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후 범죄하지 않는 인격 - 박윤선
박 목사님은 1956년 요한일서 주석을 통해 중생자 안에는 죄를 짓지 않는 별개의 인격 또는 생명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1964년 안팎으로 백 목사님과 중생론 논쟁이 있었는데 잘못 전해 듣고 공회 교리를 잘못 비판한 글을 개정판 주석에 싣게 됩니다. "사람은 중생 후에도 범죄한다" 이 것은 박 목사님이나 우리나 원래부터 같았습니다. 중생 후 죄를 짓지 않는 부분은 따로 있다는 것이 박 목사님과 우리나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표현이 주석 개정판에 나온 것은 이 노선 중생 교리를 향한 우회적 비판인데 이 글은 기초사실을 잘못 파악한 실수입니다. 중생 교리 연구를 위해 필요한 글이어서 올립니다.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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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후 범죄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박 목사님의 주석 설명
- 출처 : 1956년판 요한일서 3장 9절, 5장 18절
"중생 후에 우리가 범죄를 하지만 우리의 속사람 새사람 중생의 생명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명확한 글이 있습니다.
- 개정판에서 달라 진 부분
출처 :
로마서는 85년 1월 인쇄, 89년 6월 2판 발행
공동서신은 89년 8월 15일 인쇄(증보전정) 89년 8월 20일 발행
Ⅱ. 사건과 비판
5. 사람은 중생 후에도 범죄한다.
......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않는다”고 하는 또 다른 성경적 근거로 그들이 내세우는 성구는 롬 7:14~25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간 그러한 생각이 건전한 것인가 생각하여 보겠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러한 생각은 성경 본문과는 전연 관계없는 잘못된 생각이다.
롬 7:14~25은 13절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선한 율법이 사람을 죽였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단연코 부정하고 있다. 사람을 죽인 것은 죄라고 하였다. 선한 율법은 숨은 죄를 드러내고, 계명은 드러난 죄가 더욱 더 심히 죄되게 하는 것이 그 본래의 사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13절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7:14~25은 어떤가?
이것은 13절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변의 연속이다. 13절에서 일부 답변을 하여서 죄가 사람을 죽이되 연장으로서 율법과 계명을 사용하여서 죽였다고만 말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간단하게 원칙적으로만 말하고서는 만족하지를 못하였다. 그는 계명이 죄가 심히 죄되게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의 체험을 독자들과 함께 극적으로 회상하기를 원하며 현재동사 어법으로 말한 것이 바로 7:14~25인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죄 아래 팔려 있는 죄의 종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다스림 밑에 속하여 철저히 죄만 짓고 있는 모습을 누차 강조 되풀이 하고 있다. 아무리 자기를 다스리고 있는 주인인 죄를 벗어나보려 하나 전연 불가능한 것을 말하고 있다. 아무리 계명을 지켜보려 하나 결과적으로는 죄 아래로 사로잡혀 가는 것을 볼 뿐이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이 이상의 다른 뜻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에서 중생한 영혼은 범죄치 아니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끄집어 내고 있는 것이다.
롬 7:14~25은 사람이 거듭나면 그 영혼이 범죄를 하느니 하지 아니하느니 하는 문제는 전연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단지 주인인 죄와, 종인 바울이 서로 싸우는 모습일 뿐이다.
어느 종이 주인에게 자원하여 순종하겠는가!
바울은 원치 아니하면서도 죄에게 굴복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계명을 통하여 죄가 죄되는 과정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그 계명을 지키려 할 때에 더욱 더 그 계명 때문에 죄인으로 드러났을 뿐이었다.
바울은 여기에서 죄 아래 팔려가서 죄의 속박 밑에 종살이 하고 있는 처참한 인간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선한 율법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고, 사람이 지은 그 죄가 그 사람으로 죽였다는 것을 바울 자신의 과거 체험을 극적 표현법인 현재동사 어법으로 말하고 있다. 이 롬 7:14~25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말하고 있으니 그것을 참고할 것이다(육에 속한 사람).
