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백영희구원론의 의의 (정통 구원론의 완성적 의미)
I.교리 정리의 필요성
1.정리되지 않은 교리, 정리된 교리
큰 범위의 교리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면 논리적인 정리를 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 하나의 옳고 바른 교리를 한 곳에 모아 놓으면 서로가 충돌을 하게 된다. 실은 서로가 모순되는 것이 아닌데 모아놓고 정리하는 사람이 배열을 잘못해서 그렇게 될 수가 있다. 전체가 파악되면 정리가 되고, 정리가 되면 교리가 간단해지고 쉬워진다.
삼위일체교리로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한 분임은 틀림이 없고 예수님과 성령님도 참 하나님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까지 알고 있던 분들이 성경과 인간적 설명을 뒤섞어 수도 없이 주장을 하였지만, 구구절절이 말은 맞는데 마지막은 자기 논리의 모순이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라는 말고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말은 결국 예수님이 1/3의 하나님이 되든지 아니면 하나님은 유일신이 아니든지 해야 되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삼위일체 교리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교리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로 요약하기까지, 수백년간 교회는 모든 철학가의 모든 철학이 어지럽게 난무하였다. 여러 사람의 주장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무슨 말인지조차도 모를 표현과 나열이다. 실은 전체 파악의 정도에 따라 단순화되고 쉬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3위1체의 하나님이란 표현에서 이 모든 인간적 의문은 하나님의 계시로 요약되어 답변된 것처럼, 구원론도 이제는 요약되고 정리되어 아주 간단하고 그러나 단호하게 정립될 때가 되었다.
현재 구원론에 대한 여러 정통교리서들이 구구절절 옳고 바른 성경적 근거의 주장들을 적고 있다. 그러나 그 책을 기록한 저자 자체가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썼는지 알 듯 말 듯 한 것을 구름잡듯 하는지 어지럽다. 백영희목사님의 구원론은 이런 점에서 단순하며 단호하고 누구나 쉽게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요약으로 정평이 있다. 구원론을 바로 정립했다는 가장 외부적 증거이다.
2.현재까지의 구원교리
1)그 절대 명제들
①사람은 물질인 몸과 비 물질이며 영적인 존재 영혼, 둘로 되어 있다.
②따라서 영혼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성 전체성의 존재이다.
③따라서 구원은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인데 이는 즉각적이지 점진적
이 아니다.
생사란 중간 상태나 또는 점진적인 과정일 수가 없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④예수님의 대속은 우리를 단번에 사죄하고 칭의시켜 단번에 중생케 하였고 이
러한 영혼의 중생은 일생에 한번밖에 없는 일회성이다.
⑤그러나, 중생된 성도라도 그 영혼에 죄를 다 털쳐버리지 못하여 평생 노력
을 해야 한다.
2)한곳에 모아두면 당장에 나타나는 현실적인 모순들
①예수님의 대속은 한번인데 한번으로 적용되어 중생된 영혼이 다시 짓는 죄
의 값은?
②영혼은 분리할 수 없는 단일의 존재인데 그 영혼 안에 의로 산 부분이 있
고, 아직도 죄를 짓는 부분이 있다면?
③중생된 성도가 평생에 죄만 짓고 산다면 그래도 천국은 반드시 가게 되어 있
는가?
3)정리되지 못한 구원론 교리가 빚어내는 교회 현장의 모순
①성도라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지옥을 간다. 그렇지 않다면 죄
를 지어도 천국을 가게 된다는 말이 될 것이니 성도는 마음껏 죄를 지어도
천국 갈 수 있게 된다.
②참으로 중생된 사람이라면 완전 중생이기 때문에 다시는 영혼이 죽지 않는
것이며, 죄를 짓지 않고 살게 된다.
③물론 성도는 평생 죄를 짓고 살지만 반복적으로 또는 고의로 또는 습관적으
로 짓는 죄가 아니며, 이것이 바로 중생된 생명이 가지는 기본적 성향이다.
