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건설구원 반대론 - 제2장 하늘나라와 상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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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충성하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큰상을 받을 것입니다. 상을 받기 위해 충성하십시오.”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려 합니다.
무책임하게 말하는 하늘나라 상급
앞장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인식들을 정리했습니다. 다소 여러분에게는 생ㅇ소한 것들도 있겠지만 성경이 증명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번장에서는 하늘나라의 무상급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한번 더 물어보겠습니다. 정말 하늘나라에가면 상급이 있다고 생각됩니까? 대부분이 상급이 있다고 생각할 줄 압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나는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때로 나는 강의시간에 이런 일로 인해 성경을 잘못 알고 있다고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이 언제부터 누구에게 이런 잘못된 내용을 배워왔는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비단 하늘나라에 대한 상급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잘못된 전통 관념이 뿌리 박혀 있는데, 이제는 하나하나 정리할 때가 온 줄 압니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하여 자주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그들은 거의가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잘못된 생각입니까! 교회에서 목회자들은 하늘나라의 상급을 구실로 성도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무책임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집사님, 하나님께 충성하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받습니다. 기도 많이 하십시오. 헌금 많이 하십시오.”
이런 식의 말은 교회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많이 하면 하늘나라에서 정말 큰 상을 받습니까? 헌금을 많이 하면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받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할 것입니다. 또한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교회에 바칠 것입니다.
마태복음 19:16-21에 보면 부자 청년의 재물에 대한 교훈이 나와 있습니다. 특히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산상보훈 가운데 마태복음 6:19-20에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은 모두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구절들입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문자해석을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현실에서 우리의 제물이나 소유를 안전한 하늘창고나 은행에 그대로 보관하거나 맡겨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영생에 대한 내용입니다. 계명을 다 지킨 부자에게 예수님은 온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소유를 다 팔아 가나나한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의미가 진정 이 땅의 보화가 그대로 하늘나라에 쌓인다는 것은 잘 못된 해석입니다. 단지 이것은 이 지상에서 예수를 좇는 자의 온전한 자격이 물질로 인하여 결정될 수 없다는 가치의 기준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 해석이 간단합니다. 그것은 21절에서 명확하게 해석의 실마리를 풀어줍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24절에서 다시 한정된 보충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행하게도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물직적 책임을 지겠다는 표현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 상급과 우리의 행위
만일 하늘나라에 상급이 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도 이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나는 신문에서 사회 각계의 인사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 중 3분의 2를 사회에 내어놓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지 않고 사호에 환원하여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녀들의 세대에서는 모두 무(無)로 인생을 출발하게 하여 평등을 심어주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는 혜택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아무런 상속도 받지 못하는 그러한 불평등을 막자는 의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목적은 후세대들에게 평등과 민주를 심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선천적으로 받은 지능이나 생물학적이고 생득적인 차이는 인정하지만 이것의 차이마저도 좁히려는 것이 바로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의 역할인 줄 압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후진국일수록 생물학적 생득적 차이가 많으며 빈부의 차이도 심했습니다. 어떤 나라는 귀족이나 소수 정치인들이 백성들을 무지하게 만들어 자신들의 국어조차도 모르게 하며, 수리 능력은 물론 고등 수학은 전혀 접근도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소수의 귀족이나 정치가들이 우민정치(愚民政治)를 하여 자신들만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 중의 하나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청년들에게 무상속의 계뭉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상속없이 무로 평등하게 출발하도록 하려는 사회 인사들에 대한 내용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적인 답변은 무의 평등보다 유(有)의 평등이 더 주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부모가 자녀에게 무보다 유의 보편적 평등을 통하여 부모의 권위와 자녀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젊은이들의 견해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빈부의 격차를 좁히고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잘 살기를 원합니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국민들이 중산층에 대한 호응이 높은 줄 압니다.
