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1975.5.20.화전
일시: 1975.5.20.화전
본문: 마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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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요 G의 소원대로 우리가 되려는 것과 또 G의 소원을 이루려하는 것이 기도다. 그러니까 기도가 빨리 응답되는 것은 G의 소원을 빨리 바로 찾은 것이다. G의 소원을 빨리 바로 찾은 데에 기도의 응답이 속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G의 소원대로 빨리 개조 될 때에 기도는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자기의 사욕과 주장대로 아무리 많이 말하고 열심을 내여도 소용이 없다. 기도를 열심히 하라 쉬지 말고 계속하라 하는 말은 G과 사귐이 되는 교제가 되는 결합이 되는 이일을 위하여 힘써라, 이 일에 계속 노력하라는 말이다.
G의 뜻 반 내 뜻 반을 종합하는 것 아니다. 내 뜻을 완전히 묵살 시키는 것이 기도요. G의 뜻을 나에게 성립 시키는 것이 기도다. 일반 사람들은 이 기도에 질은 생각지 아니하고 외부적인 방편만 생각하여 G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함으로 여러 번 말하면 G이 들으실 줄로 이렇게 생각하는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다.
그러므로 말을 많이 함으로 그 간구에 본질이냐 어떻게 됐든지 열심히 욕심을 내여 강하게 많은 말만 하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 방편은 원죄로 사는 방편이다. 타락자의 생활 방편이다. 우리는 기도의 어조보다 자기의 태도보다 기도의 종목을 찾아야 한다. 네가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바다에 옮겨지리라 하여도 네 말대로 되리라. 또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라 하여도 네 명대로 순종하리라 하는 이 믿음에 근거는 G이시다.
믿음이란 요소는 G과 G의 뜻과 사람과 이 세 가지 요소로 된 것이 믿음이다. G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받아 가려 할 때에 전능하신 G이 그 일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전능이다. 능치 못할 것이 없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란 말은 ~ 강하게 굳세게 요동치 않는 그런 확신을 말하는 것 아니다. G의 뜻으로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G이 어떤 사람에게 지시하시기를 네가 이 지구를 당장에 없어지라고 명하라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이 없어지라고 명하면 말씀하신 G이 없어지게 하는 것이요. 막 바로 이것을 교회 겨자씨 믿음 산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산 믿음이란 말은 G에게 피동 되는 믿음이란 말이다.
피조물에 생명은 창조주에 따라 동함이 피조물에 생명이다. 피조물에 사망은 G을 따라 움직이지 아니하고 G의 움직임에 반대로 반대로 움직임이 피조물에 사망이다. 지금 안 죽고 있어도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G을 따라 움직이는 움직임은 작고 큰 것이 없다. 작은 것에도 전부가 책임지고 있다. 큰 것에도 전부가 책임지고 있다. 그러기에 작은 것도 큰 것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어려운 것 G은 쉽게 할 수 있다.
예수도 바로 배워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도 사이비한 미혹이 가득 들어와 있다. 우리가 이 유혹을 벗어나야 한국교회는 바로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만 하면 G이 들으신다는 것을 버려야 한다. 이 방편이 이방인의 방편이다.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G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느니라’
이 말씀은 네가 살아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네게는 네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느니라. ‘너’ ‘너’ 찾지 아니해도 G은 너를 인정하시느니라. 밤낮 ‘나’ ‘나’ 말하지 아니해도 G은 네가 살 것과 중요한 것을 네가 화 면하고 존귀해야 할 줄도 아시느니라. 네가 밤낮 ‘나’ ‘나’ 이렇게 안 해도 다 아시느니라 하는 말이다.
이런고로 너 위주로 너 중심으로 네 욕심으로 네 사욕으로 항상 살지 말라. 그것으로 주장 되어서 움직이지 말라. 그것들이 주장되어 움직인 것은 모두 썩어질 것을 구하느니라. 없어질 것을 구하느니라. 저주아래 있는 것을 구하느니라. 무엇?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구하느니라.
