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공2의 문서 운동 : 95 ~ 98년 (자료 등재 - 8.13.)
(부산공회2의 생성 역사)
최근 부공1과 부공2가 몰래 합의를 하고 총공회 전체 재산인 노곡동의 명의를 변경하고 기도원을 전부 없애 버린 사태가 발생하였다. 1992년부터 무한 투쟁을 했고 교계는 물론 세상 뉴스의 초점이 되고 전경이 출동하던 패싸움, 그리고 최근까지 서로를 절대로 믿지 못한다 한 2개 공회가 총공회 전체 재산을 이렇게 조처하게 된 상황을 두고, 감정에 앞서 일단 지난 날을 차분히 살펴 보면서 공회의 바른 길에서 이런 상황을 바로 알아야 바른 대처가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부공1과 2의 예전 기록을 다시 살펴 보게 되었다. 부공2는 익명으로 그리고 거의 엽서로 전국에 발송하여 교회 주변 불신자들이 보게 했다.
* 부공2가 부공1을 비판한 우편 엽서, 상대방은 삐라라 했다.


'대구측 교역자'란 '대구공회'를 말한다. 이 시기에 부산공회는 부공3을 제외한 전체가 대구공회와 총공회 재산 때문에 교단 차원에서 소송을 진행하던 시기이다.
* 부공2가 부공1을 북한의 기쁨조로 비판한 우편 엽서

부공2가 극언으로 비판한 7인 중에 4인이 부공2로 전향을 했다. 전향한 후 4인은 부공2의 최고 중요한 자리를 모두 가졌다.
그리고 이후 4인까지 포함한 부공2가 부공1을 상대로 평생 투쟁했다. 이 번 5월까지. 다른 2인은 부공4로 나갔다.
* 부공2의 추가 비판

노곡동 5월의 전국 집회 때 부공2 핵심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집회 곳곳에 삐라를 뿌리고 부공1은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각목을 들고 삐라 뿌리는 이들을 색출한다고 혈안이 되었다. '전단'이라는 말은 '삐라'이다. 부공2는 이렇게 출발했다. 지금 부공2의 최고 지도부들은 당시를 거론하면 '왜 덕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느냐'며 펄쩍 뛴다. 그 때의 자기들을 생각해 봤을까? 부공2를 분류하면, 그 때 활동했던 이들이 부공2의 공로자다. 나머지는 부공1에서 건너 온 이들이다. 그 때를 모르는 이들은 깨끗한 것이 아니라 당시 공회를 모르던 어린 신앙들이다.
* 부공2는 '서영호' 목사를 위해 출발했다.

부공2는 하나님 중심이며 이 노선을 위해 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초기 10년은 무조건 서영호 목사를 위해 좌익 운동권처럼 시작했다. 부산공회의 대세를 장악한 후에는 다행스럽게 보수 색채를 띄고 있다. 다행이다. 그런데 좌파 정권이 정권을 잡기 전에 했던 언행은 어떻게 할까? 세상은 정권만 쥐면 된다. 그 때부터 책임 있게 정권을 운영하면 된다. 교회는?
* 부공2의 투쟁은 오로지 '서영호'를 위해서였다. 그는 흠도 점도 없는 듯이 부공2가 추종했다. 지금은 그 때를 부인한다.

* 부공2는 8월 거창 집회에서도 삐라를 뿌리며 운동권 활동을 했고 부공1은 색출하느라고 집회는 전쟁터였다.
부공3은 당시 전체 총공회 재산에 대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나 교권투쟁이어서 일체 간여하지 않았다.

* 부공2의 투쟁은 집회와 교역자회에 집중 되었다. 지금은 그 때 '장돌뱅이'라고 하던 이들과 한 편이 되었다.

* 부공2는 서영호 목사를 집회 강단에 세우기 위해 부공1에 경고했고 부공1은 강단을 요새화했다. 집회 강단을 둔 전쟁이다.
1998년의 이 극단적인 투쟁 직후에 부공1의 대부분이 부공2로 전향한다. 극단적으로 비판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부공2의 어느 글이 생각난다. '예.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겁니다....'