이 세상에서도 이런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는데, 하늘나라에서조차 상급을 인정한다면 이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인식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또 충분히 이해되어져야 할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있고 없는 차이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갈등을 가집니까? 우리는 이런 것 때문에 이웃과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죽이는 불행한 사태까지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이럴 정도로 불행한데 하늘나라에서까지 상급과 그 등차가 있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이며, 따라서 자연히 평화도 깨뜨려지고 말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상급과 이 세상의 재물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의 가가자 형편에 따라 그 상급이 좌우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상급은 이 땅위에서의 우리의 유무(有無)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보다 더 유리할 것입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않은 자보다 어떤 면으로든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께 드릴 것이니까요. 물론 가지지 않는 자가 가진 자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보편적이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나 행위로 하늘나라의 상급의 등차를 결정짓는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한번 잘 생각해봅시다. 한 교회 안에도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녀노소가 있고, 학벌과 출신도 다르며, 재산의 유무도 다르고, 가진 재능까지도 각자 다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보다 더 유리한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나치게 가진 자가 많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자가 비례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며, 가진 자의 소유만큼 못가진 자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 땅 위에서도 갖지 못한 자가 가진 자와 더불어 사는 것을 극복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하늘나라에서조차 상급의 등차가 있다면 그 얼마나 극복하기 어렵고 슬픈 일이겠습니까!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직분이 있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그리고 기관에 따라 다양한 직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 직분들이 정말 하늘나라에서 상급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됩니까? 목사가 장로보다 하늘나라의 상급에 더 유리하다면 모두 목사만 되려고 할 것입니다. 장로가 집사보다 하늘나라에서 더욱 유리하다면 모두 장로가 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유리하다고 하여 모두 목사가 된다든지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직분이 하늘나라의 상급을 좌우하지도 않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늘나라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상급은 전혀 없습니다. 교회의 직분에 대한 내용을 좀더 언급한다면 이해하는 데 퍽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권위직이 아닙니다. 게다가 인정을 받기 위한 직분도 아닙니다. 오늘날은 거의가 교회의 직분을 직능에 따른 기능면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주신 개인의 직능에 따른 기능에 의하여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합니다. 목사라고 해서 교회의 전부가 아니며, 주일학교 어린이라고 해서 하찮은 존재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격상의 가치적 등차가 아니라 단지 직능에 따른 기능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만일 교회의 직분으로 평가를 좌우한다면 하늘나라에서도 그대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요구할 것입니까? 지금 목사라고 해서 하늘나라에서도 목사입니까, 지금 장로라고 해서 하늘나라에서도 장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목사도, 장로도, 그리고 집사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원칙은 어느 누구나 평등한 기쁨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2:43-47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 교회의 생활 가운데 유무상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리라”.
위의 말씀에 대해서 공산주의 발상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그들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던 초대 교회의 진정한 평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내용에서 일부사람이 공산주의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이것은 신앙적 열정에서 출발했으나 공산주의는 정치적 이념에서 제정된 것이며, 둘째 이것은 내적이며 자발적인 것이나 공산주의는 외적이며 강제적이며, 셋째 이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며 이를 위해 많은 순교를 했으나 공산주의는 사람을 죽이고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자는 다같이 붉은피로 상징되고 종국적 복락을 주장하나(천년왕국과 공상왕국),그방법과 양태는 극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평등생활은 순수한 신앙에서 출발한 자연 발생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표현적이나마 그 내용적으로도 잘못되었습나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일시적 현상이었으며,
공산생활이 아니라 있는자 와 없는 자의 무조건적인 나눔이었습니다.
이같은 발상의 원인은 사도들의 기사와 표적에 있었고, 이러한 내용의 목적은 성경 그대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데 있으며, 집에서는 떡을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공산주의가 아니라 성전과 집에서 신앙을 잘할 수 있는 하나의 방도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유무상통을 동한 평등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켰다는 일면을 엿볼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J.B.Scott(커버넌트 구약학 교수)의 말을 인용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하여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물건들을 팔았습니다. 갑자기 그들은 복음이 그들의 신앙고백에서만이 아니라 생활방식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를 주었음을 깨닫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교회 역사를 통해 꾸준히 지속되지 못한 것은 그 사람들의 실패가 아니라 후대의 덜 헌신된 교회 지체들의 실패였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모습은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룰 보면 잘 알 수 있으며, 그들의 적극적인 신앙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평균에 대한 교훈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는 너희의 유연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연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자도 있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라 (고후8:13-15)
바울은 마게도냐와 헬라지방의 교회에서 나타났던 유모의 고려에 대한 정신을 고리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평균이란 영어 equal(헬라어로는 이소스)
에서 유래된 말인데, 여기서는 equality(이소테스), 즉 동등, 평등, 공평이란 의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과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골 4:1)
여기서도 바울은 공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전의 윤리은 의와 공평입니다. 이것은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볼 때 공동체의 기본 강령이기도 합니다. 의와 공평만니 사회와 국가를 번영하게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퇴폐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공평은 어렵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늘나라에서만 이루어질 표현상 우리의 상급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8:14에서 말한 평균의 의미는 바로 裕(유)餘(여)와 부족의 공평입니다.
