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건설구원 반대론 - 제3장 하늘나라의 면류관
나는 얼마전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의 말을 빌리면, 하늘나라에는 5대 면류관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둘째는 의의 면류관(딤후4:8)
셋째는 생명의 면류관(계 2:10) 넷째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그리고 다섯째는 석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면류관이란 무엇입니까?
하늘나라 최대의 상급으로서의 면류관
면류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거의 동일합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최대의 상급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찬송가 544장이 생각납니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 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눈물 골짜기 더듬으면서 나의 갈길 다간 후에 주의 품 안에 내가 안기어 영원토록 살리로다
열린 천국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 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나의 가는 길 멀고 험하여 산은 높고 골은 깊어 곤한 나의 몸 쉴 곳 없어도 복된 날이 밝아오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 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한숨 가시고 죽음 없는 날 사모하며 기다리니 내가 그리던 주를 뵈올 때 나의 기쁨 넘치리라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 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나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기쁨과 소망이 넘쳐 흐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 주의 품안에 안기어 영원토록 살며 그 복된 날이 밝아올 때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가사에서 모순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을 쓰는 데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는데, 좀더 구체적으로는 1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현상학적 인식론을 통한 기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진정 하늘나라에서 면류관, 즉 모자를 쓸 줄 믿고 있습니다.
면류관에 대한 대표적인 예화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한국교회에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강 이러한 내용입니다.
어느 장로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가장 공로가 있는 자로서 헌금도 제일 많이 하고, 목사에게 신임도 받으며, 교회의 앞자리에 앉아야만하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같은 교회에 직분도 없고 보잘것없이 초라한 한 할머니가 있었는데, 예배 때마다 오는지 가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석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이 장로가 꿈에 하늘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이곳 저곳을 살피는데 어느 방에 빛나는 면류관이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여러 종류가 있어 평소에 교회에서 공로가 가장 많았던 장로인지라 스스로 가장 큰 면류관이 자기의 것인 줄 알고 머리에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모두 써보았지만 자신에게는 하나도 머리에 맞질 않았습니다. 실망한 장로가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한쪽 구석에 개털모자가 있어서 그것을 써 보니 머리에 꼭 맞더라도 합니다.
꿈을 깬 장로는 평소에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말석에 앉던 남루한 할머니를 선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설교 중 이 예화는 어느 누구나 한번쯤은 신자들에게 그 나라의 실상이 이러하며 면류관을 쓰기 위해 하나님께 충성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들려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면류관의 의미
면류관이란 말은 헬라어로는 ‘스테파노스’로서 그 뜻은 ‘에워싸다’(to encircle)인 ‘스테포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면류관은 둘러싸여 있는 것(that which surround)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스테포’가 사용된 경우는 왕이(왕하 11:12) 헬라의 경주에서 승리한 자에게(고전 9:25) 공석에서 영광이나 기쁨의 표시로(사 28:1) 각각 사용되던 것이었습니다.
역시 성경에서 사용된 면류관은 모두 허위(pseudo)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가끔 언어철학에서 허위언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표현기법으로서 직설적 표현보다 더 수사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가령, 벼가 자 익은 가을 들판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야,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었구나.”
이것은 누구나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어떻습니까?
“야, 황금 물결이로구나.”
이 말로도 우리는 가을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의 표현은 이렇게 엉뚱한 면도 있습니다. 정말 벼가 잘 익은 가을 들판이 황금입니까, 또 그것이 물결입니까? 그리고 황금이라고 하여 오항금 연구를 하고 나서 잘 익은 벌판을 표현할 것입니까, 물결이라고 하여 바닷가까지 가서 물결을 보고 돌아와서 표현을 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잘 익은 가을 벌판의 허위동등(pesudoequivalence)인 것입니다.
