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경우라 해도 실은 전혀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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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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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09 00:00
제목분류 : [~성경~주해~사무엘상~]
내용분류 : [-성경-주해-사무엘상-]/[-성경-주해-역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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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불신자는 이용만 당하는 것이고, 믿는 사람은 이용도 당하고 또 이용하기도 합니다.
불신자는 오로지 우리를 위해 이용만 당할 뿐입니다. 우리를 고치기 위해 그들을 치고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우리에게 경계가 되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우리를 고치게 하십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매를 맞을 때는 매맞는 그 사람에게 그 매가 필요해서 매를 친 것이고 동시에 그 매맞는 모습을 다른 믿는 사람에게 보여 그들에게도 경계가 되고 구원에 도움되도록 하십니다. 즉 불신자는 이용만 당할 뿐이지만 우리가 매맞는 것은 자기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동시에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을 위해 다윗을 칠 수도 있고 또 다윗을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을 위해 이스라엘 전체를 치는 경우 다윗이 그 중심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전체가 다윗 때문에 이유없이 당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그들대로 매 맞을 일이 있었고 또 매를 맞아서 고치게 되는데 그 매 맞는 것이 다윗에게도 동시에 도움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2.믿는 사람의 징계는 본인과 주변을 동시에 유익되게 하지만, 중심 문제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을 특별한 관계로 보지 않고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징계 받는 본인과 주변을 동시에 두고 하나님은 역사하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 믿는 사람들이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경우는 좀 달라집니다. 부모 자녀 관계라든지 목회자와 교인 관계와 같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통으로 내려가도록 관계를 주신 경우는, 윗사람을 고치기 위해 그 사람의 애착이 전부 다 기우려져 있는 자녀를 쳐서 경계를 삼습니다. 물론 육적으로는 자녀지만 신앙으로는 그 자녀가 앞서 있는 경우는, 도리어 부모를 쳐서 그 자녀에게 경계로 삼게 됩니다.
요는 신앙의 '계통'으로 맺어진 관계에 있어서는 위를 먼저 잡아야 아래가 바로 되기 때문에 위를 바로 잡기 위해 아래를 친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윗의 경우는 구약의 왕인데 그 자리는 이스라엘 전체를 감당하는 머리되는 자리입니다. 다윗이 곧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이 곧 다윗이라고 표현할 사람입니다. 다윗 하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결국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시대로 살게 되고 다윗 하나에게 있는 허물은 결국 온 이스라엘의 허물이 되어 그 영향을 전체가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직책이며 오늘 교회로 말하면 교역자의 위치이며, 실은 오늘 우리 성도 전부가 가지고 있는 직책입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자기는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 비록 범위는 적지만 그런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3.'징계'와 '신앙의 계통'을 이렇게 이해한 다음, 이제 질문 내용을 하나씩 살펴 본다면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징계하시는 도구로 다윗을 사용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요?
①신앙의 지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 위치를 바로 지키고 있을 때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2. "여호와께서 다시"라는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죄를 반복했습니다. 한두번 죄를 지을 때는 다윗을 이용하지 않으셨지만 아래 사람이 죄를 반복해서 짓자 하나님께서 윗사람(다윗)을 죄짓게 하시고,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즉, 아래사람을 인도하지 못한 죄가 적용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②아랫사람이 반복해서 죄를 지었다면, 책임자가 자기 위치를 바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했다고 하신 다음 '다윗을 격동'시켜 매맞을 일을 하게 했다는 말은 다윗은 이스라엘 신앙의 총책임자로서 하나님께 매맞을 일이 있었다는 말이고 이스라엘 전체는 자기 머리가 잘못되었으므로 당연히 몸 전체에 화를 입게 된 경우입니다. 다윗이 다윗의 자리를 바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다윗과 다윗이 맡은 이스라엘 전체를 쳤다는 것이니 이런 긴 설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한 것이 되고, 그 책임이 구체적으로 그 지도자에게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 '다윗'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머리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그 이스라엘 전체가 매맞을 일이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이번 화는 다윗에게 그 문제가 있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본문의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라고 한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범죄한 것으로만 질문자께서는 이해하신듯 합니다만 이 본문은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서 다시 진노하신 것으로 보셔야 할 것같습니다. 다윗과 관련된 성경본문 중에서도 이 부분은 특히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나 부족에 대한 중심으로 기록되지 않고, 다윗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다윗이 바로 이스라엘이 되어 있던 때입니다.
