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예수님 인성을 기능구원이라는 점에서 살펴보려면, 영의 연약성을 함께 살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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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 인성을 기능구원이라는 점에서 살펴보려면, 영의 연약성을 함께 살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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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기능구원~]

내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기능구원-]/[-교리-죄론-]/[-교리-기독론-신인양성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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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 인성의 기능구원


(1)범위면에서 본 구원


①구원의 좁은 뜻만 아는 분들의 오해가 클 것 같습니다.


구원의 성격을 일반 신학 상식으로만 아는 분들은 예수님 인성의 기능구원이라는 표현을 접하게 되면 예수님도 죄를 짓고 구원을 받은 것이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구원의 의미를 좁게만 사용해 왔기 때문인데 일반 신학은 구원론의 일부만 알고 있으니 이런 편협된 단점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편협된 범위만으로 기준을 삼아 백목사님의 폭넓은 구원론을 성급히 정죄할까 염려되어 미리 구원론에 해당되는 넓은 범위를 설명하겠습니다.


②구원이란 지옥갈 죄인이 천국가는 좁은 면과, 천국에서 영원히 자라가는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 구원이란 죄로 지옥가게 된 사람이 대속으로 천국 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넓은 의미로 구원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고 거룩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전 과정을 말합니다. 현 교회의 의식은 천국 들어가는 것만으로 우리의 영원은 전부인 줄 알지만 이는 하나님과 천국의 관계를 잘 모르는 어린 신앙에서 보는 오해입니다. 세상에 살던 사람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은 활동 무대의 변경일 뿐입니다. 활동 무대라는 의미에서 이 세상은 임시 준비하는 곳이며, 천국은 본 무대가 됩니다. 우리가 영원히 활동할 우리의 본 무대인 천국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영원히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이기 때문에 그 끝이 없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영원하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은 세상처럼 한번 불타버리고 없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원히 닮아 가는 우리의 영원한 활동 무대라는 것입니다.


③천국이라는 영계를 하나님과 비교하여 생각할 때 우리는 인식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후의 천국에 대한 교리는 현재까지 교리사에서 거의 살펴보지 못한 분야이며 앞으로 백영희 교리세계에서 그 끝없는 세계를 밝혀나갈 주 분야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선 영계에 대한 인식을 일부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점만 분명히 해 둡니다. 천국 안에 계신 하나님만 생각할 정도로 천국의 범위를 크게 잡아서 하나님까지도 그 안에 거주하고 그 천국 밖의 범위는 생각지 않은 것이 현재까지 나아간 교리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시기 때문에 영계보다 더 좁은 우주에도 계실 수 있는 것처럼 영계에 계시는 것도 그 영계 범위은 영계보다 무한히 크신 분이며 영계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표현한다면 무한히 작은 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국이 영원하고 무한한 곳이라 할 때는 그 기준이 오늘 세상을 기준으로 본 것이며 더 작은 우리를 기준으로 본 것입니다.


④구원의 의미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완전자 하나님과 같이 '온전함에 이르는 영원'입니다.


그렇다면 타락과 대속이라는 과정은 하나님이 목적을 정한 이후 예정 창조 타락 구원 심판 영원 영계의 무한한 전체 속에 한 토막일 뿐입니다. 타락과 대속의 그 과정만으로 우선 죄지어 지옥갈 우리에게는 다급한 '구원'이었으니 이는 좁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혼자 계시던 자존에서 목적을 세우시고 그 목적을 따라 우리를 예택하고 영계를 만들어 영원토록 이 불완전 피조물이 완전자 하나님을 향하여 가도록 만든 전부는 적극적인 의미이며 넓은 의미의 진정한 구원입니다.


