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삼분론에서 본 뇌교체 소고
삼분론에서 본 최근의 인체 공학 (의학의 한계는?)
I.의미있게 관찰할 일
1997년 영국 로잘린 연구소의 양 복제 생산과 1998.4.28. 미국의 뇌의학자의 원숭이 뇌교체 수술 성공은 오늘의 신학에 큰 의미를 가진다. 과학, 특히 의학이 갈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겠는가? 이미 신학계가 그어온 한계를 전부 넘어서 버렸다. 과학이 자동차를 만들자 아무리 발달해도 하늘을 날지는 못한다고 했을 19세기의 신학자들, 하늘을 날아버리는 과학을 향해 그다음 할 수 있는 말은 사람의 육체는 손댈 수 없다. 이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창조의 범위라고 했을 것인데, 이식에 인공심장, 신장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는 두 사람을 하나로 합하고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복사하는 의학이 되었다. 이미 신체뿐이 아니라 생각도 전기충격과 조절로, 원하는 기억을 지우고 원하는 생각이 많아지게 하며 원하는 성격까지도 만들고 있다. 사람의 생각, 마음의 범위까지도 그 설계도의 세부사항, 기능의 역학, 작동의 원리까지 전부 파악이 되고 이제 실험과 훈련을 통한 숙달만 남아있는 단계이다.
1.생물학적 의미:
뇌 전체를 교체했다는 의미는 앞으로 뇌사상태의 식물인간과 뇌기능만 유지되는 식물인간의 경우, 뇌만 살아있는 사람의 뇌를 뇌만 죽고 전신은 살아있는 사람의 뇌를 들어내고 이식하는 경우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김씨의 뇌가 박씨의 신체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 뇌기능이 왕성한 사람이 건강한 젊은 육체를 착용하고 재활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1년전 영국 로잘린 연구소가 성숙한 양의 체세포를 떼어 또 하나의 정상적인 양을 복제하였는데 이 기술은 뇌이식 기술과 합하여 뇌사만 아니라면 다른 신체의 고장으로 죽게 될 때, 신체 전부를 복제해서 길러둔 또 하나의 자신 신체에 이전시켜 버리면 된다.
2.사회적 의미:
돈이든 주먹이든 힘있는 사람은 신체를 교체하고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기술이 가능한 데까지는 매매라는 거래가 따라 붙게 되어 있다. 즉 재화만을 대상으로 하던 지금까지의 모든 기술, 경제, 산업의 모든 분야는 그 대상을 사람으로까지 할 수 있다. 살인죄의 범위같은 자연법적 문제는 그 규정을 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전면적으로 금지시켜 인간 복제나 뇌이전을 막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요가 있으면 공급은 필연이듯이 자신을 복제하고 자신의 신체를 여분으로 보관 운영할 수 있다면 법을 초월하거나 피하여 실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생겨지게 되고 이 실상이 많아지면 결국 법도 사회관념도 다 따라 오는 것이다.
II.신앙적 의미:
1.신학계가 보는 관점
사람을 영혼과 육체 둘로만 나누어 영혼은 영물로, 육체는 물질로 보고 있다. 의술은 지금껏 물질인 육체를 상대한 것이며 영혼인 마음의 세계는 인간 과학이 미칠 수 없는 범위라고 했었다. 이런 대답도 그동안 많이 후퇴한 결과이다. 이전에는 사람의 신체 자체에 대하여 하나님의 직접 창조물이어서 과학이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인공 심장 등 인공장기에 대하여 불가능하다고 주장을 했었다. 그 이전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부정한 것부터 따진다면 과학이 접근할 수 없는 분야라고 주장했던 부분들이 지금까지 다 허물어져 후퇴했지 끝까지 신학이 이긴 경우는 없었다.
복제 짐승들에게 인간의 마음에 해당되는 기억, 슬픔, 의지 등이 있음은 확인이 되고 있다. 복제된 인간이 만일 신체만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을 가지게 된다면 그리고 일반 신학계의 이분설 주장이 맞다면 드디어 인간은 영적인 존재를 만들어 내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과학이 신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고급의 자기 최면, 가설을 이용한 수양 정도일 뿐이다.