>3. 그런데 아래 성구를 보면, 회개는 다윗이 합니다. 물론 대표의 원리일 수도 있겠지요. 백성의 죄 때문에 다윗이 이용당한 것 같은데, 회개치 못하고 수십만이 죽었는데, 다윗은 회개하여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이 어찌 큰 복인지. 수십만을 죽인 죄를 사해주시는 것을 눈으로 보다니요.!!! 역으로, 죽은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값대로 죽으면서 다윗의 신앙을 위해 이용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요?
>
③믿는 사람의 재앙은 본인과 다른 사람에게 함께 필요한 결과로 진행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원칙에 의하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은 그 당시 죽어야 할 때가 되었고 그렇게 될 필요가 있어 그리 되었으며 또한 그 당시 다윗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화를 당한 그들의 모습이 구원에 유익이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기준으로 본다면 일단 죽게 된 이상 본인에게는 구원에 아무 유익될 것이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쉽겠으나, 사실 죽음도 그 죽는 시점과 그 죽는 모습까지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꼭 적당하고 필요하게 닥쳐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는 그 순간이 비록 찰나와 같다해도 그 순간에 평생에 이루지 못한 구원과 회개를 이루는 사람이 오늘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다윗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또 그런 큰 재앙을 목도하게 된 다윗은 크게 회개하여 더 큰 신앙의 사람이 된 것은 많은 분들에 의하여 모순으로 지적되고 있는 바입니다. 현재 일반인들이 흔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꼭같은 절대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여러 사람이 희생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일반인이 생각하는 시각의 인류 평등론, 인간 동등가치론은 성경 오해입니다. 택자 하나를 위해 불택자들은 전적으로 동원되고 이용만 되는 인간들입니다.
따라서 택자와 불택자는 같은 인간일 수 없고 같은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택자가 있고 택자 외에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분류한 다음 그 피조물 안에는 다시 택자와 비슷하게 생긴 불택자라는 그룹이 있고 그 불택자라는 그룹보다 못한 동물이 있고 그보다 못한 식물이 있다는 등으로 분류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택자들끼리 분류할 때는 그런 차원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그 실력이나 그 중요성을 두고 말한다면, 한 의인의 한번 행한 의가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행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하여는 그를 상대하는 비중을 인류 전체보다 크게 보실 때가 있고 어떤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는 여러 세대의 모든 복음 운동 전체보다 크게 관리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 하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희생되고 실험 실증 대상이었을 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그들도 그들대로 그들에게 필요한 구원과정에 꼭 있어야 할 순서였고, 그런 순간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필요한 동시에 또 다윗에게는 크게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 다윗이 그 사건에서 깨달은 것은 이후 하나님의 나라 건설 전체를 두고 그 희생으로 비교될 수 없는 정도의 큰 복음역사로 더 온전하게 되어져 전체 교회와 하나님 역사에 100배의 결실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어느 한 성자가 뱀의 꼬리가 움직이는 것을 어릴 때 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가 이후 예수를 믿게 되자 안 믿을 그때 보았던 그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성경 깨달음에 도움을 가지게 되어 그의 지도하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깨달음의 세계에 쉽게 그리고 명쾌하게 이해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켜 깨닫게 되고 더 온전하게 되어진 신앙의 지도자가 있다면, 그 지도자의 보다 성숙하게 되어진 신앙역량은 자기 혼자 챙겨 수입볼 수입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는 자칫 옆으로 한발 잘못 가져다가 사용하게 되면, 목회자가 교회와 교단을 다 둘러마시는데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하는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만, 사실은 사실이며 분명히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④불쌍해 보이는 다른 사람을 밟고 강퍅한 사람이 두고두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있습니다.
목회자들 중에는 강퍅하여 믿지 않다가 그를 위해 기도하는 아내가 결국 불쌍하게 죽고 나서야 회개하고 목회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남편을 그렇게 돌아서게 한 아내는 평생 빛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회개한 남편이 이후 신앙으로 세상으로 행복하게 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재혼한 사모님과 함께 너무도 복받고 좋은 가정과 목회를 하여 훌륭한 교계 지도자가 되자 그 죽은 첫 부인의 친정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은 우리 딸만 불쌍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원통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정식구들 입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난리들입니다.
