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초안14권 (1955년) 목록과 내용 일부
초안 14 (1956. 6. 12)
1. 본문 빌4:10-20
제목 내 안에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라. (목적과 비결을 배움)
2. 본문 빌3:17-21
제목 의인은 믿음으로 사느니라.
① 부자에게 멸시받지 아니하는 가난한 자로
② 젊은이에게 멸시받지 아니하는 늙은 자로
③ 산 자에게 멸시받지 아니할 죽은 자로
3. 본문 요8:31-59
제목 참 자유할 수 있는 신앙 - 범죄치 아니하고 사는 것이 기독자의 장성기다.
4. 본문 요8:31-52
제목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5. 본문 빌1:21-26
제목 생사를 확정하라
6. 본문 마16:13-28
제목 참된 기독교
7. 본문 고후9:1-15
제목 성도의 물질적 생활에 대한 표준인물들
8. 본문 히12:5
제목 죄와 하나님의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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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 1955. 6. 12 주일 오후
본문: 빌4:10-20
제목: 내 안에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라 (자족과 비결을 배움)
본문에 얼핏 보면 10절에 바울이 크게 기뻐한다는 것과 18절에 풍족하다는 그 말씀이 빌립보 교인들이 물질로 바울을 도와 줌으로 바울이 기뻐하고 모든 것에 풍족하다고 고한 것 같이 보여진다.
그러나 거기 모든 것에 풍족하다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이 천성을 향하여 걸어가는 그 노정에는 피조물들의 그 힘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길이다.
천성 걸어가는 주님 걸어가신 그 걸음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걸음이니 단순히 빌립보교회에서 물질로 도와주는 그런 것에 속한 류가 아니다. 또 바울이 크게 기뻐하는 것도 그런 류의 기쁨이라면 이는 사망에 땅에 속한 기쁨이니 바울의 걸어가는 그 걸음에서는 도무지 평강을 줄 수 없는 물질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바울이 빌4:10에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것이 다시 싹이 남이라.
물질로 도와 주는 그 도움이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여 내가 궁핍함으로 너희에게 말함이 아니라 너희들이 나를 생각하는 그 생각이 다시 싹이 남으로 내가 기뻐한다는 그 내가 누구겠느냐?
딤후4:9에도 데마는 나를 떠나 세상으로 갔다고 말했다. 여기 있는 나는 바울이 아니요 바울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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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교회가 바울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함이요 바울을 사모함이 그리스도를 사모함이 되어지는 것을 조금도 의심없이 너희가 나를 사랑함이 다시 싹이 남으로 내가 크게 기뻐한다 할만큼 바울은 그리스도의 도의 사람으로 완전히 변화받은 장성의 분량이 보이고 있다.
바울이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가 기뻐하는 것은 바울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기뻐하심이다.
요17:21 겟세마네에서 주님 최후 기도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어서 하나된 것과 같이 저희들은 우리 안에 우리는 저희 안에 있어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신 그 기도는 예수님께서 성도를 위하여 피와 땀을 기울여 기도하신 그 기도의 최고의 목표를 다 이룬 장성한 은혜에 이룬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그 성화를 입은 바울인 것이 나타나 있다.
바울이 예수님이요 예수님이 바울이란 말이다. 잘못 들으면 오해하기 쉽다.
바울은 벌써 죽어 장사 지냈다. 바울의 소원이 예수님의 소원이요 바울의 사상이 예수님의 사상이요 바울의 그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이요 예수님의 사상과 지식과 사상과 인격은 바울의 전부가 되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요 예수님은 내 중심의 나요 자기 안의 예수님께서 성화에 장성하여 완전히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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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된 세계에서 산 장성한 분량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 가리켜서
롬8:29에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골1:15 이 아들의 형상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들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입은 그 인격으로 이제 나타나서 말씀함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기업이다
하나님의 형상 곧 그 인격이란 말씀이다. 하나님 안에 내가 내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어 당신 전부가 내 것 되었고 나는 죽어 장사되었으니 이는 피로 구속함받아 주님은 머리요 교회는 몸이라는 장성한 분량을 받은 바울 자기를 가리켜 말한다.
이 바울은 이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는 육체에 머물렀으나 영의 사람이었다. 그는 땅에 머물렀으나 하늘의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이 살아 있으나 완전히 예수님으로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크게 기쁨이 있었고 빌립보 교회의 도와준 물질로 기뻐하였던 것은 아니었고 이 장성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졌는 고로 그 바울 곧 예수로 사는 그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영적 향상에 움트는 것을 기뻐하였던 것이다.
오늘밤에 이 말씀을 거듭 증거하는 것은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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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멈추지 말고 실지로 소유하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 장성한 분량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이 세계에 나가지 못하고는 이 인격 가지지 못하고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축복
골1:26-에 만대와 만세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그 비밀 그리스도 한 분 소유할 때에 우주와 신령계 전부 내 것 되어지는 비밀 곧 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놓으신 큰 구원이 곧 이 비밀이다.
누구든지 육에 머물고 바울의 목적한 이 장성한 분량을 얻지 못하면 큰 구원을 다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이 바울이 나를 너희들이 사랑함으로써 나 기뻐한다는 기쁨이 바울 사랑함이 주님 사랑이었고 바울 떠나는 것이 주님을 떠나는 것이 되어졌고 바울의 기쁨이 주님의 기쁨이 되어진 것, 주와 한 몸 되어진 장성한 분량되어진 이 높은 소망이 우리에게 있으니 5절에 구경만 하고 지나갈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이 한 푯대는 우리는 잡아야겠다.
