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같이 빛나리 - 제7,8,9장
제 7장 평양으로 가는길
1. 거창 경찰서에서 진주로 압송
거창 경찰서에 구금된 다음날.
1940년 7월 17일이었다. 진주 경찰서 유치장으로 압송한다고 하였다. 거창 경찰서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고 진주로 넘긴다는 것이었다.
상부의 명령인 것 같았다. 중죄로 다스릴 모양이었다. 주 목사는 모든 걸 체념하였다.
산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지만 주 하나님을 계명대로 사랑하며 살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땅 위에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손에 무거운 수갑이 채워졌다. 자동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어느듯 알고 어린 딸 경은이를 업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내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꼭같이 괴로웠다. 세 살난 경은이가 엄마의 등에서 아빠를 보고 안다고 손을 흔든다.
주 목사는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눈에서 말간 물기가 빙그르르 감돌다가 땅에 떨어졌다.
아내가 주 목사 가까이 다가섰다.
“끝까지 참으세요.”
아내는 힘을 주어 말했다.
“굴하면 안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세요.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주 목사의 시선이 아내의 시선에 짧게 부딪쳤다.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다시 아내가 다짐을 했다. 주 목사는 입을 꼭 다문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주 목사가 수갑찬 손등으로 얼른 눈시울을 닦고 자동차에 올랐다.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듯 했지만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자동차는 시내를 빠져 미루나무가 줄지어 선 신작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 가면 살아서 이 길을 다시 돌아올 수 없을런지 모른다.
누가 살아 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의 가슴에는 순교, 순교의 아름다운 제물이 되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정든 고향 거창이 뒤로 물러가고 있었다.
인정을 나누는 소박한 이곳에 태어나, 자라고, 교육을 받고, 한 땐 군수의 비서관으로 호강도 누리며 윤택하게 살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을 받고 인간적인 부귀공명을 버리고 복음과 함께 뜻있게 살기를 원하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냈다.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그리하여 복음을 전했다.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고 사명감에 불타 목회를 하였다.
삼군(거창, 함양...등)시찰장으로 도보로 다니며 일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버려두고 거창을 떠난다.
누가 이런 슬픈 비극을 가져다 준 것인가? 정든 교회 교우들과의 뜨거운 관계를 끊게 하고 사랑하던 가족마저 버려둔 채 누가 저 손에 수갑을 채워 데려가는가? ‘역적!’누가 만든 이름인가? 누가 붙인 대명사인가?
그는 지금 비애국민이란 오명을 쓰고 아무의 동정도 받지 못한 채, 끌려가는 것이다. 가야산, 덕유산, 지리산은 변함이 없건만 인간만이 변한 것이다.
왜 인간은 변하는 것인가?
그 마음에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옳고 바른 것을 분별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옳지 않은 것도 옳다고 교육을 시키면 그런 것인가 보다고 따라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그가 접해 있는 환경에 따라 그 마음도 좌우되는 것이다.
주 목사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거창읍 교회 교인들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마음은 원이지만 환경에 약한 신자들! 그들이 잘되기 만을 마음으로 빌면서 거창을 떠났다.
모든 것은 떠났다. 이제 다시 살아 올 수 있다는 것은 아예 기대밖이다.
주어진 환난을 잘 이기고 끝까지 참아 순교하는 길 밖에 그에겐 없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
“끝까지 참으세요.”
힘 주어 하던 말이 귓가에 살아 쟁쟁하다.
‘끝까지 참아 견뎌야지.’
자동차는 안의 함양을 지나 진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주 목사를 실은 자동차는 저녁 늦게야 진주 경찰서 앞에 정차하였다.
형사들의 지시를 따라 차에서 내려 유치장으로 들어섰다. 더위가 유치창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바람 하나 통해지지 않는 유치장 안에 주 목사는 감금이 되었다.
다음 날, 주 목사는 고등계 김을도 형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는 한국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보다 더 지독한 편이었다. 김을도 형사는 주 목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고 다니면서 설교한 설교 제목과 요지를 상세히 말하라고 하였다.
주 목사는 서슴없이 이야기 해 주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요지의 설교를 하자 다른 형사가 기록을 하였다. 설교가 끝나자 김 형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천황은 어떻게 생각하나?”
“천황은 일본의 임금이오.”
“그 이상은 생각지 않나?”
“생각지 않소!”
“청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야!”
“예수님의 재림시엔 그렇게 됩니다.”
“그 때 천황도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인간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에 천황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요.”
“당신은 지금 불경죄를 범하고 있는거야.”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신성불가침의 천황에 대하여 신성모독죄를 범한거야, 용서할 수가 없어.”
여기서도 심한 고문은 계속되었다. 주 목사는 진주 유치장에 있는 동안 4차에 걸친 심문과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하였다. 이젠 고문 종류에 따라 그것이 얼마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중에도 매일 성경을 암송하며 찬송을 부르면서 그 쓰라린 고통의 유치장 생활을 견디어 나갔다.
그는 때마다 영혼으로 찬송을 불렀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아련한 기쁨이 가슴에서 뜨겁게 피어 올랐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주 목사의 심령엔 은은한 즐거움이 먼 하늘 끝에서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감사와 기쁨 가운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 옥중 동지들
주 목사는 이 곳 진주 유치장에서 최덕지 전도사를 만났다.
최 전도사도 일차 검거되어 이 곳에서 1년을 지내다가 병보석으로 지난 해 4월 중순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계속 각 지방으로 반대운동을 하고 다니다가 1940년 6월 23일 동영에서 검거되어 이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녀를 만나서도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취조가 있을 때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을 철장 속에서 바라보는 정도였다.
7월 중순경, 방가운(?) 동지가 유치장에 들어왔다.
황철도 전도사였다. 그는 창녕군 남지신 영수 집에서 연행되어 창녕 경찰서로 넘어갔다가 진주 유치장으로 압송된 것이다.
주 목사는 황 전도사를 만나 마음으로 반가웠지만 체질 약한 것이 걱정이 되었다. 황철도 전도사는 이 곳 유치장에 온 지 3일이 지나 심문을 받게 되었다. 두 형사가 황철도 전도사를 데리고 경찰서 안에 있는 신사 앞에 세워놓고 소리쳤다.
“절을 해!”
굳굳하게 선 황 전도사는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못합니다.”
“해!”
“못합니다.”
형사들은 그를 끌고 취조실로 갔다.
몽둥이를 들어 치는 것이었다.
형사들의 몸 속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잔인한 힘이 숨어 있는듯 하였다.
황 전도사는 많은 피를 흘리고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다. 물을 끼엊어 다시 정신이 나게하여 유치장으로 보냈다. 심문은 며칠 후에 또 계속되었다.
하루는 고문을 받던 황철도 전도사가 주 목사의 염려대로 견디지 못하여 기절해 버렸다. 강이라는 형사가 주 목사를 불러내었다.
황 전도사를 업고 가라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황철도 전도사가 쓰려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도리깨로 사람을 친 것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황 전도사를 부축하여 등에 업었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려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주 목사는 자신의 수난보다 동지의 수난을 보고 더욱 가슴아파 하였다.
1940년 9월 20일.
많은 동지들이 검속되어 유치장에 들어 왔다. 강문서 장로, 이봉은 권사, 강문서 장로의 장남 강찬주, 김여원, 박성근 목사, 김점룡 전도사등이다.
그들은 하동, 합천, 진주지방 신사참배 반대운동 책임자들로 활동하다가 검거된 것이다. 동지들이 많아지니 위로가 되었다.
서로 말은 할 수 없지만 심문을 받기 위하여 오고 가는 길에 얼굴을 대면할 수 있고 무언의 격려를 주고 받았다.
3. 기도의 제목
더운 열기가 유치장 안에 기어다니고 있었다.
취침 시간이 되어 자리에 누웠는데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전신이 뜨거운 쇠솥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바람기라고는 그의 콧김 뿐이었다.
주 목사는 일어나 기도를 하였다. 기도하던 중 깜박 졸음이 밀려와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주 목사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진주 시내였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었다.
어느 교회 앞에 발이 멎었다. 그 때는 진주에 교회가 두 개 밖에 없었다. 그 중 한 교회에서 풍악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요란한 소리였다. 귀를 째는 씨그러운 소리였다. 주 목사는 교회 뜰로 들어섰다. 풍악 소리는 교회당 안에서 들려 오는 것이었다.
교회당 안에 들어서니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예배 시간에 농악대들이 풍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주 목사는 강단에 서 있는 목사에게로 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배시간에 풍악을 울리다니‥‥”
목사는 주 목사의 말에 계면쩍게 피식 얼굴에 웃음을 피우면서,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라는데‥‥”
입을 열었다.
“뭐라구요?”
주 목사는 눈을 떴다.
꿈이었다.
그는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교회가 시국을 인식하고 신사참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원통한 일이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풍악이 웬일인가? 오늘 한국 교회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풍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이고, 복음만을 전해야 하는 신성한 강단이 시국 인식을 위한 연설자의 연단이 되고, 불의한 자들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유희장이 되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주 목사는 이 밤에 세가지 내용으로 기도를 하였다.
“주님! 이 땅에 어서 속히 해방을 주옵소서! 불의한 자들, 침략자들, 우상숭배 자들이 다 물러가게 하옵소서.”
이것이 첫 번째 기도였다.
“주여! 이 땅에 신사가 하나도 없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시사를 다 불태워 비리소서, 신사는 이 땅에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이 두 번째 제목이었다.
“주님, 이 땅의 교회를 정화시켜 주옵소서!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만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시고, 이 땅에 수 많은 교회를 세워 주시고, 이 백성들이 주 예수님을 다 믿게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세 번째 기도의 제목이었다.
주 목사는 이날 이후, 세 가지 기도의 제목으로 밤이고 낮이고 기도하였다.
주 목사의 이 기도는 옥중 성도들 전체의 기도이기도 하였으리라. 이 기도는 6년 후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4)
주님의 살아 있는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4. 공밥 한 덩이에도 감사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촌에는 햇곡식밥을 먹을 때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햇쌀밥에 김치 깍두기 된장국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유치장의 주 목사 앞에서 주먹밥 한 덩이와 깨진 사발에소금국 한 국자가 놓여있을 뿐이다.
주먹밥 이것은 사실 밥이 아니었다. 썩은 콩 부스러기와 좁쌀들, 그리고 밀과 보리가 섞여 있는 잡곡덩어리였다.
주 목사는 그것을 앞에 높고 감사 창송을 부른다.
“구주여 해변서 떡덩이를
떼시어 인민을 먹였으니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그 같이 나누어 주옵소서“
이 찬송은 주 목사가 평소 식사전에 즐겨 부르던 찬송이다.
“내 주를 찾고자 갈급하여
영생의 말씀을 보나이다
해벼서 떼신떡 복됨 같이
성경도 복되게 하옵소서“
가정에서나 심방시에 부른 찬송은 입으로 부른 때가 많았지만 유치장에서 부르는 찬송은 영혼으로 불렀다. 감옥은 은혜 받는데 제일 좋은 곳이라고 출옥 후 주 목사는 늘 말씀하셨다.
“이 복을 주시면 종된 것과
날 매는 사슬을 곧 벗고서
내 맘에 평안함 늘 있으며
또 높은 구주를 만라리라.“
전일 가정에서 밥상을 받았을 때나, 교인들 집에 초청받아가서 식사를 하게 될 때 주 목사는 이 찬송을 1절만 불렀다.
그러나 유치장 안에서는 3절까지 즐겨 부른 것이다. 가축의 사료같은 콩밥 한덩이, 그러나 주 목사에겐 생명을 이어주는 귀주한 밥이기에 감사 찬송과 감사 기도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왔다.
콩밥 한덩이에도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떨어진 좁쌀 한 톨까지 다 주워 먹었다.
