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같이 빛나리 - 제4,5,6장
제4장
10년 걸린 졸업
1. 권서 일을 보면서
개신교는 성경이 중심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먼저 하는 일이 성경을 그 나라 말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일이었다.
1882년 만주에서 선교하던 로스(John Ross)목사 등이 우리나라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누가복음을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것을 장사꾼들의 손을 통하여 반포하였더니 그 효과는 대단하였다. 선교사가 정식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벌써 성경(누가복음)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 사람들의 손에 들려졌다.
선교사들은 문서전도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목사는 한국에 들어 온 2년 후,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번역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신약성경은 1900년에, 구약성경은 1911년에 완역 출판이 되었다.
한편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합동작업으로 1908년에 찬송가를 번역 출판하였다.
선교사들은 그 외에도 교리문답,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등 소책자도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이미 한국에는 1885년에 대영성서공회 한국지부가 서울에 생기고, 성경 반포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23년 이른 봄, 주남고 전도사는 출옥 후, 신학교를 더 계속할 경제적 형편이 못되어 성경반포 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신학교 졸업까지를 그는 10년으로 잡았다. 너무나 어려운 가정 경제를 생각하고 권서일에 나선 것이다. 권서 일은 힘드는 일이었다. 성경 찬송과 기타 종교 서적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며 책을 팔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집회도 인도하였다. 교회가 없는 곳에는 전도하며, 교인들을 모우고 가정을 정하여 예배를 드리게 하고 교회가 서도록 협력을 했다.
권서의 길은 고달팠다. 이런 일이 있었다.
초 봄이었다. 그날도 주남고 전도사는 책짐을 짊어지고 신원면 소재 소야 교회를 찾아 산길을 가고 있었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꽉 덮고 있는 깊은 산길을 들어섰다.
계곡에 이르니 안개 구름이 낮게 깔리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침밥을 거르고 나왔는데다가 수십리 길을 걸었으니 허기져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안개구름마저 끼어 길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앞이 캄캄하였다.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았다. 머리가 띵 해오면서 전신이 나른하였다. 그는 짐을 벗고 앉아 기도를 하였다. 나무 포기를 꼭 붙잡고 몸을 흔들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어나 다시 짐을 질려고 하는데 안개구름이 걷히면서 계곡저쪽에서 무엇인가 빨간 알맹이들이 눈에 보였다.
날쌔게 일어나 계곡으로 들어서니 산딸기가 빨갛게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주여! 감사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열심히 딸기를 따 먹었다. 얼마나 따먹었는지 배가 불렀다.
안개구름도 걷히고 길도 환히 보였다. 그는 다시 책짐을 짊어지고 능선을 올라서서 길을 따라 소야교회로 향하였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때는 딸기가 익는 계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깊은 산골짜기에 달기가 있었으니 참으로 부락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다시 한번 실감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의 일이었다. 그날도 책짐을 짊어지고 길을 걷고 있었다. 합천 접경인 가조교회로 가는 길이었다.
검은 구름이 하늘 가득히 덮혀 있었다. 집을 출발 할 때는 날씨가 몹시 포근하더니 얼마가지 않아 눈이 내리는 것이었다.
주남고 전도사는 열심히 길을 걸었다. 집동재를 넘을 때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렸다. 솜털같은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이었다. 머리와 어깨위에 쌓인 눈송이를 털며 고갯길을 내려갔다.
가도 가도 인가는 없고 눈만 펑펑 쏟아질 뿐이었다.
짚신을 신고 있었던 그는 바닥에 눈이 묻고 묻어 얼마가지 않아 신이 높아져서 길을 걸을 수 없었다. 눈 위에 앉아 짚신 밑에 붙은 눈을 털어버리고 길을 걷곤 하였다.
종일을 눈과 싸우며 길을 걸었다. 인가가 있으면 들어갈 것인데 인가도 없고 배는 고프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찬송을 불렀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옥중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자유로운가? 어디든 자유로이 갈 수 있고, 쉬고 싶으면 눈 위지만 앉아 쉴 수 있고, 목마르면 눈을 먹고........ 그는 감사가 넘쳤다.
해가 졌는지 어두움이 밀려왔다. 눈도 멎었다.
바람이 좀 차게 불기는 하지만 눈이 멎고 살 것 같았다.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였다.
한 골짝을 지나니 등불이 보였다. 인가가 있는가보다 생각하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등불이 여러개 보이고 사람들의 웅성 우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보니 어느 넓은 집 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사람들의 손에는 등불이 들려 있었다. 알고 보니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오늘 낮에 눈 때문에 길이 막혀 신랑이 오지 못하다가 늦게야 도착되어 밤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 날 밤은 푸짐한 대접을 받았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보음을 전하며 성경을 여러 권 팔기도 하였다.
주남고 전도사는 그 밤도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오렸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었다.
2. 10년만에 신학교 졸업
보통 3년만에 졸업하는 신학교를 주남고 전도사는 10년 만에 졸업을 하였다.
경제적 사정을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그러나 늦지만 졸업을 하게 되는 것만이 감사할 뿐이다.
1930년 3월 어느날. 졸업식을 마치고 나오는 주남고 전도사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어렷다. 오늘이 있기까지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던가?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을 기쁨과 감격을 바꾸기에는 충분하였다.
그 무렵 거창읍 교회는 어려움에 처하여 있었다.
지난 해 11월에 부임해 오신 이홍식 목사께서 건강이 좋지 못하여 사면을 한 것이었다. 이 목사는 젊은 부흥사로서 정열과 패기가 있는 목사였는데 너무 몸을 무리하게 사용하여 병을 얻었다.
교회에 부임한지 일 개월만에 병을 얻어 5개월간 고생을 하시다가 회복될 가망이 보이지 않자 사면을 하고 고향으로 떠났다. 이 목사의 고향은 함안군 군북이었다.
주남고 전도사가 졸업을 하고 거창으로 오니 교회는 쓸쓸하였다.
1930년 4월 2일 임시 당회장 이자익 목사 사회로 당회가 열려 생활비 55원으로 주남고 전도사를 교역자로 맞을 것으로 결정하였다. 주 남고 전도사는 다시 거창읍 교회 교역자가 된 것이다.
4월 5일.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군북에서 치료중이던 이홍식 목사가 별세하였다는 것이다.
다음 날, 주남고 전도사는 교회 대표로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거창에서 군북까지의 길은 이백리가 넘는 먼 길이었으나 그는 걸어 나섰다.
젊은 목사의 죽음은 더욱 슬펐다. 젊은 미망인과 철모르는 두 아들 삼열과 진열. 미망인은 울음으로 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허나 어린 삼열과 진열은 아버지의 장례날이 무슨 잔치날이나 되는 듯 우쭐거리며 신바람을 낸다.
주 전도사는 남의 일 같잖게 코가 찡 느꼈다.
주 전도사는 미망인을 조용히 위로 하였다.
“이 목사님은 이 세상에 오시어 할 일을 다 하시고 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사모님의 할 일입니다. 어린 저 두 아들을 신앙으로 잘 기르십시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님을 위해 일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전도사님........,”
미망인의 얼굴엔 굳은 결심이 익어가고 있었다.
과연 훗날, 이 목사의 두 아들은 어머니의 교훈과 피눈물의 기도와 수고로 목사가 되었다.
한 목사가 죽고 두 목사가 열매로 나타난 것이다.
제 5장
맹물 솥에 불때는 사택
1.거창읍 교회 위임목사
1930년 9월, 주남고 전도사는 경남노회에서 목사고사에 응하였다.
합격이 되어 장립을 받게 되었다.
인수 위원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노회장이 눈물어린 간곡한 기도를 올렸다. 주 목사의 가슴은 뜨거움으로 열이 났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주님을 위해 일생을 온전히 바치려는 굳은 마음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악수례를 나누고 강단에서 내려오는 주 목사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1930년 12월 7일 오전 11시, 감격에 찬 성찬예식을 거행하였다. 목사가 되어 처음으로 집례한 성찬예식이었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거룩하게 진행이 되었다.
온 교인이 은혜를 받았다.
이 날, 권임함 선교사 사회로 공동의회가 모였다. 주남고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하는 투표를 시행한 것이다. 세례교인 81명이 참석하여 만장일치로 가결을 보았다.
1931년 2월 22일. 경남노회가 파송한 위임위원 이자익목사 외 5명의 주선으로 주남고 목사의 위임식이 성대히거행되었다. 많은 성도들과 외부인사들도 참석하였는데, 윤봉기 영수도 참석하였다. 윤봉기 영수는 함양군 서산면 상남리 상남교회 영수였다.
윤봉기 영수는 1907년 4월 10일, 충북 영동읍에서 태어났다. 칠세에 서당에 들어가 한무을 익혔고, 아홉 살에 강원도 홍천에 가서 모곡학교에 입학하였다.
모곡학교는 남궁억 선생이 가르치고 있었다. 남궁억 선생은 1898년 9월에 발간된 황성신문사의 사장을 지낸 바 있는 유명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모곡학교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강하게 불어 넣어 주었다.
