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같이 빛나리 - 제10,11,12,13장
제10장
위로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
1. 형무소의 철문이 열리던 날
1945년 8월 15일 정오.
산 신이라고 자처하던 일본 천황 히로히또의 울음섞인 육성이 라디오를 통하여 들려왔다. 그 음성은 신의 음성도 영웅의 음성도 아니었다.
너무나 처량한 음성이 전파를 타고 흘러 나왔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대하여 비상한 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이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이른다. 짐은 대 일본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 국가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히로히또 천황은 울고 있었다. 그렇게 서슬이 푸르던 일본인들이 이 방송을 듣는 순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반면 잠잠하던 조선 천지에는 노도같은 태풍이 일고 있었다.
“해방이다!”
“대한 독립 만세!”
이 광풍은 평양 형무소 내에도 몰아쳐 왔다.
“전쟁이 끝났다!”
“일본이 패전했다!”
“해방이다. 자유다!”
주 목사의 얼굴에 감격의 눈물이 번졌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쓸모없는 죄인을 어찌하여 살려 주십니까?”
누가 시작했는지 찬송이 흘러 나온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던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 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찬송은 합창이 되어 온 감옥 안을 메운다.
주 목사도 일어나 창살을 두 손으로 움켜 잡았다. 소리 높여 찬송을 불렀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이 감방에 들어온지 어언 6년.
함께 들어왔던 동지들 가운데 세상을 떠난 분이 있음이 기억났다.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박광순 장로, 최권능 목사, 쟁쟁한 신앙의 용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주 목사의 안막을 스쳐 지나간다.
“보아라 광야에 화초가 피고
말랐던 시냇물 흘러오네
이 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려
주 예수 은총을 찬송하네.“
주 목사는 창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순교자들의 못다한 이들을 나가서 힘껏 하고, 기회가 오면 자신도 순교 할 것을 굳게 마음 먹었다.
“땅들아 바다야 많은 섬들아
찬양을 주님께 드리어라
싸움과 죄악의 참혹한 땅을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네.“
이제 푸른 하늘을 보게 된다.
태양이 작열하는 거리를 힘차게 걸어보고 싶다. 땀이 흘러도 좋다. 묶이지 아니한 자유로운 몸으로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
“대한 독립 만세!”
이곳 저곳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날 밤은 감방안에 쌀과 보리쌀로 만들어진 주먹밥이 고기국과 함께 배달되었다. 큰 주먹밥을 받아 쥔 수인들의 얼굴은 흥분되어 있었다. 다른 감방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내보내지 않고 뭐하는 거야!”
“감방 문을 열어라.”
풀이 죽은 간수들이 나와,
“조용히 하십시오. 상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참아 주십시오.”
하고 변명하였다.
“뭐야! 해방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상부의 지시야?”
“질서를 지켜 주십시오.”간수들은 심히 떨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수인들이 몰려나와 보복을 할까봐 겁을 내는 것이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렇게 도도하던 간수들의 태도가 서리맞은 상치처럼 시들어져 있었다. 하루 순간에 세상이 이렇게 바뀌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이렇게 오묘하였다.
8월 16일, 조선건국 준비위원회 안재홍씨는 경성 중앙방송을 통하여 건국준비와 지방조직을 호소하였다.
전국 형무소의 정치법·사상범, 경제범을 일제히 석방시키도록 지시가 내렸으며, 곳곳의 옥문이 열렸다. 그러나 평양 형무소의 문은 열려지지 않았다.
8월 17일. 평남 건국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위원 약 20명 중 좌익계는 2명 뿐이었다.
위원장은 조만식 장로였다.
일본 당국은 조만식 장로에게 임시 행정권을 인수하였다. 그리하여 북한 각지에서는 건국 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자치대, 치안유지위원회 등 각종 명칭의 자발적 조직이 발족되기 시작하였다.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회가 조직되고, 따라서 북한지방 각지에 공산조직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날 밤 11시경. 평양 형무소의 감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밤에 감방 문이 열려진 것은 형무소 담당자들의 공포심 때문이었다.
수인들이 형무소장이나 과장, 부장, 간수들에게 혹 행패를 부릴까봐 겁을 내어 이렇게 밤을 이용한 것이다.
밤11시는 조용하였다. 이미 형무소 책임 간부들은 다 귀가하고 간수 몇만 남아서 이 일을 시행하였다.
간수들 중에도 지독히 굴던 일본 간수나 한국인 간수들은 다 숨어버렸다. 좀 후하게 대하던 한국인 간수 몇 사람이 이 일을 맡았는데, 그들도 떨리는 손으로 감방문을 열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자, 질서있게 따라 나오십시오. 형무소 철문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공손한 말투였다. 수인들은 어두침침한 복도를 걸어 나왔다.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손에는 수갑이 없었다.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누가 감히 그들의 손에 수갑을 채운단 말인가?
수인들은 각각 자기의 손목을 한 번 더 어루만져 보는 것이었다. 뼈만 앙상한 손목, 까실 까실한 촉감이 전신을 짜릿하게 흐른다.
간수를 따라 밖으로 나오는 성도들의 발걸음은 비틀 비틀 하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희미한 전등불에 비친 여위어 뼈만 앙상한 얼굴들이지만 그 얼굴들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꽃구름처럼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긴 것이었다. 믿음이 이긴 것이었다. 승리자의 가슴에는 기쁨이 치솟기 마련이다.
“목사님!”
“주 목사는 소리나는 쪽을 보았다. 이기선 목사였다.
“살아 계셨군요.”
손을 잡았다. 뜨거운 피가 손바닥에 모여 들었다.
그때, 걸어나오는 한상동 목사를 보았다.
“한 목사님!”
주 목사와 이기선 목사도 동시에 한 목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경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듯 여윈 얼굴에 무거운 미소를 보이는 한 목사, 감격의 눈물이 이들의 앙상한 양볼을 주르르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반가웠다. 천국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천국이 아닌 지상에서 자유로운 몸으로 다시 만나 손과 손을 마주 잡다니 꿈만 같았다.
모두들 철문쪽으로 발을 옮겼다. 이곳 저곳에서 아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철문은 닫겨 있었다. 철문 밖에는 이미 소식을 들은 성도들이 옥중 성도들의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옥문 밖 성도들은 옥중 성도들의 모습이 나타나자,
“대한 독립 만세!”
하고 소리를 외쳤다. 옥문 밖 성도들이 애국가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그들은 흥분되어 있었다. 애국가를 부르는 성도들의 얼굴은 환희에 차 있었다.
다시 찬송이 울려 퍼졌다.
“예수의 이름 권세요 엎디세 천사들,
금 면류관으로 드리고 만유의 주 삼세
금 면류관을 드리고 만유의 주 삼세.
찬송을 부르는 순간 옥문이 열렸다. 밖에는 여러 대의 인력거가 준비되어 있었다. 옥중 성도들은 인력거에 올라탔다.
시가행진이 계속되는 것이었다.
“주께서 당한 고생을 못잊을 죄인아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삼세
네 귀한 보배 바쳐서 만유의 주 삼세.“
인력거 앞 뒤에 줄을 서서 걸어가는 성도들의 행렬.
개선장군을 앞세운 시민들의 행렬 같았다. 신아의 개선장군들을 환영하는 하늘 시민들의 거대한 행렬이다.
“이 지구상에 있는 이 온지파 족속들
장하신 위엄높이어 만유의 주삼세
장하신 위엄높이어 만유의 주삼세.“
어두운 창공으로 찬송소리는 울려 퍼졌다.
일행은 안이숙 선생댁으로 갔다. 안이숙 선생댁은 모친이 거처하는 집이었다. 그 집은 남의 집인데, 안 선생 모친이 세들어 있었다.
집 주인이 옥중 성도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큰 집을 임시 사용하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옥중 성도들은 이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마루에 음식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옥중 성도들을 위하여 안이숙 선생 모친이 여러 성도들의 도움으로 이 상을 마려한 것이다.
처음, 감옥으로 들어간 성도들은 36명이었다. 그러나 7년 가까운 세월에 태반이 순교를 하고, 병보석으로 나간 분도 있고 하여 이 밤, 이곳에 온 옥중 성도는 모두 14명 뿐이었다.
식사를 하였다. 오랫동안 굶고, 영양가 없는 음식으로 창자를 괴롭혀 왔는데 갑자기 고기국과 쌀밥이 들어가니 창자가 견디지 못하는지 음식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모두들 몇 술을 입에 떠 넣다가 그만 두는 것이었다.
이때 어떤 여인의 빠른 목소리가 있었다.
“수도에서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모두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물통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쏴쏴 들렸다.
평양시내 수돗물이 몇 달 동안 나오지 않아 먼 곳까지 물을 길러 다녔었다. 그렇게 귀한 물이 옥중 성도들의 출옥과 함께 이 밤에 물이 터진 것이다.
“기적이다!”
부인들의 떠드는 소리가 났다.
식사상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서 예배가 시작되었다. 감격과 눈물의 기도가 흐르고 찬송을 부르는 성도들의 가슴이 뜨거움으로 은혜가 넘쳤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성도들은 헤어질 줄 모르고 옥중 성도들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옥중 성도들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들은 옥문 밖의 성도들에게 은혜와 감격을 불러 일으켜 주었으며, 이런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밤은 깊어갔다.
2. 평양 산정현 교회 집회
다음날, 옥중 성도들은 산정현 교회로 갔다. 교회당에는 이미 많은 성도들이 모여 있었다.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기선 목사가 인도하였고, 밤엔 한상동 목사가 섰다.
부흥회가 시작 된 것이다. 다음 날은 주 목사가 인도하였다. 곳곳에서 모여온 성도들이 교회당을 메웠으며 은혜가 넘쳤다. 인도하는 목사들은 한결같이 건강이 좋지 못했다. 굶주렸던 뱃속에 쌀밥과 고기국이 들어가 놓으니 위장이 말이 아니었다. 일주일을 그들은 변소길에 다니느라고 분주하였다.
그러나 속 사람은 살아 있기에, 설 때마다 은혜의 단비가 쏟아졌으며, 주 목사는 ‘신앙의 조상들’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앙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다.
아브라함의 순종과 이삭의 헌신과 야곱의 투쟁이었다. 경상도 사투리의 강한 액센트, 그의 음성은 철성이었다. 깐깐하게 흐른다.
사실 설교는 말만이 아니고 생활이 겹쳐서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말씀으로만 움직이는 주 목사의 설교는 그를 아는 사람일수록 더욱 은혜를 받는다.
같은 출옥성도인 손명복 목사는 당시의 주 목사 설교를 상기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지요. 나는 그때 주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대로의 설교를 하나 작성하였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가장 힘있게 강조한 것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고 착하게 주님의 뜻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산정현 교회는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였다. 주기철 목사가 이 교회를 시무하다가 검속되어 형무소로 들어갔고, 해방 1년 4개월을 앞두고 주 목사는 순교하였다. 그동안 이 교회는 비어 있었다.
조국 해방과 함께 출옥 성도들이 이곳에 모여 집회를 계속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밤낮으로 집회는 계속되었다. 눈물의 바다요, 은혜의 강이 하늘로서 내렸다.
3. 거창읍 교회로의 이동
해방이 되자, 이X형 목사는 사면하고 밀양으로 시무 이동하였으며, 동사 목사로 일하던 전성도 목사만 남았다.
전성도 목사는 1942년 4월에 전도사로 거창읍 교회에 부임하였다. 전 목사는 1911년 1월 17일, 경북 안동군 서후면 명동 383번지에서 전기석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이다.
목사의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자랐다. 그는 1935년 3월.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법정대학 고등사범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각기병으로 계속 수학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병을 치료받으면서 차도가 있어 마산 창신학교 교원으로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26세에 이덕선(22세) 여사와 결혼하여 신혼생활을 하던 중, 복음전파에 불타는 마음이 일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호 중앙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에서 공부하던 중, 전쟁으로 신학교가 폐교되고 말았다.
그는 한국으로 다시 나오게 되지 이X형 목사의 주선으로 거창읍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전성도 전도사는 교육 전도사로 교회 일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서울 조선 신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교회보조로 공부하게 되었다. 1943년 12월에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 11월에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거창읍 교회를 위해 일하여 왔다.
이제 이X형 목사가 사면하고 나가니 전 목사 혼자 남았다. 원 목사로 교회를 이끌어 나가기엔 자신이 너무나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그때 교회는 다시 주남선 목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제직회를 모여 교역자 문제를 논의하였다.
“주 목사님을 모시도록 하십시다.”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전일에 주 목사의 가족들을 돌봐 주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고의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시대가 그랬고, 목회자가 바뀌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는가?’
간사한 것이 인간이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그것을 후회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인간, 그것은 약한 것이다.
지난날들의 악몽을 씻고 새출발 하고 싶었다. 주 목사만 원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참으로 선한 청지기, 주 목사를 그들은 지도자로, 목자로 모시고 싶었다.
제직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주 목사를 모셔오기로 가결을 보았다. 주 목사를 모시는 데에는 공동의회를 모일 필요를 그들은 느끼지 않았다.
“시국이 그래서 우리 목사님 빼앗겼다가 다시 모시려고 하는데 다른 수속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냥 모시고 오면 됩니다.”
“목사님께서만 허락하시면 일은 간단합니다.”
모두 이런 말들을 했다. 그리하여 전성도 목사가 주 목사를 모시러 평양으로 가도록 결정을 보았다.
8월 17일 아침. 전 목사는 강진실 집사와 주 목사 큰 아들 주경중씨와 주경순과 함께 김천으로 나갔다. 김천에서 열차편으로 올라 갈 참으로 역에서 기차를 기다려 오후 늦게야 기차를 탔다. 복잡하였고 지저분한 기차였다. 때마침 김천소년원에 수감되었던 소년죄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년 죄수들이 기차에 꾸역꾸역 기어 올랐다.
파리하여 여윈 소년들이 눈알만 초롱 초롱하여 수선을 피웠다. 전 목사는 그의 앞에 앉은 소년 죄수에게 말을 걸었다.
“감옥살이 괴로웠지?”
“말도 마시라우!”
되바라진 목소리를 던진다.
“그래, 제일 괴로웠던 일이 무엇이냐?”
“그야 배고픈 일이지라우!”
“그렇겠지.....”
“나는 밖에 나돌아 다니며 잡일을 거들었는데유, 그냥 아무 것이나 마구 먹었지유. 푸성귀며 호박줄거리, 벌레도 잡아 먹었어유.”
그러나 옆에 앉아 있던 소년이 뾰족한 턱을 한번 추켜 올리더니 입을 연다.
“얘! 넌 밖으로 나돌아 다녔으니까 푸성귀며, 호박줄거리라도 먹었지만 감방 안에서만 줄창 눌어붙어 있는 우리 주제야 그런 것인들 구경이나 할 수 있었을라구, 우린 말이야, 똥을 누어서 먹었다구유. 자기 똥을 먹는 사람새끼가 어디 있겠어유? 개지! 난 개 같은 생활을 했어유!”
이 소년의 말을 처음 들을 때 전 목사는 거짓말로 들었다.