제가 큰마음 먹고 구해 보아봤자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구하느니라. 이것은 네가 그 면에 노력 안 해도 알고 계시며 다 예비해 놓고 계시느니라. 그런고로 너희는 이 사람이 되어서 이것을 구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가르친 것을 소원할 것을 노력할 것을 가르쳐 주었느니라 하시고 주신 것이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대로 자기 중심 대로 살지 말고 G 중심으로 G 위주로 제 사욕으로 안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 ‘나’ 하고 사는 것 보다 참 너를 살게 하고 복되게 하느니라.
이것이 너를 무시함이 아니라 너 보다 소중히 취급하고 네가 돈 지식 평안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네 느낌 보다 더 필요히 알고 적당히 조절해서 주고 계시느니라. 그런데 이방인과 같은 사람으로 이방인과 같은 이런 것들은 구하지 말라.
이해가 되느냐? 간절한 소원이 되어야 한다. 안되면 안 된다. 아니면 사이비한 기독자가 되기 쉽다. 세상이 아닌 것 같으나 세상으로 살기 쉽다. 이것이 외식이다.
그런고로 이방인과 같이 란 절을 말하고 중언부언이란 방편을 말한다. 그 밑에는 질(절?)을 말한다. 옛 사람이 되어 살지 말고 방편을 쓰지 말라는 말이다. 이런 전부는 자기를 부인함에서 이루어져 간다. 자기를 죽이는데서 이루어 간다. 이것이 십자가에 도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아니하는 자로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기부터 바꾸어야 한다. 그 전에도 종종 말했으나 다시 말한다. 천하에 사람이 지은 죄 보다 자기가 범한 해가 크고, 자타가 알고 있는 죄 보다 자기만 알고 있는 죄에 해가 더 크고, 자기가 알고 있는 죄에 해독 보다 자기에게는 자기가 모르는 죄에 해독이 크고, 자기가 모르고 있는 죄에 해독 보다 자기가 왕이 되어 있는 죄에 해독이 가장 큰 것이다. 제 중심 자기 위주 이것이 크다. 이것을 사욕이라고 한다.
민족 욕심. 인류 욕심도 다 사욕이다. 김일성이는 제 사욕을 전 국민에게 인식 시켜 제 사욕대로 되기를 힘쓰면서도 사욕이 아니라고 자칭 말한다. 공욕(公慾)이라고 말할 것이다. 공욕의 어머니는 사욕이다.
그러므로 사욕으로 살지 말고 성령에 소욕으로 살라는 말이다. 이대로 살면 욕심을 다 이룰 수 있고 이룬 것이 영원하고 그 성령에 소욕에 것은 금생 내생에 인정하는 깨끗하고 권위 있는 씩씩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자타를 망치고 금생 내생에 손해인 사욕대로 살 것이 무엇인가? 이대로 G을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외식에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G과의 관계를 옛사람 불신자들에 목적으로 G과 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 불신자의 방편으로 G과의 방편을 가지면 안 된다. 이것은 조만간에 다 멸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지 말라.
자기 위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사욕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욕과 대원수가 되어야 한다. 자기 중심 위주와는 나의 일대원수다.
내 원수가 누구냐? 나다. 자기다. 이 자기를 멸망케 하는 어디서 뛰어 들어와서 자기인지. 자기 아닌 자기인데 이것이 자기가 됐다. 자기 아닌 것이 타락으로. 선악과 먹은 자기가 됐다. 이것이 첫째로 들어와 자기 죽였다.
