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천교회 1909년 1월 설립
현재, 경남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위천교회, 담임목사 안현
설립, 1909년
* 교회 설립 초기
고제면 개명리(註. 개명교회 설립 1903년) 온 권서 권응서의 전도에 유응춘이 처음 신앙
1909.1, 상천리 6통 6호 3칸짜리 집을 매입 후 기도소로 정하고 예배 시작
1915. 예배당을 장기리로 이전
1920년대, 노은상 고운서가 전도하여 교인이 40여 명
* 의병 활동
1910년 교인 중 ‘전주 모씨’가 의병 활동으로 일본 헌병에 검거되어 전주 옥에 감금 중 탈출, 위천교회로 피신.
일본 헌병이 교회에 도착했을 때 도망갔고 교인들이 구타 감금되어 유응춘은 진주 라대벽 선교사에게 보고.
선교사는 헌병들이 요구 하는 30원을 주고 해결. 이 과정에서 교회의 지도자가 서간도로 이주. 교회는 쇠퇴.
* 위천교회는 신사참배를 이기지 못했고 신앙은 피폐
* 1949.7. 백영희 전도사 개명교회에서 부임. 광복 후 국기 경례가 일제 최경례로 90도를 굽히는 배례로 진행.
위천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 박해를 이겼고 전국 곳곳도 거부하며 정부는 가슴에 손을 얹는 주목으로 변경.
* 1950.6.25 전쟁의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도 예배 계속. 50.9.28.경 예배에 들어온 북한군을 호령하며 쫓아냈고,
인민군 퇴각 후 미군의 폭격에 예배당의 오폭을 막기 위해 청년들이 지붕에 CHURCH를 적었으나 이를 철회.
예배당 뒷산이 빨치산 남부군 본부여서 친미 운동으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한 것. 전투나 폭격 중에는 일시 피신.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 중에는 교회 강단 계단이나 인근의 학교 교실에 강단 아래 기도하며 교회를 지켰고
전쟁 중에도 주일과 밤예배와 새벽예배를 지속했고, 고신의 지도부의 파송을 받은 부산의 방문객이 직접 목도.
* 1952.7. 고신 지도부는 부산의 서부교회의 파행을 막기 위해 위천교회 백영희 전도사에게 부임을 요구. 이주
공회가 가진 위천교회 시절 자료나 이야기는 공회 내에서는 아는 인물이 거의 없어, 공회나 백영희를 이단으로 비판한 교단이나 인물들을 위주로 자료를 수집한 결과입니다. 당시의 실제 이야기는 이보다 더 극적이나 교계를 향해 객관적 자료 제시와 연구를 위해 평소 그렇게 진행합니다.
아는 내용도 있고 또 새로운 내용도 있습니다.
현재 소속을 달리 하는 고신 쪽의 자료여서 저희로서는 의미도 더해 집니다.
돌아 가셨는지 몰라도 얼마 전에도 위천교회에서 정정하게 6.25 당시를 설명하시던 고신 장로님의 증언이 계셨습니다.
기독교보 1550호 - 23.9.16 "100년고신교회(33)"
위천교회 1909년 1월 설립
현재, 경남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위천교회, 담임목사 안현
설립, 1909년
* 교회 설립 초기
고제면 개명리(註. 개명교회 설립 1903년) 온 권서 권응서의 전도에 유응춘이 처음 신앙
1909.1, 상천리 6통 6호 3칸짜리 집을 매입 후 기도소로 정하고 예배 시작
1915. 예배당을 장기리로 이전
1920년대, 노은상 고운서가 전도하여 교인이 40여 명
* 의병 활동
1910년 교인 중 ‘전주 모씨’가 의병 활동으로 일본 헌병에 검거되어 전주 옥에 감금 중 탈출, 위천교회로 피신.
일본 헌병이 교회에 도착했을 때 도망갔고 교인들이 구타 감금되어 유응춘은 진주 라대벽 선교사에게 보고.
선교사는 헌병들이 요구 하는 30원을 주고 해결. 이 과정에서 교회의 지도자가 서간도로 이주. 교회는 쇠퇴.
* 위천교회는 신사참배를 이기지 못했고 신앙은 피폐
* 1949.7. 백영희 전도사 개명교회에서 부임. 광복 후 국기 경례가 일제 최경례로 90도를 굽히는 배례로 진행.
위천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 박해를 이겼고 전국 곳곳도 거부하며 정부는 가슴에 손을 얹는 주목으로 변경.
* 1950.6.25 전쟁의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도 예배 계속. 50.9.28.경 예배에 들어온 북한군을 호령하며 쫓아냈고,
인민군 퇴각 후 미군의 폭격에 예배당의 오폭을 막기 위해 청년들이 지붕에 CHURCH를 적었으나 이를 철회.
예배당 뒷산이 빨치산 남부군 본부여서 친미 운동으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한 것. 전투나 폭격 중에는 일시 피신.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 중에는 교회 강단 계단이나 인근의 학교 교실에 강단 아래 기도하며 교회를 지켰고
전쟁 중에도 주일과 밤예배와 새벽예배를 지속했고, 고신의 지도부의 파송을 받은 부산의 방문객이 직접 목도.
* 1952.7. 고신 지도부는 부산의 서부교회의 파행을 막기 위해 위천교회 백영희 전도사에게 부임을 요구. 이주
공회가 가진 위천교회 시절 자료나 이야기는 공회 내에서는 아는 인물이 거의 없어, 공회나 백영희를 이단으로 비판한 교단이나 인물들을 위주로 자료를 수집한 결과입니다. 당시의 실제 이야기는 이보다 더 극적이나 교계를 향해 객관적 자료 제시와 연구를 위해 평소 그렇게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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