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구원의 두 가지 면, 마음과 다른 영을 알아야 해결됩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약2:24)
정통교리의 종합서로서 박형룡 "조직신학" 저서 내용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비록 독창성의 결여라는 지적을 받으며 그 학적인 성취도의 논란은 있지만
일단 현재까지의 정통 교리의 종합서라는 의미에서는 대단히 광범위하게
대단히 많은 양의 정리가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1. 박형룡 구원론에서 요약되는 기존 입장
1.믿음만으로 얻는 구원. 의롭다 함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신앙으로만 칭의됨을 말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dia: 여격), 믿음으로 (ek: 여격) 칭의된다고 한다 (롬3:25,28,30, 5:1, 갈2:16, 빌3:9). 원어의 전치사 "디아(dia)"는 신앙은 우리가 그것으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이용하는 기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에크(ek)"는 신앙이 논리적으로 우리의 자신적 칭의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후자는 전자에서 창시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여격어는 기구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성경은 한 번이라도 우리가 "신앙 때문에" 칭의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신앙은 도무지 우리의 칭의의 근거로 제시되지 않는다. 만일 신앙이 칭의의 근거라면 그것은 행으로, 즉 공로적인 무엇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그렇게 보는 것은 사도 바울이 철저히 반대한 행함으로 칭의된다는 관념을 소개함이 될 것이다(롬3:21, 27, 4:3,4, 갈3:16,21, 3:11).
2.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고 한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은
①의로운 행위를 만들지 못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율법주의자들에게 바울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하였다.
②바울은 믿음을 강조했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야고보는 믿는다 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한 것이다. 그런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요, 따라서 의롭게 되는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③의롭게 되는 믿음은 선한 행위를 만들게 된다.
따라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도, 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도 모순되는 것이 아니요 참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죄인인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은 것은 믿음으로 되었으며,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의가 행함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의인의 행함에 의한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를 굳게 한다.
2. 박형룡 구원론에서 찾아지는 과제들
1)"믿음으로만 아니니라" 하신 말씀은 연구 과제
①죄인의 칭의와 의인의 칭의
박형룡은 만일 야고보가 이 성구에서 아브라함과 라합이 그들의 선행을 기초로 하여 죄인의 칭의를 받았다고 말하였다면 그는 바울과 충돌할 뿐 아니라 또한 자가 모순에 빠짐일 것은 그가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칭의되었다(약2:23)고 솔직히 말하는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선행과 관련된 칭의와 달리 믿음으로만 가지게 된 칭의를 "죄인의 칭의"라고 언급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신앙에 의한 칭의를 굳게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칭의는 동일한 칭의지만 처음 믿을 때 가지게 되는 칭의와 함께 믿는 사람이 된 이후에도 "더 굳게 되는" 면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죄인이 칭의를 받는 것은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받는 칭의가 그 후에도 행함으로 점점 성도 속에서 강하게 되는 이후의 어떤 작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박형룡은 현재까지의 교리 수준에서는 칭의의 성격상 칭의를 두가지 면으로 나누는 자체를 생각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약2:24의 말씀이 죄인이 의롭게 되는 그 순간에 적용된 칭의와 별개로 그 후에 나타난다는 표현 또는 더 굳게 된다는 표현으로 최대한 간단히 그러나 언급치 않을 수 없는 고민을 하고 있음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주저없이 ①죄인이 칭의를 받는 것은 믿음 ②의인된 사람이 행함으로 더 굳게되는 칭의로 나누어 생각한다고 밝혔어야 했다.
②창15장 이전의 아브라함은 아직 죄인이었던가?
아브라함이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하신 창15:6에서 아브라함은 의롭게 되었다고 박형룡은 말하고 있다. 이삭을 드림은 죄인이 의인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창15:6에서 믿음으로 의인은 되었고 이삭을 드림에서는 이미 가진 믿음이 참 믿음이며 생명 있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또 필연적으로 이삭까지 바치는 순종의 행위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창세기 15장 이전의 아브라함, 즉 12장에서 14장까지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영이 죽었던 불신자 아브라함이라고 해야 한다. 12장의 축복도,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도, 9나라의 전쟁과 멜기세덱을 만난 모든 것이 다 불신자일 때 했던 일이라고 해야 한다.
2)"잃었던 영"을 찾아 영이 중생되는 기본구원 칭의와 성도가 자기 심신을 길러가는 건설구원으로 나누어 요약될 문제이다.
①현재까지의 교리 체계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계이다.