주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감격의 나날을 보내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냉기가 바다처럼 감방 안에 깔린다. 식사시간이 되면 작은 문이 열리고 나무로 만든 쟁반같은 곳에 콩밥 한 덩이와 깨진 사발에 검은 국물 한 국자가 들어온다.
일부러 얼려서 갔다 주는 콩밥이다.
밥덩이는 꽁꽁 얼어 쟁반위에 용케도 공처럼 앉아 있다. 국은 시금치 삶은 물인지 시래지 삶은 물인지 건더기도 하나 없고 소금을 녹혀서 짜기만 하다.
먼저 국물을 마시고 밥을 씹는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웃으며 참았다. 찬송과 기도와 성경 암속으로 지루했던 겨울을 무사히 넘겼다.
1941년 3월.
봄이 온 것이다. 앵두꽃 피고지는 정원을 맴돌던 훈훈한 바람이 유치장 창살 안을 기어들어 왔다.
배는 여전히 고프지만 몸에 한기가 빠져 나가니 살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유치장에 봄과 함께 찾아오는 반갑잖은 손님이 있었다.
경남 도경찰부 고등계 형사부사장이었다. 그는 주 목사를 불러내었다. 진주에서의 마지막 심문을 할 예정이었다.
주 목사는 형사부장 앞에 섰다. 그는 착잡한 심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심문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꼬박 이틀 밤을 새우며 심문을 하는 것이었다.
이틀 동안의 지루한 심문과 혹독한 고문으로 시달린 주 목사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주 목사가 눈을 떴을 땐 유치장 감방에 돌아와 있었다.
5. 부산으로 압송
아침 식사가 끝나자 감방 철문이 열렸다.
“주남고, 나와!”
앙칼진 형사의 목소리가 싸늘한 벽에 부딪히면서 쨍하게 귀를 때린다.
주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사는 주 목사 손에 수갑을 채웠다.
주 목사는 형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어두컴컴한 시멘트 복도를 지나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다.
황철도 전도사와 김정룡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 모두 경찰서 안으로 들어온다.
“시국 인식을 못하는 최고 악질 너희들은 오늘 부산으로 간다.”
형사부장이 두꺼비 같은 눈을 껌벅이며 말을 뱉았다.
1941년 3월 13일.
주 목사 일행 네 분의 옥중 성도들은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하여 진주 역으로 나갔다.
세형사가 뒤를 따랐다.
기차가 진주역을 떠나 개양역에 도착되었을 때, 두분의 성도들이 수갑에손이 채인 채 기차에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최상림 목사와 이현속 장로였다.
형사 둘이 그들을 호송하는 것이었다.
형사들은 자기들끼리 반가웠지만, 성도들은 성도들끼리 반가웠다.
순교자들과 지옥의 사신들!
얼마나 대조적인 그들인가?
한 쪽은 주님을 위해서 열심이고 한쪽은 마귀를 위해서 열심이다. 주 목사는 최 목사와 이 장로를 만났을 때 목이 메었다.
입을 열어 말은 할 수 없지만 눈과 눈으로 그들은 말을 나눌 수가 있었다.
일행은 부산역에 도착하였다.
형사부장이 도경찰부에 연락을 하고 있었다.
“도경찰부는 만원이야! 그래서 남부경찰서로 가라는데‥‥”
형사부장의 거만한 말에,
“비 국민들이 이렇게 많아서야 어디 나라가 평안할 수 있겠나?”
형사 하나가 꽥 소리를 지른다.
그리하여 일행은 남부경찰서로 들어가게 되었다.
"잡아들이다 보니 십전짜리도 잡혀들었어!“
이는 잡아들일 가치도 없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는 말이다. 빈정거리는 말이기도 하였다.
시일이 갈수록 신자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분들도 있었다.
박인순 전도사는 처음 도경찰부로 잡혀 올 때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모진 고문과 끈질긴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사수하여 왔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심문을 받기 위해서 간수에게 이끌려 유치장 문을 나서시 걸어나오다가 시멘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처녀였다. 원래 건강한 몸집은 아니었지만 별로 병으로 누워본 일이 없는 겅강한 체질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문과 심문으로 그는 쇠약해졌다. 이날 박전도사는 끌려나오면서 겨우 몸을 지탱하며 발을 옮겨 놓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면서 앞이 캄캄해 오더니 눈앞에 별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몸이 뻗뻗해지면서 굳어버리는 것이었다. 데리고 나가던 간수가 이 광경을 보고는 소리쳤다.
“박인순이 죽었다!”
이 말은 밖에까지 들렸다. 소식을 들은 성도들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첫 순교자가 부산에서 나왔다고 감격하였다.
허나 얼마 후 그녀는 다시 깨어났다. 가족들에게 인계되어 그녀는 구금된 지 3개월 10일만에 병보석으로 석방이 되었다.
박 전도사는 병보석 석방이지만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을 못내 서운하게 생각하였다.
도경찰부에는 많은 성도들이 나가기도 했지만 역시 유치장은 만원이었다. 그리하여 부산 외의 지방에서 검속되어 온 사람들은 남부경찰서로 보내게 된 것이다.
주 목사 일행은 남부경찰서 유치장에 입감되었다. 황철도 전도사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 가고 있었다. 진주 유치장에서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한 때문이다.
부산에 온 이후 계속 팔다리를 잘 움직이지 못하고 창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유치장 안에서 늘 누워 지냈다. 공의가 진찰을 하고는 그냥 둘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의는 고등계 형사과장과 형사부장등과 의논을 하여 황철도 전도사를 내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며칠 안가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황철도 전도사를 불러내었다.
“오늘부로 유치장 생활 그만 두고 나가! 자유다.”
황 전도사는 어리둥절 하다.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다니? 나가라면 나가는거지‥‥”
“나는 나가지 않습니다.”
“죽고 신나?”
“나는 죽지 않습니다.”
“의사가 그냥두면 죽는다는데도‥‥?”
“나는 안 죽습니다.”
“어째서 안 죽는단는 거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불러가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다른 죄수들은 아프지 않는것도 아프다하며, 대수롭잖은 병도 중병으로 말하여 나갈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이 사람은 나가라고 하는데도 나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부장이 말했다.
그러나 황철도 전도사는 1941년 6월 28일, 병보석으로 석방이 되었다.
한편 최덕지 전도사는 유치장에서 금식을 시작하였다. 일주일 넘게 금식을 하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경찰에서는 걱정이 되었다. 저러다 죽으면 뒤가 개운찮을 것 같아서 석방하기로 결정하였다. 최덕지 전도사를 불러내었다.
고등계 형사부장이,
“당신 그냥 나가시오, 병이 중한 것 같소!”
“우린 당신 같은 사람 시체 치우기도 귀찮으니 그냥 나가!”
“싫습니다.”
“명령이오!”
그리하여 억지로 병보석으로 석방이 되었다. 최덕지 전도사는 나가서도 여전히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였다.
주일이 되어 교회에 찾아갔더니 말이 아니었다. 교회당 강단 뒤에 신사를 차려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최 덕지 전도사는 분개막심 하였다.
그는 탄식하며 외쳤다.
“현실교회는 완전히 마귀당이 되었구나!”
이리하여 최덕지 전도사는 신사참배 반대 뿐 아니라 동방요배 국기배례 반대까지 부르짖으며 다니게 되었다.
최덕지 전도사는 다시 검속되었다. 한상동 목사, 주남고 목사 일행이 평양 형무소에 입감 된 얼마 후에 그녀도 평양으로 압송되어 형무소에 입감되었다. 후에 최덕지 전도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재건교회에서는 한상동 목사, 주남고 목사를 위시한 옥중성도들은 신사참배는 반대했지만 동방요배는 한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되 사상이요, 그릇된 사고이다. 주기철 목사나 한상동 목사나 주남고 목사가 검속되어 넘어 갈 때엔 동방요배 문제는 나오기 전이었다. 일차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된 후 현실 교회는 점차적으로 총독부지시에 따라 시행되고 있었는데 뒤 늦게 동방요배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최덕지 전도사가 남부 경찰서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나가보니 동방요배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동방요배마저 반대하고 운동하다가 검속이 된 것이다.
그러니 동방요배 반대운동으로는 그녀가 경남지방에서는 제일 처음 사람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옥중 성도들보다 결코 위대한 일이라고 앞세울 문제는 못되는 것이다.
왜나하면 앞선 투옥된 분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고, 그녀는 늦게까지 남아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보니 동방요배 문제가 생겨서 그것도 반대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된 성도들이 만일 그때도 동방요배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상식에 관한 문제다.
6. 평양으로 가는 길
주 목사가 남부 경찰서 유치장에 입감한지 4개월이 지났다. 평양 형무소로 압송된다는 말이 들렸다. 한편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 곳에는 주 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의로운 주의 종들이 구금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는 바다. 산 순교자들이 모여 있는 평양 형무소로 빨리 가고 싶었다.
1941년 7월 11일.
평양으로 압송되는 날이다. 주 목사는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등과 같이 수갑을 찬 채 경찰서 밖으로 끌려 나왔다. 주 목사는 겨울 두루막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일년이 넘도록 갂지 못한 머리털은 길게 자라 귀를 덮고 어깨위까지 흘러내렸다. 수염은 아무렇게나 자라 꼭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같았다.
부산본역으로 나갔다. 본역 앞에는 도경찰부에 수감되었던 한상동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가 나와 있었다.
한 목사 부인 김차숙 여사와 시내교회 교인들인듯 신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경찰부 고등계 형사부장 하부장과 다른 형사 한 사람도 서 있었다.
주 목사는 한상동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를 보니 너무도 반갑고 기뻐 눈물이 눈시울에 빙 돌았다.
7월의 햇살이 머리 위에 따갑게 내려 쪼인다. 너무 오랜 세월을 햇살을 보지 못하고 살았기에 따가운 햇살이 마냥 고맙고 꿈 같기만 하였다.
도경찰부에서 나온 한 목사와 조 전도사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다. 이걸 본 남부서 한 형사가,
“우리만 채워 가지고 갈 필요가 어디 있나?”
하고 말하자. 다른 형사가,
“그렇지!”
피식 웃으며 수갑을 풀어 주었다. 자유로운 몸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자유가 허락된 것이다.
한상동 목사의 얼굴은 긴 머리털과 수염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그림에서 보는 예수님 같았다.
일행은 기차를 탔다. 한 사람 옆에 한 사람씩 형사가 끼어 앉았다. 그러나 차를 타는 승객들은 아무도 죄수와 형사로 보지 않았다.
승객들은 이상한 얼굴 모습들을 바라보며 수군수군 하였다.
“어디 사람인가?”
“글쎄 미국 사람은 아닌것 같고, 코 보니까 말이여!”
“불란서 사람인가베.”
“아니여, 몽고 사람이다.”
“코하고 눈은 꼭 조선사람 안 같나?”
“옷도 조선옷 양이가‥‥”
“참야, 별 희안한 사람도 다 있네.”
승객들은 아무도 이들이 수난당하는 주님의 귀한 종들인 줄 몰랐다. 시내교회 성도들이 역에서 전송을 하고 눈물을 닦으며 돌아갔다.
기차 안에는 김차숙 여사와 초량교회 양성봉 장로 부인이 함께 탔다.
양 장로 부인은 인삼을 준비하고 한 되들이 병에 커피를 한 병 끓여 넣어 쥐고 있었다. 기차가 떠나는 동안 양 장로 부인은 커피를 옥중 성도들과 형사들에게도 한 컵씩 주었다. 형사들은 머뭇거리며 받아 마셨다.
얼마나 오래간 만에 마시는 커피냐? 시래기 국물과 콩, 조, 밀, 보리, 잡곡만 먹던 창자 안에 커피가 들어가니 목구멍이 아릿해 오면서 창자가 거북하였다.
