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박형룡박사의 이분설 (박형룡)
박형룡박사 저작 전집 III (교의신학. 인죄론)
제3장 인성의 구조와 번식
우리나라 정통 보수 신학계는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 저서에서 거의 모든
신학 이론이 전개되고 있다. 이유는 이 저서에서 박 박사의 자신의 주관적
이론 전개보다 칼빈주의 학자들의 정통이론을 가장 잘 요약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박 박사의 저서 한 권에서 보수 신학계의 의견을 가장 잘 도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분론과 삼분론에 대하여도 국내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박형룡 박사의 저
서에서 그 이론 전개의 근거를 삼고 있기 때문에 원저에 해당되는 내용을 독
자들의 열람 편이를 위해 그대로 소개한다.
사람의 성질은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었는가? 또는 그 중의 정신적 요소는 어떤 방식으로 번식하여 수적 증가를 보는가? 신학은 인생 성질의 정신적 요소의 연구에 주력하나 또한 그것의 물질적 요소에 관해서도 언급하게 된다.
제1절 인성의 구조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신체와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인생 성질의 구조를 논할 때에는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여 제시하게 된다. 우리는 영혼의 구조에 치중하나 그것을 신체와 연합하여 있는 실체로 보아서 논하며 영혼의 도덕적 성질을 고찰하기 전에 먼저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생각할 것이다.
인생 성질의 구조의 논의는 관례적인 방식에 따라 먼저 이분설과 삼분설의 비교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할 것이다. 교회 역사상의 정통 신학자들의 보통한 견해는 사람을 신체와 영혼의 두 부분으로 생각하여 왔으니 이 견해는 전문 술어로 이분설(Dichotomous Theory)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이와 병행하여 인생 성질이 신(身), 혼, 영의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으니, 이것은 삼분설(Trichotomous Theory)이라는 명사로 지시된다. 삼분설은 성경교훈의 결과로 기원한 것이 아니니 성경은 거의 변이없이 이분설의 어조로 말한다.
1. 삼분설
「삼분설」의 영어 Trichotomy는 3부로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명사니, (Τριχα = in three parts, : τεμνειν = cut) 신학에서 인생 성질을 몸, 혼 영으로 3분하는데 적용된다. 3분설은 철학에서 기원하고 이단설에게 이용되었으나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의 채용을 받으며 성경의 지원을 스스로 주장하므로 신자들의 주목거리가 되는 때가 있다
1)철학적 이단적 관련.
인성 3분설은 헬라 철학에서 기원하였으니, 그 철학은, 사람의 신체와 영의 상호 관계르 물질적 우주와 하나님의 상호관계와 유추하여 생각하였다. 후자가 오직 제3실체, 혹은, 중간존재의 방편에 의해서만 상호 교통할 수 있는 것 같이, 전자는, 오직 제삼 중간적 요소 즉 혼을 방편으로 해서만 서로 생적(生的)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혼(ψυχη)은 한편에 비 물질로, 다른 편에 실체에 적응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이 영을 이용하는 한에는 비 물질로 보여 졌으나 이것이 신체와 관계된 한에는 육체적, 가사적(可死的) 것으로 인정되었다.
가장 익숙하게 알려졌으나 가장 조잡한 형의 3분설은 신체를 인성의 물질적 부분으로 혼을 감각 생활의 원질(元質)로, 영을 하나님과 관계된 이성적 불사적 (理性的 不死的) 요소로 인정한다. 혼은 사람과 동물이 공유한 것이나 (마2:20, 막3:4, 롬11:3) 영은 사람만이 독특하게 가진 것이요 신적 본체의 한 부분과 같은 것이니 동물은 겨우 몸과 혼을 가졌을 뿐이므로 죽을 때에 몸과 혼이 함께 없어지지만, 사람은 몸 혼 영 3가지를 갖추어 가진 고로 그 몸은 사망하나 영혼은 영존 불멸한다고 한다.
