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8.교회 운영의 원칙 - 전원일치로만
(*새로 개척되는 교회를 위해 적어보았던 것입니다.)
교회 운영은 목회자와 교인의 전원일치가 원칙
1.믿고 맡길 목자가 있던 때가 있었으며, 또 그렇지 못한 때도 있습니다.
총공회 소속 교회들은 40여년간 교회의 모든 문제를 백영희목사님 지도로 운영해 나왔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모든 사람이 지도를 받을 수 있었던 그 시대를 살아본 이들은 선지 사도들이 살았던 당대의 행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도하는 순간이 감동과 감격이었고 그 결과가 모든 것을 입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인간의 실력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데까지 그 지도는 미치고 있었습니다. 성경시대가 아닌데도 성경시대의 모습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면, 백목사님이 없는 시대에도 능히 그가 있던 시대와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각 시대적 역사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그대로 살았기 때문에 성경역사를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이 백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백목사님의 신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보면 그가 살아간 신앙생애를 우리시대에 다시 되살려 볼 수 있습니다. 백목사님이 유일로 알고 따랐던 바로 그 성경을 우리도 보고, 동시에 그의 신앙세계까지를 우리가 참고해 본다면 우리는 백목사님보다 더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직접 배운 제자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사람이 된 것은 생전이 아니라 예수님 승천 이후였습니다. 백목사님을 통해 받은 많은 지도, 그 지도의 가치를 참으로 알게 되는 때도 꼭 그의 생전이어야만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야 알기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실은 우리는 그런 정도의 신앙들이라고 봅니다.
2.교역자가 교인으로 함께 연구할 때입니다.
오늘 우리 교역자들을 지도할 스승이 없고 지도자가 없는 때, 이런 때에 우리 교역자들이 삼가 힘쓸 바는 옳은 소식 하나를 듣기 위해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현재 교계에는 그 광고문구 하나만을 봐도 지식선전과 경제운영을 위해 진행된다고 느껴지는 수도 없는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드러나고 나타난 곳에는 배울 것이 없다고 단정하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 주변의 조용한 곳, 밤 기도하는 예배당 한쪽 주일학생, 반사, 또는 연로한 한 교인의 애절한 기도 속에는 진정 옳은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일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 시대는 백목사님에 비길 시대적인 종을 갖지 못했습니다. 좋은 신앙노선은 받았고 오늘에도 필요한 교훈은 여전히 우리가 함께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노선 이 복음을 받은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연구할 때라는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백목사님이 앉던 의자에 앉기만 하면 우리 교역자들은 갑자기 백목사님이 되어 버립니다. 총공회적으로도 이렇게 되는 이들을 우리는 더러 보았고 또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그들의 말로가 얼마나 우습고도 슬프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원래 그 자리는 백목사님이 자기를 다 비우고 주님 한 분의 뜻만을 찾아 생사를 아득히 초월하고 따르다가 앉게 되었던 자리였습니다. 오늘 우리 교역자들은 그가 갔던 길 1/100도 간 적이 없는 유약한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할 일은 함께 의논하고 살펴보는 것입니다. 타협과 분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좀 더 옳은지를 찾아 나서기 위한 것입니다.
우선 교역자가 스스로 교인을 찾아 이 시대 우리 교회가 나아갈 좀 더 옳고 나은 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역자란 그 자리에 앉는 즉시 자동으로 전지전능이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천주교와 다릅니다. 한 교회를 맡고 한 교회를 개척하는 교역자 출발점에 선 이들, 또한 목회한 경력이 상당히 지나간 이들 할 것 없이 교회를 어렵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 교역자들입니다. 백목사님의 신앙세계가 그러했습니다. 이 점에서 백목사님의 주장은 꼭 맞는 것이라고 인정이 됩니다.
