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과 악에 대한 몇 가지 검토 - 09.5.14. 답변 ********

문의답변      


중생과 악에 대한 몇 가지 검토 - 09.5.14. 답변 ********

분류
yilee 0
1. 죄와 악의 관계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성을 주셨고 우리는 이 자유성으로 하나님을 떠날 수가 있는데

하나님을 떠나는 하나의 행위를 두고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기준으로 하면 '죄'이고

하나님을 떠나는 하나의 행위를 두고 '주체'를 기준으로 표현하면 '악'이 됩니다.


죄를 좁게 잡지 않고 넓은 범위로 잡으면 자기 중심도 하나님이 금한 법을 어기는 것이고

우리 모든 죄를 악으로만 살펴도 그 죄의 내용은 전부 악의 종류와 과정으로 분석 됩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는 동일한 하나의 행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여러 면으로 가르치기 위해

주체와 규칙이라는 두 기준을 주신 것이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선후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다만 보통 우리가 편하게 가르치고 기억할 때는 악이 분명히 먼저이고 죄는 뒤 문제입니다.


답변자가 1989년 4월에 출간 된 '메모'의 '정의' 편을 요약할 때 자구 하나까지 전부

백 목사님께 직접 지도를 받았고 많은 면으로 질문과 반론을 드렸던 기억이 뚜렷합니다.

죄는 '법' '명령' '규칙'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좀 엄한 기준을 어긴 행위를 강조했었고

악은 그런 행위의 내면과 동기와 주체가 강조 되고 있었습니다.


2. 악성이 원죄, 악습이 본죄인 것은


아담의 첫 죄로 아담과 우리에게는 자기 중심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속에 생겨 버렸으니

이 것이 우리 속에서 모든 죄를 다 짓게 만드는 원인이며 그 죄의 성격이 자기 중심이므로

악성이라고 하고


본죄는 각자가 자기 속에 샘처럼 들어 앉아 있는 원죄가 한 번 움직이면 본죄를 한 번,

여러 번 움직이면 여러 번 본죄를 짓게 되는데 '습관'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반복을

말하지만 원죄와 본죄에서는 엄밀하게 말하면 원죄가 원래 첫 행위이고, 어느 사람이

본죄를 딱 한 번 지었다면 그 본죄만 가지고는 1 회지만, 사실은 원죄가 1 회고 그의

본죄는 2회가 되는 것이므로 모든 본죄는 기본적으로 2 회 이상의 반복으로 생깁니다.

그래서 모든 본죄는 악습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 편으로 원죄는 아담의 첫 죄만이 원죄이며 본죄는 그 내용을 알지 못해도 보통

사람의 관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신앙 교육적으로도 악습이라는 '습관'과

'반복'의 뜻이 필요했습니다.


3. 악행과 악습


악행은 자기 중심의 행위를 그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둔 표현이고

악습은 자기 중심의 행위를 그 행위 자체보다 반복 되는 관찰에 중점을 둔 표현입니다.


본죄라는 것은 끝 없이 자기 중심이 원인이 되어 수도 없는 죄들이 생산 되어 나오며

반복을 통해 처음의 작고 약한 죄가 크고 강한 죄가 되어 자라 가는 모습도 있습니다.


믿는 우리가 모든 종류의 죄를 상대할 때 그 죄의 모든 종류도 개별적으로 알아야 하지만

총론적으로 어떤 죄든 모든 죄는 그 내적 성향에 일정한 흐름이 있으니 바로 자기 중심이며

그 자기 중심은 어떤 죄로 나타나든 죄가 반복 되면 습관이 되면서 점점 강해지는 면과

그 어느 한 죄가 반복 되면 특히 그 죄의 발달과 영향력은 무섭게 자라기 때문에 악습이라는

표현을 굳이 강조하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4. 중생을 '영혼 속에 심겨진 새 생명의 원리나 성향'이라고 하는데


마치 미신의 굿풀이로 인체와 병을 총론적으로 파악하고 고치려 하던 고대 미개인들이

반복 되는 관찰과 누적 되는 통계를 가지고 개론적으로 인체와 병의 관계를 알아 가면서

인체를 외부 뿐 아니라 가죽 속에 있는 부분까지 자세하게 자꾸 나누게 되었고

그렇게 나뉜 부분 별로 나타나는 증상이 다르고 치료와 결과가 다른 것을 알게 되면서

근대에 이르면 돋보기를 들이 대고 그 돋보기의 배율이 높아지면서 세포까지 알게 됩니다.


