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3.지식의 위치
III. 지식의 위치
지식에는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지식 둘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 두 지식의 위치, 이 두 지식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두 지식의 원래 위치를 말한다면 하나님지식은 없는 가운데 천지를 창조한 창조의 말씀이다. 인간지식은 영원히 지옥을 이루는 지식이다. 따라서 비교할 가치도 없다. 논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두지식을 받아들일 인간이다. 인간은 어두워져 황금뭉치와 똥뭉치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두 지식의 위치가 "어떻게 되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1.하나님지식은 주격, 인간지식은 소유격이다.
지식의 속성에서 우리는 하나님지식은 진리의 산지식이요 인간지식은 거짓의 죽은지식임을 보았다. 하나님지식은 하나님께로 나와서 인간을 구원하는 지식이요, 인간지식은 죽은 악령이 죽은 인간에게 넣어줘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지식임을 보았다. 그러면 산지식과 죽은 지식의 위치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말할 것 없이 산 것은 우리를 살릴 것이니 주격이 되어져야 할 것이요 죽은 것은 우리를 죽일 것이니 대적하고 이를 배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적하고 배격해야 할 인간지식은 그 용도에 따라서 이용가치는 있을 수 있다. 하나님지식 자체에는 전혀 상관없는데 타락한 우리 인간의 범위에서는 이 인간지식이 이용의 가치를 가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이 주격이 되고 인간지식이 소유격이 되어질 때 비로소 인간지식은 타락한 인간에게 이 하나님 떠나 인간지식의 어두움에 묻혀 있는 이 범위에서는 주종의 관계가 바로 된 인간지식은 이용의 가치가 있게 된다.
2.두 지식의 바른 위치(正置) :
1)생명과 죽음의 관계
생명 가진 산 사람이 생명 없는 죽은 고기와 삶아놓은 밥을 먹는다. 이 고기는 도살장에서 소를 죽여서 정육점으로 나누어 판 것이다. 또 벼를 탈곡해서 이제 밥을 했으니 완전히 생명 없는 것이 되었다. 생명 없는 고기와 밥을 살아있는 사람이 먹으니까 생명 없는 이 음식들이 생명에게 삼켜져서 생명의 것이 된다. 생명에게 삼켜진 이 음식은 생명에게 잘게 씹혀져서 분해가 되어지고 이어서 생명에게 녹아져 들어간다. 생명은 생명 없는 이 음식을 받아들여 생명의 힘과 생명의 활동과 생명의 성장으로 삼는다. 죽은 것이 죽은 그대로 있으면 점점 더 썩어지고 더 부패해져서 죽음의 모양과 죽음의 힘이 더 커지게 된다.
2)세상을 보존하시는 목적
이것이 하나님과 끊어진 세상이다. 인간이 범죄하므로 모든 것은 다 죽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죽은 세상을 보존하시고 계신다. 그 뿐아니라 택한 백성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이 죽은 세상을, 생명 없는 세상을 현실로 주셔서 이 현실을 떠나지 않고 현실 안에서 살아가도록 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죽은 세상, 생명 없는 세상이지만 이것이 생명 가진 성도에게 잡아먹혀서 이용이 되어지면 생명 없는 이것이 생명 가진 성도에게 보배롭고 요긴한 음식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밥이다.(민14:9) 영원히 살 천국과 지옥을 두시고 그 영원 세계를 본향으로 찾아가는 "나그네와 행인같은" 우리에게 (벧전2:11) 하루밤 같은 짧은 세상 기간에서 영원을 준비하고 영원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3)생명과 사망의 투쟁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생명으로만 되어져 세상이 곧 천국이었다. 다른 마찰과 오해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에덴동산의 장소는 세상에 있었으나 그 형편은 천국이었으니 지상낙원이라고 이름을 지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한 뒤에는 세상이 달라졌다. 범죄한 사람이 죽었고 세상은 악령의 세계가 되어졌다. 세상에는 생명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과 완전히 연결이 끊어진 세상에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예택 했던 당신의 백성 우리를 이 죽은 세상 가운데서 다시 살리려고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죽은 것과 산 것 둘 사이에는 필연적인 투쟁이 있게 되었다. 무슨 투쟁인가? 생명없는 세상에 생명의 역사가 활동을 하기 시작하니 죽은 세상은 이 생명을 죽이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이 생명은 죽은 세상에 잡혀 죽어있는 택자를 살리려고 총력을 기울인다. 또 이 생명에게 붙들려 살아난 사람들은 받아 가진 생명으로 세상을 삼켜서 이용을 하려기 때문에 투쟁과 마찰은 필연의 일인 것이다. 이것이 죽은 세상 속에 들어온 복음 역사인 것이다.
