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 인물과 관련 된 해방 전후 인물사 - 김익진 정기수
[첨부파일]정교진신앙과학문2018.12해방전후월남개신교정치인김병연의애국애족운동연구
조만식 측근 2명(정기수 김익지)과 공회 연결
해방전후 월남 개신교 정치인
1. 김익진
사직동교회 김증한 교수의 부친, 일제 때 판사 변호사, 해방 후 제2대 검찰총장. 조만식 법조 담당, 김증한이 정기수 사위
김증한은 공회의 1972년 국기배례 사건을 대법원에서 승소하게 했고, 1988년 사직동교회 사건에서 대문에서 함께 예배
서울대 법대 학장, 교육부 차관, 민법을 제정하며 교회 총유법 제정. 1980년대에 동아대 부총장으로 오면서 서부교회 출석
2. 정기수
남천교회 최기주 권사님의 남편, 평양 오산학교 교장, 조만식의 외교 부장, 김증한의 장인이 되고 공회 남천교회 중심 가정
우현룡 목사님이 둘째 사위, 송종섭 목사님이 세째 사위. 월남 후 일체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정계와 교육계의 거물급 인사
* 김익진과 정기수는 '정교진, 해방전후 월남 개신교 정치인, 김병연의 애국 애족 운동 연구'에서 조만식 관계가 나온다.
'신앙과 학문, 23(4), 179-21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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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첨부파일 확인
p184. "위원장에는 조만식이, 부위원장은 오윤선,"
해방 다음날, 석방된 김병연은 조만식을 수반으로 하는 최초의 정치활동이었던 '조선건국 평안남도 준비위원회'(이하, 평남 건준)에 참여했다.5) 조만식은 평남 건준의 조직 편성을 김병연과 이주연에게 맡겼다. 이 두 사람의 기초 작업위에 다른 준비위원들의 의견을 모아 17일 오후 2시에 평남 건준이 조직되었다. 위원장에는 조만식이, 부위원장은 오윤선, 총무부장은 이주연, 치안부장에 최능진, 선전부장에 한재덕, 교육부장에 홍기주, 산업부장 홍정모, 재정부장 박승환, 생활부장 이종현, 지방부장 이윤영, 외교부장 정기수, 무임소(민족주의) 김병연, 무임소(법조계) 한근조, 무임소(법조계) 김익진, 무임소(천주교) 김필현, 무임소(유림) 지창규, 여성부장 박현숙, 무임소(의학) 김병서, 무임소(민족주의) 김동원, 무임소(법조계) 노진설, 무임소 김광진 등, 총 21명이었
다.
p186. "평남 건준의 위원이 조만식을 비롯해서 오윤선"
조선민주당은 11월 3일 평양에서 105인 발기인 이름으로 창당하여 33인의 중앙상무 집행위원을 선출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조만식(당수), 이윤영(부당수), 최용건(부당수), 오윤선, 이종현, 김병연, 우제순, 김익진, 백남홍, 김책, 조종완, 홍기한, 정인숙, 박현숙, 한여사, 오영진, 김규환, 이계환, 윤무준, 박재창, 박승환, 이호빈, 윤장엽,전영택, 홍기주, 차재익, 전준삼, 박선권, 김병조, 조명식, 고몽헌, 2명 불명, 이들 중 평남 건준의 위원이 조만식을 비롯해서 오윤선, 이윤영, 김병연, 김익진, 박현숙, 홍기주 등 일곱 명이 된다(김창순, 1990: 244).
(설명)
해방 직후 38선 이북을 맡은 건준 위원장이 조만식, 부위원장이 오윤선(동생이 오형선, 주남선과 함께 거창읍교회 설립)
총독부에게 이북 지역을 인계 받고 김일성보다 먼저 북한을 통치한 조만식 주변에 여러 면으로 공회와 연결 될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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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진)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대법관 및 제2대 검찰총장.