말씀한 일반 교리들은 이런 근대 과학의 돋보기 정도로 밝아졌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데

공회의 영안은 최첨단 전자현미경의 배율 덕분에 세포 속과 염기 배열까지를 다 읽었으므로

근대 현미경과 현대 최첨단 현미경의 차이로 인해 우리 마음 속의 중생의 본질을 읽는 데에

마치 차이가 있어 양론이 생기고 반론이 있는 듯하나 실은 하나는 전 단계이고 하나는 다음

단계이므로 나무의 둥치와 그 둥치에서 더욱 뻗어 나간 가지의 차이랄까 그런 면입니다.


중생의 역사를 제대로 살펴 봤다면 몸 안에는 뭔가 신령한 것이 있으니 그냥 마음이라고

말하기에는 불신자 수준에서도 아는 것으로 너무 싱거워 '영혼'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고

그 영혼이라는 존재 안에는 인간의 일반 인적 요소나 수준에서 발견 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해상도가 흐려 뭔지 확실히 단정은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 것이 발견 된 것이 인간 내부니

하나님이 보낸 신적 은혜인지 하나님이 살려 놓은 인적 요소의 재생인지 모든 것이 애매하여

양심적이며 경건한 분들이 당대 그들의 해상도로 파악하고 내린 의료 소견서의 결론은

일반 교인들에게는 알듯 말듯한 표현, 이 말도 아니고 저 말도 아닌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마 어느 중국 선교 단체처럼 앞뒤 없이 용감했으면 당시 해상도로 수 없이 단정했을 것이고

그 결과 소 뒤 발로 맞은 것도 한 둘 있을 것이나 그 결과 수도 없는 이단이 난무했을 것인데

그래도 우리 한 세대 앞 그리고 멀리는 칼빈으로까지 올라 간 우리의 개혁 주의 선배들은

그들로서는 양심과 경건을 다하여 자신이 없는 말은 비워 두고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갔으니

앞에서 설명한 '중생이란 영혼 속에 심겨진 새 생명의 원리나 성향'이라는 표현까지입니다.

이런 교리가 만일 삼위일체나 신인양성일위였다면 토씨 단 하나에서 아리우스 아폴리나리스가

되어 역사에서 우리와는 교파가 달라질 정도가 아니고 이단을 넘어 종교가 달라질 문제인데

오늘 우리의 MRI CT PET 고해상도로 보면 사진까지 환하게 찍어 다 알기 때문에 아주 쉬우나

그 때의 초기 형태 X-ray 사진기를 가지고 알 수 있는 것은 그 표현이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표현이 이 노선의 교리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최고의 정통 핵심 교리였으나

일단 새 시대를 주시고 더 확실한 정의가 나올 해상도를 주셨는데도 과거 것을 말하면

꼭 같은 사람이 꼭 같은 표현을 해도 그 순간 이전과 이후에 대한 책임은 아주 달라집니다.

예수님 오기 전에 더듬은 것은 어리다 하지만 예수님 오신 후에 더듬으면 강퍅하다 합니다.

예수님 오기 전의 유대인은 구약 교회라 하나 오신 뒤는 바로 유대교라 해서 종교가 다릅니다.


일반 교계가 지금까지도 과거 정의에 붙들려 사용하는 '영혼의 주도적 성향'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믿고 나면 안 믿을 때 믿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세계를 확실히 가지게 되니 그 것을 여러 면으로 애매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5. 악성과 악습을 두고 더 연구한다면


: (1) 나인 것 같은 존재인 악을 존재적으로 '성질'과 '습관'으로만 구분 지은 신 이유는?


만 가지 죄를 읽는 지혜는 '자기 중심'이며, 평생의 자기 중심은 한 번 심겨진 그 악이니

에덴 동산의 악은 말하자면 첫 씨와 같아서 그 씨를 알면 나머지를 다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쥐 구멍에서 많은 쥐들이 밖으로 나와 다니는데 일단 바깥 쥐들도 개별적으로 잡아야 하나

동시에 그 모든 쥐의 뒤만 쫓다 보면 해결 난망입니다. 쥐 구명을 찾아 막아야 합니다.

돌아 다니며 별별 짓을 하는 흉칙한 쥐들은 개별 죄고, 쥐 구멍은 악이라고 한다면

그 쥐 구멍 안에 원래 옆 집에서 건너 온 쥐 한 마리 조상이 바로 원죄입니다.


