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교리]영혼이 아니라
박영관교수
중생된 영혼은 범죄하는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공회의 부산 서부교회의 백영희 목사는 로마서 7장 17절에 근거를 두고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중생한 영혼은 죄를 짓지 아니하므로 성도가 거듭난 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중생한 성도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한 영혼이 범죄치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도 없고, 중생한 영혼은 회개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중생한 영혼은 기본구원을 받았기에, 율법과 행위 죄를 범하여도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답변:
1. 박영관교수님의 지적은 삼분론의 용어를 이분론의 용어로 수평 대입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동문서답이 되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총리와 일본의 총리는 그 직책의 이름이 같으나 그 직책이 가지는 실체는 전혀 다릅니다.
일반 신학에서 말하는 "중생된 영혼"은 믿는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믿는 사람이 믿은 이후에도 마음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은 백목사님을 포함하여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2. 백영희목사님의 핵심 교리는 "중생된 영혼"이 아니라 "중생된 영"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이니, 백목사님이 정의하는 "영"과 "영혼"은 박교수님의 "영"과 "영혼"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입니다. 박교수님은 "영"과 "영혼"을 같은 존재 즉 마음의 다른 표현으로 보는 입장이 며 백목사님은 "영"은 "영혼"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박교수님이 "백목사는 중생된 영혼이 범죄하지 않는다"고 했다는데 백목사님은 "중생된 영 혼은 범죄한다"고 분명히 단정을 하신 분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은 박교수님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일 것입니다.
3.그러나 백목사님은 마음 속에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지을 수 없는 부분, 예수를 믿을 때 다시 살아난 부분이 있으니 이 부분은 마음에 속한 부분이 아니고 믿는 사람에게만 있는 중생된 영이니, 이 영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박교수님에게는 "영혼"과 "영"이 마음을 표현하는 같은 존재라는 이분설의 기본 인식에서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한 백목사님을 "중생된 영혼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용어를 교체한 다음 "믿는 사람의 마음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잘못이라"고 일반인이 알기 쉽게 다시 해석을 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박교수님의 지적은 용어의 혼란이라고 보며, 교리의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지적이나 논리적 반론이 있었다고 보지를 않는 것이 총공회의 입장입니다.
다시 한번 백영희목사님의 구원론의 입장을 정리합니다.
1.안 믿는 사람은 영은 죽어 있고 마음과 몸으로만 살며
2.믿는 사람은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니 이 중생된 영과 마음 몸으로 살게 된다.
3.안 믿는 사람은 마음과 몸으로만 살고 있으니 그 마음 속에 역사하는 것은 악령뿐이었고
4.믿는 사람은 마음 속에 죽었던 영이 살아 났으니 악령으로 더불어 늘 자기 마음을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한 싸움이 평생에 계속된다.
5.따라서 불신자는 죄 짓는 한 길로만 살고, 믿는 사람은 마음과 몸이 자기 속에 영과 하나 되었을 때는 의롭게 살고, 마음과 몸이 악령에게 다시 붙들리면 죄를 짓게 되는 반복으로 살게 된다.
6.믿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정확히 말한다면, 마음과 몸이 악령에게 붙들려 죄를 짓게 되 는 것이고 대속으로 살아난 자기 속에 영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며, 악령에게 붙들렸던 마 음과 몸을 영이 신앙양심을 통하여 다시 타일러 영에게로 돌아오도록 만들면 죄를 회개하 고 의롭게 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는 안 믿을 때와 마찬가지 로 마음과 몸이 죄를 짓는 것이며, 영은 죄 짓는 마음과 몸을 의롭게 살도록 악령과 싸우 는 존재이지 영 자체가 악령에게 붙들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7.그러므로 믿는 사람 안에는 두 개의 자기가 있어 안 믿을 때처럼 악령에게 붙들려 마음과 몸이 죄를 짓게 되는 자기와 예수 믿은 이후 새로 살아난 영이 마음과 몸을 붙들어 의롭게 살 수 있는 자기가 있는 것이다.
8.그렇다면, 사람의 구성요소는 전체로 3가지이니 몸, 마음, 영이다. 몸은 신체를 말하고, 마 음은 혼, 영혼 등으로 표현하며 이렇게 몸과 마음은 물질로 된 것이며 이는 불신자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사와 같이 영물로 된 존재는 마음 속에 중생된 영이니 불신자에게 는 죽어 있고 믿는 사람에게는 믿을 때 이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이 영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던 참 자기, 자기 안에 자기이다.