양 장로 부인은 삼량진에 내렸다. 일행을 실은 기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지를 향하여 올라가는 산 순교자들, 한상동 목사, 주남고 목사,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 그들은 한결 같이 다시 이 열차를 타고 아래로 내려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이 열차가 천국행 열차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상동 목사. 그는 김해 명지에서 태어나 6세에 양자로 가서 외로운 생활을 하였으며 24세에 복음을 받아 주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뜻있는 목회를 하려 하였으나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그는 모든 걸 버리고 분연히 반대운동의 선봉자가 된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생명을 주 앞에 바치고 있었다. 경찰은 그를 고문 할 때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의 옷이 붉게 피로 물들어 가족들에게 넘겨졌을 때, 어머니 배옹애 여사가 아들의 옷을 안고 통곡하다 쓰러졌다.
최상림 목사는 동래군 기장 출신이었다.
일찍 복음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던 중 그의 신앙은 뜨거웠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여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0년에 졸업하였다. 주남고 목사보다 신학교 4년 선배였다.
최 목사는 고성, 동래, 남해교회 등에서 hr회를 하였다. 최 목사는 남해에서 검속되어 남부경찰서로 넘어온 것이다.
이현속 장로는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 사람이다. 그는 6세 어린 시절에 복음을 받아 믿었고, 경남 성경학원을 거쳐 평양신학교 1학년까지 수업하였다. 그러나 신학교를 계속하지 못하고 전도사 일에만 힘을 썼다.
그는 창녕, 진양, 하동, 산청, 주로 변두리 농촌교회를 다니며 목회를 하였다. 그가 38세 때 진주에 있는 기독교병원인 배돈병원에서 서기 겸 전도사 일을 보게 되었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반대 뜻을 표명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수차 진주에서 주 목사와도 만나 반대운동에 대하여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는 명원에서 매주 수요일 정기 예배시에 직원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그 때 배돈병원 직원은 약 40명 정도였다.
그는 이들 직원들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주의 재림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천년왕국이 임하며 일제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전하였으므로 검속 된 것이다.
조수옥 전도사는 안이숙 선생이 평양 감옥에서 처음 본 인상으로 귀염성이 있고, 성스럽고, 총명하더라는 그대로였다. 그의 청춘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불태운 성스러운 여성이었다.
그녀의 고향은 경남 하동이었다.
그녀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사를 돌보던 중 20세에 출가하였으나,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병원 보조 간호원을 하였다. 그러나 병원 간호원 생활을 그만두고 양재점 재봉교사로 지내다가 복음을 받아 가슴에 뜨거운 열이 있어 진주 성경학원으로 갔다.
경남 성경학원을 마치고 25세 때부터 전도사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삼천포 교회를 시무하다가 부산으로 내려왔다. 초량교회 전도사로서 선교부 주선으로 부산지방 선교사 전도부인으로 활약하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구금된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한상동 목사와 주남고 목사, 이 인재 전도사 등과 뜻이 같아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협조하여 왔다.
일행은 역을 빠져나와 광장에 나섰다. 광장에는 주 기철 목사 부인 오정모 여사와 안이숙 선생 어머니 등 몇 분의 성도들이 소식을 듣고 마중나와 있었다.
오정모 여사는 김차숙 여사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어쩐일로 이까지 따라 왔노?”
말을 던졌다.
“염려 마십시오. 짐은 되지 않을터이니.”
김차숙 여사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판국에 무슨 고생인들 못견디랴 하는 자신으로 올라온 것이다. 하(河)부장이 다른 형사에게,
“검찰청에 전화하고 올터이니 잠시 기다려!”
말하고는 역사무실로 들어갔다.
일행은 역광장에서 하부장을 기다리며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서 눈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후 하부장이 돌아왔다. 시간이 늦어 모두 퇴근하고 경비원들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식사나 하고 가시지요.”
김차숙 여사가 형사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럽시다.”
형사들도 평양까지 오면서 상당히 익혀진터라 싸늘하지 않았다. 오정모 여사의 안내로 식당에 들어갔다. 냉면을 한 그릇씩 시켰다. 식당 종업원들이 옥중 성도들을 보고 키득키득 웃으며 저희들까리 야단이었다.
“불란서 사람이다.”
“아니다, 호주 사람이다.”
그러다가 가족 중 한 분에게 묻는 것이었다.
“저 사람들이 불란서 사람들이 아닙니까?”
“불란서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요.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저 모양이지요.”
이 말을 들은 종업원들은 얼굴이 굳어지면서 정중히 손님으로 대해 주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냉면을 먹으니 세상에 이런 음식도 있었는가 싶게 맛이 있었다.
가족들이 형사들에게도 대접을 했다. 식사가 끝나고 일행은 하부장의 인솔로 평양 종로경찰서 정문으로 들어섰다.
주남고 목사, 한상동 목사, 최상림 목사,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는 각각 헤어져 유치장 감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 종로 경찰서 유치장 안에는 전국에서 신사차배 반대로 투쟁하던 성도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조선 총독부 경무국의 명령이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지조있는 성도들을 이 곳에 총 집결시킨 것이다.
주남고 목사는 이 곳에서 주기철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 장계성 장로, 안이숙 선생, 이광록 집사 등 여러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진주 경찰서에서 보다, 부산 경찰에서 보다, 평양 경찰서에서는 신앙의 동지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데에서 한없이 흐뭇함을 느꼈다.
7. 평양 종로경찰서유치장
한상동 목사는 그 밤에 주기철 목사와 같은 감방에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두 종을 땅 위에서 만날 순간을 주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한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는 대동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 갔다. 경남 도경찰부에 있는 분, 두 분만 대동 경찰서로 가고 나머지 세 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남고 목사가 갇혀 있는 유치장 감방 맞은 편 감방에 최봉석 목사(최권능이라고함)가 있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최 목사의 우렁찬 목소리는 유치장 안의 모든 성도들의 심령에 힘을 주었다. 평양 유치장은 전주나 부산보다 훨씬 대우가 좋았다. 이발도 시켜 주었고, 옷도 갈아 입혀 주었다.
긴 머리털을 깍고 수염을 밀고나니 한결 마음도 산뜻하였다.
유치장 간수들의 대하는 것도 진주나 부산보다는 좀 부드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처음 기독교인들이 연행되어 왔을 때엔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했다.
고문에 시달려 많은 성도들이 죽어가기도 하였다 한다. 고등계 형사들은 성도들을 짐승처럼 대하였고 장작개비로 패고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마시게 하고 지독한 고문을 가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해 겨울 만주 독감이 몰려와 모든 경찰들과 형사들을 잡아 눕혔다. 독감으로 인하여 죽은 자도 많이 생기고 지독하게 고생을 하였다.
경찰들은 이것이 기독신자들을 너무 심하게 고문한 죄벌이라고 깨닫게 되었단다. 그리하여 이제는 성도들을 두려워하는 형편이라 좀 부드러워 진 것이라고 하였다.
주남고 목사가 이곳 종로 경찰서에 압송되어 온지 한 달 보름이 되었다.
1941년 8월 25일.
더위는 아직 가시지 않고 기승을 부린다. 갑자기 고등계 형사들이 나타나더니 유치장 안에 있는 기독신자들을 다 불러 내었다.
경찰서 안은 기독신자들로 가득하였다. 가족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서 보자기를 풀고 먹을 것을 나눈다. 주남고 목사의 가족은 몰론 오지 않았다.
오늘 평양 형무소로 옮겨 간단다. 붉은 벽돌집으로 가는 것이다. 높은 담에 둘러싸인 형무소, 중죄를 지은 사람이 형을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지옥이다.
그런데 들어가면서 다시 나올 수 있을는지 모르는 벽돌집으로 들어간다 하건만 산 순교자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주님을 향한 뜨거운 희열이 안개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자동차가 왔다. 형사들은 성도들의 손에 수갑을 채워서는 차례로 자동차에 올라 태웠다.
성도들을 태운 자동차는 평양 시내를 빠져 형무소에 이르렸다. 형무소의 무거운 철문이 둔한 소리를 내며 열였다. 자동차는 형무소 뜰로 들어가서 멎었다. 일행은 서서히 수갑을 찬 채 차에서 내렸다.
그때였다.
최상림 목사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아, 주기철 목사님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그때 모두들 주기철 목사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과연 주 목사의 얼굴에는 찬란한 빛이 발산되는 것이었다.
그 빛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얼굴에도 광채가 나는 것이었다. 모두들 서로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였다.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얼굴처럼 모두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다. 이 사실은 주남고 목사가 직접 긔의 옥고기에서 밝혀 주었다.
일행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유치장에서 입고 있었던 사복을 벗고 푸른 죄수복을 입을 때, 최봉석 목사가 소리쳤다.
“우리 주님은 홍포를 입으셨는데 우리는 청포를 입네!”
이 말을 들은 성도들의 눈엔 감격의 눈물이 빙그르르 돌았다. 주남고 목사는 최 목사의 말을 받아 응수하였다.
“지금은 청포를 입지만 앞으로는 홍포를 입게 될 것입니다.”
주남고 목사의 말에 모드들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눈물이 동반된 감격의 웃음이었다.
푸른 수인복을 바꾸어 입은 성도들은 이름 대신 번호표를 받아 달고 간수를 따라 감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긴 시멘트의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36호 방에 주남고 목사는 인도 되었다. 옆방인 37호에 주기철 목사가 갇혔다. 최봉석 목사는 좀 떨어진 33호에 지정이 되었다.
폴리갑처럼 80여세 노령의 몸으로 최 목사는 원수들에게 잡혀 왔지만 그의 기백은 물 밖에 갓 나온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주남고 목사는 주변에 많은 동지들이 숨쉬고 있는 것에 마음 든든하였다. 특히 옆방에 있는 주기철 목사와 연락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벽은 시멘트로 꽉 막혀 있어 답답했지만 앞으로 걸어 나오면 쇠창살이다.
쇠창살을 손등으로 두드려 본다. 저쪽으로 울림이 가고 다시 저쪽에서 같은 반응으로 울림이 왔다. 두 주 목사는 쇠창살 두드리는 것으로 아침 저녁 인사를 나누었다.
대동 경찰서로 연행되어 간 한상동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도 이 형무소로 압송되어 왔다. 자유로이 서로 만날 수 없지만 한 형무소 안에서 같은 콩밥을 먹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주남고 목사는 조용히 찬송을 불렸다. 그가 즐겨 부르는 찬송이었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나를 항상 거느리시고 나를 친히 거느리시네,
나를 항상 거느리시고 나를 친히 거느리시네.”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그의 마음은 천국에 이른 듯 즐거움이 솟았다.
제 8 장
목화이삭 줍는 사모님
1.지극히 작은 자에게
주 목사가 검속되어 거창을 떠난 후, 그의 가정은 말이 아니다. 생계는 막연하였다. 교회에서는 관계가 끊기고 교인들마저 당국의 눈이 무서워 찾아오지 않았다.
1939년 1월부터 거창읍 교회에는 이X형 목사가 부임하여 왔다. 그는 사국을 인식하는 목사로서 경찰의 감시를 받지 않고 시키는데로 자유로이 목사일을 하여 나갔다. 그는 전임 교역자의 가정에 대하여도 냊어하였다.
교인들에게도 일절 주 목사 가정과는 상종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노회와 총회 위원들이 교인들의 시국인식을 위하여 종종 다녀갔다.
특히 김X창 목사와 김X일 목사는 세도가 당당하였다. 김X창 목사는 1923년에서 1926년 7월 까지 약 4개년 동안 거창읍 교회를 시무한 일이 있었다. 허기에 그는 거창읍 교회에 대하여는 유독 관심이 많았다.