그 쥐가 외래종이면 그 조상 쥐 그 쥐 한 마리의 이름은 수 많은 쥐를 상대하는데 필요하고

그 쥐의 원래 출신만 공부하다 보면 부엌으로 사방으로 다니는 현재 쥐들이 또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수 많은 죄를 성경에 기록하심도, 그 죄의 원인들을 다각도로 악으로 설명하심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추려서 에덴 동산의 선악과 하나로 요약하심도 차원 별로 필요했습니다.


: (2) 성질과 습관으로만 구분 지으면 자기중심인 악을 다 분류하는 대분류가 되는가?


새는 날고, 뱀은 기고, 나무는 박고, 개는 물고, 소는 받고, 토끼는 뛴다는 성향을 알면

사냥꾼이 뭘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며 뭘 사용해야 하는지 등등이 환하게 알게 됩니다.

죄라는 놈은 반복이 되면 눈덩이처럼 크지고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알면 크게 도움이 되고

그 죄라는 놈의 원 뿌리를 찾으면 자기 중심이라는 그 성향임을 발견하면 다 잡은 것입니다.

지금 세계가 신종 바이러스로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감기 환자의 콧물도 문제지만

작은 실험실에서 연구원 하나가 그 바이러스들의 공통점과 그 DNA 분석을 끝내고 발표하면

그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일단 끝난 것이나 마찬 가지고 이제 수습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죄라는 놈이 나는 성향인가, 기는 성향인가, 뛰는 성향인가, 그 성향 파악이 가장 중요하고

이 자기 중심이라는 성향은 반복이 되면 무섭게 변하며 강해서는 사실 역시 중요합니다.

이 것은 모든 죄 전체를 근본적으로 파악하여 모든 죄의 배후를 완벽하게 다 밝혀 놓았으므로

개별 죄는 그 죄만의 개별 특성을 파악하며 상대하되 동시에 악성 악습을 알면 바이러스의

근본 퇴치법을 치고 들어 가는 것처럼 그 모든 해결법의 핵심이 되며 전부가 됩니다.


: (3) 다른 것들로는 더 구분 짓지 못하나? 빠진 것은 없나?


나무의 뿌리와 둥치를 지적했으면 그 위에는 천지만엽이라도 달리 빠질 수가 없습니다.


: (4) 둘로 구분 짓는 것 자체의 정당성은 무엇인가? 구분 안지어도 되는 것 아닌가?


앞에서 설명이 다 되어진 것 같습니다.


: 5. 교계와의 소통을 위한 우리의 과제는 무엇 일까?


대화란 듣고 말하는 것이고, 학문이란 여러 의견을 모아 비교한 다음에 결론을 내는데

세상 지식 유무식에 상관 없이 대화와 학문이 되는 사람은 이 노선에 지지자가 되었든지

아니면 좋은 아이디어니까 살펴 보겠다고 지켜 보고 있으나


최소한 교단적으로나 신학교 단위로 말을 하면 이런 것은 단체이므로 단체에게 덕을 보려면

다수결의 힘에 굴복하고 살아야 하는데 아직 우리 한국의 다수결은 덮어 놓고 쏠리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자세도 분위기도 구조도 그런 실력도 없어 대화와 의논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교계의 부정적 인식을 바꾸고 그들을 바로 교육 시켜 설득을 하려면

경남고나 서울대나 해외 유력 학위를 받아야 유리한데 그렇게 과정을 거치면 타락을 하고

활동력과 언변만 있어도 되는데 이런 이들은 교계에 갔다가 얻어 먹고 귀화를 해버리고

이 노선의 장점과 가치를 아는 이들은 혼자 안다고 입에서 쏟아 내다가 이단이 되거나

아니면 그리 될까 두렵고 나가고 싶어도 오라는 곳이 없으니 기도만 상대한다며 산속에 있고

아니면 한글 해독도 안 되면서 세계 교리를 눌렀다고 혼자 떠들다가 미치괭이가 되어 버리고

이 홈은 재주가 없어 시골에서 동네 방송이나 틀어 놓고 있으니 그릇이 작아 쓰이지 않고...

해결법은 전후좌우를 잘 갖춘 인재를 하나님께서 언제 보내 주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로 주실 것도 없이 이 노선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받은 말씀만 잘 새겨 보면 그냥 해결이 될

듯한데 복음은 원래부터 좁고 협착하여 인재들이 모이지 않는 곳이라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6. 최소한


주변에 차분하게 대화하다 보면 소통이 되지 않을 수가 없고 주변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노선의 인적 구성이 대화나 연구라는 표현은 너무 생소하여 가당치 않은 면이 있습니다.