이것을 때로는 상징표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면류관도 왕, 승리자, 기쁨의 표시로 사용한 모자로서 영어로는 일괄적으로 crown이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면류관
신약성경을 보면 면류관이란 용어가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면류관이 하늘나라의 상으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면류관이 하늘나라의 상으로만 사용되는 전용단어로 알고 있지만 요한계시록 12:3을 보면, 용의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3승이 열 면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 9:25에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절을 보면 달음질하는 자가 상을 얻는데, 그 상을 얻는 자는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 합니다. 또 25절에는 절제자와 비절제자 사이에 면류관이 다른데, 전자는 썩을 면류관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측면에서 면류관이라는 허위 언어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찾아볼 수 있는데, 하늘나라에서 받을 5대 면류관이 우리는 최대상급임을 고집하는 자들을 위해 다음 항에서 상세히 언급하려 합니다.
5대 면류관
5대 면류관, 나는 이런 면류관에 대하여 노래처럼 들어 왔습니다. 또 하늘나라에는 이러한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5대 면류관은 표현방법일 뿐 하나도 그 자체의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5대 면류관을 보면,
1.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2. 의의 면류관 (딤후 4:8)
3.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4.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5.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
1. 자랑의 면류관
데살로니가전서 2:19-20을 보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전서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가 성공적일 때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말미암아 베뢰아로 갔으며, 다시 아덴까지 좇겨갔다가 그 교회가 걱정이 되어 결국은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그러던 중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박해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킨다는 대견스런 소식에 감격하여 바울은 이 편지를 썼으며, 또한 이에 감사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으로 지칭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여러 주석가들의 해석을 살펴보면 거의가 같은 맥락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에 대한 해석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신자들이 구원을 받아 심판의 날에 면류관으로서 소망, 기쁨, 그리고 자랑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편적인 해석은 바울의 자랑의 면류관은 이러한 사실이 이루어질 때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주석가들의 해석이나 오늘날 교회 목회자들, 심지어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같은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소망, 기쁨, 그리고 자라의 면류관은 다 같은 사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 교회의 구원이 완성되므로 얻어지는 주관적, 객관적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주어진 상은 보상의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성경 해석의 모순에 대한 난관을 극복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오직 믿으로 구원을 받으나 그 구원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내용에 대해 말입니다. 정말 보상이 따릅니까? 보상이 따른다는 해석들을 마태복음 5:12, 고린도후서 5:10 등을 인용하여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마태복음 5:11-12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이 책 2장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님의 산상보훈 중 팔복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러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기에서 대체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기쁨의 근거는 하늘의 상급과 선지자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며,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요건은 믿음일지라도 그곳에서 상받는 것은 행함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의 상급을 클 것이며, 이것은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산상보훈의 말씀에 대한 논리적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논리적 문맥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부득불 하나하나 다시 정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자, 생각해 봅시다.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면, 현실적 우리의 삶에서 가난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미래의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가난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잠시 시간적인 이해가 해석의 선행조건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한 미래의 하늘나라에서는 조금도 심령이 가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현실적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해져 한다는 의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역시 동일한 시간적 의미임을 발견합니다. 저 영원한 하늘나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나라에서 우리는 구태여 복을 얻기 위해 애통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어 팔복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여덟 가지 복의 근거는 모두 현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성경 해석에서 오류나 모순을 가지는 것은 논리적 구조에서 처음 전제가 현세적이면 재진술이나 결론도 현세적이기 때문입니다.
