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1975.5.22.목새
일시: 1975.5.22.목새
본문: 스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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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김응도조사님의 기도 중에는 G과 대화하는 양보다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는 양이 더욱 많았다. 이 말은 인신공격이 아니라, 김조사님의 옛사람의 자기가 나타나 하는 것은 우사만 할 것이 아니라 죽여야 한다.
‘자, 들어라. 보아라. 내가 이렇게 기도를 멋지게 한다. 봐라. 너희들이 이렇게 알고 살아라.’ 하는 식의 기도다. 기도는 너희가 이렇게 살았느냐 하는 것은 기도의 대화가 아니요 대중설교다. 다른 사람에게 호령치는 것은 이중인격이요 그런 기도를 하면 교만해지고 어두워지고 점점 G과 멀어진다. G은 외면한다. 기도는 언제나 G과 상대해야 한다. 상대가 G이다. 혹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 할 수 있는 자기가 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40년 전, 호주 여선교사가 고제농산 교회에서 집회 할 때 성신 인도로 기도하라고 하니까 먼저 기도 소리를 내고 들고 나와 기도하던 자동차 사기꾼이 있었다. 이때 박 장로님 둘이 사기를 당했다. 당시 차 한 대 값이.....
사람들이 예수를 실행해 믿지 아니하니 허영에 날뛰고 있다.
신28장에 말을 잘못 듣고 기억한 것 같다. 기도 중 “내가” 할 때와 “우리”라고 할 때가 다르다. 책임과 벌을 받아야 할 때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민족의 잘못이라도 주여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야 한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칭찬을 들을 때는 우리라야 한다. 좋은 것은 언제나 우리라야 하고 나쁜 것은 ‘내가’라야 한다. 용서와 축복은 우리에게 벌과 책망은 내가, 나에게 라야 한다. 이것은 불신자라도 그것이 예의이다. 이 반대의 기도는 다 옛사람의 기도다. G이 벌을 주실 때는 대개 그 본인에게 준다. 반대로 그 사람에게 상을 줄 때는 그 사람에게 속한 주변에 사람에게 다 주신다. 그 개인 단독에 베풀 때도 혹 있다. 그러므로 G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이것을 말했다. 우리가 이런저런 기회에 어떻게 하든지 자기 아닌 자기는 버리고 G이 창조하신 자기 G이 죽은 것을 살린 이 자기는 영생을 가진 자기인데 , , , 이 자기로 살면 G과 동거동행케 되고 내주 하시고 또 경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영생인데 왜 이 자기로 살지 아니하고 왜 자기 아닌 자기를 자기인 줄 알고 살겠는가? 이런 어리석은 우리로 살지 아니해야 한다. 예, 어떤 사람이 술에 만취되어서 정신이 없어서 술 먹기 전에 저는 검정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제 붉은 옷을 입혀 놓으니 정신이 혼돈 되어 어느 것이 네 고 하니 검정 옷을 입은 자에 팔이 내 팔이라고 하는 것 같이
사람이 사욕에 도취 되여 자기와 자기가 있어 생명 줄에 끊어져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 영에 생명은 끊어졌으면 즉시 죽고 육에 생명은 6. 70년이 지나야 죽는다. 다른 식물은 저주받아 죽었으나 나무는 천년을 살다가 죽는 것도 있다. 나무들도 저주 아래 있다. 그러므로 G의 아들들이 G의 뜻대로 사는데 이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와 자기 구별이 중요하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벼릿줄이요 강령이다. 그런고로 사람에 해독의 순서는 ①신을 모르는 지식이 가장 큰 해 주고 ②자기를 모르는 지식이 둘째로 해독이 크다. 진주를 돼지와 개에게 던지지 말라 라는 말은 개, 돼지는 사람이 짐승의 성질이 됐다는 말이다. 사람이 육체가 됐으니 G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한 말은 짐승화됐다는 말이다. 영을 떠나서 마음과 고기 덩어리가 주체가 됐다는 말이다. 육을 떠나 영으로 살면 평강이요. 육으로 살면 육에 생각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했다.
