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재건 교회
출처 : 부경기독교역사연구회 격월간지
* 재건 교회는 공회 노선 주변에 있었고 간접적으로 얽힌 부분이 많았습니다. - 관리자
-----------------------------------------------------------------------
재건교회의 지도자
강상은 목사
허성수(소설가)
들어가는 말
재건교회는 한국 장로교회의 한 분파로서, 해방 후 일제에 의해 무너진 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의미로 기존의 장로교를 떠난 성도들에 의해 탄생되었다. 초창기 재건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최덕지 목사를 생각하지만 그와 뜻을 같이 하며 재건교회를 세운 또 한 사람의 지도자가 있었다. 그가 경남 마산의 강상은 목사였다. 그는 부산.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남한교회 재건운동에 동참한 유일한 목사로서 초창기 재건교회의 기초를 닦으며 신학을 가르치며 목회자를 길렀다. 최덕지 목사에게도 강상은 목사는 기댈 수 있는 큰 언덕이었다. 여전도사였던 그녀를 목사로 안수한 것도 강 목사였다. 그러나 강 목사는 최덕지의 그늘 아래 가려져 있었다. 아마도 해방 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 구속돼 오랜 옥중생활에서도 온갖 고문을 이겨내며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여성으로 너무 잘 알려져 해방 후 그녀가 택했던 노선의 대표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이제부터 그녀 뒤에 있는 높은 언덕을 향해 찬찬히 산책해 보라고 한다.
1.일제 치하의 한국교회와 강상은 목사
1.가정배경과 입신
강상은 목사는1890년3월20일 경남 통영군 통영읍 태평동180번지에서 아버지 姜龍翰(강용한)씨와 어머니 金某同(김모동)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들만 삼형제였던 부모 슬하에서 상은은 둘째였다. 조부 姜宗述(강종술)은 조선시대 삼도수륙대장군을 지낸 명문 집안으로서 바로 통영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다. 유불교와 미신 등의 전통종교가 지배하던 통영 땅에도 그 무렵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1891년 호주 선교사 왕대선 목사(Rev. R. D. Watson)부부가 통영에 복음을 전하러 왔다.1892년에는 무어 양(Miss. E. S. Moore)이 합류해 진남을 중심으로 해안의 섬들까지 순회하며 심방선교 활동을 했다.1889년부터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호주선교부는 1896년 부산에 일신여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00년대 초에는 경남 중서부지방으로 교육사업을 점점 확대해 나갔다. 마산에 창신학교와 호신학교, 의신학교, 복음농업실수학교를, 통영에 진명학교를 세워 신교육과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상은이 복음을 처음 접한 것은17세 되던1907년 여름이었다. 말라리아에 걸려 동생 지연과 함께 사경을 헤매던 중 예수 그리스도(기독)를 영접했다. 어머니가 우상에게 치성을 드리고 무당을 불러 굿도 해봤으나 아무 효험을 보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호주 선교사들을 찾았다. 손안로 선교사가 곧장 달려가 펄펄 끓는 두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고, 결국 열이 내리며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상은의 가족들은 곧바로 대화정교회(지금의 충무교회)에 나가 등록했다. 충무교회는 바로 1년 전1906년에 설립된 상태였다. 상은은 열심히 교회에 나가 말씀을 들었다. 주일과 수요일 밤예배만으로도 부족해 매일 새벽기도회도 나갔다. 교회까지는 산길을 걸어 공동묘지를 지나야 했지만 말씀을 사모하는 그의 열정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2.교역의 길로
상은은 1911년‘助師(조사)’가 되었다. 조사란 선교사나 목사를 돕기 위한 직분으로 오늘날의 전도사 직을 말한다. 그는 거제도 연안을 순회하며 7개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1915년 경 김순이와 결혼해 첫 아들을 낳았지만 일찍 장티푸스에 걸려 천국에 먼저 보내야 했고,1920년 낳은 아들 성도는 건강하게 성장했다. 상은은1921년 장로가 됐다. 나이 만31세로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제12회 경남노회에서 장로시취에 합격했다.3년 후1924년 봄 강상은 장로는 조선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신은 선교사들이 한국인 목회자를 배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1901년 최초로 개교한 신학교였다. 그런데 평신에서는 교역자의 교역 정도는 너무 높이지 말고 일반교인의 지적 수준보다 약간 높게 한다는 교육목표가 있었다. 심지어 영어도 배우지 못하게 했다. 아마도 정통 신학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데 다른 잡다한 신학을 비교 연구하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것 같아 취한 조치로 보인다. 평신 학생들에게 유일한 도서는 오로지 성경과 찬송가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선주 목사는 요한계시록을1만 독 했고, 이승훈 장로는 신약을100독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외에도 평신 출신 목사들은 보통 성경을 몇 백 독, 몇 천 독 하며 설교를 준비했다고 한다. 강상은 목사도 이런 영향으로 훗날 성도들에게 성경 외에는 다른 책들을 일절 보지 못하게 했다. 당시 평신의 교수진은 왕길지(교회사 및 헬라어),이눌서(조직신학),곽안련(실천신학 및 종교교육),어도만(구약문학 및 주해),이성휘(성경문학 및 주해)등이었다. 그 중 남궁혁과 이성휘 박사가 한국인 교수였다. 강상은은 경남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왕길지 교수를 특히 존경했다. 그 외 경남출신의 신학교 동기생으로는 이약신이 있었다. 강상은은5년의 정규 과정을 큰 어려움 없이 마치고 1929년 봄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3.진해 경화교회 부임
