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960.4.26. 화야
본문: 고후13: 5.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과거의 자기, 現在의 自己, 未來의 自己를 바로 들어내놓고 과거의 행위가 말씀에 합치하는 것은 무엇이며 대치되는 것을 발견하고, 못 깨달아서 범죄한 것 말고도 연약해서 범죄, 고의적 범죄를 찾으라. 現在, 未來도 自己를 냉정히 비판하여 대조하면 교훈, 책망, 권면,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말씀과 상관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비추지 않으면 양심을 버린자이다. 양심을 쓴 자라면 합치인지, 대치인지의 비판의 결과가 나타난다. 나타나면 정신차려야지! 그기에서 靈魂이 움직인다. 그렇잖으면 그 靈이 第一불쌍하다.
뎀3:16 본문 말씀은
①교훈의 말씀이니,
교훈을 받을 때는 自己行爲나 敎訓과 대조해서 어떻게 할 것을 發見하고 또한 교훈을 받으면 감흥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②책망의 말씀이니
自己에게 거리끼는 것은 책망인 것이다. 聖經에서 약한말로 했더라도 자기에게 거리끼는 것은 큰 책망이고 성경에 큰 책망이라도 自己만 그기에 상관없는 生을 했으면 책망이 아니다.
③바르게 함이니
비뚤어진 것을 가르쳐 옳은 길로 인도한다.
④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의를 행하도록 할 일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을 때 매우 복잡하다. 왜? 고칠 것, 悔改, 계획, 간구 할 것 등을 찾아야되므로. 또 말씀을 받았으면 깨달아야 한다. 깨달으면 영의 양식이 되지만 못 깨달으면 靈의 양식이 안 된다. 또 깨달은 후는 實行이 있어야 한다. 실행은 먼저 마음으로 실행, 다음에 몸으로 실행이다. 마음은 받는 즉시 행할 수 있으나 몸은 맘대로 못 한다.
몸은 하나님이 허락하는 機會에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면 즉시 마음은 作定하고 行하나 몸은 기회를 만날 때만 한다. 곧 사랑할 수 없을 때에 사랑하고, 사람을 만날 때에 사랑할 수 있다. 이처럼 몸의 實行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에만 하므로 마음으로 행하고 肉으로 行키를 원치만 一平生 못 만나 보는 것도 있다. 몸의 행함이 없으면 理性은 구원 얻으나 몸은 못 얻는다. 그러므로 주신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靈은 理性과 肉이 함께 구원받아야 充分히 자란다. 말씀을 들어 깨닫는 것도 보배이나, 實行이 없으면 律法이다. 깨달은 대로 行할려고 작정하는 것이 理性의 實行이고 理性이 行했으면 다시 肉에게 實行시킬 義務가 있다. 그래야 理性의 責任完了이다.
또 몸이 行하면 행한 일이 의가 되고 G의 양식인 은혜로 靈은 자라게 된다. 그런고로 말씀을 받을 때 ①깨닫고 ②여기서 行하라. 말로만 하고 부정을 품고 있으면 理性이 行한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은 肉을 지배하지 못한다. 마음으로 확정하고 行하기로 作定하면 넘어져도 또 일어난다. 마음으로 못 행하는 자는 知識뿐이므로 징계를 받고 나서는 행하게 된다. 이런 기회 없으면 헛일이다. 깨닫는 정도는 各者에 따라 다르다. 깨닫는 것은 靈의 양식이므로 靈이 장성한 분량에 따라 다르다. 자란 정도에 알맞게 깨달아야 양식이 된다. 목사와 평신도와 깨닫는 양도 다르다. 말씀은 꼭 같은 말씀이나 各者가 깨닫는 量도 다르고 方面도 다르다. 한 설교를 듣고도 각각 여러 가지의 悔改를 한다. 깨닫는 方法. 自己의 명철한 총명도 아니고 기존지식도 아니다. 이것들은 교만뿐이다.
깨닫는 것은 영의 양식인데 먹는 것은 行하는 것이다. 깨달은 것을 행치 않으면 새가 주어 먹는다. 깨달은 것을 결심하고 각오하고 뜻을 세워 나가면 넘어져도 표가 보임으로 다시 세울 수 있다. 천 번 꺾여져도 또 일어나야 한다. 마음으로 원치 않는 소행이 집에 가서 어찌 행하겠느냐? 이 마음은 나쁜 마음이다. 信者가 惡子될려면 말 할 수 없다. 그러나 잘 믿는 자는 정금 같다. 어떻게 남에게 누를 끼치고 살까? 어떻게 남의 덕을 볼까? 하나님께만 구하라.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며 自己것 다하고 남을 도와야 한다. 自己는 조금도 부족이 없어야 한다. 自己의 罪로 말미암아 천대를 받는 것은 地識行動이다. 죄가 없는 대도 욕하고, 천대하고 또 모르고 핍박당하거든 그들을 사랑하고 너그러이 용서하고 기도하라. 도와 주라.