2.백영희목사님의 삼분론에서 본다면
1)백영희목사님의 일관된 성경신학은 3분론이다.
사람을 영물인 영과 물질로 된 마음과 몸, 이렇게 3가지로 깨닫고 주장해 나온 것이 벌써 50여년이 다 되어 간다. 성경이 가르친 것이 마음은 물질이지 영일 수 없다는 일관된 주장이었다. 현재의 과학이 마음의 세계를 물질의 활동으로 밝혀내고 있다. 우리는 그 과학의 증명을 별로이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 과학은 하나님도 천국도 볼 수 없는 우맹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맹이 마음을 물질로 증명했다고 그 과학의 정확성을 인정하겠는가? 맞으면 우연의 일치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신 자연계시의 이치를 하나 발견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일반 신학에서는 고고학에 대한 비중이 대단하며 그 고고학에서는 과학적 증명이 또한 대단한 위치를 가진다.
과학이 증명하는 진화설, 우주의 기원설 등이 그 출발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우리는 또한 주목하고 있다. 아무튼 과학의 증명 없이 성경과 평범한 자연계시로도 얼마든지 우리는 마음이 물질임을 증명할 수 있다. 과학의 도움을 별로이 별요치 않는 것이다.
2)육의 기능구원:
마음과 몸의 구원은 주격인 영에게 어떻게 이용되며 순종되어졌느냐에 따라서 그 성화가 결정된다. 이미 육체에 만들어진 기능들, 예를 들면 사기꾼의 생각과 혀의 협조, 그 사이에서 맺어진 죄의 기능, 그 협조관계가 신체의 교체로 인하여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소매치기의 날치기 손기능과 눈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할하는 그 마음의 죄기능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여러 가지의 기능구원문제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영의 실력, 마음과 몸의 성화와 그 기능의 실력, 이것이 믿은 이후 우리에게 해당된 문제이며 이런 경우 신체나 마음에 해당되는 부분 중 일부 또는 전부의 교체가 있게 된다면 그 각각의 기능구원은 어찌 되는가 라는 문제로 접근할 일이다.
III.뇌교체에 대한 성경연구
1. 뇌교체는 가능한가?
일반적으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의 작용은 두뇌를 중심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신학계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 자세한 실상은 알 길이 없고 다만 신비로운 결합 또는 작용이라고 대충 버무리고 왔었다. 그러나 뇌를 교체까지 할 수 있다는 발표는 신학계, 특히 조직신학을 전공하는 신학자들에게는 굉장한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정신 세계는 물질인 몸이 아니라 영적 존재인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과학이 물질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세계까지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한다면 인간의 과학이 영적인 범위까지 진출할 수 있겠는가? 이런 논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신학은 그 출발부터가 흔들리게 되며 신학 자체가 와해가 되어야 할 문제로 부각된다. 그러므로 뇌교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도 못하던 시절, 신학계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단언코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을 했다. 인간과학의 발달은 물질의 범위 안에 있지 영적인 범위까지 들어올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논리였다.
결론적으로 과학은 뇌교체를 해내 버렸다. 이제는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되어진 일이다. 이 문제를 두고 신학계는 애써 외면하고 이 문제를 정면으로 연구하는 것 자체를 회피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인간의 정신 세계, 이것을 영혼의 작용 또는 영혼의 범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인론"을 다루는 신학은 공통적으로 2분설을 주장하고 있다. 육체와 영혼으로만 인간은 되어있다고 단정한 다음 몸이 아닌 것은 영적인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혹 3분론을 말하는 학자들도 몸과 마음 영으로 나누기는 하지만 마음을 물질로 단정한 학자는 없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라고 보았다면 2분설이나 3분설이나 이번 문제를 두고 해결되지 않을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분설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마음이 영적인 존재라면, 그리고 과학이 영혼 또는 영이라고 불리는 마음의 영역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분설 신학자들은 신학자가 아니라 과학자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동시에 우수한 세상 과학자들 밑에 놓이는 우매한 미개 사회의 과학자 수준으로 내려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분설 신학자들의 이분설 주장이 착오라면, 그리고 삼분설을 주장하되 영만 영적인 존재이며 마음 또는 혼이란 물질로 된 것이라고 단정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물질인 몸과 마음의 세계를 다루는 일반 세상 과학자와는 달리 영적인 존재인 영을 상대하는 진정한 신학자일 것이다.
