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성막공부2 - 재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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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공부2,(재료편)
(1973년 12월 10일 설교 외 7설교에서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 출25: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 오라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예물은 상대방을 대접하는 성격인데 장삿속으로 갚는 것이나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받은 은혜에 대하여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는 사례의 성격으로 드리는 것인데 하나님께 드릴 때에는 이런 예물적 성격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법으로 드릴 것이 아니고 감사할 큰 일에 있어 이 감사를 갚을 수가 없어 기쁘고 즐거운 감사에 대한 사례, 사은에 대한 감사의 예물로 드려야 합니다. 받은 바 은혜를 연구함으로 감사가 나오고 감사하는 표로 드리고, 드린 당신의 것 가지고 자기 것 만들 것입니다. 성전은 나의 몸, 행동 전부가 하나님의 성전이니 이것 전부를 하나님에게 예물로 드린 후 하나님의 것 가지고 나의 이것, 저것을 만들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결심도 나의 것으로 만들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예물로 드린 후 나의 것으로 만들 것이요, 사은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릴 것이요, 감사해서 드리는 이것은 정서면이요, 율법면으로는 이미 구속을 인하여 당신의 것이요, 정서적으로 감사해서 드리는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롬12: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물은 감사해서 사은으로 드려야 합니다. 믿는 자는 법적인 구속으로 당신의 것인데 자원해서 드릴 때에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말씀의 법칙을 가르쳐 주어 하나님의 도에 거하게 하는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강제로 바치게 함으로 무례와 무성의가 되어 하나님께 바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원적으로, 능동적으로, 사은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것을 나타내실 때에는 인간의 미개함과 유치함을 인하여 서서히 나타내심을 성경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진화는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실상은 성막이요, 성막으로 비유한 실상은 성전이요, 성전으로 비유한 실상은 교회요, 교회로 비유한 실상은 하나님의 몸이요, 지체입니다. 교회로 비유한 실상은 하나님의 몸입니다.
교회의 최고 완성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상호 내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내주 하는 것을 알려면 교회를 성경에 기록하였으니 교회를 찾아 연구하면 알 수 있습니다 .
교회를 알려면 성경에 성전을 기록했으니 성전을 연구하면 알 수 있고, 성전을 연구하려면 성경에 성막을 기록해 두었으니 성막을 연구하면 성전을 알 수 있고, 또한 성막을 연구하려면 성경에 에덴동산을 기록해 두었으니 에덴동산에 대하여 연구하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이루어갈 최고 완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몸이 되고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몸 안에 마음이 있어 마음의 작용이 몸을 통하여 나타남과 같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하나님의 전지가, 하나님의 전능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우리 통하여 나타납니다. 이것을 완전한 성화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였으니 성전을 알려면 미개한 시대의 성막으로 비유하였으니 성막을 연구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2절에 하나님께서 이 성막을 짓기 위해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하실 때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막,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몸, 지체되는 요소는 어떤 요소라야 성화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지체가 되는가?
■출25:3-9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는 요소, 하나님이 동거동행 할 수 있는 요소, 또 하나님의 몸 하나님의 지체와 같이 쓰여질 수 있는 요소, 이것이 곧 성막의 재료인 것입니다.
●금(영원성)
금은 영원 불변성을 말합니다. 육체 이스라엘은 금을 바쳤으니 우리도 정금을 바쳐야 합니다. 이래도 저래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바쳐야 합니다. 약속도, 행동도 변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말에는 책임을 집니다. 변동되고 책임 없는 사람은 일을 할 때에 주의하지 않고, 신중을 기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변동할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변동 없는 일을 하려고 하면 심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연구와 신중한 계획과 행동이 나오게 되므로 먼저 지혜 있는 사람, 후회 없는 사람이 되어지니 일이 쉽게 풀리므로 모든 사람이 인정하게 됩니다.
사람은 외유내강해야 합니다. 구원의 뿌리가 뽑혀 피동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외부는 둥글고 부드러우나 내부의 구원의 줏대는 변치 아니해야 합니다. 아무리 웃어도, 아무리 슬퍼도 이것이 속에 있는 구원을 침범하지 못하고, 아무리 큰 유익이 오고, 큰 손해가 와도 변치 않는 이것이 인격자요. 바다 위에는 파도가 일어나도 속에는 잔잔한 것 같은 이런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금. 영원성, 금은 영원성의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세월이 갈수록, 늙을수록 없어지는 것, 변하는 것, 죽을 때에 못 가져가는 것, 심판 받을 것 이런 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재료가 되지 못합니다.
또 자체의 성품, 욕심, 사랑, 지혜, 지식, 우리의 행동 우리의 기쁨, 평안, 두려움, 그런 것이 일시 있다가 없어질 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재료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 행위 그런 자체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지체가 못됩니다. 다 영원성을 가져야 합니다.
영원성을 가진 속성이라야 참 속성이요,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지체가 되는 성화 된 속성입니다. 선이라 해도 영원성을 가진 선이 아니면 참 선이 아닙니다. 성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성전의 지체가 안됩니다.
영원성의 사람으로, 영원성의 속성으로, 하나님의 심판에도 정죄 받지 아니하고, 영원히 가는 인격, 영원히 가는 쾌락, 영원히 가는 평안이라야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지체가 될 요소입니다. 그런 것을 하되 특히 원하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단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자체의 모든 요소가, 우리의 행동의 요소가, 우리의 일들의 요소가, 그 모든 것이 다 영원성을 가진 것이라야 이 성전 재료 그리스도의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주 하여 동거 동행할 수 있습니다.
영원성 있는 것이라야 하나님이 동거 동행하고 그 자체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그를 통해 역사 할 수 있습니다.
●은(거룩성)
결백보다 더 깨끗한 것은 성결이요. 성결보다 더 깨끗한 것은 거룩이요.
거룩은 그것에 속한 모든 것은 빠지지 않고 그 전체를 비교하여 거기에 하나만 되는 참을 선택하여 취한 것이 거룩입니다.
예로서 어떤 사건에서 그 사건을 처리할 때에 대개는 그 사람이 그 사건에 구비한 모든 면을 생각지 못하고 그 사건의 일부만 생각하다보니 아직까지 그 면만 생각하니 모자랍니다. 모든 것을 다 생각하여 구별하고 구별하여 완전을 선택한 것이 거룩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사귀는데도 그 사람의 장점, 장점만 보고 사귀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사귀고 그 사람의 평범까지 겸해서 사귀는 사람도 그 사람의 모든면, 기능면, 도덕면, 인내, 충성, 지식, 예술, 정서면 모든 요소를 빠짐없이 낱낱히 살피고 구별하여 아- 이 사람의 가치는 어느 정도이니 어느 정도 사귀어야 하겠다 하는 자는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별해서 정확하게 판단하여 구별하는 것 같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조금도 잘못됨이 없이 관계를 가지는 것이 거룩면입니다. 거룩성을 가진 것이라야 하나님의 지체, 하나님과 동거 동행할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은은 성결, 깨끗을 상징합니다. 마음, 정성, 봉사를 깨끗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연보를 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드리고, 다른 생각이나 야심이 없이 드려야 합니다.