2. 생애[편집]
1896년 8월 9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아버지 김일규(金一圭, 1863. 8. 23 ~ 1914. 11. 11)와 어머니 능성 구씨(1863 ~ 1922. 1. 18) 구형원(具亨元)의 딸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경성전수학교[6]를 제1회로 졸업하고 1918년 경성지방법원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에 임명되어 근무를 시작하여 1919년부터 1920년까지 공주지방법원 홍성지청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조선총독부 판사특별임용시험을 통과하여 1921년 평양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재직하였다.[7] 이후 1922년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 1923년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 1924년 함흥지방법원, 1925년부터 1926년까지 평양지방법원, 1927년 평양복심법원 함흥지청을 거쳐 평양복심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8]
그후 1927년 사직하고 평양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다. 변호사로서 활동하면서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민족주의, 계몽주의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재야 법조인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제4차 조선공산당 평양지부 사건의 변론을 맡았고, 평양 기생에 대한 경찰의 인권 탄압에 항의하는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고, 평안남도에서 순사가 도박 혐의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가한 사건에서 순사를 고소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소련군정의 반탁진영에 대한 탄압 과정에서 간첩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북한을 탈출하여 월남하였고 1948년 정부수립후 최초의 대법관 인사에서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에는 검찰총장으로 임명되는데, 당시 반공 정책을 강화하던 이승만 정권은 공산 치하에서 고생을 한 김익진이 검찰총장으로 적격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이후 여러 사건에서 대통령과 검찰총장은 대립하게 된다.
김태수 등의 정치 브로커들이 공산 게릴라가 봉기할 것이라는 날조된 정보를 보고하고 사설 수사기관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하여 공산당으로 몰아가다가 발각이 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에서 이승만은 검찰이 관여하지 말 것을 특명하고 기소하지 말라는 친서까지 보냈으나, 김익진은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직접 지휘하여 수사 및 기소하도록 하여, 108명을 검거하고 김태수 등 11명을 기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담당 검사들이 기소장을 작성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친서를 공개하지 않았고, 대통령에게 '현행법상 불기소처분이 불가능하다'는 답신을 보내 부당한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검찰의 중립성을 지키려 애썼다.
또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노덕술을 체포하려는 것을 당시 서울특별시청 경찰국장이던 김태선이 방해하자, 김익진 검찰총장은 김태선을 범인은닉 혐의로 입건해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같은 일로 인해 이승만은 격노하였고, 1950년 6.25 전쟁 사흘 전 검찰총장에서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좌천되고 만다. 김익진은 정치적 압력으로 검사를 몰아낼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치욕스런 강등에도 불구하고 서울고검장 직무를 수행하였다.[9]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자, 김익진이 평소 좌천 인사에 대해 정부에 불만을 갖고 있다가 배후인물로 지목된 김시현과 연좌하였다는 피의사실로 구금되었는데 1심과 2심에서 무죄, 상고심에서는 면소판결을 받았다.