뒤에 이 일로 투옥되고 고초를 많이 받았지만 그는 투철한 민족사상을 젊은이들에게 고취시켰다.
윤봉기는 이 모곡학교에서 낭궁억 선생을 통하여 강한 배일사상과 애국애족의 교육을 받았다. 모곡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양주로 가서 재동 영어학교를 다녔다. 양주에 있으면서 양잠에대하여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전라도 잠수땅에 가서 삼촌 밑에 얼마 있다가 결혼을 하였다.
함양군 서상면 삼남리에 경치가 좋고 큰 절이 있다는 말을 듣고 윤봉기는 이 절에 놀러간 일이 있었다. 산에 나무가 많고 공기가 맑아 마음에 들었다.
절 주지는 동경약전을 나온 유식한 주지였다. 주지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윤봉기가 뽕나무 접붙이는 기술을 갖고 있다는 말에 자기 절에 와서도 도와 달라고 주지가 조르는 것이었다.
“생활 염려는 하지 말고 오시면 됩니다.”
그리하여 윤봉기는 영각사에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오 형선 장로가 영각사에 찾아왔다. 민족사상이 강한 청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오 장로는 윤봉기 청년과 인사를 나누고 민족사상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오 장로는 종종 찾아와 윤 청년을 만났다.
하루는 오 장로가 윤봉기 청년에게
“내만 이 곳에 놀러 올 것이 아니라 윤 선생도 내 사는 곳에 한번 찾아 오시오.”
하고 당부 하였다.
“일요일에 한 번 찾아 가겠습니다.”
약속대로 윤봉기는 오 장로를 찾아갔고 예배에 참석을 하였다. 예배 장소에서 처음 주남고 목사를 만났다. 그 때, 주남ㄴ고 목사는 목사 인수를 받기 전, 전도사로 일보고 있었다.
처음 대하는 주남고 전도사의 모습은 윤봉기 청년의 눈에 성자로 보였다. 인자하고 겸손한 주 남고 전도사의 태도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초가삼간에서 남반과 여반을 방 두나에 가각 앉히고 마루에서 설교를 하였다.
윤 봉기는 주 전도사의 열띤 설교에서 많은 것을 마음에 담은 뜻하였다. 예배 후 민족주의에 대한 대화가 오가는 중, 윤보기는 주남고 전도사와 오형선 장로 등과 통하였다.
"주일마다 오겠습니다."
윤봉기는 이렇게 약속을 하고 거창을 떠났다. 윤봉기는 절로 돌아와서 계속 일을 보면서도 그 마음은 거창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일마다 거창교회로 나가고 주남고 전도사와 오형선 장로를 만나는 것을 그이 낙으로 삼았다.
얼마 후, 윤봉기 청년은 절에서 짐을 꾸렸다. 아랫 마을로 이사를 한 것이다.
방을 얻어 살림을 정돈하고 일자리를 마련했는데 상남 사립국민학교에 교사일을 보게 된 것이다.
얼마 후 그는 따로 방을 얻어 교인들과 모았다. 그리하여 주일이면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일년이 지난후 이자익 목사가 찾아왔다.
이자익 목사는 연합당회장을 맡아 순회 전도를 하며 다녔다. 이 목사는 윤봉기에게 오전 예배시간에 학습을 세웠다. 그러더니 저녁 예배시간에 세례를 주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고 어떨덜한 윤봉기 청년에게 이어 영수로 임명을 하는 것이었다.
윤봉기는 영수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이자익 목사에게 물었다.
“영수가 무엇입니까?”
“영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영수를 주었구나!”
이 목사는 피식 얼굴가에 웃음을 날리드니 대답했다.
“영수는 집사를 다스리고, 설교도 하고 교회를 살피는 직이지요?”
영수가 된 윤봉기는 열심으로 교회일을 도왔다.
2월 22일, 주남고 목사 위임식에 특별히 학교일을 두고 참석한 것이다. 특히 윤봉기 영수의 마음을 끄는 것은 위임식에 양복을 선물받은 일이었다.
윤봉기는 옆 교인에게,
“위임식 때는 어떤 목사라도 양복을 선물로 드립니까?”
하고 물었다.
“대개의 교회들은 양복을 해줍니다.”
윤봉기 영수는 주 목사의 양복 입은 모습을 그려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 종종 주 목사를 만났지만 양복 입은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
하루는 주 목사를 만난 윤 영수는 조용히 물어보았다.
“목사님, 왜 양복을 입고 다니시지 않습니까? 전일 위임식때 받은 양복이 있지 않습니까? 양복을 입으시면 더 신사로 멋이 있어 뵐 것인데요·····.”
주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 농촌교회 목사입니다. 농촌지방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역시 한복이 어울려요. 그리고 내가 한복을 입고 다니는 데는 또 한기지 이유가 있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윤 영수는 그것도 궁금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항시 흰 두루막을 걸치고 다니는 모습이 이상하였다.
주 목사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시더니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민족사상 때문이지요. 대구 형무소와 진주 형무소에서 동립운동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의 일을 잊고 싶지 않아서요. 형무소에서, 나라 사랑의 마음을 굳히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한복을 입는 거요."
운봉기 영수의 머리가 또 한 번 수그러졌다.
2. 가정에서 좋은 아버지
주 목사는 독립운동과 권서 생활과 신학 공부 때문에 동한했던 가적을 돌아보았다.
착실한 남편으로써 좋은 아버지로 가정을 보살폈다. 목사가 가정에서의 할 일도 가족들의 신앙교육 문제였다.
주 목사는 유순한 그의 천성적 성격과 신앙의 힘으로 가정을 조용히 이끌어 갔다.
큰 아들 경중은 18세 소년으로 거창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으로 갔다.
다시 윤인구 목사가 경영하던 창신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둘째 아들 경도가 15세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흥학교는 기독학교였다.
고학을 하다시피 어려운 가운데 학교를 다녔다.
딸 경순이 11살. 거창에서 서오성 여선교사가 경영하던 명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명덕 학교는 4년제 초등학교였는데 극빈한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시켰다. 일반 교과목은 국민학교와 꼭 같으면서 성경과목이 하나 더 있었다. 교사로는 남 직원 1명에 여 직원 3명이었다. 경순은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서 째 아들 경효는 5세 엄마의 등의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다녔다.
네 째 아들 경세는 2세. 엄마의 등에 매달려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주 목사는 이 자녀들의 장래를 위하여 하나님께 늘 기도하였다.
경중이 마산에서 방하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시교회 목사들의 생활을 보고 부러운 생각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조용히 졸랐다.
“아버지, 우리도 이 교회 사면하고 다른 교회로 가요.”
“왜 그런 소리를 하냐?”
“교인들도 매일 보는 사람이고, 별로 좋아하는 눈치도 아닌데 오래 붙어 있는 것은 좋지 안아요.”
“네가 무엇을 알아서 그런 소리를 하냐? 내가 여기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는데 좋다고 오래있고 싫다고 떠나고 할 수가 있겠니? 내가 이 교회 위임을 받을 때, 이 교회를 위해서 몸을 바칠 것을 약속 했느니라.”
조용히 꾸짖는다기 보다 아들을 이해시키는 주 목사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시 교회는 참 굉장해요. 새로 부임하면 환영식을 하고 사면하고 떠나면 또 크게 송별식을 하고 그래서 목사들도 부자가 된다구요.”
경중은 몹시 그들을 부러워하는 뜻에서 말하였다.
“나는 이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처음 복음을 받은 곳이고,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고, 장로 장립을 받고, 신학을 마치고 목사 안수까지 받고, 지금은 위임 목사가 아니냐? 환영을 받기 위해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사가 된 거야.”
처음은 어머니도 아들 경중이 말에 찬동하였지만 그만 잠잠하였다.
주 목사는 자녀들에 대하여 과격하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부드럽고 유순하게 자녀들을 대하였다.
교육의 효과는 즉서에 나타나는 법이 아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라야 참된 교육은 효과를 발하게 된다.
룻소(J.J. Rousseu)는 그의 교육론에 이런 말을 하였다.
“유년기의 교육은 그 결과가 즉시에 선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적인 교육을 받은 아이나 그렇지 못한 아이나 동일하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 교육의 결과는 나타나는 것이다.”
주 목사의 자녀 교육이야 말로 이런 이상적이 교육이었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경순이 학교에서 늦게 돌아왔다. 이날 경순은 동무들과 학교 화단가에서 봉선화 꽃잎으로 손톱에 물을 들였다.
연분홍빛 꽃물이 손톱에 먹혀들어 여간 보기에 좋지 않았다. 열심으로 꽃잎을 따서 손톱에 문지르다보니 저녁 어둠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급히 집으로 뛰어왔다. 주 목사는 딸의 당황하는 거동을 살피다가,
“왜 늦었냐?”
“·······”
“어디 갔다 오냐?”
“아닙니다.”
“학교에서 그만·····”
“어서 올라와 밥 먹어라. 배고프겠다.”