II.구원론에 대한 정리
구원론에 대한 교리는 위에서 살펴본 하나 하나의 명제들은 다 옳고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 모든 것을 한자리에 모아 놓으면 전체가 혼동스러워진다. 그래서 구원론의 여러 명저들, 대표적인 대작들조차도 과연 알고 써내려 간 것인지, 개별 문제마다 단답으로만 엮어 놓은 것인지, 그런데 앞에 한 말이 뒤에 한 말의 반대가 되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 때로는 이 대목은 말로서 성립이 되기나 하는지까지를 문의하는 독자들이 있는 정도이다.
1.정통의 교리들의 절대적 명제를 자세히 살펴 들어가 보면 그 안에 해답은 있다.
1)구원론은 옳은데 인성론의 근본 시각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구원교리는 몸이 아닌 영혼을 중심으로 엮어지고 있는데, 마음인 영혼은 비 물질적인 영적 존재라고 인성교리에서 이분설로 단정을 한 다음 성도의 마음이 중생된 다음 성화되는 과정을 구원론으로 구성하게 되니까, 구원론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즉 인성교리에서 마음이 영적 존재라고 하였기 때문에 중생은 마음이 중생되는 것이다는 전제를 가지게 되었고 그 다음 성경에 명확하고 이견이 없는 구원론의 명제들을 내리 적용을 시켜 나가니까 결국은 모순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인성의 이분론과 구원론의 중생, 칭의에서는 사람의 영혼은 살면 살고 죽으면 죽지 살고 죽는 것이 불명확하거나 중간단계를 거치는 일이 없고 또한 이 부분은 살아나고 저 부분은 죽어 있는 분할 또는 분리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구원론의 성화부분에서는 중생된 사람의 영혼이 죽는 날까지 죄를 짓고 나가기 때문에 노력해서 성화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모든 정통 조직신학의 교리서에서 거의 일치되는 주장이며 이렇게 주장하지 않는 이들은 중생 후의 성도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완전론을 말하든지 아니면 인간의 노력으로 중생도 성화도 영향을 받는다고 하여 전적 은혜의 구원을 부정하고 나서는 이들이 있다. 여기서는 정통 교리 안에서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다.
조직신학의 저서들이 대개 그 양이 방대하고 한 가지 논점마다 깊은 철학적 용어와 난해한 설명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로서는 쉽사리 각 항목별로 무엇을 말하는지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동일한 서적 안에서 모순되는 표현과 주장들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전체를 요약 비교하면 분명히 논리적 모순은 확연히 들어나고 있지만 그 하나 하나의 개별적 이치는 성경적임에 틀림이 없으니 결국 표현의 애매함과 추상화로 변통을 하고 있다.
불신자의 마음은 죽었는데 성도의 마음은 중생이 되었고, 그 중생은 마음 전부를 살려낸 것이고 그 마음은 평생에 한번 중생으로 두 번이 없고..... 그런데 그 마음은 또 한편으로 죽는 날까지 죄를 짓는다.....는 주장을 하다보니까 말이 성립조차 되지를 않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불가능한 일인가?
2)구원론을 위해 영혼 속에 묻어 두었던 "잊어버린 영"을 찾아 내야 한다.
인성교리가 그 구조를 다룰 때 해부학적으로 또 단편적으로만 다루었고, 우리에게 실제로 적용될 구원의 실생활 문제와 연관을 시키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이분론이 옳다는 전제에서 구원론을 전개시키다 보니까 결국 구원론은 옳은데 이분론이라는 출발 토대에 오류로 엉뚱하게도 구원론의 끝에 대단한 결과착오가 생겨버렸다.