사교성으로 드리는 것은 뇌물이요, 깨끗한 것은 되지 못합니다. 직분 결백, 신용관계 결백, 교제사교의 결백, 인격의 결백, 물질의 결백, 남녀 정조의 결백 이것을 가져야 합니다. 결백은 자기의 힘이 됩니다.
은은 거룩성을 가져야 합니다. 깨끗은 구별에서 온 것입니다.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구별에서 온 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깨끗의 광채가 거룩입니다. 깨끗의 결과가 거룩입니다.
입니다.
●놋(연단성),
이 세상에서 시련 연단을 받아 어떤 사건 어떤 시대가 와도 요동치 않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성전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놋은 불에 넣어 달구고 하여 순전한 놋만 남는 것. 어떤 연단 파란 곡절이 와도 요동치 않는 자. 그런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많은 시련들을 겪어야 합니다. 그 사람도 시련들을 겪은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 사람이 뜨겁다 해도 어떤 시련에서 눈과 같이 녹듯이 하면 안됩니다. 어떤 것이 있더라도 그를 변질시킬 수 없는 사람이라면 시련 받은 사람입니다.
놋은 세상에서 연단 되어 인본적인 것 피조물적인 것, 혈육적인 것을 제거하고 영감의 것이 우리에게 나타나 충만해짐이 성전이 됩니다.
금, 은은 딴 것으로 표시했음으로 금도, 은도 연단을 하는데 딴 것으로 영원성, 불변성, 성결성 거룩성으로 표시했습니다. 놋은 연단으로 표시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충성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등용하시지 않습니다. 그 충성이 참 영원성이 있어야 하고 그 충성이 거룩성이 있어야 하고 그 충성이 온갖 시련을 받아 연단하고 연단한 그 충성이라야 합니다.
놋은 연단 받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하면 광채가 잘나고 닦으면 광채가 잘납니다.
모든 일에 연단으로 바쳐야 합니다. 무엇이라도 생각하고 생각하여 심각하게 할 것입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않고 또 일어서고 또 일어서고 하여 이루어진 이것을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가다가 오다가 이루어지는 이런 일을 하나님은 원치 아니하십니다.
쉽게 하는 것보다 어려움 가운데에서 하는 여기에 만족이 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단한 이런 것을 원하십니다. 계1:15절에는 "불로 연단한 주석 같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파란을 겪어 이제는 "나 같은 죄인이 없습니다" 하는 이런 상한 심령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참 괴수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청색실(생명성).
자연 육체의 생명은 짐승의 생명과 꼭 같습니다. 여기 생명성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중생 된 영이 진리와 영감으로 결합이 생명이요. 그 움직임이 영생입니다.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하나님과 진리와 자체가 하나된 것이므로 청색실은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와 행위와 결합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 즉 행위와 자체를 합한 자기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와 합한 움직임이라야 그것이 산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인간이 이것을 참 칭찬 존경할 만하다 해서, 인간 노벨상을 탔다 해도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 뜻과 결합되지 아니했으면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청색은 생명, 생명은 하나님과 진리와 그 사람이 하나가 되어진 것이 생명. 상합이 되어야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 재료 하나님이 동거동행 하실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역사 하실 수 있습니다.
지체 곧 내 손발이 없으면 이 종을 못 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소원을 그 사람을 통채 자유자제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지체입니다. 그런고로 생명성이 있어야 하나님의 지체 하나님의 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청색실, 생명성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진리와 자기와 하나가 되어야 생명이 있고 하나가 되어 이루어져야 영생이 있습니다. 자기란 자기와 행위가 합하여 자기입니다.
청색실은 비유이니까 자기 일생이라는 날, 날이라는 베틀에 길게 된 길에 실을 북에 넣어 옆으로 넣어 바디로 짜는 것이 씨입니다. 날과 씨로 짜면 베가 됩니다. 자기의 일생 사는 날이나 자기의 세월은 베 짤 때 날과 같고 생명과 같습니다.
자기의 일생이라는 날에 매일이라는 씨로 짭니다. 자기의 일생의 하루, 한 건, 한 행동으로 사는 것, 이것을 가지고 하늘나라에서 옷을 만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마포 옷입니다. 베를 짜다가 날이 끊어지면 베에 올이 졌다 합니다. 흠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을 옷을 지어 입으면 그 옷이 다 떨어질 때까지 갑니다. 영원한 수치의 옷이 안되도록 해야 합니다.
청색실이란 자기의 일생 생활이 청색실로 비유한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청색실로 비유한 생애가 아니면 심판 받습니다. 영생 못합니다. 성령님과 진리와 그 사람과 그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것이 산 행동입니다. 어떤 것이 산 행위인가 산 사랑인가 산 기쁨인가 구별해야 합니다. 산 행동이 있고 죽은 행동이 있고 영광도 산 영광, 죽은 영광, 기쁨도 산 기쁨 죽은 기쁨, 노(怒)도 산 노 죽은 노가 있습니다.
죽은 것은 마귀와 불법과 자기 행동과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 죽은 거입니다. 산 생애는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하나님의 뜻인 진리와 자기와 한 덩어리 되어 산 생애 행동한 그 행동이라야 하나님이 내주 하실 수 있고 지체같이 역사 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 기쁨을 가졌으면 그 기쁨의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기쁨인지 마귀가 거할 기쁨인지? 하나님이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이 받아드릴 수 있고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기쁨인지 이런 기쁨이라면 청색실입니다. 이 기쁨은 산 기쁨입니다.
산 기쁨은 하나님이 계시고 심판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기에게도 영광이 됩니다. 성령님의 감동과 진리와 자기와 자기의 행동이 하나가 되어 기뻐함은 청색실로 비유한 산 기쁨입니다.
예를 들면 상대방에게 봉사하고 관용 관대하고 참고 상대방을 사랑하므로 봉사하고 모든 소유 온갖 보화를 아끼지 아니하며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준다면 귀한 사랑인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안에 동거 동행하실 수 있는 사랑이야 그 사랑이 영원성을 가진 사랑이냐? 그것을 구별하고 또한 구별하고 구별하여 거룩한 성결의 사랑이냐? 또한 연단성의 사랑이냐? 청색실로 비유한 생명적인 사랑이냐? 그 사랑이라면 청색실로 비유한 참 사랑입니다. 노(怒)도 산노 죽은 노가 있습니다. 산 노는 영원성을 가진 것이라야 합니다. 안낼 성을 내면 안됩니다. 산 노는 영원성 성결성 연단성을 가진 영감과 진리성을 가진 것이라야 산 노입니다.
