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복음성가 (추가 - 12.7)
(첨부파일)복음성가-타이핑
공회의 거창 지방 동산교회 교인들이, 건전했던 한국교회의 1950년대 애창 복음성가를 배껴 기록한 내용입니다.
오타 등을 살피고 정본으로 발표할 때까지는 다른 곳에 인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확인 본을 옮기게 되면 훗날 정본과 미확인본이 함께 돌아 다니면서 혼란해 집니다. 미리 공개하는 것은 혹 원본이나 오타를 잡아 주실 분에게 부탁하는 뜻입니다.
한국의 찬송가는
선교와 함께 선교사들이 고향에서 은혜 받고 불러 온 유명한 찬송가를 선곡하여 1935년에 '신편찬송가'로 또 1962년에는 '새찬송가'로 내려 왔습니다. 1983년에 만들어진 통일찬송가부터는 WCC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어 이 노선에서는 아예 외면하지만, 신편찬송가의 신앙 찬송을 새찬송가는 성가곡으로 변질을 시켜 아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해방 후, 한국 교회는 선교 50년이 훨씬 넘어 가는 시점에 선교사들이 가르친 초보와 기초 신앙을 넘어 서면서 선교사를 넘어 서는 신앙으로 자라 갔고 그런 내면이 새로운 복음성가 속에 묻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신앙의 깊이와 역사와 신학의 전문성이 뛰어 났지만 이미 기독교 국가라는 환경 때문에 신앙 초기부터 신앙 자체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절박함은 사실 가져 보지를 못했습니다. 또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세 끼 식사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하늘 나라 외에는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찬송가는 뭔가 겉도는 느낌이 많았습니다. 거지에게는 부자의 고급 차량과 고급 식사가 창 밖의 그림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유재헌 목사님을 중심으로, 전국의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교회의 교인들만이 지을 수 있고 또 우리의 신앙에 깊은 내면이 그대로 표출 되는 찬송가들이 쏟아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 시절을 겪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신학에 의하면 한국 교인들이 각오하고 감사하는 찬송은 '찬송'이 아니었기 때문에 '복음성가'라는 2류 이름을 붙입니다. 미국에 유학을 다녀 온 한국 신학자들이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놓은 점이 더 많습니다. 그들은 뭔가 정식을 배웠고 이들은 한글도 잘 모르고 신학이란 너무 모르기 때문에 일시 눈물이나 짜 내는 또는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 진 하나의 투정처럼 화김에 나오는 수준 낮은 간증 정도로 취급을 했습니다.
이 노선은 선교사들에게 늘 감사하면서도 이런 대목이 나오면 질문을 하게 됩니다.
찬송은 신앙의 내면에서 누르고 누르다가 더 이상 누를 수 없어 토해 내는 감탄인데, 여러 분들은 조상 대대로 모태 신앙이어서 교회를 출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활이지만 우리에게는 그 한 번의 발걸음에 천지가 뒤집어 지고 온 가정과 가문에 일대 전쟁이 벌어 지는 상황을 각오해야 하고, 그런 환경의 급박하고 무거운 상황 때문에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 혹시 느끼지는지?
부자의 빵 한 조각과 10일을 굶은 거지의 빵 한 조각은 영양학적으로는 같지만
그 것을 보는 순간 거지가 느낀 감사와 감격과 터쳐 나오는 희열이란 부자가 알 도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정말 깊은 찬송은 선교사들이 전해 준 미국과 서구의 찬송가보다 해방 후 쏟아 진 한국 교인들의 복음성가들 중에 있지 않을까? 1983년에 한국 교회가 찬송가를 아주 폐기해 버릴 때 공회는 지난 날의 찬송가 노선을 발표할 기회를 기다렸는데 1987년에 공회의 이런 심정을 처음 표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 오실 때까지 그리고 천국에서 이어 질 찬송을 정본으로 준비하면서 과거 공회의 초기 교인들이 생활 속에 품어 온 찬송가들을 소개합니다.
해방 후라고 하지만
또 한국 교인들의 고난 속에서라고도 했지만
그 중에서도 전국적으로 가장 어려운 중에 있었던 마을들과 그 곳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전해 지며 모여 지던 복음성가들이 있었고, 그런 찬송가들 중에서 공회 신앙에 깊은 분이 따로 보관해 온 것이어서 공회의 초기 교인들의 당시를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재건교회 고신교회 공회교회의 초기 교인들에게는 이런 찬송가 주를 이루었고
합동 교단 정도가 되면 일부만 그렇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공회의 거창 지방 동산교회 교인들이, 건전했던 한국교회의 1950년대 애창 복음성가를 배껴 기록한 내용입니다.