교인들에게 주 목사의 가족을 돌보는 것은 비애국적인 일이니 결코 돌아봐서는 안된다고 엄포를 놓는 것이다. 주 목사의 가족들은 참으로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경순은 동래 일신 중학교 다니다가 오빠 경도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일본에서 간호학교에 들어가서 산파학을 겸하여 수업하였다.
일본에 들어가서도 그녀의 마음은 아버지 생각에 가득하였고,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생각에 마음은 항상 무거웠다. 거창에 남은 주 목사의 가족은 모두 넷이었다.
부인과 세 자녀들이었다. 경효가 열두 살, 경세가 여덟 살, 경은이가 겨우 세 살이었다. 모두 한참 먹고 싶어 할 때이고 자라나는 시기였다.
경은이는 젖도 제도로 먹지 목하고 자랐기에, 노리끼한 얼굴에 눈만 동그랗다. 경효와 경세는 아버지 주 목사가 수집해 둔 엽전을 가지고 나가서 엇하고 바꾸어 먹었다. 주 목사는 평소에 엽전에 수집에 취미가 있었다. 많은 엽전을 수집하여서는 쌀자루에 여러 자루 넣어 두었다. 엽전을 연대별로 가려 창호지로 묶어 두었다.
형호와 경세는 그 엽전 때문에 심심찮은 나날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엽전도 바닥이 났다. 몽땅 엇을 바꾸어 먹은 셈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배가 고팠다. 간혹 숨은 성도들의 얼마의 곡식을 몰래 갖다주어 끼니를 잇기도 하였다. 몇 차례 한상동 목사 부인 김 차숙 여사가 찾아와 돈을 전하고 갔다.
김차숙 여사는 천국을 순회하며 뜻있는 성도들의 현금을 받아 평양 형무소에서 복역중인 성도들에게 식사를 넣어 주기도 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기까지 하였다.
백영희 전도사가 종종 찾아왔다. 그는 상복을 입고 삿갓을 쓰고 다니며 지방 교회 성도들의 현금을 얻어 식량을 구입하여 가져오곤 하였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를 존경하는 후배로서 주 목사의 가족을 자기 가족처럼 보살펴 주었다.
백영희 전도사는 1910년 7월 29일,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식학문을 배웠다.
16세시 일본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4년 후 귀국하여 가창군 고전면 개명리에서 양조장을 시작했다. 양조장을 하면서 진한 누룩 냄새를 맡으며 인생을 고민하였다.
마침 운봉기 전도사가 길가는 것을 보고 집에 들어오게 하여 복음을 들었다. 윤봉기 전도사는 친절하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백영희는 입신하던 날부터 열심이었다. 믿게된 지 삼일이 되던 날, 양조장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십 칠일 후에 누룩 장사도 그만 두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구호기관과 복음기관에 기중하고, 논 얼마만 남겨두어 농사를 하여 생활하기로 하였다. 일년후 세례를 받고 전도일에 나섰다. 무보수 전도사였다.
봉산 교회와 봉개 교회와 개명교회를 맡아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무보수 전도인이 되기까지 그의 신앙의 길잡이는 주 목사였다. 주 목사의 신앙인격에 많은 감화를 받았고 특별 지도를 바았다.
백 전도사는 주 목사댁을 자기 집 드나 들 듯이 쫒아 다녔고 지극히 작은 일 하나까지 주 목사의 지시를 받았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자 주 목사는 지방 각 교회를 심방하여 신사참배를 못하도록 가르쳤는데, 백 전도사에게도 여러번 이 문제에 대하여 당부하였다.
“신사참배는 제2계명과 제 1계명까지 번하는 것이니 결코 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날, 주 목사는 백 전도사를 만나 조용히 강변으로 나갔다. 강가에 앉은 주 목사는 백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문제와 일제의 탄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날 받았던 주 목사의 교훈을 백 전도사는 가슴에 잘 새겼고, 그가 신사참배하지 않게 된 좋은 계기가 되었다. 주 목사 투옥 후, 백 전도사에게도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번질나게 찾아왔다. 그러나 끝까지 백 전도사는 반대하였다. 그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은 주 목사의 교훈 대문이었다고 훗날에 말했다..
그는 약 5년 갂운 세월을 한결같이 주 목사 가족을 돌봐 주었다. 자기 가족의 생계도 막연한 시대에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곤 할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되어질 일들을 말씀하신 일이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었다.
그 때, 모든 민족을 두 종류로 구분지어 모으고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는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대에 너희는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말씀하실 것이다. 그 때 오른쪽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그런일을 하였느냐고 반문을 한다.
주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신다.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1-46)
여기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인가? 그는 예수님 이름 때문에 주리고, 목 마르고, 나그네 되고, 감옥에 갇힌자가 아니겠는가?
지극히 작은 자의 가족이 굶주리고 있었다. 그러나 역적으로 몰아 외면해 버리는 저 사람들···
하지만 이들을 돌보아 주는 또 한 쪽의 사람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다.
2. 역적의 가족이라니
주 목사의 가족들은 결국 당국에 의하여 역적의 가족이란 죄명으로 동네에서 좇겨나고 말았다. 당국에서는 신사참배 문제 보다 전일 독립운동한 일도 있고 하여 사상범으로 주 목사를 취급하였다. 하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에겐 더욱 많은 수난을 가하였다.
동네에서 쫓겨난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찬바람이 귀뿌린를 따가는 듯 세게 불어왔다. 몹시 추운 날이었다.
이 날, 주 목사의 가족들은 간단한 짐을 걸머메고 찬바람 부는 벌판으로 나와 동네에서 얼마간 떨이진 외진 곳에 발을 멈추었다. 그 곳에 한 채의 흉가가 있었다 이집은 전날, 박성희씨 (강주선 목사 부인)의 친정집이었다.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은 집이어서 흙담이 헐고, 한 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사람이 거처하기엔 꺼림직한 그런 집이었다. 그러나 쫓겨나 갈 곳 없는 주 a고사 가족 들에겐 밤 서리를 피할 수 있어 여간 다행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집을 쓸고 청소를 하였다. 짐을 옮겨 정리 하였다.
솥을 걸고 물을 끓였다.
굴뚝에 연기가 나니 아이들이 좋아서 환성을 질렀다. 그들은 집을 빌려 준 박성희씨 친정 부모들에게 마음으로 감사하였다.
박성희씨 친정 부모들은 그 집에 예속된 200평 남짓한 땅도 같이 부치라고 허락 하여 생계에 도움을 주었다.
일제 당국은 주 목사 식구들에게 우물도 주지 말라고 당부를 했고 어떤 어려움에 있어도 도우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불신자지만 진정한 마음으로 주 목사 가족들을 염려하였고 도우려 애썼다. 마을 사람들은 간혹 밤이면 집단 속에 수수, 조 같은 잡곡을 넣어 담 너머로 넘겨 주었다.
잡곡을 준 것은 자신들도 쌀은 공출로 내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국자 가족에 대한 대접을 이런식으로 표하였다.
당국에서 우물 물을 금하였기에 도랑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끓여 마시게 되었다.
밤이 되었다. 산에서 늑대랑 여우 등의 짐승들이 집 가까이 와서 울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차마자락을 붙잡고 오들오들 떨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옥중에 계신 목사님과 일본에서 공부하는 아들 달을 위하여 밤이 깊도록 기도하였다. 그것은 눈물의 기도였다.
엷은 몇 개의 이불은 아이들 차지였다. 여사는 그 긴 추운 밤을 이불없이 밝혔다. 옥중에 계신 남편을 생각해서이다.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 경효가 이불없이 땅바닥에 그냥 누어 잠든 엄마를 보았다 자기가 덮던 이불을 엄마 몸에 덮어드리니 번쩍 눈을 뜨신 엄마가
“너나 덮고 자거라.”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엄마 추운데 덮으셔야지요.”
“아빠는 옥중에서 이불 덮고 주무시겠니?”
“······”
“평양은 경상도 보다 더 추운 곳이라는데······”
여사의 눈에 맑은 액체가 고인다. 달빛이 봉창문을 밝게 비춘다.
여사의 얼굴이 선명하게 경효 어린이의 동공 속에 들어왔다.
“엄마 그래도, 이불 덮고 같이 자!”
“나는 괜찮다. 너희 아빠가 이불을 덮는 그날까지 나도 이불을 덮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으니······ 내 염려는 하지 말고, 너나 덮고 자거라.”경효 어린이의 가슴 속에 이 일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깊이 아로새겨졌다.
날이 밝으면 여사는 행상으로 나간다. 비누 등속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낯선 마을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집집마다 들어가 비누를 권하였다. 비누를 주고 보리를 얻고 밀을 얻는다.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면서 심히 힘겨운 일이었다. 행상나간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노는 아이들은 배가 고팠다. 집이 공동묘지가 보이는 냇가에 있었다.
공동묘지로 가는 길이 이 집 옆으로 뻗어 있었다. 종종 시채를 지게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관에다 시체를 넣을 형편도 못되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마니에다 시체를 싸가지고 지게에 지고 지나간다.
이렇게 가난한 장례식에는 아이들도 쓸쓸하다. 그러나 상여가 나가는 날이었다.
민가를 구성지게 뽑으며, 지나가는 장례 행렬에는 주 목사 아이들도 한 묷 끼이는 것이었다. 떡이 있기 때문이다.
마른 아주까리 잎사귀 국물만 먹던 멀건 뱃 속에 떡이 들어간다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공동묘지 길 가의 아이들의 노래가 만가이다. 양지쪽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른다.
“어흥 어흥 어라넘자 어흥
북망산천 어디메뇨, 눈감으면 그 곳이지.
어흥 어흥 어라넘자 어흥.”
주 목사의 아이들은 찬송가와 만가로서 어린꿈을 익혀갔다.
춥고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얼었던 땅이 녹고 도랑가 언덕이 연두빛을 띠고 푸르러 왔다. 남술남 여사는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갔다.
경효와 경세는 학교에 가고 경은이는 여사의 등에 매달렸다. 산에 올라가 산나물을 뜯고 나무도 한다. 낫으로 송피를 벗긴다.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나면 나무와 두꺼운 껍질 사이에 엷은 속껍질이 있다. 그것을 벗기는 것이다. 그것은 액체와 함께 말랑말랑 하다. 입에 넣으면 달고 텁업하다. 이것은 송피라고 한다.
이것을 말려 가루를 만들어 죽도 끓여 먹고 떡도 만들어 먹는다.
이것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최후의 양식이다.
여사는 종다리 소리를 들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으로 송피를 벗기는 것이다.
따뜻한 봄날의 긴 햇살이 서산으로 사라지면 머리에 나무를 이고 겨드랑이에 송피와 산나물이 담긴 소쿠리를 끼고 비탈길을 내려오는 것이다. 집에 오면 학교에서 돌아와 먹을 것이 없어 울고 지내던 아이들이 어마를 기다리며 지쳐있다.
산나물을 삶고 국을 끓인다. 쑥에 보리겨를 묻혀 떡을 찐다.
이것이 저녁식사이다. 그들은 이것을 먹으며 얼굴에 미소를 날린다.
누가 이들에게 역적의 누명을 주었는가!
누가 이들을 이렇게 비참한 고아로 만들었으며 과부로 만들었는가?
하나님만이 이들을 돌보시며 지켜 주셨다. 어느 장로가 산간을 일구어 개간한 밭을 소작으로 이들에게 주어 그 밭을 경작하게 하였다.
장다리에 강씨 성을 가진 교인이 비밀리 200평 남짓되는 밭을 빌려 주어 농사할 수 있었다.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달이 밝은 밤이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했다. 입산 금지로 낫에는 산에 갈 수 없다.
밤 만이 나무할 수 있는 기회인데 너무 어두우면 나무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달밤을 기다리는 것이다.