이것이 들어와 자기를 영원히 죽인 것을 예수님이 다시 와서 다시 한번 살릴 수 있는 것이 둘째 사망을 받느냐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날 기회는 한번만 있는데 한번만 있고 두 번 없다. 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누구냐? 여인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임신 양육 등은 다 죄값이다. 부담감 없이 노력하지 아니하면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잘 해 아이가 떠들지 못하게 하라. 의(義)전 어머니는 인류의 보배요. G의 보배요 교회에 보배다. 여인은 자기 자녀를 주 안에서 잘 양육했다면 그 이상의 자랑할 것이 없다. 아이 때문에 은혜 못 받고 성경 못 본다고 하는 여인은 악한 여인이다. 사람이 G이 창조해주신 이 자기 아닌 것이 들어와 자기가 됐다. 영육은 자기지만 자기를 주관하고 살아 온 것은 자기가 아니다. 이것은 악령과 죄악으로 더불어 된 것이다. 이것이 자기같이 자기의 마음과 고기 덩어리같이 존재하고 있다. 영혼은 고기덩어리 같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발견해서 죽여야 한다. 이것이 원죄다. 이것이 곧 제 중심 사욕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제 중심 사욕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원수다.
바울은 말한 것은 내가 공중을 손으로 치는 벌판이 같은 싸움을 아니하고 내가 나를 쳐서 복종시켜는 것과 자기 아닌 자기를 죽이는 것이 자기 싸움이라고 하는 것을 발표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G 중심 G 위주 성령의 사욕, 이 사람이 자기다. 이것이 자기 영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마음이 그 고기 덩어리가 변화함을 받는 것이다. 그 심신이 자기 주인 영혼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만일 자기 중심으로 중심으로 돈 직장 기타 활동함이던지 자기 중심위주로 함이 성경에 위반된 그 모든 것은 자기가 죽여야 할 원수인 것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든지 이것을 죽이고 멸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에 선한 싸움이다. 이놈은 어디서나 있다. 혼자에도 둘이 에도 있다. 이놈으로 더불어 싸우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이 싸움을 이기는 우리가 되여야 한다. 우리는 영생할 것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멸망으로 살수도 있다. 이것이 갈래길이다. 결단코 자기 현실을 영생으로 사는 현실 통과는 굶는 것이나 죽는 것이 아니요 자기 육에나 물질에나 손해가 없다.
왼쪽 멸망의 걸음은. 육에 생명으로 삶에 전부가 안볼 오해를 많이 본다. 백해무익이다. 영생에 길은 다 유익이다. 그런고로 세상에서도 여러 해를 받는다. 핍박를 겸해 받는다. 안 되는 것 같은 것으로 나 되는 것이다. 안 되는 것 같은 것으로 나 되는 것이다. 안 되는 것 같을 때니 두려워하는 간이 쪼릿쪼릿 한 것이 옛 사람이다. 박 넝쿨 같이 시들시들 한 것 같이 이 옛사람이 시들게 된다. 가슴이 두근두근 한 경우를 통해서 왜 되느냐? 이때 떠는 자가 누군가? 이 자는 옛 사람이다. G의 말씀대로 하는데. 가슴이 도근도근 한 것은 사람이다. 이것을 통해서 영이 자란다. 옛 사람이 시들어져야 새사람이 자란다. 성장한다. 이것이 연단에 걸음이요. 십자가에 길이다. 이 놈이 다 죽으면 저주와 사망과 모든 실패 화 덩어리가 다 죽이는 것이다. 화 받을 것이 없어져야 복이 오지. 죽을 것이 없어져야 살 것이 온다. 우리는 도통을 해야 한다. 환하게 보고 믿어야 한다. 기독교는 미신에 도가 아니다. 비합리란 인간에 말로 하는 말이다. G 편에서는 다 진리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시간에 각오를 해야 한다.
이제는 가정 직장 내 개인생활을 여생에 생활을 내 중심 내 위주 사욕으로 더불어 싸워야 하겠다고 해야 한다. 이 싸움을 싸우려고 할 때 인간의 정신이 나온다. 이 싸움을 싸울 때 제가 봐도 인생에 가치가 보인다. 제가 저를 보아도 인정과 가치와 기념할 만한 것이다. 이 싸움을 싸울 때 성경과 G과 성령의 감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 싸움에 승리에서 세상을 깔보게 된다. 시온산으로 올라갔다. 자기가 세상에서 살던 티끌 같은 세상에서 높은 세상에서 산 위에 있는 것을 자기가 알 것이다.