구원교리의 절대 명제는 그 골격이 대단히 바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구원교리를 전개하기 전 기본인식이 2분설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고 진행을 했기 때문에 2분설 때문에 구원론에 모순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복적으로 의인과 죄인 사이를 복잡하게 오고가는 것이 성도의 마음이며, 한번 중생으로 다시는 죄와 상관없는 영적인 존재는 마음이 아닌 영이다. 이 영과 마음(영혼)을 구별하여 다시 구원론을 살펴보면 현재까지 밝혀낸 정통의 구원론은 전부가 정확한 교리로 확연해지게 된다. 그러나 인성을 몸과 마음 둘로만 나누어 마음이 영적인 존재라고 하면서 위에서 지적한 논리를 적용시키면 혼동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론의 교리들을 옳은 것으로 단정하고 맞추면 그 시작의 인식이었던 이분설이 달라져야 한다. 이분설이 말하는 영혼, 그 영혼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이분설이 말하는 영혼이란, 물질로 된 마음과 영적인 존재인 영으로 명확히 다시 구분되어야 하며 물질로 된 마음은 몸과 함께 물질에 속한 것이며 불신자와 믿는 사람 안에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며, 마음 속에 있는 영적인 존재는 오직 우리의 영이며 이것만이 불신자와 성도를 구별할 수 있는 분명한 차이이다. 이 영이 불신자에게는 죽어 있고 믿는 사람에게는 다시 살아나게 된 바, 이 다시 살아나게 된 영을 가르쳐 중생된 영이라고 하는 것이다.
3)성경적으로 구원교리는 명확하여 이견이 없고, 인성구조는 분분한 이론이 많다.
구원교리는 성경적 명확성이 있다. 인성구조는 성경적 근거를 명확하게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세상 기본 상식 평소의 기존 인식을 바탕에 깔고 그냥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성경적 명확성이 있는 구원교리를 먼저 확정시켜 놓고 그다음 인성구조를 찾아들어 가보면 인성구조는 바로 밝혀진다.
이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단순한 생각에 영혼은 마음이고 마음은 중생 후에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중생된 영혼이 죽는 날까지 죄를 반복하여 짓는다는 주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교리는 대속과 중생은 인간에게 한번이지 반복되는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결론이 나오니까 조심스럽게 연구하는 사람들은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라 하고, 일반인들은 무슨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게 되고, 설명하려는 측에서는 마지막으로 설명이 어려운 모순은 "신비로운 진리의 세계"라고 얼버무려 지내온 것이다.
인간에게 영적인 존재는 마음이 아니고 마음 속에 있는 영이다. 이 영이 중생되는 것이며, 마음은 물질로 된 것이며 이는 불신자에게도 있는 것이며 믿는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이 중생 이전 때처럼 악령에게 붙들렸다가 다시 영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에 영과 마음을 구별치 못하여 오해가 된 것이다.
영혼의 중생은 한번 뿐이며, 즉각적이며 이는 영혼이 단일성의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마음이 아닌 마음 안에 있는 영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영혼이 평생토록 중생후에도 죄를 짓는다는 것은 물질인 우리의 마음에 해당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물질이며 따라서 몸과는 다른 형태 다른 성질의 복합체이다. 중생된 영에게 붙들렸다가 악령에게 되붙들려 양쪽으로 오고가는 존재이다.
4)따라서, 구원교리에서 인성구조의 "잃어버린 영"을 되찾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맞아진다.
이분설과 삼분설 자체는 아무리 논쟁을 한다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이론만의 이론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렇게 논리적 평행선을 긋고 나가는 두 의견 중에서 마음은 물질이며, 영적인 존재는 영이라는 결론을 지어주고 있다. 구원교리는 성경의 중심에 있고 인성구조는 그 외곽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구원론을 맞추고 그 구원론에 인성구조를 맞추면 인간은 삼분설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맞아지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성구조를 다시 한번 검토한다면 인성은 삼분이 맞고 우리의 마음은 물질이지 영혼이 아님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래서 인성구조에서 출발하나, 구원교리에서 맞춰 들어오나 물질인 마음 안에는 우리가 잊었던 영이 있음을 알게 되고, 이 잃어버린 영을 되찾으면 순간 모든 것은 확연하게 정리되면 결론에 도달케 된다. 이제 잘못된 마음관, 영혼관을 바로 잡아 잊었던 우리의 영을 찾아 낸 다음 다시 한번 구원론을 접근해 보자.
2.정통교리의 구원론의 정확성
1)중생은 평생 한번이다.
