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 은혜로 얻는 구원이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된다는 면에 대한 소고
1.구원과 인간노력의 관계는?
엡2:8-9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는 선물이라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라는 성구 등에 의하여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는 전혀 필요 없다는 교리는 우리 기독교 교계에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내려오는 교리이다.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인간 행위가 어떠하든지 그것과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데에는 정통의 교리는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종교개혁 이후 오늘까지의 칼빈 신앙노선의 시작이다.
천주교의 구원관은 인간의 행위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전적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고 그 결과 수도 없는 필수적 행위들을 천주교는 나열시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는 말 뿐이고 실은 인간이 힘써서 얻는 구원으로 몰고 나갔었다. 여기에 대하여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은 그 교리적 핵심이 구원이란 전적 은혜이며 따라서 어떤 대가도 어떤 노력도 어떤 수고도 필요 없이 거저 믿기만 믿으면 된다고 했었다. 구원관에 대한 교리의 시작이며 오늘까지 기독교의 올바른 깨달음이다.
2.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할 때 그렇다면 믿는 행위는 행위가 아닌가?
흔히 우리 개신교 노선으로 믿는 이들은 습관처럼 되새기는 것이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은혜로 주시는 것이니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이 말 속에는 몸으로 힘써 노력하는 이런 인간 수고는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러나 마음으로 믿는 것만은 필요하다는 뜻을 비판 없이 가지고 있다. 마음으로 믿는 믿음, 생각으로 수고하는 그 수고는 인간에게 그리 큰 수고를 끼치지 않게 되어 있고 따라서 천주교가 과중시켰던 여러 가지 과중한 노력이 배제되기 때문에 마음의 수고인 믿는 행위 정도는 인간의 노력이 개재되었다고 볼 수 없고 그래서 "믿고 얻는 구원"은 은혜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구원론의 본질은 그기에 있지 않다. 인간이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우리의 영이 죽었고 이렇게 죽은 존재가 다시 살아나는 데에는 자기 죄로 죽은 자기를 자기가 스스로 살릴 수가 있겠는가라는 문제이다. 죄로 죽은 자기가 자기를 살리려고 수고하시는 하나님의 노력에 티끌만큼이라도 자기의 인간 수고를 조금이라도 더할 수가 있겠는가? 절대로 그럴 여지가 없는 것이 바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며, 더욱이 죄로 죽어 죄없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죄지은 인간은 죄로 죽은 영을 살려내는 구원에는 어떤 티끌만한 보탬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이란 전적 신적은혜로 만들어졌고 신적은혜로 우리에게 입혀져서 신적은혜로 우리를 살려 놓은 것까지이며, 이렇게 살아나게 된 내가 되찾은 생명이 움돋고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주님 때문에 그 은혜로 살아난 것을 알게 되고 그 주님을 찾게 되면서 그 주님이 반가워지고 그 주님을 마음으로까지 모시게 되는 결과가 보이게 되는데 이렇게 살려놓은 성도에게 나타난 마지막 외부의 행동만을 가지고 단순하게 평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더라"고 인간의 시각인 자기 주관의 관점에서 말하게 되는 것이다.
3.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믿음은 인간의 심리 행위로서의 "믿음"이 아니다.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인간이 마음으로라도 수고한 인간 노력의 "믿는 행위"로서의 "믿음"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노력한 부분이 몸이냐 마음이냐는 문제가 될 뿐이며 결국 인간의 수고 인간의 행위가 내재되어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백하게 "믿음"이 필요하다고 한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믿지 않으려고 해도 믿어지도록 성령이 마음을 열어 믿게 만든 "믿음"이며, 내가 믿어려고 노력해서 믿은 사람일찌라도 그 마음은 자기도 모르는 이면에서 성령이 믿도록 마음을 움직여 성령이 움직인 마음의 "믿음"이지 성령과 별개로 인간 스스로 만든 심리의 결과가 아니며 또는 그 마음을 가지도록 성령과 마음이 합의를 하여 합동 노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 은혜라는 이 "은혜"면을 연구하고 또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안다면 인간노력이나 인간의 행위는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어야 하고, 실제로 인간이 중생되기 전 움직이는 것은 죽음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산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신 고전13:3 말씀에서 예수를 주로 믿는 우리 마음 속의 믿음은 성령이 만들어 성령이 넣어 주셔서 성령이 주로 시인토록 하여 시인되는 것이니 구원에 이르는 믿음, 중생되는 믿음은 전적 성령의 행위이며 인간은 수동적인 위치에조차도 설 것이 아니다. 거저 죽은 송장까지 살리는 의사가 그 송장을 의사 실력으로 살릴 때 자기는 송장으로서 의사의 의료 행위가 자기 몸에 움직이고 가감되어진 것을 그 구조의 대상물로 당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구경조차 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은 이런 성령의 행위로 영이 살아난 후, 비로소 살아나게 된 때를 더듬고 유추하여 추론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는 행13:48 말씀에서 우리는 이런 은혜의 행위가 인간의 초청에 의해서 될 성질도 아니며 또는 성령이 오실 수 있도록 인간이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였을 성질조차도 아니라는 것을 단정하게 된다.
에베소 2장 1절 말씀에서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말씀에서 당신은 살리고 우리는 살림을 당하는 것이지 살리는 당신에게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는 일에 일조를 하는 문제는 몸의 행위 뿐 아니라 마음의 행위조차도 있을 수 없음을 명백히 단정할 일이다. 따라서 구원의 조건인 "믿음"이란 우리를 살려주시는 성령의 구원역사일 뿐이며 중생 이전의 인간이 중생을 위해 움직일 마음의 행위는 전혀 아니라는 성격으로 이해해야 한다.
4.너무도 논리를 위한 논리가 아닌가?
결국 믿어 구원을 얻게 된 것이 본질이며 믿는 사람이 되어 성도의 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으면 된 것이지 그렇게까지 무리하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갈 것이 있겠는가고 반문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구원의 본질에 대한 확고한 교리가 없으면 인간이 노력할 필요도 없는 중생이라는 기본구원을 인간의 노력으로 해 보려고 여러 가지 헛수고를 하게 되고, 오히려 인간이 노력하여 각자가 준비할 자기 분량의 자기 실력과 영광은 또한 은혜로 돌려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이 땅 위에서 묻어두고 세상에서 썩혀 두는 성도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