이 싸움 승리에서 이것이 참 인간의 승리로구나 할 것이요. 참 인간에 힘도 보이고 돈 권세 등은 참 인간의 힘이 아니요. 가지려고 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모조리 죽은 자라 하는 것이 제 눈에 보일 것이요 알 것이요. 그를 바로 평가할 것이요. 참 사람의 이 힘에 실력을 원할 것이요. 기를 것이다. 요1: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니 와보라고 하였다. 우리가 실행해 보아야 한다. 복잡할 것 없다. 어디 가면 제 중심이 없는 곳이 없다. 어디서든지 나오니 이 놈과 싸워 이겨야한다. 빈부귀천 존귀가 구원을 이루는 데는 꼭 같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같다. 지족 하다고 하였다. 모든 것이 필요하다. 닥쳐오는 대로 현실을 이용해서 구원을 이룰 것 뿐이다. 이것을 확정을 지워야 한다. 그럴 때에 내가 세상에서 나왔다. 세상에서 파묻힌 것이 아니라 나왔다. 그때에 세상에 빛이 됐다. 어리석고 빛인 것같이 보이나 그때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생명에 능력이다.
반드시 핍박이 있으며 훼방이 있으나 십자가에 도는 그것이 온다. 미움을 받아야 사랑을 받고 핍박을 받아야 환영을 받고 빼앗겨야 얻는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 이것이 무슨 말이냐?
G 위주 성령 중심으로 살려고 하니 사욕으로 사는 자가 똘똘 뭉쳐 대적해 오니 대적은 많고 강하고 자기는 적으나 양보치 아니하고 굳게 서서 나가니 성령의 소욕으로 나가니 미움 받아도 양보치 아니하면 나와 대적이 됐든 자가 뒤에는 주심이 하시는 것이 있으니 미워했던 자가 존경을 안 하고는 안 된다.그들이 나에게 온갖 해를 가해도 두려워아니하고 세상에서 획득한 것이 없어도 이 생활 자체가 가치 있는 권능이니 생활이니 내 생에 큰 것이 있게 하니 그것들에 세력에 붙어 있지 아니하고 그들이 시험 할 때로 다하면 죽이면 다 했느냐 하시고 이제는 내 솜씨를 보라 하니 하고 G이 하시니 일어섰다.
그러나 믿음을 시작 했다가 핍박이 오면 G을 배신하는 자는 성공하면 제힘으로 됐다고 할 자이기에 이 자는 버린다. 끝까지 핍박을 당해도 시험해도. G편으로 구주를 잡으면 이것이 자기에게 시험이 와도 이기면 G이 이루시는 것이다. 그런고로 그릇이 커야 한다. 이런 것을 이기지 못하면 피조물 위에 일 위에 것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듣기만 하면 자신을 속이지 말고 도를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한다. 여기에서 자기 아닌 자기를 발견할 수 있고 죽었다가 살아난 자기 아닌 것 같은 참 자기를 살 것이요. 갓난아이가 자라면 저를 알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았으나 자라가지 아니하니 10년 믿어도 저를 모른다. 당장 며칠 안 믿어도 아는 자가 있다. 당장 알 수 있는데 내가 둘이로구나. 한 놈은 내게 옳은 것을 죽이는구나 하는 것과 또한 나는 나의 힘은 G의 힘과 같은 힘이구나. 아, 이 사람은 안 죽겠다. 죽을 수 없고 원자탄이 태울 수 없구나 하여 비로소 자기와 자기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 믿은 일주일에 성경에 말씀이 내 마음과 꼭 같은데 하는 것이 있었다. 일주일만에 자기가 바꾸어졌고 G이 살린 자가 살아나니 이성비판이 바로 된 것이었다.