“설마, 제가 눈 똥을 먹었을라구?”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인 걸유!”
일제시대의 감옥은 그런 곳이었다. 이런 소년범들이 이렇게 배고파 고생하였다면 옥중 성도들이야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까? 전 목사의 가슴은 미안함과 괴로운 마음으로 찌릿하였다.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되었다. 소년범들은 다 내리고 빈 자리에 일본 군인들이 들어와 앉았다. 남쪽으로 가지 않고 왜 북쪽으로 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군인이 장총을 옷걸이에 거꾸로 걸어 두었다. 그는 장교였다.
전 목사는 자기가 쓰고 있던 중절모자를 일본군인이 걸어둔 장총 개머리판에 걸었다.
그때였다. 앞에 앉아 있던 이 일본 군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더니 일본말로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황송하게도 천황폐하에게서 받은 이 귀중한 총 개머리판에 모자를 걸다니, 무례한 녀석이군! 우리가 전쟁에 패전을 했지만 이런 무례한 대접을 받아서 되겠나......”
하면서 그 일본 장교는 옆구리에 찬 권총을 끄집어 내더니 소재하는 척 하면서 실탄을 재는 것이었다. 전 목사는 아찔하였다. 이 때는 무법시대이다. 총을 발사하면 끝난다. 결국 죽는 사람만 원통하지 별 수 없다.
전 목사는 일어나 모자를 머리에 쓰고 살짝 자리를 떴다. 조금 걸어 나와서는 뛰어 다른 칸으로 가 숨듯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슴이 뛰었다. 가지고 가던 짐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냥 두고 나왔다. 짐이 문제가 아니었다.
주경중씨와 강진실 집사는 전 목사가 변소에 간 줄만 알았다. 그러나 사태가 급해서 피신을 한 것이다. 일본은 패전했지만 그들의 사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기차가 평양에 도착되어서야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짐을 찾아 내렸다.
일행은 곧장 산정현 교회로 주 목사를 찾아갔다. 전 목사는 주 목사를 만나 인사를 하고, 교회의 되어진 일들을 이야기 하였더니 대단히 반가워 하였다.
주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집회가 더 계속될 모양이니 먼저 내려가십시오. 저는 다른 동지들과 행동을 같이 하겠습니다.”
전 목사는 며칠 후에 다시 거창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한상동 목사 부인 김차숙 여사가,
“전 목사님, 좀 더 계시다가 함께 가시지요.”
하고 만류를 한다.
“빨리 내려가봐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내려가 이 곳 형편과 주 목사님의 태도를 말씀해 드려야지요.”
다음 날 떠나려고 하니 가방과 모자가 없다. 김차숙 여사가 숨긴 것이다. 전 목사는 간신히 가방과 모자를 찾아서 평양을 떠났다.
전 목사가 평양을 떠난 그 날 오후, 소련군이 밀어닥쳐 삼엄한 경계가 시작된 것이다. 8월 22일의 일이었다. 이북은 8월 20일에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쓰챠코프 대장이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소련군을 협력케 하고, 22일에 소련군 선발대를 평양에 도착케 한 것이다.
이 날, 소련군 소부대는 평양을 거쳐 김교까지 가게 되었다.
9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38선을 분계점으로 하여, 미·소 양군이 남북을 각각 분할 점령케 됨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것이 남북을 갈라 놓는 비극의 38선 경계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38선은 미·소 양군의 삼엄한 경비로 지켜지게 되었다.
이런 일은 꿈에도 모르고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는 은혜의 불길만 안고 있었다.
4. 거창에 돌아와서
산정현 교회 집회는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집회를 하는 동안 산정현 교회에서는 여러 차례 당회가 모여 후임 문제를 논의하였다. 산정현 교회 당회에서는 결국 한상동 목사를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결정하였다.
한 목사는 투옥 전, 담당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산정현 교회 시무를 허락하였다.
9월 18일. 한 목사만 산정현 교회에 그대로 남고 다른 분들은 고향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남한으로 내려가는 일행은 함께 출발을 하였다. 평양역에 들어서니 소련군들이 요소 요소에 서서 검문을 하였다.
열차를 탔다. 열차 안에도 소련군은 있었다. 사리원까지는 무사히 왔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몇 차례 소련군에게 제재를 당하였지만 남천까지는 가까스로 열차를 이용하였다.
남천에서 도보로 출발하였다. 주로 낮에는 숲에서 쉬고 밤을 이용하였다. 평양을 출발한 지 일주일 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많은 고생들을 하였다. 여윈 얼굴들이 더욱 파리해 보였다.
주 목사는 거창을 돌아왔다. 7년만에 걸어보는 고향땅이었다. 감개가 무량하였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줄로 알았는데 지금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정든 길을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역시 고향은 좋은 곳이었다. 아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히뜩히뜩 지나간다.
주 목사는 죽전으로 들어섰다. 옛 교회 사택으로 들어간 것이다. 가족들이 교인들의 주선으로 다시 이사를 와 있었다.
주 목사를 맞는 가족들의 얼굴엔 기쁨과 슬픔이 엇갈려 있었다. 주 목사는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밥상을 받아 놓고 주 목사는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감사가 치솟는다.
세상에 수다한 사람들이 별짓 다하면서 살고 있지만, 정말 주님만을 위해서 살수 있게 하여 주신데 대한 감사가 뜨겁게 쏟아졌다.
소문을 듣고 교인들이 모여 왔다.
“목사님!”
목이 메이는 사람,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껴?”
말만의 인사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는 인사가 오갔다. 뜨거운 태양열을 받고 여름을 익혀온 뜰에서는 훅훅 더운 기가 치솟는다. 교인들이 몇 차례 지나가고 가족만 남았다.
밤이 조용히 밀려 들고 있었다. 강물처럼 어두움이 더위를 덮고 흐르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주 목사는 딸 경순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정다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들이 가여워요. 사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죽지 못해 살아 온 생명들이어요.”
경순이의 눈에 물끼가 서린다.
“알아, 시대가 그런걸 누굴 탓하겠니?”
“교인들이 야속해요. 아버지가 목회를 하실 때와는 너무나 달랐어요.”
“그럴 수 밖에 더 있니? 새로운 목회자가 오면 그 목회자를 섬겨야 하니까 그렇지.”
“친일파 거짓 목자인 데두요?”
“그런 소리 하면 못써. 인간은 다 약한 거야.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별 수가 없지.....”
야위고 푸르죽죽한 주 목사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아버지, 무엇 때문에 거창에 또 계실려구 그래요. 가요! 아버지를 기다리는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부산이고, 마산이고, 도시로 나가요.”
경중이도 아버지의 굳은 얼굴은 바라보면서 말을 건다.
“안된다.”
“왜 안됩니까?”
“목사는 환영을 받기 위해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야. 교회가 반대하여 쫓아내지 않는 한, 그곳에서 일을 해야 해 목사는 자기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야.”
“그렇지만, 얼마나 설움을 받았는 줄 아십니까?”
“그건 시대가 그렇게 한 것이지 교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야.”
주 목사는 자녀들의 불평을 신앙으로 조용히 밀어 내렸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너희들은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 경순이도 학교를 계속해야지.”
주 목사는 딸 경순이 얼굴에 눈을 준다. 핏기없는 경순이의 얼굴에는 검은 눈동자만이 유독 빛을 풍겼다. 경순은 자신의 앞길보다 경효와 경세의 장래에 대하여 염려를 두었다.
두 남동생의 교육을 위해서 자신은 희생해도 좋다는 대담한 마음이 밀려온 것이다. 경순이의 영롱한 눈빛이 경효와 경세의 얼굴에 머물자, 찡하고 코허리가 시큰해 짐을 느끼는 것이었다.
5. 첫 주일 강단
주일이 왔다. 7년만에 처음으로 주 목사가 강단에 서는 날이다. 일제 탄압의 모진 혹한이 사라지고 자유의 나라, 자유의 예배 시간이 왔다.
얼마나 기다리며 바라던 날인가? 시간 전에 교인들은 교회당으로 모여 들었다. 교회당 마룻바닥에 엎드린 교인들은 흐느끼며 기도하였다.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못한 안타까움과 배반자의 쓰라린 가슴이 눈물을 부르는 것이다. 회개의 눈물이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1계명을 범한 무서운 죄의식이 가슴을 친다. 죄를 범하면서 죄인줄 모르고 죄를 도리어 정당화하고 변명하여 온 지난날의 신앙이 아닌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 부끄러운 일이었다.
주일이면 교회당에 모여 들어 맥빠진 찬송을 조울듯 부르고, 진실과는 거리가 먼 어색한 기도를 올리고, 지루한 시국강연의 설교를 들어왔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이미 무거운 죄와 함께 하나님을 쫓아낸 것이다.
하나님을 잃은 그들의 가슴 속, 그러면서도 주일이면 교회당을 찾아와야 했던 서글픈 사실, 무거운 피곤이 그들의 심신을 누르고 있었다. 이 어둡고 답답했던 과거가 허물어지고 꿈같은 새날이 찾아온 것이다.
진실된 주의 종, 신앙을 목숨보다 귀하게 사수해 온 산 순교자 주남선 목사가 강단에 선다.
성도들의 가슴은 죄책과 새로운 흥분으로 야단이 나고 있었다. 교회당 안은 교인들로 가득찼고, 흐느끼는 울음과 자복기도의 여음이 탁류처럼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종이 울렸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였다. 찬양대의 잔잔한 찬송과 함께 예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찬양이 끝나고 고요하게 목사님의 기원이 시작되었다.
교인들의 가슴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를 체험하고 있었다. 함께 찬송을 부르고, 목회자의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
먼 곳에 계신 예수님을 소리높혀 외쳐 부름이 아니라, 옆에 계신 예수님을 사랑과 신뢰로 부르시는 것이다.
교인들의 귓전에,
“오냐!”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역력하고 산 기도가 올려지고 있었다.
“주여!”
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죄인을 죄대로 갚지 않으시고 사랑과 은혜로 대하시니 너무나 감사하옵고, 황송하옵나이다. 부족하고 죄 많은 이것, 옥중에서 불러 가시지 않으시고 살려 주셔서 출옥하게 하시어 성도들과 함께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리게 됨을 진심으로 감사하옵나이다. 목자 잃은 양떼들이 갈 길을 못찾아 유리방황하였나이다. 연약하여 주의 뜻 어긴 것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양떼들이 어긋난 길을 가고 주님의 계명을 범한 죄 용서하여 주옵소서. 미리 미리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이 죄인의 죄가 많사옵나이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양떼들, 마지못해 지은 죄, 깨닫지 못하고 지은 죄, 주님이 아십니다. 이들의 죄의 값을 이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목사의 기도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겸손한 기도였다. 교인들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이마엔 구슬땀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에 숯불을 부은 듯 활활 타는 뜨거움을 느꼈다. 진리를 위해 피흘리기까지 싸우지 못한 죄책감이 가슴을 친다.
교인들은 울고 또 울고, 가슴을 치고 마루바닥을 쳤다. 기도가 끝나고 성경봉독이 있었고 찬양대의 찬양이 드려졌다.
설교시간. 교인들은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주 목사의 얼굴을 차마 정면으로 바라 볼 수가 없었다. 뼈만 앙상한 그 모습을 쳐다보기가 황송하였다.
육체를 위해 살아온 그들 자신들의 기름이 낀 모습들과 비교할 수 없는 성스러움 앞에 자연 머리가 수그러졌다. 이제와서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들 받아 들이지 못할 말이 있겠는가?
책망, 또 책망, 소낙비처럼 책망을 퍼부어 주었으면 싶은 마음들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은 그의 몸을 감싼 곱게 다듬어진 모시두루막에 반사되어 진초록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마엔 깊이 새겨진 주름살은 지난 날의 모진 상흔을 역력히 말해 주고 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나라 없는 슬픔이 그런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평탄하고 형통해지는 길만이 아닙니다. 모진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의 책망없이 시작된 주 목사의 설교는 교인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고 감동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교인들의 실수를 자신의 실수로 아는 목사님, 교인들의 부족을 자신의 부족으로 알고 책임을 느끼는 목사님, 교인들은 그 목사님 앞에 머리를 수였다. 거창읍 교회성도들은 한결같이,
“우리 목사님을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
하고 결심을 지었다.
주남선 목사의 목회생활은 다시 거창읍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거창읍 지방의 모든 사람들이 비록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지만 주 목사의 인간됨과 그의 애국심과 종교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 목사를 우러러 보고 있었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갔다.
6. 철저한 신앙인
주 목사는 항상 한복을 입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도 발을 맨 댓님을 푸는 법이 없다. 두루막만 벗고 그냥 눈을 부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느 교역자,
“목사님, 어째서 옷을 입은 채 댓님을 맨 채 주무십니까?”
하고 질문을 했다.
목사님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데 잠잘 때 오시면 급히 일어나야지!”단순한 신앙이었다. 이는 그의 마음을 보여 주었다. 그의 깨어있는 신앙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아침 9시가 훨씬 넘어서야 사택으로 돌아간다. 성경찬송을 겨들랑이에 끼고 길을 갈 때면 보는 사람마다 감화를 받는다.
어느 주일 아침이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다가 모시두루막 고름을 밟았다. 툭 하고 고름이 떨어져 발 밑에 깔렸다. 고름을 손에 쥐고 집으로 왔다.
달 수가 없는 것이었다. 주일이기에 고름을 달아 달라고 사모님께 내밀 수가 없었다. 그는 남은 옷고름에 떨어진 고름을 잡아 매어 빙 둘러 묶었다.
그런 상태로 강단에 섰다. 교인들이 목사님의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사모님이 몰라서 저렇게 두었는가 보다”
마음으로 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예배 후, 여 집사 한 분이 목사님께 질문하였다.
“목사님, 두루막 옷고름을 왜 그렇게 하고 나왔습니까? 꼭 어린아이 갔네예... 호호.....”
그러나 주 목사는 근엄한 표정으로,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말을 하였다.
이렇게 계명에 대하여는 철두철미 엄수한 주 목사였다.
당회를 모이다가 혹 의견이 맞지 않는 때가 있었다. 그 때 주 목사는 우기지 않았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지요.”
눈물어린 기도가 시작된다. 줄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마루에 떨어진다.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기도였다. 장로들은 눈물어린 기도에 차마 자신의 어떤 고집을 주장하지 못했다.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 맡깁시다. 주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사심이 없고, 자신의 유익을 구치않는 주 목사의 신앙적 처사에 순종 못할 이유는 없었다.
주 목사는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주일 아침만은 냉수로 목욕을 했다. 고행이 아니라 그의 정신이었다. 맑은 정신 깨끗한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다는 뜻에서 그렇게 하였다.
7. 약속은 틀림없이
그 무렵 이성옥 전도사는 한천읍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전도사로 시무하고 있으면서 장로 장립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성옥 전도사는 사전에 주 목사를 만나 모든 순서에 대하여 의논하고 장립 날짜를 정하였다.
정립 날짜가 가까워 왔다. 헌데 주 목사는 급한 일로 서울에 상경하신 것이었다. 장립 날자는 내일로 박두하였는데 소식이 없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각 교회에 통지문을 내었으니 연기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며칠째 눈이 내려 길이 막혔다.
