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인간지식에 복된 두 종류의 사람
1.인간지식을 복되게 가지는 2종류의 성도
인간지식을 잘못 알고 잘못 가지는 결과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인간지식을 복되게 사용하는 경우를 살펴보면서 참고할 상식을 잠깐 새겨 본다. 복 있는 성도들은 올바른 지식관을 가지고 인간지식을 바르게 상대하여 구원에 유익하게 또 자연혜택의 좋은 수단으로 이용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지식을 복되게 이용하는 성도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초월의 사람
인간지식에 대하여는 무식했으나 하나님지식에 통달을 하여 인간지식을 따로 몰라도 구원에 필요한 모든 면에 하나님이 특별한 지혜를 주셔서 인간지식을 초월한 성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요셉은 17세 때까지 아버지 품속에 살다가 30세가 될 때까지 종으로 죄수로 살았다. 특별히 인간지식을 잘 배울 기회가 없어 무식한 사람이었다. 믿음의 법만 잘 지켜 하나님지식으로만 갖추었으나 인간지식을 초월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아서 애굽을 다스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사무엘도 다윗도 베드로와 같은 사도도 그러한 경우였다.
하나님이 인간지식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주지 아니했을 때 이런 형편을 하나님이 주신 현실인 줄 알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믿음의 법"만 잘 배워 갔을 뿐이다. 자연과 만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할 때는 하나님이 특별한 지혜를 주셔서 인간지식을 초월하여 나갔던 성도들이다.
(2) 통과의 사람
초월의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지식을 주격으로 삼은 것은 꼭 같은데 다만 인간지식을 일반의 단계를 따라 일일이 통과하면서 가지게 된 성도들이 이런 경우이다. 지식관이 잘못되면 두말할 것 없이 구원에는 실패했을 것이다. 인간지식을 일반의 법칙대로 다 가지면서 내적으로는 하나님지식을 주격으로 삼아 인간지식을 종으로 만든 사람들이 있으니 곧 모세나 다니엘, 바울 같은 성도들이다.
모세는 애굽의 최고 학문 세상 최고 최상의 바로 왕궁 교육을 받았으나 이는 하나님지식의 종으로만 들어왔지 주격의 위치에는 절대 두지를 아니했다. 그 결과 인간지식이 좋다고 소개하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하나님지식이 증거하는 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크게 여겼던 것이다. 다니엘도 당대 최고 학문을 다 배웠지만 먼저 가진 하나님지식을 주격으로 바로 붙들고 인간지식을 종으로 받았기 때문에 바벨론의 그 모든 인간지식이 다니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섬기는데 도움만 되었지 손해 보이지를 못하였다.
바울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모세나 다니엘은 하나님지식을 먼저 받고 인간지식을 뒤에 받은 경우라면, 바울은 인간지식을 먼저 배워 통달을 했던 사람이다. 물론 이전까지 알던 성경지식도 인간대로 알았던 지식일 뿐이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는 이전에 가졌던 모든 지식을 전부 종으로 삼고 하나님지식을 주격으로 모셔 바른 지식관을 가졌다. 비로소 바울에게는 이전 모든 지식이 복음을 위하여 귀하게 쓰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2.초월과 통과의 복된 사람들의 공통점
인간지식을 다 배웠으나 이를 종으로 들인 사람, 아예 배우지도 않았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초월한 사람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다같이 지식관에 있어서는 복된 사람들이다. 만약 인간지식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통과의 사람을 좋아할 것이다. 또 게으른 사람이라면 초월의 사람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초월이던 통과던 지식관에 복있는 사람은 어느 종류던지 공통점이 있다.
(1)지식자체와 위치를 바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은 인간지식은 죽은 지식, 죽이는 지식인 줄 확실히 알았다. 특히 통과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인간지식이 욕심 나던 차에 하나님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니까 인간지식 배우는 것이 좋아서 배운 인간지식 애호가들이 아니었다. 인간지식과 하나님지식을 영감으로 확정지운 사람들이었고 그 면에서는 흔들림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초월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배우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으로 배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들어간 지식은 복되게 이용되어졌던 것이다. 만일 이 지식관이 잘못되었더라면 그들의 지식이 많은 만큼 불행의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속에 지식욕이 있어 그 지식욕을 버리지 않고 배운 것이 아니었다.