197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3. 가족[편집]
1남 김증한 전 서울대 법대 교수 / 처 정영숙 (정기수 女)
김학동 전 서울시립대 교수
김혜동 / 夫 최연희
2남 김창한
3남 김흥한 변호사 - 국내 최초 법무법인 김장리 설립
장소: 남천교회 기도원, 충북 제천시 송학주천로 71-1
일시: 2012.3.27
묘소를 이장한 후 가족들이 함께 한 사진으로 보이며
앞줄 중앙 넥타이 송종섭, 우측 2번 검정양복 우현룡 부부



(정기수)
부인: 최기주 남천교회 개척
처제: 최금주 청량리교회 개척
처남: 최기훈, 석굴암 조실대사
* 공회 인물사 참조
(오윤선)
동생이 오형선으로 거창에서 활동, 주남선과 거창읍교회를 개척. 후에 웅양교회 (노현리교회) 첫 조사가 되는데 해방 후 백영희는 개명 봉산 웅양 교회를 목회한다. 오윤선 오형선 오원선, 3형제는 해방 전후 한국 사회와 교회사에 많은 기록을 남기며 오윤선은 조만식이 위원장일 때 부위원장을 했고 '하나님의 섭리 따라 오형선 장로의 선교 발자취' 등으로 출간 된 도서에 자세히 나온다. 백영희의 일제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대한 언급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
조만식 측근 2명(정기수 김익지)과 공회 연결
해방전후 월남 개신교 정치인
1. 김익진
사직동교회 김증한 교수의 부친, 일제 때 판사 변호사, 해방 후 제2대 검찰총장. 조만식 법조 담당, 김증한이 정기수 사위
김증한은 공회의 1972년 국기배례 사건을 대법원에서 승소하게 했고, 1988년 사직동교회 사건에서 대문에서 함께 예배
서울대 법대 학장, 교육부 차관, 민법을 제정하며 교회 총유법 제정. 1980년대에 동아대 부총장으로 오면서 서부교회 출석
2. 정기수
남천교회 최기주 권사님의 남편, 평양 오산학교 교장, 조만식의 외교 부장, 김증한의 장인이 되고 공회 남천교회 중심 가정
우현룡 목사님이 둘째 사위, 송종섭 목사님이 세째 사위. 월남 후 일체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정계와 교육계의 거물급 인사
* 김익진과 정기수는 '정교진, 해방전후 월남 개신교 정치인, 김병연의 애국 애족 운동 연구'에서 조만식 관계가 나온다.
'신앙과 학문, 23(4), 179-21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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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첨부파일 확인
p184. "위원장에는 조만식이, 부위원장은 오윤선,"
해방 다음날, 석방된 김병연은 조만식을 수반으로 하는 최초의 정치활동이었던 '조선건국 평안남도 준비위원회'(이하, 평남 건준)에 참여했다.5) 조만식은 평남 건준의 조직 편성을 김병연과 이주연에게 맡겼다. 이 두 사람의 기초 작업위에 다른 준비위원들의 의견을 모아 17일 오후 2시에 평남 건준이 조직되었다. 위원장에는 조만식이, 부위원장은 오윤선, 총무부장은 이주연, 치안부장에 최능진, 선전부장에 한재덕, 교육부장에 홍기주, 산업부장 홍정모, 재정부장 박승환, 생활부장 이종현, 지방부장 이윤영, 외교부장 정기수, 무임소(민족주의) 김병연, 무임소(법조계) 한근조, 무임소(법조계) 김익진, 무임소(천주교) 김필현, 무임소(유림) 지창규, 여성부장 박현숙, 무임소(의학) 김병서, 무임소(민족주의) 김동원, 무임소(법조계) 노진설, 무임소 김광진 등, 총 21명이었
다.
p186. "평남 건준의 위원이 조만식을 비롯해서 오윤선"
조선민주당은 11월 3일 평양에서 105인 발기인 이름으로 창당하여 33인의 중앙상무 집행위원을 선출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조만식(당수), 이윤영(부당수), 최용건(부당수), 오윤선, 이종현, 김병연, 우제순, 김익진, 백남홍, 김책, 조종완, 홍기한, 정인숙, 박현숙, 한여사, 오영진, 김규환, 이계환, 윤무준, 박재창, 박승환, 이호빈, 윤장엽,전영택, 홍기주, 차재익, 전준삼, 박선권, 김병조, 조명식, 고몽헌, 2명 불명, 이들 중 평남 건준의 위원이 조만식을 비롯해서 오윤선, 이윤영, 김병연, 김익진, 박현숙, 홍기주 등 일곱 명이 된다(김창순, 1990: 244).
(설명)
해방 직후 38선 이북을 맡은 건준 위원장이 조만식, 부위원장이 오윤선(동생이 오형선, 주남선과 함께 거창읍교회 설립)
총독부에게 이북 지역을 인계 받고 김일성보다 먼저 북한을 통치한 조만식 주변에 여러 면으로 공회와 연결 될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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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진)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대법관 및 제2대 검찰총장.