주 목사는 지극히 평온한 음성으로 말을 하였다. 경순이 마루로 올라오자 주 목사는 다시 엄한 말씀 한 마디 하였다.
“다음에 또 이렇게 늦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알겠니?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면 집으로 빨리 와야지, 집에서 늦게까지 네가 오지 않으면 걱정을 하게 되지 않니.”
그 날은 벌을 면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또 늦었다. 그 날도 역시 봉선화 꽃잎 때문이었다.
늦게 들어오는 경순을 바라보신 주 목사는 나직히 속삭이듯 말했다.
“약속을 지켜야지. 너는 분명히 잘못하였다. 그러니 벌을 받아야 한다.”
경순은 떨리는 마음으로 시무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매를 맞을래, 벽장 안에 들어가서 곰곰이 생각해 볼래?”
“·····”
“어느 것을 택하겠니? 네가 원하는 것을 하여주마.”
경순은 어린 마음에 매 맞는 것 보다는 벽장에 들어가 있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었다.
“벽장에 들어가겠어예.”
이윽고 주 목사는 경순을 벽장에 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캄캄한 골방이었다. 어둡고 침울한 곳이었다. 숨이 답답하고 갑갑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벌로 견디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어렴풋이 잠이 들려는데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너라.”
벽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 이후 다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일이 없었다.
3. 강인한 배일사상
중앙에서 일인 거물급 인사들이 거창에 내려왔다. 지방인심을 수습하고 일본에게 복종하는 강연을 하러 온 것이다.
거창 지방 유지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을 공회당에 불러 모았다. 총독 아래 있는 콧수염의 사나이가 점잖을 피우며 일본을 인식시켰다.
연설을 마치고 그는 군중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오늘날 우리 대 일본 제국에 대하여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요? 또한 현재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무엇이든지 좋으니 말을 해 보시오.”
단상 뒤에는 의자에 수십명의 금테두른 모자를 쓴 자들이 앉아 있었다. 몇 명의 경찰들이 주변에 서 있었고 공회당 밖에도 띄엄띄엄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말을 해 보시오! 무엇이든지 좋소. 이 자리에서는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소. 여러분들을 위하는 일이면 무엇이나 가능한한 노력해 보겠오.”
군중들은 조용하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군중들은 일인들의 당당한 그 위세에 억압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도 할 말이 없오?”
이 때였다.
주 남고 목사가 군중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물론 모든 군중들의 눈길이 주 목사에게로 모두 모여 들었다.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말해 보시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지요.”
“그게 무엇이오!”
“우리나라에서 일본 사람들이 정치를 하지 말고 물러가 주는 일이오”
연설하던 자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면서 눈썹이 송충이 기어가듯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둘러앉은 금테두른 일인들의 얼굴도 동시에 이그러졌다. 주 목사는 한층 소리를 높혀 외치듯이 말을 던졌다.
“이 사실은 나도 원하고 우리 2천만 동포가 다 같이 원하는 바요.”
군중들은 가슴에 뜨거움이 찾아왔다.
차마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주 목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일인들은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고 술렁이기만 하였다.
그들은 현장에서 주 목사를 끌고가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주 목사 뒤에는 항시 형사가 감시를 하였다.
한 편, 거창 유지들을 비롯한 모든 읍민들이 주 목사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존경하였다. 거창 읍민들은 모이면 주 목사의 이야기를 하였다.
“주 목사는 참 애국자야. 민족심이 가한 어른이라구.”
4. 고등계 강 형사
공회당 사건 이후, 주 목사 뒤에는 고등계 형사가 미행하고 있었다.
강 형사라는 자는 한국 사람이다. 주 목사의 강인한 배일사상과 독립정신을 아는 거창 경찰서에서는 주 목사를 감시하기 위해서 강 형사를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강 형사는 밤낮을 주 목사 사택 앞에서 감시하였다. 식사 시간과 잠자는 시간 빼고는 언제나 사택 문 앞을 서성거리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강 형사의 끈덕진 감시하에서도 조금도 다름없이 성경을 읽었고, 주석을 참고하며 설교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심방할 일이 있으면 성경찬송을 끼고 태연히 나가셨다.
강 형사는 심방길에도 미행하였다.
하루는 심방길에 따라오는 강 형사를 g야하여 주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강 형사님, 나를 따라다니는 끈덕진 그 정성을 다른 데로 돌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강 형사는 계면쩍게 피식 웃으면서,
“다른 데라니요?”
하고 주 목사옆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시오. 그런 쓸데없는 짓하고 다니지 말고 예수를 믿고 영혼도 육신도 잘 되는 길을 찾으시오.”
“슬데 없는 짓이라니? 대 일본 제국을 위하여 충성하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란 말이요?”
“강 형사! 당신의 나라는 대 일본 제국이 아니지 않소?”
“뭐라구!”
강 형사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면서 부르르 전신을 떠는 것이었다.
지독한 친일파였다. 그러나 주 목사는 시종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그를 대했고 시간있는데로 전도를 하였다.
뒤에 이 강 형사가 주 목사를 잡아 들였고, 심한 고문까지 하였다. 해방 후 강 형사는 진주로 도망갔는데, 거창지방 좌익계 사람들이 뒤쫓아가서 돌로 쳐 죽였다.
5. 청빈한 가정 생활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하여 정치하는 중, 가장 탐을 낸 것이 쌀이었다.
일제는 해마다 4백 64만석의 쌀을 외국에서 사들여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한반도의 쌀 생산은 참으로 탐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본국의 식량 문제를 한반도에서 해결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것이 1920년 11월 총독부가 발표한 산미증식계획 이었다.
일제는 제1차,2차로 산미증식 계획을 세워 시행하면서 공출이란 이름으로 쌀을 빼앗아 갔다. 한편으로는 군수공업 시설을 하여 식민지 착취를 강화하여 나갔다.
이러한 경제력과 노동력의 착취로 농민들이 생활은 궁핍하게만 되어져 갔다. 교인들이 생활이 궁핍하여가니 교역자의 생활인들 오죽하겠는가?
자녀들이 많은 주 목사 가정은 식사를 하는 날보다 끼니를 넘기는 날이 더욱 많아졌다.
철없는 어린 것은 배가 고파 울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그 어려운 사정을 교인들이 알까봐 염려하였고, 끼니를 넘기는 날에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솥에 물을 붇고 불을 넣었다. 물만 끓고 있는 빈 솥을 바라보는 사모님과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눈물이 아롱졌다.
당시 주 목사는 삼군 (거창, 합천, 함양) 지방 시찰장으로 여러교회를 혼자 시찰하며 돌보았다. 한 번 나갔다가 며칠이 걸려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면 집에는 십여 명의 전도사들과 교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 교회의 문제들을 상의하기 위해서 주 목사를 기다린 것이다.
주 목사는 그들 개인 개인, 개 교회마다의 문제를 정중히 해결지어 주었다. 그리고 찾아온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해서 보내는 것이다.
자신은 굶으면서 찾아온 전도사들에게는 배불리 먹여 보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처사가 못 마땅하였다.
“아버지, 아버지의 자식들은 굶어도 좋습니까? 배가 고파 우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습니까?”
주 목사는 손을 내밀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애 너희들의 배고픔을 내가 모르겠니? 그러나 저 분들은 다 주님의 종들이란다. 나를 찾아온 주님의 종들을 굶겨 보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너희들을 배불리 먹여 주실 것이다.”
아이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아야 해. 배고픈 사람이 우리들 뿐이니?”
아이들은 아버지의 처사에 불평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수 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었고, 그들은 아버지의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지금 주 목사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성공하였고, 배고픈 일이 다시는 없게 되었다.
6. 충성된 청지기
그해 여름 비가 많이 왔다. 장대비가 계속하여 여러날 퍼부었다.
둑이 터지고, 산골짝 도랑가의 집들이 떠내려 왔다. 그래도 비는 멎을 줄을 모르고 쏟아졌고 바람까지 불었다.
주 목사는 그 밤에 등불을 켜 들고 심방길에 나섰다. 월천 동네 교인집이 염려가 되어 찾아가는 길이었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월천은 거창읍에서 오리길이 되었다. 그 먼 길을 어둠을 헤치고 걸어가는 것이었다. 두루막 자락을 걷어 올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내를 건너 교인의 집 앞에 이르렀다. 벌써 이 집은 마루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급히 교인을 불렀다.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주 목사의 깨우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뜬 교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보니 물이 마루 위로 올라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짐을 챙길 여유도 없이 밖으로 나와 강둑에 올라셨다. 집을 돌아보니 어느 듯 물은 지붕 위를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그 때 주 목사의 방문이 없었으면 그들은 자다가 난을 당할뻔 하였다. 그들 가족들은 너무도 고마워,
“목사님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목사님을 보내 주셨군요.”
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주 목사는 계속 물 때문에 고생할 만한 성도들의 집을 그 밤에 찾아 심방을 하였다.
밤이 늦어 비 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리는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다녔다. 교인들 집 앞에 가서 바로 인한 피해가 없고 불이 꺼져 있으면 자는 줄 알고 그냥 지나갔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러 찾아가는 길이 아니다.