3.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있어 교역자가 더 낫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절대다수의 총공회 교역자가 비디오설교는 죄라고 단정했지만 그 결정이 지금 와서 돌아보니 코메디였습니다. 1989년 10월 17일, 그렇게 비장한 분위기에서 총공회를 한국교회 이단정죄에서 구원할 조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던 모든 목회자들의 당시 분위기는 평양총회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출옥성도들을 연상시키게 했습니다. 지금 대구공회와 서울공회의 출발은 뜻도 모르고 모였던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 민란건에 비길 일입니다. 우리 교역자 수준이 바로 이런 정도인데 어찌 목회자라며 그 이름 하나로 갑자기 교인에게 선지노릇을 하며 또한 교인들은 어제까지 함께 있던 동류였던 사람이 교역자가 되었다고 그날부터 백목사님이어야 한다고 기대하고 따르면 되겠습니까?
교인은 교역자에 대하여 반항이나 거역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보충과 협조의 뜻으로 적극 의사를 발표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교역자도 포용과 융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옳은 것을 찾는 유일 목적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반론을 한다해도 참고해야 할 때입니다. 이 시대는 아직까지 순종해 놓고 따라도 될 만한 이가 없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있어 교역자가 낫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교역자들이 말했던 하나님의 뜻은 거의가 다 교역자들의 주관이었고 이해타산을 고려한 계산이었습니다. 총공회적으로는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산하 교회들은 더 그랬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논리적일 것입니다.
4.모든 교회사는 모든 교인들의 의사를 다 살핀 다음 전원일치로만 나아가야 합니다.
전원일치로 매사를 의논하라는 것을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들은 잘못 알았습니다. 교회가 전원일치로 운영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한 두 사람이 반대한다면 그 반대를 다수의 의견으로 누르고 나갈 수가 있습니까? 5천명 예배보는 시간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고함 지른 것 때문에 교회는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세상이라면 그 사람을 사법조처해 버리면 되겠지만 교회는 이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결국 싫던 좋던 전원일치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교회의 속성입니다. 그러니 진리면에서도 전원일치가 옳고 또 실제로도 전원일치가 아니면 안되는 것이 교회이니 전원일치로 교회를 운영하지 않으면 안되는 면을 우선 교역자가 인식을 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한 두 교인이 계속 교회를 훼방하는 경우는 어찌하겠습니까? 그 교인이 동기는 이해할 만한데 수준이 낮아 주관만 되풀이하는 경우라면, 좀 더 놔두고 보면 됩니다. 해야 될 많은 교회일을 다 중단시키고 기다리면 됩니다. 처음에는 자기 한 사람 주장 때문에 교회 전체가 중단되는 것을 보고 대단히 만족할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자기 한 사람 주장에 다른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의무 또한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반대하면 아무 일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자기 주장한 것도 다른 사람의 반대로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일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그대신 의견충돌을 피하게 하며 세월 속에 좀 더 냉정하게 모든 면을 보게 만듭니다.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철이 들게 되고 또 자기 주장의 결과가 결국 어떤 모습으로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는지를 스스로 보게 되면서 자기 주장의 방법을 많이 바꾸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일은 지연이 되나 사람을 고치고 수정시키는 수입이 있게 됩니다.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최종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며 교회가 추진하려던 사업의 결국이 바로 이 목표였음을 알게 된다면 전원일치의 장점에 무릎을 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길러가야 할 교인이 아니라 명백히 마귀운동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쩔 것입니까? 그렇다고 교회에서 매를 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짜 미쳤다면 파출소로 인계할 수 있고 또 정신병원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닌데 마귀노릇을 한다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모른다면 아직 믿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 차량 구입문제 하나를 두고 교인과 교역자의 의견이 갈린다면, 그리고 교인과 교인의 의견이 갈린다면, 밀어붙일 일이 아니고 연기시키면 됩니다. 당장 차가 없어 교인의 예배 참석에 문제가 생긴다면? 하나님께서 아직 허락지 않았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교인 출석이 어렵다고 전원일치의 자유성을 해치게 되면 교회는 더 큰 것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차량이 없어 교회로 오지 못하는 교인은 아직 우리 교회에 주지 않은 교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도 두고 볼 수 없다면? 두고 볼 수 없는 교인이나 교역자가 교회적으로 결정이 나기 전까지 자기 개인이 개인 부담과 책임으로 차량운행을 마련해서 개인적으로 데려오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교인만 손해가 아닌가? 손해가 아니라 십자가이며 전도인의 충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해 나간다면 어떤 문제든지 해결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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