사람이 육체가 됐다는 말은 영은 주격인데 영을 떠난 육 단독으로 사니 사람이 육체가 됐다. 그 사람이 영의 도구로 고기 덩어리가 움직이지 아니하고 육 단독으로 움직이니 그것을 가르쳐 육신의 정욕이라고 했다. 이 육신이라 육체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영이 하나라고 하는 사람들은 육체에 소욕과 육체라고 하는 말을 그들은 인간에 “부패성”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육은 마음과 고기 덩어리라고 본다. 오늘 사람들은 벌콥 신학을 첫째 권위로 본다. 또 칼빈에 신학을 첫째 권위로 본다. 칼빈에 교리에는 영을 마음은 영혼으로 보니 그 것 외에 다른 것을 말하면 이단이 되고 있다. 마음은 육이요 영은 딴 것이라고 말하면 이단이 되고 있다. 미국에 유니온에서 프린스톤이 나왔고, 프린스톤에서 웨스트민스터가 나왔는데 여기에서도 대개 가르치고 있는 것이 마음은 영혼이라고 한다. 육은 피 덩어리 뿐이라고 한다. 이것이 대개 숫자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 신학이 속화 됐다고 개혁한 신학이 또 많이 있다.
성경에 육신에 생각이라고 했으니 고기 덩어리도 생각이 있느냐 육은 고기 덩어리 뿐이라고 하니 그러면 성경에 육은 무엇이냐? 하면 육은 원어에 싹스라고 했다고 하여 대답한다. 그러면 요1:1에 말씀이 육신이 되여 한 원어는 무슨 원어냐 하고 보니 쏘마가 아닌 싹스였다.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되여 했으니 예수님은 부패성이 뭉쳐서 왔느냐고 하니까 고려신학교에서는 그 말이 없어졌다. 만약 영과 마음은 하나이다. 둘이 아니다 하면?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에 정욕이란 말은 무엇인가? 고기 덩어리가 마음 없이 본능으로 동한다고 하면 우리는 이런 것을 본다. 마음 없이 본능으로 동하는 것들은 죄가 없다. 개 돼지 소 사자가 죄가 있느냐? 그들이 심판 받을 것인가? 물론인데 범죄 때문에 받는 것이다.
성경에 갈5:19-. 육체에 생각은 현저하니 음행 호색 우상숭배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이단 술수 방탕 등이다. 라고 했으니 이것을 마음이 없이 하는 것이 있는 가? 우리가 진리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천주교가 G의 진리보다 위에서 내려오는 계통을 중히 여기니 교리적으로는 구원이 없이 망했다. 그들은 전에는 성경을 볼 수 없었다. 원어에 요절만 몇 읽고 있었다. 성공회가 갈라지고 난 후부터 성경을 본다. 지금은 천주교로 번역판이 나왔다. 마귀는 교묘하다. 성경을 못 보게 하면 미혹이 안 되니 이제는 성경을 보게 하고 있다. 이제는 천주교 성경 반 개혁 교 성경 반 섞어 번역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천주교를 죽인 악령이 감투를 바꿔 쓰고 나온 것이다. 천주교가 가속도로 부패한 것은 G의 말씀 보다 유전과 전통을 계통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너희가 장로들의 유전을 사람의 道도로 삼았다고 책망했다. 바리새인들이 망한 것이 이것이다. 고르반 했으니 G의 말씀 보다 유전을 더욱 크게 여겼으니 망했다. 천주교가 이것이다. 천주교는 교황교리 무오주의다. 우리는 성경무오주의다. 지금도 내나 그 마귀다. 초대교회가 300년 때부터 부패했다. 천주교는 우상화하였다. 천주교에서는 벽화 70개를 그려 붙여 놓고 걸어 붙어 놓고 절 420번 하는 자가 가장 잘 믿는 자이다.