청색. 생명성을 말합니다.
팔팔 산 것, 생명적인 것, 삶에 속한 것, 모든 것이 겸하여 있는 것입니다.
행동도, 말도, 지혜도, 사랑도 산 것이라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진리와 성령이 역사 하는 데에 피동 되는 것이니 모든 것이 진리와 영감적이라야 합니다.
●자색실(영광성).
그 사람의 의에 영광스러운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자체가 온전하고 둘째 자체의 온전함을 힘입어서 자체 아닌 다른 것이 혜택을 은택을 입어 온전함을 받을 때에 비로써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체의 좋은 것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좋지 못한 것에게 은택을 입히는 그것이라야, 제 삼자에게 유익을 끼치는 온전이라야 이 성막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완전하다 해도 자기의 완전함이 제 삼자에게 유익이, 복이 되지 못한다면 영광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이 있어야 그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이라야 할 수 있습니다.
영광성은 자체가 좋을 뿐 아니라, 이웃 모든 피조물들에게 그들에게 기쁨과 효력과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야 됩니다. 저만 좋으면 소용없습니다.
예를 들어 물질,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물질은 위엣 것을 다 쭉 가져야 합니다.
자색은 그의 가진 물질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이웃에게는 그 물질이 큰 도움이 될 수 있고, 그의 물질이 환영, 칭찬, 감사, 귀하게 여기는 그런 면이 있어야 성막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물질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이 물질은 영원성 있게 활용 거룩성 있게 활용, 연단성, 생명성 있게 활용, 영광성 있게 활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연보를 했습니다. 그 연보를 가지고 취한 일을 했습니다. 영감을 받아 영감대로 했고 모든 사람이 혜택을 받아 고맙다 하나 그러나 충성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 일한 것에 대하여 마음에 끝끝내 감사 성심성의가 계속되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렇게 한 후 교만하던지 아깝게 여기면 그것 때문에 그 물질을 통하여 역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씩 할 수 없으면 쉬운데 이 모든 면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색실, 자기의 온전뿐 아니라 자기의 온전으로 인해 타인이 은혜를 입어 감사할 때에 영광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받아 잘 되어 감사와 존귀를 돌릴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잘된 우리를 보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분이 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들 선배들이 영광스러운 분들이 됨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모든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혜택을 많이 입혀 영원히 감사를 받는 이런 영광성이 있어야 성전의 재료를 가진 것입니다.
자색실은 영광성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그 생애가 영광성을 가진 생애라야 합니다.
영광이란 자체를 통하여 타인이 혜택을 입어 감사할 때에 영광이 됩니다. 예를 들면 물질적 영광이라면 그 마을에 두 부자가 있는데 김 부자집이 어데 있습니까? 하면 사람들이 모두 입을 삐죽거리면서 거기 있소 가 보소 만나는 사람마다 입을 삐죽거리고 그리고 멸시하는 것이 보이고 이 부자를 찾으니 예! 이 부자가 이 동리에 계십니다. 어디서 오셨는지 따라오십시오.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길이 좀 멀지만 잘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친절하다면 왜 그런가?
김 부자는 자기가 부자가 더 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착취하고 손해를 입혔기 때문이요. 이 부자는 부자로써 모든 사람에게 물질적 혜택을 입혔기에 덕을 세워 모두 칭찬하니 이것이 영광입니다.
너희 생애가 너희 생애로 말미암아 복을 받은 사람이 유익을 받은 것이 많아야 영광성을 가진 생애가 됩니다. 그 사람의 그 성질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해를 받았다면 그 성질로 많은 일을 했다 해도 그 성질로 인하여 영원히 욕이 되고 수치가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성질 성품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유익을 보았다면 혜택을 입었다면 그 성품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성전재료가 됩니다. 영광성을 가진 생애라야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성막 성전 교회 지체가 될 요소, 성화 된 요소가 됩니다. 이 비유로 된 쉬운 것을 모르면 문서로 알리는 것을 어찌 깨달아 알 수 있습니까.
●홍색실(충성성)
아가서에 그 입술은 "붉고"라는 말은 의무와 책임을 어떤 형편 시들고 거꾸러져도 죽을힘을 다 해 가지고 죽을힘을 다 바쳐 지사충성(地死忠誠)하는 것이 이 입술이 홍색실입니다.
홍색실 이는 건강을 말하니 충성을 가르칩니다. 얼굴이 붉으면 건강하게 보임 같이,
인격이 건강하면 일을 계속합니다. 충성합니다. 충성성이란 인내성이라는 말과 같고 계속성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실"은
날과 씨로 베를 짜듯 이런 것들을 섞어서 자기 생애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이력으로 자기를 만듭니다.
홍색실(충성성) 건강을 말합니다. 사람이 한가지 일은 잘하지만 두 가지 일을 맡기면 넘어지는 자 있습니다. 이는 약하여 그렇습니다. 계속성 충성성이 모자란 것입니다. 계속성 충성성이 있어야 성전재료가 됩니다.
● 가는 베실,
그 밑에 청색실 자색실 홍색실 이런 실이 다 붙은 것이라.
실이라 하는 것은 짧으면 못쓰고 길어야 합니다. 날을 놓고 씨를 짜면 됩니다.
베를 짜는 것입니다. 금 은 놋, 청색 자색 홍색실이 일시 번듯하면 안됩니다.
일생 짜야 필요 있습니다. 계속 일생 짜야 합니다.
[(계 3: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사람이 베를 짜는 것처럼 일생을 두고 짜는 것이라야 하나님이 무궁한 나라에 그것을 들고 쓰실 수 있습니다.
"가는 베실"은 그 사람의 일생 생애 모든 면으로 세밀한 그 세밀성, 그것이 하나님의 성막에 등용됩니다. 사람은 세밀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남편이 세밀한 것을 싫어하고 아내가 세밀한 것을 싫어하고 부하가 상관이 세밀한 것을 싫어하는 자가 있습니다. 또한 세밀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밀한 것을 싫어하는 자는 방탕의 요소요, 방탕한 자에게는 세밀이 절단입니다. 무뚝뚝하므로 건설이 없습니다. 작은 것이 없이 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밀이 없이 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막의 재료 하나님이 동거 동행하실 수 있는 재료는 세밀성이 있어 한번 더 생각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세밀히, 계획을 세밀히, 비판을 세밀히 이면 저면을 다 세밀히 조사하며 생각으로 세밀히 조사 모든 면에 세밀성을 가져야 합니다.