그는 교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이 예정 어린 심방의 길을 다니는 것이다. 교인들의 불행이 목사의 불행이요, 교인들의 슬픈일이 곧 목사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 밤에 그는 옷을 흠뻑 비에 적시며 심방을 하였다. 온 교인들의 집을 그 밤에 다 돌아보았다. 심방을 끝내고 돌아오니 새벽닭이 두 홰를 쳤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교회 출석을 잘하던 노파가 한 분 있었는데 병들어 가지리에 있는 친정으로 갔다. 그 노파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이 중하자 친정으로 간 것이다.
한데 그 노파는 회복되지 못하고 그 길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교회로 왔다. 주 목사는 집사들에게 연락했지만 사택으로 찾아온 사람은 세 사람 뿐이었다.
주 목사는 세 집사와 길을 떠났다.
가지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였다.
초상집은 쓸쓸하였다. 입관을 하고 마당에서 장례식 예배를 드렸다.
상여군이 적었다. 주 목사는 앞장서서 상여를 메었다.
이마에 구슬땀이 송알송알 맺혀 흘러내렸다. 능선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이 황토구를 안고와 얼굴에 더부룩히 묻혀주고 지나간다.
주 목사의 입에서는 찬송만 흘러 나왔다.
“우리 구주님 계신 곳에 천사 함께 늘 찬송하고, 주께 영광을 돌림으로, 모든 슬퍼한 맘 플겠네.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교인들 집 앞을 그냥 지나지 않고 들어가 기도하였다. 함께 동행을 한 최영교 집사는 주 목사의 그 충성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하나님 밖에 모르시는 귀한 어른이시다.”
최 집사는 그날 주 목사와 동행하였다가 너무나 피곤하여 집에 들어오자 자리에 쓰러졌는데 3일간 몸살을 하였다고 했다.
이런일도 있었다.
그해 겨울은 눈이 몹시 많이 내렸다.
길이 눈에 묻혀 사람들의 왕래가 힘드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지방교회 순회에 나선 것이다. 삼십리가 넘는 가조면 마상리 교회로 간 것이다. 산길은 눈에 묻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항상 바지 저고리에 두루막을 걸친 몸가짐이다.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한다는 것이 그만 한발을 헛딛어 눈속을 아무렇게나 마구 뒹굴어 내려 가는 것이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두루막 뒷자락이 찢어져 나풀거렸고 다리를 절기까지 하였다.
순회를 마치고 돌아온 후도 오랫동안 한 쪽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만나는 교인마다
“목사님 왜 다리를 져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럴때면 목사님은 피식 웃으시며,
“눈에 미끄러져 조금 다쳤습니다. 내리막길에 그냥 주저 앉았드랬습니다. 곧 괜찮을 것입니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였다.
7. 아버지가 사 주신 책상
주경순은 거창 명덕학교 4년을 졸업하고 진주로 갔다.
선교사가 경영하는 시원 여학교 5학년에 편입을 한 것이다.
가난한 목사의 딸로 자라면서 그녀는 설움도 많았다.
국민학교 과정을 공부하는데도 이처럼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학비와 식생활 문제로 선교사의 힘을 빌리기 위하여 진주로 왔다.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12세 어린 소녀는 집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두 눈에 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자르르 양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엄마!”
가만히 불러보는 경순.
해가 서녘 하늘로 기울고 어둠살이 몰려 올 땐 못견디게 집 생각이 났다.
생각을 말고 공부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야무지게 마음을 고쳐먹어도 12세 어린 소녀의 마음은 굳세지를 못했다.
날이 가도 집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장씩 떼도록 되어 있는 큰 달력이 기숙사 방 벽에 걸려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경순은 달력이 걸려 있는 벽을 향한다.
다른 아이들은 다 자기 책상이 있어서 책들을 가지런히 정돈해 놓고 제법 화병을 구하여 꽃도 꽂아놓고 앉아 공부를 한다.
그러나 경순에게는 책상이 없었다.
책보에 책을 싸서 방 모퉁이에 밀쳐놓고 필요한 것만 챙겨 방바닥에 펴 놓고 공부를 하였다.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 집 형편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라 묵묵히 참고 공부에만 전심을 기울였다.
이 무렵 진주에서 봄 노회가 시작되었다.
아버지 주 목사가 노회에 참석차 진주로 왔다. 주 목사는 딸이 있는 학교로 찾아왔다.
기숙사 방을 돌아보고 딸을 만났다.
경순은 아버지를 만나자 너무나 반가워 울음이 터졌다. 주 목사는 얼마의 돈을 내밀며 어린 딸을 위로해 주었다.
“아버지, 나는 책상이 없어요.”
철없는 딸은 아버지의 가난한 호주머니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
언제나 조용한 주 목사.
주 목사는 딸에게 그가 유속하고 있는 여관을 가르쳐 주었다. 경순은 수업이 끝나자 아버지 여관으로 갔다. 아버지 주 목사는 최상림(崔尙林) 목사와 한 방에 있었다. 다음 날도 경순은 여관으로 찾아갔으나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최상림 목사 혼자 방에 앉아 있었다.
“목사님! 우리 아버지 어디 가셨습니까?”
“오, 경순이 왔니? 잘 왔다. 아버지는 급한 일이 생겨 빨리 거창으로 가셨다. 아버지가 가시면서 네가 오거든 저걸 전해주라 하더군.”
최 목사는 책상을 경순에게 내 밀었다. 새 책상이었다. 그렇게 가지고 싶던 책상이었다.
책상을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아름다운 선물.
경순은 아버지가 사다 주고 가신 책상을 머리에 이고 기숙사로 왔다. 책상을 방 한 쪽에 자리잡아 놓고 그 앞에 앉자 눈물이 나왔다. 그 후 책상 머리에 앉을 때마다 아버지의 훈훈한 사랑을 피부로 느꼈다.
한 학기를 마치고 경순은 방학 2일 전에 선교사 자동차 편으로 거창으로 왔다.
8. 기도와 성적
경순이 방학이 되어 집에 온지 열흘이 지났다. 학교에서 경순이 앞으로 편지가 날라왔다.
뜯어보니 성적표였다. 성적이 형편없다. 중간 밖에 되지 않는다.
“기도를 좀 하고 공부를 해라. 세상 학과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야 잘 할 수 있는 거야.”
“공부하고 기도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경순은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모르는 소리, 공부를 하는 것도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께 총명한 머리를 달라고 기도해야지.”
2학기가 시작되어 경순은 진주로 갔다. 경순은 밤이고 낮이고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침저녁 특별히 시간내어 기도하였고 책상 앞에서 공부를 시작하기 전 먼저 잠시 기도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공부에 요령이 생겨지는 것이다.
학기 말 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올랐다.
6학년 때엔 3등을 하였다.
학기말 성적표를 보신 아버지는 경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봐라. 성적이 올라가지 않았니? 기도의 응답이야.”
“앞으론 더 기도 많이 하겠습니다.”
경순은 진주 시원 여학교를 졸업한 후 동래 일신 여학교에 응시하기 위하여 원서를 내었다. 그러나 공부에 너무 심혈을 기울였음인지 날짜 4일을 앞두고 경순은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다.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면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배돈 병원에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았다.
얼마만큼 전신이 돌아오자 경순은 기도하였다. 입원하여 3일이 지나자 열이 내리고 몸이 가벼워 지는 것이다. 퇴원하자 경순은 짐을 챙겼다.
동래로 가기 위하여 역으로 갔다.
김용국 목사 딸과 함께 기차를 탔다. 그녀는 지난 해 시원여학교를 졸업하고, 일신 여학교에 응시하였지만 시험에 떨어졌다. 그래서 한 해 더 재수하여 시험치러 가는 것이다.
동래에 도착하여 우선 동래 교회를 찾아갔다.
김만일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그는 사전 연락을 받고 두 목사의 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거기엔 김해읍 교회 이 목사 딸과 그의 전도사 딸도 와 있었다. 가난한 교역자의 딸들이 가난한 교역자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시험을 치루고 발표를 기다렸는데 결과는 가슴 아픈 것이었다. 경순이 혼자 합격하고 다른 3명은 모두 떨어진 것이다.
시험에 떨어진 그들은 몹시 우는 것이었다. 시험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슬프게 만드는가? 경순도 그들 친구들의 슬픔에 함께 젖었다.
차라리 자신도 그들과 함께 떨어져졌으면 싶었다. 함께 공부하게 되어 좋았는데 시험이란 게 그들 사이를 갈라 놓았다.
경순은 시험에 떨어진 친구들을 위로도 해주지 못하였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는 결과가 될 것 같아, 간단히 몇 마디 하곤 집으로 향하였다.
거창으로 돌아가면서 경순은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였다.
“세상 학과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야 잘 할 수 있는 거야.”
사실이었다.
경순은 기도의 힘이 참으로 큰 것임을 마음에 굳게 확신하였다.