중생의 '중, 重'이 무거울 중이라며 심방 가는 곳곳에서 무조건 고함을 질러 대는 목사님

고범죄의 '고'를 높은 범죄의 '고, 高'라고 중간반 학생들에게 떠들어 대는 중간 반사님들

옆에서 아니라고 귀뜸을 하면 눈을 부릅뜨고 잡아 먹을 만큼 평생 원수가 되는 수준들이니

오늘 공회가 이렇게 분열 되어 있는 것조차, 분열의 이유도 모르고 주장한 말 뜻도 모르고

자기가 손을 어디에 왜 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가고 있으니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철학이나 신학이나 그 어떤 학문이라도

시골에서 풀 한 포기 길러 보며 부부가 살아 가며 서로 오가는 대화와 마음을 읽어 본다면

그런 속에서 비록 표현은 일반적이지 않아도 알 것은 다 알 만큼 부족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노선 접하는 우리와 주변 전부가 깨진 그릇들이어서 뭐가 담길 리가 없는 듯하니다.
죄와 악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죄와 악을 배웠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삐뚫어진 것'이며,

악은 '하나님 위주,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 자기위주'라고 배웠습니다.


1. 죄와 악의 존재적 순서에 관하여


죄가 먼저 입니까? 악이 먼저 입니까?


존재적으로 살피면, 타락한 천사의 악이 먼저인 듯 합니다.


(1) 죄가 먼저 인 듯한 성구들

그런데, 인류의 경우 하와의 경우도 악이 먼저인 듯 합니다만, 다음과 같은 성경의 진술이 그 사실과 반대되는 듯 합니다.


1)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창2:17)

2)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5)

3)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7)

4)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창3:22)


즉, 위 성구들을 보면 선악과를 먹은 범죄 후에 인류에게 악이 생긴 것 같습니다. 좀 더 성경의 표현과 정확히 말하면, 선악과를 먹는 범죄 후에 선과 악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인류에게는 죄가 먼저요, 악이 그 후 인 것 처럼 보입니다.


(2) 악이 먼저 인 듯한 성구들

그러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창3:6)"를 보면 또 다릅니다.


타락한 천사인 마귀가 하와에게 마귀의 악을 전염시켰고 하와는 자기를 위하는 '악'이 먼저 생기고 나서야 범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그 후에 '죄'를 저지른 것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백영희 목사님의 설교중에도 악이 죄보다 앞선 것으로 설명하시며, 우리가 범죄하는 동인을 '악'으로 보는 것이 전반적인 교훈이었던 것 같습니다.


(3) 요약

모순되는 성구들 간에 죄나 악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죄의 결과로서의 악인지? 악의 결과로서의 죄인지? 가 궁금합니다.


(4) 참고

문제 해결을 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의 확장이 있었습니다. 참고하십시오.


- 선악과를 먹은 후에 악이 생긴 것은 범죄로 인하여 악이 강화 되는 일반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인가?

- '선악을 아는 것'과 '악에 전염된 것'은 다른 것인가?

- 넓은 의미에서 '악'은 하나님 중심을 하라하신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니 곧 '죄'가 아닌가? 백목사님께서도 '악성'을 '원죄'라 '악습과 악행'을 '본죄'라 하신 적이 있지 않은가?

- 죄의 반대가 의이고 악의 반대가 선인데, 의는 결과적 상태이고 선은 결과라기 보다는 동기나 과정이니 악이 죄보다 앞서는 것은 아닌가?

- 인류최초의 범죄와 그 후 우리들의 범죄는 순서가 다른 것인가? 인류최초에는 죄가 먼저이고 그렇게 해서 생긴 악이 우리들에게는 죄의 동인이 되는 것인가?


2. 죄와 악은 다른 것 입니까?


죄와 악은 본질상 같은 것이고, 그것이 현실에서 표출될 때 다른 것인가? 다른 각도의 표현인가?


백목사님이께서 악성을 원죄로, 악습을 본죄라고 표현 하신 것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3. 악행이라 하지 않으시고 왜 악습이라 하셨나?


왜, 악행이라 하지 않으시고 악습이라고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결국 악행이 모이고 모여서 악습이 되지만 악행은 곧 죄인데 죄의 결과로서 굳어진 우리안에 굳어진 그 무엇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악습으로 표현 하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궁금합니다.


일반 교계에서 중생을 정의할때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안에 심으시고 영혼의 주도적인 성향(경향성, 습관)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경향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4. 악성과 악습을 구분 지으실 필요가 있었나?