손 등은 소나무 잎사귀에 찔려 피가 나고, 손바닥은 괭이질로 물집이 생겼다. 물집은 터지고 다시 다져지고 하여 손바닥은 돌처럼 단단해 갔다.
여자의 손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내는 것은 힘에 겨운 일이었다. 여사의 검붉게 탄 이마엔 구슬땀이 맺고, 무명 저고리 등이 흠뻑 땀에 젖었다.
이런 고된 일을 계속하면서도 여사의 얼굴엔 짜증이나 불평의 표가 일렁이지 않았고 평화로운 미소 만이 꽃피고 있었다. 여사의 입에는 한숨 대신 찬송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기쁜 찬송이 울려나네
하늘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나의 영혼을 고이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찬송은 여사 자신을 위해 지어진 찬송처럼 자나깨나 애창하였다. 고달픈 육신의 일들이 무거움으로 깔고 눌러도 여사의 마음에는 신앙의 샘이 솟고, 하늘의 위로가 가슴에 가득했다.
“내 맘 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어디 있으랴 안심일세“
왕복 사십 리가 좋이 되는 먼 거리의 밭을 여자의 나약한 힘으로 경작 한다는 것이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앙의 불길로 살아가는 여사의 나날은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생활일 뿐이다. 오줌 동이를 이고 그 먼길을 오가면서도 가슴에는 기쁨이 꽃방석을 깔았다. 경효는 열 한 살에 오줌 장군을 지고 어머니를 도왔다.
어머니의 고생이 어린 경효의 가슴을 쓰리게 하였다. 지게에 거름을 담아내고 오줌을 퍼 나를 때, 육체의 고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어머니를 도운다는 의미에서 소년의 얼굴엔 미소가 풍겼다.
여름은 그렇게 가 버렸다.
가을이 되어 풋콩을 따고, 고구마를 파낼 때 마냥 즐겁기만 했다. 배추포기를 뽑고 호박을 따낼 때, 일의 보람을 느꼈다.
송피죽과 도톨이 묵만 먹다가 고구마를 먹게 되는 식구들은 마냥 기뻐 춤이라도 추듯이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나 평양 형무소의 아버지 생각에 온 가족이 또 한 번 눈물을 삼켰다.
일제의 간악한 수탈정책에 백성들이 호응하기 위하여 산간이며 둑길에 아주까리를 심었다. 아주까리 기름을 상납하기 위해서다. 가난한 서민들은 부드러운 아주까리 잎을 따서 국을 끓여 먹는다.
경효와 경세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지런히 아주까리 잎을 따 모았다. 이것을 볕에 말려 두었다가 겨울을 사는 것이다.
가을 비가 촉촉이 내린다. 이런 비온 후엔 여사와 아이들은 산으로 들어가 송이버섯을 딴다. 송이버섯은 좋은 영양식품이였다.
쌀 한톨 구하기 어려운 이들은 쑥과 아주까리 잎과 송피와 버섯으로 그 지루한 세월을 연명해 간 것이다.
3. 여사의 가정교육
여사는 밤이면 자녀들과 예배를 드린다.
예배가 끝나고 여사는 아이들에게 입을 연다.
“경효야, 경세야,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너희 아버지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역적이 아니다. 애국자야. 참 목사다. 그래서 감옥에 계시는 거야.”
경효는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 왜 착한 사람이고 애국자인데 감옥에 가두어 두는 거야?”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자기나라처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단다. 독립이 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어.”
“독립이 언제 되는데?”
“알 수가 없지...”
“아버지 미워!”
경효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 나왔다.
여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왜?”
“다른 사람들은 가지 않고 다 잘 있는데, 왜 하필 아버지만 감옥에 가는거야? 왜 아버지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는 거야? 아버지가 바보지 뭐.”
“너는 잘 모른다. 내가 이야기를 해도 너는 잘 모를 거야. 지금은 어려서 잘 모를거야. 그러나 먼 훗날 너의 아버지가 참으로 훌륭한 분이란 걸 너는 알게 된다. 반드시 알게 된다.”
“신사참배가 그렇게 나쁘나?”
“그렇단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신사참배같은 우상숭배다. 이것을 하면 자기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나라도 망한다.”
여사는 경효와 경세의 손을 거칠은 그의 손속에 꼭 쥐었다.
“학교에 가서 신사참배 하라면 절대하지 말아야 한다. 신사참배하러 줄을 지어 갈 때 어쨌든 빠져라.”
경효가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어떻게 빠질 것고?”
“뒤가 마렵다고 하고 빠져라. 신사참배 하는 것은 죽는 것과 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효는 여사의 말을 마음 깊이 받아 들였다.
학교에 갔다.
신사참배 하러 가는 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중도에서 빠져 버렸다. 신사참배가 아버지를 앗아 갔고, 신사참배가 그의 가족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신사를 당장 부수어 버리고 싶었다.
원수! 하나님의 원수요, 아버지의 원수요, 자기들의 원수였다.
그때는 신발이 귀했다. 고무신이나 운동화 등속은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대개 농촌 사람들은 짚신을 삼아 신었다.
경효는 고사리 손으로 짚을 물에 적셔 새끼를 꼬고 짚신을 만들어 신었다. 그러나 맨발로 다니는 때도 많았다.
4. 형무소로 보낸 솜옷
가을이 되면 목화를 딴다. 그러나 여사의 밭에는 목화가 없다. 겨울이 오는데 옥중에 계신 주 목사에게 솜옷을 만들어 보내야 하겠는데 막연하였다.
여사는 아이들과 함께 목화 이삭을 줍기로 하였다. 경효와 경세는 여사를 따라 목화 이삭 줍기에 나섰다. 목화 단을 다 거두어 간 밭에는 뛰엄 뛰엄 목화 송이가 떨어져 있다.
다래도 떨어져 있다. 그것을 열심으로 줍는다.
밤이면 목화 꼬투리를 따고, 씨가 박힌 솜을 활로서 탄다. 활 줄에 목화송이를 접촉시켜 튀기면 씨는 씨대로 솜은 솜대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솜을 장만한다. 다래는 볕에 말려 목화송이를 피게 하고 그것을 타서 솜을 만드는 것이다.
여사는 이 솜으로 남편의 솜옷을 만들었다. 정성과 사랑을 솜에 담아 옷을 누볐다. 그리고 솜을 담아 만든 회색 무명바지 저고리를 포장지에 싸서 평양 형무소로 우송하였다. 남들처럼 자주 면회를 갈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사식을 넣어 드릴 수는 더욱 없었다.
추위가 오는데 싸늘한 바람이 바늘 끝처럼 살갗을 찌르는 평양 형무소에서 겨울을 지낼 남편을 위해 솜옷 한 벌 마련해 보내는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생각지도 않았던 소포가 배달되었을 때 남편은 아내의 정성어린 선물에 얼마나 흐뭇해 하실까?
여사는 북쪽 하늘 아래 있는 평양 형무소 감방 속의 남편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마음으로 건강을 기도 드리는 것이었다.
여사는 날이면 날마다 아이들을 위하여 잠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여사는 그 후 몇 차례 평양 형무소에 면회를 갔다. 당시 여자들은 몬빼를 입어야 출입을 할 수 있었다.
허나 여사는 몬빼를 만들 형편이 못되어 큰 아들 경중씨의 바지를 손질하여 몬빼처럼 모양만 흉내내어 입고 갔다.
제9장
주여! 순교의 축복을.....
1. 옥중전도
형무소 감방의 첫 날, 해가 저물었다. 콩밥이 들어왔다. 콩과 좁쌀과 수수와 밀잡곡밥으로 덩어리가 잘 뭉쳐지지 않아 퍼석하다. 대로 만든 젓가락이 소반에 얹혀 있다. 국은 역시 희끄무레한 소금국으로 시금치나 시래기를 삶은 물같은 텁텁하고 짠 소금국이다.
주 목사는 여전히 앞에 놓고 찬송을 부른다.
“구주여 해변서 떡덩이를.......”
일절을 부르고 기도를 하였다. 감방 안에는 잡범들이 몇 있었다. 그들 중 한 청년은 전에 믿다가 낙심된 자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 흉악범들이었다.
주 목사가 기도를 하고 나니, 밥덩이는 누가 주어 먹어 버리고 말았다. 국도 없다. 그러나 주 목사는 성내지 않고,
“오죽 배가 고팠으면 남의 밥을 먹었겠오. 괜찮아요, 나는 오늘 들어오면서 같은 동지들의 가족들로부터 사식을 얻어 먹어서 그렇게 배고프지 않아요.” 도리어 위로를 하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이 감방에 같이 지내게 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는 목사입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같은 감방에서 지내게 되는 일이 우연한 일이 아닌 줄로 압니다.”
주 목사의 밥을 집어 먹은 사람도 주 목사의 모든 언행에 감동이 되었다. 마침 믿다가 낙심된 청년이 성경전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주 목사 앞에 성경을 내밀었다.
“목사님 사실 저는 전에 교회에 좀 나갔습니다. 그러다 중도에 그만 두고 나쁜 친구들하고 휩쓸려 돌아다니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다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넣어 준 것이지요. 성경을 보아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해서 그냥 가지고만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들어오셨으니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도우신 모야입니다. 잘 지도하여 주십시오.”
주 목사는ㄷ 성경을 가지고 있질 못했다. 거창에서부터 성경은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갖고들의 면회가 없으니 성경이 전해질리도 없었다.
성경은 줄곧 옛날 대구 유치장 시절에 암송했던 것을 암송하면서 지냈는데 성경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 시간부터 주 목사는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밤 열시가 되었다.
“취침, 취침!”
간수의 찢어질듯한 목쉰 소리가 들렸다. 감방 하나에 잠자리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그냥 자리에 누우면 된다.
취침 나팔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긴 여음을 남기면서 흘러가는 나팔소리, 두고 온 가정을 생각나게 한다.
수인들은 꿈에나마 가족을 만나고 자유를 누리는 시간이다. 감옥의 하루가 취침 나팔소리와 함께 그 막을 내리는 것이다.
희미하게 방안을 비추던 전등이 가버리고 감방 안에 암흑이 깔린다. 바람기 하나 없는 더운 감방, 변기통에서 번져나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주 목사는 어두운 감방 안에서 모두들 잠을 청하는 시간에 혼자 앉아 기도를 드린다. 모든 d수인들이 다 잠든 시간에 자리에 누워 피로한 육신을 쉬는 것이다.
잠이 어렴풋이 들려는 시간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 눈을 뜬다.
“샤-샤...... 툭, 툭.”
무엇인가 몸을 툭 쏜다. 전신이 바늘침을 맞는 것 같아 살갓을 만지는 순간 손에 느껴지는 것이었다. 진득진득한 액체였다.
사실 그것은 빈대였다. 감방 안의 벽은 시멘트로 되어 있지만 밑은 마루였다. 마루는 칸과 칸 사이가 딱 붙은 마루가 아니고, 구멍이 많이 난 엉성한 마루였다.
여름엔 이 마루 틈서리에 빈대가 나오고 겨울엔 찬 바람이 올라온다. 마루를 이렇게 엉성하게 하여 둔 것은 수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이다. 빈대와 더위와 싸우면서 밤을 지냈다.
아침 7시. 기상 나팔 소리가 방정맞게 들린다.
간수의 목쉰 소리가 복도를 누빈다.
“기상! 기상!”
세면은 한 사람씩 세면장까지 뛰어서 하고 온다. 그리고 아침식사가 들어온다.
주 목사는 감방 안에서 시간만 나면 성경을 펴 놓고 함께 있는 수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처음엔 비웃기도 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주 목사의 경건생활과 영적 이상한 힘에 끌려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열심으로 성경공부를 하였다. 드디어 아침 저녁 감방 예배를 드리는데 모두 합심이 되었다.