어느 날, 과거 전부를 내 놓았을 때
하나님 앞과 천사를 거론할 것도 없이 자기 오늘과 자기 과거를 나란히 놓을 때, 후회하지 않을까? 미안하지 않을까?
부공3은 최소한 늘 이 면으로는 살았다. 그래서 비교만 하자 하면 타 공회들과 어떤 비판자들도 일단 숨어 버린다.
공회는 '옳고 바른 하나의 길을 찾기 위해 끝까지 비교하며 대화하자는 노선'이다. 상대가 나오지 않는다. 공회의 불행이다.
* 생존자는 최대한 익명 처리했다.

수 년에 걸쳐 이런 수준의 전쟁이 계속 되었고,
순수한 교권 싸움이었고 훗날 그렇게 드러난 분쟁이어서 부공3은 전혀 간여하지 않았으나 연구소 책임자 1인이 부친 이름 때문에 화가 났고 해결을 부탁했다. 그래서 우리 부공3의 방식으로 그 원수를 향해 '흠도 점도 없는 훌륭한 분'이라고 칭찬하는 글을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싸움은 바로 마무리 되었다. 칼빈의 말처럼 교회는 전투교회다. 그렇다고 성경이 금하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간디의 인도식 무저항주의도 아니다. 옳게 싸운다. 그 방법까지도. 그래서 저작권을 초기에 이길 수 있는데 이렇게 7년을 부공3은 당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소송금지원칙'에 따라 일부 방어할 기회가 생겼다. 이럴 때는 부공3은 성실하다. 부공3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 공지사항을 통해 가깝게 7년, 멀리는 30년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부공3은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목회자의 질병, 내부의 분쟁, 외부가 욕하는 표현을 부공3 스스로 광고를 해버린다. 사실이면 이 땅 위에서 해결하고, 잘못이 없으면 하늘의 상급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이 것을 공회라 한다. 그래서 백영희, 그 이름이 그립다. 또 연구 대상이다.
* 부공2는 주로 우편 엽서로 보냈다. 어떤 때는 우편봉투를 사용했다.
거의 부공1의 경제와 회의 방법과 집회 장소(대구 노곡동, 거창 도평) 재산을 비판한 글이다.
부공1은 이 삐라로 비판을 받을 때 부산공회 전체의 90% 회원을 가졌고, 부공2는 10% 정도였다. 부공1은 부공2를 마음대로 쳤다. 부공2는 발언 기회조차 주지 않자 이렇게 상대했다. 전국의 이름으로, 전국 우체국을 다니며 익명으로 발송했다. 당시 인터넷이 있었다면 바로 비교가 되면서 틀린 쪽은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마지막 삐라가 뿌려 진 다음 해에 부공1의 대부분이 전향하여 부공2가 다수가 되자 이 번에는 부공2가 또 다른 공회나 상대방을 향해서 부공1에게 당한 그대로 했다.
왜 부공2에 희망을 두지 않는가?
이 글에 잘못과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 주면 좋겠다. 공개 회개 하겠다.
당시 이 글을 적은 이들은 자기들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이들은 세월의 열매를 잊고 있었다. 그들의 이전과 이후의 다른 기회에 나온 문서를 통해, 그리고 여러 기회를 통해 그 활동가들은 모두 드러 났다.
(참고로)
부공1은 백 목사님의 딸 백순희 백명희 2인이 중심이 되고 이재순 목사를 앞세워 '백영희 그대로'를 주장하며 결집했다.
부공2는 백 목사님 중심의 공회 본질을 생전부터 비판한 서영호 목사를 백 목사님 사후에 지도자로 삼고 세를 키워왔다.
부공3은 공회의 노선과 교훈을 사명으로 출발한 연구소 직원들의 교회이며 교회 운영도 연구소 사명의 일환으로 삼았다.
부공4는 부공1 중에서 백순희 지도 체계를 반대하고 이재순 이후는 김삼암 목사라야 한다며 부공1에서 분리 되었다.
부공1은 부공3을 시작으로 부공2와 4를 차례로 제명했으나 각 공회는 서로 상대의 제명을 부정하며 정통성을 주장한다.
부공2는 초기에 5명 정도의 핵심 인원으로 출발했으나 부공1에 속한 목회자가 거의 부공2로 이동을 했다.
다음 문건은 부공2가 5명 정도의 소수 시절에 부공1로부터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당시 절규하며 투쟁한 생생한 기록이다.
부공1이 부공2를 본격적으로 몰아 친 것은 1992년 12월부터이며 이 기록은 주로 1995년부터 1998년까지다.
이후 부공1의 대부분 목회자와 교회들이 부공2로 넘어 간다. 2019년 7월에 양 공회는 다시 하나가 된다. 일단 과거를 살핀다.
최근 부공1과 부공2가 몰래 합의를 하고 총공회 전체 재산인 노곡동의 명의를 변경하고 기도원을 전부 없애 버린 사태가 발생하였다. 1992년부터 무한 투쟁을 했고 교계는 물론 세상 뉴스의 초점이 되고 전경이 출동하던 패싸움, 그리고 최근까지 서로를 절대로 믿지 못한다 한 2개 공회가 총공회 전체 재산을 이렇게 조처하게 된 상황을 두고, 감정에 앞서 일단 지난 날을 차분히 살펴 보면서 공회의 바른 길에서 이런 상황을 바로 알아야 바른 대처가 나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부공1과 2의 예전 기록을 다시 살펴 보게 되었다. 부공2는 익명으로 그리고 거의 엽서로 전국에 발송하여 교회 주변 불신자들이 보게 했다.
* 부공2가 부공1을 비판한 우편 엽서, 상대방은 삐라라 했다.