해석상의 난점이 있다 하여 전제와 결론의 구조나 의미를 달리하기도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해석이 어려운 부분은 영적 해석이라는 연막탄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팔복중 칠복이 현세적 요건이나 복이라면 마지막 여덟 번째도 현세적 요건과 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머지 한 부분만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은 미래의 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도 해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위대한 주석가요 신학자인 칼빈의 해석을 그대로 인용하여 정리하겠습니다. 칼빈은 마태복음 5:10의 해석을 위해 11,12절에서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12절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입니다. 칼빈의 주석에서 글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인용(한구어 역)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불공평한 욕을 먹을 때 당황하지 않을 방편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마음이 일단 하늘을 향해 들려 올려지게 되면 끝없는 기쁨의 근거가 거기서부터 문을 활짝열고 우리에게 나와 모든 슬픔을 삼켜버리고 만다.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이 상이라는 말을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데, 이 거짓을 들춰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이 상과 공로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관계가 없으며, 이 상에 대한 약속은 그냥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가운데 가장 선하다는 사람의 선행이라도 얼마나 흠과 모순투성인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칼빈의 주석을 재해석한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이 일단 하늘을 향해 들려 올려지게 되면 끝없는 기쁨의 근거가 거기서부터 문을 활짝열고 우리에게 나와 모든 슬픔을 삼켜버리고 만다.”는 것은 성경의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라는 부분의 해석이 될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말씀이 주는 시간적 의미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의 현실적 의미임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이 상이라는 말을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데, 이 거짓을 들춰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이 상과 공로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관계가 없으며, 이 상에 대한 약속은 그냥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칼빈 당시의 내용으로서 오늘날 소위 기독교라는 명분 아래 건전한 교회의 목회자들도 대다수가 하늘나라에서 상이 있다 하며, 이것을 전제로 하여 충성과 봉사와 선행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를 속이는데, 이 거짓을 들춰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칼빈은 단도직입적으로 이 상과 우리의 공로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 관계가 없이 거저 주신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해석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조금도 두려울 것 없이 하늘나라의 상에 대하여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 가운데 가장 선하다는 선행이라도 얼마나 흠과 모순 투성인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과연 우리의 선행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앞에서 상을 받을 만큼 행위가 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고 하늘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그 외의 상을 더 받겠다고 하니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에 더 마음을 쏟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다음 고린도후서 5:10을 찾아봅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에 대한 해석의 첫째 내용은 죄의 심판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심판으로 생각합니다. 문맥을 보아 이것은 분명히 옳은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보상의 심판이며, 선한 일을 많이 한 성도는 구원의 자리에서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이고, 악한 일을 한 성도는 무슨 형태든지 부끄러움을 받는다는 해석을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택하신 자들을 행한 은혜의 표현인 것입니다.
전절인 9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된 내용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는데 그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칼빈의 해석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10의 해석을 보면, “악한 행동에는 거기에 마땅한 처벌이 따르지만 선한 행위를 보상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그 행위의 가치나 공로를 참작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큼 그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고 충분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전체 율법을 다 만족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인데, 그 정도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유일한 대비책은 하나님이 자신의 무상의 친절에 따라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우리에게 전가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그의 호의로 받아들인 다음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행위를 은혜롭게 받아주시며 보상이 따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분에 넘치는 용납이다. 하나님이 선한 행위를 보상하신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값없는 은혜로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이 부정되지 않는 것으로만 본다면, 여기에는 전혀 모순된 점이 없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을 이해한다면 칼빈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거나 따르지 못할 뿐 아니라 어느 하나도 완벽하게 행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10의 말씀을 히브리서 10:17-18과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러합니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의 영원성에 대한 진리로서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겠다는 말씀에 믿음과 신뢰를 가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최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어떻게 이해될 것입니까? 과연 그 심판대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죄를 하나하나 기억할 수 없다든지, 아니면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절을 보면 “이것(죄)을 사하셨은즉”이라 말하고 있는데, 우리의 죄를 사하셨어도 마지막 심판 때 주님만을 기억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일일이 발표할 이유도 없지만 주님과 당사자와의 관계에서는 주님만이 기억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악 간의 행함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것, 즉 행위보상과 보응도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를 따라 상을 받는다는데 대한 인식을 바로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시상대 위에서, 그리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심판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죄사함 받은 성도들의 죄를 기억하실 수 있듯이 각자의 보상은 현세적 보상방법이 아니라 주님만이 아시는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의 면류관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의(디케)라는 용어도 해석이 어렵습니다. 정의적 해석 그대로 올바름이라고 한다면 그 해석이 과연 충분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좀더 구체적인 해석으로써 판결이나 집행의 원칙적인 올바름이라고 해도 불충분합니다.
