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박형룡 구원론
박형룡박사님의 조직신학은 세계의 정통보수신학을 요약한 독보적 저서입니다.
구원론에 대한 내용만 일부 발췌 소개합니다.
제2장
제2절 중생의 성질
1.그릇된 개념의 부정
1)인성의 실체적 변화가 아니다.
중생은 마니키안파와 종교개혁 시대에 Flacius Illyricus (프래시우스 일리리쿠스)가 가르친 바와 같은 인성의 실체(substance)의 변화가 아니다. Illyricus는, 원죄는 영혼의 실체의 부패였고 중생은 그 정상적 순결을 회복하는 그 실체의 변화였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신인협동론자(Synergist)들과 라잎식포령(Leipzig Interim)의 지원자들과의 논쟁에 그의 편에 섰던 그의 모든 친구들이 후에 그를 버렸다.
註. 그 시기의 모든 논쟁들을 진정하려고 채택된 일치신조 (Form of Concord)에서 이 일리리쿠스의 특이한 견해들은 마니키안 이단의 실질적 부활로 정죄되었다. 만일 영혼의 실체가 죄악하다면 각개 영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죄의 조성자이실 것이요, 우리의 성질을 취하시어 우리와 동체가 되신 그리스도는 반드시 죄의 참여자이실 것이라고 역설되었다.
2)어떤 심력(心力)들의 변화가 아니다
중생은 단순히 영혼의 심력들(faculties) 중의 하나이나 그 이상의 수적 변화가 아니다. 즉 어떤 복음주의자들이 사고하는 바와 같이 신적 사물에 대한 염증을 제거함으로 되는 감정의 변화도 아니요, 합리주의자들이 보는 바와 같이 죄로 인하여 흑암하여졌던 마음의 조명으로 되는 지성의 변화만도 아니다. 중생은 영혼의 중심적 전관할적 기관이요, 생의 흐름의 원천인 성경적 의미의 심정(heart, 성경번역은 "마음")에 영향을 준다. 즉 이것은 인성 전체에 영향을 준다. 심정이란 명사는 의지 작용들과 행동들을 결정하는 압도하는 도덕적 성향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성경에서 가장 보통으로 사용되고 있다.(마12:34, 15:19, 눅6:43, 45) (A.A. Hodge, Outline of Theology, p.459)
3)인성의 완전한 변화도 아니다.
중생은 재세례파와 기타 어떤 열광적 종파들이 가르친 바와 같이 인성의 전부나 일부가 완전히 변화되어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일도 아니다. 전항에서 말한 것은, 중생이 원칙적으로 사람의 전 성질에 영향을 준다고 함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것이 사람 안에 행하는 성령의 공작 전부를 구성하지 않는다 함이다. 중생은 회심과 성화를 포괄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거룩한 생활의 시작뿐이다.
2.바른 개념의 긍정
1)영적 새 생명의 심어 들임과 주관적 성향의 변화
중생은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소(principle)의 심어들임(요3:3, 5:231, 롬6:13, 엡2:1, 5:14)과 영혼의 주관적 성향의 근본적 변화(행16:14, 롬6:17, 10:10, 시51:10, 렘31:33, 겔11:19)로 구성되는 것이니 그 변화는 성령의 감화 아래 하나님 편으로 향하여 움직이는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 변화는 온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나니 즉 지력(고전2:14, 15, 고후4:6, 엡1:18, 골3:10), 의지(시110:3, 빌2:13, 살후3:5, 히13:21), 감정(시42:1,2, 마5:4, 벧전1:8)에게다.
중생은 주관적 성향의 변화이다. 사람의 영혼에 중생이 오는 곳이 어다냐? 영혼의 어떤 요소가 중생되는가? 중생은 습성 혹 성향에 오는 것이다.
영혼의 본체와 능력들에 추가하여 영구한 도덕적 품질 혹 성향이 있다는 것은 선인은 관습적으로 의롭게 행하고 악인은 관습적으로 악하게 행함을 보아 확신하게 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영혼 자체나 그것의 능력들의 존재를 사상, 감정, 결의 같은 동작들을 보아서 확신함과 마찬가지다(A. A. Hodge).
