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955. (1.31.-2.1.) 새벽
본문: 살전1:3-4
제목: 소망의 인내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소망에는 인내가 없으면 헛일이다. 인내 없으면 잡지 못한다. 소망은 신앙하는 것의 실상이다. 믿는 그 실체가 곧 소망이다. 예,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이 곧 소망이라 말이다. 예수님 믿는 것은 예수님이 곧 소망이다. 천국을 믿는다고 하면 천국이 곧 그이의 소망이다. 그런고로 소망은 믿음의 실상이요 사랑의 열매이다. 사랑의 수고가 맺는 열매이다. 소망이 헐어지면 소망이 파괴되면 그기 대한 신앙도 신앙의 행사인 사랑의 역사도 다 헛되다.
소망은 모든 준비의 전제이다. 모든 준비는 소망을 앞두고 준비한다. 소망은 준비의 결과라 말이다. 그러면 준비와 소망은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보이는 외형적으로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소망이 좋으면 준비가 나쁘고 소망이 귀하면 준비가 천하게 보이고 소망이 강하면 준비는 약한 것으로 보이고 소망이 확실하고 든든할수록 실력이 있을수록 준비에는 헛되고 헛되고 허무하게 보여진다. 그런고로 소망과 준비는 외형적으로 정반대의 모양으로 나타남을 기억해야 한다. 소망하는 것을 취하여 내 것 삼는 데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원리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실상에서 먼저 취하고 이미 취하여 놓은 것이 띠가 이르매 보이게 나타나는 것뿐이다. 얼마나 인간은 속고 있는지 모른다.
소망은 다 볼 줄 알고 소망은 다 탐한다. 그러나 이 소망을 자기 것 삼는 데 있어서 어떤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그 소망을 소유한 사람을 보고 부러워하여 그 방법으로 받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받지는 못한다. 이런고로 그에게는 본 소망이 발견한 소망이 도리어 불행을 준다. 어리석은 자야, 보이는 것을 누가 소망이라 하겠느냐? 보이는 데서 소망을 받는 자는 그는 오래 전 보이지 아니한 데서 이미 받아 놓은 것이 자타에게 나타나는 것뿐이다. 그런고로 소망하는 그것을 완전히 내 것 만드는 데는 보이지 아니하는 데에서 완전히 받아야 하는 것이니 이 것이 곧 소망의 준비라 한다. 그런고로 소망과 준비는 반대같이 보이기 때문에 모순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망은 기뻐하면서 준비는 싫어한다
준비할 때에 하는 모든 역사가 소망을 보수적으로 받는 것도 있으나 실상은 괴로운 것 같은 그 준비는 소망인 그 실상을 내가 취하여 내 것 삼는 것이다 이것은 원리를 말함이다. 이것이 잣대이니 어디든지 가지고 가서 재어 보라. 예, 공부하는 학생이 지식 많은 사람 박사를 보고 나도 그 소망 가지기 원한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되고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가 있어야 한다. 괴롬이 한자 두자 와서 내게 쌓여 박사 되고 성공된다. 보이는 박사 되기 전에 안 보이는 데서 모든 박사의 행복이라면 그 반대로 불행으로 불행으로 하나 둘의 지식 내게 완전히 나타난 것이 때가 오면 박사 된다. 이것은 지엽이다 모든 전체는 이와 같다.
월봉자(月俸者)가 노동의 매일과 월말 감주(堪做=돈계산) 시, 고와 낙은 정반대이나 모순 아니 합리이다. 소망과 준비는 모순된 것 같으나 합체이다. 사람들은 이 도리 모르기 때문에 모순인 것 같으나 합체인데 소망 주나 받지 않고 받는 기회 놓치고 후에 갈급만 느끼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소망 중에 살고 있다. 누구나 다 그러하다. 소망은 생명이라 할 수 있고 낙망은 사망이라 할 수 있다. 소망의 터는 집을 세우면 터가 있어야 하나니. 이치와 법, 이치와 법을 집행할 수 있는 권능 곧 그대로 시행시킬 수 있는 그 권리 그 법대로 응보하여 줄 권세 이것을 배경 삼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소망의 배경이 되는 그 이치와 법과 집행권과 보응의 권세의 크고 적고 길고 짧은 그 권세의 여하에 따라서 소망의 가치도 매일 - 나를 끌고 가는 소망은 그 배경은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여기서는 주의할 점 있다. 언필칭은 현재는 무효하고 매일 생활을 끌고 나가는 그것이 내 가치이며 현재는 그게 속하여 있는 줄 알아 자기의 소망과 배경을 측량하여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