여기에서 굳이 상급을 논한다면 나는 수직적 상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직적 상급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사이에 서로 비교할 수 있거나 자랑할 수 있으며, 많다 적다는 갈등이 있을 수 있는 그러한 수평적 상급이 아니라 주님만이 각 개인의 행위를 기억하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수직적 상급은 주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구원받은 성도는 행위에 관계없이 자신이 가지는 기쁨으로 동일하게 만족할 것입니다. 만일 행위에 따라 기쁨의 만족도가 다르다면 하늘나라는 진정한 하늘나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약 신학자인 G.E 레드라는 사람은 그의 책 「신약 신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심판 교리에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경험되는 종말론과 미래적인 종말론 사이에 끝임없는 긴장은 심판교리에서도 발견된다. 칭의(의롭다 하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종말론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심판자의 호의적인 결정에 의하여 죄책으로부터 방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동시에 심판은 믿는 자들에게도 종말론적인 사실로 남아 있다.
우리가 소망하는 의(갈 5:5)는 최후 심판날에 무죄 선고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야 하는데(고후 5:10), 이 심판대는 또한 하나님의 심판대이기도 하다(롬 14:10).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칭의 때문에 심판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롬 8:1; 33-34).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는 그의 행위에 대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되고, 각 사람은 몸으로 행한 일에 대하여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그가 행한 일을 따라서 적절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F.V.Filson). 이러한 심판은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이 아니라 가치를 평가하는 심판이며(P.E.Hughes), 정죄 또는 무죄 선고가 아니라 신자의 생활 가치 또는 무가치에 따라서 보상 여하를 결정하는 심판이다.“
이제 이 본문의 주제인 자랑의 면류관에 대하여 종결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자랑의 면류관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해이며, 바울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강림 때 자랑할 만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2. 의의 면류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자에게니라”(딤후4:7-8).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보면 의로운 보응으로 주는 면류관, 영원한 의로 주는 면류관, 그리고 의인의 의에 대한 상급으로 주는 면류관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렇나 상급을 기대하고 있으며,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상에 대한 생각이 그들의 신앙의 일차적인 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유형의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면류관을 물질적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면류관은 사물이 아닙니다. 쉽게 표현하여 상징으로 볼 수 있으며, 구체적인 언어철학의 분석은 현상학적 인식의 범주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의는 믿음을 지킨 자에게 주는 것으로 면류관이라는 대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로써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긴다는 말입니다(롬 4:3).
그러므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5-8)는 말씀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합니다.
가령, 일반 성경주석가들의 해석은 면류관이라는 용어가 성경 여러 곳에 나옴으로 이것들을 나열하여 “썩지 않는 면류관, 시들지 않는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하며, 이것들은 성도들이 내세에서 받을 상급을 다각적으로 말한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5대 면류관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하늘나라에서 다섯 개의 면류관이라는 모자를 사용한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을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 달려가 마지막 골인지점까지 완주한 사람, 그리고 믿음을 지킨 자로 표현하면서 마지막 심판 때 재판장되시는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죽음을 앞에 두고 부활의 날을 바라봄과 동시에 ‘의의 면류관’과 ‘의로우신 재판장’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분명히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보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에 대한 내용은 주로 로마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서 4장에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칭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9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의 의에 대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의는 인간의 주관적 입장에서는 믿음으로 보지만 객관적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를 확증할 수 있는 말씀은 로마서 4:23-25 말씀입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위의 말씀을 보면, 사실 의의 면류관을 기대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리의 사소한 선행이나 행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공로로 치켜세우려 하는데,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푸신 칭의(의롭다 하심)가 행위보상과는 전혀 어긋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진 칭의와 행위보상은 완전한 일치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즉,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보상을 해주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상이라는 것이 고작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인간의 선행에 있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행위를 보아 주시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가 보상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상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라고 남용할 정도이면서도 정작 하늘의 보상이나 상급은 인간 자신들의 행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종종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는데, 첫째는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을 보상의 채무자로 여기는 것이며, 둘째는 구원의 근원이 하나님의 극진하신 은혜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능력이 하나님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의 모순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3. 생명의 면류관
야고보서 1:12을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도 역시 면류관에 대한 내용입니다. 시험에서 승리하여 믿음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후에는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인 우리의 투쟁으로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거짓된 생각입니다.