성경이 타율이 아니요 자율이 될 수 있다. G은 내 성미와 꼭 같은 분이구나 하게 된다. 또 옛날에 성미에 맞던 친구라도 이제 접촉해보니 안 맞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행하면 자란다. 그러나 악령은 실행할 기회를 딱 기다리고 있다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옛 사람으로 바꾸어지게 하는 것이다. 네가 교회에서 이름이 나야한다. 네가 먼저 주장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과 영감 도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또 자연계시인 만물에게 우리가 배워야 한다. 자기 아닌 자기와 참 자기를 이것을 성경이 가르쳐주는데 이것을 배워야한다. 참 자기와 자기 아닌 자기를 현실을 통해서 찾아서 옛사람을 멸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나타날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텐데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타인이 은혜를 끼치면 제가 하는 것만큼 기쁘지 아니하고 좋아하지 아니하는 때가 있다. 이때에 자기가 자기를 보고 아 - 이놈이 누구냐 이색진 놈이구나 하고 보면 분명히 이 사람은 성령에 사람은 아니다. 이상해서 표를 찍어 놓고 시험해 본다. 옛 사람 내가 목회하고 부흥사 노릇하고 다니는 것 아닌가하고 이놈을 잡으려고 하면 마귀는 살짝 자취를 감춘다.
이때에 자기가 다른 사건을 접촉하면 비판 평가가 바로 될 것이니 이때에 다시 다른 기회를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놈이 틀림없이 나온다. 이때에 숨지 못하게 하여 볼끈 걷어지고 단속하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자기를 미워하고 죽여야 한다. 네가 타인이 은혜 끼치면 왜 기뻐하지 아니하느냐. 무엇 때문에 시기하느냐 왜 싫어하고 대적하느냐 하고 따져보면 그놈이 고백할 것이다. 그런고로 자기를 미워하고 의심해보고 죽이는 자가 아니면 이 길을 못 간다. 자기 아닌 이놈이 옛 사람이로구나 할 것이요. 과거를 멸했구나 해서 잡아야 한다. 이러기에 이자를 뽑아야 한다.
그런고로
에베소 교회가 8가지를 잘 했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현실교회에서는 칭찬할 것인데 8가지가 있어도 그 교회가 죽어간다고 했다. 이 8가지 이런 것은 기독교의 문체요 광채이지 본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많은 말을 검어질 것이 아니고 한 말씀이라도 잡고 지키면 된다. 성경은 구슬 꾸미와 같은 것이다. 진리는 하나다. 한 진리 안에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다. 천국에 것들은 다 이렇다. 개명에는 감사할머니가 있었다. 아 - 나는 G위주 하나만 하겠다. 나의 소원은 G만 소원하고 나의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하면 계속적으로 G의 도움을 입고 계속 승리를 할 것이다. 점점 자랄 것이요. 다음은 자기 안에 G이 계심을 볼 것이다. 내 안에 G이 계심을 볼 것이라고 했다. 믿음을 떠나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할 것은 성경에 말했다. 믿음으로서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G을 떨어져 나온 독립 자기, G과 상관을 끊은 자기 G과 별거하는 자치자 자기 이것을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이 생활과 이 방편은 이 존재를 이 실력은 다 멸망할 것들이다. 아 - G이 창조하신 것인데 제가 자존자 같이 하면 되느냐 피조물이 자존자처럼 함은 무엇을 재촉하느냐? 거기에 대한 창조주는 거기 대한 G에 사랑은 G이 지으신 것을 빼앗을 수밖에 없다. G이 하신 것을 헐어 빼앗으니 이것이 죽음이다. 그러니 흙으로 물로 분산된다.