이때 그분들이 기억할 것은, 요나가 회개를 외치고 니느웨 성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성에 복을 주셨는데 정작 요나는 니느웨 언덕 위로 올라가서 니느웨 망하는 모습을 기어코 보겠다고 했던 심보입니다. 나 하나라면 그렇게 당할 일이 아니었는데, 교회 전체를 위해서 또는 그 교회 지도자 한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 내가 화를 당했다면 한편으로는 화를 당하게 될 사람으로 내가 지목된 것을 두고 하나님께 이 땅 위에서 죄값을 미리 치르게 해 주심을 감사해야 할 것이고, 또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이나 신앙의 지도자가 께우치게 되면 나를 밟고 올라서게 한 그 하나님께서 그 밑에 밟힘으로 이용당한 나를 잊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밟히게 되는 자기의 처지까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나의 중심이 있다면 그 중심을 하나님이 어찌 상대하시겠습니까?
역사는 모세를 당대의 구원자로 기록하고 있지만, 신앙의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 하늘의 회의를 보고 아는 사람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보이지 않은 신앙과 노고가 밖으로 표시된 것이 모세의 사역이라고 계산 할 것입니다. 사무엘의 위대함만 알고 지나는 것이 보통이고 그 어머니는 출산 과정에 일부 기여를 한 적이 있다고 지나치기 쉬우나 사무엘의 평생은 항상 그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신앙모습이 그 이면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두고, 아벨의 피는 그때만 역사했던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와 오늘 신약까지 이어오며 계속하여 모든 순교자의 피 뒤에서 새로운 순교자들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여겨지고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히11:4에기록을 하고 있으나 그렇게 읽는 분은 백목사님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구약에 그렇게 수도 없이 반복되는 따분한 기록 하나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라,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는 등으로 그 조상들의 이름을 그렇게 많이 붙여놓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아버지는 성경에 어떤 기록도 없으며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몰라보고 산골짝에 양이나 먹이도록 쳐박은 사람이며 사무엘이 아들을 부르라고 할 때 아들들 중에서 아예 빼버렸습니다. 그런 이새가 무슨 다윗왕의 이름 앞에 항상 붙어다닐 정도의 신앙이겠습니까마는, 성경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 때는 일일이 기록은 되어 있지 않으나 그 다윗이나 여호수아나 성경의 많은 인물들의 경우 그들의 활동이 전면에 나타난 것으로 적고 있으니 그것도 사실이지만 그 배후의 신앙 뿌리는 결코 지나치고 넘어갈 이름이 아님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4.결론적으로,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경우를 두고
우리는 이용만 당했다거나
이용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하도록 했으니 어쩌겠는가 라고 하거나
이용을 당하는 쪽보다는 차라리 건너편 복된 사람의 입장에 섰으면 빌어나 볼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택자와 달라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단순히 이용당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뒤로 계산을 차분하게 해 보면 보통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은 내 실속도 엄청나게 동시에 챙기고 있습니다. 화려하게 드러나 보이는 스타들은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측량못할 만큼 그 이름값과 외부로 드러났던 값을 기초공제로 처리해 버립니다. 자기의 자세와 중심만 바로 되었다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억울하게 당했던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계산할 수 없는 수고비를 챙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재벌은 네가 될런지 내가 될런지 가서 계산을 해봐야 압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그 계산법을 질문하신 내용처럼 한 면으로만 계산하면 알기 어렵겠으나 여러 면으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짐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용분류 : [-성경-주해-사무엘상-]/[-성경-주해-역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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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불신자는 이용만 당하는 것이고, 믿는 사람은 이용도 당하고 또 이용하기도 합니다.