註. 중생은 능력들의 행동 혹 운행(acts or exercises)에 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인사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의 영혼을 ①본체(essence) ②능력들(faculties) ③능력들의 행동 혹 운행으로 구분한 후에 중생은 제①, 제②에 있지 않고 제 ③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좀더 완전한 구분은 ①본체, ②능력들, ③습성 혹 성향, ④행동이다. 다음에 중생은 제③, 제④에 오되 먼저 제④의 토대와 원천인 제③에 온다(cf. H.B.Smith, op. cit., pp. 560, 561)
2)온 사람의 홀연적 변화
중생은 지력적, 감정적, 도덕적으로 즉시 온 사람에게 영향하는 홀연적 변화이다. 중생이 홀연적 변화라고 하는 단언은 두 가지를 함의하나니, ①중생은 로마 카톨릭파와 모든 반 펠라기우스 파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영혼 안에 점진적으로 준비되는 일이 아니다. 마치 삶과 죽음 사이에 중간 계단이 없음과 같다. "이것의 홀연적임을 역설하는 이유는 죄와 거룩의 전적 상이에 있다. 우리가 그 하나에서 그 다른 것에로의 과도를 생각하지 못함은 그것들은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②이것은 성화와 같은 점진적 과정이 아니다. 어떤 개혁파 저자들이 이따금 "중생"이란 명사를 성화까지라도 포함시켜 사용한 것이 사실이나 그것은 구원 서정의 교리가 금일같이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때의 일이었다(요5:24, 마6:24 참조).
3)비밀하고 헤아릴 수 없는 변화
중생은 이것의 가장 제한된 의미에서 잠재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역사에 의한 변화로서 결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이 변화는 사람의 순간적으로 의식함 없이 되는 것이니 "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생기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지만" 추후에라도 사람은 오직 이것의 결과를 보아서 이것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3.중생의 정의
1)새생명을 심음과 주관적 성향의 성화
"중생"의 용어와 개념에 관한 윗글의 진술들에 따라서 중생은 아래와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말의 엄밀한 의미로는 "중생은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소를 심고 영혼의 주관적 성향을 성화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러나 새생명의 "발생"의 관념과 함께 그것의 "충생"의 관념을 포함시키기 위하여 앞에서 말한 정의에 "그리고 이 성향의 최초 발동을 실현시키는"이란 한 문구를 가입함이 가할 것이다.
2)주관적 성향의 재창조
중생을 주관적 성향의 변화에 치중하여 정의 할 수도 있다. A.A. Hodge는 이것을 "주관하는 성향의 재창조"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설명하되 ①영혼에는 여러 가지 심력들(faculties)외에 습성들(habits), 혹 성향들(dispositions)이 있어 혹은 생득적이요, 혹은 획득적인 바 이것들은 영혼의 심력들을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운영하기 위한 기초를 구성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습성적으로 죄악스럽게 행동함을 보면 그의 도덕적 성향이 영구히 선하리라고 판단한다. ②이 성향들은 도덕적 행동보다 먼저 있어 그 행동의 선악을 결정한다. ③창조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심정의 성향을 거룩하게 재창조하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당히 "중생", "새창조", "새출생"이라 칭한다(A.A.Hodge)
땝네는 "중생은 도덕적 목적을 결정하는 성향들과 도덕적 영적 진리의 지각에서의 이해력의 초자연적 혁신(renovation)이니 죄와 거룩에 향한 전인의 행동에 영구적이며 근본적인 전환으로 결과한다."고 정의 하였다.
웹은 말하되 "중생이란 사람의 사악한 영혼의 주관하는 성향을 변화하는 은혜의 행동에 대한 말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중생이란 기본적 도덕상 본능적 욕망이 은혜적으로 변화함이다.)
3)죄와 거룩에 향한 행동의 전환
변화의 결과에 중점을 두고 중생을 정의함도 있다. 앞에서 진술한 땝네의 정의는 성향의 변화에 치중하면서도 그 변화의 결과로서 죄와 거룩에 향한 행동에 전환이 있음을 역설하였다. 스코틀랜드 교회 신도게요서는 중생에서 사람은 그가 일찍이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게 되며 전에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중생자도 불신자와 같이 죄인이지만, 그들이 불신자와 다른 분간은 다만 그들이 전에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며 또한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기를 시작하는 사실 뿐인 것이다.
영적 새 생명을 심음과 주관적 성향의 성화를 강조하는 제1의 정의는 중생의 가장 깊은 오소를 발굴하여 내는 강미를 가진 점에서 우수하다. 중생의 근본적 요소인 변화의 관념에 치중하여 주관적 성향의 변화만을 고조하는 제2의 정의도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결과를 중요시하는 제3의 정의도 중생의 관념을 확충하여 줌으로 필요한 것이다.
