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구원에 있어 믿음과 행함의 관계 (약2:/ 박형룡)
제4절 칭의의 때와 관계
3.신앙으로 칭의
칭의는 죄인이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수납하는 때에 이루어진다. 죄인의 신앙이 있기 전에 그의 칭의가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문맥에서 신앙과 칭의의 관계를 논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1)성경에 의한 신앙과 칭의의 관계
성경은 신앙과 칭의의 심히 밀접한 관계에 치중하여 신앙으로만 칭의됨을 말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면 신앙과 칭의의 관계는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인가? 칭의에서 신앙이 행하는 작용은 정확히 무엇인가?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dia: 여격), 믿음으로 (ek: 여격) 칭의된다고 한다 (롬3:25,28,30, 5:1, 갈2:16, 빌3:9). 원어의 전치사 "디아(dia)"는 신앙은 우리가 그것으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이용하는 기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에크(ek)"는 신앙이 논리적으로 우리의 자신적 칭의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후자는 전자에서 창시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여격어는 기구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성경은 한 번이라도 우리가 "신앙 때문에" 칭의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신앙은 도무지 우리의 칭의의 근거로 제시되지 않는다. 만일 신앙이 칭의의 근거라면 그것은 행으로, 즉 공로적인 무엇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그렇게 보는 것은 사도 바울이 철저히 반대한 행함으로 칭의된다는 관념을 소개함이 될 것이다(롬3:21, 27, 4:3,4, 갈3:16,21, 3:11).
성경이 특별히 사도 바울이 "신앙 때문에" 칭의된다는 표현을 쓰지 않은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이런 칭의관을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 것을 경고함에 충분하다. 그러나 신앙자체는 의가 아니라는 것, 또는 칭의의 의는 우리 안에서 이룩한 혹은 우리에 의해 성취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다른 많은 고찰들이 있다. 그 고찰들은 아랫글에 있을 "칭의의 근거"의 논의에 포함될 것이다.
註. 다만 한가지 이 문맥에서 긴급히 해명하여야 될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이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고 하는 성경 말씀의 의미이다(롬4:3, 9, 21, 갈3:6). 이 말씀을 성경 다른 부분들과 관련없이 고립시켜 고찰하면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신앙 때문에 칭의되었다는 의미의 표현으로 보여질 것이다. 과연 로마 교회 석의가들과 알미니안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신앙의 행동을 완전한 순종의 대용으로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전 변론의 추세에 배치하는 해석이다. 신앙으로만 칭의된다고 하는 사도적 논증 전체의 견지에서 보면 이것은 아브라함의 신앙 자체가 한 행함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대신하였다는 의미의 표현이 되지 못할 것은 확실하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아마 아브라함이 그리스도를 포함한 약속들을 믿기를 (창12:3, 15:5)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것같이 하였으니 그 신앙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의를 충용하게 하는 기구임으로 그리스도의 의 자체와 동일시 되었다 함일 것이다. 뻘콮은 말하되 "사도는 엄밀히 말하여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의 칭의의 근거라는 것을 의심스럽게 버려두지 아니한다. 그러나 신앙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충용함에서 철저히 수용적이어서 그것이 수용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위해 전의적으로 제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에 신앙은 신앙의 내용물 즉 그리스도의 공로 혹 의와 동치의 것일 것이다.
2)바울과 야고보의 외관적 상충
위에서 진술한 논쟁과 연락하여 야고보의 교훈이 바울의 교훈과 충돌하여 행함으로 칭의된다는 교리를 지원한다고 자주 주장된다(약2:14-26). 두 사이에 조화를 꾀하는 다양시도가 있어 왔다.
①죄인의 칭의
어떤 사람들은 추상하되 바울과 야고보가 다 죄인의 칭의를 말하나 야고보는 그 자체를 선행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요, 따라서 칭의하는신앙이 아니라는사실을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당한 견해임에 틀림이 없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은 혈족들이다.)
註. 야고보는 바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교리를 잘 못 쓰는 자들을 비난 함이다. 두 분의 교훈이 다 같이 영감 되었으니 우리는 그 말들을 강해함 없ㅎ이 받을 것이다. 두 분사이의 서로 충돌은 외관적이요, 실재적이 아니다. 바울의 제시와 야고보의 그것 사이에 상이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더불어 논전하는 적수들의 성질로 말미암은 것이다. 바울은 칭의를 적어도 부분적으로 율법의 행위에 기초시키려고 노력하는 율법주의자들과 논쟁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편에 야고보는 유신앙론자들과 대진하였는 바 그들은 신앙을 소유하였노라고 자처하나그들의 신앙은 진리에 대한 지능적 찬동뿐이었고(2:19), 그들은 선행의 필요를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그런고로 그는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요, 따라서 칭의하는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칭의하는 신앙은 선행을 결실하는 신앙이다. 바울도 특별히 그의 후년 서신들에서 신앙의 교리를 잘못 쓰는 자가 많은 때에 신앙의 증거로서 행위의 필요를 강하게 역설하였다(딛2:14, 3:8). 바울의 초기 서신들에서도 성령의 열매들(갈5:22),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 믿음의 역사 (살전1:3) 같은 교훈들은 야고보의 주장에 동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②의인의 칭의
위에서 진술한 해석은 난관 전부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반대를 받을 수 있다.왜냐하면 야고보는 24절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칭의되고 신앙으로만 칭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고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21) 아브라함의 사건을 들어 예증한 때문이다. 그는 22절에서 말하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저자는 죄인의 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아브라함의 또 한증의 칭의를 말하는 것임은 죄인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기 오래 전에 칭의되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하였다(창15:6). 진정한 신앙은 선행에서 그 자체를 나타낼 것이니 선행은 사람들 앞에 이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의 의 (생명의 의)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다. 의인의 행함에 의한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를 굳게 한다.
