하셨으나 1장에서는 그 인간의 영적인 면을 특별히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영적인 존재가 만들어졌고, 그러나 육의 부분은 1장에서 언급을 하지 않았을 뿐이고 2장에서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육 부분만 말씀하셨고, 그러나 영을 만든 것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영육 창조 전체의 과정에서 먼저 영육으로 된 사람 자체를 만드셨고 그 만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연결이 되도록 하여 그 인간만은 천하 만물 중에서 하나님이 직접 붙들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나머지 만물은 그 인간에게 만들어 놓은 물질의 부분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아담의 영을 붙들고 그 영이 심신으로된 육을 움직이며 그 육을 통해 만물을 다스린다는 것을 1장 2장에 차례로 간단히 그러나 시간적 순서가 있는 듯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점을 한번 특별히 말씀했습니다. 그 말은 영이 그 속에 없다는 말도 아니며 사람 속에 영을 만들지 않고 육체부터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담아 두어야 할 영을 다음 순서로 만들어 집어넣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만드는 공정에 이런 시간적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과 영이 합해서 이루어진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는 물질로 만든 것이 있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이 물질로 만든 육을 통해 물질로 된 만물을 다스린다는 면으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영의 존재는 언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아담의 자손으로 기록된 것은 그 외에는 자손이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자손은 있었던지 없었던지 간에 아담의 자손에서 두 신앙 노선이 있고 인본의 신앙이 신본의 신앙을 죽이는 두 신앙노선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자손 전부를 기록한 호적등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창세기 4장 때문에 아담은 두 아들만 낳았고 아벨 대신 셋을 낳았으니 이들이 전부라는 등으로 끌고 나갈 문제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물질로 만들어진 요소가 있습니다.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흙으로 무엇을 만들었느냐? 몸만 만들었다고 알고 싶겠지만 그 흙으로 몸을 만들었고 그다음 그 속에 있는 마음은 무엇으로 만들었겠는가? 마음은 영이 아니고 물질이니 마음 역시 흙으로 만든 그 물질 제조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마음 속에 있는 영이 천사와 같은 영물이니 빗물질적인 존재입니다.
인간 생각으로는 이 이분설 삼분설의 논쟁이 없도록 창세기 2장에서부터 명확히 기록해 주셨으면 할 수 있겠으나, 성경은 어느 인간의 어둔한 면을 가르치는 교리서가 아니기 때문에 한 글자도 뺄 수 없도록 그러나 인간에게 가르치고 싶은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도록 하나님께서 조성을 해 놓으셨기 때문에 이 성구는 인성만이 아니라 그 속에 무슨 차원의 진리를 어느 때 필요하도록까지 해놓으셨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벌콥의 표현에 창2:7의 말씀에서 흙으로 만든 몸, 생기를 불어넣으니 들어가게 된 영혼, 이렇게 몸과 영혼 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의식에도 딱 들어 맞는다면서 그러나 영과 구별되는 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의식으로 느껴 사람을 마음과 몸 둘만이라고 단정한다면 사람이 더 느낄 수 없고 더 자의식으로는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하나님이며 천국입니다. 죄를 지어 영이 죽었으니 물질로 된 인간의 심신, 짐승 수준의 인지로는 영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혹 중생된 사람이라도 성직자까지에 이른 신앙이라도 세상 욕심만 그 속에 가득찬 경우가 거의 전부이니 하나님은 두고라도 자기 속에 자기 영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2)살전 5:23, 히4:12 의 영과 혼을 별개로 볼 수 없다는 주장:
이 본문에 영과 혼을 구별했다고 그것을 별개로 본다면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뜻 다하여 라고 말씀한 성구에서 사람은 삼분만이 아니고 사분 오분으로도 나갈 수 있다는 설명은 일견 옳고 일견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 마음을 여러 측면에서 표현한 것이 있는데 표현이 다르면 다 다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논리로 단어가 다르다고 해서 전부 같은 요소를 다른 기능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몸과 신체는 다른 표현이나 같은 요소를 말합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다른 단어인데 그 실체 역시 다릅니다. 마음, 정성, 정신 등은 다 같이 마음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으나 영은 마음 정성 정신 등으로 표현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며 다른 요소일 수 있는데 무조건 이분설적 관점에서 같은 존재의 다른 표현이라고 묻어버리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성구에서 이분설이나 삼분설을 단정하는 것보다 성경 전체에서 위에 설명한 대로 삼분설의 주장이 옳다면, 살전 5:23은 요소적 나열이라고 볼 수 있고, 마22:37은 마음의 다른 표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분설이 맞다면 삼분설의 성경 주석은 대부분이 오해를 하게 되어 있고, 삼분설이 맞다면 이분설을 기초로 주석한 성경 해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도록 많이 혼돈 또는 오해하는 경우가 발생됩니다.
히4:12의 말씀 역시 삼분설이 옳다면 혼과 영은 구별해야 하고, 관절과 골수는 같은 몸의 다른 부분들을 표현한 것이며 이분설이 옳다면 마음과 몸을 각각 두가지씩으로 달리 표현한 것이니 그 다른 표현들을 하신 뜻을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이분설의 논리대로 이 성구가 4분설로 나가는 것이라든지 또는 이 성구가 절대적인 삼분설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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