성경에는 이 외에도 빈부간의 서로 도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평등이나 평균, 그리고 공평이라는 말을 단지 물질적 입장에서 언급한 것 같으나 사실은 모든 입장에서 언급한 것 같으나 사실은 모든 입장에서 이해되는 평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삶도 평균을 원하는데,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있다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오해인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상급에 대하여 판단을 할 것입니까? 어느 교회에 믿음생활이 충실한 두 사람의 장로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모두가 하나님과 교회앞에 신실하며, 어느 한 부분도 차이가 없이 동질의 평균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단지 한 가지 문제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K라는 장로는 세상에 소문이 날 정도로 부자라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며, 다른 사람인 L장로는 그와는 반대로 너무나 가난한 사람이라 물질적인 교회 봉사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물질을 많이 소유한 K장로가 가난한 L 장로보다 교회의 봉사나 사회에 공을 더 많이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달란트 비유를 들어서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고 적은 것으로도 큰 충성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이러한 물질 불평등이 하늘나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깨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두 장로 중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K장로입니까, 아니면 L장로입니까? 혹자는 그것에 무슨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물질이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보다 선행할 기회가 많을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예가 하늘나라의 상급에는 부당한 것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예를 전제로
한 것은 두 사람 모두 하나님과 교회 앞에 신실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물질의 부유와 빈곤에 따라 하늘나라에서 상급의 등차가 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현세대와 오는 세대의 상황을 고리로 연결지어 인간 자신의 어떤 소유나 선천적인 우월성이 그대로 오는 세대에 반영된다면 이것은 마치 이교도들의 신앙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교도들 가운데 불교를 믿는 자들은 현세의 삶을 통하여 전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으며 내세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기차 여행중 우연히 어느 여승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왜 중이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에 입각하여 현재 자신이 중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생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또 내생에 어떤 사람으로 환생하여 살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자선과 생의 행적에 따라 어떤 사람이 될 수 잇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만일 기독교의 대세의 진리가 인간의 현실적 공로에 좌우된다면 불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상급에 대한 어원을 생각해봅시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상(reward)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오고, 상급이란 단어는 4번 나옵니다. 특히 바울서신에서 이 말은 기독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설명하기 위하여 원형 경기장이나 투기장의 도보 경기에서 인용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성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 전서 9:24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짓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고 얻도록 이와 샅이 달음질하라”고 하며, 빌립보서3:14에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고 있습니다.
상(브라베이온)운 골로새서 3:15의 “주장하게 하라”인 ‘브라베네토’(let rule)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고전서 9:24에서 말하는 살은 문자 그대로 도보경기의 생생한 표현에 사용되고 있으며, 빌립보서 3:14에서는 다름 비유형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9:24의 상은 무엇입니까? 먼저 이것이 하늘의 문제입니까, 이니면 이땅의 문제입니까? 이것을 하늘의 상으로 해석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자 그대로 생각한다면 하늘에서 상을 얻는자가 하나뿐일 것이며, 이 상이 하늘의 구원에 관한 것이라면 구원을 얻을 자도 하나뿐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상은 운동선수들이 달음질하여 상을 얻는 것처럼 노력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다음 빌립보서3:14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향하여 좇아갑니까? 분명 “푯대를 향하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푯대는 상 자체는 아니지만 경기의 결승점으로서 상을 받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주석가들에 의하면 “우에서 부른 부름”을 상에 대한 동등소유격으로 보고 있으며, 이것을 우리가 그대로 인정한다면 상의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늘나라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오직 한일”(빌 3:13)은 가문의 자랑이나 종교적 지위, 학식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것들을 해롭게 여기면서 그의 참된 목적에만 전력을 다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붙들린 바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리심의 소망이며 하나님이 그를 부를 경주의 상인 것입니다.