? 우리 진영도 백목사님이 가르친 것을 성경 보다 앞세우면 역연 천주교다. 벌코프와 칼빈이 성경 보다 나으냐? 아니다. 성경보고 따라가야 한다. 벌코프는 말하기를 마음은 영혼에 중심이다 라고 했다. 그런고로 지킬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켜라. 왜 생명에 근원이 이에서 난다. 한다. 왜 마음을 지킬 것인가. 영혼은 껍데기요 마음은 알맹이다. 이것도 모르고 영혼 영혼 하여 중생 된 영은 범죄 안하고 하는 이단자가 있다고 비난한다. 이들은 내 앞에 영원히 설 때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영혼을 생명이라고 해석한다. 살아있는 생기가 영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육을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한다고 했으니 그 영혼은 무엇인가? 물으면 비유 라 고 한다. 또 영혼이 G 앞에 가서 호소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도 비유다 하고 있으니 성경보고 서는 자도 있고 성경보고 넘어지는 자도 있다. 그러므로 듣고 지켜 듣고 지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자는 모른다.
성경에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에 정욕을 除제하라 하는 육은 쏘마가 아니라 싹스라 하니 너희 해석은 요1:1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부패성으로 왔느냐? 어쨌든지 G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만 살도록 한 것이 기독교다. 이제는 악령이 사람을 다 죽이고 달리는 못해서 성경을 엉터리로 번역케 하고 있다. 이제는 원어도 혼돈 시켜놓았다. 원어성경도 수많은 종류가 있다. 저희들 마음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바로 믿고 나가면 성경 한 권을 빼놓아도 전부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되여 지는 것이 다.
우리는 원어에 각 종류와 한글번역에 각권을 구비해 놓았다. 우리는 안팎에 눈이 가득해야 한다. 네가 내 말에 거하면 - 실행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네 자신과 행위가 참 내 제자가 되고 - 닮고, 깨끗해지고. 자라고 나니 얽매이고 거리끼는 것이 정리가 된다. 어떤 사람을 보면 그렇게 하면 옳은 줄을 알면서도 얽매 인 데가 있어서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옛날에 보면 순회 교역자에게 잘못 보일까봐 알고도 못 행하는 자가 많았다.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배워서 아는 것보다 실행하면 알아진다. 행케 된다. 약1:22, 네가 듣고 실행치 아니하면 자신을 속인다. G의 말씀을 듣고 실행치 아니하면 그 값으로 탈선케 만든다. 왜 탈선하느냐? 그 세력은 G의 말을 오용 했기 때문에다.
듣고 실행치 아니해서 자신을 속이지 말고 듣고 행하여 자기 영혼을 깨끗게 하라. 영혼을 깨끗이 하라는 말을 원에 찾아보면 대게 자기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말이다. 또 영혼은 죄가 없는 G처럼 깨끗지 아니한 것이다. G처럼 의에 실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의를 행하는 실력이 다르다. 사람의 영이 장성하고 깨끗해도 G처럼 깨끗하고 실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성령을 바람 부는 것으로 비유했다. 영으로 난 것은 안 보인다는 말이다. 육으로 난 생명은 보인다는 말이다. 육으로 난 것은 부패성으로 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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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중생은 사람에게 G의 성품을 갖다가 넣어준 것이다. 그러면 G의 성품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신적요소가 아니냐? 그러나 G의 성품을 받았으나 G의 성품은 따로 있다. G의 성품에 신적 요소는 따로 있다. 그러니 죄를 범치 아니 하는 것이다. 중생한 영혼이 범죄 한다고 하는 자는 성경을 모르는 자이다.
벧전1장, G의 진리에 씨로 낳았다고 하였다. 말씀은 인격이 아니라 이치다. 또 중생함으로 G의 아들이 됐다고 했다. 양자는 요소는 부모의 것이 아니나 기업을 누리는 것은 같은 것이다. 신적요소는 아니나 누리는 기업은 예수님과 같은 것이다. 양자 된 것은 신적 요소를 넣어준 것 아니고 우리에게 G의 성품을 완전히 넣어줬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롬8:10,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해 산 것이니라 하였다. 영이 살아난 것은 근거가 의에 있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는 이 영은 성령이 아니라고 했다가 얼른 바꾸었다.
