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건설구원 반대론 - 제6장 종말의 문턱
요한계시록 20:1-10에 보면 천년왕국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각자가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문자적 해석이냐 상직적 해석이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녀동안 왕 노릇하리로다”도 해석의 방법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칭찬의 상급
지금까지 상급이 없다는 성격적 논리를 주장하여 해석해 왔습니다. 이제는 6장에서 확실하게 결론을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는 자들에게 어떤 상급이 있느냐고 물으면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꼭 면류관은 아니더라도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며, 몇 고을을 주시겠다는 지상적 땅의 개념 그대로를 표현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들의 말처럼 뭔가를 주실 것이라는 의도는 없으며,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으로 인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기대가 가득 찬 것에 대하여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상급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25:25) 라는 말씀 말입니다. 면류관을 쓰겠다는 자들에게 주실 완벽한 상급은 그리스도의 구원, 영광, 의 등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하늘나라의 모든 것임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것 외에 또 다른 사유를 원합니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자신의 것을 말입니다.
이런 심리적 현상은 현실 세계에서 자본주의의 특징인 사유 재산에 지배되어 왔기 때문에 하나르나라에서도 나의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칭찬은 언제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칭찬 말입니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영원한 하늘나라의 도래가 있기 전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는 그리스도의 칭찬과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보상적 언급의 시가와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위해 그리스도의 재림의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 여러 곳에서 이미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으며, 이것은 당연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연적인 문제입니다.
우선 재림 전의 큰 사건들을 보면, 첫째 하늘나라의 복음이 세계 만방에 전파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 24:14, 막13:10, 롬11:25). 이것은 이 세상이 철저하게 복음화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둘째로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서 11장에서 시간의 종말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전망하고 있으나 그것은 그 민족이나 국가적 옛 회복이 아니라 단지 전국민의 회개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있습니다.(롬11:11-32). 그러면서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종말의 날에 이스라엘의 상당수가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적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무리들을 가르킵니다. 그리고 넷째는 표적과 이적과 기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현상들을 보면 전쟁, 기근, 지진, 박해와 순교, 거짓 선지자의 출현, 하늘의 무서운 징조, 그리고 하늘 권세들이 진동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마24:29-30 막13:24-25 계21:25-26)
그 다음으로 재림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재림의 시기로서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가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천년왕국설의 다양한 주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재림의 목적은 미래의 영원한 시대와 존재, 그리고 상태를 소개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오실 것이며, 죽은 자의 부활과 최종 심판의 큰 사건을 계시하고 완수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다양한 주장에 의하여 우리는 심판과 상급에 대한 확실한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천년왕국과 부활
천년왕국에 대한 문제는 요한계시록 20:1-6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어떤 사람은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 전이라 하며, 어떤 이는 재림 후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전혀 천년왕국이 없다고 하는데, 결국 이것들을 전천년설,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로 나누어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전천년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의인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이며, 유대인들을 회개시켜 그들로 하여금 성지 이스라엘로 복귀시키고, 유대 왕국을 재건시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이 천년동안 왕국을 통치할 것이라는 설입니다.
이 설의 유효 적절한 주장은 예수님의 재림시 다윗 왕국의 영광스런 재건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셨을 때 왕국의 건설을 꾀하셨으나 유대인이 회개할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것을 재림 때까지 연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는데, 결국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불러모으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기에는 불충분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나타나셔서 긴 잠에 빠져 있는 성도들을 흔들어 깨우고 살아 있는 신자들을 가려내어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베풀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땅에는 그동안 고난의 시기가 올 것이며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성지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고난의 시대가 종말에 접어들 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그때 양과 염소의 구별이 있고, 사탄이 천년동안 감금되어 적그리스도들은 파멸되고 고난의 시대에 죽은 신자들이 부활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왕국은 세계적인 주도권을 가진 유대인의 왕국으로 재건될 것이며,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고 성전과 희생제사는 다시 회복도리 것이라는 설입니다.
천년왕국이 지난 다음 사탄과의 최후 결전이 있는 후에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 다음 불신자들의 부활과 흰 보좌 앞에서 그들에 대한 심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교회는 하늘로 올라가고 이스라엘은 영원히 이 땅에 남게 된 다는 것입니다.
천년설에 대한 해석적 오류는 부당한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과 신약성경은 영적해석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이론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적인 미족적 왕국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영적이며 우주적인 것이며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은 천국이 현실적 실재라고 표현하고 있는 무천년왕국설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경구절들과 모순되는 것들입니다.(마 11:12; 12:28, 눅17:21, 요18:36-37, 골1:13)
반면에 성경에는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동시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요5:28-29 행24:15). 이러한 의인의 부활이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6:39-54; 11:24), 이 이론은 의인의 부활을 악인의 부활에서 천년간이나 떼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이론은 성경에서 3중의 부활과 4중의 심판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은 영광을 누리게 된 성도와 육적인 죄인이 죄와 죽음이 아직도 만연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있다는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 실패한 것입니다.