어느 날, 새로운 죄수 한 사람이 들어왔다. 김형석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신의주가 고향이라 했다. 몹시 거칠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미였는데, 주 목사는 그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김형석은 커다란 눈 속에 주 목사를 담으면서,
“나는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외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두 없구, 되는대로 살아갈 것이오. 나를 상관 마시오.”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였다. 그러나 주 목사는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김형석은 주 목사의 그 성자다운 태도와 생활 모습에서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가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렴품이 알아가는 듯 하였다.
드디어 그는 굴복하고 말았다. 하루는 김 형석이.
“목사님, 나도 예수님을 믿기로 마음에 작정하였습니다. 나를 지도해 주십시오.” 그 오만하던 태도가 없어지고 얌전해지면서 자신의 마음을 내어 놓았다.
“참 반가운 일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리하여 36호실은 교회가 되었다. 아침 저녁 예배를 드리고 시간만 나면 성경공부였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평양의 가을은 짧았다. 아침 저녁 찬바람이 들락거린다 싶드니 추위가 다가왔다. 햇볕을 구경할 수 없는 감방 안은 더욱 음산하고 춥기만 하였다.
2. 검사출정 명령
11월 10일경부터 머리 뒤에 부스럼이 생기더니 점점 험해갔다. 부스럼은 목 뒤 급소에 생겨 목을 움직일 수 없는 통증을 가져왔다.
발치대종이다. 의사가 와서 치료를 하였다.
이것은 수술해서는 안되는 종기인데 칼로 짼 것이다. 그러니 더욱 악화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까지 되자 의사가 주 목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될 것 같소. 병보석으로 나가도록 하시오.”
그러나 주 목사는 거절하였다.
“나갈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죽기로 각오하고 들어온 몸입니다. 죽으면 영광이지요.”
주 목사는 정말 괴로워 한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의사는 병보석으로 나가도록 간곡히 권유했지만 주 목사는 반대하였다.
꿈에도 소원이요 바라는 순교다. 겁날 것은 없었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제는 떠나가나 보다>
생각하니 주 목사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주님! 나의 영혼을 거두소서. 이 땅에 미련은 없나이다.”
주 목사의 두 눈 언저리엔 뜨거운 눈물이 번진다.
앞에서 김형석이 입을 연다.
“목사님, 돌아가시면 제가 맏 상제가 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모두 상제노릇을 하겠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말을 하였다.
12월 2일, 몹시 추운 아침이었다. 간수가 오더니 철문을 열고 주 목사에게 검사 출정을 명령했다.
주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수인들이,
“목사님, 그래가지고 나가시겠습니까?”
염려를 한다.
“가다가 쓰러지더라도 어쩌겠습니까?”
주 목사는 일어나 간수를 따라나갔다.
머리에 용수를 씌운 다음 손에는 수갑을 채웠다. 차거운 수갑이 팔목에 매달리닌 전신이 저릿하면서 냉하여 온다.
고등계 형사실에 성도들이 모였다. 신사참배 반대자들만 이 날은 심문하는 것이었다. 용수를 씌워 놓았기 때문에 서로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일절 말도 못하게 하였다.
형사들과 간수들은 성도들을 다시 노끈으로 엮었다. 행동을 같이하게 하기 위해서다.
줄을 서서 고등계 형사실을 나와 마당을 걸었다. 법정까지 걸어가야 했다.
옥중성도들은 한 줄로 서서 길을 걸었다. 형무소를 나와 법정으로 가는 길이다. 형무소에서 법정까지는 약 오릿길이나 된다. 자동차가 귀한 전시라 걸어가야 했다.
주 목사는 목 뒤 종기로 인하여 몸에 열이 나고, 걸음을 조금 걸으니 허벅지에 몽우리가 생겨 발을 잘 옮길 수가 없다.
그는 그만 길에 주저앉고 만다. 간수가 회초리를 들어 주 목사를 후려 갈겼다.
“일어나!”
간수는 다시 발길로 찼다.
주남고 목사는 일어서면서
“아시가 이다이카라(다리가 아파서....)”
일본말을 하였다. 그가 얼른 쉽게 알아들으라고 일본말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알아들었는지 못알아들었는지 다시 발길로 걷어찰 뿐이었다. 간수의 지독한 횡포에 겨우 발을 디뎌 놓은 주 목사였다.
이 때 두 사람 뒤에 한상동 모가사가 가고 있었다. 한 목사는 그 목소리가 귀에 익은 듯하여 용수 틈서리에 눈을 주어 앞을 보니 주남고 목사였다.
주 목사는 괴로운 듯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억지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법정에 이르니 대기실에 모든 성도를 세웠다.
용수를 벗기고 수갑을 끌러 주었다. 일절 말은 금지되어 있었다. 혼자만 들어가 설 수 있는 칸막이가 있었다. 그 곳에 한 사람씩 세우는 것이었다. 칸막이가 나무로 만들어졌고, 혼자 앉을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뜻밖에 주 목사는 한상동 목사 옆자리에 들게 되었다. 한 목사가 손을 내밀어 주 목사의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한 사랑이 손과 손을 통하여 피부에 느껴진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말은 없지만 마음과 마음은 전류처럼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수고합니다.>
<참고 또 참읍시다. 순교의 그 순간까지....>
뜨거운 눈물이 두 목사의 동공에서 솟아나와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쉴새없이 눈물과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약없는 사람들. 이것이 이 땅위에서 마지막 만남이 될는지 모른다. 말이 필요없었다. 두 목사는 손과 손을 맞잡고 울고 또 울었다.
주남고 목사는 간수에게 이끌려 검사 앞에 나갔다. 검사는 주 목사의 병색이 짙은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주 목사의 얼굴은 굶주림과 추위와 병으로 누리끼리 하게 살갗이 부어 있었다.
검사는 연미의 눈초리를 주 목사 얼굴에 보내면서,
“신사참배를 하겠는가? 하면 산다.”
말을 던졌다.
“못합니다.”
주 목사는 그 유순한 눈동자를 아래로 깔면서 싸늘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다시 묻겠다. 일본 역대 천황은 사람이면서 신인줄을 아느냐?”
“일본 역대 천황은 하나님께서 일본 국가를 통하라고 세운 통치자인 줄 압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 영혼이 천국으로 가든, 지옥으로 가든, 가고 말지 신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신을 섬기는 것은 사신인 줄 압니다.”
검사의 얼굴에 노기가 등등하였다.
검사는 소리를 빽 질렀다.
“너는 불경죄를 지었으니 살아남지 못하리라.”
“.....”
“너는 당연히 처형되어야 해. 나가!”
주 목사는 검사실을 나왔다. 사십 여명의 옥중 성도들이 한결같이 심문을 받고 나왔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심문을 받았다.
아무도 검사의 심문에 항복한 분이 없는 듯 하였다. 그들은 다시 용수를 쓰고 수갑을 차고 노끈에 묶여 감방으로 돌아왔다.
3. 옥중 세례식
12월 8일.
일본 천황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투개시는 이날 새벽 날이 밝기 전,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도 이소로꾸가 진주만을 기습하고, 200여대의 항공기가 호놀룰루를 폭격하므로써 성공적 전적을 거두었다.
조선총독은 각 국장들에게 진주만의 전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정신과 자유주의 정신을 말살시키고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꺾으려 한 것이다.
친일파의 무리들은 어깨를 으쓱대며 민족주의자들과 기독교 신자들에게 앞장서서 박해를 가하였다. 전쟁의 냉혹한 바람은 평양 형무소에도 밀어 닥쳤다. 그 하찮은 콩밥이 달라진 것이다. 콩알맹이가 콩깻묵으로 바뀐 것이다.
콩알맹이 통째로 주어도 영양이 겨우 생명 유지에 불과한데 깻묵으로 변하였으니 견딜 수 없는 일이다.
12월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햇빛을 구경할 수 없는 음울한 감방 안. 모든 것을 대각대각 얼어붙게 하는 싸늘한 바람만이 구석 구석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마루 바닥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은 유리조각에 살이 베어 피가 흐르는 것 같은 아픔을 안아다 주었다.
밤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참아야 했다.
1942년 새해가 밝았다.
1월 첫 주일, 감방 안에서 첫 번째 세례식을 가지게 되었다. 김형석, 김종원 두 사람에게 세례 문답을 끝내고 세례를 주었다. 김종원은 밖에서 믿다가 낙심 되었던 청년이었으나 열심으로 성경을 배웠고, 새사람 될 것을 작정하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을 집례하는 주 목사와 세례를 받는 두 성도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봉현이란 사람은 세례받기를 원했지만 주 목사가 원하는 수준까지 아직 미숙한 것 같아서 학습을 세웠다. 감방안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세례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주 목사는 세례를 주고 나니 마음에 무거움이 왔다.
‘세례를 받고 나가서 신사참배를 하면 어쩔까?’
하는 걱정이 생긴 것이다. 그 후론 세례를 주지 않기로 하였다. 몇 사람이 세례 받기를 원하였지만 주 목사는 그들에게 조용히 타일렀다.
“세례를 받고 신사참배를 하면 세례받지 않은 것 보다 못한 결과가 됩니다. 훗날 사회에 나가서 신사참배 하지 않을 자신이 생기면 그 때 세례를 받으십시오.”
4. 이름을 남선으로 개명
주 목사는 목 뒤에 생긴 대종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으로 갈 줄 알았다. 의사도 그렇게 말했다.
“병 보석으로 나가서 치료하도록 하시오. 생명이 위험한 종기이기 때문에 이 감옥 안에서는 가망이 없오.”
간수들도 주 목사에 대하여 수군거렸다.
“고집 때문에 저 사람은 죽는 거야.”
감방 안에 함께 있는 수인들도 안타까워 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성이나 검붉게 부어오른 종기가 점차 사그라지면서 아픔이 점점 가시는 것이었다.
드디어 대종을 앓기 시작한 지 오십여일만에 낫게 되었다. 몸이 가벼워 지면서 밥맛이 돌아왔다. 짐승 사료 같은 그 콩깻묵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옆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이제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입맛이 돌아오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깻묵 밥 한 덩이를 다 먹고 소금국을 다 마시고 나니 목이 갈했다. 물을 찾았지만 물이 없었다.
물을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간수들은 빈정거리며 고함만 빽 질렀다.
“물이 어디 있어! 지금은 전시란 말야! 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물이 없어 목이 타 죽어가는 형편인데, 감옥 안에서 평안히 지내는 죄수 주제에 물이라니, 양심이 있어 없어?”
목 마름을 참기란 배고픈 것을 참는 것보다 더 하였다.
다음부터는 국을 마시지 않기로 하였다.
목에 종기가 낫고나니 잠도 평안히 잘 왔다.
어느 날 밤, 주 목사는 꿈 가운데서 윤산온 박사를 만났다.
윤산온 박사는 숭실 저눔ㄴ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나 신사 참배 반대자로 조선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교장직 파면을 당하고 출국까지 당하였다. 그는 그의 젊음을 한국에 복음사업과 교육사업을 위해 바친 위대한 교육자였다.
미국 사람으론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얼굴이 미남형으로 잘 생기고 말이 능했다. 한 때 미국에서 영화배우가 되라는 권면을 받을 만큼 말쑥한 모습이었다.
그에게 특기가 하나 있었다. 한 번 만난 사람이면 반드시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두 번째 만났을 땐 이름을 부른다. 여기에서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았다. 이렇게 그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빈틈이 없었다.
윤산온 반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많은 인격적 감화를 받았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몇 번 만나 회답을 얻기도 하였다. 그 정신적인 은사 윤산온 박사가 주 목사의 꿈에 나타난 것이다.
윤산온 박사는 생시와 꼭같은 모습으로 주 목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주남고 목사!”
주 목사는 너무나 반갑고 기뻐서,
“윤산온 선교사님!”