바울의 달음질 경주에 대한 비유는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노력에 의한 성공이 상을 받는 조건이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공로, 즉 인간의 공로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의 집중을 강조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상
구약성경 가운데에는 주로 전도서나 잠언에서 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상급이라는 단어는 다니엘 5:17, 창세기 15:1, 시편 127:3, 사 40:10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전도서 4:99:5, 잠언 11:18에서 상은 구약 히브리어로 ‘사카르’이며, 잠언 13:13에 나타난 의미는 히브리어로 ‘슈브’입니다.
먼저 전도서 4:9에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이요”는 단편적으로 둘의 합심에 대한 좋은 결과를 말하며, 전도서 9:5에서 “무릇 산 자 죽을 줄을 알되 죽은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는 죽음에 대한 무의미를 상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11:18에서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는 악과 의에 대한 반의대구적 의미에서 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아울러 잠언 13:13에서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는 것은 계명에 대한 멸시와 두려움에 대한 엄청난 결과를 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상에 대한 언급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하늘나라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땅의 문제입니까? 이제는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식견을가졌으리라라 믿고 대답을 줄이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상
고린도전서 9:24에서 사도 바울이 상에 대한 문제를 언급했고, 골로세서 3:24에서도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상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인 25절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하고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 이전에 먼저 23절의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위의 말씀들은 인간 윤리로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오해를 해서 하늘나라에서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것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크리스천인 종이 그 상전에게 주께하듯 충실하게 한다면 그대로 유업의 상을 받을 조건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그 이외의 의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는 종이 잘못할 때에 받을 형벌을 말합니다. 이 말씀 은 상선벌악의 양면성을 대조하여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살고있는 자들에게 주는 윤리적 강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 10:35).
이 말씀도 역시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19-39에서는 믿음의 전진에 힘써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34절을 보면 앞절에 이어 “너희가 갇힌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담대함을 가진 자는 큰 상을 얻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5에 있는 이것은 ‘미스도스’(임금, 급료, 보응)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큰 상”이란 39절의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란 구원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므으로 요한2서 1:8을 봅시다.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역시 이것도 복음전파에 따른 내용으로서 그리스도의 육체의 임하심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이 상이란 말은 헬라어로 ‘미스도스’로서, 구원의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외에도 요한계시록 11:18을 보면 “이방인들이 분노하메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로소이다 하더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방의 분노가 하나님의 진노가 부딪치는 최후 결전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나타난 상은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라는 내용으로 보아 모든 죽은 자들이 흰 보좌 앞에 블리어 최종 심판을 받게 되는 것으로 심판대에서 있을 일입니다.
여기에서 상 받을 자들과 멸망받을 자들은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그리고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며, 멸망을 받을 자들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주석을 보면 언급해서는 안될 내용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선지자들, 성도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두고 세 가지로 신급의 등차를 두어 말합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 여기 세 가지로 신급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성도들 중에서 다시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들, 둘째는 성도, 즉 성결된 생활을 한 자들, 그리고 셋째는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평신도들, 대소는 귀족급의 상류계급과 노예급의 하류계급을 가리킨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심판 때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서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심판 때의 행위보응은 인정하지만 이 지상세계의 선지자, 성도, 그리고 평신도라 하여 계급을 따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무론대소”에서의 “대소”가 상하류 계급을 가리킨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물론대소”는 우리말로 ‘크거나 작거나’(To the small and to the greate), 즉 ‘어느 누구나 논할 것없이’라는 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에 나타난 상의 문제를 요한계시록 21:1-4; 22:3-5과 동일하게 보고 있는데,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심판 때에 있을 일이고, 요한계시록 21:1-4이나 22:3-5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 이후 영원한 하늘나라의 문제로서 둘은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22:12은 이 계시록의 결론 부분으로서 22:1-5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상은 그리스도가 속히 오실 내요으로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는 이 내용과 일관하여 구약(욥 34:11, 사 40:10 등)을 인용하지만, 이것은 현세적 보응과 심판 때의 보응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는 말씀은 무엇을 갚아주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죄사함을 받는, 즉 죄의 용서를 받게 한다는 것이며 각 사람이 엄중히 심판을 받는 종말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약성경에 기록된 상에 대하여 알아 보았는데, 대부분 최종 심판 심판의 날에 있을 구원에 대한 의미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줄 압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상급의 등차를 인식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상이란 칭찬과 저주의 구별인 것이며, 칭찬받을 자들의 칭찬은 우리가 상세히 알지 않아도 될 문제입니다.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다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의 상의 의미