불신자는 오로지 우리를 위해 이용만 당할 뿐입니다. 우리를 고치기 위해 그들을 치고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우리에게 경계가 되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우리를 고치게 하십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매를 맞을 때는 매맞는 그 사람에게 그 매가 필요해서 매를 친 것이고 동시에 그 매맞는 모습을 다른 믿는 사람에게 보여 그들에게도 경계가 되고 구원에 도움되도록 하십니다. 즉 불신자는 이용만 당할 뿐이지만 우리가 매맞는 것은 자기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동시에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을 위해 다윗을 칠 수도 있고 또 다윗을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을 위해 이스라엘 전체를 치는 경우 다윗이 그 중심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전체가 다윗 때문에 이유없이 당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그들대로 매 맞을 일이 있었고 또 매를 맞아서 고치게 되는데 그 매 맞는 것이 다윗에게도 동시에 도움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2.믿는 사람의 징계는 본인과 주변을 동시에 유익되게 하지만, 중심 문제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을 특별한 관계로 보지 않고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징계 받는 본인과 주변을 동시에 두고 하나님은 역사하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 믿는 사람들이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경우는 좀 달라집니다. 부모 자녀 관계라든지 목회자와 교인 관계와 같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통으로 내려가도록 관계를 주신 경우는, 윗사람을 고치기 위해 그 사람의 애착이 전부 다 기우려져 있는 자녀를 쳐서 경계를 삼습니다. 물론 육적으로는 자녀지만 신앙으로는 그 자녀가 앞서 있는 경우는, 도리어 부모를 쳐서 그 자녀에게 경계로 삼게 됩니다.
요는 신앙의 '계통'으로 맺어진 관계에 있어서는 위를 먼저 잡아야 아래가 바로 되기 때문에 위를 바로 잡기 위해 아래를 친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윗의 경우는 구약의 왕인데 그 자리는 이스라엘 전체를 감당하는 머리되는 자리입니다. 다윗이 곧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이 곧 다윗이라고 표현할 사람입니다. 다윗 하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결국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시대로 살게 되고 다윗 하나에게 있는 허물은 결국 온 이스라엘의 허물이 되어 그 영향을 전체가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직책이며 오늘 교회로 말하면 교역자의 위치이며, 실은 오늘 우리 성도 전부가 가지고 있는 직책입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자기는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 비록 범위는 적지만 그런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3.'징계'와 '신앙의 계통'을 이렇게 이해한 다음, 이제 질문 내용을 하나씩 살펴 본다면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징계하시는 도구로 다윗을 사용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요?
①신앙의 지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 위치를 바로 지키고 있을 때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2. "여호와께서 다시"라는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죄를 반복했습니다. 한두번 죄를 지을 때는 다윗을 이용하지 않으셨지만 아래 사람이 죄를 반복해서 짓자 하나님께서 윗사람(다윗)을 죄짓게 하시고,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즉, 아래사람을 인도하지 못한 죄가 적용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②아랫사람이 반복해서 죄를 지었다면, 책임자가 자기 위치를 바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했다고 하신 다음 '다윗을 격동'시켜 매맞을 일을 하게 했다는 말은 다윗은 이스라엘 신앙의 총책임자로서 하나님께 매맞을 일이 있었다는 말이고 이스라엘 전체는 자기 머리가 잘못되었으므로 당연히 몸 전체에 화를 입게 된 경우입니다. 다윗이 다윗의 자리를 바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다윗과 다윗이 맡은 이스라엘 전체를 쳤다는 것이니 이런 긴 설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한 것이 되고, 그 책임이 구체적으로 그 지도자에게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 '다윗'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머리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그 이스라엘 전체가 매맞을 일이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이번 화는 다윗에게 그 문제가 있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본문의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라고 한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범죄한 것으로만 질문자께서는 이해하신듯 합니다만 이 본문은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서 다시 진노하신 것으로 보셔야 할 것같습니다. 다윗과 관련된 성경본문 중에서도 이 부분은 특히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나 부족에 대한 중심으로 기록되지 않고, 다윗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다윗이 바로 이스라엘이 되어 있던 때입니다.