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주 목사의 이름이 좋지 않아요. 남고라고 하지 말고, 남선이라 하시오.”
“남선......”
“그렇소, 얼마나 부드러운 이름입니까?”
주 목사 스스로 남선을 중얼거리며 깨니 꿈이었다. 그로부터 남고라는 이름 대신 남선으로 부르게 되었다.
5. 나는 충성을 버릴 수 없다.
1942년 5월.
검사에게 불려 나갔더니 예심 판사에게 넘겨졌다.
주 목사는 예심 판사 앞에 섰다. 예심 판사는 준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가?”
주 목사는 뼈만 남아 앙상하게 여윈 몸집이지만 바로 서서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신사참배는 성경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는 경배하지 말라고 하였기에 우상을 섬기는 일이 되므로 반대합니다.”
“조선의 모든 목사가 다 신사참배를 한다면 그 때는 어덯게 하겠는가?”
“조선의 목사가 모두 신사참배를 한다 해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대로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고쳐지기 전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성경을 고치도록 하지!”
“성경을 누가 고친단 말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사람이 고치지 못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성경을 고칠 수 없습니다.”
“지독하군! 당신이 버티면 얼마나 가겠나? 지금 대 일본 제국은 세계를 점령하게 된다.”
판사의 얼굴에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패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 무렵 전세는 일본의 완전승리처럼 보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일본에 동조하여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태평양 전쟁은 세계전쟁으로 번졌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 세 동맹국과 미국, 영국, 불란서 연합군으로 인류 사상 최대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홍콩이 함락되고 말레이 반도가 일본의 발길에 짓밝히고, 싱가폴에 일본군이 상륙하였다. 일본 수상 도오죠오 히데끼는 연설을 하기 위하여 연단에 오를 때, 오르는 계단에 미국, 영국의 국기를 깔고 그 위를 밝고 오르기까지 하였다.
이런 전시인지라 예심 판사의 기백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당당한 예심판사 앞에 주 목사는 조금도 겁나는 빛을 띄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있는 음성으로,
“일본은 전쟁에 지고 맙니다. 일본은 망합니다. 천조대신을 섬기는 일본은 망합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예심 판사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예심판사는 주먹으로 탁자를 탁 치며 소리쳤다.
“코노야로, 사형감이다!”
주 목사의 얼굴엔 놀란 빛도 없었다. 태연히 주 목사는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판사님, 당신은 당신 나라에 충성하기 위하여 이렇게 판사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내 나라를 위해서 싸우며, 나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정조를 굽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주 인 예수님께 충성하고 싶은 마음 그것 뿐입니다.”
“가정에서 당신의 처자들이 얼마나 기다리겠나? 집으로 돌아가서 처자들을 돌보아야 되지 않겠나?”
“나는 모든 것을 나의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가정도 처자도 심지어 나의 생명까지 다 맡겼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나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판사는 다시 조용히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여기 도장만 꾹 찍으면 무사히 나가게 된다. 자! 손 도장을 찍으라.”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나는 나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심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주 목사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넘쳐 있었다. 심문을 받을 때마다 자신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강한 힘이 솟아 오른 것이다.
그 힘은 성령님의 능력의 힘이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더욱 성령님의 강한 역사를 체험하였다.
6. 딸의 면회
제8대 총독 미나미 지로는 이해 5월 어느 날, 이 땅을 떠났다.
그가 이 땅에 와서 가진 못된 짓을 다하며 일본 제국을 위해 충성을 하였지만 그는 군사참의관이란 별로 큰 벼슬도 아닌 직책에 임명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미나미 총독이 이 땅을 멍들게 한 죄악의 진상은 역사에 길이 남아 이 민족의 가슴에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미나미 총독은 우리 민족에게 참으로 몹쓸 짓을 많이 하였다. 그는 내선일체를 주장하였고, 한국의 지도자들에게 국민복을 입히고 머리를 깎았다.
1937년에는 애국금채회라는 것을 만들어 한국의 귀족과 고관분인들의 금비녀 금반지 등을 일본제국에 바치토록 하였다.
1938년 3월에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한국인의 생활을 괴롭혔다. 이는 국민의 모든 생활을 정부가 마음대로 간섭하고 징발 또는 징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게 된 것이다.
1939년 19월부터는 노무자까지 징용하여 규우슈우지방, 혹카이도 지방 탄광이나 군수 공장에 보내었다.
황국신민 서사란 것을 만들어 집집마다 제창하게 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일본어 사용을 주장하면서 한국어 사용을 금하였다. 또한 창씨개명으로 우리의 성씨마저 앗아 버렸다.
1938년 2월 2일 칙령, 제95호를 공포하여 육군 특별 지원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7세 이상의 남아들은 의무적으로 입대하여 사지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이같은 몹쓸 일을 감행한 미나미 총독은 일본국으로 소환되어 갔다.
1942년 5월 29일.
새 총독이 이 땅에 발을 디뎌 놓았다.
고이소 구니아끼, 그는 육군 대장이었다. 고이소 총독은 미나미 총독에 비하여 조금도 인간미를 더 가졌다고는 할 수 없는 고약한 사람이었다.
우선 그 생긴 모습부터가 험상스러워 마치 부르도크를 연상케 하였다. 그는 2년 전 이미 한국 땅에서 조선군 사령관의 직위에 있었다. 그러기에 한국의 모든 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고이소 총독은 미나미 총독의 쌓아 올린 그 지독한 제도 위에 더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의 위치를 구축하여 갔다.
평양 형무소의 대접은 말이 아니었다.
콩깻묵과 조, 밀껍질의 이 형편없는 밥덩이는 생명을 이어나갈 영양이 되지 못하였다. 형무소 안의 성도들은 부황증세를 나타내었다.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어 남의 얼굴들 같았다.
물론 사식이 없었다. 가족들이 면회로 와서 사식을 넣을려고 하자, 간수의 폭언이 쏟아졌다.
“지금 대 일본 제국의 피끊는 젊은이들이 일선 지구에서 전쟁으로 죽어가는 판국에 감옥에 있는 것들이 사식을 얻어 먹어! 말도 아닌 소리! 대 일본 제국을 반대하는 비국민들은 굶어 죽어도 마땅하고 감옥에서 썩어 나가야 해!”
전쟁의 파문은 형무소 구석 구석까지 살얼음처럼 깔려 있었다.
더위가 한참인 8월 초순 어느날, 경순이 평양에 올라왔다. 일본에서 간호학교를 다니다가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온 것이다.
경순은 한상동 목사 부인 김차숙씨를 만났다.
“아버지를 면회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경순이 눈에는 눈물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김차숙 여사는 형무소에 살다시피 출입하므로 간수들이며 고등계 형사들이 다 낯이 익었었다. 경순은 김차숙 여사의 주선으로 아버지 주 목사를 면회할 수 있게 되었다.
면회실에 들어서서 간수가 경순에게 말을 던졌다.
“일본 말로 대화를 하여라.”
“아버지는 일본말 잘 못하실 터이니 조선말로 하겠습니다.”
“일본말 안하면 면회가 되지 않는다.”
“잘 좀 봐주세요.”
“면회는 간단히 하는거야.”
“네!”
“면회하러 온 길이니 아버지 납득을 시켜 생각을 돌릴 수 있도록 하여라. 여기서 고생이 말이 아니다.”
지극히 주 목사를 위해 주는 듯한 말투였다. 경순은 싸늘하게 한 마디 던졌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리고 아버지는 어른이십니다. 내 생각보다는 아버지 생각이 바르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나는 모릅니다.”
“그럼 안부만 하고 그쳐!”
경순은 의자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순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 들었다.
얼마 만인가? 그렇게 인자하시고 다정하시던 아버지!
남을 해롭게 하신 일이 없고, 언제나 어려운 것은 자신이 하시고 쉬운 일은 남에게 돌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까운 것 없이 다 주시던 고마우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이런 형무소에서 고생을 하신다니 너무나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경순이 일본으로 건너 갈 때, 흰 두루막 입은 사람만 보면 혹시 아버지신가 하여 뒤돌아 보며 아버지를 그리워 하였다.
그렇게 보고 싶던 아버지! 아버지를 이 형무소에서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리듯 아파오며 가슴이 뛰었다.
얼마 후, 면회소의 창문이 열리고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경순이 뛰어가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며 외쳤다.
“아버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꽉 메이고 눈물이 눈을 덮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을 몰랐다.
“경순이 왔구나!”
주 목사의 눈 언저리에 가느다란 액체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공부는 잘 했나?”
“네!”
"경도 오빠도 잘 있고!“
“네!”
“집에 엄마랑 동생들 잘 있더냐?”
“네!”
경순은 차마 어머니와 동생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주 목사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에 부황증이 들어 본래의 모습은 차장 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 만으로 그가 아버지심을 알 수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저렇게까지 고통을 주는 것인가? 남의 것을 탐낸 일이 없고, 남을 때린 일이 없고, 몹쓸 일을 꾸민 일이 없는 저 손에 수갑이 웬 말인가?
경순은 아버지 앞에서 말을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경순은 자꾸 자꾸 울기만 하였다.
주 목사는,
“울지 마라. 나는 괜찮다.”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건만 주 목사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는 것이었다.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아버지! 제가 어쩌면 아버지를 도와 드릴 수 잇겠습니까?”
“너는 돌아가서 공부나 잘 해라, 그것이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다.”
간수가 주 목사 곁에 나타났다.
“시간이 되었어!”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3분의 시간은 너무 짧다.
“우리 아버지 좀 더 말하게 두어 보세요.”
경순은 애원했지만 간수는 주 목사를 데리고 판자문으로 사라졌다.
경순은 울면서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며 아버지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경순은 김차숙 여사에게,
“나도 여기 있고 싶습니다. 사모님처럼 나도 남아서 우리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싶어요.”
하고 부탁을 하였다. 김차숙 여사는 조용히 경순을 타일렀다.
“집으로 내려 가거라. 여기서는 아무 일도 할 것이 없다. 사상가의 자녀를 누가 쓰겠니!”
“식모라도 좋아요. 우리 아버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나를 우리 아버지 옆에 있게 해 주세요.”
경수는 울면서 애원하였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기철 목사 부인 오정모 여사도 경순을 권면하였다.
“여기서 취직도 되지 않고 일할 것이 없어요. 신분이 분명해야 식모살이라도 할 수 있지, 사상가의 자녀는 역적의 자손이라고 써주지를 않아요. 일본으로 들어가 하던 공부나 열심히 해요. 그것이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고 너를 위하는 일이지.”
경순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평양에 올라온 지 일 주일만에 다시 거창으로 내려갔다.
7. 옥중의 특별 기도제목
옥중 생활은 기도와 성경을 암송하는 생활이었다.
처음에는 옥중에서 성경을 허락하였지만 뒤에는 허락지 않았다. 성경읽는 것을 감시하였고, 성경이 발견되면 심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간수들이 책을 읽으라고 넣어 주는 것이 불교 서적이고 아니면 정신교육을 위한 일본 전제주의 사상전접 등이었다. 읽을 수도 없고, 읽고 싶지도 않은 책들만 넣어 주었다.
주 목사는 전날에 암송해 둔 성경구절들을 눈을 감고 암송하며 찬송과 기도로 나날을 보내었다.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러면서 특별한 제목 여섯 개를 세워 기도하였다.
(1) 말세의 바벨론 우상제국이 파괴되도록
일본 제국주의는 바벨론 우상국가다. 이 우상국가는 망해야 한다.
(2) 신앙 자유를 이한 기도.
일제의 탄압으로 순수신앙이 말살되어 간다.
‘이 당에 참 신앙의 자유를 주옵소서.’
(3)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였다.
이 나라 백성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유국이 되도록 기도하였다.
(4) 일본 신사가 소멸되어야 한다.
‘이 땅에 세원진 모든 신사가 다 불타게 하옵소서.’