산상보훈의 복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내용을 팔복이라고 합니다. 먼저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과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조건들 뿐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하나님이 왜 불가능한 조건을 내세워 복을 주실 것인가를 의심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먼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복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가 심령이 가난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심령이 가난할 수 있는 근본이 있단 말합니까?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은 똑같이 욕심이 많아서 많이 가지기를 원합니다. 옛날 사람이라고 하여 욕심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단지 욕심의 표현방법만 다를 뿐이지 욕심의 근본은 지금과 동일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성경구절을 암송하거나 설교 본문으로 읽을 때에 마치 우리의 심령이 텅빈 가난한 자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흔히 이 팔복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반부는 자기 완성의 길이며, 후반부는 남을 위한 봉사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는 스스로 자기 완성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까? 이 역시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남을 위한 봉사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가난한 자”란 아주 적은 수입을 가지는 자로서 거지로 방도 좋을 듯하며,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가난한 자를 천대시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한 대중을 구원하실 계획이셨고, 당시 사회의 복의 개념은 다분히 외적이며 물질적이었음도 여러 주석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의 가난을 통한 하늘나라 소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를 놓고 볼 때 예수의 재물에 대한 교훈은 거의 3분의 1이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재물이나 소유에 대한 말씀을 복음서의 전체 맥락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강단 메시지의 내용은 재물의 선용에 관한 것이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하늘나라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장담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이 본무을 읽으면서 ‘심령이 가능한 자’가 된다는 것은 저 하늘나라의 문제이지 우리의 해결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소극적이며 부정적입니까? 그런 생각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그 착각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성자들의 욕심을 아십니까?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성경 말씀을 그대로 빌린다면 성자들은 욕심 때문에 하늘나라르 소유할 수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복의 내용이 조건적으로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 마음이 청결, 화평, 그리고 의를 위한 핍박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역시 우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하늘나라를 소유할 만큼 우리 스스로가 감당할 능력은 없습니다.
이런한 내용과 비슷한 것으로서 고린도전서 13:4-7의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룬 말씀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 대한 성경구절을 즐겨 암송도 하며 또 곡을 붙여 노래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특히, 고린도전서 13:3에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로도 구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수도 없습니다만 만일 내어 준다할지라도 우리에겐 사랑이 부족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나타난 사랑에 대한 본질은 우리로선 감히 흉내도 낼 수 없을 것이빈다. 아니라구요? 그렇다면 성경을 다시 봅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정말 우리는 사랑하는 일에 오래 참습니까?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불쾌함이나 노여움을 얼마나 참습니까 물론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당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시대마다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각자 ‘오래 참음’의 실패를 경험했을 줄 압니다. 따라서 ‘오래 참은’의 근본적ㄱ인 의미는 범죄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줄 압니다.
그 다음 “사랑은 온유하며”입니다. 이 온유는 ‘오래 참음’과 관계가 있는 실천적인 선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움으로 다른 사람을 감싼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친절한 행동을 말합니다.
그 다음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입니다. 이 투기는 작의 우월성으로 남을 증오하고 형편없이 낮추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인데, 이것은 앞의 내용과 관계가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은 볼 수 없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약간만 잘 되어도 크게 자랑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리고 “교만하지 아니하며”입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만은 속옷과 같습니다. 교만의 속옷을 한번 입기만 하면 벗을 수 없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겉옷은 쉽게 벗을 수 있어도 속옷은 부끄러워 쉽게 벗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다음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입니다. 앞에서 투기하는 자, 자랑하는 자, 그리고 교만한 자는 필경 무례히 행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정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합시다. 한 사람이 자주 거짓말을 하여 신뢰도 없고 책임감도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랑은 모두 헛소리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무례한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다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입니다. 우리는 성내기를 쉽게 합니다. 정말 성내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기도를 강조합니다.
“여러분,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새벽 기도회에 나오십시오. 철야 기도회에 나오십시오. 가정 기도를 하십시오.”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열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차라리 한 번 성내지 마십시오.”