가는 베실- 군자는 큰 것만 알고 큰 것만 받는다 하고 소인은 작은 것을 알고 작은 것을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세밀성- 모든 것이 세밀해야 합니다. 철두철미해야 합니다. 작은 부패성이 큰 죄를 범합니다. 지극히 작은 데에 충성하는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합니다. 작은데 충성 없는 자는 큰 것에도 충성 못합니다. 모든 면에 세밀성이 있어야 합니다.
옳은 성도의 생애를 세마포 옷을 마련하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실을 가지고 베를 짜는 것입니다. [세마포를 입었으니 이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는 베실, 공들여 짠 베, 자기의 목표, 계획, 생활 법칙을 공들여 짜서 일생을 이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언제든지 규칙적이고 진실 되고, 조직적이고 세밀한 생애를 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 염소털
또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 등은 모든 희생의 제물이 되는 것을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염소를 잡지 안 해도 염소 털을 깎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염소 털은 자기가 자기의 호신의 것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가진 털입니다. 그 털을 깎아 주인에게 드립니다.
염소는 성경에 그 행위가 사납고 난폭, 음란스러운 못 쓸 것을 가르쳐 염소라 하였습니다. 마 25:31절 이하에 [양과 염소를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 양의 편에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했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염소털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염소와 같은 인격으로 살 때에 그 전체는 나를 위해 활동 노력했던 그 모든 노력은 낱낱이 다 깎아 바쳐라 내가 나를 위해 노력하고 생각하고 애쓰던 그것을 이제는 나를 위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께 바칠 때에 하나님의 성막에 쓰입니다.
자기 위주에서 하나님에게 바쳐 드릴 때에 그럴 때에 하나님이 붙들고 역사 하십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이가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자기 식량입니다.
여러 날 굶주렸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으랴 만큼 장년들도 어려웠는데 철없는 어린아이가 그 도시락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아이에게 얼마나 요긴한데 배고플 때에 먹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자기 위한 도시락 자기에게 참 위함, 효력 있는 그것을 예수님에게 바치니 5천명이 먹고 남음이 있습니다.,
[염소털을 깍아 바쳐라] 염소와 같은 자기를 자기위주로 사는 것 그것을 회개하여 바쳐라 그래야 하나님의 지체 하나님의 몸 하나님의 성막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자기 위주로 했던 것을 회개하여 이제는 하나님 위주로 사는 것이 염소털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염소털- 자기의 몸과 생명과 건강, 자기를 위하는 것, 염소가 그 털로 영광스럽게 하고 자기를 서늘하게 따뜻하게 하고 보호하던 것을 깎아, 주인 위함과 같이 염소 같이 자기 위하던 자가 자기를 바쳐 주님을 위하는 자가 되어야 성전이 됩니다.
과거에는 염소와 같이 저 위해 털을 가짐과 같이, 자기 위해 영광, 위엄, 평온, 여러 가지 면으로 보호의 털을 마련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염소와 같이 자신을 위해 노력하던 것은, 이제는 주님 위해 노력해야 성전 짓는 재료가 됩니다.
● 붉은 물드린 수양의 가죽
염소털은 살아있어도 바칠 수 있지만 이것은 수양의 가죽은 양을 잡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수양은 양순하지 못한 불망한 양입니다. 수양과 같은 그런 성격을 죽여 바쳐, 수양과 같은 자기를 죽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깨달아, 수양과 같은 자기를 죽여 하나님의 성전 덮개를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성전 뚜껑은 그것으로 했습니다.
그 가죽 가지고, 자기는 자기를 보호하고 있던 그 가죽을 자체가 죽고 그 가죽은 벗겨 하나님의 성막을 덮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던 그것을 자기는 죽고, 하나님의 교회는 덮어 가루기 위해 자기가 죽는 것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자기가 죽어 하나님의 교회는 덮어 싸놓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려면 하나님의 교회는 덮어 가리지 못하고 발가벗겨집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덮어 가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그것을 가르쳐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왜정 말년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에 잡아죽인다 할 때에, 조선 모든 교인이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교회가 절단 나지 않게 수호하려하면 자기가 죽어야 했습니다. 자기가 안 죽고 살려면 하나님의 교회가 절단 납니다. 신사참배하면 교회가 절단, 신사참배 안 하면 자기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을 때에 자기가 생명을 내어놓아 교회를 수호한 사람도 있고, 그 때에 복음을 내어놓아 자기가 산 사람도 있습니다.
평양에서 조선 교회가 총회 할 때에 일본 헌병이 총검을 가지고 둘러싸고 있었다 합니다. 그때에 총회장이 조선 기독교가 신사참배하는 것이 좋은 줄 알고 동의합니다. 이렇게 되면 조선에 기독교가 다 음란한 여인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총회에서 재청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 때에 주기철 목사님이 고함을 치면서 "이는 우상 숭배라 할 수 없어"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수양의 가죽을 벗겨 바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붉은 물을 들여 바쳤습니다. 수양은 가죽을 벗겨 바치면 다시 살 수 없으나,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수호하기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은 일시는 하지만 충성이 없으면 끝까지 계속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붉은 물을 들여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면 우리는 어리석게 교만 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붉은 물드린 수양의 가죽- 어디로 가나 전신 전체를 덮고 있는 가죽털을 벗겨 드리는 것입니다, 털을 깎아도 안 죽습니다. 가죽을 벗기면 죽습니다. 자기 위해 계획하고 노력하던 우리가 이제는 주님의 몸 된 교회 다시 말하면 성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은 자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 진리 운동에. 과거에는 자기만 아끼든 그 자기는 죽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자기의 생명과 몸을 바치는 것을 수양의 가죽으로 비유했습니다.
한번 죽어 바치면 다시 살아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 바치니 살아있으면서 바치는 생활은 순생입니다. 살아서 바친 것인데 가다가는 망령을 부려 자기가 살아 자기로 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물들인 가죽이라 했습니다. 계속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듯 [엡 5장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몸을 미워 아니하고 보양한다고 했습니다.
과거는 자기 생명까지 기울여 자기를 보양했는데 이제는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영광 위해 다 바치는 순생의 생애, 순교의 생애를 가르쳐서 붉은 물들인 가죽이라 했습니다.
아무리 바친다 해도 생명에 속한 순생성, 순교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시만 있으면 안됩니다. 충성성이 있어야 합니다. 왜정 말년에도 순생성을 가졌던 자들이 계속성을 못가져 교만하고 망령을 부려 자타에게 손해가 되었습니다. 계속성이 있는 충성성이 있어야 합니다.