Ⅲ. 성경의 증거
4. 찬송가의 후렴 (롬 7:14~25 해석의 서론)
찬송가에만 후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도 후렴같은 것이 붙어다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롬 7:14~25은 사도 바울의 체험담인데 적지 않은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찬송가의 후렴 이상으로 생활에 붙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즉 실족하여 범죄할 때마다 이 본문으로 돌아가서 위안을 받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같은 위대한 사람도 별 수 없이 끝내 죄를 끊지 못하고 그 속에서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나 같은 범인(凡人)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는 이 본문은 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을 다시의 체험담으로 여기고 이것을 찬송가의 후렴같이 범죄할 때마다 생활에 응용하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이 본문을 놓고 과연 그럴까? 하여 말할 수 없는 갈등과 고통 속에서 해매던 시절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니까 6.25가 터지던 해이다. 박 윤선 목사는 자기의 주석으로서 요한계시록을 첫주석으로 1949년에 출판하였는데 나는 그 주석에 있는 설교를 처음부터 모조리 타이프 용지에다 복사를 하였다. 어느 때에 군인으로 갈지 모르니 설교도 듣지 못하고 주일도 없는 격전지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한 준비였었다.
이렇게 열심을 내고 있을 때인지라 나에게 걸것은 바로 롬 7:14~25에 있는 바울 사도의 체험담이었다. 계시록을 보고 초대교회와 중세사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신앙에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었다. 구약에 있는 성도들의 승리담, 그리고 예수님의 교훈(마 10:34~39)은 절대적인 권위로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나는 촌음도 그 억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감옥에서 막 출감하신 여러 교역자들의 감화는 여기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모든 교훈과, 바울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죄악에 빠져 있었다는 체험담 사이에 끼어서 말할 수 없는 갈등 속에서 방황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필자는 하는 수 없이 바울서신 전체를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교훈과 비교하여 보았다. 사도 요한의 서신과 구약과도 비교하여 보았다. 이 연구는 촬스 하지의 조직신학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을 탐독하기에 이르렀고, 신학교 입학 전에 헬라어를 공부하게 되었으며, 많은 주석들을 열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10년이 넘은 1961년 6월에 이르러 나는 롬 7:14~25 해석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것은 이 체험담은 결단코 중생 후의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어느 면으로 보아도 중생 후의 것이 될 수 없음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내가 꼭 10년 동안은 스승으로 모시던 백 영희 목사도, 롬 7:14을 중생 후의 것으로 보고, 이것을 놓고 다른 성경과 조화를 찾다가 결국 오늘같이 저렇게 장로회 본통교회에서 멀리 떠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성화교리 작성에 있어서 암초였으며, 필자의 성화생활에 장애물이던 이 난해절을 신간을 걸려서 생각하여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5. 육에 속한 사람 (롬 7:13~25)
바울의 셋째 질문 (7:7~12)에 답하면서 이러한 말을 한 일이 있다. 즉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7:10). 이렇게 말하고 보니 마치 율법이나 계명이 사람을 죽이는 것 같이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선한 율법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고 죄가 사람을 죽인 것을 강조하여 말하게 된 것이다.
13절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나를 죽인 것은 죄입니다.
죄가 그 선한 것을 방편으로 하여 내게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죄로서의 본성을 드러낸 것이며 계명 때문에 죄는 더욱 악한 것이 되 었습니다.”(새 번역 성경).
13절을 한글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보니 본문의 뜻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다. 선한 율법이 바울을 죽인 것이 아니고 죄가 바울을 죽였다고 한다. 다만 죄가 바울을 죽임에 있어서 율법과 계명을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여기 문답은 바울 자신을 제 일인으로 하고 있으며 25절까지 이대로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4절 본문을 유심히 보면 두 문장에 있어 주어가 하나는 복수이고 하나는 단수인 것이다. 여기에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의문(법조문)으로서 구원을 받고, 이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상태에 있었으므로 율법은 신령한 것이라는 정도의 지식은 다 갖고 있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가 바로 이런 뜻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실제 체험에 있어서는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에게 팔려가서 죄의 종살이를 하고 있었으며, 죄의 멍에와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못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쓴 체험을 말하고자 할 때에는 복수를 쓰지 않고, 자신 개인을 들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
“육신에 속하여”와 “죄 아래 팔렸도다”는 이 체험이 중생 전의 것임을 확증하여 주는 말이다.