또 信者는 남의 구제를 바라지 말라. 이것으로 말미암아 몰살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혜택을 받으라. 國家에서는 내 나라이므로 적당하게만 혜택받아라. 또 그것도 성경에 위반이면 안 받는다. 사람에게 혜택 받는 자는 不信者이다. 땅위에 살며 참고 견디고 용서하며 손해 보고, 양보하며 정정당당하게 낮과 같이 광명하게 살라. 基督者는 겉은 무르나 속은 철주가 들어 있다. 피조물을 겁내는 자는 信仰없는 죄값이다. 약한 것같이 보이나 약한 것이 아니고 악을 선으로 갚으니까 약하게 보인다. 肉的싸움은 어린애 싸움, 육적싸움 다음은 論理싸움, 行動싸움이고 그 다음 人格 最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다.
이러므로 예수 믿기 어렵다. 같은 짐을 질 때에 억지로 하는 것과 自意로 하는 것이 어느 것이 피로하냐? 억지로 할 때다. 왜? 靈과 肉이 單合이 안되기 때문이다. 肉의 힘은 靈에서 온다. 몸은 이성과, 이성은 영혼과, 영혼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人間의 힘에는 ①物質의 힘 ②精神의 힘이 있다. 精神의 힘은 靈에서 온다. 몸의 정기는 靈에서 오기 때문에 物質많이 먹어도 所用없다. 靈의 힘은 하나님께서 온다. 또 산 靈을 가진 자와 죽은靈을 가진 자가 일을 할 때에 그 능률은 현저한 차이가 있다. 世上에는 苦生뿐이다. 왜? 주의 영광 안 가리고, 피조물의 종이 안 될려고, 사람노릇하고, 聖徒노릇할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靈이 서둘러서 始作한다. 그러면 理性이 기뻐한다. 기뻐하지 않으면 연결이 끊어져 고장이 났다. 靈의 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靈의 힘이 몸으로 할 수 있다. 손양원 목사님의 약한 몸의 힘도 영의 힘이다. 靈肉이 연결되면 相互間에 기쁘고 자라게 된다. 피곤치 않는다. 物質도 信者는 최저한도로 하고 누를 끼치지 않는 경계를 넘으면 죄이다. 사랑의 빚 외에 지지 말라. 굶어도 罪짓는 일을 하지 말라. 罪가 안 되는 한 熱心히 努力하면 굶어 죽지 않을텐데 努力하지 않으므로 죽는 것은 살인죄이다. 自己가 努力해서 죽는 날까지 먹으라.
죄짓는 경계선 넘지 않고는 自己身分에, 自己救援이루기에 적당하게 하고 나머지는 구제에 써라. 이것이 빛의 生活이다. 責任을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他人이 잘못 비판하여 평가, 압제, 지나친 要求를 할 때에 善으로 이기는 것이 信者이다.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손해 보는 것은 죄냐, 의냐? 죄다. 信者가 어리석은 것은 믿음 없는 까닭이다. 믿음만 시키면 지혜자다. 세상지혜는 어린애 지혜이다. 죄를 짓고 맞으면 自己께만 분개할 것뿐이다. 맞을 일없이 맞으면 다행이다. 다만 모르고 그렇게 하므로 그를 불쌍히 여겨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복음 전해라)
선으로 악을 이기고, 침략치 말고, 침략을 당해도 용서하는 것이 自由의 生活이다. 信者는 호리라도 멸시받는 일을 안하도록 努力해야 한다. 罪가 없으면 그를 불쌍히 여기고 죄가 있으면 自己를 멸해야 한다. 하나님은 원수의 하나님이다. 우리도 원수를 갚아야 한다. 누구께? 그 사람을 이용하는 죄와 원수이다. 義는 공의의 義, 복수의 義가 있어야 한다. 信者는 區別하는 뜻이다.
사람은 사랑하고 그 속의 부패성을 미워하라. 또 구제를 받지 말라, 구제는 나를 돕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이는 것이다. 계12:15 뱀은 마귀 뱀은 꾀이는 役事를 할 때 쓴다. 강물은 世上에서 좋아하는 모든 총칭, 즉 자기에게 궁핍한 것을 채워 주면서 꾀인다. 땅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良心의 道德이다. 道德이 나와서 自己의 分量에 맞추어 보니 너무 可分하여 안 받으려고 피하니 그 마귀가 물러갔다. 正當하게 비판하면 다 알 수 있다. 自己의 義務를 다하는 것이 信仰良心이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서 靈은 자란다.
特殊한 일을 通하여 特殊한 救援이 이루어진다. 特殊한 事件은 드물기 때문에 그 사건 만날 때 못이기면 天國서 헛일이다. 이런 특수시간을 만나는 자가 유익이다. 그러므로 自己것 자기가 해야한다. 物質, 手苦, 사랑, 위로, 구제를 받지 말라. 구걸 中 第一큰 구걸은 마음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얻으라. 고로 聖徒는 自己 의무를 다하고 월권하지 말라. 이 말씀을 들을 때 깨닫고 곧 일어나서 마음으로 뜻을 세워 作定해야 한다. 그래야 넘어지면 넘어진 줄 안다. 마음이 굳게 뜻을 세우면 넘어지는 표가 나타나므로 다시 세우게 된다. 어떻게 해야 自己分量에 맞게 깨달을까? 바른 良心만 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