우리는 기도의 양을 맘껏 채워 놓고도 한 번 성을 냄으로 그 기도가 무효로 돌아가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받은 해나 악에 대하여 두고 두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생각해서 안될 것은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악에 대해서는 말입니다.
그 다음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입니다. 이것은 반의대구로서 기뻐해야 할 가치는 진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불의를 기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2).
또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 3:3-4)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것들로 미루어 볼 때 진리는 기쁨과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입니다. 자,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찬양을 들으며 기뻐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읭 사랑의 실천은 너무나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 되기를 원하나 어렵기 때문에 이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산상보훈의 팔복을 생각해봅시다. 특히, 마태복음 5:11-12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상에 대한 것입니다. 흔히 이 세상에서 예수의 복음을 위해 순교를 당한 자들에게 큰 상이 있을 것이며, 적당하게 믿다가 죽은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과 상이 적다는 것을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웃지 못할 해석상의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욕, 핍박, 그리고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하늘에서 너희상이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요건은 믿음이며, 거기에서 상을 받는 것은 행함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핍박을 통해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며, 앞서 선지자들의 이러한 내용도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상의 표현원리일 뿐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힘과 능력은 인간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아니면 절대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 때 이루어질 심판의 의미로서 이 상의 개념은 종결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의 생활
마태복음 6:1-18을 봅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희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1-4).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과 비교하여 보면 구제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을 알 수 있습니다.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에서 이 의(rightousness)를 어떤 번역성경에서는 구제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거나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얻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의와 구제행위에 나팔을 분다면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외식하는 자들이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회당이나 거리에서 구제를 하며 떠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제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하듯 은밀히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거나, 자랑하거나 나팔을 붊으로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으로 간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제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설정하는 것이 마땅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팔을 불지 마라”는 것은 그 당대에 유대인 사회의 실제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구제를 하기 위하여 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인정되지만 현실적 우리에게는 자신의 구제를 알리기 위해 자랑을 하거나 떠들지 말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주의하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안에서 구제하는 데 마음을 쏟으며 더 많은 것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진리가 시대와 문화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큰 모순일 것입니다.
오늘날은 T.V, 라디오,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 등의 매스컴을 통해 얼마든지 객관적으로 나팔을 불 수도 있겠으나, 위의 말씀의 취지는 구제하는 개인이나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교계신문을 통해 선교를 위한 교회 홍보 또는 농어촌 교회를 돕겠다며 서류 제출을 요구하는 도시 교회들을 봅니다. 이를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외식이나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과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의하라”, 그리고 “상을 얻지 못하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가운데에서 종종 이런 문제를 두고 어려움을 당합니다. 아무리 교회 헌금이나 개인의 구제를 감춰두려고 해도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개인이 헌금을 많이 하며 구제를 한다는 것은 어느 교회에나 있을 수 있으나 그 본인이 은밀히 하기를 노력해야 할 것이며, 둘째는 주변이 그런 행위를 침묵해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위의 말씀에서 “상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자로서 자기 의의 행위를 나타내 보임으로 스스로 상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에게는 곤고만 있을 뿐입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는 나팔을 붊으로 보상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상을 얻지 못하리라”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에서, 외식을 하지 않거나 나팔을 불지 않았다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이라는 추측은 잘못된 것입니다. 단지 이 말씀도 사람 사이에서 주어진 내용도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으신다고 한 말씀에서 잘 이해가 될 줄 압니다.
의와 구제에 대해 오시?하거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힘쓰지 마십시오.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핫비시오. 이말은 정말 왼손이 모른단 말입니까? 이것은 그만큼 은밀해야 할 구제에 대한 과장표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어떻게 갚아주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갚아주신단 말입니까? 우리는 상에 대한 기대감도 필요없습니다. 상을 근거로 한다면 은밀한 의나 구제는 은밀한 그것으로 이미 심령에 최대의 상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저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증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5-8)
앞에서 언급했듯이 구제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만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밀하게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 위의 말씀을 보면 기도는 은밀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하는데도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정규적인 기도의 장소를 회당을 정했습니다(행 3:1, 눅 18:9-14). 이것은 포로기를 전후로 하여 하루 세 번씩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단6:10, 행10:9). 그래서 기도하는 시간에 외출중이면 길에서도 기도를 했으며, 나중엔 이것이 형식이 되어 오히려 외출하여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를 보고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그렇지 못합니다.