>3. 그런데 아래 성구를 보면, 회개는 다윗이 합니다. 물론 대표의 원리일 수도 있겠지요. 백성의 죄 때문에 다윗이 이용당한 것 같은데, 회개치 못하고 수십만이 죽었는데, 다윗은 회개하여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이 어찌 큰 복인지. 수십만을 죽인 죄를 사해주시는 것을 눈으로 보다니요.!!! 역으로, 죽은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값대로 죽으면서 다윗의 신앙을 위해 이용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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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믿는 사람의 재앙은 본인과 다른 사람에게 함께 필요한 결과로 진행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원칙에 의하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은 그 당시 죽어야 할 때가 되었고 그렇게 될 필요가 있어 그리 되었으며 또한 그 당시 다윗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화를 당한 그들의 모습이 구원에 유익이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기준으로 본다면 일단 죽게 된 이상 본인에게는 구원에 아무 유익될 것이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쉽겠으나, 사실 죽음도 그 죽는 시점과 그 죽는 모습까지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꼭 적당하고 필요하게 닥쳐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는 그 순간이 비록 찰나와 같다해도 그 순간에 평생에 이루지 못한 구원과 회개를 이루는 사람이 오늘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다윗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또 그런 큰 재앙을 목도하게 된 다윗은 크게 회개하여 더 큰 신앙의 사람이 된 것은 많은 분들에 의하여 모순으로 지적되고 있는 바입니다. 현재 일반인들이 흔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꼭같은 절대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여러 사람이 희생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일반인이 생각하는 시각의 인류 평등론, 인간 동등가치론은 성경 오해입니다. 택자 하나를 위해 불택자들은 전적으로 동원되고 이용만 되는 인간들입니다.
따라서 택자와 불택자는 같은 인간일 수 없고 같은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택자가 있고 택자 외에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분류한 다음 그 피조물 안에는 다시 택자와 비슷하게 생긴 불택자라는 그룹이 있고 그 불택자라는 그룹보다 못한 동물이 있고 그보다 못한 식물이 있다는 등으로 분류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택자들끼리 분류할 때는 그런 차원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그 실력이나 그 중요성을 두고 말한다면, 한 의인의 한번 행한 의가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행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하여는 그를 상대하는 비중을 인류 전체보다 크게 보실 때가 있고 어떤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는 여러 세대의 모든 복음 운동 전체보다 크게 관리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 하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희생되고 실험 실증 대상이었을 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그들도 그들대로 그들에게 필요한 구원과정에 꼭 있어야 할 순서였고, 그런 순간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필요한 동시에 또 다윗에게는 크게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 다윗이 그 사건에서 깨달은 것은 이후 하나님의 나라 건설 전체를 두고 그 희생으로 비교될 수 없는 정도의 큰 복음역사로 더 온전하게 되어져 전체 교회와 하나님 역사에 100배의 결실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어느 한 성자가 뱀의 꼬리가 움직이는 것을 어릴 때 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가 이후 예수를 믿게 되자 안 믿을 그때 보았던 그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성경 깨달음에 도움을 가지게 되어 그의 지도하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깨달음의 세계에 쉽게 그리고 명쾌하게 이해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켜 깨닫게 되고 더 온전하게 되어진 신앙의 지도자가 있다면, 그 지도자의 보다 성숙하게 되어진 신앙역량은 자기 혼자 챙겨 수입볼 수입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는 자칫 옆으로 한발 잘못 가져다가 사용하게 되면, 목회자가 교회와 교단을 다 둘러마시는데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하는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만, 사실은 사실이며 분명히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④불쌍해 보이는 다른 사람을 밟고 강퍅한 사람이 두고두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있습니다.
목회자들 중에는 강퍅하여 믿지 않다가 그를 위해 기도하는 아내가 결국 불쌍하게 죽고 나서야 회개하고 목회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남편을 그렇게 돌아서게 한 아내는 평생 빛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회개한 남편이 이후 신앙으로 세상으로 행복하게 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재혼한 사모님과 함께 너무도 복받고 좋은 가정과 목회를 하여 훌륭한 교계 지도자가 되자 그 죽은 첫 부인의 친정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은 우리 딸만 불쌍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원통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정식구들 입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난리들입니다.
이때 그분들이 기억할 것은, 요나가 회개를 외치고 니느웨 성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성에 복을 주셨는데 정작 요나는 니느웨 언덕 위로 올라가서 니느웨 망하는 모습을 기어코 보겠다고 했던 심보입니다. 나 하나라면 그렇게 당할 일이 아니었는데, 교회 전체를 위해서 또는 그 교회 지도자 한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 내가 화를 당했다면 한편으로는 화를 당하게 될 사람으로 내가 지목된 것을 두고 하나님께 이 땅 위에서 죄값을 미리 치르게 해 주심을 감사해야 할 것이고, 또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이나 신앙의 지도자가 께우치게 되면 나를 밟고 올라서게 한 그 하나님께서 그 밑에 밟힘으로 이용당한 나를 잊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밟히게 되는 자기의 처지까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나의 중심이 있다면 그 중심을 하나님이 어찌 상대하시겠습니까?