즉, 이분설에서 말하는 마음은 영혼 또는 영이다는 용어를 삼분론에서는 다시 세분하여 마 음을 영혼, 또는 혼으로는 표현할 수 있으나, 영이란 존재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 적 요소라는 것이다.
9.박윤선목사님 등의 주장처럼 사람을 몸과 영혼 둘로만 나누게 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예 수를 믿고 다시 살아나게 된 부분은 무엇이냐 등의 수많은 교리적 모순이 생기게 된다.
칼빈의 구원론은 천주교가 믿음이 아닌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바로 잡 았던 것이며, 따라서 칼빈의 구원론은 "구원받게 되는 첫 시점"에 집중되어 있었던 바, 칼 빈에 의하여 구원의 첫 시점, 구원 받은 우리의 첫 확신은 바로 갖게 되었으나, 믿는 사람 이 믿은 이후, 구원 받은 이후의 범죄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는 것은 그 후 시대인 오늘 우 리가 더 밝혀 발전을 시켜 나가야 할 것인데, 칼빈이 너무 위대했고, 이 점이 교회에게는 칼빈에게서 머물고 그 이상의 발전은 변질이나 이질로 보게까지 된 점이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백영희 목사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거듭난 자의 영혼이 범죄치 아니한다고 한다면 율법을 무의미하게 만들므로 반 율법주의의 모순에 떨어지며 따라서 이단이 되는 것을 모면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또 하나님의 심판에 가두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큰 목적은 그리스도에게로 그 죄인을 인도하는 일이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을 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3-24)
이와같이 율법은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알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공회는 율법과 행위를 무시해 버리고 있다. 반면에 율법은 중생한 후에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표준 혹은 본분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마 5:17)
답변:
총공회의 교리, 백영희목사님의 율법과 행위에 대한 설명은 여기 박교수님의 설명과 같은 입장이지 반대의 입장이 전혀 아닙니다. "중생된 영혼이 범죄치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율법이 왜 존재해야 하느냐는 논리로 이어지고 있는 바, 박교수님의 주장은 우리 총공회, 또는 백목사님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지적할 필요가 없는 지적이며 이 대목은 논의할 필요가 없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착오가 생겼을까요? 한국교회는 한국인의 바쁜 심리 때문에 많은 세월을 단축할 수 있는 장점을 가졌고 동시에 약간의 실수도 늘 있어 왔습니다. 순복음교회의 방언이나 안수기도, 축복에 대하여 1970년대 한국교회는 지리하게도 반대해 왔었습니다. 현재도 그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교단들이 방언, 안수기도, 축복에 대하여 불과 10년도 채 가지 못하고 허용하고 있습니다.
교리적 판단은 장구한 세월을 두고 수없이 변할 환경을 다 적용시켜도 변치 않을 하나의 이치라고 확신이 될 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총공회나 백목사님의 교계적 위치는 대단한 보수노선입니다. 쉽사리 이단에 근접되는 자유주의나 불건전한 신비주의와는 가장 멀리 있는 교단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총공회나 백목사님에게 사적인 감정을 가졌던 분이 서적 출판으로 총공회나 백목사님의 주장을 편집하였는데, 서적이 가지는 자료 인용의 성격 때문에 박교수님을 비롯 많은 분들의 지적이 그 출발에서부터 착오가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로마서 7장 17절의 옳바른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윗 구절은 바울사도가 중생한 후의 기록으로써, 중생한 영혼도 범죄함을 말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적 신앙의 체험에서, 자신으로 하여금 원치 않은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자신 속에 거하는 죄라고 고백했고. 원치 않은 죄를 범하는 책임도 자신에게 있음을 밝힌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언급하기를 거듭난 자의 영혼도 더러운 방면이 아직 있기 때문에 범죄한다고 했고,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고후 7:1)하였다.
위 구절의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을 보면 다음과 같다.
"Now then it is no more that do it, dwelleth in me?"
이것을 번역하면, "지금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아니며, 내안에 거하는 죄니라"이다. 본절의 죄(sin)는 생각, 감정,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일어나는 죄를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혼도 행위죄, 자범죄를 짓는 것이 된다.
윗 구절의 헬라어 사본을 보면 다음과 같다.