피다고라스와 아리스토틀, 그리고 그후의 많은 헬라.로마의 철학자들이 사람은 이성적 영(理性的 靈)(rational spirit), 동물적 혼(animal soul), 신체의 3요소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 어법이 헬라 사람의 통속 언어에 자리를 얻었다. 그 결과로 사도(師徒)는 사람과 그의 소속 전부를 남김 없이 표현하려고 할 때에 이 세 말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람의 성질을 3분하여 생각한 것이라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삼분설은 초대교회 신학계에 소개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 닛사의 그레고리 같은 헬라 신학자들의 총애를 받았다. 오리게네는 심지어 「몸」(σομα), 「혼」(ψυχη),「영」(πνευμα)이라는 말들을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정당한 방법의 실마리로 삼아 성경의 각 구절이 ①그것의 자연적, 혼은, 신체적(somatic)의미 ②그것의 상징적, 혹은, 심리적(psychical)의미, ③그것의 정신적, 혹은, 영적 (pneumatic)의미로 해석 될 것을 제의하였다. 성경이나 인성의 이와 같은 단편적 해석은 전체와 통일에의 성경적 치중을 간과하려 하였다.
삼분설은 오래지 않아 위험시되었다. 그노시스파는 이 설에 의하여 사람 안에 영은 신적본체의 일부이어서 범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아폴리내리스는 이것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는 인적 신체와 혼만을 가지셨고 인적 영을 가지지 않으셨는데 로고스가 영을 대신하였다는 이단을 제창하였다. 그 후에 교회는 혼과 영이 판이한 실체들이라는 교리를 점차적으로 불신임하였다. 어떤 헬라교부들은 오히려 삼분설에 집착했으나 아다나시어스(Athanasius)와 데오도렡(Theodoret)은 이것을 솔직하게 배척하였다.
후대에 반(半)펠라기우스파는 사람 안에 영은 제외되고 몸과 혼만이 원죄의 주체들이라고 가르쳤다. 또 내세 멸절론자들은 주장하기를 사람이 창조될 때에 신적 영기(神的靈氣)의 불어넣음을 받았다가 범죄로 인하여 그것을 잃어버렸는데 중생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그것을 회복하여 영생에 들어가고 그것을 회복하지 못하면 실유(實有)의 완전한 절멸인 영사(靈死)를 취한다고 한다.
로마 서교회의 주도적 신학자들은 판연하게 이분설을 찬성하였다. 터툴리아노가 어거스틴이 그러하였다. 특별히 어거스틴의 심리학은 이 견해에 우세를 주었고, 중세기에 이 견해는 보통 신념이었다. 헬라 동교회에는 오히려 삼분설이 남아 있어서 다메섹 요한을 최고의 대표자로 했으나 로마 서교회는 일반적으로 이분설을 고집하여 안셂(Anselm)을 최고의 대표자로 하였다.
종교 개혁은 이 견해에 대한 태도를 변치 아니하여 루터파와 개혁파 즉 전(全)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혼과 영이 하나요, 같은 실체와 본질이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이분설에 향한 태도는 로마 교회의 그것만티 전적으로 통일되지 못하여 종교 개혁 당시부터 약간의 3분설자를 보유하게 되었다.
3분설은 19세기에 루스(Roos), 올스하우센(Olshausen), 베크(Beck), 델리취(Delitsch), 오벌린(Aubelen), 웨-너(Oehler), 화잍(White), 허-드(Heard) 같은 독일과 영국의 어떤 신학자들에 의하여 부흥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계에 큰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이 이론의 최근 변호자들은 「푸수케」(ψυκη) 혼의 성질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으며 그것과 인성의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델리취는 그것을 「프뉴마」(πνευμα) 영의 유출로 보고 - 혼이 영보다 실체로는 판이하되 본질로는 그렇지 않음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보다 판이하되 그는 오히려 하나님이심과 같다고- 베크와 웨-너와 허-드는 그것을 - 영보다 판이한 실체가 아니라- 신체와 영과의 사이의 연합점으로 생각하였다. 델리취는 전적으로 모순이 없지 못하여 간혹 준순(逡順)하는 모양이고 베크와 웨너는 사람에 관한 성경적 묘사가 근본적 생활의 주체요, 영은 그 주체의 원질이라고 설명한다. 요컨데 앞에 기록한 사람들의 성경적 3분설에 대한 변호는 사람 안에 서로 다른 세 요소의 존재를 함의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2) 성경적 근거의 박약
삼분설의 성경적 근거로 중요하게 인용되는 두 구절이 있으니, 그것은 살전5:23과 히4:12이다. 제일의 구절에서 바울은 영과 혼과 몸의 흠없게 보전되기를 축원하였고, 제이의 구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고전2:14-3:4의 여러 절들이 사람을 자연적, 육적, 영적의 3부로 본다고 인용되는 때도 있으며 고전15:44도 혹시 거론된다.