나는 오래 전에 선배 목사님께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부흥에 꼭 필요한 것으로써 새벽기도회 때 성도들보다 30분 먼저 교회에 나와 강단에 무릎을 꿇고 가끔 주여! 주여!라고 외치기만 해도 새벽기도회 때 나오는 성도들은 감동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아, 우리 목사님은 밤새도록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구나. 정말 기도를 많이 하셔. 새벽마다 교회에 가면 밤새도록 기도하고 계신다고.”
이렇게 성도들이 칭찬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30분 먼저 나왔는데 성도들은 밤새도록 기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골방만이 유효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은밀한 기도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지 못할 때 “저희는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상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곧바로 보상의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새벽 기도회에 나갔으니 보상이 있을 것이다. 밤새 철야 기도를 했으니 큰 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기대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보상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닙니다. 30분 기도한 어떤 성도가 30분 기도한 것만큼 무엇을 기대한다면, 그리고 보상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정말 할 만할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여 누구나 그만큼의 보상을 받을 거이며, 아예 하루종일 기도만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기도를 많이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한 만큼 기대에 찬 응답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한 만큼 응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응답이 없다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늘 기도에 대한 강조의 말을 들어왔습니다.
“기도 많이 하십시오. 기도는 만능입니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참된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기도는 은밀하게 하는 것이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해서 교회에 엎드려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기도를 하는데 형식적으로 하는 이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시간 메꾸기, 기도 바톤받기, 그리고 하루 24시간 중 시간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고 하여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목적대로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신다고 믿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여 그것이 자랑이 되고 뽐낸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며,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상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 땅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까? 여기에 나타나 있는 상이란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기도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현실적인 상도 아닙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흔히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 합니다. 또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호흡한다고 하여 하나님께 호흡의 대가를 지불해 달라고 한다는 것은 정말 모순입니다. 호흡하는 자는 호흡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을 이미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하여 그 대화의 대가로서 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날강도와 같은 생각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바라는 상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모두 호흡할 것이며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흡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방법을 제시하신 주님의 말씀을 차치하더라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개는 기도를 너무 잘해, 조금도 막힘이 없이 술술 기도하잖아.”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기도와 상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관계할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기도로 끝나야 하는 것이지 상과 연관시켜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 금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6:16-18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마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면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신앙자라면 대부분이 금식을 한번 정도는 했을 줄 압니다. 따라서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운지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정도로 사람에게 내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금식에 대한 성경적 역사를 살펴보면, 개인적인 것(창37:34, 삼상 31:13, 삼하 1:12; 12:21), 국가적인 것(느1:4), 슬픔의 표시(마9:14-15), 죄의 회개(fp16:29-31, 시35:13; 69:10, 단 9:3) 등이 있으며, 모세시대는 율법으로 속죄일에 금식했고, 포로기 이후 국가 수난의 기념으로 일년에 네 번씩 금식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목요일과 월요일에 금식으 했습니다.
위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금식에 대한 불필요나 금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릇된 금식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금식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므로 동정과 칭찬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에 대하여 함께 공부했는데, 이것들이 외식이라면 저희는 이미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구제는 다른 사람에게, 기도는 하나님께, 그리고 금식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모두 “사람에게 보이려고”(마6:1, 5, 16) 함으로 무효가 된다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은밀”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6:4, 6, 18). 이 말씀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은밀한 중에”라는 두 말씀은 서로 상반관계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상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강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 없는 하늘 나라의 상
지금까지 마치 캄캄한 동굴을 지나온 듯한 기분입니다. 아니, 지금도 캄캄한 동물에 있는 느낌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제껏 하늘나라의 목적이 상급에 있다는 것을 아무런 부담과 고민도 없이 들어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캄캄한 동물에서 헤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광명한 세계가 전개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할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5:41을 보면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성경구절의 해석을 막연하게 하는 자들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앞절을 보면,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 구절의 전후 관계를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지상에서 복음에 충실하고 합당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해의 영광에 거하게 되고 주님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보다 낮은 등급의 영광을 받게 될 것“ 이라고 합니다.