註. 중생은 새 생명의 원소를 심어 들임이라, 혹은 주관적 성향의 변화라고 말할 때에 "원소", 또는 "성향"의 의미는 무엇인가? 에드월즈는 말하되 "여기서 성질의 원소(principle)로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영혼의 심력들(faculties)의 운행의 어떤 특수한 종류나 양식을 위하여 성질 안에 설치된 ..... 새로운 기초이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영적감성(spritual sense)" 은 새로운 이행의 심력이 아니라, 오직 동일한 이해의 심력의 새로운 종류의 운행을 위하여 영혼의 성질에 배치된 새로운 기초뿐이다. 그리하여 이 새 감성에 수반하는 심정의 새롭고 거룩한 성향을 새로운 의지의 심력이 아니라, 오직 동일한 의지의 심력의 새로운 종류의 운행을 위하여 영혼의 성질에 배치된 기초뿐이다"라고 하였다. 성향은 원소와 대개 동일한 의미의 말로이다. 심정이란 명사는 결의들과 행동들을 결정하는 세력있는 도덕적 성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경에서 가장 보통으로 사용된 말이다.
제5장 칭의
제2절 칭의의 성질과 특징
3.성질
1)은혜성
칭의는 은혜의 행위이다. 이것은 죄인이 매수하는 것도 아니요 근로하여 얻는 것도 아니라, 무상으로 받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의 어떤 공로에 의하여 취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증여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행위의 결과도 아니요 그의 선의 보수도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인하여 거저 받는 것이다. "신앙으로 칭의"의 교리는 신앙을 칭의의 근거로 말함이 아니라, 이것을 받는 기구로 인정할 뿐이다. 구원의 서정의 모든 계단이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으나 그 중에도 칭의는 가장 탁월하게 은혜성을 지닌 일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3, 24
4)즉각 완전 최종성
칭의는 모든 신자들에게 즉각적, 완전적, 최종적이다. 칭의가 즉각적임은 영혼이 하나님의 열납도 받지 않고 정죄도 받지 않는 중간기가 있을 수 없음이요 (마6:24), 완전적임은 영혼이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율법의 요구들에 향한 그의 완전한 만족에 참여하는 때문이요 (골2:9,10), 최종적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해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10:28,29). 신앙에 의하여 즉시 되어지는 칭의는 완전하며 최종적인 것이다.
4.특징
3)단번에 단행
칭의는 단번에 단행된다. 이것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며 과정도 아니라,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다.칭의에는 보다 더도 없고 보다 적게도 없으니 사람은 충분히 칭의되거나 전연 칭의되지 않거나 한다. 이 칭의의 단번성은 윗글에서 칭의의 "즉각, 완전, 최종성"을 논술할 때에 포함적으로 논급된 것이니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른 편에성화는 금생에 완성되지 못하는 계속적 과정이다. 칭의는 즉각적이나, 성화는 시간을 잡는다.
제5절 다른 단계들에 대한 관계
1.중생에 대하여
1)상이
중생은 영혼에 영적 생활의 새 원소를 들여 심는 성령의 창조적 사역이니 단번에 완성된다. 사람은 보다 더 많이 중생되거나 보다 더 적게 중생되기 불능하다. 그는 영적으로 죽거나 살거나의 하나에 처할 뿐이다. 이것은 성령의 조장하며 발전시키는 사역으로서 영혼의 모든 심력들을 이미 들여 심겨진 영적 생명의 원소의 정화하며 조정하는 감화 아래 더욱 더 완전히 굴복시킨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하여야 된다 (고후7: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거룩의 정도들이 있음을 예상하고 말하되 "가장 거룩한 사람들이라도 금생에서는 이 순종의 조그마한 시작을 가질 뿐이다" (114)
2)상사
중생은 성화의 시작이다. 전자에서 시작된 갱신의 사역이 후자에서 계속된다. 중생에서 발생되고 출생된 영적 생명이 회심에서 최초로 활동하고 성화에서 성장하며 발전되는 것이다. 전자에서 심겨지고 기원된 거룩한 성향이 후자에서 증진하며 강화되는 것이다. 피택자의 속에 시작된 선한 일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완성될 것이다 (빌1:6). 스트롱은 말하되, "성화가 중생으로부터 구별됨은 성장이 출생으로부터 구별됨, 즉 거룩한 성향의 강화가 그것의 기원적 수여로부터 구별됨이다" 이것은 성화와 중생의 구별을 말하는 동시에 또한 양자의 상이를 표시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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