이와 함께 생명이라는 용어도 역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까? 생물학자나 의학자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학자도 신학자도 해석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생명의 본질적인 해석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란 영생이라는 개념일 뿐 생명 그 자체의 본질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날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국 L.A에 사는 잘 아는 어느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건강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번 생명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명에는 영과 육이 있는데 우리는 생명에 대한 절실함이 있으며, 이 생명의 문제가 우리에게는 최대의 가치있는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0 하반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이 면류관을 소유하는데 있어서는 성도의 환난이 전제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 죽기까지 그리스도께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최고가치는 사물적 인식인 면류관으로 동일한 의미를 줍니다.
그러나 이 면류관은 생명도 아니며 그렇다고 생명이 면류관도 아닙니다. 단지 추엇앟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데 그 가치의 표준을 면류관으로 표현한 것 뿐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이것은 신자에게 최후에 주어질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면류관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해석 불가능한 것을 면류관이라는 지상적 개념에서 이해를 시키는 계시의 표현방법일 뿐입니다.
따라서 생명과 면류관은 같은 의미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란 최대의 자격을 갖춘 자에게 주는 것이므로 달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모자 콘테스트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한다면, 생명이라는 의미를 면류관이라는 최대가치의 평가로 하나님께서 상으로 주시되 무상으로 또는 값없는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 상이 아닙니다.
4. 영광의 면류관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3-4).
본문은 베드로를 통하여 장로들에게 말씀하신 권면의 내용입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이 맡기우신 양을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본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권의 남용이나 강압적 태도와는 반대되는 내용으로서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도 이러한 자에게는 상급의 보상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상급을 주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때는 재림의 때로서 그 상급은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표현이나 계시의 한 형태일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의 ‘시들지 아니하는’이란 헬라어로 ‘아마란트’라고 하는데, 이것은 시들지 아니하는 곳에서 온 단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은 ‘아마란트’로 만든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하늘에서 받을 것은 영원불멸의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것이 특징인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또한 하늘나라에서는 과연 ‘아마란트’로 된 면류관을 장로들만이 쓴다는 것입니까? 성경에 나타나 있는 문장 구조로 보아 이것은 단지 장로들에게 권면한 말씀이며, 이것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주어질 면류관으로 이해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신도들에게는 이 말씀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내용을 오늘날 교황에게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허구일 뿐입니다.
위의 내용대로 해석한다면, 결국 5대 면류관을 주장하는 자가 평신도라면, 그는 전혀 이 면류관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역시 영광의 면류관도 영광의 의미를 지상적 표현으로 그 의미를 알게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면류관이라는 모자를 쓸 이유도 없고, 또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장로(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맡기우신 양무리를 위하여 자원하여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며, 교권자가 되지 말고 본이된 자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자신을 장로로서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벧전 5:1). 따라서 목회자는 고난의 증인이 되어야 하며 결국은 하늘나라에서 영광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5. 썩지 않는 면류관
고린도전서 9:24-27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자제에 대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것과 다투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상 얻는 자가 하나임으로 그 상을 얻기 위해 달음질하라는 것은 이토록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절제의 문제인데, 그것은 승리하기를 다투는 자는 자제해야 할 것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은 운동 선수이든 아니든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는 모두 일종의 훈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승자에게 주는 솔잎이든 월계잎이든 이 모든 것은 시들거나 썩고 맙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늘나라의 면류관은 마르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썩지 아니할 면류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단지 지상에 있는 면류관과 대비하여 하늘나라의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일념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럼, 과연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이라는 모자를 쓰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단지 하늘나라의 영원불멸의 의미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지금까지 5대 면류관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표현된 의미를 이해했을 줄 압니다. 사실, 5대 면류관이라는 말은 터무니 없는 것입니다. 자랑의 면류관은 교인들의 신앙과 행위에 근거한 바울이 말한 면류관일 것입니다. “너희가 아니냐”가 바로 그런 증거입니다.
그 다음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그리고 썩지 않는 면류관은 각각 문장과 문맥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 하지만 면류관의 의의와 방법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자랑, 의 생명, 영광, 그리고 썩지 않음을 이 지상에서의 승리자에게 수여하는 면류관으로 그 의미를 다양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면류관에 대한 내용은 줄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면류관이 보다 더 선명하게 하늘나라에 있을 영화로움과 기쁨에 대한 다양한 표현으로 이해했다면 만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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