강상은은 1929년 6월11일 부산 영도교회(지금의 제일영도교회)에서 열린 제27회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진해 경화동교회(지금의 경화교회)와 명동교회, 창원의 가음정교회와 가주리교회(지금의 가주교회)등4처 교회 합직목사로 부임했다. 당신 한국기독교는 빠르게 성장하면서 농촌에도 많은 교회들이 세위지고 있었지만 목회자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보통 목사 한 명이 여러 교회를 맡아 시무해야만 했다. 강 목사는 경화교회를 중심으로 바쁘게 쫓아다니며4개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학습세례를 베풀고 당회를 인도했다. 그러나 교통도 불편한데 매 주일 먼 거리로 떨어져 있는4개 교회를 다니며 돌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성장하고 있던 경화교회 교인들이2개 교회 정도만 강 목사가 합직하길 원했다.1930년6월9일 부인 항서교회에서 열린 제28회 경남노회에 강상은 목사가 경화교회와 명동교회만 합직하도록 청원했고, 결국 받아들여졌다. 명동교회는 진해시내와 비교적 가까운 웅천면에 있었다. 강 목사는 부임 초부터 교회교육에 무척 관심을 기울였다. 경화교회는 1905년에 설립된 진해의 첫 번째 교회였다.1929년 진해 첫 아동성경학교를 열어1주간 성경과 찬송을 가르쳤다. 아마도 이것이 경화교회로서는 사상 첫 여름성경학교였던 것 같다. 1930년8월에는 제 2회 진해하기아동성경학교를 했다. 또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는‘성경통신강좌’에 도 많은 성도들을 등록시켜 질적인 성장도 꾀했다. 배정주, 정홍이, 윤술룡, 공석구, 이성출 등의 성도들이 신약통신과와 구약통신과를 차례대로 거쳐 훗날 목사와 장로도 귀하게 쓰임받는 일꾼이 됐다. 그리고 진해영창유치원도 세워 지역사회의 유아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교회가 질적. 양적 성장가도에 오르자 이웃의 여러 미자립교회들로부터 교역할 일꾼을 요청해왔다. 맹호은 호주 선교사가 창원읍교회(지금의 창원교회)와 양곡교회. 신풍교회 등3처 교회를 맡아 시무할 교역자로 경화교회의 배정주 장로를 청원했다. 강상은 목사는1930년10월 당회를 열어 배 장로를3처 교회 전도사로 파송 했다. 한편, 이 무렵 강 목사는 아내 김순이 사모를 먼저 천국에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1932년1월7세 연하의 吳命守(오명수)사모와 재혼했다. 1933년에는 교회건축의 해로 정하고3월 기공예배를 드렸다. 강 목사는 건축이 무난히 진행될 수 있도록 기도운동에도 불을 지폈다. 성도들은 밤마다 모여 건축을 위해 기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초공사가 끝나고 점점 웅장한 골격을 드러낼 무렵 일본 경찰이 방해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강 목사를 소환해 무슨 돈으로 교회를 짓느냐고 조사하며 방해할 구실을 찾았다. 전 교인들의 재산을 다 팔아도 공사비를 다 댈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돈을 대느냐며 심문했다. 당시 진해에서는 군항사령부나 관공서, 학교 등이 반듯한 큰 건물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허름한 초가집들 사이에 크고 반듯하게 모양을 갖춰 나가는 교회 건물은 일제의 비위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배당은 비록 단층 콘크리트 건물이었지만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강 목사는 자신 있게 말했다.“돈이 있어서 예배당을 짓는 게 아니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대로 시작한 성전 공사요. 당신들이 걱정 안 해도 우리 하나님은 부자니까 끝까지 지어주실 것을 믿습니다.”결국 경찰은 더 이상 빌미를 잡지 못하고 강 목사를 내보냈다. 그 후 공사는 한동안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막바지에 시험이 왔다. 공사비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해 중단될 위기를 맞았다. 전 교인들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고, 장로들은 이웃의 여러 교회들과 교인들을 방문하며 수저를 팔기도 했다. 장로들이 체면도 벗어던진 채 도움을 호소하며 행상을 한 결과 이웃의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감동을 받고 수저를 팔아 주거나 덤으로 연보를 해 주었다.1933년11월 경 준공했지만 그래도 공사비를 완불하지 못해 예배당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주일마다 공사업자들이 공사비 청산을 요구하며 예배당 입구를 가로막고 방해를 했다. 강 목사는 교인들과 눈물로 기도하며 부산 항서교회에 시무하던 김길창 목사를 강사로 청빙해 부흥사경회를 열었다. 김 목사는“하나님의 교회 빚은 갚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온전한 헌신에 대해 말씀을 전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건축헌금을 작정 했다. 대부분 가진 재산을 다 내놓을 정도로 힘써 헌금을 했다. 심지어 빚을 내어 헌금하는 성도도 있었다. 결국 공사비를 다 청산했다. 업자들로부터 예배당 열쇠를 건네받고1933년12월11일 감격 속에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 후32년이 지난1965년에 경화교회 제10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윤술룡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다.“각 교인들에게는 과중한 연보를 부담시켰으나 그 후2년이 못가서 사재와 전답, 가옥이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사실을 직접 경험한 교우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큰 것과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음을 새삼 느꼈다”.1934년1월16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열린 제32회 경남노회는 강상은 목사를 경화교회만 단독으로 맡아 목회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그 동안 합직했던 명동교회는 사면하고 오직 경화교회에만 전념하게 해달라고 청원한 것이었다. 새 예배당을 헌당한 후 부흥의 불길은 더욱 타오르고 있었으므로 경화교회 성도들로서는 당연한 요구였다.4.부흥강사로서의 강상은 목사