그러면 먼저 “육신”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바울은 육신을 성령에 대조하여 쓰고 있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거듭 나기 전 사람을 육신에 속하여 사는 자로 말하고 중생하여 사는 자를 성령에 속하여 사는 자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이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인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로마서에서만도 수차 하고 있다.
바울은 롬 8:5~9에서 육에 속한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과 대조하여 더욱 명백하게 구분을 지어 말하고 있다.
(1) 육신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고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8:9).
(2)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전연 할 수도 없는 자라고 한다(8:7).
(3)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자라고 한다(8:8).
(4) 육신에 속한 자는 사망에 속한 자라고 한다(8:6).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사망에 속한 자를 어떻게 중생한 바울로 볼 수가 있겠는가?
바울은 또 중생하지 못하여 성령은 없고 오직 육에 거하는 자를 놓고 말하기를, “자기의 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라 하였고(빌 3:19), 또 말하기를 “이와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배만 섬기는 자라”고 했다(롬 16:18).
구약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을 보게 된다. 노아 홍수 배에 사람들이 멸망받은 이유를 말할 때에 “육신에 속하였음이니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창 6:3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여기에서도 하나님을 떠났을 때의 사람을 놓고 육에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육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아 때와 같으리니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는데.”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다가 노아 홍수 때의 사람들이 망했다는 말은 중생하지 못한 육체에 거하는 자의 생활상 전부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육에 거한다.” “육에 속하여 있다”는 바울의 표현은 극히 그 뜻이 제한되어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로마서 38장에서는 틀림 없이 그러한 것이다.
마음으로 생각할 것은 죄 아래 팔려 있다는 표현이다.
죄 아래 팔린 육신에 속하여 있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일이다. 만일 성령에 속하거나 성령에 거하면 죄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다(8:1, 2)
바울은 기독신자를 놓고 말할 때에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의만을 행하는 의의 종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롬6:22).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그러므로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있다는 체험담은 어느 면으로 보아도 중생하기 전의 바울을 놓고 하는 말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놓고 바울이 중생한 후에 더욱이나 이 로마서를 기록하는 그의 성역 말기에 있어서의 체험담이라고 보는 이들이, 이렇게 보는 이유로서 제시하는 것을 검토하여 보면 전연 무근한 것이다.
촬스 하지는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① 7~13절에서는 과거동사를 사용했으나 여기에서는 현재동사로 바뀌어진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장의 흐름이나, 성격, 혹은 내용을 전연 도외시하고서 하는 말이다. 여기에서야말로 과거에 체험한 것을 현재에서 바로 앞에 보듯이 생생하게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반드시 현재동사를 써야만 하는 자리인 것이다.
② 이 내용의 죄성같은 고민은 불신자에게는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한편 맞으면서도 틀린 말이다. 물론 불신자는 이러한 죄성의 고민이 없다. 그러나 이 체험은 불신자의 체험이 아니고 바리새인이었으며, 예수님 부활하신 때까지도 의문으로 구원을 얻어보려던 바울 자신의 체험인 것이다. 율법을 지켜 그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던 바리새인이면 누구나 다 일반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일이다. 아니 이것은 유대인 사회에 아주 보편화된 체험이었던 것이다.
③ 25절은 그리스도의 현재의 심장을 잘 말하고 있는 점도 든다. 이 말도 맞으면서 틀린 말이다. 물론 기독신자에게 25절과 같이 비슷한 체험과 고백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롬 7:14~25에서 말하고 있는 마음의 법은 육신에 사는 자의 고백이고 성령에 사는 자의 고백이 아님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이 체험담을, 바울이 중생 후에 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던 성역 말기의 것으로 보는 학자는 어거스틴, 제롬, 루터, 칼빈, 멜랑톤, 베자, 니그렌, 크로솨이데, 델리취, 하지, 빨트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중생 전에 바리새인으로서 법조문을 지켜서 자신의 의로 구원받으려던 시절의 체험담으로 보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오리겐, 크리소스톰, 그로티우스, 마이어, 데 웨테, 올솨우센, 가데트, 벤겔, 스튜아트, S.H. 데니.