역사는 모세를 당대의 구원자로 기록하고 있지만, 신앙의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 하늘의 회의를 보고 아는 사람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보이지 않은 신앙과 노고가 밖으로 표시된 것이 모세의 사역이라고 계산 할 것입니다. 사무엘의 위대함만 알고 지나는 것이 보통이고 그 어머니는 출산 과정에 일부 기여를 한 적이 있다고 지나치기 쉬우나 사무엘의 평생은 항상 그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신앙모습이 그 이면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두고, 아벨의 피는 그때만 역사했던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와 오늘 신약까지 이어오며 계속하여 모든 순교자의 피 뒤에서 새로운 순교자들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여겨지고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히11:4에기록을 하고 있으나 그렇게 읽는 분은 백목사님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구약에 그렇게 수도 없이 반복되는 따분한 기록 하나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라,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는 등으로 그 조상들의 이름을 그렇게 많이 붙여놓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아버지는 성경에 어떤 기록도 없으며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몰라보고 산골짝에 양이나 먹이도록 쳐박은 사람이며 사무엘이 아들을 부르라고 할 때 아들들 중에서 아예 빼버렸습니다. 그런 이새가 무슨 다윗왕의 이름 앞에 항상 붙어다닐 정도의 신앙이겠습니까마는, 성경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 때는 일일이 기록은 되어 있지 않으나 그 다윗이나 여호수아나 성경의 많은 인물들의 경우 그들의 활동이 전면에 나타난 것으로 적고 있으니 그것도 사실이지만 그 배후의 신앙 뿌리는 결코 지나치고 넘어갈 이름이 아님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4.결론적으로,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경우를 두고
우리는 이용만 당했다거나
이용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하도록 했으니 어쩌겠는가 라고 하거나
이용을 당하는 쪽보다는 차라리 건너편 복된 사람의 입장에 섰으면 빌어나 볼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택자와 달라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단순히 이용당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뒤로 계산을 차분하게 해 보면 보통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은 내 실속도 엄청나게 동시에 챙기고 있습니다. 화려하게 드러나 보이는 스타들은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측량못할 만큼 그 이름값과 외부로 드러났던 값을 기초공제로 처리해 버립니다. 자기의 자세와 중심만 바로 되었다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억울하게 당했던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계산할 수 없는 수고비를 챙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재벌은 네가 될런지 내가 될런지 가서 계산을 해봐야 압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그 계산법을 질문하신 내용처럼 한 면으로만 계산하면 알기 어렵겠으나 여러 면으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짐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주해] 사무엘상 24장, 역대상 21장
제목분류 : [~성경~주해~사무엘상~]
내용분류 : [-성경-주해-사무엘상-]/[-성경-주해-역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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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역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같은 일에 대해서 다르게 기록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깊은 이치가 숨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질문을 다음과 같이 드립니다.
1. 역대상 21장 전체의 내용을 좀 설명해 주세요. 어떤 이치를 가르치실려고 하시는 것인지?
2. 위 대조가 되는 성구 둘을 통해서, 하나님 하시는 일과 마귀의 하는 일을 설명해 주세요. 제 생각에 간단히 정리하면 마귀는 하나님 이용물이라는 이야긴데, 좀 더 깊은 이치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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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분류 : [~성경~주해~사무엘상~]
내용분류 : [-성경-주해-사무엘상-]/[-성경-주해-역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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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역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같은 일에 대해서 다르게 기록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깊은 이치가 숨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질문을 다음과 같이 드립니다.
1. 역대상 21장 전체의 내용을 좀 설명해 주세요. 어떤 이치를 가르치실려고 하시는 것인지?
2. 위 대조가 되는 성구 둘을 통해서, 하나님 하시는 일과 마귀의 하는 일을 설명해 주세요. 제 생각에 간단히 정리하면 마귀는 하나님 이용물이라는 이야긴데, 좀 더 깊은 이치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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