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4:26의 신령한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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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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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6 00:00
아브라함은
우리 신앙의 조상이며
두 아들이 있었으니 이는 신앙세계 안에서 두 가지 계통을 가르칩니다.
신앙세계에는 2가지 계통, 2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하나는
하갈이라는 종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같은 부류입니다.
하갈은 종년이며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나왔으니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출생한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내버리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비정한 것 같아도 엄연히 천국 구원이란 인정과 사정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을 그렇게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의 대속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믿는 사람들이니
펠라기우스처럼 알미니우스처럼 하나님께 다 맡겨놓고는 구원이 될 수 없다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인간 노력으로 인간의 필사적인 수고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느냐?
인간 스스로는 죄를 지어 죄의 종이 되어 하갈처럼 종의 신분을 절대 벗지 못하니
이런 상태에서 수고하고 억울하고 노력하고 땀흘린 것은 인간적으로는 참 동정이 가는데
문제는 천국 구원이란 인적 요소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또 한 가지 신앙이 있으니
사라처럼 죄의 종이 된 신분을 완전히 벗고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경우입니다.
사라도 과거 죄인이었고 죄의 종이었으나 예수님 대속으로 완전 자유를 받고 중생 되었으니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통의 조상이 된다는 약속을 받아 둔 경우였습니다.
사라의 수고와 땀과 눈물로 그런 신분을 갖게 된 것이 아니고 전적 은혜로 지정되었습니다.
사라는 참으로 횡재한 사람이고 출세한 사람이니 이런 상태를 전적 은혜라고 합니다.
사라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 된다고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교회를 함께 다니면서도 진정 주님 은혜로 구원 얻는 도리를 알고
매사 자기가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순종할 뿐이고
모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진정 알고 깨달을 때에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 그런 신앙 상태에 있을 때를 가르쳐 사라를 통한 구원 계통을
바로 잡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칼빈과 루터와 같은 인물들이 그런 부류였습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종 하갈과 하갈을 통해 출생한 이스마엘 계통은 멸망의 신앙 노선이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사라를 통해 출생한 이삭의 계통이 구원 계통입니다.
예수님 당시로 말하면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신앙 세계에 있었으나 그들은 인간 노력으로 구원얻으려 한 자들이고
12사도를 통해 건설된 초대교회는 전적 은혜로 구원 얻는 길을 알고 걸어간 이들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말하면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우스와 같은 이들과 오늘 건설구원을 모르는 분들 중 대부분은
자기 노력으로 천국 구원을 만들겠다고 노력하고 있으니 그 노력은 전부 멸망입니다.
칼빈과 루터처럼 그리고 그들을 잇는 개혁주의 신앙노선의 모든 선배들과
오늘 건설구원과 기본구원을 구별할 줄 아는 이들은 전적 은혜로 구원을 얻는 줄 알되
오늘 우리가 열심히 충성하는 것은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고
이 모든 명령은 건설구원의 차이에 관련된 것인 줄 알고 있으니
이런 신앙 노선은 구원 면에서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질문 내용에서 말씀하신 갈라디아서 4장에는
장소적 예루살렘을 먼저 말씀하셨으니
육체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장소적인 예루살렘은
구원을 이룰 하나의 기회였고 그 예루살렘에 살았다 해서 무조건 구원되는 것은 아닌데
그 예루살렘에서 진정 하나님께 통치받는 하나님 은혜주의 신앙으로 살았다면
하늘의 진정한 예루살렘, 즉 영원한 영생 구원을 준비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그런 부류를 하갈과 하갈을 통해 출생한 이스마엘 계통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세상 땅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예루살렘에 상관할 것 없이
정말 하나님께서는 통치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통치를 받는 상태가 되었을 때의 신앙을
신령한 예루살렘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는 이 세상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세계이니
이런 상태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했고 계21:2에서는 새예루살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가 현실마다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붙들려 살아야 하는 복종생활을 바로 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신본주의이며 하나님 은혜 아니면 안 되는 줄 아는 사람이므로
이런 신앙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만 천국 준비에 다 해당되는 것이고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를 다니고 심지어 중생이 된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종하는 생활이 아니면
그렇게 생활한 그 면은 전부 영원히 다 버려야 할 멸망의 부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이며
두 아들이 있었으니 이는 신앙세계 안에서 두 가지 계통을 가르칩니다.