거창이나 합천은 교통이 말이 아니었다. 김천에서 거창까지 백 오십 리 길은 오전밖에 버스가 없었다.
장립 날이 밝아왔다. 이성옥 전도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주 목사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어디서 어떻게 오셨는지 주 목사가 나타난 것이다. 반갑고 놀라워 이성옥 전도사는,
“목사님 어인 일입니까?”
하고 말을 던졌다.
“어인 일이긴 어인 일이라, 장립하러 왔지!”
주 목사의 이마에는 촉촉이 땀기운이 서려 있었다.
“차가 없어 못오실 줄 알았습니다.”
“김천에서 거창까지 걸어 올 생각으로 어제 오후 길을 나섰지! 그런데 우두렁 고개 미처 못와서 트럭이 한 대 오드만, 도락구가 말이야. 태워 달라고 손을 들었더니 태워주지 않겠나, 그래서 쉽게 거창으로 왔지요. 오늘 새벽 거창을 출발했는데 차가 있어야지, 걸어 나섰지 뭐!”
주 목사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길게 내 쉬었다.
“묘산까지 와서는 초조해 지더군. 시간 전에 못들어 가겠다 싶어서····· 그만 길가에 앉아 기도를 했지! 기도를 끝내고 일어나 걸을려고 하니 차소리가 나지 않겠어? 돌아보니 쓰리코다가 한 대 오더군요. 가까이 오는데 보니 경관들 차야, 염치불문하고 손을 들었지! 세워 주더군. 좀 태워달라 했더니 시원스럽게 타라고 하지 않겠나? 그래서 타고왔지.”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군요.”
“이 조사 기도 많이 한 모양이지? 장립받는다고, 다 기도 덕이지·····”
이성옥 전도사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서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는 자신의 몸이나 형편을 돌보시지 않는 주 목사. 그는 삼군지방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8. 대구 서문로 교회의 청빙
해방과 함께 도시 큰 교회에서는 교역자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 대구 서문로 교회에서도 교역자가 비어 있었다.
당회가 모여 여러번 의논을 거듭하다가 결국 주 남선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의하였다. 허나 교섭하는 일이 문제였다. 김정오 장로가 윤봉기 전도사를 만났다. 김정오 장로(김주오 목사 형)는 당시 과수원도 갖고 있었고, 약국을 하고 있었다.
김정오 장로가 주 목사와 가까운 윤봉기 전도사를 찾아 경주까지 간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서문로 교회는 주남선 목사를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 장로는 윤 전도사에게,
“거창으로 가셔서 꼭 주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오시오. 지금 우리 서문로 교회에서는 거창읍 교회가 부담하는 삼 배를 부담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다짐을 주었다. 윤 전도사는 주 목사가 자기 가까이 오시게 되는데 마음이 움직였다. 윤 전도사는 남 궁억 선생에게서 민족 사상을 강하게 받았고, 주남선 목사를 통하여 산 신앙을 체험하였다.
그의 첫 목회지는 야로 교회였다. 1935년 9월, 성서공회 권서일을 보면서 교회를 이끌어 갔다. 권서일로 뛰면서 자주 주 목사를 만났고 신앙의 지도를 받았다. 경남노회에서 전도사 시취를 할 때, 주 목사에게서 문답을 받았다.
윤 전도사는 3년간 야로 교회를 시무하다가 군북 교회로 갔으나 신사참배 문제가 생기자 군북 교회를 사면하고 안의 교회로 왔다. 여러번 주 목사가 찾아와 윤봉기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윤 전도사는 주 목사의 권면을 바로 받아들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것을 표명하였다. 주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이X영 목사가 거창읍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윤 전도사는 주 목사의 투옥이 자신의 투옥처럼 마음 아파했고, 자신의 투옥도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윤 전도사는 어느 주일 낮에 신사참배는 죄가 때문에 결코 해서 안된다고 설교하였다.
설교를 듣던 교인 중 한 분이 당회장 이X형 목사에게 보고를 해서 이 목사가 찾아왔다. 이 목사가 윤 전도사에게 말했다.
“윤 조사, 이 판에 신사참배 하고 안하는 것을 강단에서 말할 것이 무엇이 있소? 나는 윤 조사 신앙이 뜨거운 줄 잘 알고 있소. 허지만 강단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내 놓지 마시오. 그냥 구원에 대한 설교만 하시오.”
윤 전도사는 음성을 높혀서,
“목사님, 계명에 관한 문제인데 말하지 말라 하시니, 나는 목회 못하겠습니다. 나는 그만 교회를 사면하겠습니다.”
하고 강하게 말했다.
“그럼 누가 안의 교회에 오겠오.”
“그건 나도 모릅니다. 나는 계명을 범하면서 까지 목회하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윤봉기 전도사는 교회를 사면하였으며, 경주에 있는 최성환씨 주선으로 회사에 취직하였다. 최씨는 안경과 자봉침 도매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까지 경찰의 손이 뻗혔다. 경찰에 호출되어 갔다. 형사 주임이 물었다.
“당신이 윤봉기요?”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저의 이름을 아십니까?”
“일본 경찰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그래 한상동씨를 아시오?”
“예 알고 있습니다.”
“주남고씨를 아시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주남고 목사님의 사랑을 받고 있던 사람입니다.”
“묻는대로만 답하시오.”
형사 주임은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부터 주인 최성환씨도 윤전도사를 외면하는 눈치였다. 마침 경주 경찰서에 읍민들을 소개하라 명령을 해서 윤 전도사는 충남 논산군 연산면 면소재지로 갔다.
그곳에서 신문 지국을 하며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경주읍 교회에 가서 목회르 시작한 것이다.
윤봉기 전도사는 김정오 장로의 부탁을 받고 거창으로 주목사를 찾아가면서 지난 날을 회상해 보았다. 믿음으로 바르게 살기란 참 힘드는 일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가 보다.
거창 죽전에 들어간 윤 전도사는 주 목사를 마나 그가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윤 전도사는 계속해서 주 목사에게,
“목사님, 대구로 가십시다. 목사님께서 대구에 가시면 저도 자주 만나 뵙게 되어 좋을 것 같습니다.”
무게있게 말을 던졌다. 주 목사는 그의 특유한 웃음을 두텁게 얼굴에 깔면서,
“내가 거창을 떠날 것 같이 생각이 되었오.?”
하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대구에 가시면 여러 가지로 유익하실 터인데·····”
윤 전도사가 말을 흐리자,
“어쨋던 잘 왔오. 윤 조사, 나하고 한 주간 심방을 합시다.”
“난 목사님을 모시러 왔는데요······”
“그런소리 하지말고 온 길이니 심방이나 합시다. 옥중에도 같이 동행할 처지인데 심방 좀 같이 못할까?”윤 전도사는 당황하였다. 허나 주 목사의 간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같이 심방에 나섰다. 7년만에 지방 순회를 하시는 심방이었다.
교회마다 찾아가 세례 학습 문답을 하셨다. 주 목사의 세례문답은 어려웠다. 대답을 잘못하면,
“내년에 받도록 하지.”
하고 미루었다. 밤에는 집회를 가지는데, 윤 전도사에게 설교를 시키는 것이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셔야지요.”
윤 전도사가 사양을 했다.
“이럴 때 설교해야 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나?”
“그렇지만 목사님이 설교를 하셔야 은혜를 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주 목사는 가는 곳마다 윤 전도사에게 설교를 맡겼다. 윤 봉기 전도사는 주 목사와 함께 심방을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윤 전도사는 생각하였다.
“주 목사님 밑에서 교인 노릇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윤 전도사는 목회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만 주 목사 밑에서 장로가 되어 주 목사를 받들며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주 목사가 한 주간 더 있어달라는 걸 사정을 하여 대구로 떠났다. 주 목사 청빙을 위해 갔다가 주 목사 밑에 교인이 되고 싶은 마음만 안고 돌아오게 된 것이다.
제11장
살려 놓은 하나님의 뜻
1. 경남노회 노회장에 피선
경남노회는 1943년 5월 26일에 해산되어 있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사실 조선 예수교 장로회는 해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정치의 힘으로 교파를 해산시키고 교단을 통합하였다.
1943년 5월 5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해산이 되었다.
성결교, 안식교, 침례교가 폐지를 당하고 모든 교파는 “일본 기독교단”으로 통칭, 총리라는 직명을 주어 운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기독교단은 종교단체라기 보다 어용기관으로 일본인들의 요구대로 따라가는 단체가 된 것이다.
일본 기독교단 경남교구장이 된 김X창 목사는 경남교구회 소집 통지서를 다음과 같이 발송하였다.
“배계, 시하성전에 어건시를 경하부기 하나이다. 진자 조선 기독교 각파 합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가 자체가 과거의 불비한 조직을 해소하고 현 일본 기독교단 규칙을 기준해서 우리 반도계의 최 적당한 규칙을 작성하여 거 5월 5일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발전식 해소를 하고 이에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을 결하게 된 것입니다.
교단 총리로는 좌천 X근씨가 당선되었고, 불초 교제가 결성국장 겸, 경남 교구장으로 임명되고 금성 X준씨가 경남 부구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로 금후 더욱 불초 소생등을 위하여 선한 지도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1회 경남 교구회를 시급히 개회코져 하와 여히 통지하나이다.“
그리하여 통지문대로 1943년 5월 25일에 부산 항서 교회당에서 모여 2일간 회의를 계속하고 26일에 경남 노회를 해산시켰다.
8·15해방과 함께 경남 노회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9월 2일. 부산시 교회 연합 예배를 모이고 최재화, 노진현, 심문태 목사 등 뜻있는 20여명의 교역자들이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9월 18일에는 부산진 교회당에서 경남 재건 노회가 조직되었고, 현 교직자들의 자숙안을 내세웠다.
1. 목사·전도사·장로는 일제히 자숙에 들어가며 현재 시무하는 교회를 일단 사면할 것.
2. 자숙기간이 지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하여 시무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 자숙안은 신사참배에 앞장 선 똑똑한 사람들의 궤변으로 인하여 잘 실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통회의 기색은 전혀 없고 도리어 교권으로 다시 교단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러한 어지러운 교계의 상황 속에서 제47회 경남노회가 모이게 되었다. 1945년 11월 3일. 부산진 교회당에서 제47회 노회가 개회되었다.
주남선 목사는 노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날 거창을 출발하였다.
교통이 불편한 거창에서 도보로 진주를 향하였다.
가다가 요행히 트럭이 있어서 고마운 신세를 졌다.
노회에 참석한 주 목사는 어지러운 분위기를 느끼고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건노회 위원들이 주가 되어 노회 진행을 이끌어갔다.
예배가 끝나고 임원선거가 시작되었다.
앞자리 강대상 옆에 원로목사들이 앉았고, 재건노회 위원들도 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임원선거가 진행되려 할 때,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신사참배 주동자들과 가담자들은 죽은 듯 앉아 있었다.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님을 자신들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참석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원래 얼굴이 두꺼운 사람들이라 카랑카랑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일본에서 나온 목사들, 농촌에 피신했던 분들의 얼굴도 있었다.
임원을 어떻게 뽑느냐고 의논이 분분하게 나돌고 주위가 수건수건 시끄러웠다.
이때, 박X애 목사가 밖으로 뛰어 나가더니 물통을 들고와서 앞자리에 앉아 수건수건 논쟁하는 목사들에게 끼얹었다. 물 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 새끼 같은 놈들이 뭐 잘났다고 야단들이냐 말이냐! 내나 너희 놈들이나 다를게 뭐냐?”
박 목사는 고래 고래 소리쳤다.
실은 오줌통을 끼얹는다는 것이 물통을 들고 왔다.
박X애 목사는 항서 교회에서 김X창 목사와 함께 일을 보던 분이다. 그러나 그는 신사참배 문제 뿐 아니라 다른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근신당한 형편이었다.
갑작스레 쏟아진 물 벼락으로 장내는 더욱 어지러웠다.
잠시 후, 다시 정돈이 되었고 임원개선이 시작되었다. 회장에 주남선 목사가 추대되었다. 주 목사는 노회장 자리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노회 복구의 빨리 길은 주 목사가 노회장직을 맡아주는 일이었다. 이 일에 반대하는 분은 별로 없었다.
사양의 뜻을 표했지만 어지러운 이 시점에서 회장 자리를 맡아야만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노회원들 전체 의사를 무시할 수 없어 끝까지 사양하지 못했다.
임원 선거가 끝나고 신임 임원들의 인사 차례였다. 주 목사는 회장으로 인사를 하기 위해 단 위에 올랐다.
장내가 조용하였다. 책망의 소리가 나온다 해서 불평할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목사는 침착하면서도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바깥 세상을 모르고 주님만 생각하고 살아 왔기 때문에 어떻게 세월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게 살아왔습니다만 여러분은 직접 일본 사람들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자니 참으로 수고가 많았습니다.”
장내에서는 이곳저곳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척석에서 울음이 터진 것이다.
“저 같이 말주변도 없고 정치도 모르는 사람에게 옥중 성도라는 것 하나 때문에 회장의 중대한 자리를 맡기시니 너무 가슴이 무겁습니다.”
주 목사의 겸손한 인사는 감동으로 회원들과 방청객들의 마음을 찌르고 있었다.
출옥 성도의 위치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들고 나와 여지없이 책망할 줄 알았는데, 이외로 온유한 말이 나오자 회중에서 훌쩍훌쩍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주 목사의 회장 추대를 극구 음성적으로 반대하고 나오던 신사참배 앞장 선 인사들도 의외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눈치였다.
인사가 끝나고 회무가 진행되었다. 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경건회 시간마다 부흥회였다. 자복하고 통회하는 소리가 교회당을 메웠다.
제47회 경남노회는 은혜가운데 그 막을 내렸다.
2. 고려 신학교 설립 초대 인사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바싹마른 고목에 순이 돋고,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위에 따뜻한 햇살이 퍼져온다.
1949년 4월 어느 날, 주 목사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평양 산정현 교회를 시무하고 계시던 한상동 목사가 모친 별세의 소식을 듣고 부인과 함께 남하하였다는 것이다. 뛰어가 만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목사가 먼저 거창을 찾아왔다. 뜨거운 악수가 교환되고, 두 출옥 성도는 밤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한 목사는 모친 산소를 둘러보고 월북 하려고, 하였지만 길이 막혀 월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교계 소식을 들으니 아무래도 이대로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불타는 마음이 그를 초조케 한다고 하였다.
“교회가 바로 될려고 하면 신학이 발라야 합니다. 평양 신학교가 문을 닫고 다시 그 문을 열지 못하는 한, 그 정신과 신학을 계승할 신하교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옥중에서 데려가시지 않으시고 내 보내주신 것은 이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한 목사의 말은 무겁게 깔렸다.
“옳은 말씀입니다. 신학이 발라야지요. 힘을 쏟겠습니다.”
주 목사는 한 목사의 제의에 찬동하였다.
