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영남, 충주교회 - 충주양문교회
1953년생, 서울 용산 출신으로 알려 져 있다. 타 교단에서 일반 신학을 마쳤고 공회를 접하고 확신한 다음에 가입을 했다.
1980.1.7. 공회가 교역자회를 통해 공회 조사로 임명하고 경북 청도읍교회를 맡겼다.
1980.4.7. 공회는 매월 당시 67,000원의 생활비를 제공했다. 기성 교회지만 시골이라는 점 등을 배려했다.
1983.6.22. 조사님은 충주시 용산동에 충주 용산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을 했다. 교회는 83.6.28.로 적고 파송한 공회는 83.6.22일로 적었다.?
1984.3.6에 총공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조사와 목사 안수 때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공회 소속으로 순종의 의무는 필연이다.
이 때 8명이 함께 안수를 받았는데 3명은 서부교회 내 인원이고 5명은 중부권 충청 또는 경북 북쪽 출신이었다. 좀 특이했다.
1989.5.25. 양문교회로 이름을 바꿨고 89.9.7. 고신 교단에 가입하면서 89.11.16.에는 이전 신축한 예배당에 입당한다.
1988년 방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모여 결의하면 옳은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공회의 전원일치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훗날까지 살펴 보면 목회 성공에 대한 열심과 집념이 강한 분으로서 공회의 교단 이름, 찬송가, 보수적인 여러 분위기가 불편했을 듯하다. 그러나 소신이 있는 분이었다. 탈퇴를 했고 여러 경로를 거쳐 고신에 안착했다. 공회의 각종 불편과 제약을 다 벗어 버리고 마음껏 활동을 하게 되자 급성장을 했고 공회와 고신이 공통적으로 교세가 약한 충청권, 그 충청권 깊은 충주에서 대성공을 했다. 부산이나 서울이라면 눈에 띄지 않지만 고신의 충청권은 애타는 지역이다. 그래서 그렇게 각광을 받고 고신의 중부 지역 지도자로 평생 활약했다.
양문 전국 목회자 영성세미나를 12회째 계속하고 있다. 코로나 2년을 쉰 상태에서도 전국 단위 세미나를 개최한다는 것은 성공 사례가 훌륭하기 때문이다. 양성원 시절에 송용조 목사님께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송 목사님이 탈퇴하자 바로 동반 탈퇴에 나섰다. 그러나 목회만을 두고는 김철수 목사님과 많은 면에서 같은 흐름을 보인다. 열정도 넘치고 또 깨끗한 심성도 돋보인다. 1988년 송용조 목사님이 공회를 탈퇴하고 양의문교회로 이름을 바꿀 때 방 목사님은 충주양문교회로 이름을 바꾼다. 공회 탈퇴 후 예배당 신축도 했고 고신에 가입도 했으며 고신의 중부권에 대표적 교회로 성장했다. 2004년에는 마산 산창교회의 김철수 목사님의 김성도 아들을 부교역자로 받아 부목으로 활동하다 2023년에는 담임 목사님으로 인계하고 원로 목사님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