'대구측 교역자'란 '대구공회'를 말한다. 이 시기에 부산공회는 부공3을 제외한 전체가 대구공회와 총공회 재산 때문에 교단 차원에서 소송을 진행하던 시기이다.
* 부공2가 부공1을 북한의 기쁨조로 비판한 우편 엽서

부공2가 극언으로 비판한 7인 중에 4인이 부공2로 전향을 했다. 전향한 후 4인은 부공2의 최고 중요한 자리를 모두 가졌다.
그리고 이후 4인까지 포함한 부공2가 부공1을 상대로 평생 투쟁했다. 이 번 5월까지. 다른 2인은 부공4로 나갔다.
* 부공2의 추가 비판

노곡동 5월의 전국 집회 때 부공2 핵심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집회 곳곳에 삐라를 뿌리고 부공1은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각목을 들고 삐라 뿌리는 이들을 색출한다고 혈안이 되었다. '전단'이라는 말은 '삐라'이다. 부공2는 이렇게 출발했다. 지금 부공2의 최고 지도부들은 당시를 거론하면 '왜 덕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느냐'며 펄쩍 뛴다. 그 때의 자기들을 생각해 봤을까? 부공2를 분류하면, 그 때 활동했던 이들이 부공2의 공로자다. 나머지는 부공1에서 건너 온 이들이다. 그 때를 모르는 이들은 깨끗한 것이 아니라 당시 공회를 모르던 어린 신앙들이다.
* 부공2는 '서영호' 목사를 위해 출발했다.

부공2는 하나님 중심이며 이 노선을 위해 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초기 10년은 무조건 서영호 목사를 위해 좌익 운동권처럼 시작했다. 부산공회의 대세를 장악한 후에는 다행스럽게 보수 색채를 띄고 있다. 다행이다. 그런데 좌파 정권이 정권을 잡기 전에 했던 언행은 어떻게 할까? 세상은 정권만 쥐면 된다. 그 때부터 책임 있게 정권을 운영하면 된다. 교회는?
* 부공2의 투쟁은 오로지 '서영호'를 위해서였다. 그는 흠도 점도 없는 듯이 부공2가 추종했다. 지금은 그 때를 부인한다.