1)마음은 물질이다.
마음은 신비한 물질이다.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물질이다. 그러나 물질 중에도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물질도 있을 수 있다. 피아노는 물질이나 그 소리는 우리가 만지고 보지를 못해도 물질이다. 그 존재 형식은 피아노와 소리라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소리라는 것이 물질의 결과로 나온 이상 그 이론 구성은 서툴어도 물질의 결과인 소리가 물질이지 물질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지 영일 수가 없는 것이다. 물질 중에는 이와 같이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만 알면 우선 될 일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신비한 물질이라고 일컫는다. 실은 우리가 둔탁해서 그것이 신비이지, 물질의 근본 구성의 한 양태일 뿐이다.
2)과학은 물질에 대한 이치이다.
지금 세상이 과학 만능주의를 떠들고 있는 것도 큰 범위에서 보면 우스울 일이다. 과학은 물질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다. 과학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사람이 날 수 없다고 했는데 과학이 날랐다. 소리는 한번 밷고 나면 담을 수 없다고 했는데 과학은 녹음을 했고, 지나간 과거의 움직임을 재현까지 하고 있다. 이렇게 안 된다고 했다가 되어진 것이 지금까지 수백년 인류 문화사이다. 이 선은 이 범위는 이 종류는 안될 것이라는 것이 하나씩 허물어져 가면서 인간 신체의 일부가 만들어지고 복사되며 이제 뇌까지 교체가 되고 보니 이제는 어느 누구도 감히 과학의 한계를 그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아무리 멀리 잡아놓은 한계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복되는 것을 보고 주눅이 들어 버린 것이다. 경외심이 생기고 이제는 오히려 안될 것 같은 것을 된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예언이 되는 시대로 접어들어 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분명히 짚고 한계를 그을 것이 있다. 과학은 물질에 대한 이치라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이치대로라면 못한 것이 무능이요 안 되는 것이 자기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겠는가? 못한다면 자기가 무능한 것이요 불가능이라고 했던 그 시대의 그 사람들의 지식이 좁아서 그랬을 뿐이다. 반대로 날 수 없다고 단정한 신학자가 있다면 그는 영과 물질, 물질의 종류를 잘못 이해했을 뿐이다. 중세기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이 만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다. 따라서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돈다고 했었는데 여기서 그들의 오류는 지구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중심의 의미를 공간적 의미로 자작했고 이를 교권으로 밀어 부쳤던 것이다. 로마가 교회의 중심이니 로마를 축으로 지구가 돈다고 주장하는 논리와 같다. 아버지가 가정의 중심이니 아버지가 제일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는 논리와도 같다. 이것을 두고 과학이 교회를 이겼다고 하는데 대단한 착각이다. 갈릴레오가 성경을 오해한 신학자의 억지를 물리학의 범위에서는 이겼던 것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부분이다.
과학은 물질의 이치를 상대하는 기술이다. 물질의 이치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 만들어 놓으신 우주 창조원리요 보존 섭리의 원리이다. 물이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물리이며 내려가는 힘보다 올려 주는 발동기의 힘이 더 강하면 내려가는 물이 올라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내놓으신 자연의 이치, 곧 물리인 것이다. 그런데 강물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가 있다면 그 신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신학자의 잘못인 것이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만이 창조주시니, 하나님이 만들어놓지 않은 것이 만들어져 나타나는 것은 없다. 하나님만이 주권자시니, 하나님이 알려 주지 않은 것을 인간이 훑어내어 찾은 것은 없다. 따라서 눈이 밝은 사람은 보이는 것이 나타나기 전에 보이지 않던 시절 성경을 보고 미리 알고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말하여 미리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이라도 이미 나타난 것을 두고는 단정할 수 있는 범위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태초에 이미 만들어 두셨던 것이고 순서를 따라 이제 들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기 이식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신학자들이 주장을 했는데 과학이 이를 해 냈다면 간단한 결론이 도출된다. 신학자의 물리 지식 오해일 뿐이다. 또 한편으로는 과학자들이 성경이 할 수 없다고 한 것을 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물질의 이치를 내신 그 범위 안에서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 비과학적, 비 물리적인 부분이 있고 또 성경과 배치되는 과학의 결과도 있지 않느냐고 한다. 사람이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더할 수 있겠냐고 했는데 지금 과학은 이를 해내고 있다는 말이다.