강 목사는 경남노회에서 유명한 부흥강사이기도 했다. 그가 하는 설교의 주제는 언제나 예수그리스도(기독)의 십자가와 사랑이었다. 항상 반복되는 주제의 설교여서 교인들이 식상해 할 법도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어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강 목사는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1930년 여름 진주지방 제직사경회, 9월22~26일 웅천읍교회(지금의 진해 웅천교회)에서 웅천복음전도회 사경회,11월 합천읍교회(지금의 합천교회)와 통영 대화정교회(지금의 충무교회)사경회 등을 인도했다.1931년에는 김해군 이조면 야산리교회 부흥사경회,5월 대지교회 사경회,11월 창원 갈전교회와 삼천포교회 사경회 등을 인도했다. 그 무렵 경화교회 당회에서는 강 목사에게1년3회만 외부 교회의 집회 강사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고 그 이상은 제한하도록 결의하였다.1932년에는2월에 거창지방 道(도)사경회를 인도한 것 외에는 외부에 집회를 나간 기록이 없다. 강 목사는 1933 년 1월 16일 통영군 욕지도의 동항리교회의 초청을 받아 집회를 나갔으나 당시 합직하고 있던 명동교회에서는1월28일 당회를 열어 거제군 옥포교회에 한 번 더 나가도록 허락하고 1년2회로 외부 사경회를 인도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1934년 전반기에는 경화교회 당회에서 당회장에게 들어오는 사경회 청빙건을 거절하기로 결의했다. 그 해1월 중순 명동교회 합직목사직까지 사면한 강 목사에게 오로지 경화교회에만 충실해줄 것을 바라는 분위기였다. 경화교회 성도들로서는 당연한 요구였지만 당시 신령하고 능력있는 목사가 흔치 않았기에 말씀을 갈급해 하는 농촌교회들의 요청을 강 목사는 외면하기 힘들었다.1934년9월말에 가서야 경화교회 당회는 강 목사의 외부 사경회 청빙건을 허락했다. 강 목사는 부산 사상교회 설립25주년 기념 부흥사경회의 강사로 나갈 수 있었다. 또 두 달 후11월에는 사천군 곤양교회와 김해군 진영면 사산교회의 부흥사경회 강사로 나갔다.1935년2월말에는 남해 당항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5.최덕지 전도사 초청 부흥사경회
1936년1월25일부터 나흘간 경화교회는 최덕지 전도사를 초청, 부흥사경회를 했다. 최 전도사는 강 목사와 같은 통영 출신으로11년 더 젊은 여성이었지만 각별한 사이였다.1901년 통영시 항남동에서 태어난 최덕지는 대화정교회 주일학교를 다녔고, 선교사들이 세운 진명학교와 마산 의신여학교를 거치는 동안 철저한 주의 종이 되었다. 통영에 돌아와 진명유치원 교사가 되어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통영애국부인회, 상해독립단 통영원조회 등의 여성비밀단체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강상은 목사는1920년 경 당시19세였던 최덕지를 중매한 적도 있었다. 고성 출신의 일본 도쿄 유학생 김정도를 소개해 결혼하게 했다. 그러나 남편 김정도는1924년9월 첫 딸 혜수가 백일도 채 되기 전에 장티푸스에 걸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최덕지는 재혼을 포기하고1932 년 평양여자신학교에 입학했다. 에스더처럼 교회와 민족을 구할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치기로 한 것이다. 평양여신에서 3년간 공부하고 졸업한 최 전도사는 1935년 4월부터 미순회 마산지방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1936년부터는 진주에 있는 경남여자성경학교 교사가 되어 경남 각 지역에서 모여든 여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최 전도사는 성경 자체에 대한 강의에 몰두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에 대해, 죄와 구원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기독)와 십자가에 대해,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 학생들에게 철저히 가르쳤다. 경화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은 그녀를 통해 성경의 진리르르 새삼 깨닫고 큰 은혜를 받았다.
6.일제의 핍박과 한국교회의 변절
그 무렵 일제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닌 국민의례로 인식하고 행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신사참배는 명백히 우상숭배 행위였으므로 한국교회가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자 일제는 경찰력을 동원해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 온갖 압박을 가하며 회유하기 시작했다. 진해의 대표적인 교회였던 경화교회도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경찰은 강 목사를 괴롭히며 신사참배 의식을 하라고 강요했다. 강 목사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형사들은 장로들을 찾아다니며 괴롭혔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과 성도들에게도 사회적인 불이익을 주며 박해를 일삼았다. 견디지 못해 흔들리기 시작한 일부 교인들은 오히려 타협하지 않는 강 목사를 원망하기도 했다. 결국 강상은 목사는1937년12월26일 경화교회를 사임했다. 일제의 끊임없는 핍박 속에서도 갈팡질팡하는 성도들을 올바로 가르치며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었지만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핍박을 원치 않는 장로들조차 원망하는 분위기에서 강 목사는 조용히 물러났다. 곧바로 그는 함안군 칠원읍교회(지금의 칠원교회)와 함안읍교회의 합직목사로 부임했다. 뿐만 아니라 가야교회(말산교회, 지금은 함안제일교회)와 중리교회 등 함안군과 창원군에 있는28개ㅐ 농촌교회의 당회장도 맡았다. 이제 조용한 시골교회들을 순회하며 신앙의 지조를 지킬 셈이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경찰이 그를 찾아와 신사참배를 노회적으로 가결하는데 앞장서 달라고 강요했다. 그 후 일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강 목사에게도 환난과 핍박이 닥쳤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양떼들까지 핍박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견디다 못한 일부 성도들은 시험에 들고 말았다. 총회가 국민의례로 규정하고 결의까지 한 사항을 굳이 우상숭배라고 우겨야 할 필요가 있느냐며 강 목사에게 사임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강 목사는 하는 수 없이1939년10월30일 칠원읍교회와 함안읍교회를 사임했다. 아울러 함안. 창원지역 농촌교회들의 당회장 직도 사임했다.
7.가정제단
이제 갈 곳이 없었다. 오라고 하는 교회가 있다고 해도 동방요배와 신사참배에 대한 시국인식을 하지 않으면 부임할 수가 없었다. 기거할 거처가 없었고, 가족들의 생계도 막연했다. 자녀들은 모두2남2녀가 있었다. 첫 번째 아내가 천국 가기 전 낳았던 아들 성도와 딸 성애가 있었고, 재혼한 오명수 사모와의 사이에서도 셋째 딸 영애와 막내아들 영도가 태어났다.