오타 등을 살피고 정본으로 발표할 때까지는 다른 곳에 인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확인 본을 옮기게 되면 훗날 정본과 미확인본이 함께 돌아 다니면서 혼란해 집니다. 미리 공개하는 것은 혹 원본이나 오타를 잡아 주실 분에게 부탁하는 뜻입니다.
한국의 찬송가는
선교와 함께 선교사들이 고향에서 은혜 받고 불러 온 유명한 찬송가를 선곡하여 1935년에 '신편찬송가'로 또 1962년에는 '새찬송가'로 내려 왔습니다. 1983년에 만들어진 통일찬송가부터는 WCC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어 이 노선에서는 아예 외면하지만, 신편찬송가의 신앙 찬송을 새찬송가는 성가곡으로 변질을 시켜 아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해방 후, 한국 교회는 선교 50년이 훨씬 넘어 가는 시점에 선교사들이 가르친 초보와 기초 신앙을 넘어 서면서 선교사를 넘어 서는 신앙으로 자라 갔고 그런 내면이 새로운 복음성가 속에 묻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신앙의 깊이와 역사와 신학의 전문성이 뛰어 났지만 이미 기독교 국가라는 환경 때문에 신앙 초기부터 신앙 자체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절박함은 사실 가져 보지를 못했습니다. 또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세 끼 식사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하늘 나라 외에는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찬송가는 뭔가 겉도는 느낌이 많았습니다. 거지에게는 부자의 고급 차량과 고급 식사가 창 밖의 그림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유재헌 목사님을 중심으로, 전국의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교회의 교인들만이 지을 수 있고 또 우리의 신앙에 깊은 내면이 그대로 표출 되는 찬송가들이 쏟아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 시절을 겪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신학에 의하면 한국 교인들이 각오하고 감사하는 찬송은 '찬송'이 아니었기 때문에 '복음성가'라는 2류 이름을 붙입니다. 미국에 유학을 다녀 온 한국 신학자들이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놓은 점이 더 많습니다. 그들은 뭔가 정식을 배웠고 이들은 한글도 잘 모르고 신학이란 너무 모르기 때문에 일시 눈물이나 짜 내는 또는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 진 하나의 투정처럼 화김에 나오는 수준 낮은 간증 정도로 취급을 했습니다.
이 노선은 선교사들에게 늘 감사하면서도 이런 대목이 나오면 질문을 하게 됩니다.
찬송은 신앙의 내면에서 누르고 누르다가 더 이상 누를 수 없어 토해 내는 감탄인데, 여러 분들은 조상 대대로 모태 신앙이어서 교회를 출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활이지만 우리에게는 그 한 번의 발걸음에 천지가 뒤집어 지고 온 가정과 가문에 일대 전쟁이 벌어 지는 상황을 각오해야 하고, 그런 환경의 급박하고 무거운 상황 때문에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 혹시 느끼지는지?
부자의 빵 한 조각과 10일을 굶은 거지의 빵 한 조각은 영양학적으로는 같지만
그 것을 보는 순간 거지가 느낀 감사와 감격과 터쳐 나오는 희열이란 부자가 알 도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정말 깊은 찬송은 선교사들이 전해 준 미국과 서구의 찬송가보다 해방 후 쏟아 진 한국 교인들의 복음성가들 중에 있지 않을까? 1983년에 한국 교회가 찬송가를 아주 폐기해 버릴 때 공회는 지난 날의 찬송가 노선을 발표할 기회를 기다렸는데 1987년에 공회의 이런 심정을 처음 표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 오실 때까지 그리고 천국에서 이어 질 찬송을 정본으로 준비하면서 과거 공회의 초기 교인들이 생활 속에 품어 온 찬송가들을 소개합니다.
해방 후라고 하지만
또 한국 교인들의 고난 속에서라고도 했지만
그 중에서도 전국적으로 가장 어려운 중에 있었던 마을들과 그 곳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전해 지며 모여 지던 복음성가들이 있었고, 그런 찬송가들 중에서 공회 신앙에 깊은 분이 따로 보관해 온 것이어서 공회의 초기 교인들의 당시를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재건교회 고신교회 공회교회의 초기 교인들에게는 이런 찬송가 주를 이루었고
합동 교단 정도가 되면 일부만 그렇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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