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건설구원 반대론 - 제4장 유업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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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업의 상”이라는 말의 내용을 보면 ‘유업’과 ‘상"이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24에 “유업의 상”이라는 말씀이 있으며 그 뒤에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유업‘과 ’상‘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봅시다.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유업에 개념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유업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현세적이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점진적으로 그 유업이 확대되어진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1:28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그 땅을 인간에게 소유하도록 하시고 경작케 하셨으며, 또 향수케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이후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선택된 백성에게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그 유업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후 그곳에 인간을 살게 하셨습니다(창 2:8). 따라서 에덴동산은 인간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선물이며 유업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상 어느 부분에서 살도록 위치 선정을 해주셨는데, 창조 역사에는 에덴 동산으로 말미암아 위치가 설정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곳은 하나님이 인간 아담에게 할당해 주신 선택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옮기신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창 2:15). 그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기 위한 관리자의 임무를 주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그곳을 정당하게 관리함으로 즐거움을 얻게 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인간이 범죄함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으며 근본된 토지를 경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확인을 요구하는 것이며, 노동의 문화, 땅의 문화로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일감을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창세기 11장까지는 하나님이 없는 철저한 이간 타락의 역사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유업으로 주신 땅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가운데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담이 가인을 낳았고,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죄를 다스리는 자가 되었고(죄라는 단어가 처음 나옴), 결국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여호와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이라는 땅에 망명하여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창 4:16).
이 놋 땅의 의미는 ‘망명한 곳’으로서 전혀 안식과 평화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땅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휴식이 없이 영원히 방랑하는 땅을 말합니다.
그후 창조의 안식일에 대하여 언급이 있은 후 출애굽기의 십계명을 통한 안식일의 언급이 있기까지 하나님은 안식일에 대하여 침묵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안식이 없고 고독을 느낍니다. 그래서 가인은 제사행위를 통해 하나님ㄴ께 나아가려 했지만 그의 불성실로 말미암아 아주 하나님과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가인은 하나님을ㅇ 떠난 인간 문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에 입각한 문명의 출발입니다. 창세기 4:17부터 가인의 계보가 시작되고, 하나님이 없는 문명과 문화가 시작되었브니다. 문화의 창조와 직없으 변화는 타락한 인류 전체의 문제로서 이 사회 발전의 4대 요점인 노동, 교육, 국방 및 상공업과 타락한 인간의 애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 발전의 결과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었습니다. 아담이 가인을 통해 얻은 7대자손인 라멕의 악의 노래는 범죄한 인간의 죄의 주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창 4:23). 이것이 곧 인간 죄악의 확대입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내가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 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 가인의 살인과 더불어 라멕에 와서 죄의 완성을 볼 수 있으며, 오만한 인간, 죄악의 노래와 풍류를 좋아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아내들은 아다와 씰라인데, 아다는 ‘아름답다’라는 뜻이고 씰라는 ‘사치, 그림자’란 뜻입니다. 이들은 악을 조장하는 천박한 여자들로서 오늘날도 천박한 여자일수록 사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창세기 5장에서 셋의 계보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통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셋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유일한 종교적 첫 행위였으며, 아담이 셋을 통한 십대 자손에서 노아가 태어났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교활하며 문화, 문명, 이기심, 그리고 불경건의 특징이 있지만(창 4:16-24), 셋의 후손은 하나님께 헌신과 순종(창 4:25-26), 하나님의 교제를 기뻐하며(창 5:22),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창 6:8).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셋 자손)과 사람의 딸들(가인의 후손)이 통혼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일을 일백 이십년으로 정하시고 창조한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실 것을 말씀하시고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셨습니다.
홍수를 통한 심판과 그후 사건들이 주목되는데, 그것은 그의 아들들,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노아의 아들들로 인하여 백성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창 9:19).
그후,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가 주어지며 형제의 종이 될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셈은 여호와를 찬송하게 했고 동생 야벳을 창대케 하셨으며,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 종이 되게끔 하셨습니다(창 9:26-27).