그러하다. 죽었던 우리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두 번이나 세 번으로 반복할 불완전한 대속이 아니며 완전 대속 단번 대속 영원 대속으로 대속한 것임은 이견이 없다. 이는 그리스도가 두 번 세 번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대속이 아님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영원히 다시 죽지 않을 영생으로 받은 것임은 이견이 없는 교리이다.
중생이란 이렇게 단번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거듭난 것인데 이 중생을 영이 아닌 마음에 해당된다고 적용을 잘못했기 때문에 모순이 시작된 것이다. 중생된 사람이 중생 후에도 수없이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이 현실이고 그 마음이 의와 죄 사이를 하루에도 70번씩 7번을 반복할 수 있는 변동 많고 탈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얼마나 우리가 우리 마음을 단속키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신앙의 실제이다. 이런 마음을 곧 영적 존재인 영혼이라고 한다면, 또 이 마음이 중생받은 존재라고 한다면 중생은 다시 범죄할 수 있도록 중생된 것이지 다시는 변동없는 중생이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구원론의 교리는 옳고 마음을 영적 존재라고 인식한 이분설은 좀 더 연구를 하고 나왔어야 할 아쉬움이 있다.
2)중생은 즉각적이다.
죽고 사는 생사문제는 점진적이라든지 중간 단계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면 바로 죽고 중생되면 바로 살아나는 것이다. 영혼은 죄로 죽어 있는 영혼이냐, 의로 살아난 영혼이냐 둘 중에 하나이지 일부는 살고 일부는 죽어 있고 아니면 살았던 것이 어설프게 다시 죽는 반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통의 교리이다.
과연 정확한 깨달음이다. 영적 존재란 물질과 달라서 복합체가 아니며 점진적인 변화의 단계를 거쳐가는 것이 아니다. 범죄한 아담은 말씀대로 즉시 죽었지 930년을 통해서 서서히 죽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서서히 죽어간 것은 아담의 물질적 요소 즉, 몸과 마음이다. 아담의 영은 바로 죽었고, 또한 그 후손된 우리가 중생될 때도 이 영은 즉시 바로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이 영이 우리 마음 속에서 활동을 다시 시작한 중생 이후에도 우리의 물질인 마음은 반복을 수도 없이 한다. 마음의 이 양심 부분은 말씀을 듣고자 하는데 욕심 부분은 아직도 죄를 지을 기회를 찾는다던지, 어제 마음은 이랬다가 오늘 마음은 번복을 하는 별별 애를 다 태우며 평생을 거쳐 가게 되는 것이다.
정통의 구원교리는 그 한 대목 한 대목은 정확히 깨달았고 다 한 시대를 앞서가는 깨달음이었는데, 애매한 인성의 구조를 단순히 자신들의 안 믿을 때 가졌던 선입견, 중생되지 않은 사람이 느끼고 알 수 있는 것은 몸과 마음 밖에 없으니까 그 마음을 영적인 존재로 혼동을 해서 영적인 존재인 영에게 해당시킬 중생이라는 구원을 마음에다 적용을 시킴으로 모든 혼동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목적 착오, 즉 적용의 대상 착오가 있게 된 상태에서 올바른 구원 도리를 설명해 나가려고 하니까, 분명한 성경 진리인 구원의 명제들은 양보할 수가 없고, 그런데 마음만이 영적존재라고 착각을 하여 이 마음이 중생된 영적 존재라고 설명을 해야 되다 보니까 모든 설명이 복잡하게만 되면서 결론에는 모순이 나오게 된 것이다.
3)영적 존재는 분리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마음은 신체적 해부의 개념으로 해부가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신비한 물질로서의 또 다른 차원의 해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상론하며 서로 따져보고 또 갈등에 싸움까지도 하고 있다. 욕심은 강하여 집착력은 장점인데 인정이 약하여 알면서도 또 끌려간다든지 하는 등이다. 그 마음의 단일성을 보기가 오히려 지극히 어렵고 복잡하고 얽혀 있기를 이루 말로다 표현을 못할 정도이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7장의 탄식 뿐이겠는가?