그러므로 만능이 될 영혼이 없는 것같이 동결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G의 사랑이니 그를 수밖에 없다. 내가 준 것을 제가 잘해 가진 것인 줄 알고 있으니 빼앗을 수 밖에 없다. 없어졌는데 G이 왜 없느냐 물으니 G이 가지고 갔으니 없다고 하니 왜 그러면 처음은 그래 안 했느냐 할 것이다. G의 것 다 가지고 가니 이것이 사망이다.
G께 의존자가 독립자처럼 인식하고 있으니 그 자에게 G이 할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하고 싶은 것 인간이 하는 것을 안 되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늙고 죽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다 제 하고 싶은 것 다 못하고 죽는다. 인간이 G께 의존자가 독존한 망령에 보응이다.
그런고로 G께서 G을 위주 해 살아란 말은 인간에 본지위로 돌아가 자기 지위에 서란 말이다. 상하좌우 안팎에 바른 연결을 가지란 말이다. 인간이 자존자로 독립자로 망령되게 사욕으로 주력하니 이 사욕은 모든 것에 적이다.
※ 이러니까 이 사욕에 대해서 G이 하신 것이 무엇인가? 이 사욕은 G께서 자멸 운동이 되도록 하셨다. 왜냐? G의 소욕이 사는 운동이니 인간에 소욕은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전체에게 집중 공격하니 제가 멸망이다. 그런고로 G이 노함이 없고 분을 내는 것 아니다. 저 멸망함을 모르고 나가니 불쌍하고 가련하지 대적할 것이 무엇인가?
그런고로 예수님이 우셨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G이 창조하신 본 위치로 돌아가도록 하는 운동으로 하는 당신을 가르쳐 화목발물이라고 했다.
화목제물이란, G과 인간과 모든 피조물과 인인 간에 서로 죽이는 이 관계를 깨트리고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이 운동을 가르쳐 화평이라 화목이라고 말했다.
화평케 하는 자는 G의 자녀란 말은 G께로서 난자의 지상생활은 전부가 화평생활이란 말이다. G께로서 난 者자는 G과 인간 자신. 피조물에 대해 바른 관계를 맺어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필요 있는 존재로 바른 관계를 맺는 이 운동이 있는 것이 이 사람에 생활이다. 지금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요. 앞으로도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우리 생활이니 영생이다.
내가 내 피란처는 아무 것도 해할 수 없는 여호와의 은밀한 곳이 나의 피란처라. 이곳은 나의 언행심사가 G과 모든 존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그 위치에 내가 서는 것이다. 그때에 G 과 모든 피조물은 다 나의 것이다.
천지에 모든 것은 다 너희 것이라고 했다. 내가 정(正)에 것만 하나 되면 내가 끼일 자리에 끼여지면 이 부속품은 전 시계에게 없어서는 안 될 혜택을 입히고 받으나, 떠나면 해준다. 이것은 무생물에 기계이다. 하물며 우리냐.
우리는 G과 단일 심신 한 영광으로 사는 많은 지체와 세포가 합해서 한 몸같이 이것과 비슷한 것이 우리이다.
이런 것으로 유가 되지 아니하는 우리의 연결체다 관계처다. 이 자리에 되고 들어가야 하겠다. 물샐 틈도 없는 상상도 못할 곳이다. 이것이 오묘한 곳이다. 제 빨리 뛰어 들어가라. 한번 죽는 것이 다시 한번 살수 있는 기회다. 안 살리면 죽는다.
그런고로 자기 중심 위주 사욕의 사람으로 살지 말고 이런 것을 욕구 하는 사람으로 살지 말고 네가 욕구 할 것을 네게 말씀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주기도문 주해)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렇게 대영(對靈)관계를 하라. 이렇게 G을 대하는 관계를 하라. G과 사귀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하나님만 유일하신 자존자로 홀로 한 분만 계신 원인자로 우리들도 인식하고 G을 향하여 이런 행동을 가지도록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 하나 되는 유일자 지성자 이런 자이심을 우리들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사 이렇게 대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함이다. 이것이 주기도문에 일절이다.