그러나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백히 분별해야 할 것은
(1)성경의 비고(備考) 예외적 진술을 성경의 비고, 성경의 통상적 제시의 조명에 의하여 해석하는 것은 성경 석의의 건전한 규칙이다. 이 예외적인 몇 성구가 영과 혼을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실체들로 생각하였을 수 없음은 다른 많은 성구들은 사람을 두 부분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롬8:10, 고전5:5, 7:34, 고후7:1, 엡2:3, 골2:5). 이 사실에 주목하는 어떤 3분설자들은 이 몇 구절이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논점을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시인한다.
.(2) 전체를 표시하는 세 명사
영, 혼, 신의 세 명사는 인성 전체를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요, 세 실체를 지시함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막12:30에서 예수께서 「마음」, 「목숨」, 「뜻」「힘」을 말씀하신 것은 인생 전체를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교훈하심이요, 네 종류의 서로 다른 실체들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과 같다.
마라이스는 말하기를 성경에서 「사람은 한 통일체로 제시되니 그것의 활동들이나 피동들의 잡다에 있는 통일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된 다양명사들은 이것들을 실현하는 상이한 본체들이나, 분리된 기관들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함의하지 않는다」
(3) 살전 5:23의 참뜻
이 구절에서 바울은 사람의 존재의 모든 방면을 개괄하는, 따라서 성경이 혹시 따로 말한 영과 혼을 병립시켜 말하는 해설적 진술로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진술을 강조하기를 원한 것이다. 즉 이 진술은 인성의 구성부분들의 과학적 열거가 아니라, 그것을 그것의 중요 관계들에 의하여 포함 광대하게 묘사하고져 한 것이다.
3분설자들은 혹시 이 구절의 「영과 혼과 몸」이라는 말들을 큰 강조로 외우며 「과」란 말에 특별히 치중하여 이것이 영과 혼의 구별되며 분리 될 수 있는 실체들임을 보여주는 절대적인 증명인 듯이 호언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논법은 막12:30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기초로 하여 인성 사분설을 주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 역사 위에 이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인성 사분설이 발전된 일이 일찍이 없었다. 기독교 신학은 마음(heart)을 판연한 실체적 존재라거나 「뜻」(mind)이 자체로서 독존한다고 변론하는 어떤 당파로 인하여 교란을 당한 일이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이 말들에 앞서 있는 「온전히」와「온」이란 말들은 바울이 사람의 부분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의 국면들을 마음에 우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말하기를 「사도는 너희 모든 부분들에서」(holomereis)란 말을 쓴 다음에 이 부분들을 몸, 혼, 영으로 개괄하지 않고 부분들에 관설함이 없는 「온」(δλοτελεισ)이란 말을 사용한다.