이 역시 이들이 잘못 안 것이 있다. 안 된다고 했는데 된 것이 있다면 이는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고 그 성경을 사람이 잘 못 알았다는 말이 된다.
3)뇌교체가 성공했다면 그 기술은 물리이다.
과거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 되어진 것은 안될 것이 된 것이 아니라 될 것이 되어지게 된 것 뿐인데 인간의 눈이 어둡고 그 지식이 좁기 때문에 잘못 보고 잘못 말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 기억할 것은 과거에 안된다는 것이 되었다는 것으로 앞으로 안될 것이 다 되어질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해 놓으셨으면 지금 안될 것같아 보이는 것이 앞으로는 다 되어질 것이고, 지금까지는 다 되도록 하셨더라도 비록 물질계 범위의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안되도록 막아놓은 것이 있다면, 다른 것은 다 되어져도 그것만은 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뇌교체가 성공했다면, 오보가 아니고 또 흔히 과학계에서 있을 수 있었던 잘못 전달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체할 수 있도록 한 범위이기 때문에 한 것이다. 하나님이 할 수 없도록 한 것이었으면 이는 절대를 붙여서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없는 신대륙을 만든 것인가, 아니면 있는 대륙을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소경들이 불과 수백년 전에서야 알게되었는가? 그 큰 땅, 유럽보다 얼마나 더 큰 그 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자신 조상들의 과학적 무지를 욕하지 않고 발견한 그 발견에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지한 일이다.
발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은 발견은 있어도 발명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로부터 물질 세계에 배치시켜 두었던 모든 피조물, 그리고 그 피조물의 존재 형식, 그 존재 형식의 움직임 등에 대하여 광대한 분량을 두셨는데 인간이 억만분지 일을 알고 지나다가 억만분지 일을 더 알게 되자 난리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를 더 알았으면 하나를 더 알았다고 자랑하고 대견스러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도 무지몽매했구나 라는 것을 느껴야 한다. 교만하고 자만할 일이 아니라 바보임을 더 알게 되었고 더 느끼게 되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4)마음도 물질이다. 과학이 갈 수 있는 곳이다.
마음도 물질이다. 신비한 물질이라 둔탁하던 인간, 미개하던 인간이 몰랐던 부분이었다. 타락한 인간에게도 마음은 있다. 인간의 타락에서 죽은 것은 영이요 죽은 영을 제외하고 살았다고 움직이는 것은 물질이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택자, 불신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씩 손꼽아 전부 물질의 부분으로 분류하면 틀림이 없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사람은 물질과 영 둘로 대별할 수 있다. 물질은 다시 심신으로 구별한다. 이런 구별법은 성경으로 찾아내는 구별법인데 이보다 더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 방법이 이런 것이다. 사람에게는 영도 있고 물질인 육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영이고 어디까지가 육이겠는가? 무엇이 영이며 무엇이 물질이겠는가? 사람은 전부 죄로 죽었고 우선 죽은 것은 영이요 물질인 육은 지금도 죽어가는 중이다. 중생은 영 중생이지 육 중생이 아니니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를 살펴보면 영과 육의 구별은 단번에 날 수 있다. 다음으로는 만물을 살펴서 알 수 있다. 만물 중에 영을 가진 존재는 천사와 인간이다. 천사는 타락한 천사 악령과 천사로 나눌 수 있고 그 외에는 중생한 우리 믿는 사람 속에 있는 중생된 영 뿐이다. 이 외에는 전부가 물질이다. 따라서 짐승에게 있는 것은 전부 물질이다. 돌과 나무 속에 있는 것은 전부가 물질이다. 이렇게 단정한다면 틀림이 없다. 그리고 나서 이제 물질과 영을 구별하면 아주 쉬워진다.