똘똘 뭉쳐 단정한 마음의 결정이 다음날에는 뒤바뀌어서 완전히 딴 소리를 하는 것은 몸이 혼자 저진 일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칭하는 그 마음이 하는 일이다. 이는 영적 존재의 근본적 성질과는 아주 다른 물질적 존재의 일이다. 실은 이런 문제는 정통 조직신학의 구원론 저서에서도 숨겨놓지를 못하고 있다. 마음을 본질, 능력, 성향, 행동 등으로 분리 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그 각각은 살고 죽는 상태가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영적 존재이니까 분리가 가능치 않다고 해놓고는 또 마음을 실체적으로 연구를 한 결과 이렇게 여러 차원으로 나눌 수도 있다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은 마음을 3-4가지로 분해할 때 3번째에 해당되는 성향에 온다고 하여 마음의 일부는 살고 마음의 다른 차원은 죽어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논리는 다 성경적이고 옳은데, 마음에 해당될 것과 영에 해당될 설명을 마음 한 곳에다 다 적용을 시켜놓고 나니까 바른 교리가 모순을 일부러 잡고 있는 듯하다.
4)구원에는 단번인 중생에 이어지는 성화도 있다.
중생은 단번이지만 중생에 이어지는 성화는 점진적이며 반복적인 과정으로 평생을 이어간다. 이 성화라는 개념을 영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마음에 적용을 시키면 아주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이 성화라는 개념은 중생과 그 나타나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존재인 마음이 영적 존재로 중생된 바로 그 영혼이라고 하기 때문에 모순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단번에 죄를 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중생 후 평생토록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 성화이니 성화를 부인할 수는 없고 성화를 인정하려면 중생된 영혼은 평생토록 죄를 털어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는 말이 되니 이는 중생의 성질 중생의 본질에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생은 단번이며 영혼의 전체에 동시에 적용되며 그 중생은 평생에 한번으로서 중생 이후는 영생으로 이어지며 다시는 되 죽는 일이 없다고 설명을 하는데 우리의 마음을 두고 여기에 해당되는가 아무리 살펴봐도 이는 해당이 없는 말이다.
구원교리 중에 있는 중생과 성화의 설명은 바로 되었으나 그 대상을 중생은 영에게 성화는 마음과 몸에게 해당시켜야 될 터인데 마음만을 영혼이라고 오해하여 중생과 성화가 마음 한 존재에게 다 해당이 된다고 논리를 맞추려고 하니까 모순이 안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구원교리, 특히 중생의 교리는 그 표현과 정의 또한 이어지는 설명이 아주 어지러워 읽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 바로 이 이유이다.
3.백영희의 중생교리, 중생된 영은 범죄치 않는다는 신학적 의미
1)잃어버렸던 "중생 영"을 명확히 찾은 의의
성경은 인간의 구조가 어찌 되었는지 나열하고 있는 생물학적 해부서가 아니다. 반면 성경은 그 제일 중심의 주제를 "구원"에 맞추고 있으며 구원에 관한한 명확한 성구와 많은 각도의 교훈이 있다. 따라서 양심적이며 복음적인 그리고 중생된 참 신학자들로서는 생생하게 구원의 교리를 성경에서 집어 낼 수 있었다. 여러 각도에서 여러 면에서 절대 명확한 구원교리의 한 대목 한 대목을 밝혀 나왔는데 그 모든 옳은 주장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으면 여러 가지 모순이 계속 나왔던 것인데 그 가장 깊은 원인이 바로 마음을 영적인 존재로 본 오류였었다.
백영희목사님의 중생된 영은 범죄치 않는다는 단언은 이런 정통교리의 핵심에 있는 구원관을 간단히 쉽게 그리고 명확히 나열하여 수백년 정통교리의 혼란스러워 보였던 바른 교리들로 하여금 바른 교리로 증명이 되도록 했다. 구원관의 혼돈으로 교회의 중세 1,000년이 헛되었듯이 또 하나의 구원관이 바로 나갈 개신교로 하여금 500여년 주춤하게 만들었던 것을 각각 제자리에 앉혀 놓는 것이 이 교리의 의의이다.
