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1975.5.20.화새
일시: 1975.5.20.화새
본문: 신2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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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에 증거한 말씀은 불신자들이 불신행위를 할 때는 자기 단독에 힘을 길러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노력한다. 그러기에 된 것은 자기 힘으로 해서 된 것이요 안 된 것은 자기의 실력 부족으로 안 됐다고 해 자기가 책임을 진다.
또 기독자가 아닌 사람들이 가진 모든 종교인들은 자기의 하는 일에 한 걸음 나아가서 자기 이상으로 힘을 가진 어느 존재에게 받아 무엇을 해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에 힘만큼 밖에 안 되기에 인간의 힘이란 너무나도 제한되어 있고 약하기 때문에 인간 자체의 힘으로 이룬 이상적인 것에게도 이것은 가치에 둘 것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시야가 넓었기 때문이다. 대상이 넓었기에 거기에 머물 수 없다.
또 이종교인이 자기 보담 이상자에 도움을 받아 할 찌라도 도움 받은 부분이나 안 받은 부분도 너무도 인간에 요소가 끼여 있으니 그것도 무력하고 부족한 것이기 때문에 이종교에 신망(信望)같은 신망을 가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기독자는 내 힘으로나 나보담 강한 자 어떤 피조물에 힘으로 되는 것은 그 가치가 심히 적고 힘이 아주 작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시간적 공간적, 종별적으로 넓게 보니 너무 됐든 것은 약해서 멸망이요 끝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상대하지 아니한다.
다만
※자존자 완전자 G만 영원불변의 완전자 이 분만이 영구하고 완전하기에 이분에 것으로 갖추어 가지려고 하는 것이 기독자이다. 이분에 생명으로 사랑으로 지혜로 능력으로 이분으로 충만하여 이분으로 살고 지식하고 모든 움직임을 움직이고 이분으로 살아가려 함이 기독자인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 사회주의나 도덕주의 정치주의 인본주의들은 순전한 기독인이 아니다. 참된 기독교의 진수를 만날 계기와 인간은 될 수 있으나 그것이 기독교가 아닌 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 개량이 아니다. 인간에게 G의 것을 보충 시키는 것도 아니다. 마치 집은 주인의 돌보아 줌과 움직임을 입으면 임시 집 자체가 주인 외에 무슨 능동이 없음 같다. 이와 같이 순전히 G의 것만이 사람 내 것을 활용하는 것같이 내 활용으로 나타내심을 바람이 기독교다.
그런고로 전능자 전지자가 되는 것이 기독교다. 완전자 된 것이 기독교인이다.
※인간 단독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단독으로는 추호의 완전도 없는 것이 기독자다. 영원무궁히 완전 행위를 한 사람이나 영원무궁 끝에 그 사람이 G과 관계가 끊어지면 그 즉시, 즉시로 타락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기독교다. 그런고로 아무리 위대해 진다고 해도 순전히 G으로만 된 것이지 자기의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성화된다고 해도 G의 요소로 변화됨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창조주는 창조주요 사람은 피조물 그대로다 G은 요소 그대로다.
그러면 모든 면에 G과 꼭 같은데 도달함이 완전함을 이루는 것은 마치 전구가 빛을 나타내는 전력은 하나도 없다. 전력이 오면 환하게 비출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얼마 동안 켰으나 전기가 가면 캄캄해진다. 몇 달 동안 썼어도 전력이 끊어지면 캄캄하고 이으면 즉시로 환하다. 전구는 전력이 오면 빛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 만들어 놓은 것이 기계다.
이와 같이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G의 완전을 받아서 나타낼 수 있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그런고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 빛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빛이란 말도 전혀 아니다. 우리는 전혀 빛이 없다. G이 빛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기에 세상은 우리를 보고 빛이라고 한 것이다 . 인간은 전혀 빛이 없다.
※ G의 완전이 우리에 완전이 되는 방편?
그런고로 G의 완전이 우리의 완전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 G의 소원이다. 또 우리의 소원이다.
※ G의 완전이 우리의 완전이 되는 방편은?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의 순서는 - G이 우리에게 말하시고 G이 이루어실 것을 G이 말하시는데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G이 나에게 이렇게 해 주시려고 하시는구나 이렇게 나타내시려고 하는구나 더러운 죄인에게 무지한 죄인에게 전지 전능자가 나타나려고 하는구나 하는 것을 본인이 말씀을 들을 때 인정하고 이대로 되기를 원하고 인정하고 원하데 자기의 힘대로 다 움직이도록 생애 본능이 움직이게 할 때 이것이 G의 허락이 되기에 G은 우리를 해서 나타난다.