"nuni de ouketi ego katertazomai auto alla e oikousa en emoi amartia"
윗 구절은 영적, 혹은 신앙적 죄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죄이다(롬 5:12)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한 내 속에 거하는 죄는 자신의 죄성(罪性)을 말한다. 중생한 영혼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고, 의롭게 되였으나, 아직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에 있으므로, 현세에서는 중생한 영혼에 부패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생한 영혼도 범죄를 하는 것이다.
답변:
현세에서는 중생된 성도라도 마음 속에 즉 영혼 속에 아직까지도 죄를 짓고 싶은 죄악성이 남아 있고 또 악령은 늘 이 죄악성을 붙들고 죄를 더 짓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중생된 영혼도 범죄를 한다는 것은 논리 이전에 경험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총공회의 백목사가 가르침에서, 중생한 영혼이 범죄치 않는다면, 중생한 성도의 죄는 우리의 인격에서 무엇이 짓는가 하는 것이다. 아현예배당의 김현봉 목사는 중생한 영혼은 죄를 짓지 않고, 육체의 본능과 습관의 죄를 짓는다고 했다. 백영희 목사는 이 문제에 많이 고심을 하였다. 중생한 영혼이 죄를 짓지 않으면, 무엇이 죄를 짓게 하는가이다. 그의 답은 중생자의 밖에서 찾았다. 즉 , 마귀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마귀가 중생자의 몸을 부려서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다.
답변:
지적하는 분들이 이분론의 입장에서 이분론의 용어로 삼분론을 분해하면서 발생되는 대표적인 오류입니다. 중생된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 분명하고 이 죄를 짓게 하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몸 밖에서는 악령이 유혹을 했고 몸 안에서는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악성이 발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신앙양심을 통하여 영은 죄를 짓지 말아야 된다고 끊임없이 타이르고 있으나 결국 마음이 자기 양심을 통해 말하는 영을 거부하고 죄악성을 붙들고 늘어지는 악령에게 붙들리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악령 마귀가 중생된 사람을 붙들고 죄를 짓는다는 말이 틀렸다면 악령없이 인간이 스스로 죄를짓는다는 논리가 될 것입니다. "마귀가 중생자의 몸을 부려서 죄를 짓게 한다"고 했다는 말은 잘못입니다. 마귀가 중생자의 마음을 붙들어 이 마음을 통해서 몸이 죄를 짓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설명하면, 중생자 밖에 있는 마귀가 중생자의 육체 속에 들어와서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죄한다는 것인가? 우리의 인격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 단일 인격인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인격 속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존재하여, 죄를 짓고, 짓지 않는다는 것인가?
답변:
지적하시는 분의 착오는 백목사님의 주장이 믿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는 마음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니까 몸 밖에 있던 악령이 몸만을 붙들고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며 그렇다면 마음과 몸이 분리되어 죄를 짓고 안 짓는 것이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이니 이 논증은 출발부터가 없는 가설에 필요없는 첨언이 된 예이다.
몸과 마음은 하나로 움직이는 것이 단일 인격이다. 그러나 롬7:17 말씀을 박윤선목사님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속에는 죄를 지으려는 자기와 죄를 짓지 않으려는 자기가 있어 죄를 지을 때는 죄를 지으려는 마음과 몸이 합해 죄를 짓고, 또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때는 죄를 짓지 않으려는 마음과 몸이 합해 죄를 짓는 것이다. 몸은 마음이 결정하는대로 따르는 하부 기관이며 마음은 마음 속에 죄와 의 둘 중에 하나로 끌려가고 끌어가려는 투쟁이 하루에도 70번씩 7번도 생겼다가 뒤집어 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는 총공회의 백영희 목사의 주장에서 깊이 통찰하면, 인격 곧 영혼과 육체가 범죄한 것을 알수 있다. 그들의 성경적 주장 가운데, 요한 1서 3:6절"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 하나니", 요한 1서 3:8절,"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그리고 요한 1서 3:18,"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고 한 성경구절 등이다.
여기서"범죄하지 아니하고, Sinneth not 는 모두 현재 동사로서 상습적인 범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범죄를 전혀 아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중생한 영혼이 범죄치 않는다고 할 때에 다음과 같은 성구로 답변을 할 수 있다.