벌코프의 말을 빌리면, 요한계시록 20:1-6에서 잘못 발견한 것으로서 이 구절은 하늘의 광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결코 유대인이나 지상적인 만족적 왕국 내지는 팔레스타인을 지시하고 있는 구절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천년왕국설의 이론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의 논란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어느 한 가지를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급에 대한 성격과 가치성에 대한 논의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아 천년왕국설의 유무에 대한 문제를 재론한 것입니다.
천년왕국을 차후 지상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확실하게 본다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할 자들의 내용을 생각해 볼 만할 것입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배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그들이 하나님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계20:1-6).
여기의 왕 노릇이 과연 상급의 내용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결국 천년왕국설은 이 지상세계와 영원한 하늘나라와의 중간 기간에 있는 것으로 본다면, 역시 하늘나라의 상급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무천년왕국설자들의 주장대로 전혀 이 지상세계와 영원한 하늘나라의 중간 기간이 아닌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라면 더욱이 상급의 문제는 우리의 상상 밖의 문제로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핸드릭슨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자들의 영이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한다고 합니다.
최후 심판과 상급의 내용
최후 심판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요한계시록20:11-15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는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
이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에 있을 상급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본서 제5장에서 최종심판에 대하여 약간 언급했듯이 과연 심판의 핵심진리는 행한대로 보상과 보응하시는 행위보응의 가치성을 어디에 두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천년왕국설이 유효한다면, 세상 끝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천년왕국의 과정을 겪고난 뒤에 올 것이며, 여기에 대한 복잡한 시간의 구조는 피하고 상급에 대한 문제가 우선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말한 대로 생명책과 행위책에 의하여 전자는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책이며, 후자는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 멸망의 책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입장에서 구원받은 서도라 할지라도 행위에 대한 심판은 받아야 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1-15).
바울은 여기에서 은유법을 사용하여 “그날”이라는 최후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있을 두 가지 부류를 확실하게 한정 지워주고 있습니다. 한 분류는 금, 한 분류는 은, 그리고 보석이며, 한 부류는 나무, 풀, 그리고 짚입니다.
당시 고린도인들은 인간의 천사를 받으려는 야망이 강했으므로 이러한 바울의 말은 그들에게 정확한 판단의 기준을 일깨워줄 수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사역에 성실해야 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접합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두 가지 부류는 공력의 시험을 받을 터인데 그 시험의 표준은 불입니다. 이 불은 해석자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는데, 어떤 이는 마지막 심판의 불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하고, 칼빈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금, 은, 보석과 나무, 풀, 짚에 대하여 시험했을 때 전자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나 후자는 소멸되고 말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심판은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천사에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영접하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것은 어리석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날에 (그때) 이후에 있을 것인데, 그것은 불에 의하여 그 공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5절의 말씀인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는 어떤 경우든 구원을 받되 상급은 영원히 보존되는 금, 은, 보석과 같은 행위로 인해 상을 받는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의 ‘상’과 ‘해’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초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그 해석이 오류와 모순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의 전체적인 주제는 ‘건축자인 전도자’로 보아도 좋고, ‘건축자인 신앙자’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0절에 오직 터를 닦아 둘 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 터 위에 다른 사람이 건축을 하는데, 각각 어떻게 세우든 조심할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특히, 14절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는 상과 벌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미 5장에서 인간 공로나 공적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언급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성경구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해당하는 시간적 의미 외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심판이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연장되거나 그대로 적용된다면 지금까지 언급해 온 상급의 문제는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칼빈은 단지 부르이 시험을 통하여 공력이 그대로 있거나 불타버리고 없거나 간에 전자는 그 공력이 그리스도의 날을 잘 견딘 후에라야 칭찬과 상을 받을 것임을 말하며, 상에 대해서는 자신의 책「기독교 강요」를 참조하라고 합니다.
또한 칼빈은 자신의 행한 사역의 실패를 솔직히 인정하면서 또 금이 용광로에서 정련되 듯이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을 정결케 하신다면, 더구나 하나님이 때때로 자신의 백성들을 고난으로 연단하시며, 불(성령)의 방법으로 백성들의 무지를 고치시고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 역시 이런 것을 십자가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의 해석이 모든 건전한 판단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만족시키리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심판의 날은 인간 공력의 결과에 따라 상과 벌을 받을 시기로서 그 상의 가치는 칭찬, 즉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처럼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리라”는 것 외에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같은 의미로서 고린도후서 5:10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나는 역시 이 구절에 대하여 잘못된 해석을 하는 자들에게 반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우리가 나타날 때 행위 보상을 구원과는 관계없이 다루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는다는 구절로 볼 때 분명히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완벽한 구원에 입각하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가 주님 앞에 스스로 완벽한 선행을 한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 됩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칼빈의 말을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한 행동에는 거기에 마땅한 처벌이 따르지만 선행의 보상에는 하나님이 그 행위의 가치나 공로를 참작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그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고 충분하지 못하며, 더욱이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행위로 기쁘시게 해드리는 유일한 길은 전체 율법을 다 만족시킴으로써 가능할 것인데, 이것은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은, 하나님이 자신의 무상의 친절에 따라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전가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자신의 호의로 받아들인 다음,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행위를 은혜롭게 받아주심과 아울러 보상이 따를수도 있는 것은 바로 분에 넘치는 용납입니다.