뇌교체니 동물복제니 하는 용어가 생기기도 전, 인간의 장기 이식 조차 가능치 않던 시절, 이미 성경만 보고도 인간에게는 영과 마음이 따로 존재하며 마음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 존재라고 단정을 해놓았던 것이 백영희목사님이다. 나타난 것을 보고 되짚어 아는 정도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기 이전, 이미 보이지 않던 시절을 성경으로 미리 보았던 것이다.
5)뇌라는 것은 짐승에게도 있고 사람에게도 있다.
불신자에게도 있으며 신자에게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물이 아니고 물질이다. 물질 중에 어느 정도 고급이며 어느 정도 가치와 비중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은 여기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물질이냐 영물이냐는 것만이다. 짐승에게도 운동을 관장하는 뇌기능이 있다. 추억이라는 지성이 있다. 계산이 있으며 연구가 있다. 이성의 기본 골격이 있다는 말이다. 짐승에게도 감정이 있으며 욕심이 분명히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과학이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과학에 의지할 것 없이 집에 개한 마리를 길러보면 그냥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성경의 보편성이다. 어느 사람이든지 알려면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말이다. 이런 감성, 지성, 이성, 감정, 욕심 등을 어떻게 신체라고만 하며 본능이라고만 하겠는가? 이것을 신체의 기능적 본능이라고만 강변한다면 결국 사람도 그러하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수준과 정도의 차이지 짐승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또한 불신자는 그 영이 죽어 영의 세계는 전연 없이 산다. 육으로만 사는 것이 불신자이다. 육체가 되었다고 한 바로 이 육체인 것이다. 불신자의 구성요소는 육체이다. 물질이다. 불신자의 마음은 무엇으로 보아야겠는가? 그것을 영으로 보아야겠는가? 물질로 보아야겠는가? 물질로 보자니 우선 주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신자의 마음은 영이라고 할 수 없고 그들에게는 영적 요소가 다 죽었다고 단정하기는 대단히 쉽다. 물론 악령이 불신자를 붙들고 역사할 때 영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있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믿는 사람도 역시 악령에 피동 될 때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람 자체의 구성요소를 두고 비교할 때는 어디까지나 신체는 신 불신자간에 꼭 같다. 그 다음 마음도 믿기 전과 후가 꼭같다. 그렇다면 양측이 꼭같은 것은 인적요소요 그것은 중생과 상관없는 부분이니 중생과 상관없이 가지는 부분들은 중생된 부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생된 우리 속의 요소는 무엇인가? 일반신학에서 말하는 대로 마음의 한 요소 한 성향이라는 주장대로 말한다 해도 그 부분, 그 성향을 뺀 나머지 예수 믿기 전에 존재하고 움직이던 마음은 물질이라고 해야지 그것을 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6)따라서, 마음은 물질이며 과학이 미칠 수 있는 분야이다. 그렇다면 뇌교체는 가능한 과학의 많은 현상 중에 하나일 뿐이다.
마음은 짐승에게도 있고 불신자에게도 있는 물질이라고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마음은 과학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는 분야이다. 과학이 할 수 있는 대로 하여 볼 일이다. 만일 과학이 절대 할 수 없는 분야가 나온다면 그것이 인간의 무능이라서가 아니라 안 되는 분야가 있다면 우리는 쉽게 한마디 해 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은 부분이라고, 물질 안에 것은 하나님께서 다 허락하셨겠는가? 그것도 우리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확실히 아는 것은 인간 과학이 나가는 곳까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일 뿐이다.
7)결론적으로 뇌교체가 되었다면 된 것이다.