그러면 G만 바로 알고 바로 대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생활에 기초와 으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G께 구할 때 우리가 안 되면 안 된다. ‘우리가’ 되어야 한다. ‘나’ 혼자 되게 해 주옵소서 하면 안 된다. 내 개체를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소속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에 지체인 이 교회에 전체가 자기요 그 전체를 자기인 그 전체에 영광이 자기의 영광으로 전체의 질고가 세포가 형통이 형이 자기로 되어 G에게 이 은혜를 상대해야 한다. 이렇게 상대해야 이 은혜가 이루어지지 이것이 아니면 G에게 대한 우리에 것을 자기인 원죄로 돌아간다. 이것은 멸하려는 원죄가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되여야 원죄가 멸해진다.
신28: 네가 말씀을 지키면 내가 복 주겠다 하였으니 우리가 하면 먼 것같이 보이니 개적이면 좋겠다. 전체가 다 잘 됐으면 좋겠으나 더욱 내가 잘 되어야 한다고 하면 옛 사람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가 되지 아니하면 원죄에 있어서 G에게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목적이 방편 이 동기가 우리를 위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한 분자로 살아야 할 우리0다. 이것이 될 때에 우리가 살아나는 것이다.
왜 이 말씀을 가르치는가? 이 신앙생활에 개인주의가 들어와 교파 교파마다 원죄가 주장이 되여 죄적 교파와 교회와 교인이 되어있기에 이 말씀을 증거 하는 것이다. 자신이 우리인 것을 깨닫지 못함은 벌써 옛사람으로 돌아갔다. 우리인 자기 전체인 자아 대아인 자아 그리스도의 지체인 자아 이것을 떠났으면 그리스도로 살아난 새사람 자기는 아니다. 벌써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타락된 멸망된 자아인 것이다.
동기도 목적도 주체도 그 자이요 방편만 진리를 쓰기에 이것은 새 술을 헌 부대에 넣는 것이다. G의 말씀은 새술인데 개인주의 義사욕주의 헌 부대를 찢어버리는 것이 G의 진리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전체에 그리스도에 지체인 자기 성전에 돌 한 덩어리가 된 자기 이 자기가 되여 있기에 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서 이 동기 이 방편을 쓸 때 새 부대가 된다. 새 부대는 그리스도의 지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완전히 사욕을 버려야 한다. 자기의 교파만 거꾸러가도 옳게 간다고 허물을 숨기고. 남에 교파는 없는 허물도 들추어 내는 행위는 교회도 개인도 안 된다.
‘나라 임 하옵시며’
받으면 G이 作定작정된 상급이 손에 잡히도록 이 은혜역사는 우리가 되여야 하고 우리의 도 목적으로 되여야 한다. 이러면 기독교에 중요한 진수가 다 들어 있다. 위에 것도 다 들어있다. 형이상학에 것이 다 들어 있다.
※ 신28장에는 네가 하면 또는 네가 안 하면 안 된다 했고 마 6:7- 여기는 정반대다. 이 양 모순을 어찌 할까?
신28: 은 우리가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이요 마6: 은 우리가 할 일이다. 자기를 바꾸지 아니하니 이것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 다 소용이없다. 사람들이 설교를 할 때 교리 설교를 한라혀고 한다. 왜? 하면 강사 인기가 떨어지고 사람들이 싫어하니 안한다. 교리는 신학교에서나 할 것인 줄 안다. 그러나 실은 교리 설교를 안하면 할 것이 없다. 지금 기독교에 터전 설교를 하니 듣기가 어렵고 딱딱할 것이다. 5계명에서 - 10계명까는 이종교에서도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우리의 주관들이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지금 말하는 것은 길이 다 도적질 회개보다 제 생명 내어 놓는 것도다 어려운 것이다. 자기는 전체 중에 한 분자로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그리스도의 한 지체인 것을 인식하고 느끼는 것과 그리스도의 교회에 전 희로애락이 자기의 것이 되어 느껴짐과 그리스도의 전체에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느껴지는 이것이 어렵다. G이 이일을 하시려고 모았다. 인정하고 소원하고 감각하여서 자기의 본능발동이 일어날 때까지 이 단계에 이르면 G이 단독 일하신다. G의 초자연에 실상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사욕을 실재적으로 꺾는 것을 주님이 가르치고 있다. 너는 우리가 되어서 살아라. 우리가 되여 생각하고 소원하고 경험해야 동기도 가지고 목적도 우리의 목적으로 가져야 가치가 있다. 이것이 아닌 것을 익혀야 가치가 없다.