“서울에서 박윤선 목사를 만났습니다. 만주 동북 신학교에서 교수일을 보다가 서울에 와 있습니다 .적산집 이층 다다미 방에서 몹시 고생을 하고 있더군요. 부산서 신학을 했으면 싶은데 와 줄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대단히 기뻐합디다.”
잘 되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라면 안심하고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형용 박사도 모시게 되면 참으로 좋은 신학을 할 수 있을 것인데.“
“앞으로 봉천에 사람을 보내어 모셔오도록 하십시다.”
“좋습니다.”
이리하여 두 옥중 성도는 보수 신학교를 할 일을 위하여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1946년 5월 20일. 경남에 신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위원으로는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목사였다.
6월 21일. 서울 승동 교회당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남부 총회가 모였고 이북에서는 1945년 12월에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이북오도 연합노회가 회집되었다.
이남에서는 남북노회가 함께 모일 날을 기다렸으나, 정치적인 38선 장벽으로 불가능하게 되자, 이남만의 회집으로 남부총회가 모이게 된 것이다. 이 총회가 회수로 치면 제32회가 된다.
주 목사는 개인 자격으로 제32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회장에 배은희 목사가 당선되고 부회장에서 함태영 목사였다.
이 총회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를 결의하였다.
1. 장로회 헌법은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2. 제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불법한 결의였으므로 이를 취소한다.
3. 조선 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 신학교로 한다.
등이었다.
총회를 마치고 돌아온 주 목사는 경남에 시급히 신학교가 세워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졌다. 주 목사는 부산에 내려가 한 목사를 만나서 경남에 세워질 신학교를 위하여 의논하였다. 우선 신학 강좌를 열기로 하였다.
1946년 6월 23일. 진해에서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한편 주 목사는 경남노회 임원회를 소집하여 이 행사를 후원하는 일을 위하여 논의한 결과 후원하도록 결의가 되었다. 신학강좌가 은혜 중 개강되었다. 60여명의 수강생들이 등록을 하였고 많은 방청생들이 강의를 들었다.
신학교 설립의 싹이 보이므로 기성회가 다시 모여 신학교 개학을 논의하였다. 신학교 이름을 고려 신학교로 하고 9월 20일 개학하기로 결정하였다.
주 목사는 7월 9일, 경남 노회 임원회 결의에 따라 임시 노회를 소집하였다. 고려 신학교 설립을 노회가 허락하고 협조해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노회에서는 고려 신학교를 인정하고 협조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6년 9월 20일. 부산진 일신여학교에서 고려신학교 개교식이 거행되었으며,
김치선 박사가 설교를 하였다. 김 박사는 ‘신학과 신조’라는 제목으로 바른 신앙의 길을 외쳤다. 이리하여 감격속에서 고려신학교는 개학이 되었다.
주 목사는 고려 신학교 설립자임과 동시, 이사가 되었다. 가난한 신학교 이사는 이사회를 모일때마다 자부담으로 참석해야 했다.
거창에서 부산까지의 길은 험하였다. 정규적으로 운행되는 버스가 없었으므로 진주까지 걸어서 다니기가 일쑤였다.
주 목사가 부산에 오면 한상동 목사 사택이 숙소였다. 한 목사는 초량교회 목사로 1946년 7월에 부임하였다. 주 목사는 초량교회 사택을 찾아들면서 떨떠름한 음성으로 말을 뱉았다.
“사모님, 본전군 왔습니더!”
손님대접 잘하기로 소문난 김차숙 여사는 조금도 얼굴에 짜증기를 풍기지 않고 손님을 맞아 들였다.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무료 숙박인을 친절히 대해 주었다.
주 목사는 명예를 얻기 위해 신학교 이사직을 맡은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혜택은 물론 없었고, 염려만이 무겁게 눌렀다. 그러나 기쁨으로 이 이사직을 맡아 힘을 쏟았다.
12월 3일. 진주에서 제48회 경남노회가 회집되었고, 회장에 김길창 씨가 당선되었다. 묘한 인간적인 정치운동의 결과였다. 신사참배를 합법적으로 주장하고 나선 인사가 어떻게 회장으로 당선이 된 것인가?
그리하여 나타난 결과는 비극이었다. 한 번 구부러지기 시작한 나무는 계속 구부러지기 마련이다. 헌 옷을 입은 자는 새옷 입은 자를 시기한다. 같이 헌옷되기를 바란다. 같은 헌옷 입은 사람은 헌옷 입은 사람과 짝이 되고 서로 동정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심리다.
드디어 고려 신학교 인정 취소를 결정하였다. 노회가 신학생을 추천 해 주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유는 얼마든 만들면 되는 것이다.
주 목사는 마음이 아팠다. 한상동 목사는 부패한 경남노회를 탈퇴한다고 선언을 하고 나섰다. 이때부터 교단 안에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고려 신학교는 고아 같은 외로움을 실감하며 곡해와 수모의 길을 걸어야 했다. 역사는 언제나 불의한 몇 사람이 들어 굴곡을 만들어 놓는 법이다.
3. 기억을 더듬어
1945년 12월 어느날이었다.
높은 지리산 봉우리엔 흰 눈이 쌓이고 계곡은 얼음으로 덮혔다.
주 목사는 당회 구역순회로 나섰다.
순회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함양 사근 교회에 찾아들었다. 사택에 들어선 주 목사는 키가 작고 여자처럼 곱게 생긴 청년을 만나 입을 열었다.
“여기 민영완이란 분 어디 계신지 모르겠습니까?”
청년은 주 목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면서,
“왜 그러십니까? 제가 민영완입니다.”
하고 말을 씹었다.
“아 그러세요. 내가 용케 찾아 왔군요.”
“목사님, 추우신데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나를 아시겠습니까?”
“그럼요. 이 함양지방에서 목사님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다 아는 걸요. 저는 목사님을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주 목사는 민영완 전도사의 아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교회일을 보시나요?”“예. 일본 관서 성서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가 집에 있었는데, 하도 이 사근교회에서 집회 인도를 요구하기에 응했더니 저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잘 되었군요.”
“집회 중 경찰에 불려가 욕을 좀 보았습니다만 목사님 앞에서는 부끄러울 뿐입니다.”
민영완 전도사는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서 자랐다. 일본으로 들어가 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교회일을 보지 않고 쉬고 있었는데, 사근교회에서 집회를 청하여 응하였다가 경찰에 입건되어 수모를 당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다시 사근 교회 요청에 따라 목회를 하고 있는 터였다. 민 전도사는 동그란 눈을 섬뻑거리며 다시 주 목사의 오신 목적에 대하여 알고 싶어했다.
“이 추운 날, 원로에 어인 일이십니까?”
그 때 주 목사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진주 경찰서 유치장 있을 때입니다. 같은 유치장 감방에 수감된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 때 유독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누구였는지 아시겠습니까?”민 전도사가 그 청년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주 목사는 싱긋 웃음을 얼굴가에 날리더니 말을 잇는 것이다.
“그 청년이 말입니다. 나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이렇게 몹쓸 짓으로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지만 저에게도 자랑스러운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신학을 하고 있지요. 하고 그 청년은 큰 눈에 찔끔 눈물을 짜지 않겠습니까?”
“아니 형님이 어떻게 유치장에 들어 갔습니까?”
“야미 쌀 장사를 하다가 걸린 모양입니다. 나가서는 다시 그런짓 안하고 선량하게 예수님을 믿고 살려 하더군요.”“아 그랬습니까?”
“그때부터 나는 그 청년과 그의 동생인 민영완을 위하여 기도하여 왔습니다.”
민 전도사의 얼굴이 불화로를 덮어쓴 듯 확 달아 올랐다. 두 눈에 뜨거운 액체가 고여들었다. 주르르 뜨거운 액체는 얼굴 밖으로 흘러 내리는 것이었다.
“목사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 목사는 민 전도사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밖으로 나온 주 목사는 민영완 전도사의 손을 꼭 쥐고 악수를 나눈 후,
“복음전파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이니, 용기를 잃지 마시고 힘껏 일하십시오. 부족하지만 전도사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말을 맺고는 총총히 주 목사는 길을 떠났다.
4. 거절한 독립 유공자 상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3·1절 기념행사였다.
갑격스런 3·1절이다. 일제의 몹쓸 욕심의 제물이 되기 싫어 목숨을 걸고 항거한 3·1운동!
그리고 36년. 모진 고난과 피흘린 보람이 있어 해방을 맞았다. 누구의 수고로 얻어진 해방인가? 나라에서는 일제와 항거한 독립투사들과 순국한 가족들에게 표창을 했다.
거창에서도 3·1절 기념행사는 거대히 준비되었다. 주 목사에게 3·1절기념행사 준비위원들이 찾아왔다.
“목사님, 공설 운동자에서 3·1절 기념식을 갔습니다. 꼭 참석하셔서 표창을 받으십시오.”
그러나 주 목사의 얼굴은 담담하였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제가 무엇을 하였다고 표창을 받는단 말입니까?”위원들은 깜짝 놀라면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주 목사님은 독립투사입니다. 독립유공자란 말입니다.”라고 힘주어 말 하였다.
“당치않는 말씀입니다. 그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한 것이 무엇이 대단하다고 그러십니까?”
주 목사의 말은 억지 겸손이 아닌 진실을 통하는 말이었다.
“주 목사님은 3·1운동때도 독립군을 도우고 상해 임시정부의 한 예속부대인 군정서 의용병 모집과 자금 조달에 적극 협력하시다가 투옥되어 2년 동안이나 형무소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셨지요.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 반대로 투철한 배일사상을 보여 줌으로써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어 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옥살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목사님이야 말로 우리 거창의 보배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어른이십니다.”
“너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할 일을 했고, 예수님을 믿는 기독신자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목사님, 꼭 식장에 참석해 주십시오.”
“목사가 갈 곳이 못됩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냥 돌아가 주십시오.”
준비위원들이 돌아가고 얼마 후 군수가 직접 찾아왔다. 그러나 주 목사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주 목사는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무슨 일에나 예수 중심으로만 움직였다.
5.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
1947년 10월. 전성도 목사가 거창읍 교회 사임을 표명하였다.
주 목사는 마음으로 섭섭해 하면서 전 목사에게 말했다.
“계속 함께 일을 하십시다. 교인들도 많아지고 일은 더욱 벅차지는데 왜 가시려합니까? 함께 일하는 것이 저에게는 많은 힘이 됩니다.”
전 목사는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주 목사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며, 또 전 목사 자신이 단독으로 목회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힘에 알맞은 교회가 나서면 떠나가 주 목사에게서 받는 감명과 그 목회 방법을 살려 힘껏 뛰고 싶었다. 그런데, 단독 교회가 나선 것이다. 김해읍 교회에서 청빙이 온 것이다.
전 목사는 주 목사께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목사님 곁을 떠나는 것은 참으로 섭섭합니다. 그러나 저도 앞 날을 위해서 단독 목회를 희망합니다. 계속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전 목사는 주 목사와의 아쉬운 작별을 고한 것이다.
1947년 10월 19일. 전 목사는 6년여의 거창읍 교회 사무를 종결짓고, 새 임지인 김해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주 목사의 일이 더 많아졌다. 주 목사는 기도와 독경과 심방으로 그의 부지런한 목회를 계속하였다.
11월 30일에 두 장로를 장립하였다. 이영조, 박병영 장로였다. 당회가 보강되니 더욱 교회 일을 활발하였다.
주일학교 유년부 학생들이 천 여명이 되었다. 관리가 힘들었다. 그래서 죽전 명덕학교를 확장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어린이에 대한 교회교육은 교회 부흥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주 목사는 이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교회교육은 어려서부터 철저히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일에 주력하였다.
6. 제헌 국회의원 출마 거부
1948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일제의 탄압밑에 신음한 우리 민족에겐 자유도 나라도 없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된 것이다. 정치 체제가 달랐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군정을 폈다.
군정이지만 일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군정을 폈기 때문에 전제주의적 기풍이 깔려 있었지만, 남한에서는 달랐다. 미군이 다스렸기 때문에 자유가 보장되었다. 하지만 한국인에 의한 자주독립 체제의 정치를 백성들은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 1월 27일 한국에 대한 10개년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치열한 반탁운동이 일어났으며, 급기야는 피를 흘리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국내 뿐 아니라, 미국내에서까지 여론이 비등해졌다. 미 국무차관 애치슨씨는 이 여론의 비등을 수습하기 위하여 기자회견을 갖고 해명하기를,
“미국은 한국에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가 생각될 때에 한해 5년간의 통치를 하며, 또 신탁의 연장이 필요하게 되면 다시 연장을 할 수 있으리라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견에 불과하고 계획안은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반탁운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극렬해졌다. 국내 지도자들은 하루 빨리 남북 간의 총선거가 시행되도록 동분서주하였다.
김구 선생은 여러차례 이북을 왕래하며 남북 간의 총선거를 추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승만 박사는 남한 만의 총선거라도 신속히 하므로써 이북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보고 이 일을 위하여 뛰었다. 방미외교에 나선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방미외교는 성공적이었다.
1947년 4월 21일. 이승만 박사는 성공적으로 방미외교를 마치고 돌아와 남한 단독 총선거의 가능성을 예고하였다.
4월 27일. 이승만 박사는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그의 환국환영 국민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미국 정책이 공산주의와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우리도 입법위원회에서 총선거 법안을 급속히 제정하여, 남북통일을 위한 남조선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유엔에 참가하여 소련과 절충, 남북통일을 꾀해야 합니다.”
결국 이승만 박사의 주장대로 유엔 소총회에서는 남한 만의 총선거가 허락되었다.
1948년 5월 9일을 총선거날로 정하고 남한 전역에 공고하였다. 이에 따라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게 된 것이다. 곳곳마다 독립투사들을 앞세워 정당을 만들고 입후보를 내세웠다.
거창에서도 국회의원 후보자 물색에 정당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거창에는 인민위원회(좌익계)와 공복위원회(우익계)가 동시에 인물을 찾았다. 양쪽에서 다 주 목사를 두고 이야기가 오갔다.
“아무래도 거창지구에서는 주남선 목사 밖에 나설 인물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3·1운동 때부터 일제와 투쟁한 애국지사 아닙니까? 거창 지방에서 주남선 외에 애국인물이 또 있습니까?”
“주 목사만 나서 주면 무투표 당선으로 결정이 되어집니다. 누가 맞설 상대가 있어야지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주 목사를 내세웠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어느날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주 목사의 앞에 길을 막는 장정 둘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목사님!”
납덩이처럼 무거운 음성이 주 목사의 귀를 때렸다.
“왜 그러십니까?”
의연하고 맑은 주 목사의 목소리였다.
“노상에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거창군의 국회의원 선거위원인데 이번 국회의원 거창지방 후보로서 주 목사님을 모셔야 한다는 전체의견 때문에 찾아 뵈옵게 된 것입니다.”
주 목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듣게 되어 잠시 대답할 말을 찾기 위해 눈을 감았다.
겸연쩍은 듯 말을 잇던 장정은 잠시 주 목사의 눈치를 살피다가 숨을 돌리고,
“우리 거창지방 유지들이 깊이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오니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다른 장정이 말을 뱉았다.