제 6 장
일본제 고문과 한국제 신앙의 대결
1. 신사참배(神社參拜)의 사상적 배경
신사참배는 1935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제6대 총독 우가끼(우가끼) 말년에 학교를 중심으로 실시하게 된 것이다.
신사참배는 일본국신(日本國神)을 숭배하는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일본 개국신 아마데라스 오미까미를 비롯하여, 역대 천황(天皇)이나 무사들, 공로자, 순국 군인의 영을 숭배하기 위하여 신사를 짓고 그 앞에 참배하는 것이다.
이 참배는 처음 일본 학생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한 것을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고 북지를 침범하여 국제 연맹을 탈퇴함으로써 한국에도 시행하게 되었다.
일제는 한국에선 우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써 사로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평양 숭실학교와 숭실 전문학교, 숭의 여학교 등이 반기를 들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당시 평안남도 지사 야스따께는 반대하는 세 학교에 대하여 60일의 여유를 주면서 회담을 바랬다.
1935년 11월, 세 학교에서는 신사참배 반대 성명을 발표하게된 것이다. 야스따께 지사는 노하여 숭실학교, 숭실 전문학교 교장 윤산은(G.S. Mcunne)선교사와 숭의 여고 교장 스누크(V.L. snook)여사를 면직시켰다.
1936년 8월, 미나미 지로(南次限)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신사참배는 본격적으로 감행되었다.
미나미 총독은 간악하고 교활한 자이다. 그는 본래 우가끼 계열의 장성(將星)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가끼가 물러서면서 추천을 해 주어 총독이 되었고 우가끼 정책을 계승할 것을 약속한 처지였다.
그러나 우가끼 세력이 일본 국내에서 힘을 잃게 되자 미나미는 조선 총독된 지 6개월 만에 우가끼를 배신하고 신흥 전쟁군벌에 아부하면서 잔혹한 정사를 펼치게 된 것이다.
미나미는 철저한 황국신민화(黃菊臣民化)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전쟁물자 수탈정책(收奪政策)을 실시하였다.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일어(日語) 사용을 강요하였고, 신사참배를 실시하므로 종교생활을 탄압하였다.
형식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하면서 천황(天皇)을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존재로 조작하여 절대 순종을 주장하므로써 실은 신앙의 자유를 박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잠잠할 수가 없었다. 목사들은 강단에서 설교를 통하여 우상주의를 배격하였고, 신자들의 마음 속에 배일 사상을 침투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인본주의는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목사들 중에는 시세의 바람을 타고 날쌔게 일제에 아부하면서 탄압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날이 갈수록 반대자의 세력이 확장되자 일제는 노골적으로 교회 탄압 운동을 꾀하게 되었다.
주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가 나오자 직감적으로 이는 말세에 나타날 바벨론 우상예배란 걸 인식하였다.
“그럴 수는 없다. 우상이 교회로 들어올 수는 없다. 교회가 우상을 용납할 수 는 없다. 이미 세상은 다 되었구나 이 우상숭배 문제 때문에 피를 흘리게 되겠구나.”
주 목사는 혼자 중얼거리며 기도 생활에 더욱 힘썼다.
2. 해운대 교회에서 터진 불씨
1938년 3월 해운대 교회에서 봄노회가 시작되었다. 주 목사는 그날 늦게 노회장소에 들어섰다.
노회원들의 얼굴들이 굳어 있었다. 이 날 오후에 심상찮은 일이 있었다. 그 되어진 일을 이야기 듣고는 주 목사 자신도 같은 심정으로 동의하였다.
오후에 되어진 일은 이러하였다.
한상동(韓尙東) 목사가 노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해운대 교회에 들어선 것은 오후 5시 경이었다.
별관으로 가니 이약신(李約臣) 목사가 먼저 와 있었다.
“한 목사님, 이제 오십니까?”
인사를 하는 이 목사의 얼굴에 검은 구름이 꽉 끼어 있었다.
“예 일찍 오셨군요.”
한 목사는 자리에 앉으면서 인사를 하고는 묵상 기도를 하였다.
한 목사가 머리를 들어 이 목사를 바라보니 이 목하는 근심어린 모습을 감추지 못하면서 입을 열었다.
“한 목사님, 큰일났습니다.”
“큰일이라니요.”
“삼 김이 허락을 하고 왔습니다.”
삼 김(三金) 김 ?일, 김 ?창, 김 ?진 세 목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언젠가 경상남도 도경찰부에서 노회에 요구해온 일이 있었다.
노회가 모일 땐 노회장이 일을 처리하고 권한이 있지만 노회가 폐하고 나면 아무도 상대하여 말 할 대상이 없으니 노회대표 세 사람을 뽑아 달라는 것이었다.
노회가 이 일을 위하여 뽑은 사람이 삼 김이다.
도경찰부에 노회 대표로 간 삼 김이 신사참배하기로 허락을 하고 왔다는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약신 목사의 얼굴은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슬픈 얼굴이었다.
“이번 노회 때 보고를 한답니다. 보고를 하면 반대할 자가 있겠습니까? 경찰에서 노회에 참석합니다. 사복 경찰이 둘러서 있다가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연행하여 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목사의 말을 듣고 있던 한 목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 목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큰 일은 큰 일이지만 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그 보고서 받지 않기로 동의를 할 터이니 이 목사가 재청을 하시오.”
“그러면 됐습니다. 내가 재청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한 목사는 가슴이 뛰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만일 신사참배하겠다는 저 보고가 부결이 되고 나며, 동래 경찰서장 목이 날아갈 것이고, 또한 도경찰국장의 목까지 날라 갈 것이다. 그러한 형편에 일개 목사의 생명이 땅 위에 존속하겠는가?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고 개처럼 처참하게 죽이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한 목사는 사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죽든지 살든지 이제는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길 것 뿐이었다.
밤 8시, 개회 예배가 진행되었다. 사복 형사들이 교회당 내에 짝 깔려 있었다.
첫날 회무가 끝났다. 형사들이 흩어지고 회원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때 교회당 안에서 통곡 소리가 터졌다.
한상동 목사의 애절한 기도 소리였다.
회원들의 기도가 동시에 터졌다. 주 목사도 이미 각오하고 있는터라 올 것이 왔구나 싶어 이 밤을 밝히며 철야 기도에 들어갔다.
이날 밤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참석한 모든 회원들이 은혜를 충만히 받았다.
날이 밝자 김 ?환 목사가 자리에 일어나더니,
“나도 재청 삼청 하겠습니다.”
하고 외쳤다.
김 ?환 목사는 친일파였다. 그런데 그 밤의 은혜 분위기 속에서 감화를 받아 용기있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김 목사는 다시 소리쳤다.
“우리는 다 같이 행동합시다! 같이 죽읍시다! 주님을 위하여 죽을 때가 왔습니다.”
회원들의 마음은 동일하였다. 이 소식이 벌써 경찰서에 들어갔다. 동래 경찰서장이 해운대에 나타났다.
서장은 여관에 자리 잡고 앉아서 목사들을 호출하였다.
목사들은 담대한 마음으로 여관에 들어갔다. 서장은 목사들의 얼굴을 보더니 반가워 하면서 부드럽게 말을 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하여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번 당신들의 노회에서 꼭 지지를 결정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신사참배 하라 말라 소리 안하겠으니 이번 노회에서 그 보고를 하지도 말고 결의도 말아 주시오. 거듭 부탁합니다. 결코 이번 노회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거론하지 마십시오.”
서장은 설설 비는 투로 말을 뱉았다.
“좋습니다.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목사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여관을 물러 나왔다. 이리하여 이날 오전 회무는 무사히 끝났다.
오후 회무가 진행될 때엔 형사들도 다 돌아가고 서넛만 남아 뒷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이러한 시간에 김 ?창 목사가 무슨 생각으로서인지 발언대에 나가 그 보고를 하고 말았다.
“이 보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고가 나왔으니 회장이 물을 수 밖에 없었다.
한상동 목사가 일어나
“그 보고 받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동의에 재청합니다.”
이약신 목사의 목소리였다.
결국 김 ?창 목사의 보고는 부결이 되었다.
졸다가 깨어난 형사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보고가 나왔다고?”
한 형사가 일어나 앞 회원에게 물었다.
“보고가 나왔습니다.”
그 보고 어떻게 되었오?“
“부결되었지요.”
“뭐라구?”
뜻 밖에 큰 일이 생겼다고 형사들은 뛰고 굴리며 야단법석이었다.
3. 금식기도와 굳은 결심
경남 노회를 마치고 돌아온 주 목사는 더욱 앞날의 한국 교회를 위하여 기도에 힘썼다.
거창 경찰서에도 경남 노회의 소식은 전해졌다. 신사참배 반대 강경파가 노회안에 많다는 정보를 입수한 거창 경찰서에서는 주 목사를 거창 지방 요인물(要人物)로 지목하였다.
4얼 어느 날.
거창 경찰서에서 드디어 주 목사를 호출하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가볍게 경찰서로 들어섰다. 서장은 반색을 하면서,
“지난번 해운대에는 잘 다녀 왔오?”