註. 만일 야고보가 이 몇 절에서 아브라함과 라합이 그들의 선행을 기초로 하여 죄인의 칭의를 받아다고 말하였다면 그는 바울과 충돌할 뿐 아니라 또한 자가 모순에 빠짐일 것은 그가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칭의되었다(약2:23)고 솔직히 말하는 때문이다.
③죄인 칭의의 속론
야고보서 2:24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한 말씀이 의인의 칭의를 가르친다고 하는 위에서 진술한 변론은 그럴 듯한 논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말씀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17)는 변론의 계속으로, 역시 죄인의 칭의에 관한 교훈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자연스럽다. 23절이 죄인의 칭의를 말하였는데 24절이 다른 종류의 칭의를 말하는 것일 수 없음은 첫 멀리에 "이로 보건데"라는 어구가 있어 이 절을 앞절의 결론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라는 표현은 신앙에 따르는 "행함으로" 칭의됨을 의미할 것이요,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는 말씀은 행함이 따르지 않는 관념적 신앙만으로는 칭의되지 못함을 지시할 것이다.
註. 야고보가 바울에 배치한다는 변론은 가장 인상적인 지원을 야고보의 아브라함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인출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사람은 행함없이 신앙으로만 칭의된다고 말하였다. 야고보는 그의 예를 사용하여 신앙만은 불충족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어떻게 바울은 아브라함에게서 행함없는 신앙의 특이한 의의를 보았고(롬4:),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하여 사람이 행함으로 칭의되고 믿음으로만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 가능한가(약2:24)? 아브라함은 해석의 회오리 바람에 잡혀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는 듯하다.
야고보의 의도에 관해서는 의견의 상이가 별로 없다. 로마와 프로테스탄트가 다 같이 야고보는 행함이없는 신아응ㄴ 열매 없고 죽은 신앙이라고 말함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특히 로마교회는 야고보의 말은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권위적 해명이라고 말할 것이다.
바울은 창세기 15:6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하였다(롬4:3).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에서 출발하여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드리기로 의욕한 일에 관하여 설명하여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하였다(약2:21). 그리고 야고보는 이 "행함", 신앙의 행동은 창세기 15:6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라는 놀랄 만한 진술을 지었다(약2:23). 창세기 15장이 창세기 22장에서 된 바에서 성취되었다 함이니 둘은 합하여 신앙이 행동에서 완성됨을 밝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야고보는 먼저 언명하였다(약2:22).
창세기 15:6의진술이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순종의 구체적 실재에서 성취되고 완전해지고 화신된 것을 보여진다.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명령에 그의 신앙의 시금석이 놓여 있었고, 그의 순종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은 생의 실재에서 참된 것으로 계시되었다. "만일 그 시취가 왔을 때에 그 신앙이 행위에 의해 배합되지 아니했으면 그것은 완성되지 못한 신앙으로 증명되었을 것이다. 행위는 신앙이 항상 바른 종류의 것이었음을 보여 주어 그것을 완성하였다" (J. H. Ropes, The Epistle of St. James i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1916, p.220). 이것이 야고보가 그의 신앙과 행위의 관계에 관한 전 강론에서 말하기를 원한 바이다. 만일 그가 이렇게 이해한다면 그와 바울 사이에 어떤 갈라진 틈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④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대항한 것
야고보서가 다른 누구를 겨누었든지 간에 바울에 대항한 것은 아니다. 대개 바울이 만일 신앙과 신앙의 의를 행위에 대항하여 배치하였다면 (롬3:28) 그것은 율법의 행위에 대항한 것이요, 신앙에서의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행위에 대항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여기에 추가하기를 참된 신앙과 선행 사이에 분열이 있지 않다고 하였다. 야고보의 논평이 바울을 대항하여 때린다는 가능한 사상은 절대적으로 없다. 키텔은 말하되 바울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인정하기를 "야고보가 대항하여 변론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확실히 바울의 신학이 아니라, 아마 그것과 유사하면서 절대적으로 다른 무엇이라"고 할 것이다 (Kittel, Theologische Woerterbuch Zum N.T., IV, p.95).
註. 야고보와 바울의 상호 충돌을 말하는 전 논쟁은 율법의 행위와 신앙의 행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에서 일어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구별을 신실히 지으면 우리는 또한 야고보가 그의 아브라함 연구에 추가한 마지막 줄 (final line)을 이해하기 유능할 것이니 즉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한 것이다. 마지막 어구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사람을 루터의 오해한 바울주의로부터 돌려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피상적인 성경 읽기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야고보의 전 서신의 문맥에 연합하여 이해한다면 이것은 바울과 다른 모든 사도들이 전도한 복음의 참된 강조에 따라 열매 없고 죽은 신앙에 대항한 것임이 분명하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비난하여 "짚의 서신이요, 복음적 성격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은 이 서신이 신앙으로 칭의되고 행함으로 되지 않는다고 바울이 가르친 칭의의 교리에 반대한다는 그의 오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바울과 야고보의 증언에 조화가 있음을 본다고 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주기를 원하였고, 야고보는 칭의의 열매들에 의한 칭의의 증명에 관심을 두었다 (Calvin, Commentary on James 2:21 ff.). 루터가 반동에 인도되어 야고보서가 복음의 사신과 깊이 조화되었음을, 그리고 유신앙론과 생의 실재를 가지지 못한 신앙의 교리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임을 보지 못한 것은 가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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