“선거운동이나 운동방법에 대하여는 일절 신경을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선거위원들이 성심껏 일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의사표시만 해 주시면 됩니다.”
주 목사는 이 딱한 장정들에게 무슨 말을 먼저해야 좋을지를 몰라 망설였다.
“주 목사님 말고 우리 거창에 참 애국자가 누가 있습니까? 목숨보다 나라를 사랑하시고···”
“잠깐.”
주 목사는 장황하게 연설조로 말을 끌고 가려는 장정의 말허리를 꺾었다.
“전 생각지도 않은 일입니다. 갑자기 이런 말을 듣고 보니 무슨 말로 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지방민들의 고마운 성의에 대답할 말이 궁해집니다.”
주 목사는 신중히 말을 이었다.
“저는 교회 목사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께 몸을 바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는 일밖에 다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거위원회에서 달리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한 청년이 바지를 추켜 올리며 재빨리 응수를 하였다.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주 목사님의 겸손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분명히 사양하실 줄 알고 오늘은 우선 귓뜸만 해 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일을 할 것이니 그리아시고 계십시오.”
그들은 말을 던지고 그냥 깍듯이 인사를 하곤 가버리는 것이었다.
딱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을 앞으로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를 우두커니 서서 생각하였다.
다음 날이었다. 광복위원회 쪽에서 사람들이 왔다. 중아에서 온 선거위원 두 사람도 함께 왔다. 죽전 사택으로 찾아온 이 정당인들은 허락해 다랄고 늘어 붙는다.
“거창지방에서는 일본사상에 물들지 않고 무슨 일에나 신용할 만한 분이 주 목사님 뿐입니다.”
또 한 사람이 말을 잇는다.
“땅을 다 맡겨도 안심할 수 있는 탐심없는 사람이 주 목사님 외에 또 있겠습니까? 우리 거창 지방에 주 목사님 같으신 분이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이요, 자랑입니다. 출마만 허락하시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주 목사는 할 말이 없었다.
멍하니 그들의 동정만 바라보았다.
“출마하셔야 합니다. 국회의원으로 중앙에 올라가셔서 일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중앙에서 내려왔는데, 중앙에서도 주 목사님의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주 목사님 같으신 분이 일을 하셔야지 누가 일을 한단 말입니까? 나라를 위해서 출마를 허락하십시오.”
주 목사는 이 끈질긴 정당인들에게 말을 잘랐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목사입니다. 나는 주님의 양떼를 위해서 교회를 지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국회의원 되셔서 주님의 일하면 되지 않습니까? 더 크게 일할 수 있지요.”
“안됩니다. 나는 목사직이 나의 천직으로 알고 이 일에만 충성하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연 4일간 계속 설득작전을 펴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새벽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다.
계속 정당인들이 늘어붙기 때문에 마음의 시험이 되었다. 기도로 이 시험을 물리쳐야 했다.
주 목사는 예수님의 시험을 생각하였다. 광야 40일의 금식 후 마귀에서 시험받으실 때, 마귀가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고 경배하라고 했다. 그러면 이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했다.
이와 같은 명예의 시험이 주 목사에게 온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명예를 얻기 싫어하는 자 어디 있겠는가? 부귀와 영화를 싫어할 자 어디 있겠는가?
모진 고생을 했다. 배고픈 설움이 제일 슬펐다. 자신의 배고픔보다 처자식들의 굶주림은 가장으로서, 부로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었다.
국회의원이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선 자신은 주님의 종이었다. 주님의 종은 주님 밖에서는 자유가 없는 것이며, 주님의 일 외에는 마음을 돌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목사가 된 그는 목사로서의 사명만이 전부이다. 주 목사의 두 눈에 영롱한 물방울이 맺혔다.
“주님, 모든 시험을 물리쳐 주옵소서. 주님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하옵소서!”
중아에서 왔다는 선거위원들은 4박 5일로 주 목사에게 접근하였다.
마지막으로 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주남선을 두 사람 만드시오. 그래서 목사 아닌 주남선을 데려가시고, 목사인 주남선은 교회 일만 보도록 놓아 두십시오.”
선거위원들은 더 이상 권해야 소용없는 줄 알고 주 목사 곁을 떠났다. 그들은 가면서 참 이상하다고 말했다.
“허락만 하면 저절로 당선 될 국회의원 자리인데, 어째서 한사코 거절하는 것일까? 명예와 부귀와 영광이 동시에 넝쿨채 굴러오는 것을 거절하다니····· 참 이상하다. 목사자리가 그렇게 좋은가?”불신자인 선거위원들이 주 목사의 심중을 알 까닭이 없다. 그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허나 주 목사의 가슴 속에는 예수 밖에 없었다.
다른 어떤 것도 주 목사의 가슴에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엔 예수 만으로 꽉 차 있었다. 예수만 위해서 그는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었으며, 예수 만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이며, 예수만을 위해 죽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일편단심 예수만으로 주 목사의 가슴은 설레이고 있었다.
선거일이 다가왔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5월 9일은 주일이기에 기독교 교계가 연합전선으로 날짜 변경을 호소하였다.
날짜가 곧 변경되었다. 5월 10일, 월요일을 총선거의 날로 정한 것이다. 선거는 혼란과 잡음 속에서도 사고없이 진행되었다.
전국의 총 입후보자 902명 중 198명이 당선되었다. 이리하여 국회가 조직되고 헌법이 만들어졌다.
드디어 초대 대통령이 뽑혔다.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이 된 것이다. 긜하여 8월 15일 대통령이 취임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새 공화국 탄생을 백성들은 다 함께 기뻐하였다.
7. 하나님 제일주의
박봉기라는 소년이 있었다. 지금은 마산 애리원에서 일을 보는 착실한 장년이지만 당시는 마음 약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예수님을 믿고 너무 기뻐서 주 목사 심부름을 해 주고 나들이 나가실 땐 가방도 들어주곤 했다.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봉기 소년이 밖에서 서성거리자 주 목사가 불러 들였다.
“심부름 한 가지 할래"
주 목사는 교회당 열쇠 꾸러미를 내밀면서,
“당회실에 가서 당회록을 좀 찾아 오너라.”
하고 말씀하신다.
봉기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당회실에 무서워서 못들어 가겠심더.”
주 목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던졌다.
“무섭긴 무엇이 무섭단 말이냐? 하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서운데 예·····”
“참 딱하군. 나는 말이야, 신학교 다닐 때, 혼자 김천에서 걸어서 거창까지 오곤했다. 낮이 아니고 밤일 때가 많았다. 우두령 고개 알지? 그 무서운 고개를 혼자 걸어 넘었단 말이다.”
“목사님은 어른이시니까 그랬지요!”
“아니야, 어른은 뭐 무서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든?”“어른은 아이들 하고야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아이들보다야 한결 무서운 생각이 덜 나지, 하지만 어른도 사람인 이상 무서운 거야.”
“그런데 어떻게 혼자서 우두령 고개를 넘었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모든 걸 맡기고 다녔지!”
봉기는 주 목사를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 목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고 한다. 김천에서 우두령 고개를 넘어가는데, 너무 피곤해서 큰 나무 밑에서 잠시 쉬었다. 달빛이 하얗게 쏟아져 산천에 깔렸다.
너무 조용한 시간이었기에 주 목사는 앉아서 한 참을 기도하였다. 눈을 떠 보니 옆 자리에 짐승이 한 마리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호랑이였다. 허나 별 무서운 생각이 일지 않았다. 주 목사는 일어나 길을 걸었다. 호랑이도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주 목사를 앞서 가는 것이었다. 우두령 고개를 넘어 거창이 보이는 길목까지 가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야기를 마친 후 주 목사는 소년에게 시선을 주며,
“봉기야, 그래도 무섭냐”
봉기 소년은 꿈을 꾸는 듯 신기함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호랑이를 보내어 길을 인도해 주신 거야. 하나님은 신자들을 이렇게 끔직히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단다.”
“목사님, 가겠습니다. 이제는 무섭지 않아요.”
봉기는 그길로 당회실로 들어갔다.
조용하고 어두운 당회실은 무서웠다.
그러나 주 목사님의 말씀을 하여 믿는 성도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당대할 수 있었다. 그 후 봉기 소년은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8. 유급 교역의 원리
백영희 전도사는 계속 개명 교회를 시무하면서도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았다. 생활비를 받지 않고 목회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하루는 주 목사께서 백 전도사를 찾아와 신앙적인 격려를 해 주었다. 그 때 주 목사는 백 전도사에게,
“아직도 교회에서 생활비는 받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예, 받지 않습니다. 저는 생활비를 준다해도 안 받을 것입니다. 생활비를 받으면 약점이 잡혀 일을 힘차게 못할 것 같아요.”
“백 조사, 그게 잘못된 생각이야. 성경에도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전 9:9)고 하셨고, 예수님도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고 하시지 않았오. 전도인이 생활비를 받는 것은 성경이 가르친 바 원리입니다.”
“그래도 생활비 안 받는 것이 속이 편합니다.”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오. 교인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대로 일하려는 잘못된 생각에서 온 처사입니다. 생활비를 받고 유급 전도사가 되시오. 그래서 신학도 하고 유능한 목회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백영희 전도사는 생활비 받는 일만은 마음에 허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백 전도사의 둘째 딸 아이가 정미기에 들어가 중상을 입었다. 팔과 다리, 중요 부분의 뼈가 부러졌다. 다섯 군데나 뼈가 절단난 것이다.
백 전도사는 아찔함을 느꼈다. ‘하나님의 징계가 아닐까?’ 자신의 고집으로 온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교회당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주 목사님의 권면을 외면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그냥 밀고 나간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백 전도사는 자신의 잘못된 고집이 결국 어린 것에게 미친 줄 깨닫고 통회자복하였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 만일 어린 딸 아이의 중상이 주 목사님의 권면을 거절하고 자신의 고집으로 나간 것 때문에 온 것이라면, 즉시 상처를 낫게하여 주옵소서. 상처가 의사님의 손을 빌리지 않은 어떤 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낫는다면 이는 분명히 주 목사님의 권면을 듣지 않는 결과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아파서 못견디며 울부짖던 어린 것이 3일이 못되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밖에 나들이를 하는 것이었다.
백 전도사는 기쁜 마음으로 주목사에게 뛰어갔다.
“목사님의 권면을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제는 생활비를 받고 일하겠습니다.”
그때부터 백영희 전도사는 유급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신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질 뻔 했다.
논문 시간에 그는 긴 말을 쓰지 못하고 단 하나 마디 ‘포도나무의 원가지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 왔습니다’고만 논문을 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박손혁 목사가,
“논문도 쓰지 못하고 이런 한 마디의 글을 쓰는 정도의 실력으로 앞으로 신학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입학을 거절하였는데, 주 목사가 설득을 시켜 입학이 되었다.
백영희 전도사는 주 목사의 여러 가지 배려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목회에도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되었다.
제12장
기쁨과 슬픔의 사이
1. 거창 성경학교 개교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주 목사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신학교를 이미 시작한 주 목사는 그 신학교를 뒷받침 해 주는 성경학교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1941년 11월. 오종덕 목사가 부산에서 고등 성경학교를 할 뜻을 가졌다는 소식이 왔다. 주 목사는 부산으로 내려가 한상동 목사와 오종덕 목사를 만났다. 그리고 고등 성경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뜻을 모두었다.
오종덕 목사는 부민동에 땅을 마련하여 12월에 고등 성경학교를 개교하였다.
오목사는 초대 교장이 되고 주목사와 한 목사는 이사가 되었다. 이 고등 성경학교는 고려 신학교의 부속기관으로 고려 고등성경학교라 칭하였다.
주 목사는 거창 지방에도 성경학교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농촌 청년들의 신앙 자질을 위해서 성경학교는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거창 지방 성경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우선 전담 교사가 필요하였다. 실력이 있고, 신앙 사상이 투철한 신앙인이 있어야 했다. 물망에 오른 사람 중 제일 유력한 사람이 남영환 전도사였다. 남전도사는 강도사로서 이번 노회시 목사 안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사천 정의동 교회를 시무하였다. 정의동 교회는 미조직 교회로서 청빙이 안되므로 지방 전도목사로 안수를 받으려고 절차를 밟았다.
주 목사는 남 전도사에 말했다.
“거창에서 성경학교를 하려는데 남 조사님이 전임 강사로 수고하여 주십시오” 남 전도사는 갑자기 받는 청원이라 당황하였다.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으려는 때이다. 마음으로 그는 망서려졌다. 그러나 상대가 주 목사다. 신앙의 선배요, 마음으로 존경해 오던 어른이다.
“남 조사님, 목사장립 청원서 들어갔지만 보류시키고 가십시다.”
남 전도사는 주 목사의 간청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목사 안수야 다음에 받으면 된다.
“남 조사님, 성경학교 전임 강사이지만 우리 거창읍 교회 전도사로 청빙하는 것이니 꺼려하지 마시오.”
주 목사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말투로 이야기 하였다.
“난 성경학교를 단순히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시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옥중에서부터 생각해 온 계획 중의 하나를 실행하려는 것입니다.”
주 목사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남 전도사는 전임강사가 되고 나는 교장이 되어 우리 함께 일을 해 보십시다.”
남 전도사는 완전히 주 목사의 말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도와 힘써 보겠습니다.
남 전도사는 기쁨으로 거창으로 갈 것을 허락하였다.
노회가 끝나고 이어 남 전도사는 거창으로 이사를 하였다.
4월 10일. 성경학교가 개학되었다. 50여명의 많은 학생들이 모여왔다.
과목으로는 구약사기, 대선지서, 신약에서 공관복음, 옥중서신, 요한 계시록, 요리문답 등이었다.
요리문답은 주 목사가 맡고, 그 외의 과목은 모두 남 전도사가 강의를 하게 되었다.
1년, 3학기를 나누어 수업하기로 하였으며, 교실은 죽전에 있는 건물을 이용하였다.
개학 날, 주 목사가 설교를 하였다.
성경학교는 주간으로, 본격적인 교육이 실시되었다.
2. 전임강사 남영환 전도사
남 영환 전도사는 거창 성경학교 전임 강사의 위치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주일이면 거창읍 교회를 섬겼다.
즐거움이 있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대한 즐거움이었다. 보람을 느꼈다.
남 전도사는 거창으로 참 잘 왔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 시대에 사용하기 위해서 단련시켜 주신 것이라고 느꼈다.
주 목사를 도와, 주 목사와 함께 일하게 됨을 생각하니 기쁨이 치솟았다.
남영환 전도사는 1915년 2월 10일,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실리에서 태어났다. 시골서 자라고, 산나물 밭곡식으로 그의 뼈는 굵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들어가 대판 모리꾸지에 있는 경판 상업학교를 다녔다. 귀국하여 부모를 도와 농사에 손을 대다가 19세 때, 박명순 씨와 결혼을 했다.
신혼의 즐거움도 가시기 전, 그의 마음은 허영으로 들떠 있었다. 세비로 양복이 입고 싶었다. 흰 칼라의 와이셔츠에 넥타이가 메고 싶었다.