● 해달의 가죽
물개인데 민물에 있을 때는 수달. 바다에 있을 때는 해달이라고 합니다. 바다에서 가장 빠르고 용기 있는 것입니다. 고래는 고기로써 가죽을 벗기면 비늘이 있으나, 해달의 가죽은 털이 있고 가죽이 윤기가 있다고 합니다. 족제비, 쥐 털보다 부드러운 털이 있다 합니다.
바다에서 돌아다니며 용기 있게 자기를 보호하던 것을 죽여 바치는 것처럼, 죄악 세상 바다에서 살면서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서 노력하며 살던 것이, 죄악에서 살던 자기를 죽여,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몸 된 교회 복음 운동 위해서, 자기를 위하던 것을 이제는 죽여 가죽을 성전 덮게를 덮는 것 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는 것이 있어야 성전 됩니다.
●조각목
이는 우리 몸을 말합니다. 몸이 이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화목 될 것뿐입니다.
조각목이 성전에 안 쓰이면 화목(火木)밖에 될 것이 없음 같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안되면 무가치합니다. 조각목은 아카시아 나무 같은 것인데 성전 재료가 안되면, 화목이나 재목 밖에 안됩니다.
만일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 위해 안 바치면 세상을 건설하는데 쓰여지고, 썩어질 것에 이용되고 소멸될 것밖에 안됩니다. 만일 우리 몸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됩니다. 위에 것을 다 바쳐도 몸을 안 바치면 안됩니다.
●등유
등불을 켜는 기름입니다. 세상에 빛을 나타낼 수 있는 영능을 자기가 받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모범이 될 수 있는 영감등(靈感燈). 모든 죄악의 세력을 헤치는 영감의 등. 기름은 등을 켜는데 쓰는 것도 있고, 음식에 쓸 수 있는 기름도 있는데 여기 기름은 불을 켤 수도 있고 음식에 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석유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빛을 나타낼 수 있는 어디서나 어두움을 물리치고 어디서나 그 실상 정색, 정명, 정질을 그대로 들어낼 수 있는 영능, 모든 것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감화를 줄 수 있는 그것을 가르쳐서 등유라 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씩 떨어지면 안됩니다. 자갈을 모아 무더기를 만든 것 같이 되면 안됩니다. 이는 인격면을 말하니 단일의 것이라야 합니다. 어찌 보면 붉게 보이고 어찌 보면 푸르게 보이는 하나된 것을 말합니다. (연기된 단일의 것)
등유- 등유는 성전을 밝히기 위해 불을 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빛의 행위를 하기 위한 빛의 행위를 하는 그런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두워지면 모든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럴 때에 자기가 받은 영감을 가지고 모든 것을 구별할 수 있도록 신앙 행위를 하는 것이 빛입니다.
10처녀 비유 중에서도 다섯은 기름 준비하여 밤중에 신랑을 맞이했습니다. 밤중은 모든 신앙 생활하기 어려운 절정을 밤중이라 합니다.
아가서에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란 말씀이 있습니다. 해가 기울고 질 때에도 그림자가 다소 있지만, 해가 아주 넘어가면 그림자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빛이 비추는데도 있고 비추지 않는데도 있다가 나중에는 그림자조차 없어집니다. 전부가 까맣게 됩니다.
아가서에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 사랑하는 주님과 같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여러 가지 어두움의 세력이 오면 마치 밝은데도 있고 어두운데도 있음 같이 여러 가지 환란이 오면 광명한 신앙을 유지하는 교회도 있고 그런 신앙을 유지 못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또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신앙을 유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두워지면 전부가 새까맣게 모든 존재들이 자기 이름 색채를 하나도 들어내지 못하여 영감이 약한 사람은 등이 꺼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온 교회가 신앙을 지키는 사람이 있지마는 이제는 신앙을 양보하는 사람도 있어, 마지막에는 전부가 새까맣게 되어 밝은 데가 없어, 등불든데만 밝아집니다.
온 교회가 신앙을 지키다가 차츰 어두워 반만 신앙을 가지고 그 다음은 몇 사람만 신앙을 지키다가 그 다음 심히 어려워지면 밤중에는 일찍부터 경고히 하여 자기 신앙을 지켜 자기 영감을 소멸하지 않고 끝끝내 복종하는 것이 기름준비 그것이 영감을 자기에게 권위 있게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끝끝내 진리의 빛을 비춥니다.
그 때는 신앙의 사람 진리의 생활 빛의 생활, 그것이 다 없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말하여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이 등대는 성전 안에 7촛대를 가지고 그 기름을 가지고 곡식 기름을 가지고 향기 내는 것으로 성전을 환하게 하는 것처럼, 성령의 충만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빛 곧 진리와 영감을 그대로 들어내어, 아무리 그 영감 그 진리를 부수려 하여도 양보하지 않고, 자기가 사형을 받을찌언정 끝까지 진리와 영감을 자기가 지켜나가는 보수하는 것이 등대 생활인 것입니다.
남해 마운산에서 기도할 때에 피곤하여 있을 때에 앞으로 한국교회가 장차 될 것을 스가랴 4장 정금 등대를 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때에 보니 정금 등대만 어려움을 당하지 정금 등대가 아닌 것은 아무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꺼질 것은 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금 등대 참 하나님의 교회의 빛이 되는 죽었으면 죽었지 신앙 양보하지 않는 그런 사람만 박해를 받습니다.
등유- 환경이 어려워질 때 자기는 광명한 빛이 되는 그 일을 위해 준비하는 성령의 권능 영능을 자기가 마련하는 것이 등유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안할 때 잘 믿으나 어두워질 때는 잘 못 믿습니다. 기름이 없어 꺼진 것입니다.
지금은 남한으로 말하면 모든 경제 풍부가 있고 지나치게 편리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편리하고 평안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까지 이룰지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보아 장정이 하루종일 일하여 보리 3되 밀1되, 장정이 하루 양식 밖에 못 법니다. 레 26:26에 내가 너희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신체적, 가정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두움이라 합니다.
이럴 때 밝히 비추도록 우리는 기름준비, 등유 이것을 미리부터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요소, 하나님의 등유가 되는 요소는 어떤 요소인가?
성도가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요소는 위에 즉 말한 성질 외에 등유의 성질을 가져야 합니다. 평소에 아무리 잘 믿는다 해도 어려움이 있으면 툭툭 꺼집니다.
각각 있어도 조각목은 있고, 등유가 없으면 이것은 물질이기 때문에 이 종류가 없어도 저 종류가 있지만 이것은 비유요 성전은 내 자신의 인격임으로 이것을 쪼갤 수 없습니다.
10가지 면에서 9가지가 잘되어도 한가지가 없으면 1가지 계명을 어기면 다 어긴 것입니다.