2. 생애[편집]
1896년 8월 9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아버지 김일규(金一圭, 1863. 8. 23 ~ 1914. 11. 11)와 어머니 능성 구씨(1863 ~ 1922. 1. 18) 구형원(具亨元)의 딸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경성전수학교[6]를 제1회로 졸업하고 1918년 경성지방법원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에 임명되어 근무를 시작하여 1919년부터 1920년까지 공주지방법원 홍성지청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조선총독부 판사특별임용시험을 통과하여 1921년 평양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재직하였다.[7] 이후 1922년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 1923년 공주지방법원 충주지청, 1924년 함흥지방법원, 1925년부터 1926년까지 평양지방법원, 1927년 평양복심법원 함흥지청을 거쳐 평양복심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8]
그후 1927년 사직하고 평양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다. 변호사로서 활동하면서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민족주의, 계몽주의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재야 법조인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제4차 조선공산당 평양지부 사건의 변론을 맡았고, 평양 기생에 대한 경찰의 인권 탄압에 항의하는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고, 평안남도에서 순사가 도박 혐의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가한 사건에서 순사를 고소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소련군정의 반탁진영에 대한 탄압 과정에서 간첩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북한을 탈출하여 월남하였고 1948년 정부수립후 최초의 대법관 인사에서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에는 검찰총장으로 임명되는데, 당시 반공 정책을 강화하던 이승만 정권은 공산 치하에서 고생을 한 김익진이 검찰총장으로 적격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이후 여러 사건에서 대통령과 검찰총장은 대립하게 된다.
김태수 등의 정치 브로커들이 공산 게릴라가 봉기할 것이라는 날조된 정보를 보고하고 사설 수사기관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하여 공산당으로 몰아가다가 발각이 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에서 이승만은 검찰이 관여하지 말 것을 특명하고 기소하지 말라는 친서까지 보냈으나, 김익진은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직접 지휘하여 수사 및 기소하도록 하여, 108명을 검거하고 김태수 등 11명을 기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담당 검사들이 기소장을 작성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친서를 공개하지 않았고, 대통령에게 '현행법상 불기소처분이 불가능하다'는 답신을 보내 부당한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검찰의 중립성을 지키려 애썼다.
또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노덕술을 체포하려는 것을 당시 서울특별시청 경찰국장이던 김태선이 방해하자, 김익진 검찰총장은 김태선을 범인은닉 혐의로 입건해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같은 일로 인해 이승만은 격노하였고, 1950년 6.25 전쟁 사흘 전 검찰총장에서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좌천되고 만다. 김익진은 정치적 압력으로 검사를 몰아낼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치욕스런 강등에도 불구하고 서울고검장 직무를 수행하였다.[9]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자, 김익진이 평소 좌천 인사에 대해 정부에 불만을 갖고 있다가 배후인물로 지목된 김시현과 연좌하였다는 피의사실로 구금되었는데 1심과 2심에서 무죄, 상고심에서는 면소판결을 받았다.
197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3. 가족[편집]
1남 김증한 전 서울대 법대 교수 / 처 정영숙 (정기수 女)
김학동 전 서울시립대 교수
김혜동 / 夫 최연희
2남 김창한
3남 김흥한 변호사 - 국내 최초 법무법인 김장리 설립
장소: 남천교회 기도원, 충북 제천시 송학주천로 71-1
일시: 2012.3.27
묘소를 이장한 후 가족들이 함께 한 사진으로 보이며
앞줄 중앙 넥타이 송종섭, 우측 2번 검정양복 우현룡 부부



(정기수)
부인: 최기주 남천교회 개척
처제: 최금주 청량리교회 개척
처남: 최기훈, 석굴암 조실대사
* 공회 인물사 참조
(오윤선)
동생이 오형선으로 거창에서 활동, 주남선과 거창읍교회를 개척. 후에 웅양교회 (노현리교회) 첫 조사가 되는데 해방 후 백영희는 개명 봉산 웅양 교회를 목회한다. 오윤선 오형선 오원선, 3형제는 해방 전후 한국 사회와 교회사에 많은 기록을 남기며 오윤선은 조만식이 위원장일 때 부위원장을 했고 '하나님의 섭리 따라 오형선 장로의 선교 발자취' 등으로 출간 된 도서에 자세히 나온다. 백영희의 일제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대한 언급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