죽은 영이 살아나는 중생, 죄인이었던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이 전적 은혜의 칭의, 행함으로는 절대 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칭의가 있다. 죽었던 우리라면 죽은 존재로서는 어떤 형태의 행위도 할 수가 없는 것이 사망의 속성이다. 심지어 "믿는 행위"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이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믿음으로 중생되었다고 했는가? 믿음이란 그 마음의 작용까지도 하나님이 하게 하셔서 된 것이니 "마음으로 믿는 믿음"조차도 실은 행위이며 이것도 하나님이 전적 믿어지도록 해서 믿어지게 된 것이다. 전적 은혜 역사라는 말이다. 우리가 죽었다면, 그리고 칭의와 중생은 전적 은혜라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필연이다. 야고보서 2:24의 성구는 이 단계에서는 전혀 해당이 될 수 없는 문제라고 단정한다.
즉, 약2:24의 성구,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하신 말씀은 우리가 중생 때 가졌던 믿음이 산 믿음 참 믿음임을 표시하고 결과적으로 들어 난 것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일부만 설명했을 뿐이고 원만한 해석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 믿을 때 믿음이 참 믿음 산 믿음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의로운 행위를 할 수 있게 된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번 중생된 사람은 남은 평생의 문제는 앞으로 닥쳐올 모든 순간 모든 현실 모든 사건에서 말씀을 따라 행한 그 행함으로 이미 받았던 생명이 더 힘있게 역사하게 되고, 이미 받았던 칭의가 더 굳게 되는 것이며, 이미 받았던 중생이 그 범위를 넓혀 나가게 되는 것이니 곧 이 면을 가르쳐 "성화"라고 해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성구는 "중생" 단계에 해당되는 성질을 말했고,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하신 성구는 중생된 사람은 남은 평생 노력해야 될 자기 "성화" 단계에 해당되는 성질을 말씀하신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죽었던 영이 살아나게 되는 영에 문제요, 심신이 살아나는 것은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평생토록 말씀대로 심신을 복종시켜 말씀대로 행하도록 만들어야 그 만큼이 살아나고 거룩해져가는 것이다.
②약2:22,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이 바로 "성화"에 해당되는 것이다.
단번이며 완전이며 영원으로 해결되는 것은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 "중생"이다. 그러나 그 살아난 영이 자기 심신을 깨끗게 만들어 가는 "성화"는 평생 계속될 일이며 반복적으로 또 완전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갈 성질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믿음은 행함까지 나아가는 믿음이라야 심신의 성화가 이루어지며, 행함으로라야 그 믿음이 온전해 지는 것이며, 행함이 없이 지식에만 그친 믿음은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이 과정에서는 역사하지를 못한다. 심신의 한 부분 부분, 심신의 한 요소 요소가 의롭게 되는 과정에서는 알게 된 말씀을 마음이 그 말씀대로 움직여 자기 속에 반대하는 요소를 이겨야 되고 이긴 승리에서 취하게 되는 것이니 행함이 없는 것은 전투에서 진 것이다. 즉 우리 마음과 몸이 예수 믿은 이후에도 평생 싸우게 되는 것은 그리고 하루에 70번씩 7번이라도 넘어져다 일어서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바로 이 면 때문이다.
영과 마음의 구분을 가지지 못하고, 그래서 칭의란 영과 마음에 단계적으로 역사됨을 구별하지 못한 혼동에서 이 성구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설명이 이어지고, 모르는 면이 나오게 되면 알 듯 말 듯한 표현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까지의 교리서들이었다.
칭의가 두 번으로 나뉘어 작용하게 된다면 칭의의 성질을 또 다시 거론하겠지만, 이는 전혀 의문될 일이 아니다. 영과 심신에 작용되는 구원의 역사는 분명히 시차로도 나뉘어지고 그 성질로도 구별된다. 중생은 시작이요 성화는 그 이후이며 중생은 단번이요 성화는 무수한 반복이고 중생은 순간 완전으로 중생되나 성화는 죽는 날까지 완전을 향하여 점점 온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대한 기존 교리의 입장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 말 속에 이미 처음 중생되어 평생 세상에 살다 결국 천국으로 입성하는 우리의 재세기간은 크게 2가지로 나뉘어지는 구원의 시간별 적용단계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3)이미 이런 면은 종교개혁 초기부터 제기 되었던 문제였다.
①루터의 혼란과 칼빈의 설명에서도 그 흔적은 바로 보인다.