시편 41편 4절"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이 여기소서 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고린도후서 7:1절"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요한 1서 1:8절,"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異 端 宗 派 批 判 (3)
朴英官 博士 著 예수교문서선교회
답변:
지적하신 박교수님은 백목사님이 성도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박교수님으로는 우리 성도들이 죄를 짓는 것이고 그 죄를 고쳐달라고 애원하고 노력하자는 성구들을 나열하고 있다. 박교수님이 제시한 성구 시41:4, 고후7:1, 요일1:8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 믿고 난 뒤에도 죄를 짓는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누가 죄를 짓는 것이며, 우리 속에 죄를 짓지 않으며 오히려 죄를 짓지 않도록 죄를 이기도록 주도하는 중생된 참 자기는 없다는 말인가? 이것이 백목사님의 연구였으며, 이것이 칼빈이 출발시킨 중생교리의 다음 단계 연구 제목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앙" 의 독자문의
제가 그 동안 궁금하게 여겨왔던 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본래 영은 타락하지 않았고 혼(마음)과 육만 타락했다고 주장하는 무리에 대하여 이단성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거듭(중생)난 영은 절대 범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예수님 보혈의 피로 속죄 받은 우리의 영은 절대 범죄할 수도 없고 죄를 범할 기능성도 없다는 교리에 대하여 매우 의심이 갑니다. 그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 요한일서 3장 9절과 5장18절 말씀에 근거를 두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주장이 과연 성경적인가 아니면 잘못인가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기본 구원"과 "건설 구원"으로 나누어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그 예로 마태복음 25장에 3가지 예수님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비유 가운데 열 처녀 비유 중 열처녀 모두가 기본적으로 천국에 갔고 단지 미련한 다섯 처녀만 건설적인 면이 없기 때문에 상급만 없을 따름이라고 해석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듯 "거듭(중생)난 영은 절대 범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연관성이 없는 성경 여러 부분들을 들춰가면서 자기네들만이 깨달은 교리라고 주장하고 가르치고 있는데, 본인의 생각에 이는 결국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함으로 진리의 혼란을 초래하고 더 나가서는 성경 전체를 뒤흔드는 약한 일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주장에 반박할 만한 연구 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적당한 답변은 성경인데 저로서는 신학을 공부하지 안았고 반론할 만한 지식도 없어 그들에게 대항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입니다. 그들은 대항하고 그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글을 보낸 것 만은 아닙니다. 한국교회 모든 교인들에게 조금이나마 성경 교리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영적 분별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글을 보내오니, 저보다 많이 공부하신 목사님들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깨달은 "거듭(중생)난 영은 절대 범죄하지 않는다."는 교리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연약한 성도를 꾀어 진리의 착각을 일으키도록 변질시키는 이단성에 대하여 밝혀 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연구하신 자료가 있다면 즉시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회와신앙>에서 수고하는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길 진심으로 간구합니다.
1995.5. 전주에서 독자 올림
("교회와 신앙"에서 발췌)
우리가 신학적으로 구원이란 말은 사용할 때 두 가지로 사용함을 알아야 합니다. 넓은 의미로 말할 때의 구원이 있으며, 좁은 의미에서 구원을 말할 때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우리의 거듭남 내지는 중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거듭남과 성장을 다 포함시켜서 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육신을 비유로 말하자면 인간은 태어나는 것과 자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태어나지 않고 자라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또한 자라지 않는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구원을 말할 때면 태어나는 것과 자라는 것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요. 좁은 의미에서 구원을 말할 때면 태어나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답변:
너무도 확실히 너무도 정확히 최삼경목사님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최삼경목사님의 설명이 바로 백목사님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구원의 2가지 측면을 잘 이해도 하고 또 설명까지 하면서 앞과 뒤에서는 자기 논리의 다른 표현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지 이 면이 대단히 의아합니다. 같은 논리의 다른 표현은 표현의 조정과 진의의 확인이 먼저 있어야 하고, 내용이 같다면 표현이란 조정 또는 조절의 문제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껏 최삼경목사님과 같이 구원론을 설명하는 신학자가 있었느냐는 문제를 먼저 제기 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성화......등등의 순서로 단순 나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명확히 둘로 나눈 분은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백목사님이 아주 단호하게 그리고 명쾌하게 나눈 것입니다. 그러면 왜 좁의 의미와 넓은 의미로 둘로 나눌 수 있고, 또 벌콥과 같이 중생, 회심, 신앙.......등으로 순서 나열의 여러 이름으로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까?