그런고로 G 당신이 말 할 때에 G 혼자 하시려는 것이요. 우리가 허락하는 것이다. 허락하고 소원하면 G이 하시려고 착수하시는 것이다. 내 허락은 G의 하시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 아니다. 내가 하는 것 같은 방편으로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율성을 다 기우려 원하는 내용과 태도가 되기에 하려는 것뿐이다.
그런고로
G의 완전이 우리에게 오는 도덕과 능력은 순전히 G의 것이다. 스피커에 말은 순전히 내 말이다. 강사의 음성이다. 기계는 이 음성을 전하는 것 뿐이다.
※ G의 일에 순서는?
G과 우리 사이는 기계적이 아니다. 유기적이다. 그런고로 G이 하시는 말씀은 당신이 하려고 나에게 의논하는 것이다. 내가 응하면 되는 것이다. 사1:18, 우리가 서로 의논하자고, 주홍 같은 붉은 죄나 눈과 같이 온전케 된다고 했다. 의논이 합해지면 땅에 것을 네가 전부 소유케 되나 그렇게 아니하면 멸망하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금번 첫 시간은 G 단독 모임으로 빈 깡통과 같은 우리에게 가득 채우려는 것이 G과 우리의 소원이다. 소망이다.
※ G의 일에 순서가 ?
①우리에게 G이 말하시고 ②우리가 인정하고 소원하고 - 인정 소원함에 표시를 원함에 노력이 있고 - ③그때에 G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고 G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가 되여 유한한 인간에게 G의 온전이 나타난다. G의 온전을 본받고 닮은 것이 아니라 G의 온전이 바로 우리를 통해 나타남이다. 이것이 기독교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주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님이 말하시기를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아버지가 일하신다고 하였다.
이러기에 내가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삼위 그에게 거처를 함께 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하신 것이다.
※
그러므로 G의 말을 옳다고 인정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여 자기 지식을 바꾼 것이요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 실상이 변질 변화 된 것이다. 자기에게 있는 실력이 완전히 변해졌다. 자기 실력을 없애버리고 G의 실력은 나를 통해 나타내려는 것이 기독교다.
※
이 사실을 알기가 쉽고 논리하기도 쉽다. 다만 어려운 것은 자기를 부인하기가 어렵다. 십자가를 죽이는 것이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G 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G을 인정하고 그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명철이나 世上세상 학문으로 그의 슬기나 욕심이나 많은 수양으로 되는 것 아니다. 간단하다. 자기를 빛이면 된다. 나를 G께 맡기면 된다. 자기와 G과 바꾸는 것
그러므로 기독교의 적은 자기 위주 자기 중심 자기 고수다. 자기 이것을 죽이고 바라고 싶어 하기 전에는 안 된다. 자기보다 주님이 좋아서 주님으로 사는 것이 어렵다.
※
이것을 보고 듣고 깨달음에서 느껴지는 감동으로 느껴 점점 자기 부인이 커져서 자기를 전적 부인하면 G이 인정되면 G이 완성하는 것이다. 자기를 꺾어 죽여서 제물로 드리고 G으로 사는 이것이 완성 될 때에 G은 자기에게 제제 받지 아니하고 나타날 수 있고 G은 나의 전부가 되어지는 것이다.
이 말도 양심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양심으로 깨닫고 양심으로 느껴지는데서 살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 유식한 자로서 잘 믿는 자가 적다. 왜 자기 부인이 어렵고 세상 수양으로 잘 믿는 자가 적다.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나 수가 적다. 무엇 때문인가 ?
부인해야 할 자기가 강해져 있기 때문에다. 이런 자들이 꺾고 죽이면 누구 보다 더욱 자유롭게 G이 나타날 수 있다. 좋은 마이크 스피커가 될 수 있다. 이것을 첫째 시간에 증거했다. 말씀을 듣고 기억해서 옮길 수 있다고 하는 자는 외식하는 자이다. 그 사람은 참 마이크 스피커와 같이 물질로 사는 자는 영으로 사는 자가 아니다. 인격으로도 받지 아니한 자다.
양심으로 받지 아니 했고 양심 없이 기억 오직 이것으로만 받았다. 그러니까 전파는 할 수 있으나 자기는 죽일 수 없는 자다. 자기가 왕이 된 자이기에 자기는 죽일 수 없다. 자기 죽이는 능력으로 와야 함. 자기는 쇠 덩어리 같이 있고. 제가 주체가 되어 G의 말을 소유함이면 안 된다. 이 말씀은 나에게서 살고 나는 죽고 꺼꾸러지고 주의 말씀이 살아 역사해야 한다.