말을 던진다.
“예, 잘 다녀 왔습니다.”
“그 때 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를 결의했다면서요?”
“당연한 일이지요.”
“뭐라고요?”
서장은 책상을 꽝 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독신자로서 하나님 외에 딴 신이 없다고 주장한 일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주 목사의 목소리는 깊은 계곡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물처럼 줄줄 흘렀다.
“하하, 이거 큰일 나겠군.”
서장은 안절부절 어쩔줄을 모른다.
서장은 태도를 바꾸어 인식시켜 볼려고 온갖 말을 다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늘은 그냥 가시오.”
서장은 더 이상 어쩌지를 못하고 돌려 보내는 것이다.
조선 총독부가 형식상이지만 신교(新敎)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사참배 반대 이유만으로서는 구속(拘束)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주 목사는 계속 심방하며 기도하는 일에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6월 어느날 이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답답하고 초조해 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주 목사는 가조리(加祚里) 교회로 건너갔다. 조용한 곳이라 그곳에서 특별 기도를 시작했다.
신사참배 문제를 주제로 하고 2일간 금식기도를 하였다. 낮에는 주로 요한계시록을 탐독하였고 밤에는 기도에 열중하였다.
계시록을 읽으며 연구하는 중, 신사참배는 틀림없는 말세의 바벨론 우상숭배였다.
“이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므로 싸워야한다.”
주 목사는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싸워 이겨야 해! 못이기면 죽는 거다. 영혼이 죽는 거다. 영혼이 죽는 것은 영원히 죽는 것이다.>
혼자 말하던 주 목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죽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인생으로 태어나서 태어난 목적을 상실하고 상실되는 것 아닌가? 무서운 일이다.
주 목사는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였다.
“주님! 담대한 힘을 주옵소서. 나는 무능하고 나의 힘은 약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김을 주시지 않으시면 별 수 없이 넘어집니다. 주님 힘을 주옵소서, 힘을‥‥ 하늘의 힘을 주옵소서‥‥.”
주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를 위하여 싸울 것을 굳게 다짐하면서 가조리 교회를 떠났다.
거창교회로 돌아온 주 목사는 줄곧 방에 앉아 전적 하나님께만 매달렸다.
‘사람은 세상에 났다가 한 번은 죽고 만다. 한 번은 죽고 말 인생, 그렇다면 한 번 뿐인 인생의 죽음을 어떻게 죽을 것인가? 보다 참되고 보람되게 죽어야 할 것이 아닌가? 참되고 보람된 죽음은 어떤 것인가?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주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길 밖에 더 참되고 가치있는 죽음이 있겠는가?’
죽자! 주님을 위하여 죽자. 주 목사는 눈을 감는다.
“주님, 나에게 순교의 큰 축복을 주옵소서.”
두 줄기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 내린다.
이상한 일이었다. 기도 할때마다 힘이 솟았다. 전에 체험하지 못한 큰 힘이었다. 담대하여 지는 것이었다.
주 목사는 매일매일 신비한 은혜 세계에서 믿음의 힘을 기르고 있었다.
4. 치욕의 제27회 총회
9월이 되자 전국 교회는 술렁술렁하였다.
경찰의 손길은 교회에 미쳐 신사참배 반대 교직자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총회 전체 각 노회에서는 노회가 모였다. 경남 노회는 밀양읍 교회에서 모였다. 주 목사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경찰에서 예비검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총대를 뽑는 노회이므로 신사참배 반대자가 총대가 되면 큰일이라고 미리 선수를 쓴 것이었다. 주 목사 뿐 아니었다. 부산에서는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몇 목사들이 예비 검속되었다.
검속 이유는 신사참배 반대가 아니고 다른 이유에서였다.
총독부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법을 내 걸고 있기 때문에 신앙문제 정식 체포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남고 목사는 사상이 불건전하다 하여 검속하였으며, 한 상동목사는 싱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천황에 대한 불경 죄를 적용하여 검속하였다.
평양에서는 주기철(朱基撤) 목사와 송영길(宋永吉) 목사도 검속하였는데, 그들은 대구 유재기(劉載奇) 목사의 농촌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농우회(農友會)사건을 적용하였다.
채정민(蔡廷敏) 목사, 이기선(李基宣) 목사 등 허다한 목사들도 근사한 이유를 붙여 미리 예비 검속을 하였다.
총회 날자가 가까웠다. 지방 경찰서에서는, 선정된 총회 총대들을 불러 신사참배를 인식시켰다.
9월 9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가 개회되는 날이다.
평양 시내에는 사복 형사들이 깔렸다.
총대들은 풀이 죽어 총회 장소로 모여 들었다. 그러나 기가나서 펄펄한 총대들도 많았다. 그들은 친일파 목사들이었다.
총회 장소는 성문밖 교회다.
하오 8시 정각. 총대 목사 86명, 장로 총대 85명, 선교사 22명 등 총회원 193명이 총회장소 지정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청은 겨우 3명이었다. 97명의 경찰관들이 틈틈이 끼어 앉아 억압을 주었다.
총회장 이문주(李文主) 목사 사회로 조선 장로회 제27회 총회가 개회된 것이다.
예배가 끝나고 임원 서거에 들어갔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회장에 홍택기(洪澤麒), 부회장에 김길창(金吉昌), 서기에 곽진근(郭眞根), 회계 고한규(高漢糾) 제씨가 각각 피선되었다.
총회는 정회가 되었다.
다음 날, 역사적인 9월 10일.
오전 9시 45분에 정시보다 15분 늦게 총회가 속회되었다. 이유는 임원들이 밖에 게양된 일장기에 경배하는 일과, 평남 도지사와 경찰서장이 늦게 도착된 일로 인하여 15분 지연된 것이다.
10시 30분, 공천부장 함 ?영 목사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대표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제안권은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이 가한 줄 아오며‥‥”
하고 낭독되자 회장이 가결을 지울려고 하였다. 그 때 방위량 선교사가 회장을 불렀다. 옆자리의 형사가 제지를 하였다.
회장이 소리쳤다.
“선교사는 잠잠하시오!”
방위량 선교사는,
“항의합니다!”
하고 외치다가 앉았다. 권세열 선교사가,
“회장 발언권을 주시오!”
소리쳤지만 그 소리도 묵살되고 말았다.
회장은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입을 열었다.
“가하면 예하시오.”
“예‥‥”
힘 없는 대답이 나왔다.
“가결 되었습니다.”
하고 강대상을 쳤다. 그 때였다.
“회장! 규칙 위반이오!”
외치며 일어난 사람은 한부선(韓富善) 선교사였다. 회장이 가만 묻고, 부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선 것이다.
“왜 가만 묻고 부는 묻지 않습니까? 이것은 불법이오.”
그러나 말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옆에 앉았던 경찰관이 한 선교사를 끌어 내는 것이었다. 안간 힘을 쓰며 규칙을 들고 항의하였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하기로 결의를 보게 된 것이다.
총회는 폐회가 되었다. 김 ?창 부회장은 총회를 대표해서 각 노회 노회장들과 함께 평양신사를 찾아가서 참배를 하였다.
5. 금족령(禁足令)
주 목사는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소식은 다 들었다. 총회 소식을 듣고 흥분하여 탄식하였다.
하루는 경찰에서 다시 주 목사를 불렀다. 점점 험악하여 지는 형편이었다. 서장은 주 목사를 보더니 비굴한 웃음을 얼굴가에 날리며 의자를 내어 놓았다.
“앉으시오.”
주 목사는 비소어린 서장의 얼굴에서 눈을 도려 창문가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평양소식 들었겠지요?”
서장이 입을 열었다.
“들었습니다.”
“어떻소? 이제는 총회에서도 신사참배 하도록 결의가 되었고하니 거절 못하기겠지요?”
“총회 결의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총회 결의가 소용 없다니‥‥ 총회를 불복종 하겠다는게요?”
“총회가 불법으로 결의를 한 일이라면 순종할 수 없지요.”
“그래요.”
서장의 얼굴엔 다시 살얼음이 일기 시작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사참배만은 할 수 없습니다.”
주 목사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범할 수 없는 위엄이 풍겨 흘렀다.
서장은 버럭 성을 내면서,
“당신의 발을 오늘부터 묶어 두겠오! 집에서 한 발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거요. 나 거창 경찰서장의 명령이오!”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 목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날 오후 일절 자유가 없었다.
고등계 형사들이 집을 교대로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경남 노회에서는 주 목사에 대하여 거창읍 교회 위임목사 해제통보가 왔다.
강제로 교회 사면이 되었다. 그리고 사택을 내어 놓아야 했다.
노회의 압력을 받은 교회측에서는 사택에서 옮겨 주기를 통보해 왔다.
참으로 비정한 일이었다.
주 목사는 말없이 죽전(竹田)에 있는 자택으로 짐을 옮겼다. 밤에 니고데모처럼 박병영 집사가 쌀 몇 되를 가지고 찾아왔다.