칼빈의 경우 오늘까지 후학들이 그대로 이어 나오는 설명처럼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주기를 원하였고, 야고보는 칭의의 열매들에 의한 칭의의 증명에 관심을 두었다 (Calvin, Commentary on James 2:21 ff.) 고 언급하고 있으나, 루터에 의하면 심지어 야고보서를 "복음적 성격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서신이 신앙으로 칭의되고 행함으로 되지 않는다고 바울이 가르친 칭의의 교리에 반대한다는 그의 오해 때문이었다고 박형룡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해라고 단정할 일이 아니고 두 사람이 다 바로 보았고 그러나 전체를 요약치 못한 상태에서 발표된 표현이었다.
칼빈은 바울과 야고보의 증언에 조화가 있음을 본다고 한 반면, 루터는 반동에 인도되어 야고보서가 복음의 서신과 깊이 조화되었음을, 그리고 유신앙론과 생의 실재를 가지지 못한 신앙의 교리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임을 보지 못한 것은 가석한 일이라고 칼빈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가 그렇게까지 보고 있음을 단순히 오해를 했다고 할 것이 아니라, 루터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대목이 하나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며, 칼빈 역시 자기대로는 이해를 하였다고 설명을 하였으나 그 설명이 미흡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하신 말씀이다.
②키텔의 경우를 들어 박형룡도 그 흔적을 보고 있었다.
키텔은 약2:24 의 말씀이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이라는 성구와 유사하면서 절대적으로 다른 무엇이 있다고 했다고 박형룡은 덧붙이고 있다. "바울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인정하기를 "야고보가 대항하여 변론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확실히 바울의 신학이 아니라, 아마 그것과 유사하면서 절대적으로 다른 무엇이라"고 할 것이다 (Kittel, Theologische Woerterbuch Zum N.T., IV, p.95)." 는 언급을 소개하고 있다.
박형룡 자신부터가 현재까지의 모든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하신 말씀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단순히 믿음의 결과이며 믿음의 표현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미흡하고 무엇인가 한 가지 다른 면에서 보아야 할 것이 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3.백영희 구원론이 제시하는 정리와 요약
1)두가지 측면에서 볼 우리의 구원
①기본구원, 행함이 있을 수 없는 구원
불신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믿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전적 믿음인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죽은 영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의 어떤 노력 어떤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죽어 있던 자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는 객관의 하나님이 살릴 때까지는 수용이라는 최소한의 노력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적 은혜요 전적 받아 가진 새생명일 뿐이다.
이 중생은 단번이며 완전이며 영원까지로 변동없이 확정된 구원으로 우리가 이미 받아 가진 것이다. 잃어버릴까 염려할 것도 아니며 중생후 짓는 재범으로 훼손될 차원도 아니다. 이렇게 중생된 영은 다시는 범죄하지 않으며 악한 자가 만질 수도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는 요일5:18의 생명이 바로 이것이다.
즉, 중생된 사람은 다시는 잃어버릴 수 없는 구원, 천국으로 향하는 돌이킬 수 없는 구원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믿는 사람 전부가 믿음으로 기본적으로 받아가지는 공통의 전부의 것이다. 믿는 사람 사이에 어떤 구별도 차이도 없는 구원은 바로 이 면이다.
②건설구원,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구원
영이 중생되어 살아나면 이제는 살아난 영이 자기 마음과 몸을 말씀대로 살도록 만들어 가는 노력이 평생 이어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얻은 구원, 이제 믿는 사람이 된 성도는 누구나 천국가는 문제는 확정이 되었고 남은 문제는 자기 마음과 몸을 말씀대로 만들어 가는 것이니 이것은 각자의 노력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실은 어떤 성도도 꼭같은 사람은 없게 되는 다 다른 것이다.
이것을 성화라고 하는 것이니, 이 성화 단계에서는 배워서 아는 말씀, 마음으로 믿는 바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 행치 않으면 그때 그 마음의 요소 그때 해당되는 그 몸의 요소 그 부분, 그 요소는 그 해당된 현실에서 깨끗해질 수 없고 거룩해지는 성화를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순종으로 살아날 그 죄 아래에 있던 심신의 요소는 다시는 살릴 수 없는 것이 되고 이는 영원히 지옥에 버려두어야 할 폐기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매 현실이 마음과 몸 안에 있는 옛사람의 요소들이 새사람의 요소로 바뀌느냐 아니면 예수믿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살아 버리느냐는 평생의 투쟁이 있게 된다.
죽은 영이 살아나는 구원은 기본적이며 모든 성도가 꼭같은 것이며, 인간의 노력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구원이며, 마음과 몸을 살려가고 길들여 가는 성화의 과정은 평생에 수도 없는 반복, 노력, 수고, 투쟁이 뒤 따르게 되며 따라서 자기 노력에 따라 모든 사람이 다 다른 결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성경이 노력을 요구하고 충성을 요구하고 조심을 요구하는 것은 전부가 이 건설구원에 해당이 되는 것이며, 은혜로만 되고 노력으로 될 수 없는 부분은 전부 이 기본구원에 속해 있는 성질이다.