시골에 그냥 눌려 있어 세월을 축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술을 마셨다. 방종한 생활을 해봤다.
그러나 신통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허물어지고 자신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집에서 논 판 돈을 장롱 속에 감추는 것을 먼 눈으로 보아 두었다.
한날 밤, 논 판 돈 200원을 훔쳐, 일본으로 건너간 영환은 야하다 철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기도 했고, 대판으로 올라가 외칠촌댁에 식객이 되기도 하였다. 외칠촌이 대판 중앙교회 집사로 있었기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입신하였다.
다음 해인 1938년 3월에 관서 학원대학 신학부 예과에 들어가 수학을 하다가, 신사참배 문제로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만주로 건너가 봉천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여기서도 일경의 손이 뻗혀 수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서평서 정가돈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끈질긴 추적 때문에 다시 몽고로 갔다. 여기서 해방을 맞았다.
그는 1946년 7월에 서울을 들러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진해로 갔다.
진행에서는 박윤선 목사를 모시고 하기 신학강좌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강좌에 참석하였다가 주남선 목사를 만난 것이다.
남영환 전도사는 그 후, 박형용 박사를 모시러 만주로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요양을 했다. 건강이 회복 되는대로 지방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였고, 고려 신학교에 다시 편입을 하여 졸업하였다. 강도사가 되고 목사 안수를 받으려는데 주 목사를 만나 성경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거창으로 오게된 것이다.
3. 비극의 제36회 총회
1950년 3월 어느 날. 대구 제일 교회당에서 제36회 총회가 회집된다는 소식이 주 목사에게 날아왔다. 1947년 4월부터 신학교 문제로 총회는 시끄러웠다.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를 총회에 고발하였는데, 김 교수의 성경관이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이었다.
1948년 4월 22일. 서울 새문안 교회당에서 모인 제34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를 1년간 미국 유학시키기로 학고 전 교수진도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고려 신학교 문제는 총회와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친서를 주지 말라는 결정을 보았다.
5월 20일. 신학문제 대책위원회는 서울 창동교회에 모여 장로회 신학교 개교를 결정짓고 이사회를 조직하였다. 이리하여 총회 안에는 신학교 문제로 금이 생겼다.
대구 제일 교회당에서 모이는 제36회 총회는 시끄러울 것이 분명했다. 주남선 목사는 심신이 피로하였다. 교회 목회만도 힘에 벅찬데, 총회 문제로 더욱 머리를 써야 했고 기도해야 했다.
극도로 심장이 약해졌고, 가슴도 아팠다. 기침이 심하게 나고 가래가 끓는다.
그러나 그의 기도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총회를 앞두고 철야 기도를 하였다.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쇠약한 그의 몸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 했다. 그런 그 앞에 한 장면이 전개되었다.
안개같은 뿌연 상태에 강둑이 보였다. 거창읍 교회 앞의 강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 물이 바짝 마른 강이었다. 그런데 위에서부터 탁류가 밀어닥치고 있는 것이었다. 강물은 둑을 삽시간에 넘어 흘러 황토물이 교회당으로 밀려왔다. 물살은 교회당 주춧돌을 때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주춧돌은 굳건했다.
눈을 떴다. 어둠이 교회당 마루에 깔려 있었다. 꿈이었다. 총회일이 염려되었다. 황토물이 밀려오듯 교계에 위험이 올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주춧돌이 떠내려 가지 않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낮에 남영환 전도사를 만났다.
주 목사는 지난 밤의 꿈을 남 전도사에게 이야기 하였다. 남 전도사는
“목사님, 저도 간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신령한 꿈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머리를 떼었다.
“그렇습니다. 이야기 해 보세요.”
주 목사의 얼굴에 근엄한 표정이 지나갔다.
“나는 거창 앞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니 옆에도 목욕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약신 목사와 심문태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심문태 목사가 밖으로 뛰어 나가지 않겠습니까? 잠을 깨고 일어나 생각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총회 때에 심문태 목사가 우리측에 서지 않을 것 같단 말입니다.”
남영환 전도사의 말을 듣고 있던 주 목사의 눈언저리에 괴로운 감정의 조각들이 싸이고 있었다.
4월 21일. 대구 제일 교회당에서 제36회 총회가 최재화 목사 사회로 개회되었다.
개회 벽두부터 회원 자격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경남노회가 5노회로 총대가 올라왔다. 조선 신학교를 지지하는 3노회 총대와 고려 신학측 총대, 그리고 중간 세력의 총대들은 모두 인정 할 수 없다고 주장하므로 문제는 심각해졌다.
결국 난투극이 벌어지고, 무장경관의 출동으로 총회는 비상정회가 되었다.
치욕의 역사를 남기고 정회된 총회는, 돌아서는 총대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주 목사는 걷잡을 수 없는 무거운 마음으로 거창에 왔다. 남영환 전도사를 만나 주 목사는 씁쓸한 말을 던졌다.
“남 조사님 꿈 그대로야, 총회가 수라장이 되었지! 심문태 목사는 중간 세력에 가담되었어!”
주 목사의 얼굴에 어두운 구름이 지나갔다.
거창 성경학교는 1년 3학기로 정하여 철저한 교육을 실시하려고 계획을 세워 진행했지만 한 학기로 문을 닫고 말았다. 6·25동란 때문이었다. 동란은 많은 것을 빼앗아 갔지만 거창에도 신비로운 역사를 남겨 놓았다. 거창 성경학교 학생 중에 순교자 한 사람을 내었는 바, 그가 배추달 집사였다. 한 사람의 순교자를 내기 위하여 거창 성경학교는 창설되었는지 모른다.
주 목사는 애초 요리문답을 강의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너무 분주한 목회생활과 당회 일 때문에 한 시강의 강의도 하지 못하였다.
다만 개학식날 설교와 방학식날 설교를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학교는 순교자의 아름다운 혼 심었고, 거창지방의 교회사에 깊은 한 면을 남겨 놓았다.
제13장
살인 명부
1.북괴군 남침과 살인명부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북괴군은 평화로운 이 땅에 포탄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동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날은 주일이었다. 마귀는 언제나 주일을 이용한다.
오전 11시.l 평양방송은 엉뚱한 보도를 하였다.
“이승만 괴뢰의 침략군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개시했으며, 이것은 정당방위입니다.”
오후 1시 35분. 김일성은 방송을 통하여,
“남한은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제안을 거부해 왔고 평화통일을 반대해 왔으며, 급기야는 옹진반도의 해주에서 인민군 진지를 공격하여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을 가한 것입니다.”
핏대를 올렸다.
거짓말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 거짓말 하는 자는 마귀의 후예들이다.
26일 낮, 북괴군의 탱크는 의정부를 깔고, 수유리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날 오후 서울 상공에는 적기가 날았다.
28일 새벽 1시경. 북괴군의 탱크는 미아리에 접근하여 왔고, 아군과 접전하였으나 불행히도 아군은 밀리고 말았다. 드디어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적은 7월 6일, 평택을 짓밟았고, 7월 7일 밤엔 천안으로 밀어 닥쳤다.
7월 15일 토요일이었다. 주 목사는 죽전 사택에서 설교준비를 하고 있었다.
“목사님! 목사님!”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나서 책상 앞에 앉아 계시던 주 목사가 밖을 내다보았다. 먼 친척뻘 되는 청년이 헐떡이며 뛰어오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목사님은 마루로 나오면서 조용히 말했다.
“큰일났습니다. 목사님,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거창지방 인민위원회 간부회의에서 작성한 살인명부를 저가 보았습니다.”
동란이 일어나자 비밀리 활동하던 좌익계 인사들은 자기 세상이 왔다고 날뛰며 인민군들이 당도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당도하는 날에는 합세하여 전투를 도울 것이고, 지방 행정을 맡을 것을 꿈꾸며 그들의 일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청년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에 좌익계 사람들과 접촉하는 중, 사상이 영글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사무실에서 비밀 살인명부를 보고 호기심에서 표지를 넘기다가 놀란 것이었다. 주 목사의 이름이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님, 살인 대상자가 50명이었는데, 그 첫째가 목사님었습니다. 얼른 피하십시오, 큰일납니다. 지금 전쟁은 이북이 우세합니다. 인민군이 거창에 들어오면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말을 하는 청년의 입술은 공포에 젖어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청년의 모습과는 반대로 눈시울을 활짝 펴면서
“고맙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다. 나는 도망가지 않는다. 나는 일을 하여야 해!”
“목사님 당합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괜찮아! 하나님의 허락이면 당하는 거고,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공중의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청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뒤통수에 살며시 손을 얹드니, 고개를 굽히고 돌아서 나갔다.
주 목사는 피신할 수 없었다. 7월 19일부터 거창비아 교역자 수양회가 모인다. 36일까지 계속될 수양회는 주 목사가 없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혼란한 전시에 교회를 담임한 교역자들이 더욱 더 교회를 사수하여야 하며 이 일에 격려를 해 주어야 했다.
주 목사는 책상 앞으로 돌아와 조용히 설교 준비를 계속하였다.
주 목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
그의 생명까지도 이미 맡기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잔잔했고, 주일 준비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2. 교역자의 수양회
7월 19일 수요일. 거창지방 교역자 수양회 날이었다. 삼군(거창, 합천, 함양)지방 교역자들이 모여 들었다.
전시였지만 평상시나 다름없이 교역자들은 거창 명덕학교로 찾아 왔다. 명덕학교는 거창 성경학교 교사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장소를 이 곳, 강당에 정하였던 것이다.
모두 21명의 교역자들이 모였다. 반가왔다. 전시에 같은 길을 걷는 교역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니 더욱 반가웠다.
힘이 솟았다. 모두들 굳게 악수를 나누고 신앙의 격려를 하였다.
이날 모인 교역자는 다음과 같았다.
주남선 목사를 비롯하여, 남영환, 배수윤, 이종대, 안태수, 추교경, 추국원, 백영희, 이백원, 임상율, 정우덕, 이성옥, 하종숙, 조갑득, 이재순, 김상수, 장익진, 강진실, 박기천, 임동선, 장병용 전도사 등이었다.
개회 예배가 시작되었다. 수양회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시로 전쟁이 밀려온다는 소문이 계속 들려왔다. 교역자들의 마음은 점차적으로 초조하고 무거워졌다. 주 목사는 교역자들 앞에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역자들입니다. 교회를 버려두고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순교를 각오하십시오. 십년 후, 이십년 후에 죽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 목사의 얼굴엔 이미 세상을 포기한 숭고한 빛이 아련히 감돌고 있었다. 교역자들의 마음에 깊고 견고한 신앙의 지층이 쌓이고 있었다.
주 목사는 다시 교역자들에게,
“우리가 이번 수양회 기간에 특별히 할 일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찬송가 가사를 외우는 일입니다. 적어도 20장 이상은 외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암송하는 일입니다. 유다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외워야 합니다. 유다서는 이단을 배격하는데 꼭 필요한 내용입니다. 어두운 시대가 오면 찬송가도 성경도 우리 손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가 세상 노래를 하겠습니까? 암기한 찬송을 불러야지요. 암기한 성경을 암송해야지요. 그러한 때 영적 힘을 잃지 않게 됩니다.”
말을 하는 주 목사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다.
그의 눈엔 초롱초롱 광채가 빛났다. 수양회는 기도하는 일과 찬송가 외우는 일, 그리고 성경 암송하는 일로 계속되었다.
전세는 불리하였다.
7월 20일 오후. 대전이 북괴군 제4사단에 의하여 빼앗겼다. 북괴군 제6사단은 대전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아래로 질풍처럼 내달았다. 20일에는 벌써 전주를 삼킨 것이다. 그들은 안의, 진주 노선까지 뻗을 양으로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이 위험하였다. 미 제8군 위커 장군은 24일, 24사단 처어지 소장에게 서부전선을 방어하라고 명령하였다. 진주와 김천 노선은 공비의 소굴인 지리산을 끼고 있었다. 북괴군이 공비와 합세하여 안의, 거창을 거쳐 낙동강에 이른다면 마산이 위험하였다.
미 제24단은 25일 방어를 폈다. 제19연대의 주력 2개 대대를 진주에 두고, 나머지 1개 대대를 안의에 배치하였다. 제34연대는 거창을 방어하기 위하여 사단 사령부를 합천에 두고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날 밤이었다. 집회 도중에 배낭을 맨 오십대 장정이 들어왔다. 그는 개성이 있는 어느 교회 목사였다. 저녁집회가 끝나고 그 모사는 교역자들을 보고 말했다.
“어쩔려고 이렇게 태평스럽게 있습니까? 삼십리 밖에 인민군들이 들어오고 있어요.”
주 모사는 그 목사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우리는 태평스럽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수하기 위하여 힘을 얻으려고 교역자 수양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괴뢰군 놈들은 악랄해서 목사나 전도사는 우선적으로 살해합니다. 빨리 피하십시다.”
“이 전시에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교회를 사수해야 합니다. 피난을 간들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도 함께 합시다.”
“나는 어차피 나왔으니 가야 합니다. 지금은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 때 교역자들 가운데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분들이 있었다. 가족 때문이었다. 그 목사는 밤에 떠나 가고 수양회는 계속 새벽까지 기도회로 진행되었다.
26일 새벽. 큰 은혜가 내렸다. 모든 교역자들의 가슴은 뜨거웠고. 죽음도 무섭지 않은 담력을 얻었다. 주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만일 잡혀서 순교를 당하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못하고 이용을 당할 우려가 있을는지 모르니 아예 몇 가지 가결을 지어 둡시다.”
모두들 그게 좋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주 목사는 다음 2개항을 교역자들과 함께 자결했다.
1. 기독교 연맹에 가담하지 말 것.
2. 공민증을 받지 말 것(왜냐하면 공민증은 계시록의 짐승표나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26일 새벽 기도회로 수양회는 끝났다. 교역자들은 각각 자기 담당 교회로 양 떼를 지키기 위하여 떠났다.
북괴군 제6사단은 호남 지방으로 내려가 여러 항구를 점령하였고, 순천에 모여 들어 동쪽으로 침입할 계획을 짰다.
한편 대전을 점령한 북괴군 제4단은 금산을 누르고 남으로 내려와 거창을 향하였다.
3. 거창 전투
7월 28일. 작열하던 태양이 서산에 얼굴을 감추자 대지에는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벼 포기가 검푸르게 자라는 논 주변엔 사람들의 그림자가 없다.
전쟁은 부지런한 농부들을 피난시키고, 벼 포기에 땀을 떨어뜨리지 못하게 했다. 거창의 넓은 벌판과 마을에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있었다.
북괴군 제4사단의 대 차량이 안의를 거쳐 위수 골짜기 신작로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위수는 위천과 안의 사이에 흐르는 강을 말함) 부옇게 먼지가 장사진을 이룬다.
생각 밖이었다. 분명, 김천 쪽에서 올 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주에서 넘어 올 줄 알았다. 그리하여 미 제34연대는 주로 김천 길을 주시하고 방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북괴는 전주를 거쳐 들어오는 것이었다. 보고를 받은 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위수쪽 산허리에 대기시킨 포 부대에 사격을 명령하였다. 포 부대에서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했다. 먼지 속에서 차량이 폭파하는 폭음이 하늘을 치솟았다.