뇌교체를 성공했다면, 우리가 알 것은 그것은 물질의 범위구나,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을 허락하신 범위구나 이렇게 두 가지로 단정한다. 그렇다고 잘했다, 발전이다 이런 말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 바벨탑을 인간들이 쌓아 올라가는 것은 할 수 있다. 올라 간 곳까지가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허락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고 된 것이라는 의미와 해야 할 것이었다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선악과를 두셨고 인간이 따먹을 수 있도록 했는데 따먹을 수 있는 자유성 가능성 허락성과 해서 안될 짓을 해서 망하는 인간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뇌교체를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인간이 했다면 그것은 가능토록 되어졌던 것일 뿐이라고 우리는 확인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뇌, 심지어 마음 부분까지 그것은 하나의 물질이기 때문에 물질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범위에 두셨던 것이다. 물질의 이치, 물리는 모든 물질의 이치에 다 통한다. 그러므로 그 물질의 이치가 어디까지가 끝인지는 몰라도 인간이 재림 이전까지는 밝혀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 밝혀나가는 과정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분야로만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러므로 물질에 관한 이치는 인간이 물리로 연구해 찾아갈 있다. 물리로 찾아가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주권 허락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2.이어지는 질문들과 여러 관점들
백영희 삼분론과 심신의 기능구원이라는 교리 내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추론하며 그 확실한 결론을 찾아 봐야 할 것이다.
1) 현재 당장 우리에게 당면된 문제는 중생된 영과 자기 마음이 사용하고 있는 신체는 비록 일부일찌라도 남의 신체인 경우가 있다. 남에게 사용된 망막을 받아 들여 이제는 내 눈의 일부로 사용하는 경우, 이 신체 부분의 기능구원 또는 건설구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이다. 그 이전 사람에게 소속된 당시의 기능상태가 그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리고 그 기능이 탁월한 경우와 열등한 경우는 각각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좀더 좋은 환경과 재료, 또는 좀더 불편한 환경과 재료를 주시는 경우로 알면 될 일이다. 다섯 달란트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각자에게 각각 다른 하나님의 요구가 있는 줄 알면 될 일이다.
자기의 영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아 가지게 되는 경우는 어찌되겠는가? 그 마음이 다른 사람이 노력해서 얻어놓은 기억력을 그대로 인계를 받아 제 것으로 사용하는 경우,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 역시 신체의 일부와 같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몸과 마음이 물질적인 존재이며 이는 사람 안에서 소유격에 해당되는 것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한다면, 심신의 기능 이 두 가지가 하나되어 의의 연습, 건설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자기 영이 자기 마음을 통하고 그 마음이 자기 신체를 통하여 움직이면서 그 과정에 의와 죄의 병기간 전투가 있고 훈련, 연습이 있으며 이를 통하여 기능이 생겨지고 의와 죄의 요소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의의 요소만큼이 성화된 건설구원 양이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심판을 통과하여 천국갈 것들이다. 이미 만들어진 것은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앞으로 만들어질 것이 문제이다. 여기서 영이 마음을 붙들고 그 다음 타인의 신체를 가지고 의와 죄의 기능을 만들어 간다면? 또는 영이 달리 숙달된 다른 사람의 생각 방식과 신체를 가지고 살게 된다면?
건설구원의 결국은 마음과 몸의 기능과 실력이 분리되어 천국에서 활동하거나 존재할 것이 아니며 이 심신의 기능과 실력이 마련된 그 성화의 양은 결국 그것의 주인인, 그것의 주격인, 그것의 하나밖에 없는 인격 자체인 영의 실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영에게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영이 자기가 부렸던 자기 소속하의 심신에게 어떤 장악력을 쌓아 나왔느냐는 것이 영원한 나라의 자기 구원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 영이 하나의 심신을 그대로 사용하고 나왔는가? 아니면 그 영이 신체의 일부를 다른 것으로 교체하였고 교체된 일부가 있는 자기 심신을 소유격으로 사용해 왔느냐는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소유격의 변동 형편에 상관없이 주격인 영이 이룬 영의 기능, 영의 실력, 이것이 영원한 자기일 것이고 이 영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맡기실 것이며, 맡기신 것은 되어지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동원하는 그 나라인 것이라고 하겠다.