2)이제는 구원관을 정리 요약할 때
①총론은 옳지만 각론에서 무리했던 수많은 성구 해석들
기름준비에 부족했던 미련한 5 처녀를 지옥갈 사람으로까지 해석하게 된 것은 "노력과 행함의 부족"으로 지옥간다는 율법주의가 되는 일인데도 교리적 총괄 요약에 미진하여 마25장의 각론 해석은 그리 되었다. 즉, 구원은 은혜로만 되고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구원론 교리 총론에서는 단정을 해놓고도 성경 해석이라는 각론에 와서는 기름준비를 열심히 한 슬기로운 5처녀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성구도 총론에 맞추어 하려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기름준비가 되어졌고 그래서 슬기로운 5처녀와 같이 되어있다는 것을 단순히 우리에게 보여주는 성구라고 해야 된다. 성도는 슬기로운 5처녀이니까 기름준비를 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고 저절로 준비가 되어지는 것이니 염려말아라는 것이 된다. 실은 염려말아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그것도 마음의 노력과 행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저절로 염려가 되지 않게 되는 것이 참 믿음의 결과일 것이다.
②성경의 명령들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투로 이겨서 가져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그 모든 명령은 권면은 저절로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생사를 둔 신령한 전투이며 이는 우리 인간이 인간 노력으로 다해야 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우리가 행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으로 되는 것이지만, 최소한 우리의 주관적 의지는 우리에게 주님이 싸워 가지라고 명령한 명령으로 받아야 된다는 내용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명령을 할 것도 없고 우리는 은혜로 받은 구원이니 우리가 노력할 문제가 아니고, 또 노력 없이 받은 중생과 구원으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 온전한 행위가 저절로 우리의 것이 되게 된다는 결론까지 나가게 된다. 결국 우리는 어린 소자 하나를 영접치 않는 일이 없는 다 선한 사람이며 항상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데 믿는 사람은 저절로 그리 되도록 되어 있다면, 적어도 오늘 주님 앞에 설 참 믿음을 가지고 진정 중생된 사람은 한국 교회에 한해서는 거의 없다 할 것이다.
한국교계를 천국 보내려고 만든 합리화의 교리가 아니라, 교리의 정리가 미흡하다 보니 그런 오해석이 나오게 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내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과 반대로 갈수록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가 되어 있는 지금 믿는 자는 수도 없이 많은데 그 중에 이런 선행이 따르지 않는 사람을 전부 중생이 되지 않은 죽은 믿음 말 뿐인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하려면 여러 가지 모순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③우리의 심신은 평생을 살면서 성화된 부분과 성화에 실패한 부분으로 누적되어 간다.
심신의 성화는 전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외견에서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성화로 보이지만 중생과는 달리 성화란 심신이 해당되는 현실에서 해당된 부분, 요소만 말씀대로 행한 것은 성화가 되고 말씀대로 행치 못한 것은 성화에 실패하고 다시는 성화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그 현실이 지나간다. 이렇게 진행되어 말씀대로 행한 것만큼 성화된 부분이 그이 안에 쌓여가고 행치 않은 것만큼 그이 안에는 부패된 요소들이 남아 있게 된다. 한 현실에 해당되는 심신은 전체적으로는 하나로 상대되나 그 속에는 실은 그 현실 마다 해당된 요소들이 따로 진행되며 평생 나아가게 된다.
마지막 이 세상 생활이 끝마치게 되면, 심신 속에 누적된 성화와 부패 두 요소들은 나뉘어 부패로 남아 있는 부분은 다 지옥에 버리고 성화된 요소만 우리의 영이 가지고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이니, 우리의 영과 심신 자체는 천국에 가고 그 심신이 말씀대로 살아 만들어가진 성화된 부분, 그 요소 그 심신의 실력은 자기 심신에 붙들려 함께 영생에 들어가게 되나, 누구든지 자기 평생에 성화시키지 못한 자기의 부패된 부분들은 다 지옥에 버리고 가게되는 일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마지막 우리가 온전히 성화된다는 말은 평생에 썩은 욕심을 그대로 가진 그 욕심을 성령의 욕심으로 성화시켜 준다는 말이 아니다. 내 손 속에 넣어두고 길러놓은 훔치는 기능을 의를 행하는 기능으로 성화시켜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말이 아니다. 동일한 손 하나를 가지고 말씀대로 살아 만들어진 기능도 손 안에는 있을 것이고 죄에 숙달된 기능도 우리 손 안에는 같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니 의롭게 된 기능은 그 손 속에 남아 있어 함께 천국으로 갈 것이고, 그 손 속에 남아 있던 죄로 숙달된 기능은 죽을 때 지옥에 버려 영원히 태우게 되는 것이다.