그런고로 위에 것을 다 가져야 할 동시에 이것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어두워져도 자기의 진리와 영감을 빛을 그대로 들어내고, 증거하고 입으로 행동으로 사랑으로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북 같은 나라는 밤중입니다. 그 밤중에서 거기서 영감을 그 때에 행동으로 증거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등유는 저렇게 어두울 때에 자기는 삼키지 않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자기는 영감과 진리를 배반하지 않는 그것이 등불입니다.
그러나 등유는 그럴 때에 등불을 켤 수 있는 영능을 평소에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보니 성막을 지을 때에 한가지만 빠져도 하나님이 그 성막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빠진 것이 없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이신 그대로 되었더라]
그런고로 우리의 신앙을 성막을 연구하면서 이 비유에 이런 요소를 다 갖추어야 합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가정이 사회가 나라가 경제가 신앙 동지자가 어려움을 줄 때가 있습니다. 이는 다 어려움이요, 어두움입니다. 그러면 사소한 암흑에서 등불을 들고 있는 진리와 영감을 배반치 않는 것이 등유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낮에는 등불을 잘 켜고 있습니다. 어두움만 있으면 힘을 쓰지 못하여 턱턱 꺼집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울 때에 용감한 신앙을 가지나 그러나 평안할 때는 잠잠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등불 들고 있다가 밤이 되면 다시 말하면 평안할 때는 진리대로 살지만 환란 때 어두울 때는 어두워지니 등불이 꺼집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영감도리대로 자기에게 영감을 시켜주는 대로 자기에게 하나님이 감동시켜 주시는 자기 진리, 그 영감대로 살아야 합니다. 언행심사의 행동이 빛인데 이것이 아주 어려움이 없을 때는 하기는 쉬우나 어려움이 오면 그 생활은 하기가 어렵습니다.
평소에 아무리 잘 산다 해도 어려움이 올 때 빛을 잃으면 평소에 잘 산 것이 소용이 없습니다. 평소에 수절을 잘 지킨 정절부인이 어려움이 올 때 정조를 빼앗겼으면 어떻게 빼앗겼던지 자기 정조는 빼앗긴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에 영감과 진리를 잃어버리면 예수님을 맞이 못합니다.
그러므로 등유는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어두울 때에 켜는 불입니다. 자기를 영감과 진리로 살게 하는 것을 유지하지 못하게 해도 진리와 영감의 빛의 행위 빛의 자기는 없어지고, 그대로 유지하는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을 영능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소에 기름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 어떤 고문 고행이 와도 주를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이 영감 도리를 계속하며 도우소서 하는 기도를 매일 수차 해야 합니다. 기도할 뿐만 아닙니다.
마 25장에 "밤중에 신랑이 온다" 할 때에 밤중에 기름 준비하는 것은 헛일입니다. 일찍 낮에 준비한 자라야 맞이했습니다. 그런고로 어떤 어려움에도 자기의 빛의 계속 생활을 하는 준비는 평소에 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기도로 해야 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힘이 모자라서 천사가 그 기도를 도와 그 기도에 충족이 될 때 그 기도는 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됐다 너희는 쉬라 이제 가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란 중에서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빛의 영감과 진리대로의 자신 또 행위를 빼앗기지 않고 꺽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권능을 마련해야 할 시기는 환란 때가 아니요.
평안 무사할 때에 영능을 마련해야 합니다. 남한 교회는 지금 영능을 마련할 때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라도 빛을 계속하는데는 인간의 힘 가지고는 안됩니다. 성령의 권능으로야 합니다. 준비는 평안 무사할 때에 해야 합니다.
평안 무사 할 때에
첫째는 간곡한 기도를 하는 것과
둘째는 영감과 진리의 행위를 평안 무사할 때에 할 수 있는, 자기에게 분담시킨 그 빛의 행위를 빠지지 말고 그 행위를 계속하는 것이 이 기름 준비인 것입니다.
그럴 때는 사람이 견디지 못할 괴로움이 있습니다. 별별 어려움이 있습니다. 7-8번 굶겼다가 물주지 않고 실컷 먹게 합니다. 밥 먹이고 물주지 않는 것이 견디기 아주 어렵습니다.
또 소금물을 많이 타서 간물을 많이 줍니다. 그러면 점점 갈증이 심합니다.
또 묶어 두었다가 불 앞에서 굽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멘트 바닥에 던집니다. 그래도 등불을 끄지 않고 빛을 계속 발하면 찬물을 뿌려 얼립니다. 또 따끈한데 더운데 둡니다. 여러 가지 별별 고문. 손을 어깨 넘어로 묶습니다. 엄지손가락 두개를 천장에 매답니다. 이것이 밤중입니다. 그래도 진리와 영감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그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빛의 생활입니다.
이는 평소에 영능 생활하는 것이 기름준비입니다.
첫째는 기도요.
둘째는 자기 행동으로 어떤 어려움에도 자기의 가진 빛의 행위를 양보하지 않고 빼앗기지 않을 때에 등불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유를 준비해야 합니다. 다른 것 준비해도 등유가 없으면 필요 없습니다. (다 있으나 어두우면 영능이 필요합니다. 조금 있으면) 남한 교회가 해방 전을 생각하면 너무 잘 먹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신앙 유지 못하면 앞으로 밤중에는 못합니다. 영능 생활한 것이 무궁한 세계에 지위 권위 하나님의 대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조그만한 어려움에도 요동치 않으면 큰 어려움에도 요동치 않는 사람이 됩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정으로 움직이고 의를 계속 못하면 큰 어려움에도 계속 못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이것을 준비하는 것이 등유 영능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순서적으로 오는 어려움을 피할려고 말고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사소한 어려움에도 영감을 배반치 않는 것이 그 때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준비가 있어야 하고 또 사소한 것이 큰 것이 올 때 성령님을 그런 기회에 배반하면 관계를 못맺습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일에 성령님(영감)을 배반하면 어려움이 올 때는 그 성령님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등유(등불켜는 기름) 여기 기름은 영능을 말합니다. 불은 어두울 때에 켜서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 몸, 생명을 바치기도 하지만 이는 어두울 때에 밝게 하기 위해 바치는 면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제직회가 비뚤어지는 어두운 일을 할 때에, 어둡다 함은 비뚤어진 일을 말합니다.
제직회서 전체가 비뚤어진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거기서 바로 할려고 하면 대립이 됩니다. 그러기에 바르게 하기를 사람들은 꺼립니다. 일정 때 조선 교회가 신사 참배를 거의 다하는데 그 비뚤어진 것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못하게 하기가 어려우니 그만 두고 신사 참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평양에서 총회 할 때에 신사참배 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는 조선 교회가 다 어두워져 가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또 고치기를 원하면서도 성령의 영능을 받지 못해서 나서지 못하는데 주기철 목사님은 큰 소리로 외치면서 신사참배는 10계명 중 1,2계명을 범하는 것이니 할 수 없소! 하고 밝게 들어내어 빛을 비추었습니다. 이런 것이 등유입니다.