의는 G의 소행이요 영은 G 자체다. 여기 영은 인간에 영혼을 말한다. 또 ‘너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종이란 G과 부자의 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한 이용물로 관계를 가졌다는 말이다. 하나의 종은 소유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중생하기 전은 우리의 영이 기능적으로 산영이 아니요. G의 저주에 대상에 있었다.
종으로 있었다는 말은 소유로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했으니’ 종에 영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란 말이니 중생한 영은 G과 대립되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이 중생한 영은 다시는 G과 대립이 아닌 이 위치와 소속이 다시는 변개치 아니한다는 말이다. 이 중생한 영은 G과의 부자에 위치 소속에 위치 하나 된 결합이 다시는 변개가 없다는 말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다. ‘받지 아니하였고’, 결제가 된 과거사다. ‘양자의 영을 받았고’ 우리 영이 G의 양자가 됐다. 예수님은 적자요 우리는 양자다. 예수님과 같은 요소는 아니다.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밑에 ‘아바’는 이성 비판적으로 부르짖는 것이다. 세례를 줄 때 G 아버지가 억지로 나오는지 시키니 나오는지 본능적으로 나오는지 이 점을 나는 살핀다. 속에서 나오는 것과 시켜서 나오는 것이 다르다. 본인은 알 수 있다. 의심 없이 아버지가 나오면 중생 된 증거다.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G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여기 우리란 전체의 자기 영육에 자기를 말한다. ‘증거를 받나니’, 마음 없이 증거를 받느냐? 이성 없이 누가 증거를 받느냐 아니다. 고기 덩어리는 촉감밖에 없다. 마음이라야 청각을 가지는 것이다.
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너는 G의 자식이니 마귀의 자식으로 살지 말라 G의 자녀는 그렇게 살라 이런 증거를 하는 자는 우리 영이 G과 더불어 동역 할 수 있는 자가 되여 영이 육에게 하는 증거다.
21-22절,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은’
23절‘ ’이 뿐 아니라‘
23절, ‘이 뿐 아니라 성령에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했으니 성령이 처음으로, 열매로 결실 완성을 해 놓은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중생 된 영이다. 중생 된 영들은 하나다. 흩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로 움직인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눈이 어두워서다. 왜 제가 왕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리새 사람이 이러다가 망했다. 박윤선 교장이 처음 주석은 바로 했으나 후에는 범죄 한다고 하였다. 오늘 김응도조사님을 우사 시켰으나 그로서는 가장 은혜에 시간이다.
성령에 처음 익은 우리까지도 ‘양자 될 것’ 했으니 양자가 됐는데 안 된 것이 있으니 곧 우리 몸에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몸은 아직 양자가 안 됐다는 말이다. 양심을 안 쓰면 유혹을 받는다. 듣고 행하면 얼마든지 알 수가 있다. 만약 중생 영이 범죄 하면 부활한 몸도 범죄 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요일3:9, G에게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난 사람이 아니고 ‘난 자’라고 한 것은 중생한 영을 말하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지으나 중생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 영은 중생 했고 육은 안했으니 그때 말한다.
‘이는 G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씨는 자라는 것이다. 구속 역사가 그 속에 시작됐으니 G의 연결 역사는 영에서 마음 몸 그의 소유에까지 점령해서 충만케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G으로 동하고 정하는 것은 우리의 산 영생이다.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여기 범죄를 상습적으로 죄를 짓고 싶지 않지 제 본성으로 짓고 싶은 것 아니다 하는 자가 있다. 그러면 이단 운동을 하기 싫어도 하느냐. 박태선 문선명이가 이단운동을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하느냐. 본능적으로는 하고 싶지 아니한데 상습적으로 행하고 있다면 죄를 짓는 것은 부득이 짓는 것이 아닌가? 내가 죄로 말에 실수로 안 하려고 하니 더하게 되더라. 이것은 죄를 범함이 많은 것이 아니고 들어 나기에 그래 보인다.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하는 말을 중생 된 사람은 본성적으로 짓고 싶어 짓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죄는 그 본인이 짓고 싶어 짓는 것이다.