그런고로 입문으로서 양심이 필요하다. 양심은 이 도에 입문으로서 도를 시작케 함이다. 양심이 G을 찾아 간다. 양심으로 했다고 믿음 지킨 것 아니다. 양심은 믿음 보다 계급이
양심은 온젼함을 찾아 가는 것이다. 양심밖에 지각이 있다. 듣고 알고 자기가 기억하는 거기에서 그 자는 언제 양심으로 듣고 깨닫고 느끼는 단계에 나아갈는지? 양심의 단계에 나아가면 본능이 움직이게 된다. 본능적 움직임이 되면 G이 사시는 역사에 시작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을 쓰지 않는 하나에 지각에서 듣는 것은 혹 그것이 어느 기회에 양심과 연결이 되어 양심으로 지식하고 느껴서 그 단계에 나아갈까 하는 유효 적인 소망이 저 양심으로 나아감이 아니면 헛된 것이다. 양심 없이 지식만 가진 것은 자기에게 정 죄에 역사만 한다.
G의 심판에 가기 전에 핑계하지 못하게 미리 정죄 된다. 정죄 될 때에 양심에 가책이 왔다면 용기와 기운이 꺾어 질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정죄를 받으나 아무런 불쾌감이나 좌절감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껍데기 중에 껍데기다. 이것이 죽고 또 죽어 열매 없는 가을 나무다. 그런고로 외식하는 자가 되기 쉽다.
※
G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이 생명에 도에 접선되는 것은 양심에서부터이다. 양심에서 깨닫고 느낄 때에 이 양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있으나 이것은 구원에 접선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인정해서 주님으로 살 때에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표시가 나타난다. 그때에 G이 일하실 수 있다. 너무도 외식에 머무는 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말해서 멸망에 원인을 외식이라고 했다. 그것은 완전히 외식뿐이란 말이다. 외식 외에는 섞인 것이 없다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근채의 십일조나 장로에 유전하지 잘 지켰으나 율법에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했다. 이 말은 자기에 양심과 인격을 버린 것이다. 양심과 인격 없이 G을 섬겼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 없는 외식이요 G 인정이 없는 외식이었다. 자기 죽이는 것이 없이는 G으로 사는 것이 없다.
옷단을 넓게 하는 것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이 다 외식이 아니다.
진정한 교역자라면 은혜 끼치는 종이라면 시장 가운데 간다고 해서 업신여기지 아니할 것이요 두렵게 인사할 것이다. 이것이 외식이 아니라 진짜다. 그러므로 마23장에 시장에서 인사하는 것이나 옷단을 크게 하는 것이 상관이 없으나 그만한 정도로까지 타락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추려서 들어가면 이 시간에 말한 것이다. 양심을 써서 인격을 기울이면 자기가 부인되고 자기가 죽고 G이 인정되고 G으로 살고 있는 것이 없는 외식이었다.
이 말을 거듭 거듭 말한 것은 기억한 자에게 또 기억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가 기억한 것을 기억에서 그친 이 외식에 있음을 죽이란 말이다. 자기를 죽이고 꺾고 부인하고 G을 인정하고 G으로 살라는 말이다. 기억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하는 이자는 가증스러운 자이다. 이 자리는 성령 충만한 자리다. 왜? 수자(數字)가 성령 충만한 자가 될 수 있다. 이때에 자기를 부인하는 많은 역사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 홍수가 많이 내려올 때는 같이 안 갈라고 해도 같이 가는 것이 큰 것같이 이런 기회에 G 인정함이 자기 죽이는 역사를 크게 많게 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연히 들은 말 듣고 또 듣게 함이 아니다. 두 번 들을 때 내게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하니 내게는 필요 없다고 말함이 막 바로 외식이다. 여기서 자기 부인하는 역사를 하자.
신28:1-19
28장을 보면 전장이 개인 상대다. G은 개체로 내가 네가 나 너 뿐이다. 내가 너에게 네가 지키면 내가 어찌하겠다고 말씀했다. 다른 데에는 G이 우리가 우리라고 말했다. 다른 데에는 G이 우리가 우리라고 말했다. 우리가 할 때는 삼위의 G에 은혜를 총합할 때다. “내가” 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의 영이 말씀을 선포하고 심판함을 말한다. 심판은 그리스도의 영이 전달하고 그리스도의 영이 심판한다. 그런고로 여기에 첫째 주의 할 것은, 이 28장을 읽고 자기가 G을 상대할 때 개인적으로 상대할 수 있다고 오인하기 쉽다.