악성과 악습은 악령과 같이 '나' 아닌 '나를 물들인 것'인데, '자기 아닌 자기'인데,


(1) 내 안에 들어와 나인 것 같은 존재인 악을 존재적으로 '성질'과 '습관'으로만 구분 지은 신 이유는 무엇인가?

(2) 성질과 습관(행위 포함)으로만 구분 지으면 자기중심인 악을 다 분류할수 있는 대분류가 되는 것인가?

(3) 다른 것들로는 더 구분 짓지 못하나? 빠진 것은 없나?

(4) 아니면, 둘로 구분 짓는 것 자체의 정당성은 무엇인가? 구분 안지어도 되는 것 아닌가?


5. 교계와의 소통을 위한 우리의 과제는 무엇 일까?


이상과 같은 의문은 향후 교계와의 소통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일반교계에서는 죄의 열매를 악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거의 모든 일반 신학이 철학의 배경들이 깔려 있는데, 악한 인간을 '성질'과 '습관'으로 분류할때는 성질과 습관이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해야 그들과 소통시 문제가 없을 듯하여 질문을 드립니다.


실제 그들의 철학에서는 어떻게 분류를 하는지는 잘 모르나, 언뜻 기억나기로는 '지정의'로 보는 것이 일반인 것 같습니다.


또 기억하는 것이, 조나단 에드워드가 중생으로 인해 생기는 영혼의 변화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힘들과 경향성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경향성이란 단어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라틴어 '하비투스(habitus: 본성, 성격, 경향성)'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와 경향성'에서 언급한 희랍어'헥시스(실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어떤 상태 혹은 항구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의 철학적 영향을 받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서양 철학사에는 존재론 이란 것이 있는데, 존재가 곧 무엇인지를 연구한 철학의 한 주제로 경향성이 존재의 특성이란 관점과 경향성 자체가 곧 존재의 본질이라는 관점등 다양한 것 으로 압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철학을 공부해서 알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으신 백영희 목사님께서 '존재론'에서 도용한 '존재와 경향성들에 대한 개념'중 나중에 영어 Habit(습관)으로 변형된 것으로 보이는 라틴어 '하비투스'(habitus)의 개념을 들어 악의 한 형태인 악습과 악성을 정의하신 것에 주목해야 될 것이라 보입니다.


우리가 무지, 무식해서 백영희 목사님의 신학세계를 가지고 세계철학과 신학의 핵심을 꿰뚫고 그 위에 우뚝 설 수 있는 진리를 배우고도 그들이 뭔지도 모르고 난잡하게 이것 저것 주 대어 펼쳐 놓은 개념들을 백목사님의 신학으로 한가지 원리로 요약 할 수 있어서 그들도 설득시키고 이해시켜 이 길로 돌아 올수 있는 교리를 정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우둔함으로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자책입니다.
---------------------------
쓰기 문의답변 초기목록
(1) 항목별 검색 주제별 | 가나다별 주제별 정리
(2) 게시판 검색
(3) 통합검색
번호제목이름날짜
  • 13934
    성도A
    2026.02.23월
  • 13933
    외부교인
    2026.02.20금
  • 13932
    교인
    2026.02.16월
  • 13931
    LA
    2026.02.15일
  • 13930
    재독
    2026.02.14토
  • 13929
    학생
    2026.02.12목
  • 13928
    성도A
    2026.02.11수
  • 13927
    도봉
    2026.02.10화
  • 13926
    교인
    2026.02.10화
  • 13925
    배우는 이
    2026.02.05목
  • 13924
    성도A
    2026.02.04수
  • 13923
    학생
    2026.02.02월
  • 13922
    성도A
    2026.02.02월
  • 13921
    공회교인
    2026.01.23금
  • 13920
    학생
    2026.01.21수
  • 13919
    학생
    2026.01.16금
  • 13918
    반사
    2026.01.16금
  • 13917
    학생
    2026.01.15목
  • 13916
    반사
    2026.01.13화
  • 13915
    성도A
    2026.01.12월
  • 13914
    신학도
    2026.01.12월
  • 13913
    부족한교인
    2026.01.06화
  • 13912
    성도A
    2025.12.26금
  • 13911
    돌아온탕자
    2025.12.23화
  • 13910
    믿는 자
    2025.12.22월
State
  • 현재 접속자 194(1) 명
  • 오늘 방문자 6,464 명
  • 어제 방문자 6,972 명
  • 최대 방문자 7,646 명
  • 전체 방문자 3,254,146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