(2)예수님의 인성의 기능구원


①질문하신 내용에 집중하겠습니다. 예수님에게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 될 수 있느냐 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대속받아 천국 갈 수 있게 된 것을 구원이라고 정의한다면 예수님은 구원자이지 구원받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이시니 예수님의 인성도 구원할 구원자이지 구원받을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좁은 의미로 구원을 본다면 천부당 만부당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질문하신 분의 신앙은 예수님이 죄를 지어 구원받게 되는 과정에 그 인성의 기능은 어찌 되느냐는 차원으로 질문하실 수준이 아닙니다. 죄가 없으심을 너무도 당연히 아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우리 인간에게 평생 문제가 되는 것은 기능구원인데 예수님도 인성을 가지셨으니 우리와 같은 인성이라고 한다면 죄는 없지만 인성인 이상 인성에 적용되는 기능 문제는 어찌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단정을 쉽게 전제한다면 타락과 대속이라는 좁은 의미의 구원에는 전혀 해당이 없고 그렇다면 그런 차원의 기능구원은 예수님에게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구원, 즉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 아담이 보다 불완전한 상태에서 보다 더 완전한 상태로 발전이 있었고 또 세상이 끝나고 영원한 세계가 시작되는 영계에서도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향해 점점 가까이 나아갈 것이니 죄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면을 구원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구원이 한 인간 단위로 이루어지는데 실은 그 속에는 심신의 요소가 수많은 개체로 되어 그 한 요소가 각기 자기에게 해당되는 현실에서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 동행으로 인하여 그 해당되는 요소가 성화되는 것이니 이런 의미의 기능구원은 예수님에게 당연히 해당됩니다.


다만 성화라는 의미도 죄로 더러워진 것이 의로 깨끗해진다는 성화는 예수님에게 해당되지 않고 연약한 것이 더 온전해지고 강해진다는 의미의 성화는 적용될 수 있습니다. 깨끗의 정의 중 하나는 하나님의 완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성도 우리와 같은 인성이니 예수님의 심신도 수많은 요소로 된 복합체이고 그 복합체는 각 현실을 따라 그 요소별로 활동하며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기능은 넓은 의미의 구원에 있어 모든 단계를 완전히 밟아 자라갔습니다. 우리의 기능구원과 다른 점은 우리의 기능은 죽었던 것이 살아날 수 있는 기회이고 따라서 좁은 범위의 구원에 우선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원죄가 없기 때문에 넓은 범위의 구원이라는 의미로 기능구원이 해당됩니다.


②눅2:40, 52 말씀들이 명백하게 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눅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눅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성구는 예수님의 인성의 성장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그 인체의 발생이 모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아기를 거쳐 장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러 오실 때 그 인체를 아담처럼 바로 완성품인 성인으로 만들지 않고 태 속에서 발생시켜 아기와 소년 그리고 청년 장년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은 예수님 인성은 기능의 발달 기능의 숙달 기능의 발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몸과 마음이 동일하게 그러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밟으신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심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죽을 죄값을 대신 죽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인생으로 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전 과정을 전부 대행하였습니다. 히4:14,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구는 특별히 '체휼'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우리 택자들의 모든 형편을 전부 다 겪으셨다는 것이며,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는 말씀은 그의 인성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연약한 피조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속의 신성에게 완전히 붙들려 그 모든 시험을 우리와 같은 조건에서 통과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속주가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절정을 대표적으로 상징한 것이며 예수님의 대속은 인성을 입은 순간부터 부활 영원 후까지입니다. 부활 후 다시 가진 인성도 우리가 중생과 부활 후 영원히 누릴 상태를 미리 대신 마련한 것이니 이 역시 대속의 큰 범위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3)연약성도 죄이니, 중생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것은 틀렸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①연약한 것도 결국은 명령에 미달이니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생된 영의 범죄 문제가 제기됩니다.


백목사님은 중생된 영이 심신의 성화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영이 연약하여 심신을 장악하지 못하고 심신이 죄를 짓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경우 이를 영의 병이라고 했습니다. 영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심신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장악하고 지도해야 하는데 영이 장성하지 못하여 심신의 범죄를 막지 못했다면 이는 영의 유약이니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애쓰는 것은 심신은 심신대로 기능구원으로 성화되어야 하는 면이 있듯이 영은 영대로 장성하여 자기 심신을 붙들고 죽는 데라도 끌고 들어갈 수 있는 영이 되도록 정성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죄론에서 연약하여 미달된 것도 죄에 포함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죄라는 것은 삐뚤어진 것입니다. 삐뚤어진 것은 방향이 틀려도 삐뚤어진 것이고 또 명령에 미달되어도 삐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정확하게 명중되지 않은 것은 전부가 죄인데 중생된 영이 유약함으로 자기 심신을 붙들지 못한 것은 죄가 영 자체의 죄가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