다행히 통영 대화정교회에서 청년시절 함께 신앙생활했던 후배 최남국 집사의 도움으로 마산 교방동10번지에 거처와 농토를 마련할 수 있었다. 최남국 집사는 대화정교회에 계속 다니며 마산 상남동에 넓은 임야를 사서 영생목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거제도에도 어장을 갖고 있을 정도로 몹시 부유한 편이었다. 강 목사는 이제부터 농업을 호구지책을 삼기로 하고1940년1월 가족들을 이끌고 마산으로 이사했다. 그러면서도 예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에서 은밀히 매일 예배를 드렸다. 뜻을 같이 하는 성도들이 그의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실 교회들은 예배 때마다 국민의례라는 미명으로 신사참배는 물론 궁성요배까지 하고 있었으므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변질된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일제는 그의 가정제단까지 찾아와 핍박을 가했다. 1940년11월16일 강 목사는 마산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근는 감옥에서도 하루 네 차례씩 시간을 정해 예배드렸다.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배드렸던 것을 본받았는데, 강 목사는 한번을 더 했다. 오전11시와 오후3시, 그리고 새벽과 저녁예배까지 하루 네 번 예배를 드렸다. 다니엘이 정오에 드렸던 예배를 강 목사는1시간 앞당겨 오전11시에 드렸는데, 그 이유는 그 시간에 일제가 강요하는 순국령의 묵도를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가 부산 경남도경에 구속된 최덕지 전도사도 이처럼 하루 네 차례 예배를 매일 드리고 있었다. 밖에서 초야에 은둔하고 있던 성도들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국교회를 위해, 수난당하는 성도들을 위해 똑같이 네 차례의 예배를 매일 드렸다. 강 목사는 옥중에서 금식을 오래 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에 이르자 경찰이 가석방했다. 집으로 돌아온 강 목사는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다시 가정제단을 쌓았다. 숨은 성도들과 매일 은밀히 네 번씩 예배를 드렸다. 양봉과 농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 때 그가 터득한 목회철학은 목회자가 교회의 사례금에만 의존하지 말고 부업을 하면서 자립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시 일제가 강 목사의 집을 감시하며 괴롭혀1943년6월2일 캄캄한 밤을 틈타 석전동152번지로 이사했다. 그리고 아홉 마지기의 논과6천6백여 m의 밭을 사서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일제의 핍박속에서 견뎌나가기로 했다. 그나마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마련하라 수 있었는데, 그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함께 가정제단에 모여 예배드리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노동의 터전이 되었고, 거기서 나는 소산물로 그들의 모든 권속들까지 나눠 먹었다. 당시 그의 가정제단에 동참하고 있었던 성도는 임명순, 이두악, 류미시, 김유선 등으로 그들의 어린 자녀들까지 포함하면 무려27명에 달했다. 가아 목사는 장정 다섯 명에게 일을 시키면 식사시간에는 그들의 식솔들까지 모두 오게 했다. 그러면 삼사십 명 정도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인자한 강 목사와 너그럽고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오명수 사모의 성품을 잘 아는 일꾼들은 눈치 볼 필요 없이 맘 놓고 배불리 먹곤 했다. 강 목사는 형사들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의 상남동 영생목장으로 피신하거나 거기도 안전하지 못할 때는 거제도까지 갔다. 강 목사는 최 집사의 거제도 어장에서 한동안 일을 도우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거제에 있는 동안 김홍조 장로(김영삼 대통령의 선친)와 박남식 장로(재건중부교회 박성도 목사 선친)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二(이).해방 후 강상은 목사와 재건교회
1.최덕지 전도사의 노선
1945년8월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으르 선언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식민지 ?대를 종식했다. 이틀 후8월17일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됐던 성도들이 전국의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 중에서도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하는 성도가 가장 많았다. 최덕지 전도사도 평양형무소에서 마지막 수감 생활을 하다가 출옥했다. 그 날 그녀와 함께 평양형무소를 출옥한 성도는 고흥봉 목사, 김린희 전도사, 김형락 영수, 김화준 전도사, 박신근 집사, 방계성 전도사, 서정환 전도사, 손명복 전도사, 안이숙 선생, 양대록 집사, 오윤선 장로, 이광록 집사, 이기선 목사, 이인제 전도사, 이현속 전도사, 장두희 집사, 조수옥 전도사, 주남선 목사, 채정민 목사, 한상동 목사 등이었다. 평양형무소를 나온20여 명의 성도들은 바로 흩어지지 않고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시무했던 산정현교회에서2개월 동안 함께 지내며 한국교회의 재건에 관해 논의했다. 그 결과 그 해9월20일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한 기본원칙이 나왔다. 그러나 최덕지 전도사는 대부분의 출옥성도들이 기존 교계에 들어가 재건운동을 하려고 하는 움직임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 그녀가 본 한국교회는 전부 사탄의 회로 화했고, 지도자들은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먼저 구분부터 하고 죄악을 경책하여 양떼의 생명을 구하자고 했다. 즉,“밖에서 불러내자”는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한상동 목사는 “안에 들어가 건지자”였다. 한 목사는 이제 자신들이 들어가면 저들은 물러가고 말 것이니 안에 들어가서 가르쳐 주고 회개케 해서 상처를 싸매 주자고 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갈라서고 말았다. 최덕지 전도사는1945년12월 부산에 내려왔다. 이듬해1946년2월 부산시 동구 수정동 전상옥의 집에서 박부준, 박열순, 조복희 장로들과 하수봉, 유사덕, 강선희, 정봉기 집사들이 함께 한 가운데 부산재건교회 설립예배를 드렸다.