2)중세 1,000년의 구원관이 틀린 이유
은혜로 얻는 구원, 하나님의 단독 역사로만 얻게 되는 구원, 한번 중생되면 다시는 지옥의 자식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는 완전 구원, 영생구원이 우리의 구원인데, 천주교는 이런 전적 은혜의 완전 구원에다가 인간의 노력이 일정 부분 필요함을 주장하였고 이 주장은 인간의 노력이 잘못되면 지옥 갈 수 있다는 것으로 결국 나갈 수밖에 없었다. 논리적 필연성이다.
천주교는 100% 잘못되었던가? 그들은 영에게 해당될 중생을 마음에 해당이 된다고 마음만 알았고 그 마음이 중생 된 후에도 자꾸 죄와 의 사이에서 변덕과 반복을 하게 되니까 인간의 마음이 노력을 해야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또 중생 후 새로 지은 죄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영에게 해당되는 모든 택자의 천국가게 되는 기본적 절대적 구원을 마음에 해당된다고 보고 이 마음은 상대적이며 점진적이며 인간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 보니까 천국 가는 기본적인 구원 자체에 인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나가 버린 것이다.
이런 착오는 결국 구원에는 인간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니 반대로 인간노력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는 논리로 전개가 되고 결국 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 집중할 노력은 이런 것이라고 여러 가지를 요구하게 되자 천주교의 구원은 절대적인 대속의 은혜 대신 인간적 제도와 노력이 대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3)개신교 500년의 구원관에 혼란
개신교는 출발할 때부터 구원에는 인간노력이 있어야 된다는 천주교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왔기 때문에 중생은 전적 은혜이며 인간 노력은 전혀 필요치 않다는 주장을 절대적 명제로 하게 된다. 인간의 노력을 구원에서 완전히 배제시키다 보니까 중생은 완전 중생으로까지 설명하게 되는데, 문제는 영이 있는 줄은 모르고 마음의 존재만을 알고 있던 초기 개혁가들이 중생을 마음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그 후 오늘까지 이어지는 후학들은 개혁가들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생 이후의 문제를 두고 혼동하게 된 것이다.
중생은 즉각이며 단번이며 완전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 중생된 영혼이 죽는 날까지 죄를 짓고 있다는 설명을 "성화"라는 항목에서는 덧붙여 놓는다. 구원의 출발인 중생에다 초점을 맞추면서 그 중생의 성질이 전적 은혜라는 점을 주목하다 보니까 자연히 성화라는 면은 소홀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츰 세월이 지나가면서 중생 후의 성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게 되고 그러면서 그들에게 나타나는 재범과 회개의 반복, 또 점진적인 변화 등을 보면서 "성화"를 점점 많이 의식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를 논하다 보니까, 중생 후의 성도가 거룩하게 점점 성화되어가는 데에는 인간적인 노력이 있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고 동시에 이런 성화의 과정은 중생된 그 영혼에 해당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을 붙여 놓고 보니까, 하나의 영혼에 병립될 수 없는 두 개의 성질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실은 중생과 성화란 둘 다 전혀 달라 보이는 그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다만 그 적용되는 대상이 "동일한 영혼"인 마음이 아니라 영혼인 마음과 그 마음과 다른 영적인 존재인 영, 둘이 있다는 것만 알았다면 완벽한 구원론의 완성이 되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인성의 삼분론을 구원론에서 찾아보지 못했던가? 교리의 전체성을 폭넓게 보지 못한 협견 때문이었다. 