②예수님 인성의 연약성에서 영의 연약성 문제가 함께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죄론에서 죄의 범위를 정하는데 이 성구는 항상 인용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욕하고 남을 때리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평범한 기존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도덕의 기준에서 본 죄이지 성경이 말하는 죄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며 또 채찍을 들고 성전에서 사람을 폭행하였는데 그는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으니 폭행도 죄되는 폭행과 의가 되는 폭행이 있고 욕도 죄되는 욕이 있으며 또한 의가 되는 욕이 있다고 확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영의 연약성이 죄가 아니냐라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점점 자라가고 강하여져가고 지혜로워져 갔다고 했는데 이는 완전을 기준으로 본다면 미달이며 연약이니 곧 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짓도록 시험은 다 받았으나 죄 짓지 않고 그 모든 과정을 통과했다고 히4:15에서 말씀했으니 예수님의 성장 과정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③범죄 이전 아담과 부활 이후 우리의 진보과정은 또한 연약함이 무조건 죄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아담은 그 육체는 성인으로 지어졌지만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간이 더할수록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며 더 실력이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천국에 간 우리는 성장을 멈추고 놀고만 먹는 누리는 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3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소망이란 이루지 못한 바를 말하며 나아갈 목표와 현재 위치와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태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고전 13:13이 말씀했고, 그 소망을 점점 이루어 가게 하는 방법은 믿음이니 믿음은 이 지상에서 지옥갈 우리가 천국가는데 까지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간 이후의 영원한 생활에서도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순종의 방편으로 영원히 소망을 이루어가는 것이 하늘나라인데 순종하는 사람에게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면을 가르쳐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대가 없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이 소망이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이 과정은 영원히 무한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과 구원 이후, 특히 지상 생활이 끝난 이후 영원한 나라에서도 계속될 이 발전과 성장은 항상 미달이라는 상태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달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약함도 죄가 되는 경우도 있고 연약함이 죄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연약성과 영원한 천국에서의 연약성을 생각할 때 구별해야 함은 분명합니다.


④연약성이 죄가 되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때 순종에 미달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12세 되던 기록이 눅2:41에 나옵니다. 이때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예수님을 인도하셨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데 이르지 않았으면 이 연약은 죄가 됩니다. 그러나 12세 때에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나서지 아니하였으며 그 나이에는 성전에 있으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육의 부모와 3일간을 떨어져 혼자 성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12세에는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는 단계로 아버지를 따를 때이니 그 나이에 예수님의 완전 순종은 성전에 있는 것이었으며 또한 나사렛에 이르러서는 육의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시는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명령하셨으니 그 명령에 추호도 모자람이나 연약함이 없이 명중으로 순종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의 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12세 때 있었던 2가지 일들이 전부 미달이며 연약함이 되겠지만 예수님 인성의 12세 때 그를 인도하시던 하나님은 십자가로 예수님의 인성을 데려가지 않았으니 십자가 기준에서 12세 예수님의 인성을 목표 미달로 정죄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아는 것이며 성경이 말하는 죄의 범위가 연약성도 포함한다 할 때 연약성과는 다른 연약성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연약성도 그 영이 중생이 되었으면 영이 심신에 대하여 가질 모든 책임은 이미 대속으로 해결이 되었고 이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죄가 상관없게 된 영은 그 영에게 성령이 요구하는 바는 항상 순종을 하고 나가지만 예수님 12세 때 예수님의 지혜와 육의 키가 장성한 때와 비교할 때 연약했듯이 영도 영을 인도하여 데려가는 그 순간순간에는 성령과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동행하며 순종하고 나가고 있으므로 이 면에 있어 영은 죄와 전혀 상관없는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신의 경우는 영과 달라서 중생된 사람의 심신이 담배를 끊으라고 때를 주셨는데도 그 담배를 그 순간에 끊지 못했다면 이 연약은 죄의 연약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영에게 영의 심신에게 담배를 끊도록 촉구를 하라 했으면 영은 성실히 촉구를 했고 촉구를 했으나 아직 영이 심신을 장악할 때가 되지 못했으므로 그 결과는 심신이 담배를 끊지 못했으나 그것으로 영의 연약성을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는 영이 아직도 심신을 장악하지 못하는 연약한 상태인데 그 연약한 상태에서도 성령이 명령하는 데 따라 영이 노력은 틀림없이 했을 것이니 영은 순종함으로 의의 영으로 그 현실을 통과했고 결과적으로 담배를 끊지 못한 것은 심신이 자기가 할 일을 순종치 아니했으므로 끊지 못한 것입니다. 영의 탄식은 빨리 장성한 단계로 나아가 자기 심신의 악습을 제어하는 데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행하지 아니한 것이 죄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그 뜻대로 다 따라 가지 않은 것은 죄이니 하나님 인도에 못 미친 것은 죄가 되지만, 영의 연약성과 예수님의 연약성은 그 당시 당시 인도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를 모자람 없이 따라갔으니 그것은 믿음으로 행한 의가 되는 것이고, 순종을 했지만 아직까지 때가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는 과정으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우리의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 행1:7입니다. 때와 기한이 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아직도 미진한 것은 죄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⑤마24:36의 그 날과 그 때를 예수님이 모르는 것은 전지에 부족한 것이지만 죄가 아닙니다.