2.마산재건교회의 설립
강상은 목사는 해방 후에도 가정제단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영적으로 간음당한 현실 교회로 돌아가지 않은 채 신앙의 절개를 지킨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재건할 생각이었다. 해방될 때까지 함께 했던 성도는 송신상, 황건엽, 이아자, 진은천 등 네댓 가정으로 강 목사의 집에서 매일 네 번 예배를 드리며 나라와 교회재건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다. 강 목사는 들에서 일하다가도 오전11시와 오후3시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예배를 드렸다. 논에서 모내기를 하든 추수르르 하든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해도 시간이 되면 일꾼들을 빙 둘러 세우거나 앉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다. 강 목사의 가정제단에 대한 소문이 두루 퍼지면서 기성교회 성도들이 점점 찾아오기 시작했다. 진정한 회개와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교회지도자들에게 실망한 그들은 강 목사의 순결한 가정제단을 통해 교회 재건의 꿈을 나눴다. 그러나 자꾸만 늘어나는 성도들 때문에 제2재건제단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강 목사는 1946년11월22일 오후7시 마산시 회원동340번지 丁又順(정우순)의 집에서 모두18명의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제2재건재단 설립예배를 인도했다. 마산재건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1946년7월 하순 강 목사는 부산으로 가서 최덕지 전도사를 만나 교회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강상은 목사는 최덕지 전도사의 재건노선에 공감을 표시한 유일한 목사였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진정한 교회재건의 뜻을 알리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집회를 하기로 했다. 우선 가까운 경남지방부터 순회를 시작했는데, 출옥성도 이광록 집사도 합류했다. 1946년 12월 진해 하구교회(현재 재건자은교회)에서 첫 부흥사경회가 열렸다. 하구교회는 강 목사가 경화교회에서 목회할 때 분립한 교회였다. 1937년1월 하구기도소로 분립됐으나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경화교회와 강제통합됐다. 일본 군함을 만드는데 헌납한다며 교회의 종과 모든 재산도 빼앗겼다. 1945년8월15일 해방 후 하구교회는 다시 복구되어 이용실 전도사가 사역하고 있었다. 이 전도사와 함께 이성출 장로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 다 경화교회 시절 강 목사로부터 은혜를 받고 섬겼던 신실한 주의 종들이었다. 강 목사와 최 전도사가 번갈아가며 인도하는 부흥사경회에서 하구교회 성도들은 큰 은혜를 받았고, 결국 두 사람이 이끄는 재건노선에 합류하기로 했다.1947년1월에는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교회와 함안면 강명리교회에서,2월에는 김해군 진례면 담안리 담안교회에서, 또 3월말에는 다시 진해로 돌아와 집회를 계속하는 동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조용술, 조용화, 박또식, 조광제, 최종규, 염애나, 주상수 등의 성도들이 회개자복하고 교회재건에 뜻을 같이 하기로 한 것이다. 1947년4월18일부터1주일간 마산 제2재건제단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정학진을 비롯해 수많은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고 재건교회의 노선에 합류했다. 마산 제2재건제단은 점점 부흥의 불길이 타올라 부득이 넓은 장소로 이전해야만 했다. 마산시 교원동 30번지에330m의 부지와 건물2개 동을 매입, 수리해1947년7월 이전했다. 그후4개월이 지난 1947년11월10일 강 목사는 석전동 자택의 제1재건제단을 교원동의 제2재건제단으로 합쳤다. 석전동 제단에서 오명수 사모를 비롯해 임명순, 이두악, 류미시, 김유선 등의 성도들과 그 가족들이 교원동 제단으로 오면서2만8천492환25전을 성전부지 헌금으로 바쳤다. 제1. 2재건제단이 하나가 되어 강상은 목사를 초대 담임목사로 추대했다.
3.재건교회의 조직과 체계
강상은 목사와 최덕지 전도사가 경남을 중심으로 전국을 다니며 집회를 계속하는 동안50여 개 교회가 흔쾌히 노선을 같이 하기로 해 하루 빨리 교단으로서의 조직과 체계가 필요했다. 강상은 목사의 어깨는 누구보다도 무거웠다. 그는 재건노선에서 유일한 목사였다. 기성교회들에 비해 목회자 기근도 심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성도 수도 절대적으로 열세였다.1948년 2월18일 경남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 대변교회에서 처음으로 재건교회 지도자들이 모였다. 이날30여 개 교회50여 명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강상은 목사를 선출했다. 그 밖에 부회장 최덕지, 서기 주상수, 부서기 최종규, 회계 장봉기, 부회계 민귀부 등을 선출했다. 이들은 수적 열세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표어를 내걸고 3대주의5대강령을 정했다.3대주의:
(1)여호와께만 충성하자.
(2)철두철미 회개하자.
(3)깨끗한 성전을 지어 바치자.
5대강령:
(1)대한교회는 완전 재건하자.
(2)마귀당은 일절 버리자.
(3)불의와 위선에는 다 절교하자,
(4)우상은 일절 타파하자.
(5)너도나도 재건 운동자가 되자.
5대강령 중 두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마귀당’은 재건교단에 합류하지 않은 기성교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로 더렵혀진 제단은 사탄의 회로 화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으니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존 교회에 있는 자들을 밖으로 불러내 진정 재건한 교회를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렇지 안하으면 기성교회 교인들과 절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같은 가르침에 따라 재건교인들은 부모 형제자매나 가까운 친지라도 재건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다니면 냉정하게 정을 끊어야만 했다. 만일 교회의 허락 없이‘마귀당’사람들과 교제하거나 경조사에 참석하기라도 해 그 사실이 알려지면 책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재건교인들은 출세지향적인 자나 가진 자들이 적고 대체로 가난했다. 양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워 늘 정체된 소수교단으로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이 같은 폐쇄적인 교리 때문에 이단시 당하기 일쑤였다. 초창기 재건교회의 노선이 너무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배타적인데 대해 일부에서 반발도 없지 않았다. 북한에서 재건운동을 하다가 월남한 김창인 전도사는1949년 경 남한재건교회에 가입했으나3년만에 탈퇴하고 말았다. 김 전도사는6. 25전쟁으로 부산에 내려와1952년6월30일 동일교회를 설립하면서 고신교단으로 옮겨 갔다. 그는 한국교회를 마귀당이라 할 수 없고, 설령 우상숭배로 더럽혀졌다 할지라도 수리해서 사용하면 되는 것이며, 성경에도 마귀당이라는 말이 없으므로 들어가서 외치겠다고 했다. 재건교단으로서는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부터 그는 탁월한 설교자요, 부흥사였고, 목소리가 좋아 찬송가도 잘 불렀다. 1953년 전쟁이 끝날 무렵 서울로 올라간 그는 충무로에 충현교회를 설립했다. 1956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안수는 합동측 경인노회에서 받은 그는 충현교회를 국내 최대 규모의 교회 중 하나로 부흥시켰다.