4)죽음의 이용가치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죽은 세상을 역사 세계 속에 그대로 보존해 두시고 오늘까지 이끌어 오셨는가 이유를 다시 한번 새겨보게 되는 것이다. 죽은 세상을 위해서 죽은 세상을 보존하시는 것이 아니다. 없앨 힘이 없어서 두고 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을 오히려 잘 보존하고 털끝만큼도 놓치 아니하시고 붙들어 관리하여 나오는 이유는 죽은 택자를 죽어있는 세상 가운데서 살리시고 살아난 택자에게 각각 재세(在世) 기간과 재세 형편을 주셔서 죽은 세상을 생명으로 삼키고 이용해서 생명의 힘을 얻고 생명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 생명을 자라게 하라는 것이다.
세상과의 많은 접촉과 투쟁의 과정, 경험에서 이 "생명"은 더욱 하나님과 연결이 강해지고 구비한 실력을 갖추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기간이 끝이 나면 이제 영원한 나라에서는 마찰과 투쟁의 대적은 없어진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신 것이요(약1:4) 이는 다 우리를 낯추시며 우리를 시험하사 결국 우리에게 영원한 복을 주시려고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여러가지 형편으로 인도하신다. (신8:16)
이런 많은 과정을 통과해서 세상에서 준비되어진 하나님과 연결의 양, 연결의 범위와 실력만큼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아 만물에게 충만 시키는 이 나라가 영원히 계속되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5)세상의 바른 사용
이런 영원한 소망을 미래에 둔 우리에게 생전의 세상이라는 것은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우리가 새삼 새겨야 할 것이다. 영원한 소망의 실상을 만들고 준비하는 이 기간은 오직 생전의 세상뿐이다. 만일 세상 기간이 끝나게 되면 두번의 기회는 없다. 재수는 없는 것이다. 반복은 없는 것이다. 오직 한번의 현실, 비록 살아 생전이라도 지나간 현실은 되돌이켜 다시 해 보는 일은 없다.
이러므로 성도가 현실은 한번밖에 없고 그 가치는 영원하다는 것을 바로 알고 난 다음에는 세상 어떤 것에도 하나님과의 연결을 손해볼 리가 없다. 사람이 식물을 먹고 나면 양분은 체내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찌끼가 되어 용변으로 빠져나간다. 성도에게 세상이라는 것은 먹고 버릴 "배설물"일 뿐이다. (빌3:8)
모세가 40년 지내온 바로 왕궁의 모든 것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영원한 나라에서 그대로의 갚음을 바람이었던 것이다.(히11:24-26) 모든 앞서간 선진 사도들 신앙의 선배들이 세상에 감추어져 있는 이 보화를 보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이 보화를 자기것 만드는 일에 전력을 했던 것이다. 또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조롱하고 멸시하면 감추인 보화 대신 세상을 취하여 가지는 것으로 가치를 삼고 생의 전 노력을 하여 온 것이다.
6) 결론
이것이 성도의 재세관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죽은 것이나 동시에 없어서 안될 보배롭고 귀한 선물이다. 두번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보배로운 훈련기간이다. 어머니의 모태이다. 세상은 썩은 것이다. 그러나 새생명 받은 우리에게는 생명을 더욱 새롭게 할 수 있는 보배로운 재료이다. 세상은 부패한 것이다. 그러나 새생명 받은 성도에게는 새것을 건설할 수 있는 자재들이다. 세상은 죽이는 세력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이를 삼키게 되면 오히려 죽어있는 것을 살리는데 필요한 도구가 되고 이용물이 되어진다.
모세에게 잡힌 지팡이가 손에서 놓여지면 모세를 해할 원수가 된다. 그러나 모세의 손에 잡히면 모세의 몸을 보호하고 지탱하여 수족노릇을 할 수 있는 귀한 도구가 되어진다. 세상 죽은 것이 죽은 그대로 자유하면 우리 생명을 해하는 원수가 된다.