* 부공2는 8월 거창 집회에서도 삐라를 뿌리며 운동권 활동을 했고 부공1은 색출하느라고 집회는 전쟁터였다.
부공3은 당시 전체 총공회 재산에 대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나 교권투쟁이어서 일체 간여하지 않았다.

* 부공2의 투쟁은 집회와 교역자회에 집중 되었다. 지금은 그 때 '장돌뱅이'라고 하던 이들과 한 편이 되었다.

* 부공2는 서영호 목사를 집회 강단에 세우기 위해 부공1에 경고했고 부공1은 강단을 요새화했다. 집회 강단을 둔 전쟁이다.
1998년의 이 극단적인 투쟁 직후에 부공1의 대부분이 부공2로 전향한다. 극단적으로 비판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부공2의 어느 글이 생각난다. '예.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겁니다....'


어느 날, 과거 전부를 내 놓았을 때
하나님 앞과 천사를 거론할 것도 없이 자기 오늘과 자기 과거를 나란히 놓을 때, 후회하지 않을까? 미안하지 않을까?
부공3은 최소한 늘 이 면으로는 살았다. 그래서 비교만 하자 하면 타 공회들과 어떤 비판자들도 일단 숨어 버린다.
공회는 '옳고 바른 하나의 길을 찾기 위해 끝까지 비교하며 대화하자는 노선'이다. 상대가 나오지 않는다. 공회의 불행이다.
* 생존자는 최대한 익명 처리했다.