4,여성안수와 교단분열
강상은 목사는 자신과 함께 쌍두마차 역할을 하며 재건교회를 이끌고 있던 최덕지 전도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안타까웠다. 평양여자신학교를 나왔고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는 말씀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고 있었으므로 목사가 되고도 충분히 남을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온몸으로 맞서 싸워 신앙의 절개를 지킨 여장부가 아닌가. 강 목사는 1951년4월3일 예수교재건교회 중앙위원회제6회 정기총회에서 최덕지 전도사에게 명예목사 직을 허락했다. 현실적으로 헌법이 허락하지 않아 여성에게 안수할 수 없어서 잠정적으로 붙인 직분이었다. 이듬해1952년5월13일 중앙위원회를 해체하고 예수교재건교회 남한지방회를 발족하면서 강상은 목사가 헌법을 개정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이에 강 목사는 최덕지 한 사람에게만 특혜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여성들에게 남성과 똑같이 직분을 주고 안수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다며 헌법 개정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최덕지 전도사도 같은 말로 옹호 했다. 그녀는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보다 더 위대하다든지, 여자가 남자의 시중만 들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잘못된 관념이라며,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같은 수준에서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 결국 여성도 성직(목사. 장로)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짓고 강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헌법수정위원회를 구성했다. 헌법기초위원으로는 최덕지, 김영숙, 주상수, 최일구, 최종규, 박성규 등이 위촉을 받았다. 1954년3월9일 재건부산교회에서 열린 예수교재건교회 남한지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여성안부를 허락하는 개정헌법이 통과됐다. 그러자 여권반대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반대세력 중 가장 주도적인 인물은 주상수 목사였다.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는 그는 막상 헌법개정이 이뤄지자 앞장서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여성안수를 허락한 바로 그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사실상 남한재건교회의 두 번째 목사가 되었던 그는 훌륭한 동역자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강 목사에게 배신자가 된셈이었다. 강 목사는1954년9월2일 주상수 목사를 서면교회 목사직에서 파면하고 제명했다. 그 밖에도 주순애, 최일구, 이성출, 이용실, 홍순숙, 박길성 등으르 전도사직에서 파면했다. 이 같은 무더기 파면과 제명처분을 재건교회 남한지방회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이른바 여권파와 여권반대파로 나눠진 것이다.
5.재건신학교 설립
강 목사는 초창기 재건교회으 유일한 목사로서 좋든 싫든 교단을 이끌어 나가야 할 입장이었고, 목회자 양성도 절실한 과제였다. 1951년9월 마산재건교회에서 예수교재건신학교를 개교하고 강 목사는 교장으로 취임했다. 교수진 역시 기근이 심한 소수교단의 신학교로서 강 목사 혼자 모든 과목을 다 가르쳤다. 각 교회의 남자 조사(전도사)들이 우선 입학했다. 마산교회당은 새로 짓고 있는 중이어서 강 목사의 자택이 곧 강의실이었다. 학생수도10명 미만으로 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먼 지방의 학생들은 통신으로 과제물을 주고받기도 했다. 가끔 모여 수업할 때는 강 목사의 집이 그들의 기숙사가 되었다. 강 목사의 집에는 오명수 사모와 외동아들영도, 이렇게 세 식구밖에 없었다. 큰아들 성도는 해방직후1946년10월26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강 목사는 방마다 군불을 때 신학생들을 재웠다. 오명수 사모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부지런히 밥을 짓고 반찬을 마련해 신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강 목사의 집에는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많은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부인이 찬이 없어 걱정이라도 하면 강 목사는 이렇게 웃으며 대꾸하곤 했다.“허허, 국솥에 물몇 바가지 더 부으면 될 것 아니오. 넉넉하게 끓여요.”사모는 항상 여유있고 너그러운 남편을 닮아 조용히 순종하며 손님들을 대접했다. 1956년8월7일 새로 지은 마산재건교회당 헌당식과 겸해 제1회 재건 신학교 졸업식이 거행됐다. 졸업생은 단 한 명으로 최종규였다. 개교 초기 입학해5년간 꾸준히 공부했던 그는 이미 해방 전 도쿄에 유학까지 했던 엘리트였다. 입정대학 고등사범대 역사지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해방 후 마산여고와 마산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재건신학교에 입학했다. 1947년 최덕지 전도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고 교직을 버린 것이다.
6.첫 여성목사 탄생
1955년5월4일, 재건부산교회에서 열린 남한지방회 제4회 정기총회 사흘째 날 밤 총회장 강상은 목사의 집례로 첫 여성목사 안수식이 거행됐다. 최덕지 전도사를 비롯해 김영숙, 김소갑숙 등 모두 세 명의 여성이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맨 앞자리에 앉았다. 강 목사는 먼저 베드로 전서2장8~10절을 읽고‘만세전 하나님의 경영이 이뤄진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세 여성들을 강단에 올라오게 했다. 드디어 그들의 비녀 꽂힌 머리에 안수하고 축복했다. 이어서 강 목사는 또 한 구절의 말씀으르 찾아 읽고 권면했다.“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딤전3:1~2).남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강 목사는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으로 주지시켰다. 여성목사 안수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부산교회 목사위임식이 이어졌다. 총회 장소가 바로 최덕지 목사가 시무하는 재건부산교회였다. 최 목사는 부산교회 성도들과 전국의 총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담임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그러나 최 목사는 안수를 받은 지1년만인 1956년5월13일 만55세의 일기로 소천했다.