물론 오늘에서 볼 때, 그때의 그런 논리가 협견이라고까지 하는 것일 뿐, 개혁의 당시에는 구원이 전적 은혜라는 그 한마디가 1천년 천주교를 뒤집는 역사적인 깨달음이었으니 그들에게 그 이후 시대가 다시 덧붙여 감당할 몫을 당시에 같이 해결하지 못했다고 협견이라 한다면 교회를 세월 속에 길러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평하는 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된 사람은 이제 노력이 없어도 무조건 단 한번의 중생으로 천국까지 이어지게 되고 천주교가 말하던 모든 형태의 인간이 할 노력, 면죄부 등 추가 행위는 천국가는데에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필요 없다고 해야 개신교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 교리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영에게 해당되는 중생의 성질이며, 천국가게 된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가질 우리의 실력, 우리의 자랑, 우리의 영광의 차이에 대한 것은 각자의 수고와 노력에 따라 분명히 다른 것이니 이는 마음과 몸의 성화의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생과 성화의 구별은 확실히 나눌 수 있는 것인데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존재를 마음 하나만으로 알고 그것이 영적인 존재인 줄로 오해를 하게 되고 보니까, 그 마음 하나에게 중생의 성질과 성화의 성질을 다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천주교는 중생을 희생시켰고 개신교는 초기에 성화를 희생시켜 혼돈이 있게 된 것이다. 중생을 희생시킨 천주교는 천국을 인간 노력으로 갈려고 힘쓰게 되었고, 성화를 희생시킨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이니 인간이 할 노력은 없고, 혹시 하게 된다면 중생된 사람의 본능이 자연스럽게 주님 인도 따라 살게 되는 하나의 결과 정도로 말하기까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초기 개혁가들이 거의 또는 대단히 지나쳐 버렸던 성화를 그후 천주교와 토론 자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히 연락이 끊어질 정도로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가 교회 내부 문제로만 다시 한번 성화를 살펴보게 된 것이다. 사람이 중생된 후 범죄하지 않는 것인가? 완전 중생이기 때문에 저절로 천국을 가게 되는가? 그렇다면 중생된 사람은 노력할 필요도 또 노력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도 환하고 그렇다고 천국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천주교가 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면 중생된 사람은 중생의 본질 때문에 저절로 의롭게 살게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교회 내에는 아주 악질적으로 평생토록 고의적인 교권 싸움을 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이들을 단순히 지옥갈 불택자가 탈을 뒤집어 쓰고 교회내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니까 성화에 대한 재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중생은 단번이고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나 성화란 믿는 사람이 평생에 노력하고 나갈 투쟁과 수고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요약을 하고 보니까 그렇다면 영적인 존재로 마음을 영혼이라 했는데 그 영혼인 마음에 어떤 부분은 중생이 되었고 다른 부분은 성화가 필요하다는 등의 혼란이 또 모순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해결할 수는 없고 그러나 개별적으로는 다 옳은 구원교리이기 때문에 모든 교리서가 구원론에 대하여는 각 단원, 각 항목 별로만 적어나가고 있지 전체적 요약은 피해버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백영희의 중생 교리는 바로 이런 개신교가 발전시켜 나온 구원론이 그렇게 단편적으로 나뉘어 존재할 교리가 아니고 전체적으로 요약될 수 있는 올바른 교리임을 간단 명료하게 펼쳐 놓은 공로를 세운 것이다. 마음은 물질이며, 사람의 영적 존재는 영이라는 것으로 마음은 영이 중생된 이후 마음 속에서 외치는 영의 목소리를 따라 깨끗이 씻어가는 평생의 성화 과정을 밟게 된다.
4.백영희의 구원교리 요약
이제 요약을 하자면 사람은 영과 마음 그리고 몸으로 되어 있다. 몸과 마음은 동물에게도 있고 불신자에게도 있는 것으로 물질이며 따라서 종합체로 되어 있으나, 영은 영적인 존재이며 만물에게 없는 인간에게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이는 단일성의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과 같이 나뉘거나 혼선되지 않는 존재이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심신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을 때, 그 주인인 영은 그 책임으로 단번에 죽었으니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그 영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었고, 영이 하나님으로 연결되는 존재인데 이 영이 즉각 죽게 되자 하나님과 인간은 끊어졌고 따라서 심신만이 물질로만 된 만물 중 하나로 살다가 결국은 죽게 되었던 것이다.
