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 소개하신 자료는 총공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알던 내용을 크게 보충하는 사료입니다.
1.남영환목사님에 대한 몇 가지 소개를 덧붙인다면,
1)주남선목사님의 주 활동임지였던 거창읍교회를 주목사님에 의해 후임했던 분입니다.
2)거창읍교회의 지지가 확고하지 못해 결국 거창읍교회에서 종신하지는 못했습니다.
3)그러나, 노년에 고신의 최고 원로급 목회자로서 위치는 분명합니다.
2.남목사님의 백목사님 언급은 총공회 외부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1)백목사님이 교계에 알려지기 이전 시기에 대하여 가장 근접한 비판적 외부인입니다.
2)출옥성도 조수옥, 이인재, 박인순과 주경순 등 고신 내부적 많은 신앙 중심인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시각을 대칭하여 반대적 입장을 제시할 시각의 중심입니다
3)소개된 책자는 고신역사의 남목사님 시각입니다. 시각을 총공회로까지 가져 오지 않고 객관적으로만 돌려놓아도 백목사님 신앙사가 일반 수준의 전기 이상일 수 밖에 없겠다는 많은 면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여 소개하신 책은 백목사님 전기에 외부적 자료로 의미있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3.동일교회로 백목사님이 이동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1)서부교회 주일학교 운영"이라는 책자에서 간단하게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책자의 성격 때문에 그 과정은 아주 간단히 언급했으나, 거창 위천교회에서 부산 서부교회로 이동하게 된 과정은 아주 많은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자체가 백영희신앙노선의 특별함이었고, 일반 신앙노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었습니다.
1952년 7월 27일, 부산 서부교회 김용학집사님이 위천에 청빙 대표로 가셨고, 밤이 되면 당시 위천지역은 주간은 아군이 야간은 인민군이 교대 접수하며 상호 적대 민간인을 제거하는 상태로서 전면전 때보다 민간인의 사살 위협은 더욱 심해졌고, 이 상태에서 예배당 불을 켜놓고 연일 집회를 하며 야간 인민군 점령 치하를 호령하던 백조사님은 이미 이런 상황을 근 2년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전시 부산에만 있었던 김집사님은 야간의 인민공화국 세상을 처음 접했고, 그 풀무불 속을 2년이나 호령하는 조사님을 그곳에서 직접 확인하고서야, 왜 고신 최고 지도부 7 목사님이 백조사님 아니고는 서부교회 문제는 해결할 사람이 고신 안에는 없고, 자신들이 아무리 권해도 요동없는 백조사님을 청빙할 수 있는 것은 서부교회 양떼 중에서 양들의 형편을 직접 전하는 것으로 혹 될는지 모르겠다는 권면을 한명동목사님이 강조했는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거창지방에는 남영환목사님이 당회장으로 총책임을 지고 있었고 그분은 고신 지도부가 부산 고신의 본부로 백조사님을 이동시키려는 노력을 적극 반대 했었습니다.
남목사님의 단순 착오일 것입니다. 만에 하나의 착오도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4.총회측과 소송문제를 둔 고신에게 백목사님의 비판은 고신 뿌리째 흔들 수 있었습니다.
고신은 그 숫자가 적고 또 법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상 인물들이 현저하게 총회측에 밀리고 있었습니다. 내부가 일치 단결해도 어려운 때에, 신학교 교수로서 박윤선목사님의 학자적 권위는 고신에서 지대했고, 박목사님이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밝혔었습니다. 그러나 학자 박목사님과 정치가 송목사님의 대립에서 결국 고신은 박윤선목사님을 잃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알려진 해방후 장로교 내부 20여년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 고신의 바닥 정서와 고신의 근간이 되는 지방 교회들은 백조사님에 의하여 소송이 죄라는 인식이 대단히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전도사였던 그에게 영향을 받는 인물들이 고신 내부에서는 지도부에서부터 시골교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에 고신은 대단히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으로는 간판 학자를 잃게 되고, 목회와 성경으로는 고신이 배출한 최고의 인물인 백조사님을 잃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돈, 자존심, 교권 등이 얽혀 백조사님도 1959년 고신에서 최종 제거됩니다.
고신의 교권 중심부에서는 박목사님의 입장이 더 다급했습니다. 그러나 백영희조사님이 고신의 밑바닥 정서, 각 지교회의 현장에 미치는 영향, 들어나지 않는 대단한 영향력 등을 가장 심각하게 직시했던 분이 남영환목사님이었습니다. 이인재목사님은 출옥성도로 백조사님께는 한참 선배이며, 그는 동시에 한상동, 주남선목사님과 함께 고신을 주도했던 분인데 백조사님에 대하여는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이나 박윤선목사님은 백조사님의 정공 전면 비판에 대하여 신중론으로 처음에는 달래고 있었으나 결국 백조사님에 이어 소송을 반대하고 나서게 됩니다.
남목사님은 일관되게 백조사님에 대한 경계를 고신 지도부에 가장 많이 촉구했었으나 주남선목사님이 고신 지도부 목사님들에게 너무도 강하게 백조사님을 추천했었고 따라서 초기에는 그의 주장이 고신 지도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후기에는 그의 주장이 지도부를 설득했고 결국 백조사님은 고신에서 제거됩니다.
박윤선목사님보다 휠씬 앞선 시기였습니다. 한편 서울에서는 고신의 경기노회가 전면적으로 소송반대 운동을 결집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 있었던 분들 역시 백목사님에게는 대단히 가까운 관계들이었기 때문에 교권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백조사님은 고신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확실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혼자 외쳤고 그것으로 전부였고, 그다음 제거되자 독자의 길을 걸었을 뿐입니다.
박목사님이 고신에서 나온 뒤, 서울에서 진리 수호의 신학교를 재건하자며 백목사님에게 제의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학자의 이론 중심 신앙노선이 교계의 난무하는 정치 목사들에게 결국 영향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여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박윤선목사님의 섭섭함은 많았고, 얼마지 않아 백목사님을 이단으로 처음 지목하는 책자에 배경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30여년이 지나면서 두 분이 하나님 앞에 서기 직전, 박목사님은 백목사님을 사석에서 따로 만났고 어떤 언급을 했는지는 백목사님 전기 출간 때 자세히 할 것이나, 30여년 세월이 지나고서야 박목사님은 백목사님에 대한 신앙노선을 평가하게 되었다는 결론만 일단 적겠습니다.
5.일유께서 소개한 부분은 백목사님의 전기작업에 대단히 중요한 외부 자료입니다.
고신 내 백목사님에 대하여 가장 비판적이었고 또 백목사님의 활동을 가장 잘 알고 있던 남목사님이 자신의 시각에서 고신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위에서 잠깐 소개드린 백목사님의 1950년대 신앙노선을 연구하는 본인에게는 반대쪽에서 보았던 시각을 참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