누가 주인이 되느냐? 누가 사용의 주체가 되고 누가 왕이 되느냐? 산지식 하나님지식이 주인이 되어 인간지식을 사용하고 부려먹으면 세상은 밥이 되어 생명에 요긴한 이용물이 된다. 만일 인간지식이 주인이 되어 하나님 지식을 무시하고 눌러버리면 우리 속에 생명은 모든 기회를 다 놓쳐버리고 생명 자체는 천국에 가지만 이 생명이 갖출 실력과 이 생명이 수족같이 써먹을 모든 기회는 허비케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생명에게 붙들린 세상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명에게 붙들리지 아니한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라. 그러므로 세상 자체는 "선"이라 "악"이라 할 수 없다. 세상 물질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악으로 사용하느냐 선으로 사용하느냐 사용의 주체가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염세주의는 성경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단정을 한다. 하나님 없는 세상, 하나님 없는 물질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이라 해서 세상을 떠나 살고, 물질을 부정하고 사는 염세주의는 물질의 이용가치를 잘못 본 것이다. 또 세상이 좋아서 세상에 빠진 애세, 속세주의도 물질의 이용가치를 잘못 본 것이다. 세상은, 물질은 생명에게 이용이 되어지느냐 이용이 되어지지 아니하느냐? 이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문제는, 두지식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져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지식을 산지식으로 알아서 주격의 위치에 두고 인간 모든 지식을 그 밑에 종으로 두고 써먹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내가 올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말씀대로(눅18:8) 지식관 하나를 두고 보더라도 믿음의 법대로 지식관을 바로 가진 사람이 거의 없음이 한탄스러운 것이다.
금 같은 하나님지식을 똥같이 취급하고 똥같은 인간지식을 금같이 평가하는 인간이 문제인 것이다. 믿는 성도가 이렇게 평가하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지식은 주인이다. 이 주격관계만 확실하다면 주인에게는 부려먹을 종이 많을수록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 왕에게는 섬기는 휘하의 신하와 군사가 많을수록 왕의 세력이 강해지게 된다. 두 지식의 관계가 확실히 주종(主從)과 군신(君臣)의 관계가 되어있는 이상 종과 군신은 숫자만 많을 수록 좋을 뿐 아니라, 유능하고 똑똑하고 실력이 있을수록 좋은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지식이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지식의 종으로 신하나 군사의 위치로만 확실히 되어진다면 세상지식이 많을수록 고급 지식일수록 그 지식이 희귀한 지식일수록 주인에게는 더 유익될 것이다.
3.두 지식의 잘못된 위치 倒置
1) 주종 도치의 자유: 主從倒置의 自由
만일 주종의 관계인 이 두지식의 관계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격이 되어야 할 하나님지식은 종이 되어 짓밟히고 소유격이 되어야 할 인간지식이 주격이 되어 하나님지식을 이용하면 어찌 되겠는가?
성도의 생명 자체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 중생, 단번 중생, 영원 중생을 받아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죽지 않는 생명이다.(히7:23-28) 그러나 그 생명이 갖출 모든 기회와 실력은 인간지식에게 다 뺏기고 마는 것이다. 두 지식 자체의 위치와 실력은 두말할 것없이 완전과 불완전, 창조와 피조물, 생명과 사망의 사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지식을 어떻게 알아주고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두지식을 받아들이는 주체인 내가 어느 지식을 주격으로 모시고 어느 지식을 주인의 소유격으로 들이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 세상에선 천국과 지옥을 이루어가는 일에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자유 선택권을 주신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는 무신론을 주장하던 하나님 유일주의를 주장하던 하나님은 세상 마지막까지는 심판의 그날까지는 두고 보신다. 따라서 지식에 있어서도 어느 지식을 주격으로 삼고 어느 지식을 거기에 종으로 삼아도 두고 보신다. 그러나 그 기간은 생전일 뿐이다. 그후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이다.
이 지식의 주종관계에 대하여는 우선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경우가 다른 점이 있으니 이면을 살펴보고 나가도록 한다.
2) 신.불신자의 차이
천국과 영원은 알 수도 없고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불신자는 의례껏 일생을 인간지식으로 주격을 삼아 이 지식대로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안 믿는 불신자가 인간지식 대신 하나님지식을 주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중생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믿고 안 믿는 것은 인간 자유이지만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만 있다. 그래서 안 믿던 사람이 믿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믿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이 먼저 주시고 그 마음이 원할 때 하나님이 믿어지도록 도우셔서 비로소 믿게 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전적 성령이 열어줘서 열리는 세계이지 자기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이면이 있다. 요는 안 믿는 사람, 인간지식으로 주격 삼은 사람의 결과는 무엇이냐는 것을 여기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또 믿은 사람이 한번 믿었으면 평생 그는 하나님지식으로 주격을 삼아 살게 되는 것일까? 중생은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이요 이 영은 한번 믿어 중생 되면 영원히 하나님지식으로 주격을 삼아 변동이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심신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지식으로 주격삼은 영에게 피동되어 하나님지식으로 주격을 삼을 수도 있고 또 중생된 영을 거부하고 믿기 이전처럼 인간지식으로 주격삼아 살아갈 수 있다.(롬 7:22-25 )
이점에 있어서 안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는, 우선 안 믿는 사람은 아예 영이 죽어 있어 하나님지식은 주격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 또 심신도 그러하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영은 완전히 하나님지식으로 변동 없는 주격을 삼았으나 심신은 주격을 삼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점이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이 다른 점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떤 때는 예수믿는 그 믿음으로 뚜렷이 살 때가 있고 또 어떤 때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행동을 보일 때도 있는데, 이것은 두 지식의 주종관계가 심신에 있어서 늘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3) 지식도치의 결과
이제 지식이 도치가 된 사람은 어떤 결과가 있겠는가? 지식대로 살게 되고 자기 일생 산대로 자기의 영원이 결정되는 것은 지식관의 서론에서 살펴보았다.