인격의 혼재가 있는 경우, 이미 우리에게 당면된 문제가 되었으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마주한 이 시대의 여러 복잡한 현상들이 과거 이런 때를 위해 미리 눈 밝은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방향의 깨달음을 주셨으니 다행이라 하겠고, 그러나 현재 이 시대는 미리 밝혀져 있는 교리나 교훈을 나타나는 현상에 잘 맞추어보면 결론이 쉽게 날 수 있는 정도라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될 것 같다.
덧붙혀 생각해 둘 것은 말세에 혼동은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신 정도이니 아는 데도 믿지 않아서도 탈 일 것이고 또는 아는 기초부터가 미달되고 혼돈되어 믿음에 나아가는 사람은 아예 찾아보기도 어려울 수 있음을 안다면, 그런 현상이 바로 이 논제만 가지고도 해당되겠다고 느껴질만큼 심각히 또 신중히 우리의 신앙을 정립해 볼 때이다.
이런 여러 가지 관점에서 우리는 백영희 삼분론 이미 중요한 요소들을 거의 다 해결하고 있다고 보며 따라서 다만 구원에 유익한 그리고 성경에 올바른 방향을 잘 요약하고 정리하는 정도의 수고만 하면 되겠다고 기대해 본다.
2) 물론 여러 가지 다른 결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성화에는 신체에서 이루어지는 성화와 다른 면이 있을 수 있다. 그 마음 스스로가 육체를 통과하지 않고도 마음 자체에서만 끝나는 마음의 기능 마음의 성화 마음의 구원도 대단히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신체를 통과하면서 육체의 기능구원까지 관계된 것도 많다. 구체적으로 발생될 문제는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작용에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를 빌려서라도 그 움직임을 가져본 것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빌린 신체의 그 기능이 숙달되어진다고 해도 이미 내 육체가 아니니 부활시에 자기 육체의 기능구원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 흙 속에 흩어진 육체의 요소들과 움직이는 타인의 요소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기능은 자신의 육체를 잃어버리는 순간, 이미 육체와 하나되어 연습하고 길러갈 부분의 성화는 끝나는 것이고 이제 마음 단독이 이룰 성화의 부분을 연습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신체를 잃어버리면 자신의 신체는 기능구원에 끝이 나고 이제 마음은 마음 단독의 구원만으로 남은 때를 살게 되는데, 이때 타인의 신체를 빌려서 이루어지는 심신의 움직임은 남의 신체된 그 신체가 의의 기능에 발달이 있다해도 원 주인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요 그렇다고 새주인의 육체 기능 부분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 신체로 인하여 신체 움직임이 필요한 부분의 마음 기능부분의 발달은 마음의 주인 원 주인 자기 자신의 성화가 될 것이다.
3)타인의 신체와 자신의 마음이 합하여 의의 기능이 생겨질 수 있겠는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신체는 소유격 마음은 주격이다. 이미 자신의 신체는 자신과 분리되면서 기능연습은 끝이 났고 새로 가진 그 육체가 마음에 소속되어 새로 만든 그 육체의 기능도 단순한 연장노릇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새기계로 새로 일해서 새겨진 그 마음의 실력과 그 신앙의 요소는 어찌 되겠는가? 새 연장으로 새롭게 연습한 새로운 실력이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신체는 하나의 연장이겠는가? 물론 육체는 만물 중 최고 탁월한 기능을 가진 연습, 도구이다. 병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교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육체도 인격이 있다면 이는 교체가능이 없는 것이다.