신앙세계에는 2가지 계통, 2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하나는
하갈이라는 종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같은 부류입니다.
하갈은 종년이며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나왔으니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출생한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내버리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비정한 것 같아도 엄연히 천국 구원이란 인정과 사정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을 그렇게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의 대속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믿는 사람들이니
펠라기우스처럼 알미니우스처럼 하나님께 다 맡겨놓고는 구원이 될 수 없다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인간 노력으로 인간의 필사적인 수고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느냐?
인간 스스로는 죄를 지어 죄의 종이 되어 하갈처럼 종의 신분을 절대 벗지 못하니
이런 상태에서 수고하고 억울하고 노력하고 땀흘린 것은 인간적으로는 참 동정이 가는데
문제는 천국 구원이란 인적 요소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또 한 가지 신앙이 있으니
사라처럼 죄의 종이 된 신분을 완전히 벗고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경우입니다.
사라도 과거 죄인이었고 죄의 종이었으나 예수님 대속으로 완전 자유를 받고 중생 되었으니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통의 조상이 된다는 약속을 받아 둔 경우였습니다.
사라의 수고와 땀과 눈물로 그런 신분을 갖게 된 것이 아니고 전적 은혜로 지정되었습니다.
사라는 참으로 횡재한 사람이고 출세한 사람이니 이런 상태를 전적 은혜라고 합니다.
사라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 된다고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교회를 함께 다니면서도 진정 주님 은혜로 구원 얻는 도리를 알고
매사 자기가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순종할 뿐이고
모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진정 알고 깨달을 때에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 그런 신앙 상태에 있을 때를 가르쳐 사라를 통한 구원 계통을
바로 잡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칼빈과 루터와 같은 인물들이 그런 부류였습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종 하갈과 하갈을 통해 출생한 이스마엘 계통은 멸망의 신앙 노선이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사라를 통해 출생한 이삭의 계통이 구원 계통입니다.
예수님 당시로 말하면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신앙 세계에 있었으나 그들은 인간 노력으로 구원얻으려 한 자들이고
12사도를 통해 건설된 초대교회는 전적 은혜로 구원 얻는 길을 알고 걸어간 이들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말하면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우스와 같은 이들과 오늘 건설구원을 모르는 분들 중 대부분은
자기 노력으로 천국 구원을 만들겠다고 노력하고 있으니 그 노력은 전부 멸망입니다.
칼빈과 루터처럼 그리고 그들을 잇는 개혁주의 신앙노선의 모든 선배들과
오늘 건설구원과 기본구원을 구별할 줄 아는 이들은 전적 은혜로 구원을 얻는 줄 알되
오늘 우리가 열심히 충성하는 것은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고
이 모든 명령은 건설구원의 차이에 관련된 것인 줄 알고 있으니
이런 신앙 노선은 구원 면에서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질문 내용에서 말씀하신 갈라디아서 4장에는
장소적 예루살렘을 먼저 말씀하셨으니
육체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장소적인 예루살렘은
구원을 이룰 하나의 기회였고 그 예루살렘에 살았다 해서 무조건 구원되는 것은 아닌데
그 예루살렘에서 진정 하나님께 통치받는 하나님 은혜주의 신앙으로 살았다면
하늘의 진정한 예루살렘, 즉 영원한 영생 구원을 준비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그런 부류를 하갈과 하갈을 통해 출생한 이스마엘 계통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세상 땅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예루살렘에 상관할 것 없이
정말 하나님께서는 통치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통치를 받는 상태가 되었을 때의 신앙을
신령한 예루살렘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는 이 세상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세계이니
이런 상태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했고 계21:2에서는 새예루살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가 현실마다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붙들려 살아야 하는 복종생활을 바로 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신본주의이며 하나님 은혜 아니면 안 되는 줄 아는 사람이므로
이런 신앙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만 천국 준비에 다 해당되는 것이고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를 다니고 심지어 중생이 된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종하는 생활이 아니면
그렇게 생활한 그 면은 전부 영원히 다 버려야 할 멸망의 부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