(5) 조선 교회 지도자 교양을 위하여 수도원을 설립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고, 이 땅에 남아있는 교역자 대다수가 신사참배에 가담하였다.
이 땅에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가고 신사가 불타 버릴 때 다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때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마음의 무장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수도원이 필요하다. 또 이곳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교역자를 양성시켜야 한다.
(67) 거창에 성경학원을 하나 설립하도록 기도하였다. 지방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신앙의 훈련과 성경공부를 시켜야 하므로 성경학원이 필요한 것이다.
주 목사는 이 여섯 가지를 특별기도 제목으로 정해 기도하였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란 주의 말씀대로 이 여섯 가지의 특별 기도제목은 그 후 이루어졌다. 믿음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은 것이다.
8. 주기철 목사 순교하던 날
1944년 4월 13일.
옆 방에 있던 주기철 목사가 신병 때문에 병감으로 옮겨가던 날이다. 이 날 주 남선 목사는 심히 마음이 허전하였다.
서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지는 못했어도 옆에 있을땐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 병감으로 옮겨졌단다.
이 감옥 안에서 병들었다면 살아날 가망은 없다. 약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무엇으로 치료를 받으며, 무엇을 먹고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벌써 여러 목사와 장로들이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 기철 목사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하였다. 자리에 누워 어렴풋이 잠이 들려는데 비몽사몽간에 우렁찬 찬송소리가 들려왔다.
주남선 목사는 찬송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찬송은 윤산온 박사가 부르는 것이었다. 윤산온 박사는 곡조 찬송을 높이 들고 힘차게 찬송을 불렀다.
“십자가 군병되어서 예수를 좇을 때,
무서워 하는 맘으로 주 모른 체 할까
그리스도 내 구주여 나를 속량했으니
내 십자가를 벗은 후 저 면류관 쓰리.“
주남선 목사는 너무나 황홀한 중에 찬송을 듣다가 정신이 들었다.
꿈이었다. 환상이었는지 모른다. 정신이 말아 오면서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한 것이 아닐까?”
이제 막 그 찬송이 순교자를 위한 개선가로 생각이 되어졌다.
주남선 목사는 마음이 기뻐지며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주님 감사합니다. 또 한 분의 순교자를 받으셨나이까? 나의 때는 언제이옵니까? 주님이 허락하여 주옵소서!......”
다음날 정오에 소제부가 들어 왔다.
“주기철 목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남선 목사는 소제부에서 속삭이듯 물었다.
소제부는 부르튼 얼굴로 시원찮게 말을 던졌다.
“어제 밤 아홉시 반 경에 세상 떠났오!”
이 땅에 찬란히 빛나던 또 하나의 별이 떨어진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승리의 순교를 부러워 하며 종일 금식을 하였다. 들리는 말에는 예수 천당의 최봉석 목사도 별세하였다고 했다.
4월 19일. 주기철 목사보다 2일 앞서 가신 것이다.
평양 형무소는 갑자기 적막해 지는 듯 하였다.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지 알 수 없는 초조 속에 더욱 기도와 찬송과 성경암송으로 깨어 있는 나날을 보내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일본은 전쟁에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듯 하였다. 간수들의 움직임에 별로 생기가 없었다.
함께 부산에서 올라온 이현속 장로도 별세하였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최상림 목사도 세상을 떠났단다. 모두들 영양실조로 굶어 죽은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자신의 생명도 얼만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더욱 기도에 힘썼다.
7월 24일. 고이소 구니아끼 총독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소환되어 본국으로 갔다.
조선 제10대 총독으로 아베 노부유끼가 부임해 왔다. 아베 총독은 일본의 내각수반을 지낸 바 있는 정계의 거물이었다.
그는 육군대장 출신이다. 그는 부임하자 부임성명을 통하여,
“전쟁 완수의 근본은 사람에게 있다. 힘쓰면 불가능이 없는 것이다.”
하고 외쳤다. 그리하여 전쟁의 인적, 물적 자원의 80퍼센트 이상을 한국에서 얻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남자들은 징병과 징용으로 뽑아 내었고, 여자들은 근로 정신대를 조직케하였다.
여자 근로 전신대는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1944년 8월 23일부터 동원하였다. 일본은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었다. 형무소 안의 생활도 더욱 견디어내기가 힘겨워 갔다.
9. 일본은 망한다.
144년 12월. 예심정에 출정명령을 받았다. 주남선 목사는 비틀거리며 예심 판사 앞에 나가 섰다. 예심 판사는 되바라진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천조대신은 여호와와 같은 신인데, 왜 다른 신인줄 알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가?”
주남선 목사는 머리를 들어 예심 판사를 응시하면서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여호와 하나니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참 신이며,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신이신데, 어찌 천조대신을 여호와와 같은 신이라 하십니까? 천조대신은 사람이 만든 사신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참 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외엔 참 신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재림하여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면 일본의 천황에게도 통치권이 있는가?”
“없습니다. 천년왕국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통치권이 있습니다. 만일 천황이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통치권이 있습니다.”
“일본은 신사참배를 하는데 천황 폐하가 예수를 믿을 것 같으냐? 예수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통치권은 없습니다.”
“예수의 재림시엔 일본국가가 망하겠는가?”
“그렇습니다. 일본은 망합니다.”
예심 판사는 노기 띤 목소리로,
“요시!”
하더니 이빨에 힘을 주고 입을 다문다. 다시 입을 연 예심 판사는 고함을 쳤다.
“나가!”
발악적인 고함이었다.
주 목사는 밖으로 나왔다.
감방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10. 장질부사와 최후 심문
1944년 3울 초순.
조선 총독부 5층 비밀창고에서 아베 총독은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세이데와 비밀 회담을 하고 있었다.
아베 총독은 일본의 패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미군이 한국에 상륙하는 날, 한국의 인물들을 살육하자는 것이었다.
그 수는 3만명이었다. 세이데 사무관은 아베 총독에게
“저들의 처형은 감쪽같이 해야 합니다.”
고 말했다. 아베 총독은 이때부터 더욱 많은 한국의 각계 인사들을 예비 검속하였다. 사학가들의 말에 의하면 서울 인사들만도 이천 여명이라 했다. 총독부의 학살 음모는 치밀하게 진해되었다.
학살 대상 3만명 중에는 옥중 성도들과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학자들,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까지 포함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소위 조선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란 것이었다.
아베 총독은 이 찰령 시기를 계산하였다. 미군의 제주도 상륙을 8월 하순이나, 9월 초로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학살 시행은 8월 중순에 단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비밀리 학살 준비를 단행하고 있었다.
4월 어느날, 평양 시내에 장질부사가 유행하였다. 이 유행성 병균은 시설이 불결하고 영양실조에 태양 빛을 보지 못하는 평양 형무소 내에도 찾아왔다.
수인들 가운데 환자가 늘어갔다. 건강인들도 견디기 어려운 형무소 생활에 괴질이 찾아 온 것은 수인들의 근심을 또 하나 첨가시킨 결과이다.
위생관리도 의료시설도 말이 아닌 형무소였다. 여기에서 이 무서운 열병에 걸리는 날엔 그만이다. 죽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수인들 중 몇이 이 무서운 괴질에 걸려 신음하였다. 약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죽고 만 것이다.
주 목사도 예외없이 이 괴질에 걸렸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생각하면서 주 목사는 눈을 감았다.
온 전신이 어슬 어슬 추워오면서 견딜 수 없는 열기가 얼굴로 발산되였다.
주 목사는 자리에 눕지 않았다. 앉아서 기도로 병을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 병으로 저를 받으시렵니까? 소원입니다. 순교는 저의 평생 소원입니다. 어서 속히 저를 받으시옵소서!”
주 목사의 얼굴엔 괴로움의 빛도 두려움의 빛도 없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서 그 무서운 괴질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본 죄수 한 분이,
“목사님! 누워서 이불을 덮고 몸을 더웁게 하십시오. 그러시다가 큰일나겠습니다.”
하고 걱정을 한다.
“염려 마십시오. 죽든 살든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열병은 오래 계속되었다. 매일처럼 열이 40도를 오르내려 그 고통이 극심했다. 옆에 수인들이,
“아무래도 이 열병으로 돌아 가시겠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들이 상제노릇을 하지요.”
그들의 얼굴엔 슬픈 빛이 서려 있었다.
주 목사는 조금도 근심스러운 빛을 띠지 않고 의연하게 말했다.
“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살아서 필요하다면 이 열병에서 낫게 해 주실 것이고, 나를 데려 가실 때가 되었으면 나는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목사는 열심히 기도하였다. 예수님의 겟세마네동산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피땀나는 기도를 계속하였다.
훗날 주 목사는 이 때의 기도를 통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다소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기적이 나타났다. 장질부사에 걸린지 20여일 만에 몸의 열기가 떠나가는 것이었다. 몸이 가벼워지며 입맛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런 중에서도 예심 판사는 출정 명령을 내렸다. 병중이란 걸 통고하였더니 얼마 도안 말이 없었다. 주 목사가 일어나 음식을 먹으며 차차 생기를 찾게 되던 어느 날, 형무소 사무실로 예심판사가 찾아왔다.
그 때가 5월 초순이었다. 주 목사는 겨우 일어나 사무실로 나갔다. 주 목사의 모습을 바라본 예심판사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든지 길게 심문하지 않았다.
“전 번 심문할 때와 지금과 마음의 변화가 조금도 없는가?”
판사는 조용히 물었다.
"아무런 변동이 없습니다. 나의 대답은 그 때 대답한 그대로입니다. 몇 십번 몇 백번 물어도 그 외의 답은 할 수가 없습니다.“
판사는 더 노하지 않고 역시 조용한 음성으로,
“그럼 이 관계서류를 지방법원 공판정으로 보낼 수밖에 없군.”
그리고는 돌아가라 했다. 주 목사는 다시 감방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왔다. 피곤하였다. 주황색 이마에 송알송알 땀방울이 맺혔다. 감방에 들어오자 쓰러졌다.
“주님, 주님은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 저에게 힘을 주옵소서.........”
기도를 올리는 주 목사의 눈언저리에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그 이후 주 목사는 불리어 나가지 않았으며, 조용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형무소 안도 비교적 조용하였으며, 간수들도 전처럼 날뛰지 않았다.
전쟁은 이미 일본의 패전으로 기울고 있었다.
7월 24일. 독일, 이탈리아는 손을 들었고, 미국, 영국, 소련과 불란서, 중국은 포츠담 회담을 개최하여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졌으며, 8월 9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무서운 원자탄은 나가사끼에도 떨어졌다. 원자탄은 무서운 위력으로 폐허를 만들었다.
일본 대본영 발표는 가공할 신형폭탄이 떨어졌다고 발표를 하였지만 이 신형폭탄인 원자탄의 위력을 그들도 가히 짐작을 하지 못하였다.
얼마나 무서운 위력의 폭탄인가? 조그마한 두 개의 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두 지방 도시에 떨어졌는데 그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이 막대하였다.
건물이 파손되고 모든 초목까지 말라 죽은 것은 물론, 인명의 피해는 사망자 35만명, 피폭환자 30여만명을 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유병으로 두고 두고 오는 세대에 고통과 사회의 문제성을 만들어 낼 줄 누가 알았으랴?
이 원자탄 투하로 인하여 일본은 생각밖에 빨리 손을 들었고, 아베총독의 그 무서운 음모 보호관찰령 제3호는 미처 시행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은 모른다. 하나님은 순교자들과 옥중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신 것이다.
원수들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으시며, 불의한 자에게 기쁨을 주시지 않으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의인의 고통을 길게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땅에 생명잃은 교회를 그대로 방치해 두시지 않으시고 생명있는 산 교회로 부활시켜 주시기 위하여, 일본을 전쟁에서 패전케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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