요즈음은 일시적 제 출세를 위해 교회를 이용해먹는 자들이 있다. 제까짓 것이 제 사욕을 위해 하나에 사술 운동을 하면서 우리기독교 연합회라고 함이 가증스러운 것이니 우리 기독교에 암과 같은 병이다. 우리는 이것을 수술해야 한다. 기독교를 자기의 사다리를 삼아 올라가는 자는 반드시 떨어질 것이요. 기독교를 팔아 사욕에 배불린 자는 반듯이 굶주림이 올 것이다. 기독교를 제 피란처로 이용하려는 자는 반듯이 함정에 빠질 것이다. 10년만 두고 보라. 20년 두고 보면 확실할 것이다.
그런고로 교회는 자기만 아는 것이 대적이다. 저 좋게만 저만 위하는 것이 대적이 다. G이 이런 것은 자멸하는 것을 말했다. G의 심판은 지극히 공평하다. 자기나 남이 이런 것을 한다고 분개함에까지는 나아갈 필요는 없다. 마음에 안타까울 것뿐이요 분함은 있다. 악령과 죄악에게 싸워 이겨야 한다.
사람에게 화살을 맞으나 마귀와 죄와 사망을 향하여서만 가지게 되는 것이다. 덩어리가 크면 큰 대로 ‘나’ ‘나’하고 적으면 적은 대로 ‘나’ ‘나’ 한다. 이것을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자멸이다. 자멸이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G께 대해서 올바른 관계도 G께 온전한 온전한 피동도 G이 우리 각자에게 작정한바 이 구원도 우리가 되여야 한다고 했다. 이를 때에 G이 도움이 온다고 했다.
11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은 영 육에 양식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즉, 오늘 하루도 깨끗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올바른 깨달음을 달라는 말이다. 이것도 우리가 되어야 상관이 있지 우리가 되지 않으면 상관이 없다.
출32:7, G이 하실 일과 모세가 할 일이 달랐다. G이 모세에게 이 백성이 범죄 했으나 너만은 지켰으니 백성은 멸하고 너와 네 자손으로 대신 세우겠다고 하였다. 모세는 이 말을 듣고 감사하다고만 하고 우리는 나타났다. 모세는 전 이스라엘에 멸망이 자기인줄 알고 간구 하니 G의 뜻에 맞아 G이 들으셨다.
:7- 네 백성이 부패했다 했는데 출3:10에 G이 내 백성이라고 말했다. 왜 이 두 곳에 말씀이 다르냐? 출3:10은 G이 하실 일이기 때문에 내 백성이라고 했다. 내가 내 백성을 책임지겠다고 하신 것이다. 출32:7은 G에 책임이 아닌 모세에 책임이라는 것을 말하셨다.
그런고로 G 앞에 생활할 때 전체를 책임질 때에 우리로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는 내 백성이지만은 언제는 네 백성이라고 했느냐? 내 백성이라고 한 것은 G이 부담했을 때 내 백성이라고 했다. 내 교파 우리 교회 내 교회 내 가정 나하면 짝 들어붙고 맞으나 이것이 부패성에 깊이 물든 중독성이다. 벌써 부패성으로 인박힌 인이 들어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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