단지 이 말씀은 부활된 몸이 현재의 몸과 다른 것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35절은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인데 첫째 어떻게 살며, 둘째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입니다. 첫째 물음에 대한 답변은 ‘뿌리는 씨’의 비유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활의 구체적인 방법을 알 길이 없습니다. 현대 과학이나 생물학 그리고 생기론 같은 것으로는 부활과 생명을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바울의 첫째 물음을 씨뿌림의 비유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력의 의미를 말해주려 할 뿐입니다.
씨뿌림을 통하여 부활을 설명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실적 입장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씨를 뿌려 그것이 자라나서 열매를 거두는 것은 파종과 성장 그리고 번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지 부활의 실체를 설명한다고는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body)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seed)뿐이로되 하나님의 그 뜻대로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형체를 주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갱이입니다.
바울의 설명도 과학적이지만 자연법의 설명은 아닙니다. 부활의 의미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씨앗의 생명력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으로 부활을 설득은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둘째 질문인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가 문제입니다. 40절에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라고 하며, 이어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그리고 별과 달의 영광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부활 때 각자의 부활체에 등급이 있다는 것입니까? 정말, 해석상의 어려운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고 하여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단지 여기에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행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그리고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등치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평신도들은 부활 후 성도들에게 영예와 영광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에서 이런 차이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바울은 부활 후 성도들이 각자 그들의 상태로부터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육체와 죽은 성도들의 육체가 마지막에 받을 육체와 어떻게 다를 것인가에 대하여 논한 것입니다.
칼빈의 말을 빌린다면 가장 정확한 해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칼빈은 부활의 직유를 사용함으로 어떤 모순되는 암시를 바울이 제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해와 달과 별의 광채와 영예가 각각 다르다고 하여 이것이 부활 때에 각자의 차이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육신이 어떤 질적 변화를 가질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 때에 우리가 서로 질적인 차이가 있다면 현재 각자의 삶의 질적 차이가 그대로 반영된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42-44절을 보더라도 이원론적 차이를 문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유고가 신령한 몸의 차이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게 하려면 다음 성경을 연결하여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을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하늘나라의 근본 의미
하늘나라, 우리는 이것을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만족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외에 다른 무엇을 요구한다면, 마치 이것은 경기자가 일등의 의미보다 부수적인 상품, 즉 부상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도 더한 것이빈다.
우리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에 더 집착합니다. 너무 인간 본위적인 것은 구원 외에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얼마나 칭찬 받을 것이 있어 행위 보상을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감동이나 기쁨을 글자 그대로 상상합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가치성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우선이냐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이냐 라는 것은 잘못 생각하면 모순인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기에다 상급까지 부가하여 마치 상급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지금까지 교육받아 왔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만약 하늘나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곳은 이미 하늘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강합니다. 하늘나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지안적 세계를 상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하늘나라의 그 실상을 먼저 지안적으로 상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며, 하늘나라는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하늘나라의 가치를 따집니까?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기 때문입니까,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기 때문입니까, 그 성곽이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이 정금이며 유리같기 때문입니까, 열두 기초석의 보석이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그리고 자정이기 때문입니까?
하늘나라의 가치 기준을 사도요한이 본 보석으로 정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보석들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돌만큼 쌓여 있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이 하늘나라이며 그 하늘나라의 가치 기준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성도들에게 행위대로 상들 주는 곳이 아니며 그 가치가 우선이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참된 가치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입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지리적 하늘나라를 전제로하여 지옥에 가 계신다면 곧 그곳이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상급이나 하늘나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나라이며,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사는 곳이 곧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인간 본위의 하늘나라를 꿈꾸며 생각한다면 아직도 우리의 교회는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뭔가 영양이 없는 약간의 조미료에 매력을 느끼는 것뿐입니다. 조미료는 음식의 맛을 돋구는 것뿐이지 음식 자체가 아니며, 우리의 주식과 영양이 될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상급이나 하늘나라의 화려함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도구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지난 88올림픽 때 쿠웨이트에서 온 두 사람의 유고선 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델과 히삼이었습니다. 아브델은 미혼이고 히삼은 결혼을 했다고 자신들을 소개했습니다. 이들은 공군 장교로서 비행기 조종사들이었습니다.
히삼이 말하기를, 쿠웨이트에는 이슬람교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매일 예수. 예수, 예수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예수이고 저 세상에서도 예수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제2장의 내용은 퍽 복잡하고 지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을 찾아보면 확실하게 하늘나라의 무상급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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