즉 지식자체도 바로 알았지만 인간지식의 위치는 소유격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하나는 이리 쓰고 하나는 저리 쓰는데 하나님이 쓰는 종류에 따라 쓰임 받다 보니 통과의 사람이 되었고 초월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었다. 초월의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2)믿음으로 지사(至死) 충성한 사람들이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 하시던지 지사충성의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초월의 사람의 경우에서 오해하지 말 것은 그들이 게으른 사람이라 배우는 것이 귀찮고 싫었는데 초월로 인도하시니까 "초월의 인도를 자기 안일욕의 기회로 삼았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요셉이 공부하기 싫던 차에 세상공부를 하지 않고 초월할 수 있는 인도를 주시니까 좋아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자기에게는 초월의 과정을 주셔서 인간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아니했기 못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지식을 가졌던 사람이나 초월했던 사람이나 하나님의 인도가 어느 형편을 주시던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충성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3.두종류 사람의 장단점
하나님이 인도하는 과정이 달라서 하나는 초월로 하나는 통과로 인간지식을 상대했으나 본질적으로는 꼭 같은 지식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앙의 현실을 생각할 때 또 많은 신앙의 사람들을 지켜 볼 때 두종류의 사람을 비교해 본다면 어느 경우가 더 안심되고 복된 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두말할 것 없이 초월의 사람일 것이다.
1)더 안심되고 안전한 길은?
지식은 어디로 향하던지 그 지식화 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지식이란 비록 하나님지식에 종으로 삼아 붙들어 두더라도 항상 기회를 노리고 있다. 반란의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그 지식 속에는 그 지식의 원 배후자인 악령이 있어 조금만 틈이 있으면 하나님지식을 부인케 하고 주격의 자리를 탈환하려고 한다. 나무는 심어두면 제 자리를 지킨다. 동물은 매어 두면 그만이다. 돌은 쌓아두면 그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지식은 주격을 차지하기 전에는 끊임없이 주체를 노리고 있다.
따라서 인간지식을 통과한 사람이 인간지식을 비록 종으로 붙들어 복되게 쓰고는 있지만 주격의 하나님지식이 흐려질 때는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신앙을 절단 낼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통과의 사람에 비하여 늘 위험성이 많다고 하겠다. 그 사람은 차라리 인간지식을 가지지 아니했더라면! 훌륭한 신앙의 사람 중에서 이런 탄식을 하는 많은 경우를 신앙의 현장에서 보게 된다.
훌륭한 신하와 군사들, 힘센 많은 머슴들, 얼마나 요긴하고 얼마나 자랑거리겠는가? 반드시 종의 위치에 있다는 전제에서만 요긴한 것이지 그 위치에 변화가 생길 때는 바로 내 목에 칼을 댈 원수라는 것을 늘 새겨야 할 것이다.
2)실족치 않고 힘입게 계속될 길은?
인간은 연약하다. 바울 같은 이도 늘 찌르는 가시를 없애 주시도록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너무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혹 교만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그 기도를 듣지 아니하였다. 하물며 그 이하의 일반적 신앙인이겠는가?
초월의 사람은 모든 신앙걸음이 전적 하나님의 은헤임을 외부로까지 늘 확실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애굽을 다스린다는 자체가 전적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을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돌아볼 때 전적 은혜임을 느끼기에는 초월의 사람이었기에 장점이었다. 그러나 다니엘과 같은 사람은 바벨론을 다스려 나가는 그 모든 실력이 하나님의 전적 은혜인가, 바벨론에서 배운 최고의 학문 때문인가 하는 이면에서 자칫 손해보기 쉬운 위험성을 가졌다.
인간지식을 가졌던 안 가졌던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고 자신은 전적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 하나로만 할 수 있다는 이 면이 흐려지기 쉬운 경우는 둘 중에 어느 경우이겠는가? 아무래도 초월의 사람보다 통과의 사람이다.
> 따라서 통과의 사람은 이런 위험성을 늘 새겨 더 두려워하며 더 조심하는 신앙을 가져야 복된 자기의 인간지식이 복으로 계속 될 것이고 이 면이 흐려지면 그 지식을 가짐으로 크게 손해보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