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본문1-고신과 주남선을 거쳐 백영희 신앙노선까지 움직인 한국교회사
신사참배가 고신과 주남선을 거쳐 백영희의 신앙노선에까지 이어지는 과정
1.한국교회사의 중앙에 위치한 신사참배
한국교회가 겪었던 신사참배 환란 문제는 세계교회사적으로도 정통 개혁교회의 범위에서는 여러 가지 점에서 보기 드문 사례였으며 특히 한국교회사에서는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이설이 없는 사건이다. 한국교회사를 구분하는 여러 기준에 따라, 또 접근하는 시각에 따라 수많은 학설들이 있다. 자연히 시대구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흔하지만, 신사참배라는 사건만은 어떤 학자의 어떤 기준 어떤 접근방법에서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만큼 이 사건은 현재까지 한국교회사에서 거의 모든 면에서 정 중앙에 위치하며 한국교회사를 양분시키기에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국의 모든 교회가 한꺼번에 다 연루가 되었고, 이 환란에 대하여는 승패가 눈으로 또렷이 구별이 되어졌으며 특히 교회의 제일 대표적인 인물들이 전부 실패하였다. 해방 후 그 처리 건은 어떤 식으로든지 한국교회 전체를 완전히 뒤바꿔 놓을 만한 사안이었다.
2.신사참배의 중앙에 위치한 고신교단의 의미
한국교회의 외형적 계량에서 고신의 의미란 참으로 미미한 것이다. 우선 그 주 세력이 거의 경남이라는 지방에 편중되어 있고 또한 교세도 상대가 되었던 교단들에 비하여 현저히 적은 형편이다. 교단을 대표할 만한 중심적인 대형교회 하나조차 없는 형편이다. 고신교단 스스로도 일반인의 외부적 평가에 대하여는 변명이 없다. 현저히 열세임을 자인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역사적 의미 또는 전 교파적 의미에서 모임을 갖게되면, 고신이 제외된 상황은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신사참배문제를 기준으로 본다면 고신은 절대다수의 한국교회를 죄인으로 묶으면서 자신들은 그 대칭점에 홀로 세울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정당했던 억지였던 상관없이 어떤 반대측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고신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한국교회사는 해방 후 많은 교회사적 고비가 있었다. 그때마다 일반 교단들로서는 고신이라는 작은 장애물 하나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하는 유혹을 느껴보지 않았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고신이 한국교회에서 이런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은 몇 가지 이유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①북한교회의 완전몰락
해방 후 기독교 선진 지방이었던 북한쪽에는 공산주의에 의하여 완전히 그 외형이 제거되어 버렸고 남한 교회만으로 한국교회가 되었다. 평양신학교로 일컫던 시절을 생각해보더라도, 해방후 3.8이북의 주도권이 기독교 세력인 조선민주당 조만식에게 넘겨졌던 예만 보더라도, 경남지방의 모든 목회자들이 평양에까지 유학을 하며 목사 길을 배웠음을 고려해도 그러하다.
②장로교의 한국교계에서의 특수한 위치
미국 등과 달리 독특하게도 한국교계에서만은 신앙의 모든 면, 즉 정통성 보수성 건전성 활동성 외형성에 이르기까지 주도적 입장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곧 한국교회사는 장로교회사라고까지 할 수 있으며, 장로교의 중심은 한국교회의 중심에 곧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③한국교회의 보수성
한국교회는 초기 복음주의적 노선에 충실한 선교사들로 인하여 특수하게 보수적 교계가 되었다. 이런 보수적 경향은 자칫 수도 없이 많았던 사건들 중에 한 사건으로 지나갈 수 있었던 신사참배 문제를 오히려 확대 재생산해가며 오늘에까지 그 영향력을 교계운영의 한 축이 될 위치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민주화의 기준으로 교계입장을 보는 이들은 해방 이전과 이후가 권위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 입장이었다면서 그 차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으며, 인권의 기준으로 보는 이들은 인권이 완전히 확보된 최근을 기준으로 양분을 하기도 하며, 민족주의적 기준이라면 남한은 일제청산이 현재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오히려 북한의 자주적 정통성을 인정하고 남한은 아직도 일제침략의 다른 모습으로 보는 정도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입장이 강했던 장로교는 해방직후에만 해도 순수 복음주의적 입장에 반대하는 신신학적 학설들은 설 수 있는 입지조차를 없앴고 오직 "제2계명을 어긴 교회냐 지킨 교회냐"라는 지극히 작은 한 교리의 모퉁이로만 가지고 한국교회를 간단하게 양분시킬 수 있었다. 2계명을 지킨 이들은 전부 옳고 2계명을 어긴 쪽은 다 틀렸다는 방향으로 대세가 잡혀가게 되었다. 이 정도로 극보수적인 복음주의 입장이 대세를 이루었기 때문에 장로교 안에서는 도저히 교권투쟁에서 맞상대가 될 수 없었던 한 지방의 소수파가 전국의 대다수 교회를 향하여 동등한 입장에서 찬반논쟁을 가지게 되었다.