“목사님‥‥”
말을 계속하지 못하는 박 집사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주 목사는 박 집사의 손을 꼭 쥐어 주면서,
“박 집사, 참 고맙소! 마음은 결코 불의한 자들에게 빼앗기지마시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것입니다.”
뜨거운 말을 들려 주었다.
박 집사는 후에(1947년 11월 30일) 주 목사 주례로 장로 장립을 받았다. 주 목사 댁에는 교회 직분자들의 발까지 끊어졌다.
쓸쓸한 서재에 앉은 주 목사는 기도와 성경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금족령이 내려 바깥 출입이 금지되었다. 식량이 떨어져 어려움이 극심하였다.
이웃에 조재룡(曺在龍) 장로댁이 있었다. 조 장로는 평소에도 주 목사 편에서정신적으로 도와준 분이다. 그는 농사를 얼마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시기지만 양식을 숨겨 놓고 굶지는 않았다.
그는 틈틈이 얼마의 양식을 주 목사 댁에 전해주곤 하였다. 문제가 있을 때 목사를 도우고 위해 주는 덕과 인정이 있는 장로였다.
그의 아들 조상덕(曺尙德)은 당시 15세의 소년이었는데 아버지가 목사를 위해 주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다 한다.
주 목사의 집문 밖에는 형사들이 항시 사나운 맹수들처럼 어르릉 거리고 있었다.
이런 때에 경남 노회에서 임원 중 몇이 거창에 왔다. 김 ?창 목사와 김?일 목사였다. 그들은 주 목사와 가까운 사이였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노회일을 염려하였고 의논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가 나자 그들과 주 목사 사이에는 거리가 생겼다.
오늘 그들이 주 목사를 찾아 온 것은 도경(道警)의 부탁을 받고 파송되어 온 것으로 주 목사를 설득하기 위하여 왔다.
허나 주 목사는 조용히 거절하였다.
김 ?일 목사가
“주 목사님, 우리 강변에 나가서 좀 이야기 합시다.”
다시 제의를 하였다.
“그 일이라면 더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일로는 대화가 되겠지만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두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래 도 되지 않을 것 같자, 두 목사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했다.
주 목사도 따라 일어났다. 그때, 주 목사 부인 남술남 여사가 주 목사에게 눈치를 하였다.
주 목사가 부인쪽을 향하자,
“따라 나가지 마시오, 나가면 무슨 말로 유혹할런지 모릅니다.”
부인의 음성이 날카로웠다.
“안심하시오, 내가 그들의 말에 넘어갈상 싶소?”
“장담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도 장담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인사만 하고 오겠오.”
주 목사는 일어나 회색 두루막을 입었다. 그러나 두루막 깃고 대가 붙어 있지를 않았다.
“여보, 이 두르막 동전 좀 달아 주시오.”
그러나 부인은 따라나가 시험을 받을까 염려하여 깃 고대를 달아주지 않았다.
주 목사는 더 부인에게 졸라 봤자 소용없음을 알고 털실로 짠 녹도리로 감싸 두르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서 전송을 하곤 곧장 들어왔다.
주 목사도 주 목사지만 부인의 애국심과 신앙심은 주 목사 못지않게 강하였다.“ 그러기에 어떤 어려움과 수난도 가정에서 다 참고 이겨 나간 것이고 주 목사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에서는 생활비가 나오지 않았다.
교역자 생활에 한 달만 생활비가 나오지 않아도 빚을 져야한다. 겨우 생활 할 수 있을 정도의 적은 생활비에다 그것마저 끊어졌으니 생활은 막연하게 되었다.
가을이었다. 들에는 추수가 한창이고 농가에서는 쌀가마가 오고 갔다.
여름동안 검게 타고 깡마른 농부들의 얼굴에 약간의 윤기가 돌고 살이 붙는 것도 이때이다. 허나 주 목사의 집에는 양식이 모자랐다.
큰 아들 경중이 마산 복음 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해 3월부터 거창 보성학원에 교원으로 나가긴 하지만 그 월급은 가정에 별로 보탬이 되지 못하였다.
간혹 할머니 교인들이 치마폭에 쌀 얼마씩을 숨겨 비밀리에 전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쌀을 가지고 다니다가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히면 용서가 없는 때였다. 그들은 경제범으로 취급을 했다. 그러기에 여간한 용기와 간절함이 없이는 감히 쌀을 치마폭에 싸들고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등계 형사들이 주 목사의 집을 경계하고 있는 이런 살벌한 환경에서 쌀을 전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환란 때에 더욱 꽃피는 것이었다.
핍박은 갈수록 노골화 되고 극력했다. 경찰에서는 수시로 주 목사를 호출하였고 들어가면 매를 맞는 것이었다. 심한 고문으로 괴로움을 주기도 했다.
장작쪽으로 모질게 때렸다. 피가나고 시멘트 바닥이 피로 물들면 물을 부어 씻고 또 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기절이라도 하면 물통을 덮어 씌웠다.
이럴때 경중과 경효가 양유 넣은 주전자를 들고 경찰서에 찾아갔다.
아버지께 양유를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주 목사 집에는 젖짜는 양이 한 마리 있었다. 이 양이 주 목사댁의 식구들에게 영양을 공급해 주는 유일한 원천이였다. 경중이와 경효가 경찰서 뒷문으로 들어섰을 때, 장작쪽으로 사람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경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다. 살금살금 기어들어 창문 안으로 보니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 주 목사가 매를 맞고 있었다.
경효는 순간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단번에 뛰어들어 장작을 뺏어 형사에게 휘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뿐이었다. 힘이 없었다. 자신에게도 힘이 없었고, 나라를 잃은 백성이기에 더욱 힘이 없었다.
경효는 고사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순사를 만나 주전자를 주면서 아버지께 좀 전하여 달라고 간청을 했다.
순사는 주전 자를 받아 경호네가 보는 앞에서 그냥 땅에 부어 버리는 것이었다. 아버지께 드리기 위하여 온 식구가 아끼고 아낀 야유이다.
그러나 그 아까운 양유를 순사는 땅에 부어버리는 것이다. 치솟는 어린 가슴의 분노를 그대로 삼킨 채, 경효는 경중 형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경효의 눈에 눈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피로 범벅된 모습이 어른거렸다.
고등계 형사들은 면회 온 두 아들이 돌아간 후에도 고문을 계속하였다. 때리고 또 때려실신 상태가 되면 그들은 비웃는 것이었다.
마치 예수님을 고문하던 로마 군인들 처럼,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고 하듯이.
“지도자가 되어가지고 이게 무슨 꼴이람!”
하고 그들은 비웃었다.
찬물을 끼얹어 희미한 정신을 가다듬어 몸을 일으키면,
“잘 생각해봐!”
말을 뱉는다.
“백 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요. 참 신은 하나님 뿐, 다른 신은 없는게요. 신사참배는 할 수 없어!”
다시 때린다.
주 목사는 실신상태 그대로 업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며칠을 치료를 받고 겨우 일어났다. 그는 조용히 생각하여 보았다.
<신사참배,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다. 그런데 일반 신자들은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몰라서 계명을 어긴다면 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억울한 일인가? 알게 해야지, 가르쳐 주어야 한다.>
주 목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간다. 그의 옷은 언제나 무명 저고리 바지에 두루마기다.
철저한 한복주의자. 이 한복주의자는 그의 민족의식에서였다.
그만큼 그는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의 것을 소중히 여겼다.
그의 한복차림 바람에 고생하는 이는 부인 남술남(南述藍)여사였다. 그녀는 불평 한 마디 없이 남편의 일을 도왔고 어린 자녀들을 보살펴 왔다.
남편에겐 열녀요, 자녀들에겐 너무나 훌륭한 어머니였다. 씻은듯 가난한 무임교역자의 가정 살림을 짜증없이 끌고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주 목사는 그지없이 미안했다.
때 묻은 한복을 어느 사이에 씻고 말려 다듬이질을 하였는지 언제나 깨끗한 것을 내어 주었다.
그 후 경중은 징집(徵集) 문제로 집을 나가 행방을 감추게 되었다. 경도(璟道)는 전주 신흥 중학교를 다니다가 대구 개성 중학교에 편입하여 다녔다. 물론 고학을 하였다.
겨도는 개성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경도에 있는 고종 형의 주선으로 도일하였다.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다.
경순(璟順)은 동래 일신학교에 재학 중이다. 영양부족과 기관지염으로 쇠약하고 공부를 하는 것보다 병을 앓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약 한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병과 싸우는 그녀는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볼 뿐이었다.
6. 신사참배 반대 운동
주 목사는 깨끗하게 다듬어진 한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거창시찰 구역내의 교회들을 순방(巡訪)하기 위해서이다.
주 목사는 거창, 합천, 함양지방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교인들을 만났다. 그리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신사참배는 결코 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 목사의 권면은 좋은 반응을 일으켰다. 모두들 그렇다고 굳은 마음의 결심을 보여 주었다.
1939년 12월 6일.
주 목사는 다시 거창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담당 고등계 형사는 심문을 하였다.