4)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는 말씀으로 전혀 다른 면에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할 때 양자를 데려다 기르는 것은? 그러면서 자녀를 가진 심정을 알아보고 자신의 마음 속에 갖출 양육의 사랑과 부모의 심정에 대한 의의 기능을 가져 보려는 것은 어떠한가라는 말이다. 그 자녀를 아무리 데리고 자녀처럼 한다고 해도 부모 자녀의 심정을 그려보고 느껴볼지라도 가정구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자녀를 잘 길렀다고 자기의 부모로서 기능구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자를 과욕 정도로 생각한다. 그 실효성도 그러하고 성경적 원리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지 않은 자녀를 데려다가 라도 기르려고 하면 한 면은 맞추어지고 이익이 있는 것 같은데 다른 면으로는 반드시 더 큰 손해가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유익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 눈이 나쁠 때 안경을 갖추는 것은 물질의 이치의 도움으로 자신의 활동 범위를 넓힐 수가 있다. 과학의 혜택은 자연 혜택의 일종이며 자연계시 내의 범위이다. 바로만 사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세계 안이다. 그러나 부부사이에서 출산되도록 한 자녀를 낳지 못하게 될 때 이를 지나친 방법으로 무리하여 만드는 것은 은혜세계에 대한 이용인지 아니면 주지 않은 범위와 뜻을 지나쳐 자의식 자기 주관 자기 욕심 자기 주도의 자기 인생을 만들어 작게는 성공이요 크게는 실패하는 경우가 아닌지를 보아야 한다.
공부가 무리되는 가정이 무리해서 하게 되는 공부는 이미 그 출발과 동기에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 그것이 결국 손해의 열매가 되지 유익의 열매가 되지 않는 또 하나의 초월적 이치가 적용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잘 사용해서 잘 되는 경우도 있지 않느냐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붙들어서 되면 되지 자기가 과욕을 하면서 하나님께 붙들려 쓰이면 잘 쓰이게 되는 수도 있다며 의에 쓰일 가능성도 하나를 생각하고 죄를 짓는 것은 처음부터 계산착오이다. 후에라도 바꿔쓰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없었더라도 달리 되는 수를 만들 수 있는 분이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보편적 은혜이며 하나님 주시는 자연적인 것이며 어떤 것은 무리적이며 과욕적인가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국 자기 신앙양심 문제이며 자신의 주관적 문제일 수밖에 없다. 한복을 언제부터 우리가 입게 되었고 벗게 되었는가? 남보다 크게 앞서 갈 것은 없고 그렇다고 끝까지 거부할 것은 없다. 주사나 수술의 인간 방법을 거부하고 자연적 치료에 맡겨야 한다는 극단적 신앙도 주신 자연과 그 이치, 그 혜택을 거부하여 받을 은혜를 버리는 유기죄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최첨단 신약 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세상만 알고 있는 이들이 열심히 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자연 세상에 인간 보통의 자연 물질 이치가 보편화 된 것을 천천히 보고 가는 것이 또 하나의 지혜일 것이다.
4. 주의할 점
1)놀랄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 허락된 물질 범위의, 과학이 갈 수 있는 방향 중에 또 하나가 나타난 것뿐이다. 오히려 이제야 그것을 발견했느냐, 천지창조 때 이미 만들어 물질계에 넣어둔 것을 이제야 찾았느냐고 조롱할 일이다.
2)조심 할 일이다:
새로운 과학과 인간의 재주가 나올 때마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뜻에는 단행과 돌진이 필요하다. 맡겨놓고 달릴 일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는 일은 통계상으로 또 이치상으로 1개 얻고 10개 망할 짓이었다. 바벨탑의 건축과학은 하나님 없는 인간들에게는 오늘의 과학만큼이나 대단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에게는 우스운 장난이요 자기 죽을 무덤이었다. 올려간 것만큼 물질의 이치 대로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추진하던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은 측량 못할 고통을 주었다. 결국 쌓지 않음만 못했다. 조심할 일이다. 악한 자와 멍에를 같이 매다가 같은 저주를 받을까 해서이다.
3)우리 갈 길은 전혀 요동 없다:
마음이 물질의 세계요 신체에 비하여 탁월한 가치를 가졌으나 물질임에는 같고 이는 기능 구원으로 길러가고 갖추어갈 요소요 실력일 뿐이다. 마음은 물질이다. 우리의 주격은 영이다. 영에 붙들려 마음을 종으로 부리고 마음을 통해 육체를 부려서 각 부분에 해당된 구원을 이루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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