여기 ‘죄를 범죄 치 못하는 것은...’ 이라고 한 것은 유동성의 것이 아니고 부동성의 단어로 됐을 것이다. 못한다는 것은 부동어다. ‘났음이라’ 부동어다. 이런데 왜 어누리를 부치느냐.
요일5:18 ‘G께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위에서는 자체가 범죄 치 못할 뿐 아니라고 했고 여기는 객관성적으로도 못한다고 한 것이다.
G께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였다. 만약 범죄 한다면 지키는 자가 무능이다. 지키는 것은 G의 것이 되었기에 지키는 것이다. 우리의 육은 아직 G의 것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확실한데 어떻게 어누리를 붙여 말하겠소. 영은 중생이 두 번이 없다. 단번뿐이다. 이것은 정통에서 공통인 고로 저들이 변개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혼이 범죄 한다면 죽어야할 것이다. 죽으면 중생을 또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범죄 하느냐 우리가 죄를 가장 많이 짓는 기관은 눈이요 귀요 마음 혀로 짓는 것이 많다. 수족 범죄는 많지 못한 것이다. 우리 눈으로 범죄 함이란 정평정가 다 없이 지나가는 것은 다 죄 짓는 것이다. 혀로는 다 못하나 본능적으로 다 평가해야 한다. 하면 피곤하나 안 하면 잠시 보 응 받는다.
제가 이 중생교리를 틀리게 알았으면 제 주장이 영원히 가겠는가? 오늘에 고치고 갈 것이다. 칼빈은 500년 전에 사람이요 우리는 2,000년대에 사람이다. 이 선배에 잘못이 멀리 퍼져 나가지 못하게 우리가 이것을 고쳐야 한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의를 영혼이 입었기에 새 생명을 받았고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의를 아직 못 입었으니 새 생명을 못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를 두고 날마다 기능 구원을 받아가고 있으며 우리의 몸은 부활 때에 그리스도의 의를 완전히 입는다. 그때는 죄는 안 지으나 의에 실력은 다르다. 의를 행하는 실력에 차이는 각각 다르다. 그런고로 육에 구원은 중복이요 우리의 회개는 평생회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이 범죄 한다는 말은 영은 G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G만을 나타낼 수 있는 G의 충만을 다 모사할 수 있는 G의 신격 같은 영은 중생 시켰으니 범죄 할 수 없고, 이 영혼에 도구와 같은 육은 범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너는 죄에 도구가 되지 말고 의에 도구가 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속하는 것은 마음과 고기 덩어리다. 범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 온갖 미혹에 지배를 받으니 이 욕심에 끌리지 아니하고 이 영에게 지배 받아야 한다. 그런고로 저들은 범죄에 책임을 영혼에게 두나 우리는 범죄에 책임을 마음에게 둔다. 그러므로 마음을 찢고 책임을 지워서 네가 이놈아 왜 미혹을 받았느냐. 못된 욕심에 순종해 범죄 했느냐 하는 것이다. 내 마음 성질 뜻 감정 욕심을 조져 다진다. 저들은 영혼을 다진다.
적은 엉뚱한데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참 자기를 대적하면 G을 대적함이 아닌가?
이러니 이 운동에 주체가 악령이다. 그들은 이것을 모르고 남에 주장을 파악도 안 해보고 벌로 듣지도 못하고 말하니 어찌하려는가? 그러므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 했다. 반박하다가 깨어지면 저는 박살난다. 경북 노회가 결의한 것을 두고 확인 도장을 받으러 가니 하나도 찍어 주는 자가 없었다. 인간에 이목과 주장이 큰 것이 아니다. 눈과 귀가 하는 일이 다르니 귀는 눈에 혜택을 받아야 한다. G이 각자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 있으니 서로 달게 받아야 한다.
우리가 육이 범죄 했다고 함은 마음까지 포함된 것이요 중생 된 영은 범죄치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중생 된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다. 왜 마음과 고기 덩어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과 영은 어떻게 다르냐? 성경에 육에 정욕은 음행 정욕 술수 당파 짓는 것 온갖 이단 이런 것이 정욕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자연 계시 중에 즘 생은 영이 없으나 사람의 마음과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 없느냐?