①불신자의 경우
두 지식이 도치된 사람의 일생은, 또 그의 영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일생을 인간지식으로 주격삼아 살 수밖에 없는 불택자는 하나님 없이 영원히 지옥에서 인간지식으로만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는 신,불신간에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자연 은총은 꼭 같이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별 표없이 사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제 영원한 지옥에서는 이런 자연은총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거두시게 되고 만유주 당신이 당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거두시기 때문에 인간지식으로만 산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자연은총 하나도 없이 영원히 살아야 하는 이것이 지옥고통이다. 세상에서 인간지식을 많이 가져 자연은총을 자기 중심으로 죄의 방법으로 많이 이용해보고 누려본 자일 수록 그 고통은 더 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누가복음 16장 홍포입은 부자에서 가르친 지옥의 실상인 것이다.
②성도의 경우
믿는 성도들은 두 지식의 위치를 바로 잡아 살 수도 있고 도치하여 살 수도 있다. 우리의 심신이 그러하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지식 대신에 인간지식을 주격으로 삼아 살 게 되면 어떤 결과가 있겠는가? 인간지식을 주격으로 삼아 사는 그때에 해당된 모든 심신의 요소, 그 요소들의 모든 활동, 그 활동으로 만들어진 심신의 기능 전부는 영원히 지옥에 버려야 한다.
따라서 인간지식으로 주격 삼아 사는 그때에 해당된 모든 것은 영원히 잃어버리기 때문에 손해요 또 동시에 그 현실에서 하나님지식을 주격으로 삼아 성화시킬 심신의 모든 건설구원의 기회를 놓치게 됨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4.두지식의 위치는 점점 심화된다.
하나님지식과 인간지식, 두 지식의 위치는 바로 될 수도 있고 도치 될 수도 있다. 또 이 위치는 계속해서 바뀔 수도 있다. 따라서 성도가 가질 수 있는 미혹 중 하나는, 인간지식으로 주격을 삼아 세상 욕심을 먼저 채우고 그다음 위치를 바꾸어 인간지식을 종으로 하나님지식을 주격으로 삼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할 수 있다. 하루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주종의 관계는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바꿀 수 있으니 우선 세상욕심부터 채우자는 이 생각도 인간지식이 주격이 된 결과이다. 따라서 인간지식으로 시작한 이 계획이 마지막에 그 욕심을 다 채운 다음 내가 쫓아낸다고 잘 쫓겨나겠는가? 한번 들어온 지식은 내안에서 점점 자라게 되고 그 세력도 더 강해지게 되고 하나님지식은 반대로 점점 더 약해진다. 결국 인간지식이 자리를 잡고 나면 뒤에는 아무리 하나님지식으로 일어서 보려고 해도 인간지식에게 붙들려 꼼짝을 못하게 된다.
하나님지식도 그러하다. 어려워도 한번 하나님지식이 인간지식을 누르고 주격이 되고 나면 하나님지식은 자꾸만 자라고 세력이 강해진다. 반대로 인간지식은 점점 더 약해진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먼저 주격이 된 지식, 한번 주격이 된 지식은 상대편 지식을 잡아먹고 소유격으로 삼아 주격의 위치와 힘을 더 강하게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지식이 먼저 주격이 되어지면 인간지식이 이 위치를 뒤집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인간지식이 먼저 주격이 되어지면 하나님지식이 이 위치를 뒤집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인간지식으로 평생 자기의 주격을 삼아 나온 불신자가 하나님지식으로 주격을 삼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하나님지식이 주격으로 자리잡은 사람을 인간지식이 주격이 되려는 이 일도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므로 믿는 사람 하나 하나를 두고 이 두 지식은 서로가 이 주격위치를 두고 서로가 사력을 다하여 노력을 하고 있으니 이는 보통의 전쟁과 다르다. 영원을 두고 싸우는 싸움인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평생 힘쓸 건설구원면인 것이다.
표시할 내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