제직회가 비뚤어져 나가는데 혼자 틀렸다고 하면 대립이 될 것이니 그냥 두어 도매금으로 돌아감은 등유를 마련 아니해서 영능을 못 받아서 그렇습니다. 교회 장로나 어떤 세력 있는자의 주장대로 나갈 때에 틀린 것을 알면서도 말못함은 영능을 못 받아서 그렇습니다.
잘못을 구별 못함은 빛이 없어 어두워 있어 그렇고 틀린 것을 알면서도 말못함은 등유의 영능을 못 받아서 그렇습니다. 또한 목사도 교인의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함은
영능이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또한 교역자가 설교할 때에 어떤 세력 있는 교인이 잘못한 것을 지적 못함은 말하면 배척할 것이니 말못하고 나감은 등유인 영능이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불 없으면 어두우면 한 덩어리 됩니다.
아가서에 해가 지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나와 함께 가자 함은 어려움을 당하여 옳게 나아가는 자가 하나도 없을 만치 어려울 때에도 사랑하는 자와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는 등유를 가진 자입니다. 자기 가정에서 혼자 믿을 때에도 가정에 틀린 것을 들어 밝히 내지 못함은 등유가 모자라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주일에 교회가지 말고 손님 대접하라 하면 그것이 틀린 것인 줄 알면서 밝히 들어내지 못하고 주일을 못 지킴은 성령의 충만한 권능을 못 받아서 등유가 없어서 밝히지 못하고 불이 꺼진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는 부흥된 것 같으나 내부는 많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국기 경배를 안 하므로 어려움을 받고 있습니다.
백영침 목사님은 투옥되었다가 보석으로 나왔는데 지금도 미결 중에 있는데 판사가 자기가 정한 한 목사와 백영침 목사님이 청한 두 목사의 출 20장에 우상에 대한 성구 해석을 듣고 여기에 대한 충분한 상식을 얻은 다음에 판결을 하겠다고 합니다.
.등유란 어두움을 밝히는데 불을 켜는 기름입니다. 천인이나 만인이 잘못되어 나가도 밝히는 성령의 영능을 받아야 합니다.
박해나 죽음을 두려워하여 말못함은 영능이 없어 그렇습니다. 밤이 짙어 가니 등불이 꺼져갑니다. 국기의 베 조각이 귀중한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표상한 것이니, 나라가 귀하기에 국기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에 기독자가 경례를 하면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는 것이니 나라를 사랑하므로 경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총회에서는 남의 눈이 있으니 안 해야 한다고 하고 개인적으로는 어려움을 당할 것이니 양보함은 영능을 못 받아서 그렇습니다.
밤중이라 함은 환란의 절정을 말합니다. 이런 때에 목숨을 잃을까봐 계명 양보를 완전히 하는 자는 불이 완전히 꺼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에 목숨을 내어놓고 계명 지킴은 영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평안할 때 계명 지킨다고 하나 어려움이 오면 계명 안 지킴은 평안할 때에 옳은 일했다고 하는 것도 저 위해 하는 비뚤어진 것이 많습니다.
그 전에 유엔군 철수하면 다 죽는다고 유엔군 철수를 반대하고 혈서를 써서 반대하였는데 고신에서도 결의했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기독자로써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증한 일입니다.
대구 동성로 교회에서 이인재 목사님 아들 약혼식에 고신의 유명한 어른들이 모인 곳에서 백 목사님에게 한상동 목사님이 "내일 새벽 예배를 백 조사님이 인도하십시오" 하시는데 백 목사님이 인도하면 그것을 지적해야겠는데 그러면 감히 어른들이 해 놓은 것을 지적하여 등이 질 것이고 지적 안 하면 영감을 소멸하는 것이니 이래도 저래도 못하고 망설이는데. 오종덕 목사님이 강제로 하라고 시켜서 새벽 예배시에 그것을 지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인재 목사님은 참 우리가 영적 간음을 한 것이다 하는데 다른 목사님은 앙큼하게 생각하여 박해를 받는 것 중에 이것이 하나이며, 또 한가지는 예배당 소송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받았습니다. 어두운 것을 언제나 밝혀야 합니다.
대통령 한끼 대접하기 위해 전국 교회가 기도하라 하고 조찬 기도회를 가졌는데 식사 대접하는 날 지혜 있게 대통령은 안나오시고 육 여사가 나왔다 합니다.
목사님들이 모인 곳에 중의 목탁소리가 지난번 들렸는데 어떤 분이 못하게 해서 그쳤는지 세 번째는 안 들였다고 합니다.
조찬 기도회는 잘못입니다. 대통령보다 국가보다 하나님은 높습니다. 대통령을,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이야기 책 같이 꾸미는 것도 다 어두워진 연고입니다.
국민으로써 국가를 애국해야 합니다. 기독자는 누구보다 더 국민의 의무를 솔선 감당해야 합니다. 회의에 참예할 수도 있고 정치가를 존중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국기에 대해 주목할 수도 있고 손을 가슴에 대면서 나라를 생각하고 나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고 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자가 아니기에 절은 할 수 없습니다.
● 관유에 드는 향품
여기에 향이라 하는 것은 아름다운 신덕을 가르치며 믿음의 덕을 가르쳐서 향이라 합니다. 또한 성경에 기도를 가르쳐서 향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기도를 향이라고 하였으며 또 덕행을 향이라고 했는가? 모든 신덕이라는 것은 기도에서 시발되어 나온 것이며 기도가 없이는 덕이 나올 수가 없고, 기도는 하나님과 의논하는 것,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과 같이 행하는 것이 기도요 하나님과 같이 교제 생활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란 것은 간구 하는 것만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생존하신 인격을 인정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알아서, 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상관이 있는데 매우 존경하고 있는 그 상관이 멀리 떠나면서 명령을 하달하고 갔습니다. 그 명령을 받아 상관을 생각하면서 지키는 것과 같이, 상관을 모시고 있으면서 지키는 것과 다릅니다. 기도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상대하고 언제나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기도요. 또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이 기도요, 깨달은 것을 느끼는 것이 기도요. 깨달은 것을 소원하는 것도 기도요. 결심하는 것도 기도요. 결심한대로 그대로 행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깨닫고, 감상하고, 결심하고, 지키되 부하가 상관이 출타할 때에 생각하면서 명령을 지킬 때와 같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 기도가 아닙니다.