(4)히4:12의 참 뜻
이 구절은 내면적 사람에게 투입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혼을 그의 영으로부터 분리한다는 "상이(相異)한 2 실체가 있다고 함의하는"의미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단순히 혼과 영, 즉 여러 관계를 총괄하는 정신적 요소 전부의 깊은 곳에 뚫고 들어가는 것을 말한 것뿐으로 볼 것이다. 이 구절이 혼과 영의 쪼개어질 수 있음을 말하니 그것들은 분리될 수 있고 따라서 구별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변론된다. 그러나 이 본문의 「쪼개기 까지 하여」라는 표현은 혼을 영으로부터 분할 하거나 분리할 수 있음을 지시하지 않는다. 이 v;ygus이 그러한 의미를 가지기 위하여는 「혼」(ψυκη)과 「영」(πνευμα) 사이에 「메탁수」(μεταζυ=between=사이)같은 어떤 전치사가 요구되며 둘을 나누는 것을 암시하는 어떤 말이 있어야 된다.
찰스 하지는 말하기를 「관절과 골수는 서로 다른 실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같은 실체의 서로 다른 형태들이다. 그와 같이 혼과 영은 서로 다른 국면들, 혹은 관계들 아래 있는 동일한 실체의 서로 다른 형태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감정에 미칠 뿐 아니라 또한 양심에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으나, 마음(heart)과 양심을 서로 판연하게 다른 실재들이라고 추상함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II. p.50).
(5)고전 15:44의 참 뜻
이 구절에 있는「육의 몸」과「신령한 몸」이 원어에서 「혼의 몸」(σωμα φυχικον)과 「영의 몸」(σωμα πνευματικον)이기 때문에 혼과 영의 구별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보여 거론된다. 그러나 「혼」의 원어 「수케」(ψυκη)는 또한 육체적 생명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마2:20, 6:25),「혼의 몸」대신에 「육의 몸」(natural body)으로 역술되었다. 육의 몸은 현세 생활에 적합한 속성들을 가진 현재의 연약한 몸이요, 「영의 몸」은 내세 생활에 적합한 부활체를 가르킨 것이므로 「신령한 몸」9spiritual body)으로 역술되었다. 이리하여 현재의 영역문과 한역문이 적정함을 인정하는 때에 이 구절은 혼과 영의 구별을 암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여진다.
고전2:14-3:4에 세 명사가 함의 되었다면 그 참 뜻을 위에서 설명한 경우들에서와 같이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3)중대한 오류
3분설자들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경을 잘못 이용하는 오류의 밑바닥에 자리잡은 두 가지 중대한 오류가 있으니, 그것은 혼과 영의 상이를 고찰함에 실체적인 것과 작용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함과 사람을 삼위일체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다.
(1)작용적 상이를 실체적 상이로
3분설자들은 혼과 영의 작용적 상이를 실체적 상이로 보는 중대한 오류에 빠진다. 3분설자들이 자기들의 견해를 지원하는 권위자로 자주 언급하는 프랜즈.델리취 교수의 견해는, 이 중대한 오류의 한 실례이다.
註 델리취는 그의 명저 「성경심리학」(Franz Delitzech, "System der Biblischen Psycholgie", 2nd ed., Leipzig, 1861., English edition, "A System of Biblical Psycololgy," T. and T. Clark, 1869)의 「그릇되고 참된 3분설」이라는 부분에서 시작하는 진술로 말하되
「이분설이나 삼분설이 배타적으로 인성의 구조의 성경적 제시라고 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경은 한 때에는 마6:25; 약2:26; 고전6:20에서와 같이 명확히 이분설적인 경향으로 말하고 다른 때에는 살전 5:23; 히4:12에서와 같이 절대적으로 또는 부인할 수 없도록 3분설적인 경향으로 말한다. 그릇된 3분설이 있고, 그것에 대한 반대로 성경적인 이분설이 있으며, 그릇된 이분설이 있고 그것에 대한 반대로 성경적인 삼분설이 있다.」