수 년에 걸쳐 이런 수준의 전쟁이 계속 되었고,
순수한 교권 싸움이었고 훗날 그렇게 드러난 분쟁이어서 부공3은 전혀 간여하지 않았으나 연구소 책임자 1인이 부친 이름 때문에 화가 났고 해결을 부탁했다. 그래서 우리 부공3의 방식으로 그 원수를 향해 '흠도 점도 없는 훌륭한 분'이라고 칭찬하는 글을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싸움은 바로 마무리 되었다. 칼빈의 말처럼 교회는 전투교회다. 그렇다고 성경이 금하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간디의 인도식 무저항주의도 아니다. 옳게 싸운다. 그 방법까지도. 그래서 저작권을 초기에 이길 수 있는데 이렇게 7년을 부공3은 당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소송금지원칙'에 따라 일부 방어할 기회가 생겼다. 이럴 때는 부공3은 성실하다. 부공3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 공지사항을 통해 가깝게 7년, 멀리는 30년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부공3은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목회자의 질병, 내부의 분쟁, 외부가 욕하는 표현을 부공3 스스로 광고를 해버린다. 사실이면 이 땅 위에서 해결하고, 잘못이 없으면 하늘의 상급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이 것을 공회라 한다. 그래서 백영희, 그 이름이 그립다. 또 연구 대상이다.
* 부공2는 주로 우편 엽서로 보냈다. 어떤 때는 우편봉투를 사용했다.
거의 부공1의 경제와 회의 방법과 집회 장소(대구 노곡동, 거창 도평) 재산을 비판한 글이다.
부공1은 이 삐라로 비판을 받을 때 부산공회 전체의 90% 회원을 가졌고, 부공2는 10% 정도였다. 부공1은 부공2를 마음대로 쳤다. 부공2는 발언 기회조차 주지 않자 이렇게 상대했다. 전국의 이름으로, 전국 우체국을 다니며 익명으로 발송했다. 당시 인터넷이 있었다면 바로 비교가 되면서 틀린 쪽은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마지막 삐라가 뿌려 진 다음 해에 부공1의 대부분이 전향하여 부공2가 다수가 되자 이 번에는 부공2가 또 다른 공회나 상대방을 향해서 부공1에게 당한 그대로 했다.
왜 부공2에 희망을 두지 않는가?
이 글에 잘못과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 주면 좋겠다. 공개 회개 하겠다.
당시 이 글을 적은 이들은 자기들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이들은 세월의 열매를 잊고 있었다. 그들의 이전과 이후의 다른 기회에 나온 문서를 통해, 그리고 여러 기회를 통해 그 활동가들은 모두 드러 났다.
(참고로)
부공1은 백 목사님의 딸 백순희 백명희 2인이 중심이 되고 이재순 목사를 앞세워 '백영희 그대로'를 주장하며 결집했다.
부공2는 백 목사님 중심의 공회 본질을 생전부터 비판한 서영호 목사를 백 목사님 사후에 지도자로 삼고 세를 키워왔다.
부공3은 공회의 노선과 교훈을 사명으로 출발한 연구소 직원들의 교회이며 교회 운영도 연구소 사명의 일환으로 삼았다.
부공4는 부공1 중에서 백순희 지도 체계를 반대하고 이재순 이후는 김삼암 목사라야 한다며 부공1에서 분리 되었다.
부공1은 부공3을 시작으로 부공2와 4를 차례로 제명했으나 각 공회는 서로 상대의 제명을 부정하며 정통성을 주장한다.
부공2는 초기에 5명 정도의 핵심 인원으로 출발했으나 부공1에 속한 목회자가 거의 부공2로 이동을 했다.
다음 문건은 부공2가 5명 정도의 소수 시절에 부공1로부터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당시 절규하며 투쟁한 생생한 기록이다.
부공1이 부공2를 본격적으로 몰아 친 것은 1992년 12월부터이며 이 기록은 주로 1995년부터 1998년까지다.
이후 부공1의 대부분 목회자와 교회들이 부공2로 넘어 간다. 2019년 7월에 양 공회는 다시 하나가 된다. 일단 과거를 살핀다.
2 전체
부공2의 내면과 출발의 정체성이 다 나오는군요.
이 자료에 이어 당시 "부공1"과 "부공2"가 교리, 노선, 행정, 실무를 두고 토론한 글들도 함께 공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직동교회 김정수 교수가 당시 부공1의 송종섭 목사 입장을 대변하고 부공2의 서영호 목사 입장을 서헌제 교수가 대변했는데 두 사람은 국내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며너 공회의 역사와 내면을 남 다르게 파악했던 "대표적 교인"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은 주로 처신에 따라 이해관계가 있어 좀 종족주의적 입장이 강할 수 있으나 이 두 분은 재야에 유명한 민주화 좌익의 지성들이었으므로 최소한 객관성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료에 이어 당시 "부공1"과 "부공2"가 교리, 노선, 행정, 실무를 두고 토론한 글들도 함께 공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직동교회 김정수 교수가 당시 부공1의 송종섭 목사 입장을 대변하고 부공2의 서영호 목사 입장을 서헌제 교수가 대변했는데 두 사람은 국내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며너 공회의 역사와 내면을 남 다르게 파악했던 "대표적 교인"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은 주로 처신에 따라 이해관계가 있어 좀 종족주의적 입장이 강할 수 있으나 이 두 분은 재야에 유명한 민주화 좌익의 지성들이었으므로 최소한 객관성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부공2는 불과 6개 정도의 교회로 버티면서 부공1에게 당하는 것이 억울하게 되자 청량리교회 본당의 커텐 전부를 가로로 잘라 버리고 장의자에 칼로 욕을 새긴 집단. 그리고 부공2 지도부는 누가 했는지 모르겠다 했고 뒤로 돌아 서서는 역할분담했고. 지금은 대기업이 되어 넉넉하게 대처하니 누가 봐도 점잔하게 보이지만 여러분들의 과거는 여러분들이 공개사죄하기 전에는 늘 여러분을 따라 다닙니다. 그 단체 그 때 인물들이 목회하는 그 강단의 설교 속에서도 여러분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한번 인정하고 회개하면 그만이고, 이제 시효가 지나서 세상법으로는 처벌도 받지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