짐승에게는 기억력 감정 추억 연구 비판 계산 명철 등이 다 있다. 영이 없어도 그것이 다 있다. 이러니 사람은 최고의 고등 동물이라고 불신자가 말한다. 이 짐승보다 실력에 차이지 사람도 같다. 그러므로 어찌 육이 고기 덩어리만 육이냐
또 영혼에 중심이 마음이면 이 자는 마음 지상주의다. 마음이 인간에 최고의 것이면 인간은 소망이 없다. 마음은 단일체가 아니다. 마음은 국회의원과 같다. 그러나 통령은 하나다. 영은 하나다. 영혼은 단일체다. 이런 주장은 이들도 처음은 같았으나 사업상 다르니 반대하고 나왔다. 영은 주격이요 육은 소유격이다. 육에 범죄는 영이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생 한 이후에는 지지 아니한다. 주격 책임에 범죄는 중생 후는 없다.
왜 G께서 나지도 않은 우리의 범죄 G의 예정 속에 있는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부담 시켜 예수님이 대속 했다. 우리는 불가능하나 G은 가능하시다. 이와 같이 내 영혼을 중생 시킬 때 내 육에 과거 현재 미래적으로 범죄 할 모든 죄를 육에 주인인 영혼에게 전부 부담 시켜 단번에 정죄 시키고 정 죄 받은 영혼에 죄를 예수님이 당겨다가 지고 형벌 받고 죽었다가 나서고 G과 연결 시켜서 내 영혼을 살렸기에 내가 중생 후에 범죄는 중생 이전에 형을 받은 죄이다. 그러므로 중생 이후에 범죄는 주격으로 부담할 것은 없다.
죄보다 무죄가 깨끗하고 무죄보다 의가 깨끗하고 의보다 생명이 깨끗하다. 생명보다 G이 깨끗하다. 이런 순서를 밟아 생명을 받은 우리이다. 그러므로 주격 입장에 범죄는 우리에게 없다.
고로 지금은 마음과 영혼이 따로 있느냐 하는 문제다. 마음이 영혼이라고 하면 육신주의요 인본주의요 유물주의다. 그렇다면 오늘에 기독자들은 오늘에 심리학자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중생 된 영이 마음이라면 자주 범죄 할 것이요 부활한 몸도 이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소망이 없다.
우리 G은 지극히 거룩하고 공평한 G이다. 지금은 한국이나 세계 교회가 주력할 것이 영혼 문제이다. 界물질계에 원자가 나온 이때에 이것 위에 영혼은 초자연에 것이다. 그러니 깨닫지 못하고 마음 위에 영혼을 가지고 소망케 해야 한다. 그 속에 영생이 있느니라 라는 말은 그 속에 영혼을 가져야 하느니라 하는 말이다. 영혼의 중생은 두 번이 아니다. 마음은 종합체다. 그러므로 분리 시킬 수 있다. 욕심이 일어날 때 저래 이래 할 수 있다. 육 때문에 영이 죽었기에 주격 책임을 지고 죽었기에 G이 살렸다.
살아난 산 영은 제가 제 소유인 육을 살려야 하고. G이 직접 살리는 것이 아니다. 육을 살린다는 말은 육이 영에게 복종해야 한다.
법을 공부하면 단번에 알 수 있다. 법은 인간에 공정을 기해놓은 것이다. 이것을 배우고 다음은 사학을 배우려 한다. 왜 인간은 현실 속에 들어가서 파묻히지 아니하기에다.
그런고로 중생 된 영은 범죄 치 아니한다는 말을 교리를 굳게 잡아라. 그리고 G을 찾아가 보라. 그러나 중생 된 영이 범죄 한다고 하는 길로 걸어가 보라 분명히 양심이 어두워 질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아니한다고 하는 길로 가면 양심 이상 탁월한 빛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을 쓰라. 양심을 쓰면 인간에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영이 아니면 소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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