델리취는 실체적 실재들(substantive entities)과 작용적 속성들(functional attributes) 사이의 범주들(categories)의 구별을 짓지 않는다. 만일 이 구별이 인식되면 문제 해결의 방향은 명확하게 보여질 것이다. 사람의 비물질적 실유가 많은 작용적 속성들을 가져서 많은 명칭들로 불러진다는 것은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삼분설에 대하여 반대 하는 것은 이 설이 사람의 빗물질적 실유에 작용적 속성들을 인식하는 대신 두 실체적 실재들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델리취의 혼과 영 사이의 구별은 작용의 구별이요, 실체적 실재의 구별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아래와 같은 문절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는 기록하기를 「혼은 영의 외적 국면이요, 영은 혼의 내적 국면이며 사람의 가장 내적인 성질은 자아이니 그것은 영혼, 몸과 판이다」(Ibid., p.179). 이 인용문에서 「판이(distinct)」란 말은 작용적으로 판이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실체적으로 그렇다고 함이 아닌 것이, 「국면」(aspect)의 판이요 실체의 그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델리취의 저서에는 「혼」과 「영」사이의 상이는 동일한 실체적 실재의 작용적 명칭들의 상이보다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델리취가 실체적 실재들과 작용적 속성들 사이에 범주들의 구별을 짓지 않고 후자를 기초로 하여 「성경적 삼분설」을 말한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그가 많이 말한 바의 배경에는 이분설적인 견해의 진리성과 우리가 배척하는 3분설의 그릇됨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판연하게 보인다. 그는 말하기를 「그것(성경)의 제시에 의하면 사람은 절대적으로 판이한 두 요소들의 종합이다... 신체가 영의 우화(雨化)(Precipitate)도 아니요, 영이 물질의 승화도 아니다.」(Ibid., p.105).
(2)삼위일체의 반영
거의 모든 삼분설자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은 관념은 몸.혼.영으로서의 사람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반영이라는 것, 사람의 이 삼분적 성질은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하는 것이며 적어도 그 형상의 한 국면이라는 것이다. 이 관념이 중대한 오류라는 것은 아래와 같은 고찰에서 쉽게 판명될 것이다.
①성경적 신학적이 아님
사람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지식과 의와 거룩과 만물 위에 주관권을 포함한다는 것은 성경에 근거한 (창1:27; 골3:10; 엡4:24; 창1:28)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10)의 언명이다. 개혁파 신학은 이 밖에 다른 몇 가지를 이 형상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사람을 몸과 혼과 영으로 삼분하여 하나님 삼위의 형상으로 본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도 가지지 못하고 신학계에도 매우 생소한 관념이다.
②혼은 영의 형상이기 불능함
삼위일체의 제2위 그리스도가 성부의 형상이라고 성경에서 교훈된 것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3분으로 구성됨에 난관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고후 4:4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에 언급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하였고, 골1: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였다. 그러면 삼위일체의 제2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면(히1:3)」사람 안에 있는「하나님의 형상」에서도 제2위인 혼은 제1위인 영의 형상일 것이다. 그러나 3분설이 말하는 혼은 영보다 성질상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그것의 형상이기 불능하다.
「」「」
③이단으로 결국함
삼위일체의 위(位)들과 소위 사람의 삼분성질 사이에 유추를 찾으려는 시도는 하나의 이단으로 결국할 것이다. 삼분설자들에 의하면 영은 혼보다 크게 우월하고 혼과 영은 신체보다 크게 우월하다. 그러면 이렇게 불평등한 사람의 삼위가 어찌 「권능과 영광에서 동등이신」(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6)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실유와 유추를 가질 수 있는가? 만일 유추를 가진다면 하나님 삼위에 불평등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은 이단이다.
2. 이분설
「이분설」의 영어는 두 부로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명사니 (σικα="in two" τεμνειν="cut") 신학에서 사람은 그의 실유에 신체와 혼의 두 근본적 부분들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인생관에 적용된다. 통상으로 둘은 날카롭게 대조되고 서로 다른 기원과 독립한 존재를 가진 것이라고 고찰된다. 이리하여 신체와 혼의 현실적 관계는 곤란한 문제로 된다.