요14:27에 내가 너희들에게 평강을 주노라. 내가 주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같지 않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고 받아 보아라 하는 평강도 인간이 이해하기 어렵고 바울이 옥중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한 평강도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예루살렘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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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밑의 피투성이 중에서도 담대하여 복음의 검을 그대로 내밀었고 지중해 풍랑 중에 모든 사람이 살 희망 끊어진 거기서 그리스도 사랑 봉사 그치지 않는 충성
빌네데 섬에서 독사에게 물렸을 때 불평없이 기뻐한 그 기쁨도 측량하기 어려운 평강이며
고전15:31에 날마다 날마다 죽는 것으로 목적삼는 인생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생관이다.
바울은 그 세상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많은 물질이 바울의 마음을 조금도 기쁘게 하거나 힘주지 않았다. 좋은 환경이 그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어떠한 역경의 그 사지가 바울에게 힘을 감하게 하는 세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좋은 환경도 상관없고 얼마든지 나쁜 환경도 상관없고 그의 가는 걸음은 마치 공중에 날아가는 새에게 높은 언덕과 가시밭과 굴혈이 그 걸음에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인간성을 초월한 바울의 신앙 걸음에는 피조물들의 운동들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인격과 그 세계를 아무래도 우리가 발견해야겠고 아무래도 세상 마치기 전에 그 장성한 분량 덧입는 것이 우리에게 최대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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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리는 어리석다. 바울은
빌3:18에 내가 너희에게 여러번 말했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면서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니는 자 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수가 많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주님은 영화로운 것 같이 인간의 지식이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영광된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영광된 구원 잡으려 하지 않고 배로 하나님을 삼고 부끄러움을 영광을 삼고 세상 일만 생각하다가 멸망에 빠질 그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이제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이런 것 버리고 돌아서라 했다.
우리에게는 썩어지지 아니한 기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영원히 진동없는 세계가 있는데 어찌하여 이것 잡으려 하지 않고 얻어 보아도 없고 잡아 보아도 놓고 말고 살아보나 죽고 말고 기뻐 보아도 울고 말 것 이것 잡으려 하느냐?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여기서 머물겠느냐? 이를 성신은 탄식하신다.
빌3:18 바울의 울음은 바울의 울음이 아니요 그 울음은 예수님의 울음이다. 만일 그 울음을 바울의 울음이라고 하면 성경은 바울의 주장이 되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내 말이란 말은 바울의 심장이 아니요 바울 속의 예수님의 심장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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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바울의 장성의 분량을 우리도 이르지 못하겠는가?
우리에게는 별 희망 없는가?
만일 없다고 하면 우리에게 갈급을 더 줄 것이요, 생명은 못 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얻어질 수 없다고 피조물 세계 벌써 초월하여 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우리는 얻을 수 없다고 하면 갈급만 더하게 되고 생명은 못된다.
우리로 하여금 얻어질 수 없다고 하면 죽음에서도 기뻐하고 가난한 걸인으로서 기뻐하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 되신 이 장성한 권세의 분량이 우리에게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갈급만 줄 따름이요 생명은 못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앞에 능치 못함이 없다는 그 방법은
고후5:2-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죽기 전에 덧입으라고 간절히 힘쓰기를 짐진 것 같이 탄식함으로 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 되었다.
죽음도 빈궁도 온 세계 배척도 상관 않고 장성한 분량 이르기만 위하여 전생존의 목적을 삼았던 것이다.
4절. 무거운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다.
이 장막같은 몸이 없어지기 전에 덧입기 힘쓰고 부패한 내 인격 없기 전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짐진 것 같이 탄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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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했다. 짐은 가면 갈수록 무거워진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도 장성하면 장성하여갈수록 성화에 대한 필요성과 갈급성이 점점 마음 무겁게 더욱 짐되고 짐되었다. 이는 하늘의 사람이다.
땅의 것 분토와 같이 버렸으니 그는 신앙의 사람이다. 오늘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는 것이 주요성을 알고 알아갈수록 얼마나 영광되며 깨달아 갈수록 준비 기간의 세월은 황금같이 귀하고 그 준비에 갈급과 고민으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가리켜서 짐진 것으로 비교했다. 그가 가졌던 인생관이 무엇이뇨? 네 가지다.
1. 빌1:2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려 하노라. 그는 말했다.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은혜 받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아라.
모든 일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따라서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려 함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게 되니라.
내가 육신으로 택할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알 수 없노라. 이것이 바울의 첫째 인생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붙들려 사는 것이 자기로 살지 않고 예수로 사는 것이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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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5:13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희를 권면하시는도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16절에서 그러므로 잊는 새로 지은 것이니 내가 육체대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이제는 그리스도가 나 위하여 대신 죽고 나를 당신 대신하여 살게 했으니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심같이 나도 인간을 대신하리라. 그리하여 18-19에 명한 화목하게 하는 그 직책 다 감당하려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행하신 그 생활화되려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곧 물질, 권세, 시간, 몸, 마지막 생명까지 전부 기울여 봉사에 바치고 가려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다 .이 길 걸어야 평강이다. 그리스도의 가는 길은 이 길이다.
있는 것 다 기울여 봉사하는 그 생활로 아예 돌아서라. 일생을 요절로 외우자.
2. 이것이 사랑에 속한 것이다.
빌2:5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
그리스도의 겸손의 그 겸손 배우라 한다.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 비워 종의 형상과 또 피조물의 형상 입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분량을 완전히 얻으려고 완전한 분량 이르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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