따라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선한 행위를 보상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값없는 은혜로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이 부정되지 않는 것으로만 본다면, 여기에서는 전혀 모순이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 선악간에 행한 대로 받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에 근거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하고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심판의 과정
어떤 이는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 구원을 받았고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의하여 선행만 기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망각하실 능력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는 사실 그대로를 심판하실 것이며,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마음의 생각까지도 보고 처리하실 것입니다.
이제 심판날의 판결에 대한 공포를 생각해 봅시다.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은 각 사람에게 신판의 언도를 두고 자신뿐만 아니라 공공연히 발표되어 적어도 모든 관계자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1장에서 부득불 인식에 대한 논의를 했던 것처럼, 이것은 인식의 견해 차이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인의 심판은 인간의 인식 작용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 개체의 절대적 심판일 뿐 상대적 심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에 그 심판의 표준을 두겠지만 결국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서로 관계되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시비와 억울함을 폭로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와 은혜가 찬란히 빛날 것이라고 보지만 결코 수평적 심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말한다면, 상급도 상대적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평가로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최후 심판의 과정에 대한 묘사를 진정 어느 차원까지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이해해야 할지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상징의 의미나 문자 의미의 올바른 판단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영원한 하늘나라
지금까지 천년왕국의 문제, 그리고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과 상급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이제는 최종 정리로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한 유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상급의 유무에 대한 내용은 그 반대편인 악인의 최후 상태를 말함으로 더 확연히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1)악인의 최후 상태는 영원한 형벌로서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악인의 처소: 악인이 갈 곳은 영원한 지옥이라는 것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고통의 처소를 ‘게헨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고통의 처소로서 상징되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18:9에서는 지옥불로 말하고 있으며, 그 앞 절에는 영원한 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풀무불(마13:42)과 불못(계 20:14-15), 옥(벧전 3: 19), 무저갱 (눅 8:31), 그리고 어두운 구덩이 (벧후 2:4) 등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하나의 처소를 뜻하면서 하늘나라와 관련하여 그 위치를 바깥 어두운 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지옥은 차후 심판 다음에 오는 것으로 이 세상의 ‘불’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악인의 형벌에는 등급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4)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7-48)
이 구절들은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의 형벌을 다른 성들과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악인의 형벌에 대한 등급을 의인이 받을 상의 등급에서처럼 공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벌에 등급이 있다면 분명히 의인의 상에는 등급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적절한 성경 해석상의 논평일 것입니다.
그 다음 의인의 최후 상태를 생각해 봅시다. 의인의 최후 상태를 두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내용은 비장한 우리의 신앙적 이해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로운 창조일까, 아니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세상의 갱신일까 라는 점입니다.
특히 개혁파 신학자들은 시편 102:26-27을 인용하여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세상의 갱신으로 견해를 좁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살펴봅시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여기에서 해석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절에서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해석의 같은 원리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하늘도 손으로 만드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이 창작할 때에 손을 사용한다는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옷은 입으면 낡아서 다시 의복을 바꾸어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천지의 갱신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앞 뒤 문맥을 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27-28을 보면,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심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전혀 천지의 갱신이랄 수 없는 내용입니다.
혹자는 현존 만유 갱신설을 주장하여 창조는 완성을 예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패는 있을 수 없으며, 구속은 중생을 예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과 회복을 받아 완성을 볼 것이고, 세상이 새롭게 되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지구가 멸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부활은 회복을 예상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체적 부활은 교회를 인도하여 육체의 부활을 긍정하게 하였음으로 신체의 부활과 신천지는 유추로 서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을 재창조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의 면목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또 용해는 변형이라고 하는데, 베드로후서 3:10에서 그 내용을 결정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의 형태이며 새 하늘고 새 땅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또한 제한된 범위의 변화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경우라도 이것은 표현상의 문제일 뿐 전혀 다른 새로운 현상계가 전개도리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다른 말로 표현하여 ‘새로운 질서’라는 함축 용어를 통하여 매듭짓고자 합니다.
그래서 새 하늘고 새 땅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과는 당리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상급의 등차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옥은 이원론으로서 형벌의 등차가 있으나 하늘나라는 일원론으로서 모두가 기쁨 가운데 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표시할 내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