7.강상은 목사의 목회와 사상
강상은 목사는 마산재건교회를 목회하면서 여성장로로 세웠다. 1956년8월8일 네 사람의 장로를 세웠는데, 그 중 두 사람이 여성이었다. 김야모, 김수연을 첫 여성장로로 안수했다. 보수 성향을 가진 다른 주류 장로교단들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고려( 고신)파가 그랬고, 합동과 통합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기장 총회가 이 무렵 여성장로제도를 도입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강 목사는‘신앙은 보수, 정치는 진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조금도 거침없이 여성목사와 여성장로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교리를 범하는 성도들에게는 엄격하게 치리했다. 주일성수를 어기거나 가정 불화로 인한 개인윤리문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시비를 해도 당연히 책벌의 대상이었다. 여성들이 파마를 하는 것도 반대했다. 또 여권을 반대하는 형제나 가족과 절교하지 못하는 교우도 징계의 대상이었으며, 다른 교파나 교단의 교인들과 교제하는 것도 마귀당과 타협하는 것이라 하여 무기책벌했다. 그래도 반성하지 않으면 다시 기간을 연장했다. 그러나 끝까지 반성의 빛도 없고 죄를 범하면 제명처분했다. 강 목사는 심지어 해병대에 입대한 자신의 아들이 주일도 근무하고 훈련을 하게 되자 치리를 했다. 강영도 집사를 집사직에서 파면하고 강 목사 자신은 1개월 간 근신을 자청, 강단에 올라가는 것을 자제했다. 주일을 엄격히 지켰는데, 둘째 딸 영애가 마산여고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주일날 시험을 실시해 대신 거리가 다소 먼 이웃도시에 있는 진해여고로 보냈다. 논에 물을 댈 순서가 주일날 돌아오면 논바닥이 갈라져도 물을 대러 나가지 않았다. 또 주일날 한전에 일을 시킨다고 하여 예배당에 전기불을 켜지 않았다. 대신 호롱불이나 남포등을 켜고 예배르르 드렸다. 뿐만 아니라 수돗물은 주일에 받지 못하게 했으며, 토요일 미리 충분한 양의 물을 받아놓고 쓸 수 있게 했다. 편지는 토요일을 피해 부치도록 했는데, 주일나라 우체국 직원에게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강 목사는 추석과 설 등의 명절에는 아예3일 정도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간으로 삼았다. 우리 민족이 조상신을 섬기며 각종 우상숭배 행위를 하는 날이라 전 재건교회 차원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표어로 만들어 동네 어귀마다 붙이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금식기도를 하게 했다. 어린이들도 최소한 하루 금식하게 했다. 이웃이나 친지들이 제공하는 음식도 함부로 먹지 않는 았다 우상에게 바친 제사 음식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교인들은 명절을 앞둔 대목에 가게를 아예 닫았다. 우상에게 바쳐질 음식이나 물건을 팔게 된다고 하여 장사를 하지 않는 도록 한 것이다. 결혼식의 예단은 예식에 입을 옷과 남자는 작업복, 여자는 부엌에서 입을 옷 등 이렇게 두 벌 옷을 준비하고, 그 외는 하지 못하게 했다. 신랑은 신부에게 결혼선물로 성경을, 신부는 호적초본을 준비해 바로 그 이튿날 혼인신고를 하도록 했다. 결혼한 날 저녁에 바로 시집으로 신행을 가게 했는데, 사나흘씩 신부의 집에서 잔치로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아울러 국산품 애용과 절제를 권장했다. 강 목사는 외국의 구제품을 받거나 수입품을 사서 쓰는 것은 우리 강산을 외세에 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교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구제품도 마찬 가지였다. 신앙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배에 나올 때 성도의 의복은 마땅히 국산품으로 하되 여자들은 파마머리를 하거나 비로드 치마를 입어서는 안 되었다. 종교가 시대의 사조를 따라가면 세속화될 우려가 있다고 금기시했다. 사회법정에 소송하는 행위를 절대 반대했고, 오직 사랑으로 양보하여 시비를 해결하도록 했다. 남해교회에서 여권파와 여권반대파간에 싸움이 벌어져 여권파의 부인이 폭력을 당해 임신한 태아가 사망한 적이 있었다. 남편되는 장로가 피의자를 고소했으나 강 목사는 극구 말려 소송을 취하하게 했고, 교회당도 여권반대파에게 내어주고 빈손으로 물러나오게 했다. 후배 목회자들에게는 교회의 사례금에만 의존하지 말고 부업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대부분 교인이 많지 않은 재건교회의 특성상 교역자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강 목사가 일제시대 교회를 사면한 후 농사를 지으면서 터득한 목회철학으로 해방 후 마산재건교회를 시무하면서도 농업을 계속 했다. 뿐만 아니라 양봉도 해 상당한 소득을 올렸다. 전답이 없는 가난한 교역자들에게 특히 양봉을 권장했다. 신종구, 김인술, 박또석, 박길성, 김창효, 최달석, 박성도 등의 목사들이 양봉 전문가가 된 강목사에게서 배워 설교준비와 심방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틈틈이 벌통을 돌아보고 얻은 꿀을 팔아 생계를 해결해 나갔다.
