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총회 70년사> 책에서 백영희 목사님이 언급된 내용

자료      
쓰기 자료 처음목록
분류별
자료보기
공회 교계 교리 메모 목회 사진 생애
서부 설교 성구 성경 행정 기타

<고신총회 70년사> 책에서 백영희 목사님이 언급된 내용

2022년에 고신교회 출발 70주년 기념으로 총회출판국에서(발행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70년사" 책이 출판 되었습니다. 지은이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 70년사 편찬위원회" 입니다. 고신교단의 70년 역사에 대한 가장 정통적이며 대표적인 책입니다. 이 책에서 백영희 목사님이 언급된 부분입니다.


발췌: 제3부 고신교단의 형성과 발전 - 14장 6.25 전쟁기 고신교회의 순교자들(이상규 저)? p338


북상, 가천교회 박기천 전도사


경남 거창 북상면 갈계리 1154번지에 위치한 북상교회는 1934년 곽남순, 김동준에 의해 개척된 교회인데, 이 교회 박기천 전도사는 6.25 전쟁기 순교자의 길을 갔다. 박기천 전도사는 1920년 4월 2일 경북 금릉군 대덕면 내감리 910번지에서 박정하 이순분의 5남1녀중 막내로 출생했다. 6살 때인 1926년 4월 4일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통해 건실하게 성장하였다. 1933년 3월부터 경북 금릉군 내감리에 소재한 감주교회에 출석하였고, 1936년 3월10일 순회 당회장이었던 김충환 목사에게 학습을 받았다. 1937년 3월 13일에는 미국북장로교 부해리(Rev.Herry N. Bruen)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박기천은 감주마을의 간이학당에서 수학하고 대덕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년 후 졸업하였다. 1941년 4월에는 김해군 대저리에 소재한 복음농업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1942년 3월 10일 졸업하였다. 그 후 이춘화 장로의 소개로 충청북도 영동의 집회에서 충북 영동군 양산면 하곡리의 이창주, 박문옥씨의 4남매 중 외동딸 이진표 양을 만나 1944년 2월5일 혼인하였다. 그 후 만주에 건너가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1945년 11월에는 경남 거창으로 이주하여 위천면 임시서기로 취직하여 일하면서 위천교회에 출석하며 교사로 또는 제직회 서기로 섬겼다. 1947년 1월 부터는 거창읍 사무소 서기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공직에서 일하면서 뇌물을 받거나 술좌석에 동석해야 하는 문제 등 신앙적 갈등을 경험했다. 이 무렵 그는 백영희 전도사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면서기 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주남선 목사의 추천으로 1948년 1월에는 거창군 북상면의 북상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당회장은 주남선 목사였고, 서환성 전도사의 후임이었다. 해방 후 좌우익으로 나누어 대치하던 때에 북상에서 멀지 않은 월성에 빨치산의 아지트가 있었다. 북상지역은 좌익세가 우세하여 저녁에는 빨치산들이 내려와 우익청년들이나 교역자를 잡아가기도 했다. 박 전도사기 기도하러 입산 한 사이에 빨치산들이 교회로 와 교회를 지키고 있던 박 전도사 부인에게 총을 겨누며 전도사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라고 위협하는 등의 잦은 위협으로 젊은 부인은 심장병에 걸렸고, 몸은 쇠약해져 갔다.


북상교회에서 일 년간 사역하고 1949년 2월 10일에는 가천교회로 이동 하였다. 가천교회는 1985년 합천 댐 건설로 인해 수몰지역이 되어 현재는 거창읍에 소재한 동부교회와 합쳐 동부가천교회가 되었다. 박 전도사가 가천교회에 부임할 당시 교인은 20여명에 불과했으나 박기천 전도사는 이 교회를 위해 크게 헌신하여 교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부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6.25 동란이 발발하였고 지리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은 거창지역에 출몰하여 기독교인들을 학살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런 여러 위협 가운데서 박 전도사의 부임은 1950년 7월 16일 오전 7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7월 말 주일에는 박기천 전도사도 인민군에 의해 잡혀 인민군 내무서로 사용되던 거창의 명덕학교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40여 일간 구금되어 있던 중, 음력 추석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 인천상륙작전으로 불리한 전황이 전개되자 인민군들은 양민들 학살했다.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도 했고, 특히 주일성수를 방해하여 주일에 의도적으로 일을 시키기도 했다. 이를 거부하며 믿음을 지켰던 박기천 전도사도 인민군에게 끌려가 총을 맞고 죽임을 당했다. 박기천 전도사는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 나무 아래서 기도하던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날이 1950년 9월 26일이었다.


인민군들은 떠났으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는데 후에 나무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나무 밑에서 기도하다가 넘어저 사망한 모습이었다. 이때가 1951년 1월 이었다. 박기천 전도사는 39세의 나이로 순교의 길을 간 것이다. 장례식은 거창시찰장으로 주남선 목사의 주례로 치러졌다. 박기천 전도사의 아들이 부산 성도교회 원로 목사인 박내영 목사이다.


2 전체
사무실 2024.11.30 00:00  
박내영 목사님은 "박래영"으로도 표기 됩니다.
신학 2024.11.30 00:00  
"박래영"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박래영목사님 본인이 집필한 책에는 박래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신총회 70년사 책의 본문에는 박내영으로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