이분설도 철학의 논제로 되어왔다. 플래토는 가르치기를 신체는 죽은 물질이었으나 혼은 천계(天界)에 순수한 형식, 혹은 관념으로 존재하다가 사람의 신체에 화신(化身)
(incarnation) 되었다. 그러므로 혼은 창조되지 아니하였고 불사적이어서 신격의 한 부분이었다. 신체는 혼의 감옥이니 혼이 신체에 갗혀 있기를 굴(oyster)이 그 껍데기에 폐쇄되어 있듯이 한다. 죽을 때에 혼은 몸을 떠나 천계로 올라 가거나 다른 어떤 몸으로 재 화신된다.
아리스토틀은 플래토에 적응하되 혼을 동물적인 국면과 이성적인 국면으로 나누었고 이 견해가 토마스.아퀴나스를 통하여 로마 카톨릭 교리로 발전되었으니 그는 가르치기를 혼은 하늘에서 창조되어 형성되는 신체에 배치되었는데 마마 어머니 뱃 속에 「되 살아 날」때에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데칼트 후에 새 철학은 신체와 혼의 독립적 기원을 긍정하고 그것들의 인생 인격에서의 외관적 통일(unity)은 두 시계의 추들이 함께 흔들림 같이 잠시 상합하는 상호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현대의 신학은 통상으로 이 견해를 기각하고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한 히브리 사람의 사상에 개진된 몸과 혼의 통일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사람을 몸과 혼의 합성으로 보는 이유는, 철학이 어떤 방식으로 이 견해를 지원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이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경에 성행하는 인성의 묘사는 분명히 이분설이다. 성경은 사람을 신체와 혼 혹은 영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 것으로 제시한다. 성경은 「네페쉬」-「수케」(ψυχη)를 말할 뿐 아니라 또한 「루아크」-「프뉴마」(πνευμα)를 말하나 이것들을 두 종류의 판이한 요소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분설은 허다한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으며 또한 견실한 합리적 증거의 지원을 받는다.
1)인류 창조의 보도
(1)신체와 영혼
창2:7의 인류 창조에 관한 보도는 사람의 구성분을 신체(흙)와 영(생기)의 2부분으로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 생기(생명의 기운), 기운의 원어 니사맡은 영의 원어 루아크와 동의어니 루아크도 본래 기운을 의미한다-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하였다. 이 역문의 문자적 해석대로 보면 사람은 영의 불어 넣음을 받아서 혼으로 되었으니 그는 영인 동시에 혼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사람의 비 물질적 부분 (정신적 요소)을 혹시는 영이라 혹시는 혼이라 칭함은 적정한 어법일 것이다. 우리 동양에서 이 두 말을 결합하여 「영혼」이라고 칭하게 된 것도 매우 기묘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생령」의 원어에 포함된 의미를 보다 더 원만하게 살피면 이 것은 영혼만 아니라 신체도 포함하여 사람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이 다음에 밝혀질 것이다
(2)통일과 두 요소
한편에 성경은 사람의 성질을 통일체 (unity)로 보고, 이원체(duality)로, 두 상이한 요소들이 병행선으로 움직이고 연합하여 단일 유기체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생 성질의 두 요소 병행만을 보는 견해는 헬라 철학과 어떤 후대 철학자들의 저서들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서 성경에게는 전적으로 생소한 무엇이다. 성경은 사람의 복합적 성질을 인정하나 그것이 사람 안에 이중 주체를 결과하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사람의 행동마다 그의 전체의 행동이니, 영혼이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범죄하며 몸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는다고 본다.
창2:7은 사람의 복합성과 함께 그의 통일성을 지시하는 최초 또는 모범적인 구약 성구이다. 이 구절에서 「혼」이란 말은 우리가 통상으로 돌리는 의미를 가지지 않고 그저 산 실유를 가리키니 사람 전체의 묘;사이다. 원어대로 「생혼」이란 말은, 다른 생명의 형태들에게 적용된 것과 꼭 같은 표현이다. 이 말이 창1:20, 21, 24에서는 「생물」이라고 역술되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사람 안에 두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동시에 오히려 사람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한다.
2)구별없는 사용
성경에서「혼」과 「영」은 구별 없이 사용되어 혼은 감각계와 관계를 가지는 사람 안에 정신적 요소이고, 영은 영계와 하나님에 계를 가지는 정신적 요소라고 하는 철학상에 유행하는 구별과는 동의 하지 않는다.