“모든 목사들이 다 신사참배를 하고도 예수를 잘 믿고 있는데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냐?”
“나는 그럴 수 없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요.”
“이 거창은 조용하단 말이야! 당신 혼자 때문에 우리도 귀찮아!”
아무리 타이르며 욱박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형사들은 유치장으로 끌고가서 가두어 버렸다.
12월 초순 인데도 덕유산(德裕山) 봉우리엔 흰눈이 덮혀 있었다. 눈 위로 굴러 내려온 바람은 거창의 넓은 벌판을 지나 시가지로 휘몰아 치면서 다욱 싸늘하고 그리고 어둡고, 침울하였다.
이 음침한 유치장 안에 주 목사는 혼자 앉아 있었다.
밤 8시가 되자 고등계 형사 둘이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주 목사에게 무릎을 꿇게 하였다.
심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은 기대하였던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마다 갖은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
참으로 지독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몽둥이를 가지고 패다가 그것이 부러지자 장작개비를 가지고 와서 때리는 것이다.
굶주린 육체는 추위를 더 많이 느낀다. 살갗이 얼어 여들여들한데 장작으로 때렷으니 그 아픔이 어떠하였을까?
피는 시멘트 바닥을 불게 물들였다. 형사들은 그 피를 물로 씻어내고 또 때렸지만 그러나 주 목사는 말이 없었다.
원래 주 목사는 조용한 사람이다.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더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모른다.
주 목사는 고문을 당하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 목사가 눈을 떳을 땐 사방은 조용하였다. 30촉짜리 전등 불이 환히 유치장안을 비추고 있었다. 출입문이 잠겨 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 그냥 쓰러져 있는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은 주 목사는 그대로 업디어 주님께 기도를 하였다.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불의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나의 곁을 떠나지 모옵소서.”
그의 마음은 한없이 평온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물에 젖은 시멘트 바닥은 얼음덩이처럼 차가와야 했고, 그 다신의 몸은 오한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는 것이다. 그는 추위를 잊고 있는 것이다. 고문 때문에 긴장되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었다. 분명히 그는 훈훈한 온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몸 전체가 훈훈하였다. 그 손을 내밀어 시멘트 바닥을 만져 보았다. 뜨끈뜨끈한 것이 마치 온돌방 같았다.
그는 전시이 폭신폭신한 털로 담요 속에 파묻혀 있는듯 한없이 편하였다.
사르르 눈이 감기며 잠이 왔다. 잠을 자게 되었다.
주 목사는 뒤에 이 일을 이야기 하면서,
“푹신푹신한 털은 실제 털이 아니라, 우리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나는 주님의 품 속에서 잠자며 편안히 쉬면서 지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한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주님은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반대하다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들과는 불꽃 속에서 다니엘과는 사자굴 속에서 주님은 함께 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일이 우상숭배하는 일이다. 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유치장에서 고문당하는 주님의 종을 주께서 외면하시겠는가?
주님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주님의 종을 얼마나 바라보시며 기뻐하셨을까? 주 목사는 구금된지 8일만에 석방이 되어 나왔다.
물론 장정의 등에 업혀 나온 것이다.
집에 누어 치료를 받았다.
전신이 바스라지듯 아팠다. 바로 누워서는 허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겨우 일어나 뒷간 정도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1월 3일 오후.
두 분의 손님이 왔다.
밀양 마산에서 한상동 목사가 이인재 전도사와 함께 주 목사를 찾아 온 것이다. 참으로 반가운 손님들이었다.
주 목사는 두 분의 동지를 방으로 영접하였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주 목사의 말에 한 목사도 피차 마찬가지란 걸 말했다.
“나도 약 2주일 들어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생명을 내놓은 마당에 그게 뭐 대단한 일입니까?”
한 목사는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조용히 계속한다.
“평양과 만주 지방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이 일을 위해 이 전도사가 뛰어 내려왔지요.”
한 목사의 말을 받아 이인재 전도사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중인 신학생이었다.
지난 9월, 27회 총회에서 신학교 개학을 무기 연기시켰기 때문에 정식 강의를 받지 못하고 그는 선교사들에게 개인 교수를 받고 있었다.
그 때, 선교사들을 통하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소식을 들었다. 북한 일대에 많은 동지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있다고 했다.
만주에서는 한부선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 이유를 인쇄해서 교회마다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 무렵 한 청년이 기숙사에 이 인재 전도사를 찾아온 것이다. 청년은 돈 400원을 내어 놓으면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사용해 달라고 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더 이상 한가하게 앉아 공부할 수 없었다. 그는 깊이 생각하였다.
<아, 지금은 공부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모두들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나서고 있는데, 나 혼자 한가하게 공부를 하고 있다니‥‥>
그리하여 이 전도사는 평양을 떠났다.
그 무렵 한 목사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강제 사면을 당하고 부산 다대포 고향집에 내려가 있었다.
집에서 기도하던 중 아무래도 신사참배 반대에 조금 소극적인 태도로 있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 반대를 하여야 하겠다고 생각되어 행동으로 나섰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다니며 반대를 주장하였다.
그렇게 다니다가 1938년 10얼, 밀양 마산 교회에서 일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손이 이곳에서 뻗쳤다. 수차 경방대원(警防隊員)들과 형사들에 의해 경찰서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39년 12월 어느 날은 밀양 경찰서에서 2주일 동안의 지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난 속에 있는 한 목사를 이인재 전도사가 찾아온 것이다. 반가웠다. 이 난국에 참 동지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밤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하며, 두 주의 충성된 좋들은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같은 신앙의 동지들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거창까지 온 것이다.
두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주 목사는 감격하였다.
“잘 오셨습니다. 소식이 궁금하였는데 이렇게 소식을 듣고나니 생가기 납니다.”
주 목사의 파리한 얼굴에 미소가 지나갔다.
“반대운동을 하여야지요. 우리가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칠것입니다.”
주 목사는 한 목사와 이 전도사의 손을 굳게 잡았다. 한 목사는 이 전도사와 세운 실행종목을 말하였다.
“우리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적극적인 방법을 이렇게 세워보았습니다.”
① 신사참배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말 것.
② 신사참배한 목사에게서 성례 받지 말 것.
③ 신사참배한 교회에 십일조와 연보를 하지 말 것.
④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끼리 모여 예배하되 특별히 가정예배를 위주할 것.
이상입니다. 주 목사님은 이 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목사에게 한 마디 더 제의를 하였다.
“이 반대 운동은 결코 비밀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공연히 보란듯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밀리 반대운동을 해 놓으면 경찰에서 탄압할 때 물러설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을 것을 각오하고 정정당당하게 공개적으로 반대 운동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제는 쉽사리 신사참배 강요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이 땅을 물러서기 전에는 더욱 심한 횡포로 나타날 것이니 이 운동은 장기전이지요.”
주 목사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한 목사는 일어서면서 주 목사 손에 백원(百圓)을 쥐어 주었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사용하십시오.”
세 동지는 굳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1월 중순경, 주 목사는 함양 교회(咸陽敎會)를 방문하였다. 황보기(皇甫基) 장로를 만났다.
“신사참배는 계명에 위반되니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절대로 신사참배하면 안됩니다.“
주 목사의 말을 들은 황보기 장로는,
“감사합니다. 계명을 어기는 일을 해서 되겠습니까?”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하는듯 하였다.
황보기 장로는 전부터 주 목사를 존경하고 따르던 분이었다. 이번 주 목사의 방문은 그에게 힘을 주었다.
3월 27일. 주 목사는 진주 봉래정에 있는 황성호(黃聖浩)씨 댁에 갔다. 마침 한상동 목사와 이인재 전도사가 와 있었다.
함께 기도회를 가지며 더욱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후 계속 주 목사는 경남 여러 지방을 다니며 반대 운동을 열열히 하였다.
5월 하순경에는 김해 대저 교회에 가서 심문태씨를 만나고 그 밤에 대저 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주 목사는 개인을 만나 권면할 때나 집회를 통한 설교에서나 제목은 ‘하나님은 사랑이다’였다.
성경은 요한 1서 4장을 중심했다.
첫 대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독생자를 주셨다.
둘째 대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성령님을 주셨다.
셋째 대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계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계명을 어길 수가 없다.
밷후 3장에 말세적 신자는 성결한 행실을 가지고 경건한 신앙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에 예수님께서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셨는데, 말세에는 환란이 심하고, 기근이 극심하고, 교회에 박해가 오며, 거짓 그리스도가 출현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며, 악한 사상들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다.
지금 이 땅에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천년왕국에 들어갈 신자들은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절대 배격해야 한다. 결사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해야 한다.
이상이 주 목사가 다니며 외친 설교의 요지였다.
주 목사는 해운대, 함양, 안의, 각목, 개평, 가천, 무능, 위천, 산청군 단계, 합천삼가, 장대 각 교회를 순회하며, 성도들에게 설교하였다.
그리고 개인개인에게 권면하였다. 약 6개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드디어 1940년 7월 16일, 주 목사는 거창경찰서에 또 다시 구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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