적의 차량은 계속 폭파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의 병력은 엄청났다. 차량은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대 차량 뒤에는 2개 연대 병력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일개 연대 병력으로 사단 병력을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자 더 이상 사격을 가할 수가 없어 사격이 잠시 중지되었다.
한편 시내를 사수하기 위하여 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거창시가에 병력을 원형으로 깔았다. 그러나 자신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북괴군 제 사단은 수 개년 단련된 민활 보병이었다. 벌판과 시가지 싸움에서는 자신을 가진 북괴군이었다.
그러기에 넓은 벌판으로 형성된 거창을 사수한다는 것은 연대 병력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4연대 병력은 1천1백50명에 불과했다. 또 장비도 많이 모자랐다.
뷰챔프 대령은 일단 시내에서 맞서 보다가 제3대대 3백여명에게 후군 방위를 맡기고, 양곡부근으로 후퇴할 계획을 정하고 있었다. 거창 시내는 미군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나 괴뢰군 정예부대가 낮에 벌써 거창에 밀어닥친 것이다. 그들은 모두 국군 복장으로 들어왔다. 그러므로 유엔군은 그들이 괴뢰군들인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국군복장을 한 괴뢰군들은 유엔군과 함께 섞였다.
거창읍 교회 앞 강둑 아래에 유엔군이 엎드렸다. 강 건너 쪽에는 유엔군과 괴뢰군이 섞여 엎드렸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8월의 하늘에는 달이 없고, 별싸락만이 희뿌연 빛을 피우고 있었다.
북괴군 제4사단 소속의 보병들이 다람쥐처럼 소리없이 날쌘 동작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교회당 안에는 기도하기 위하여 몇 분이 들어 있었다. 남영환 전도사와 장익전 여전도사, 그리고 박또임 집사와 신용진씨 그 외 몇 분이 기도하며 밤을 지냈다.
주 목사는 어둠을 뚫고 부지런히 교회로 향하였다. 그러나 집에서 불과 얼마를 못가서 통금 사이렌이 울리는 것이었다. 그냥 가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 싶어 옆 길로 빠져 죽전 대밭으로 들어갔다. 그곳 대밭 속에서 주 목사는 밤새도록 기도했다.
한편 교회당에 있는 성도들은 소리도 크게 지르지 못하고 조용 조용 기도하고 있었다. 밖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에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조용히 기도하였다.
너무나 조용한 밤이었다.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새벽 4시가 되었다. 교회당 종 칠 시간이다. 사찰이 밖으로 나갔다. 새벽 기도회를 알리는 종을 치기 위하여서이다.
교회에서 종을 치는 것은 반드시 신자들이 모이라는 뜻에서만 종을 치는 것은 아니다.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또한 교회가 살아있다는 의미에서 종을 친다. 한 사람이라도 신자가 앉아 있다는 의미에서 종을 친다.
전시에는 더욱 그러하다. 교회당에 종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 땅은 비극이다. 교회당에 종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 땅은 고독하고, 그 땅은 사지인 것이다.
사찰은 종 줄을 잡았다. 그리고 힘있게 당겼다.
종소리가 고용한 새벽 공기를 깨고 요란하게 울렸다.
그 때였다. 종소리를 기다리고나 있은 듯.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사격이 가해진 것이었다. 총소리가 거창 창공을 덮었다. 탄환이 불줄기를 이으며 공간에 수 백개의 포물선을 그렸다.
탄환은 교회당 유리창을 뚫고 벽에 박히기도 하였다.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총성은 계속되었다. 한참 조용해졌다가 다시 접전이 되곤 하였다.
오후 3시 경에야 총성이 멎었다. 거창 서쪽의 제3대대가 후퇴하므로써 제34연대는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29일 저녁 무렵, 제34연대는 결국 거창을 후퇴하여 산제리의 삼거리로 들어서게 되었다. 미군은 후퇴하면서 도로와 교량을 파괴하였다. 북괴군이 급히 좇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남영환 전도사는 오후 3시 경에 교회당 밖으로 나왔다. 강둑 아래에 미군의 시체가 3구나 넘어져 있었다. 성경 찬송을 겨드랑이에 끼고 걸어가는데,
“어디 가는 거야?”
“인민군 한명이 길을 막았다.
“교회당에 기도하려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전시에 기도가 다 뭐야?”
“밖에 나돌아 다니지 마시오.”
예외로 말이 부드러웠다.
남 전도사가 주 목사 사택으로 가니, 가족들과 주 목사가 염려하고 있었다.
“무사했군요.”
주 목사의 착 가라앉은 부드러운 음성이 흘렀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주 목사 댁에서 예배를 드렸다.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주 목사 사택을 임시 예배처로 삼았다. 거창읍 교회 교인들은 400여명 정도였는데, 백명 정도가 피난 나가고 나머지는 가정에 있었다.
주 목사는 이들을 가까운 지역별로 모일 수 있도록 지시를 했다. 여섯 군데를 모이는 장소로 정하였다. 지역이 가까운 가정에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 곳은 주 목사가 예배인도를 맡고, 세 곳은 남영환 전도사가 맡도록 하였다.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4백명 가까운 교인이 거창읍 교회에 모였지만, 교역자 생활비는 형편이 없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인들은 교역자 생활비에는 후하지 못한가 보다.
교역자는 의례히 고생을 해야 하고, 생활이 어려워야 하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다. 교역자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실제 대접하는 일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교인들은 교역자를 천사로 대하였다. 또한 천사가 되기를 원했다. 밥을 먹지 않고, 옷을 입지 않는 천사 말이다. 병이 날 염려나, 아무리 뛰어도 피곤하지 않는 그런 천사 말이다.
자녀를 낳지 않고 자녀 교육이나 가정 문제에 하등 구애를 받지 않는 그런 천사가 되기를 교인들은 원한다. 그러나 실은 교역자가 천사가 아닌 것이다. 교역자도 사람인 것이다.
한 끼만 밥을 먹지 않아도 힘이 빠지고, 병에도 약한 사람이다. 교역자의 옷은 천사의 옷이 아니고, 교인들이 입고 있는 그런 같은 천으로 만들어진 옷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뽑아 세우신 믿음의 사람이다. 믿음은 강해도 인간은 약할 수 있다.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교역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위하는 일이다.
더욱이 전쟁통에 교역자의 생활비가 전달될 리가 없다. 평화로운 때에도 호강의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환란 때엔 제일 먼저 고난의 덕을 보는 것이 교역자이다.
교회 회계가 피난 나가면서 맥추 연보한 헌금 5천원과 피보리 4가마를 맡긴 것이 있었다.
“어떻게 될는지 모르니 생활에 쓰십시오.”
주 목사는 이것을 나누었다. 자신이 피보리 1가마니, 남전도사가 1가마니, 추 교경 전도사에게 1가마 보내고, 장익진 여전도사에게 1가마 주었다.
돈도 나누었다. 추교경 전도사는 지산 교회에 파송한 전도인이었다.
앞으로 피보리 1가마로 생활하여 나가야 했다.
매일처럼 보리죽을 끓였다. 보리죽이지만 끊일 수 있는 것만 다행이었다. 보리죽을 먹고도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 심방하며, 가정 집회를 인도하였다.
4. 폭격 속의 십자가 자세
주 목사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교인들의 집을 돌보기 위해 시내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냥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무더운 한낮이었다.
희뿌연 하늘엔 솜구름이 피어 오르고 하늘에서 내려 쪼이는 따가운 태양열과 땅에서 솟는 지열이 사람을 견딜 수 없게 하였다.
훌훌 벗고 물에 뛰어 들고 싶은 한낮의 거리를 주 목사는 흰 두루막을 입고 모자를 쓰고 오른쪽 겨드랑이에 책 가방을 끼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공습 경보가 울렸다. 금시 거리에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 방공호 속에 숨은 것이다. 그러나 주 목사는 태연히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쌩-”
바람을 째는 소리가 하늘에서 났다.
비행기가 낮게 지나가며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주 목사는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가방을 발 앞에 놓고 두 팔을 십자가 형으로 펴고 서 있었다. 숨을 줄을 모르고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이다. 얼마 후 비행기는 사라지고 공습 경보 해제 싸이렌이 울렸다.
주 목사는 팔을 내리고 가방을 다시 주워 겨드랑이에 끼고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괴뢰군이 있었다.
세 명의 괴뢰군이 주 목사 앞에 나섰다.
“야, 이 늙은이야. 이제 막 무얼 했어!”
귀가 쨍 하도록 소리를 질렀다.
“내가 무얼 했단 말이오?”
“공습 경보가 울리고 피하라고 소리쳤는데도 그냥 서 있었지 않았오!”
“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잔소리 말아! 양고자들에게 무슨 신호를 보냈지?”
“신호를 보내다니요?”
“스파이 노릇 한 거야! 비행기에 암호를 보냈지? 이 늙은이야!”소리를 빽 지르면서 괴뢰군은 따발총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툭툭 쳤다.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란 걸 알렸을 뿐입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를 보여 준 것이요.”
괴뢰군들은 주 목사를 끌고 내무서까지 갔다. 두루막을 벗기고 꿇어 앉혔다. 그리곤 얼마간 야단을 치더니,
“앞으로는 조심하시오.”
그리곤 보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주 목사는 수요일 저녁 예배 준비를 하였다. 사택에 교인들이 모여왔다. 아무런 일도 없는 듯 차분히 예배를 인도하였다.
5. 권총 앞에 태연히
유엔군이 후퇴한 거창 시내는 완전히 인민군 세상이었다.
무지한 인민군들은 난폭한 정치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폭격기로 인해 파괴된 교량을 놓겠다고 작업을 시작했다. 주로 밤에 일을 했다. 물론 그들은 감독이고 노역자는 시민이었다.
어둠살이 내리면 작업은 시작되었다. 집집마다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거창에서 삼십리 떨어진 곳에 웅양교회 배수윤 전도사가 찾아와 그날 밤을 함께 지냈다. 배 전도사는 그때의 주 목사의 따뜻한 사랑과 권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눈물을 글썽인다.
주 목사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말씀은 생명력 있는 말씀이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며 죽어 주셨는데, 우리도 주님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날 오후였다. 가정 예배를 보고 있었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나를 항상 거느리고 나를 친히 거느리네
나를 항상 거느리고 나를 친히 거느리네”
괴뢰군 장교가 찬송 소리를 듣고 들어 왔다.
“이게 웬 소리요, 엉?”
권총을 맨 붉은 가죽띠가 유독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뭐 하는거요?”
괴뢰군 장교는 얼굴을 찡그리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주 목사는 마루에서 내려섰다. 마루가 몹시 높았다. 신을 신고 괴뢰군 장교 앞에 나선 주 목사는,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하고 그를 맞아 들였다.
마루에서는 여전히 사모님과 어린 자녀들과 배수윤 전도사가 계속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지금 무엇하고 있는거요?”
괴뢰군 장교는 다구쳐 물었다.
“우리 지금 에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 목사의 음성은 침착하였다. 괴뢰군 자욕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까만 눈을 똑바로 쳐들더니 오른 손으로 권총을 잡아 뽑았다.
권총을 뽑아 든 괴뢰군 장교는 총구를 주 목사 가슴에 밀어대면서,
“지금이 어느 땐 줄 알고 야소를 믿고 있소? 동무는 정신 나간거 아니요?”하고 윽박질렀다.
“맑은 정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예배하는 일입니다.”
너무나 태연한 주 목사의 얼굴엔 권총의 위협보다 더 무서운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루에서는 여전히 찬송소리가 계속되었다.
괴뢰군 장교는 자신이 이상한 세계에 있는 듯, 어리둥절하여 흥분된 자기를 수습하였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이상한 노인에게 권총을 쏜들 탄환이 들어 갈 것 같지 않는 위엄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공포에 질린 것은 상대방이 아니고 권총을 쥐고 있는 자신이었다. 괴뢰군의 얼굴이 무섭도록 새파래졌다.
배수윤 전도사는 뜰에서 되어진 광경을 바라보면서 찬송을 계속 불렀다.
“올라 가십시다. 같이 예배를 드립시다.”
주 목사는 괴뢰군 장교의 가련한 영혼을 진정 사랑하는 뜻에서 권면을 하였다. 장교는 스르르 권총을 총집에 집어 넣었다.
마루에서는 찬송이 끝나고 주기도문을 암송함으로 예배를 끝내고 있었다.
“동무들은 야소 믿는 일 분수에 넘치오. 예배하는 것 합당하지 않아 권면하러 왔는데 결국 동무들은 동무들 할 일 다하고 말았으니 이래서 되갔소?”
불안한 표정을 지우면서 말을 뱉았다.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장교의 눈이 번뜩 빛을 내었다.
“나 이 앞에 다리 놓는 일 맡은 감독이오. 일 하러 나오시오!”
장교는 돌아섰다.
“종종 오십시오.”
주 목사는 나가는 괴뢰군 장교를 향하여 말을 던졌다. 교량 작업에 나오라고 온갖 성화를 부렸지만 주 목사는 결코 나가지 않았다.
주 목사는 교인들 심방하는 일에 더욱 분주하였고 기도하고 성경읽는 일에만 주력하였다.
6. 거절한 기독교 연맹조직
하루는 내무서에서 인민군들이 주 목사와 남영환 전도사를 호출하였다. 주 목사는 남 전도사와 함께 내무서로 갔다.
책상 앞에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인민군 장교가 주 목사와 남 전도사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오서 오십시오. 반갑수다, 목사 동무!”
주 목사와 남 전도사는 장교의 오만에 찬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 오늘 오시라구 한 것은 긴요한 의논이 있어서 그랬수다.”
그는 말의 서두를 장황히 장식하려 했는데 잘 안되는지 초조의 빛을 얼굴에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독교 연맹을 조직해 달라 이 말입니다.”
주 목사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서 인민군 장교의 눈을 피하여 옆 창문을 쳐다보았다.
“우리 북조선 인민공화국에서는 기독교 교직자들이 다 기독교 연맹에 가입되었수다. 이 거창에서도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정치를 따라야 하므로 반드시 이 일에 협조해야 하겠수다.”
주 목사는 어떤 문제가 부닥치면 침묵하는 버릇이 있다. 주 목사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에다 두었던 시선을 장교의 얼굴쪽으로 돌렸다.
“말을 해 보우.”
장교는 눈을 부라리고 책상을 꽝 쳤다.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하겠오, 아니하겠오, 말을 하시오!”
주 목사는 간단히 대답했다.
“못합니다.”
“뭐라고? 썅, 이 영감쟁이 맞좀 봐야 알간?”
장교는 눈에 살의를 띄우고 역정을 냈다.
“할 수 없으니까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썅, 그냥 죽음을 맛 보관?”
전류를 느끼게 하는 음성이었다.
장교의 얼굴엔 살기가 돌았다.
남영환 전도사가 장교 앞에 나섰다.
“여보세요, 선생님. 우리는 죽는 것을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협조를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협조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가 협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못한다는 것 아닙니까?”