④한국교회의 분열과 경쟁의 상호작용
결과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비록 신사참배라는 대사건이 없었더라도 오늘에 보는 분열상은 있었을 것이다. 대개 한국교회의 분열상을 신사참배 사후처리 과정의 갈등에서 그 시작을 연구하는 것은 교회가 성장하게 되면 당연히 속화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무시한 주장이다. 물론 일제 점령하의 한국인 활동은 전체적으로 위축이 되었고 더구나 교회는 신사참배로 극히 축소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지배가 없었다고 해도 한국교회는 성장기를 넘어서면서 같은 종류의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그 초기를 지나면서 어느 정도 자기에 대하여 현실 방향과 속성을 파악하고 자신감이 붙고 나면 그동안 겉돌며 겸손하고 조심스러웠던 소심함이 갑자기 돌변하여 수습 못할 영웅으로 바뀌는 기질이 있다. 이런 과정에서는 어느 한 자극이라도 가해지면 감정과 자기 주장을 급진적으로 관철시키며 반대측과는 합리와 논리적 연구과정을 생략하고 분리하고 한번의 분리는 결국 핵분열로 치닫는 것이다. 주변에서 그런 예를 하나 보게 되면 이후 헤아리기도 어려운 정도로 그 범위를 넘어가게 된다. 오늘 신학교의 범람, 개별 교회들의 분열 범람, 교계단체들의 분열 범람, 출판사 연구소의 분열, 신학박사학위까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신사참배 하나에 그 원인을 다 지울 수 없는 사안들이다. 신사참배사건이 없었더라도 다 나타날 일들이었다.
이런 분열상은 한편으로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면만 거론되어 세상 기준의 통폐합론이 제시되곤 한다. 그 취지는 원래대로의 복구가 아니고 다시는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도록 제3의 변형질로 나가게 된다. 한국교회에 내재된 공통적 속성이다. 교계의 통합운동에 대한 입장은 이러하다.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잘못된 분리는 회개하여 재통합이 되어야 하나 분리 당시 또는 그이후 교리나 신앙노선적 상이점이 있게 된다면 물량적 통합은 금물이다. 철저한 연구와 신중한 신학 신앙적 접근이 전제되지 않은 복구는 이전보다 더 복잡한 문제로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고 끝내 돌아올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교회의 갈등과 분리는 대개 외부적 문제가 원인이다. 그러나 무조건적 통합은 외부적인 단점으로 분리되었던 양측에게 내부적 내면적 문제를 새로 던지게 되고 결국 교회는 안팎의 갈등요인들 속에서 완전히 방향감각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후 교회는 더 큰 분리와 모순으로 겉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것이 고신과 총신이 분리되었다가 재통합되면서 이후 교단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이 진행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신사참배 문제가 원인이었으나 그 문제가 없었더라도 그런 극단적 투쟁은 있었으리라는 주장이다.
다행히 인간의 실수까지도 의롭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분리 일변도로 나간 한국교회는 자멸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단점 중 하나인 시기심이 경쟁의식으로 변환이 되었고 이것이 더 큰 충성을 만들었다. 교회성장이라는 뜻밖의 결과가 생겼다. 교회의 성장과정이 이렇게 되었으나 결국 한국교회는 세계대형교회 10개중 4개를 50개 교회중 30여개를 보유하고 세계교회를 주도하는 입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역시 대단히 특이한 경우이다. 경쟁심이 한국교회에게 지극히 큰 장점이 되었고 보배로 작용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 생각 못했던 결과가 있었다. 곧 보수논쟁이었다.
이장림의 재림논쟁은 원래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일이 언제라고 못박을 수 있느냐는 신학적 문제였다. 이장림 측이 세상사람들에게 물의를 일으키자 이장림은 사이비고 따라서 이장림이 주장하는 예수님이 구름타고 다시 온다는 재림까지 비웃음을 사게 되어 이장림의 재림론을 비판하면서 시한부만 잘못된 것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론 전부를 부정하는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신신학 관련 학자들이 대거 세상언론에 나가 재림론 전체를 매도해 버린 것이다. 재림론은 진리이며 이장림의 잘못은 시기를 한정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통신학은 앉을 자리도 없었다. 여론이 무서워 숨어만 있었다. 결과적으로 사이비 주장 때문에 정통재림론이 변명 한번 못하고 연금되는 형편이 되었던 것과 같이 한국교회의 보수논쟁은 반대로 한국교회에게 속화와 타락을 크게 지연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극단적인 경쟁심으로 이어졌고 고신보다 낫기 위해, 또 총신보다 낫기 위해 양측의 구호는 "정통", 노력은 "교세"였다. 이후 양교단이 합동을 하고 또 재재분열이 가속화되면서 이런 현상은 모든 분열교단들에게 해당되어, 보수, 정통, 개혁이라는 구호가 한국의 장로교회를 뒤덮었다. 내심 자유주의에 동의를 하고 교회를 움직이고 싶어도 경쟁 교회에서 비난을 할까, 경쟁 교단의 보수 정통 경쟁에서 불리해질까 하여 한국교회는 실력 이상의 보수를 가지게 되었다. 자유로워지면 더 풀려 더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죄의 속성이라면 될 수 있는 대로 보수로 묶어 두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보수가 무엇인지, 자기의 주장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군중심리 경쟁심리 때문에 원치 않게 보수신앙을 더 오래 지키게 되었을지라도 이것은 결과적으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순복음교회가 1990년대까지 이단으로 몰린다는 것은 미주교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는 사안이다.
한편 한국교회는 문제가 된 사안이라도 대개 1-20년이 지나면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는 오늘까지도 그 의미가 살아있음을 주목해야한다. 한국의 모든 경제력 두뇌력 기술력 거의가 서울에 집중하듯 서울 장안의 고신은 극소수파에 지나지 않는데 서울 장안에서 모이는 범교단 회의에서는 고신이 빠질 수 없는 것은 이런 특수성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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