분류하는 기준에 따라 대단한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벌콥과 같이 나누는 일반 신학의 단순 기술은 구원의 시간적 순서를 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은 이런 주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시간적 나열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구원의 특이한 두 모습의 내적 성질이 있고 이로 인하여 우리 믿는 사람이 믿는 현실에서 대단히 큰 방향으로 믿는 모습이 달라질 수 있는 면이 있어 이런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은 500여년전 루터와 칼빈이 명확하게 단정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 평생에 확정치 않고 후배 교회들에게 남겨둔 문제는 다음의 것들입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 중생이 된 성도들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되는가?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죄를 많이 지은 사람과 적게 지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죄를 짓고 결국 돌이키지 않고 죽는다면 어찌 되는가?
이런 실제 신앙적인 문제를 두고 교회는 대 혼란을 가졌고 현장 목회에서는 목회자가 편리한 대로 성경을 인용 자신들의 목회 편리를 위해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이 말과 저 말이 모순이 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단일 노회로서는 가장 막강했다는 합동측 대구노회가 발표문까지 동원하여 정리했던 내용들이 다 이런 혼란을 나타내고 있었고, 이런 혼란이 다음 여러 신학자들이 단순 인용하고 재론하는 기초자료가 된 것은 한국교회의 성급함이라 생각되어 심히 아쉽습니다.
이런 문제는 전혀 혼동될 필요가 없는 것이 구원과 행위의 관계에서 행위가 전혀 상관없는 처음 믿는 단계, 행위를 하되 죽도록 해야될 믿은 이후의 평생 신앙생활의 단계로 구분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환하게 해결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 이란 학자는 구원의 순서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말했습니다. 즉 소망,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성화, 성도의견인 그리고 영화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구원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지 구원을 따로 따로 떼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성화 구원"이니 "영화구원"이니 하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 목사가 말하는 "기본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정통 교회의 좁은 의미의 구원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며 나아가 "건설구원"이란 성도의 상급 내지는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건설구원"이란 말이 잘못되었지만 그 의미가 성도의 상급에 대한 잘못된 표현에 불과하다면 별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면 가히 이단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답변:
1.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설명, 그 주장의 객관적 사실 확인이 최소한 먼저라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재론입니다만, 지적하시는 최삼경교수님은 백목사님의 설명을 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이단적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수백년 배경 교리역사와 그 논쟁을 면밀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그리고 "삼위일체"표현만 가지고 단순히 의견표시만 하게 된다면, "삼위일체라는 표현이 이런 뜻이라면 별 잘못이 없겠으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면 가히 이단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는 논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2.백영희목사님의 구원론 설명은 구원의 단일성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정통교회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로만 구원론을 둘로 분류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으며, 왜 그렇게 나누어야 하는지 필요성과 그렇게 나눌 때 어떤 면에 차이점이 있는지 등에 대하여는 전혀 간과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신중히 살펴보았다면 바로 백영희목사님의 결론에 먼저 그리고 쉽게 도달을 했었을 것입니다.
즉, 두 개의 구원은 두 개의 구원의 방법을 요구하게 됩니다. 예컨대 안식교인 중에 "큰 구원"과 "영원한 구원"을 나누는 사람이 있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큰 구원이라 하고 성품까지 성화되어야 얻는 구원입니다. (최삼경)
답변:
비교종교학에서 종교마다 절대자인 신, 경전, 기도, 헌금 등등의 모습이 거의 흡사하고 약간씩의 표현이 다른 것으로 이해하여, 기독교도 그 중에 하나 정도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비교종교학 자체를 헛소리 정도로 취급합니다. 안식교가 구원을 둘로 나누었다는데 그 분류가 백목사님과 흡사하다고 슬쩍 비교해 놓는다면, 비교종교학자들이 타 종교에서도 구원을 말하고 경전이 있다는 등으로 기독교 옆에 슬쩍 갖다놓고 비슷하다는 듯 설명한다면, 우리는 이런 비유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랑이와 고양이를 같다고 한다면 같다고 할 모습이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랑이와 고양이는 종자 자체가 전혀 다르다고 한다면 전혀 다른 면이 있을 것입니다. 원숭이와 사람을 같게 본다면 얼마나 같은지 진화론자들은 진화의 시간차 정도로 봅니다. 그러나 종류대로 창조한 창세기를 가진 우리는 인간과 원숭이의 같은 점이 천도 넘고 만이 넘을지라도 인간과 원숭이는 종자 자체가 다르다고 봅니다.
백영희목사님의 설명을 먼저 잘 파악해 보시고 그다음 왜 건설구원과 기본구원으로 분류하면 안되는지 "추측"이나 "단순한 우려"의 표현이 아니라 진리 세계에 생명 바쳐 걸어갈 교리의 잘잘못을 놓고 지적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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