3)따라서 행함으로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은 심신의 한 요소 요소의 개별 성화를 말씀했다.
믿음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은 중생의 첫 신앙에 해당된 것이 아니라 믿은 후 성도에게 해당되는 성화구원, 즉 심신의 개별 요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심신의 한 요소 한 부분들이 온전케 되는 것은 아는 말씀을 행하여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신앙을 지키기에 밤중같이 어려운 최고 절정의 환란에서 말씀으로 행하고 그 현실을 지나가면 그 현실에 해당된 자기의 심신은 그만큼 성화가 될 것이고, 미리 준비치 못하여 그 환란에서 실패한 성도는 그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부분들이 다시는 성화될 기회가 없어지고 부패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부패가 계속 많이 쌓여가는 사람, 성화가 많이 쌓여가는 사람, 그 누적에 따라 그 사람 전체의 행위는 그 다음 현실에서 승리에 유리할 수 있고 패전에 유리할 수 있도록 되어가는 것이다.
어쨌던 한 현실마다 실패한 심신의 행위는 그 행위와 그 행위에 관련된 요소들은 천국문밖에 버려져야 할 것이고, 따라서 어린 소자를 영접치 않았던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 그 사람의 심신의 그때 요소는 영벌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미련하여 기름 준비를 하지 못한 자들에게 닫혀진 천국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해당되는 심신의 요소인 것이다.
한 사람을 한 사람 전체로만 보고, 한 사람 속에 개별적 요소들을 보지 못하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중생과 성화를 구별하고, 우리에게는 마음과 다른 영이 있음을 알게 되고, 우리 인간의 심신은 외부로는 하나의 인격으로 움직이나 우리 안에는 수많은 요소들과 부분들이 있어 현실마다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결과가 맺어지며 그기 따라 우리의 성화의 분량, 성화의 요소들은 두 부분으로 누적되어 가는 것을 기억하자. 믿는 사람에게만은 옛사람과 새사람이 혼재되어 있음을 성경이 똑똑히 주지 시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중생된 사람이라고 중생된 자기의 심신 안에 있는 평생 쌓아놓은 기능들 습관들 힘들을 전부를 다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기대한다면 다시 한번 교리와 성구 전체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중생된 사람의 영, 마음, 몸 자체는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을 가지만 그 마음과 몸 안에 평생 누적된 악습 악성은 지옥에 버려짐으로 우리 자신 전체가 완전한 성화, 온전한 깨끗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겠는가? 아니면 평생 누적시킨 악습 악성 지난날의 나쁜 행동까지도 죽는 순간 다 성화를 시켜 천국으로 가져가겠는가?
후자와 같이 된다면 천국간 성도의 차이는 없을 것이고, 전자와 같이 된다면 천국간 성도의 차이는 그 실력과 그 영광과 그 자체의 차이가 많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배려한다면 천국은 모든 사람이 산술적 계량적 평등이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천국이며 천국의 평등인가? 아니면 천국의 평등은 세상에서 준비한 성화의 양에 따른 평등일 것인가? 이 문제는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볼 일이다.
4)백영희 구원론의 의의
성경을 정통의 입장에서 보수의 입장에서 바른 양심으로 훑고 내려가면 누구든 중생이란 단번이며 완전이고, 성화란 평생의 점진임을 알 수 있고 또한 구원이란 전적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가 게재될 성질이 아니며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수 없는 순종행위를 요구하는 것을 모를 사람도 없다.
바른 양심을 가지고 정통의 교리적 입장에서 구원론을 연구하게 되면 결국 표현과 줄거리를 찾아내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찌라도 결국 동일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체적 일관, 전체적 요약에서 미진한 것을 백영희의 표현으로 정리를 해버리면 단순 확실 정확한 실체가 도출된다.
백영희의 구원론으로 명확해지는 것도 실은 이미 먼저 느꼈고 먼저 더듬었던 이들이 있었다. 분명히 백영희의 구원론으로 정리가 되었어야 하나 한 두가지 기존지식의 범위에 잡혀 그 설명이 어려웠던 것을, 종합 정리 요약한 백영희의 설명에서 부분적으로 모순일 수밖에 없는 약점들을 수정, 보완, 보충하며 우리 교리는 또 한번의 교리사 시대를 정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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