중생은 마음 안에 본질, 능력, 성향, 행동들의 여러 가지 차원 중에서 3번째에 해당되는 의롭게 살려는 성향이 하나 심겨지고 출발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그동안의 학설은 중생의 성질은 바로 보았으나 그 중생에 해당되는 우리 안의 대상을 잘못 잡은 것이다. 중생은 그 마음 안에 죽어 있었던 영, 즉 물질인 마음과 다른 영적인 존재인 영이 죽어 있었다가 이 영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아나게 되었으니, 죽었던 영이 중생으로 즉시 살아나고 이 영은 예수님의 완전 영원 단번의 대속으로 다시는 죽지 않는 영으로 중생이 되었고 그 영이 성령으로 함께 자기의 마음과 몸을 악령으로부터 성화시켜 나가려는 평생의 노력이 계속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그 적용의 순서에 따라 모든 믿는 사람에게 공통으로 무조건 은혜로 다 적용되는 것이 영의 중생이며, 이 중생으로써 무조건 천국으로까지 이어지는 구원은 완결이 되어진 것이니 이를 기본적으로 믿는 사람은 다 가지게 되고 차이가 없다는 뜻에서 "기본구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영이 그 사람의 육이 죽을 때까지 그 육인 심신을 성화시켜 나가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임하는 은혜를 자기 심신으로 어떻게 받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각각이 다 다르니 이 다른 것은 심신에게 해당된 것이며 꼭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건설구원"이라고 분류를 하게 된 것이다.
십자가의 단일 대속을 둘로 쪼갠 것이 아니라, 그 단일의 대속이 영적 존재인 영과 물질적 존재인 심신의 성질에 따라 영에게는 즉각적으로 마음에게는 점진적으로 적용이 되기 때문에 그 적용의 모습을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III.백영희 구원론을 평가한다면 - 기존 구원 교리의 완성 완결적 의미
따라서 구원론에 있어서 천주교는 틀렸고 우리 정통신학은 옳았다는 결론을 먼저 내리고 싶다. 천주교의 교리는 근본이 방향을 잘못 잡아 교파적으로 구원이 없는 이교가 되어 버렸고 우리 개신교는 구원교리의 시작을 바로 잡아 교파적으로 구원의 교회가 되었다. 다만 구원의 시작에서부터 그 최종까지를 정리하는데 다소의 세월이 걸린 것은 교회를 길러가는 주님의 뜻일 것이고, 오히려 생명있는 교회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니 감사할 일이다. 물론 하나 앞을 깨달은 종들의 차원에 닿지 못한 사람들이 발전과정에 있는 현재의 교리를 완성된 교리로 오해를 하여 그 이후 자라가는 교리를 수평 비교하여 정죄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우리 정통교회의 구원론의 대세적 발전과정에서는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다.
백영희목사님은 구원교리에 있어서 정통신학이 옳음을 "잃어버린 영"을 찾음으로 증명했고 정리했으며 요약하여 결론지었다. 정통신학이 단순히 흩어져 별개로 존재했던 구원론의 여러 명제들이 영과 마음을 구별하는 것에서 전부 정리가 되어졌다.
구원에 대한 천주교의 잘못을 지적한 루터나 칼빈은 대단히 깊이 많은 연구를 했던 이들이며, 인간적 노력만 가지고 알 수 없는 그 세계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서 알게 되고 발표하여 종교개혁을 성공했던 이들이다. 그 이후의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고 단순히 편리하게 가진 단순한 교리 손쉽게 사용을 했던 정도였다. 그 이후 성화는 중생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 이들은 역시 첫 종교개혁의 수고한 사람들만큼이나 연구와 충성을 했던 이들이다. 이들의 가르침을 여러 교리서에 여러 형태로 옮겨놓은 이들은 암송을 반복하는 정도였다.
다시 한번 중생과 성화는 단일 구원의 다른 적용 모습임을 처음 밝혔던 이들만큼이나 깊은 연구와 충성을 했던 사람이 그 중생과 성화가 구원의 다른 모습임을 그러나 실은 단일 구원의 두 모습임을 완전히 분해하여 요약한 것은 정통교리의 신앙노선이 생명이 있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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