이제 우리는 둘 중에서 어느 편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15~25절, 여기에서는 14절에서 이미 말한 사실이 한 사람의 체험담을 통하여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 분명한 사실만을 지적하여 보자.
(1) 원하는 선은 행해보지 못하고 싫어하는 죄만을 행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15절). 이것은 두 말할 것 없이 바울이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있는 까닭인 것이다.
(2) 미워하는 것만을 행하는 그것은 바울이 아니고 죄라고 한다(17절). 이것은 당연한 말이다. 죄 아래 팔려가서 해방받기 전이므로 주인은 바울이 아니고 죄이니, 그 책임을 주인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3)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오직 행하는 것은 악 뿐이라고 한다(17~19절). 이 말도 당연하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가서 죄에게 종살이 하는 바울인지라, 오직 주인에게 포박 당한 채로 죄만을 짓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종의 신세이다.
(4) 바울 자신에게는 선은 원하는 상태에서 그치고 자기는 죄 가운데 상주한다고 한다. 법조문을 지켜 자신의 의로 구원 얻으려던 바리새인이면 누구나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즉 선을 행하여 보려고 노력만을 했던 것이다(21절).
(5) 22, 23절, 아직 중생하지 못하여 죽어 있던 자의 마음이 몸의 지체에서 발작하는 욕정에 기울어져 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이미 7:5에서 한 말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계명과 몸의 욕정 두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욕정 편을 좇아가기 마련이다. 항상 이러한 것이다. 이것을 말하여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체험은 기독자라도 근신하지 못하여 실족하므로 범죄에 빠질 때 겪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 22, 23절이 독립된 구절로서가 아니고 6~8장 안에서 전후 문맥에 제약을 받고 있어 극히 제한된 의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6)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죄가 율법과 계명을 사용하여 바울을 완전히 하나님의 정죄에 가두어, 지옥 문턱까지 끌고 갔을 때에 비로소 구주를 찾고 있는 부르짖음인 것이다. 그 이상 다른 아무것일 수도 없다. 이것은 13절에서 제시된 문제에 대한 설명의 결론이다.
(7) 비로소 죄로 완전히 죽은 자가 구주의 품에 안기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8) 끝으로 체험담에 결론을 짓는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
박윤선 주석
로마서 7장 16절 - 17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악을 미워하는(원치 않는) 속 사람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 속 사람은 율법의 선함을 밝히 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다. 시 67:10, 36:4, 119:104 참조.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말은, 중생한 자아(곧, 나)를 그 범죄 채김에서 벗겨 주는 것이 아니다. 나로 하여금 나의 원치 않는 것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내 속에 거하는 죄”지만, 그 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된 책임이 “나”에게 있다. 그 이유는,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역시 나의 죄성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자의 영혼도 더러운 방면이 아직 있기 때문에 바울도 말하기를,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고 하였다(고후 7:1).
(1) 칼빈주의 신앙 고백서도 거듭난 자의 영혼이 범죄한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도 게요서 제13장 2조의 “성화론”에 말하기를, “신자의 성화가 온 인격에 관계되어 있으나, 현세에서는 인격의 모든 부분(영혼도)에 부패가 남아 있으며, 따라서 계속적으로 부조화의 전쟁, 곧 영과 육(몸이 아니고 부패한 성질)의 충동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곧, 그 인격의 각 부분도 부분적으로만 성화된다는 뜻이다.
대요리문답의 제78문에 대한 해답도 이와 유사하니, 곧, “신자의 성화가 불완전한 이유는, 그 사람(신자)의 각 부분(영혼도)에 있는 죄악의 잔재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종 시험에 빠지며, 많은 죄에 떨어지며, 영적 봉사에 지장을 받으며, 저희의 가장 선한 일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하고 더럽다”고 하였다.