두 번째 말하는 상관이 계실 때에 부하가 함께 있으면서 옆에서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 같은 형편에서 기도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기도요.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감상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결심하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기도인데, 그것이 기도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찾는 것이 기도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고 또 찾은 것이 기도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찾아서 감상하는 것이 기도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결심하는 것도 기도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실행하는 것도 기도가 될 수 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도가 되고 어떻게 하면 기도가 안 되는가?
첫째 이유는 부하가 아주 상관을 존경을 하는데 존경하는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하고 출타했는데 상관을 존경하면서 성심성의를 다하여 지키되 상관이 멀리 떠난 것을 알면서 잘 지킵니다.
이런 형편에서 상관인 하나님과 부하인 우리가 이런 입장에 있으면서 하는 기도가 기도입니까? 아닙니까? 또 묻습니다. 이제는 상관이 돌아와서 자기와 같이 있으면서 명령할 때에 함께 있으면서 존경하며 잘 순종한다면 어느 것이 기도입니까?
첫째 것이 기도 같습니까? 둘째 것이 기도 같습니까?
둘째 것이 기도 같은 것입니다. 첫째 것은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진리와 영감으로 중생된 새 사람이 하는 것이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다 함은 하나님과 같이 있지 아니하고 다만 율법을 받아 법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 향품을 말했는데 성경에 보면 향을 덕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미덕, 신덕 또한 기도라고도 했습니다.(계8장) 두 가지로 말한 것이 곧 한가지입니다. 감나무라 함은 감나무가 있어야 감이 열림과 같이 기도하는 나무가 있어야 그 끝에 덕이라는 열매가 맺혀집니다.
기도라는 나무가 없으면 덕이라는 열매가 안 맺습니다. 기도란 인격 교제를 말함. 술을 나누어 먹는 것만 교제가 아닙니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만 교제가 아닙니다. 말하는 것만 교제가 아닙니다.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도 교제할 수 있고, 고생을 같이 하면서 희로애락을 같이 하면서도 교제하고, 말을 하면서도, 일을 같이 하면서도 교제할 수 있습니다.
교제란 둘이 합하여 하나됨이 기도요. 둘이 대립됨은 싸움입니다. 하나님과 자기가 합하여 하나를 이룸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주의 할 것은 둘이 합하여 하나를 이루는데 상대방인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자기는 단독 함이 기도가 아니고 명령하시는 하나님과 자기와 같이 있으면서 순종함이 기도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함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등유란 세상에 빛을 나타내는 영감을 가르쳐서 말하는데 등불을 켜는 것은 성전 안을 환하게 합니다. 세상에 빛이란 세상에 감화를 주는 것이 빛이라 할 수 있으나, 세밀히 분석하면 그보다도 세상에 모든 사람의 옳고 그른 것을 밝히 들어내는 것이 빛입니다.
불이 없을 때는 의자인지 사람인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모르는데, 불을 켜면 알게 됩니다. 세상이 어두워있다 함은? 세상의 존재를 모르는데 모양을 모르는데 존재와 정체를 바로 나타냄이 빛입니다.
인생이란 이것이다. 부부란 이것이 부부이다. 이것이 선이다. 이것이 악이다 하고 들어내는 것입니다. 존재, 정체, 정색, 정직, 정명, 모든 관계를 나타냄이 빛입니다.
또 여기 향이란 다른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도 향을 뿌리면 향기가 납니다. 또한 무슨 향인지 누가 뿌렸는지는 모르나, 불을 켜 불빛이 비치면 등유입니다. 향이란 감화 주는 것, 혜택을 입혀 주는 것, 자기 아닌 상대방에게 따뜻하게 혜택을 입히는 것입니다. 고로 은덕이라는 말입니다.
그 장로님은 빛이 있지만 덕이 없다. 그 사람은 덕은 있지만 빛이 적다 빛이 없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유를 먼저 말하고 관유를 뒤에 말했습니다.
관유라는 것은 기름에 향을 부어 제조한 것입니다.
향유를 제단에 바릅니다. 향유 바른 것은 다 거룩해집니다. 등유를 먼저 말하고 향유를 뒤에 말했습니다. 빛을 나타내는 등유와 덕을 나타내는 것이 향유인데, 어느 것이 먼저이냐 등유가 먼저입니다.
빛을 나타내는 자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마찰이 많습니다. 덕을 가진 자 덕이 풍부한 자는 그 사람이 처세하는 데에 순탄합니다. 그러나 그이의 해 놓은 것이 심판 받을 것이 많습니다. 비뚤어진 것이 많습니다. 그 사람을 선지자라고 하지 않고 성자라 성녀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아야 우리가 갈 길을 서슴치 않고 바로 달릴 수 있습니다. 명령이 달라집니다.
백목사님이 처음 고려 신학교에 들어가실 때에 박윤선 목사님이 자주 찾아 오셨는데 백 조사님은 성자의 타입이라 하더니 뒤에는 칼빈이라고도 하더라 합니다.
처음에는 성자 성녀의 전기를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뒤에 틀린 것을 고치려고 많이 하니 뒤에는 칼빈이라고 하더라 합니다. 등유도 좋고 관유도 좋은 것입니다. 다 같은 기름인데, 불을 켜는 것도 있고 발라서 윤택하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관유는 성전 기구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윤기 있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자기의 몸 소유를 바치든지 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이름을 빛나게 하여 교회를 복음을 윤택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진노를 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인자를 들어내는 것이 관유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다 영감 생활이라도 그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면을 들어내는 면도 있고 하나님의 엄격을 들어내는 행위도 하나님의 진리를 들어내는 생활도 있습니다.
관유는 기름을 하나님께 바쳐서 윤기 있게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일 신사참배 같은 일이 있어 자기 생명이 끊어져도 신사 참배하지 아니하고 계명을 지켜 나간다면 어떤 사람은 너희 못 쓸 놈들아 우리는 죽어도 하늘나라에 가 있다. 너희에게 이 몸을 맡겼으니 찢어 먹든지 볶아 먹든지 하라 하면서 이기는 자도 있고 어떤 분은 너희들은 의인을 죽이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고 호통을 치면서 이긴 자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하루 세 번씩 옥중에서 예수 천당하고 외치는데 맞아도 웃으면서 어찌하든지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하면서 예수 천당 하여 승리했다 합니다.
처음에 말한 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낸 자라 할 수 있고
두 번 째 말한 자는 하나님의 엄위를 나타낸 자라 할 수 있고
세 번 째는 하나님의 사랑의 덕면을 말하여 하나님의 인자를 들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 목사님이 등유 선지면(先知面)에 주력했는데 물렁한 덕면(德面), 관유인 덕면에도 주력하여 겸해야겠다고 하셨습니다. 덕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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