그날과 그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알려주지 않으셔서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예수님의 지식이 전지라는 면에는 미달되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인성이 그날과 그시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은 무지이지만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은 성령이 알려주는 대로 다 알아 나가는 존재이니 중생된 영은 이 면에서는 죄가 없습니다만 중생된 영 역시 성령이 가르쳐 주지 않아서 모르는 것은 무지의 죄로 또는 지식의 연약성이라 하여 죄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알려 주시려고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도 심신이 외면하여 몰랐고 또 무지한 상태가 된 것이 심신의 무지입니다. 이렇게 미달되고 연약하게 된 것은 죄가 됩니다. 이미 하나님의 인도가 그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데도 그 단계를 그냥 지나치거나 해서 모르고 있는 것은 죄가 됩니다.


(4)편협된 교리관에서 오해가 없도록, 구원의 범위를 기준으로 다시 한번 조심할 구원의 두 범위


좁은 의미의 구원은 타락한 인생이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만 준비할 수 있고 죽음으로 구원여부는 끝나게 됩니다. 넓은 의미의 구원은 타락 이전에도 또 대속 이후에도 해당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타락 전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은 하나님을 향하여 점점 더 나아가고 있었고 또 우리가 세상을 끝마치고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전진이 있으니 이 전체를 포함하게 됩니다.


세상에서만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기본구원적으로는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으로 되는 기회는 세상뿐이며 건설구원적으로는 기능이 종류별로 성화되는 것은 세상뿐이라는 뜻입니다. 일단 죽고나면 구원의 기회가 없다는 것은 지옥간 사람이 지옥간 이후에도 천국으로 옮겨지는 경우는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만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말은 믿는 사람이 천국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자라가는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변동이 없다는 말은 천국에 간 성도가 다시 지옥으로 가는 멸망의 변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라가는 성장, 하나님을 향한 실력의 향상은 천국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기본구원적으로 말하면 세상은 천국으로 갈 사람을 불신자로부터 분류하여 결정하는 기간이고 건설구원적으로 말하면 세상은 천국 갈 사람이 천국에 가져갈 자기 소유 자기 기능 자기 실력을 분류하여 결정하는 기간입니다.
[기능구원] 예수님 인성의 기능구원
제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기능구원~]

내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기능구원-]/[-교리-죄론-]/[-교리-기독론-신인양성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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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3분론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인성을 영+혼+육으로 나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기능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신성+(영+혼+육)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영과 신성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신성+영+혼+부활한 신비한 육으로 되어 있습니까? 이것을 밝히는 성경적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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