(2) 칼빈주의의 대표적 신학자들도 거듭난 영혼이 범죄한다고 한다. 벨코프는 그의 “조직 신학”(p. 468)에 말하기를, “중생은 사람의 온 성품(영혼도 포함됨)의 완전한 변화도 아니지만, 어떤 한 부분(영혼의 한 부분도 관설됨)의 완전한 변화도 아니다”(그것이 비록 원리적으로는 그 인격의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지만)라고 하였다. 워필드는, 그의 저서 “완전주의”란 책(p. 580)에, 중생된 부분을 샘물 근원으로 비유하여 말하기를, “성경은 이 물 근원이 단번에 완전해질 것(이 세상에서)을 약속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3) 중생한 자의 영혼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그릇된 주장의 논거는, 성경 다른 부분에도 없다. 다음 성구들에 근거하여 중생한 자의 영혼이 범죄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은 잘못이다. 곧, 요일 3:6의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란 말씀, 요일 3:9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란 말씀, 요일 5:18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고 한 말씀들이다. 위의 세 문구에 있어서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함은, 모두 현재 동사로서 상습적인 범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범죄를 전연 아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E.M. Blaiklock, B.F. Westcott, A.B. Brooke, A. Ross, R. Candlish, D.Smith, M. Henry, Huther).
22절 - 23절
내 속 사람.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새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의 영혼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것은 없다(Calvin). 17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요한일서 3장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인류의 죄를 업이 하려고 역사상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신앙으로 그 실생활을 가지는 자이다. 그는 관념적 신자가 아니다. 그런 신자는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한다. 이것은 참된 신자가 혹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니고(2:1 하반), 상습적으로 죄 가운데 살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말의 헬라 원어가 현재동사인데, 헬라어 문법상 현재동사는 상습적 행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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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죄를 짓지 아니”한다 함은 상습적으로 범죄치 않는다는 것이고, 절대적으로 성결하여 하나님처럼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씨“는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는 중생된 생명(성령에게 붙들리운 범위 내의 영적 생명)을 의미하고, 거듭난 자의 영혼 자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요 3:6-7; 벧전 1:23).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여기 이른 바 “저도”란 말은 역시 일반 신자를 가리킨다. 이 말씀은 위의 상반절의 뜻을 좀 더 강화한 것이다.
특주
거듭난 자의 영혼이 범죄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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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석하기 어려운 성경 구절로 대답함.
요일 3:9에 말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고 한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함은 세 가지 해석을 가진다.
(1) 여기 이른 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란 말은 헬라 원문으로 보아서 현재동사이므로 상습적으로 범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상습적으로 범죄하지 않는 원인은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하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씨”란 것은 하나님 말씀의 생명있는 역사(눅 8:11; 벧전 1:23), 혹은 달리 말하면, 우리를 성화 시키시는 성령의 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씨”를 가리켜, 사람의 영혼 속에 주입 된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본질은 오직 하나님께만 독점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으로만 계시고 사람을 하나님 되게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피조물 급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바 있으나, 그것은 창조로 된 것이요 하나님의 체내의 것은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소질과 관계된 것이고, 사람이 신성으로 화했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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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께로서 난 자”(‘거듭난 영혼’이란 표현과 다름)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지켜주시는 분량만큼의 새 사람을 가리킨다(5:18). 그러므로 거듭난 자는 육신에서나 영혼에서나 성령이 지켜 주시는 분량만큼은 범죄하지 않는다.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여기 이른 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중생된 자를 가리킨다. 3:9, 5:1, 4 참조. 이 문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전혀 범죄하는 일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상습적으로 기탄 없이 범죄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 뿐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나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저를 지키시매.” 그리스도께서 그 신자들을 지키심에 대하여는 성경의 다른 구절들도 말한다(눅 22:31-32; 요 6:39, 10:28, 17:11-12; 롬 8:37).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악한 자”는 마귀를 가리킨다. “저를 만지지도 못”함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지켜 주시는 한도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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