그후 노아의 아들 가운데 함의 아들 구수가 니므롯을 낳았는데, 이를 가리켜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창 10:8)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므롯의 행적은 시날 땅(바벨론)이 중심이었으나 나중에는 앗수르로 건너갔습니다(미 5:6). 거기서 니므롯에 의하여 바벨탑을 쌓게 되었으며(창 11:1-9), 이것은 곧 아담과 그의 아들 가인과 후손이 하나님의 명령에 직접적으로 반대된 목적으로 성과 대를 쌓았던 일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쫓겨난 후 11장까지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역사의 발전이며, 비로소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새로운 창조와 구속의 통로를 여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 족속에서는 전혀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를 열 만한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었지만(수 24:2, 창 31:19; 35:2) 이러한 족속 가운데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하나님이 선택 속에 그를 두셨던 것입니다.
선택의 개념은 ‘구별’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룩해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셨으므로 거룩한 백성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와 완전히 교통이 단절된 인간에게 희생제사의 길을 제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언약은 곧 현세적 미래의 유업이었습니다. 이 땅은 가나안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브라함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창 12:7-8).
하나님은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결구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하신 유업을 이삭, 야곱, 그리고 열두 지파를 통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여 축복의 땅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축복의 땅으로 충분합니다(창 26:3; 2:13-15). 이것은 곧 하나님의 성소 및 성전의 선정을 위해 지정된 곳이었습니다.
역시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 가나안을 유업 또는 기업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기업을 약속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는 의도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현세적 유업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이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유업의 개념
우리는 먼저 구약시대는 그 유업이 현세적이며 아브라함을 통한 그 자손들에게 확대되어 성취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유업이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갈 3:15-16). 아울러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면, 유업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가 3:29; 4:7).
야고보서 2;5-6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는 말씀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괄시하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한 하늘나라의 유업을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공평과 고정에 대한 교훈입니다. 가난과 부의 현세적 측정으로 불공평한 처사가 오늘날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현실적 공평이나 공정의 요구는 하늘나라의 유업에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두고 잘못 판단된 예를 들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 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세상에는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는 깊은 골이 지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판단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반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이러한 것들을 볼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야고보는 가난한 자에게 오히려 믿음을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난한 자를 축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이며 내세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실 것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아울러 고린도전서 6:9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가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남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현실적 죄의 목록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는 진리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50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했는데, 분명히 이것은 부활과의 관계에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하여 육있는 자와 신령한 자, 땅에서 난 자, 즉 흙에 속한 자와 하늘에서 나신 자에서 결코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inherit)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유업에 대한 최상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유업의 정의
유업이란 마른 헬라어 ‘클레로노모스’(상속인, 후사)에서 유래한 ‘클레로스미아’(상속, 계승, 상속물)란 의미입니다. 특히 골로새서 3:24에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라는 말씀은 이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업과 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만한 것입니다.
믿는 성도는 어떤 인간관계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할 것이며 사람에게 주께 하듯하고 소홀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가 유업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 유업의 상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상전을 섬김으로 그리스도께서 그 수고에 대해 지불하실 것이며, 마침내 영화로운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업의 상이란 무엇입니까? 구약이 당연히 현세적이며 물질적인데 비해 신약은 내세적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대체로 본문에 나타난 유업의 상을 현세의 일상적인 물질적 보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무엇인가 하늘나라에서 지상의 소유개념에 대한 자리바꿈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유업의 상을 무엇으로 생각합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종이었으므로 내세에서는 아들의 유업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유업은 상속 또는 상속자의 의미임으로 절대로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유업의 상이란 물질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적 의미가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유업의 상이 인간 행위에 있는 듯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공평, 즉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1:7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위의 말씀은 전절들을 받은 유업의 내용이며 그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있을 우리의 위로이며 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업의 상이 바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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