8.최종규 목사의 개혁
1964년4월11일 강상은 목사는 마산재건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최종규 목사를 세웠다. 당시 강 목사의 나이74세로 정년은퇴제도가 아직 없었지만 후배 제자에게 이제 물려줄 때라고 생각하고 용단을 내렸다. 그 동안 강 목사는 재건교단 총회장직과 재단법인 이사장, 재건신학교 교장과 이사장, 총회 공천부장 등 너무 많은 일을 혼자서 줄곧 감당해왔다. 새로 부임한 최종규 목사는 우선 설교부터가 강 목사의 방식과 너무 달랐다. 강 목사의 설교는 오로지 성경만 거듭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영감을 받은대로 해석하고 증거하는 식이었고, 어떤 본문을 택하든 주제는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사랑이었다. 이에 비해 최 목사는 포괄적인 지식과 적절한 예화를 동원해가며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었으므로 교인들의 귀에는 신선하고 솔깃했다. 강 목사는 최 목사가 나름대로 회중들을 사로잡으며 은혜를 끼치는 것이 싫지 않는 았다. 그러나 최 목사가 급격한 개혁을 시도하는데 대해서는 원로목사로서 용납하기 힘들었다. 최 목사는 주일 저녁예배 때 전등을 켜 환하게 밝히는 등 그 동안 금기시해왔던 여러 가지 관습과 제도에 대해 교회 성장의 걸림돌로 지적하면서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다. 대부분 환영했지만 강 목사의 보수적인 성향을 지지하는 이룹 성도들과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배 도중 최 목사를 끌어 내리려고 했고, 이를 막는 성도들과 싸움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결국 강상은 목사는 1967년3월19일 오전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고 마산재건교회를 떠났다.20년 동안 혼자서 맡아왔던 재건교단 총회장직도 1966년10월4일제25회 총회에서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다. 최종규 목사를 반대하며 따라나온 성도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가정제단을 쌓았다. 1967년12월5일 자택이 위치한 동네의 이름을 따 재건회원교회로 명명하고 강 목사는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9.두번째 분열
그 후 재건교단은 또 한번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교단의 중심교회라고 할 수 있는 마산재건교회의 최종규 목사가 선도하는 개혁적인 방식을 지지하는 측과 강상은 목사를 지지하는 측으로 나눠진 것이다. 그 동안 억눌려 있던 교인들에게 최종규 목사의 과감한 개혁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강 목사를 지지하는 일부 교회와 서옫들은 재건정신의 퇴색과 현실교회화를 우려하며 대립하다 뛰쳐나왔다. 1969년9월 보수파들은 강상은 목사가2년 전 설립한 회원교회에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중부지방회(노회)를 창립했다. 기존의 재건교단과 선을 긋고 강 목사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재건정신을 지켜 나가기로 했다. 1956년 여권반대파와 처음 갈라진 후13년 만에 두 번째 분열이었다. 이 무렵 강 목사는 노환으로 사위인 김창효 목사에게 한 달 전부터 회원교회를 맡기고 병석에 누워 있었다. 중부지방회장으로는 여성으로서 안수를 받은 염애나 목사(창원교회)를 선출했으며, 그 밖에 김창효 목사(회원교회),박길성 목사(함안 외암교회),박또석 목사(함안읍교회),김인술 목사. 이술연 장로. 이선옥 집사(이상 상평교회), 김덕생 목사. 심명헌 집사(이상 광주교회),정영애 장로. 정태열 집사(이상 이반성교회),김동한 장로(부산진교회),전병쾌 조사. 손 장로(이상 함안 중앙교회),손용순(덕산교회),남선일 장로(가술교회),박남식장로(이수도교회)등이 함께 했다.
10.강상은 목사의 소천과 재건교회의 변화
1972년10월24일 밤 강상은 목사는 소천했다. 그의 장례는10월26일 중부지방회장으로 치러졌다. 전국에서 그를 기억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마산으로 달려와 조문했다. 고인은 자칫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될까봐 평소 평토장을 주장한 대로 봉분 없는 무덤에 묻혔다. 강 목사는 소천하기 전 자신의 제자였던 최종규 목사의 위문을 받고 화해를 했다. 최 목사는 교단 분열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사과했고, 강 목사는 재건정신의 회복과 교단의 화합을 부탁했다. 강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만1년이 지난1973년10월25일 최종규 목사가 주도하는 재건교회 총회는 여권반대파와 합동을 위한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1974년7월2일 여권반대파와 역사적인 통합을 했다. 1956년 강상은 목사가 주도하던 재건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여권반대파는1958년 12월2일 역시 여성의 성직을 반대하던 북한재건교회와 합동을 해 그 사이 만만찮은 교세로 성장한 상태였다. 여권반대파는 교회40여 개처, 목사15명, 전도사 20여 명, 장로30여 명, 교인5천 명이었다. 여권파는 교회50여 개처, 목사18명, 전도사20명, 장로40여 명, 집사400여 명, 세례교인7천 명, 교인 약 1만 명으로 양측을 합하니 전체 교인이 1만5천여명에 달했다. 여권파는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많은 교회가 있어‘재건부산노회’로 여권반대파는 서울에 교회가 많아‘재건서울노회’로 부르기로 해2개의 노회를 가진 총회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강상은 목사가 만년에 설립한 재건 중부지방회와의 합동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가서야 달성됐다.1990년대 들어 보수파 원로들이 물러나거나 소천하면서 중부지방회 소속의 일부 교회들이 재건교단 총회의 지역노회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중부지방회의 탄생을 촉발시켰던 회원교회는1974년 회성동에 회성분교회로 세웠다가1990년3월 통합해서 재건중부교회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했다. 재건중부교회는 마지막까지 독립교단 성격의 재건중부노회로 잔류하고 있다가1996년2월26일 강상은 목사의 전기[나는 이편에 서리라]는 책의 출판기념예배를 계기로 재건교단 총회에 복귀했다. 故(고)강상은 목사의 아들 강영도 장로가 재건중부교회를 출석하는데 예배당이 크지 않아 마산재건교회에서 출판기념예배를 드렸다. 마산재건교회는 강 장로 가족이 선친과 함께 거의30년 전 떠났던 모교회로 그 동안 줄곧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강 목사의 뜻을 기리는 행사를 함께 함으로써 화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완전한 교단 통합을 달성하게 되었다.
맺는 말
오늘날 재건교회는 많이 달라졌다. 한 마디로 격세지감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활짝 열려 있다. 뒤를 돌아볼 때 초창기 선배들의 신앙은 극단적인 율법주의로 비판될 수도 있지만 오직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겠다는 그 정신만큼은 결코 평가 절하될 수는 없다. 강상은 목사는 오직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던 고독한 믿음의 의인이었다. 그의 재건정신은 재건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흐트러진 자세를 추스르게 하는 거울인 것이다.
표시할 내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