네가 지키면 네게 복을 주겠다. 네가 이 계명을 지키면 네게 복을 주고 버리면 저주하겠다. 화를 주겠다. 이렇게 말하신 것을 보고 인간이 어디든지 저 밖에 모르고 있는 인간의 원인 제 중심 제 욕심 제가 주체가 된 것이 원죄인데, 이 죄는 해와가 아담에게 전달하여 전 인류에게 왔다. 죄의 알맹이는 원죄 하나다. 그것이 네 “나”라고 하는 이 원죄이다. 사욕 자기 위주 제 중심에서 나온 모든 죄다.
그런데 신28장에는 네가 지키면 ‘네’라고 하였다고 이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해서 제가 주가 되어서 신자가 불신자와 같이 다른 사람이 실패해야 제가 성공할 줄 아는 자가 됐다. 대접할 때에 남이 대접하는 것은 싫고 제 혼자 하면 복 받겠다고 하고 그 人인이 병이 든 것 보고는 속으로 기뻐하는 이 자는 제 원죄를 기른 자이니 불쌍하고 가련한 자이다.
신앙이 어릴 때는 한 가정에서 연보를 식구마다 갈라서 하자고 하는 것은 다 원죄를 기르고 있는 행위인 것이다. 그것이 자기 위주요 사욕위주다. 신28장에 네가 내 말을 지키면 네 농장 네 살림이 잘된다고 했으니 이제는 됐다 하고는 다른 사람이 망해야 제가 될 줄로 알고 다른 사람이 저보다 잘 되어지는 것은 싫어함은 이것이 원죄다. 교회 안에서 이것을 죽여야 하는데 이것을 살리는 것이면 큰 죄악이다. 종을 제 혼자 하고 싶어서 했으면 단독으로 했으면 원죄가 큰 것이다. 이런 것을 기르면 구원에 방해물이 강해지는 것이기에 일을 못한다. 부산진교회에서 어떤 여 집사를 오종덕목사님이 치리 한 것이 있었다. 그런 자를 꺾지 못한데서 그 자는 양 도적이다. "나" "나" "나" 하고서 나하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잘못된 깨달음이다. 신28장에 G이 하시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뿐이다.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G이 하시는 것 하나 뿐이다. G이 인간을 대 하실 때 대개는 개별적으로 대하시고 한사람이 잘못 할 때는 그 사람만 책벌하시는 G이시다. 혹 가다가는 연대적인 벌을 내림이 있다. G이 벌을 줄 때는 그 개인에게 준다. 아버지가 잘못한 것을 자식에게 주지 아니한다. 그러나 간혹 전체에게 벌을 함이 간혹 있다. G은 이런 G이다. 은혜를 베풀 때에는 한 사람의 잘한 것에 상급은 대개는 전체에게 베푸신다. 간혹은 그 한사람에게 베푸신다. 네가 어찌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G이 어찌하신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예수님이 마6:7-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했으니 아버지에 관계대로 우리 아버지 우리 우리 우리를 상대해서 하라는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 전체가 자기 하나에게 책임 지워져 있으니 나는 전체에 일 분자로 전체에 하나로 사상이 되고 소원이 되어 자기에 방편이 되어 G을 상대해야 G이 상대되고 영 육 성장도 모든 승리도 모든 악을 패망케 함도 된다고 예수님이 말했다. 이방인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씀은 G의 본질 본성도 보지 아니하고 때 구쟁이 써는 자 같이 떼만 써서 말하면 되는 줄 안다. 못난 인간에게는 다소 효력이 있으나 잘난 자는 그런 궤휼에 빠지지 아니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해서 G에게도 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격으로 주시오 주시오 하고 조르고 어쨌든지 말만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 ‘나’ ‘나’ 나 하나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말 것.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 우리가 되여 상대하라고 하신 것이다. 나 내 짐 내 구역 내 식구하는 것은 다 원죄가 하고 있는 운동이다. 내가 은혜를 받아 은혜 끼쳐 ‘나’ ‘나’ ‘나’ 하고 목회 하면 불쌍한 자라. 아니함만 못하다. ①G으로 우리의 전부를 삼을 것 ②이 시간 나를 죽일 것 부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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