남 전도사의 말은 또박또박 철성음으로 내무서 안을 흘렀다.
“그래, 이승만에게는 협조하면서 우리에게는 협조할 수 없다 이말이디?”
“내 말을 자세히 들어 보십시오.”
남 전도사는 침착성을 잃지 않고, 흥분되는 어조를 조절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여기 계신 이 어른은 일제 시대에도 신사참배 반대를 하시다가 투옥되어 수없이 고문을 당하시고 역경을 겪으셨습니다. 평양 형무소에서 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수난을 당하시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위해 제헌국회의원 출마를 거창 시민들이 권유했지만 굳이 거절하셨습니다. 못견딜 정도로 무투표 당선으로 출마를 요구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거창 시민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종교는 정치와 구별됩니다. 목사나 전도사가 정치에 가담하라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연맹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자유 아닙니까?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의 종교 자유입니다.”
인민군 장교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남 전도사의 말이 끝나자 장교는 부드러운 말로,
“아 그렇습니까? 일제 압박하에 수고가 많았습니다.”
하고 말을 씹는 것이었다.
“무슨 교파입니까?”
“장로교입니다.”
“그렇습니까? 실은 나도 함경도 있을 때 장로교에 한 삼년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그 교회 권사였지요.”
좀 전의 살벌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미풍이 일 듯 내무서 안은 시원하였다.
“사실은 목사가 정치운동에 가담해서는 아니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목사님, 한 가지만 청을 들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장교의 얼굴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무엇 말입니까?”
주 목사는 궁금한 듯 물었다.
“교인들의 명단을 하나 적어 주시라우요.”
“안됩니다.”
그러나 주 목사의 거절에 장교는 전처럼 역정을 내지 않고 조용히,
“왜 안된다는 거죠?”
하고 질문하였다.
“우리 손으로 어떻게 교인들의 명단을 적어 준단 말입니까? 교역자가 교인을 파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신자라 하지만 내일 신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전일에 한 삼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신자가 아니시지요. 그와 같습니다.”
장교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수긍이 가는 모양이었다.
“종습니다.”
장교는 주 목사를 한 번 더 흘깃 바라보더니,
“가 보시오.”
하고 정중히 말했다.
주 목사는 나오면서 한 마디 던졌다.
“전일에 에수님을 미등셨다니 계속 믿으십시오.”
그 이후, 인민군들은 주 목사와 남 전도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교회에 대하여 별반 간섭을 하지 않았다.
7. 모든 것 주께 맡기고
1950년 9월 1일. 더위는 아직 대지 위에 남아 머물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열기를 안고 쏟아졌다.
주 목사는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로 들어섰다. 지방 순회를 위해서였다. 안의를 둘러서 개평으로 들어갔다. 해가 지고 저녁 노을이 타고 있었다.
개평 교회 사택은 이미 인민군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무넹 윗 동리로 올라갔다. 정팔현 장로 집으로 들어갔다. 추교경, 이종대 전도사도 그곳에 와 있었다.
정 장로는 의사일을 보았기에 생활이 촌에서는 좀 나은 편에 속했다. 인사를 나누고 교인들의 동태에 대해서 들었다.
당시엔 삼군(함양·거창·합천)에서 목사는 주 목사 한 분 뿐이었기에 주 목사의 일은 벅찼다. 당회장 시찰장 모두를 겸하고 있었다.
식사 후, 교인들과 개평 교회 제직들이 모여 왔다.
주 목사는 앉은 자리에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마태복음 24장을 봉독하고 그 내용을 설교를 시작하였다.
‘환란 때 신앙을 대비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주 목사는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말씀을 전했다.
“주님의 재림 전은 환란의 때입니다. 그때는 불법이 성한 때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도처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 환란 때를 신앙으로 잘 이겨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 그리스도 국가는 결국 망합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독일이 그러했습니다. 일본이 망했습니다. 그들이 다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앙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등잔 불빛을 보고 날벌레들이 모여 들었다. 모기만이 잔인한 소리로 신경을 날카롭게 일으켰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졸거나 딴 생각으로 얼굴을 옆으로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주 목사를 향하여 앉은 성도들의 동공은 초롱초롱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뒷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 한 명이 열심히 주 목사의 설교를 필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불빛 속에서 눈을 아래로 깔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주 목사는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여전히 힘있게 설교를 계속하였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일어난 짐승이 권세를 가지고 성도를 해합니다. 이 짐승은 나라를 얻고 백성을 다스립니다. 이 짐승으로 인하여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심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이 짐승은 자기를 경배하게 합니다. 자기를 경배하지 아니하면 죽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은 결코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합니다. 죽음을 당할찌언정 짐승에게 경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주 목사의 눈빛은 등잔 불빛에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지금은 어둠의 시대입니다. 짐승이 권세를 얻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신앙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만일 신앙을 바로 가지지 못하고 넘어지면 망합니다. 멸망합니다. 기도로 힘을 얻어야 합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환란 때에 끝까지 참고 견디며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으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주 목사의 얼굴가엔 백전노장의 여유가 역력히 피어나고 있었다.
예배가 끝났다. 교인들과 일부 제직자들은 다 가고, 의사 정 장로와 이종대, 추교경 전도사와 주 목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칠은 구두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험상궂은 사나이 몇이 불쑥 들어닥쳤다.
“동무들, 같이 좀 가 줘야 하겠소!”
느닷없이 말을 뱉고 어깨를 내미는 사람은 정씨 청년이었다. 정씨는 좌익계 치안대원으로 같은 대원 몇과 정 장로댁에 나타난 것이다.
이 정씨 청년은 허순길 박사(현 고려신학대학 교수)의 국민학교 한 해 선배격인 토박이 개평 사람이었다. 정씨는 그 형제들이 모두 좌익계 인물들로 당시 개평에서는 악명 높은 자였다.
그의 동생은 소년단 단장으로 못된 짓을 많이 저질렀다. 자기 집 사랑채를 소년단 본부로 삼고 개평 지방 소년들을 강제로 대원을 만들어 좌익계 일을 도우도록 하였다.
당시 허순길 박사도 그들에게 욕을 보았다. 소년단에 가입하지 않으려 할 때, 정신적 육체적 탄압을 가해 온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사이요, 사상 문제가 없었을 때는 함께 놀던 골목 친구들이었지만, 동란이 일어나자 완전히 딴 사람으로 행사했다.
그의 부친은 보도 연맹 사건으로 죽었다. 그러니 그의 형제들은 원한 관계도 있고 해서 직독히 굴었다.
정씨는 주 목사를 향하여,
“당신이 목사요?”
하고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내가 목사입니다.”
“같이 갑시다.”
주 목사는 일어나 신을 신었다.
“당신들도 같이 갑시다.”
정 장로와 두 전도사도 따라 일어났다. 정씨는 함께 온 치안대원들이 그들을 둘러섰다.
정씨가 앞장 서고, 주 목사가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정 장로와 두 전도사가 서고 치안대원들이 뒤에 걸어갔다. 무더운 밤이었다.
정 장로댁에서 내무서까지는 오릿길이었다. 오릿길을 그들은 걸어서 갔다. 내무서에 들어선 정씨는 기세가 등등하였다.
“목사 동무! 무슨 설교했오?”
“성경에 있는 내용을 설교했지요.”
“짐승 설교 했다며?”
“했습니다. 성경에 있는대로 했습니다.”
“재미없는 줄 아시오!”지나치게 분개하는 어조로 말을 뱉았다. 정 장로와 추, 이 전도사도 개별적으로 심문했다.
“욕을 좀 볼 줄 알앗!”
찌릉 찌릉 소리치더니 정씨는 미닫이 문을 열고 밖으로 휭 나가 버렸다. 내무서 안이 조용하였다. 심한 공포가 이 장로와 추, 이 두 전도사와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자가 나가면서 던진 말은 기분 나쁜 말이었다.
“욕을 좀 볼 줄 알앗!”
욕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때는 법이 없었다. 총이 법이고, 치안대원 그들의 행동이 정의였다. 그러한 때이므로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목숨이 가차없이 짓뭉개지는 공산주의 치하였다.
이 날 주 목사 일행이 연행되어 온 것은 정 장로 댁에서 예배 드릴 때,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설교를 필기하던 그 젊은 여인의 고발로 인해서였다.
그 젊은 여인은 내무서 비밀직원이었다. 그 여인은 주 목사의 설교를 시종 다 필기하여 치안대에 보고했던 것이다.
내무서에 구금된 그들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불의한 세대가 오면 언제고 이런 변을 당하기 마련인 것이 기독신자이다.
주 목사의 얼굴엔 하등의 공포나 초조의 빛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주 목사는 정 장로와 두 전도사를 바라보았다. 주 목사는 두려움에 싸인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편이십니다. 우리가 순교 할 때면 하나님께서 데려가실 것이고, 아직 때가 멀었으면 또 살아나게 됩니다. 염려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감사할 것 뿐이지요.”
주 목사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용기가 솟아 난 것이다. 주 목사는 음석을 낮추어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되지 않더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인가?”
주 목사는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때가 왔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자 비스듬이 누었다. 주 목사는 눕는가 싶더니 이내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자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는 절박한 순간에 잠이 오다니 도저히 속인들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어나! 가자!”
하는 소리만 들리면 끝나는 것이다.
죽는 것이었다. 세상과 관계없는 영인이 되는 것이었다. 육체는 나무 둥치처럼 길 가에 뒹굴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시간을 기다리는 초조한 그 순간에 잠을 자다니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태평스럽게 잠자는 사람이 있다. 주남선 목사 바로 그 분이었다. 정 장로와 추, 이 두 전도사는 깊이 잠든 주 목사가 한없이 부러웠다.
‘모든 것을 주께 맡기라’고 말씀하시던 주 목사는 과연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있었다.
초조와 긴장 속에 시간은 흘렀다.
“삑-”
하고 신경질을 짓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 장로와 두 전도사는 반사적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 목사는 여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일어나시오!”
치안대원의 날카로운 금속성 음성이 울렸다. 주 목사가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그 때였다.
“아니 목사님 아니십니까?”
뒷 쪽에서 긴 가죽 장화를 신은 사나이가 주 목사 앞에 나섰다.
“목사님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그는 치안대 대장이었다.
“누구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주 목사는 치안대장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그러실 것입니다. 전 전에 개평 교회에서 목사님께 학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주 목사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감돌았다.
“목사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까지 오시게 했는지····· 죄송합니다. 돌아가십시오. 제가 있는 한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고맙소!”
주 목사와 정 장로와 두 전도사는 치안대장의 호의로 정 장로 댁으로 다시 돌아왔다. 주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알 수 없는 것인가?
다음 날 아침, 교인들이 늦게야 소문을 듣고 인사하러 정 장로 댁으로 왔다.
점심 때였다. 할머니 집사 한 분이 점심밥을 해왔다. 쌀밥이었다. 이 비상시에 쌀밥을 지어 세 그릇이나 담고, 칼치를 구워왔다. 주 목사는 놀란 눈으로 밥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리밥도 못 먹는데, 쌀밥이 웬 일이십니까?"
할머니 집사는 굽은 허리를 가볍게 펴면서,
“우리 목사님 대접하려고 정성드려 차린 것 아닌교. 목사님 대접 안하고 누굴 대접해야 하는교? 쌀밥 먹을 가치도 없는 인간들은 쌀밥에 고기반찬에 양 볼이 미여지도록 먹는데, 진작 쌀밥을 먹어야 할 어른들은 고생을 하고 굶주리니 이놈의 세상 빨리 끝장이 났으면 좋겠다.”
할머니 집 사는 이마에 송알송알 솟아오른 땀을 주먹손으로 문질렀다. 주 목사의 입에서 찬송이 나왔다.
“구주여 해변서 떡덩이를 떼시어
인민을 먹였으니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그같이 나누어 주옵소서.”
8. 형님이 별세하던 날
9월 2일, 토요일이었다. 주 목사는 개평에서 주일을 본 교회에서 지키기 위해 거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읍으로 들어서는 살목의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길이 너무 비탈져 미끄러웠다.
더위가 전신을 감고 있었다. 발에는 먼지가 뿌옇다. 땀이 이마를 타고 언저리를 돌다가 눈 가장자리로 스며드는 것이었다. 손수건을 내어 땀을 닦으며 길을 걸었다.
그 때, 발목이 뼈걱하면서 굽혀져 주 목사는 비탈길에 그냥 주저않고 말았다. 발목에서 통증이 왔다. 다시 일어나 걸으려고 했으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한다.
발목을 삔 것이다. 비탈길에 앉은 채 얼마를 있었다. 전신에 비지땀이 솟는다. 거창 시내 하늘을 몇 차례 미 전투기가 날고 폭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남영환 전도사는 이날 교인들 집을 심방하고 돌아가는 길에 주 목사 사택을 들렀다. 주 목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백씨 주남재씨가 마루에 앉아 사과를 먹고 있었다.
주남재씨도 애국지사이다. 그는 초대 거창 군수를 지낸 바 있어 거창에서는 상당한 덕망을 얻고 있었다. 유독 주 목사는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주 목사는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사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급한 일이 없으면 꼭꼭 형님댁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갔다.
죽전 사람들은 주 목사의 이 예의있고 사랑이 깊은 모습을 보고,
“참, 세상에 형제간 치고 저렇게 사이좋은 형제간은 처음 보았어!”
모두들 칭송이 자자했다.
“주 목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하늘이 내려준 사람이라구. 형을 어떻게 부모 섬기듯 할 수 있냐 말이야. 만사에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구······”
남영환 전도사가 들어가니 마루에 안장 사과를 먹고 있던 주 남재씨가 반색을 하면서,
“남 조사, 더운데 수고가 많소, 자 사과나 한 개 먹어요.”
사과를 한 알 내밀었다. 남 전도사는 반갑게 사과를 받아 깍았다. 막 사과를 입에 넣어 한 입 깨물려는 순간,
“우르르 꽝!”
하고 폭탄이 떨어진 것이었다. 폭탄은 사택 사랑채 위에 떨어졌다. 폭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폭격이 끝나고 조용해 지자 남 전도사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주남재씨가 보이지 않았다. 방공호 속으로 함께 들어간 줄 알았는데 들어가지 않았는가 보았다.
밖으로 나와 찾아 보았지만 없었다. 혹시나 해서 집으로 찾아가 봤지만 역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인이 어디 갔을까?”
모두들 걱정을 했다. 길가나 둑쪽에 시체가 많이 누어 있었다. 주로 인민군들의 시체였다.
주 목사는 이날 어두워질 무렵에 겨우 발을 절면서 들어왔다. 얼마간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치고 피로에 쌓인 그의 육신을 휴식하기 위하여 발목을 다치게 하신 것인지 모른다.
주 목사는 백씨의 행방불명 소식을 듣고 무척 염려하였다.
삼일 후였다. 죽전 삼거리 모퉁이 집에서 주남재씨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폭격에 쓸어진 집을 일으키는데 시체가 깔려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주 목사는 형님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다. 자신도 발목을 다치지 않고 줄곧 왔더라면 어떤 변을 당하였을는지 몰랐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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