(1)루아크-뉴마(영)와 네페쉬-수케(혼) 가 다같이 동물에 사용되었다(전3:21; 계16:3)
(2)수케는 여호와에게도 돌려졌다. (암6:8; 사42:1; 렘9:9; 히10:38).
(3)신체와 분리된 죽은 사람들을 수카이(ψυχαι)-혼들이라고 칭하였다. (계6:9, 20:4)
(4)종교의 최고 수행이 혼(수케)에게 돌려졌다(막12:30; 눅1:46; 히6:18, 19; 약1:21)
(5)그리고 수케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막8:36,37).
성경이 사람의 혼과 영을 말할 때에 두 종류의 판이한 요소에 언급함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3)교대적 사용
성경은 「영」과「혼」의 두 말을 교대적으로 사용하였으니 두 말은 동일한 실재의 두 이름 뿐이다.
(1)사망은 혹시 혼의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창35:18; 왕상17:21; 행15:26), 혹시는 영의 포기로 묘사되기도 하였다(시31:5; 눅23:46; 행7:59),
(2)죽은 자의 비 물질적 요소가 혹시는 「흔들」이라는 말로 표시되고 혹시 표시되는 「영들」이라는 말로 되었다(벧전3:19; 히12:23; 계6:9;20:4).
(3)사람 전부를 가리키는 성경적 어구가 어떤 경우에는
「신체와 혼」이요(마6:25; 10:28), 어떤 경우에는 「신체와 영」이다(전12:7, 고전5:3,5).
4)자의식에 조화됨
이분설을 말하는 성경의 제시는 사람의 자의식과 완전히 조화된다. 사람마다 자기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두 요소로 구성된 것을 의식하나 아무도 자기 안에 혼과 영이 따로 있다고 의식하지 못한다.
3분설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고등한 영성에 의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며 선악을 변별하며 도덕을 수련하고 그 다음 지위의 혼으로 인하여 식욕, 기억 상상을 발하는 것을 자의식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같은 자의식은 사람의 정신적 요소의 두 방면의 작용을 지시하는 것이요, 결코 두 부분이나 두 실체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작용 중에 어떤 것은 영에 속하고 어떤 것은 혼에 속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 혹은 혼이라 칭하는 동일 실체의 여러 작용들로 볼 것이다.
인성은 삼층집이 아니라 이층집이고 그 윗층에 창문들이 하늘로 향한 것과 땅으로 향한 것의 두 방향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분설자들이 인성의 몸, 영, 혼의 세 부분은 성막의 지성소(영), 성소(혼), 뜰(몸)과 같아서 하나님의 거주하실 만한 처소라고 말하는 것은 유사로는 기묘하지만 사실의 정확한 제시는 아니다. 이 유사는 루터가 말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영과 혼은 동일 실체의 두 동작이라고 말하여 이분설과 삼분설의 중간에 선 때도 있었다.
5)영혼의 불가분성
영혼은 사람의 비 물질적 요소이며 단일하여 그 실체에서나 동작에서나 분할될 수 없다.
영혼의 어떤 부분은 사유하고, 어떤 부분은 감상하고, 다른 어떤 부분은 의욕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전체가 사유, 감상, 의욕하는 것이다. 인식, 결의, 감정 등은 마음이나 영혼의 부분들이 아니라 영혼의 동작들의 분류이다. 영혼의 동작을 인식 혹은 마음, 결의 혹은 의지, 감정 혹은 감상, 양심 혹은 도덕적 성질의 사중으로 나누는 것은 가장 좋은 분류이다. 이 마지막 대지의 고찰은 이분설에 대한 응원인 동시에 우리의 연장된 인성구조의 논의에 좋은 결론이다. 이 고찰은 또한 다음 문장에 연장되는 인성구조의 속론에 서언이 될 것이다.
----- 위 내용은 박형룡박사님이 발표한 내용을 관리자가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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