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답변)'인과관계'라는 표현에 대하여는 약간의 설명을 첨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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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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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1 00:00
제목분류 : [~교리~신론~역사~예정~]
내용분류 : [-교리-신론-역사-예정-]/[-성경-성경일반-]/[-교리-말세론-심판-사심판-]/[-교리-교회론-신앙생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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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요약을 위해 질문을 다시 소개하고 답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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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사실상, '죄와 징계'는 직접적 인과관계는 없고 (그렇게 보여지도록 하셨지만)
2. '징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며 수단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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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1.징계가 과정이며 수단이라는 말씀은 맞고, 죄와 징계의 '인과관계'는 약간 설명이 필요합니다.
인과관계라면 주일 어긴 행위가 원인이고 다리 부러지는 사고가 결과로 직결되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들이 인과관계로 연결되었다고 분명하게 보이도록 하나님은 하시지만, 주일 어긴 죄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고 말씀을 어기는 그 사람의 행위가 더 큰 문제이고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징계는 우리를 길러가시는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한 수단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아 가도록 하시려는 목적에 필요한 범위 안에서 필요한 정도로만 사용하십니다. 좁은 의미에서보면 죄와 징계는 분명 인과관계로 직접 연결이 되어 있는데 이 차원에서 다시 본다면 인과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면들이 너무 많습니다. 따라서 인과관계와 상관없이 우리를 기르시려는 목적에서 아주 다른 차원으로 징계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일을 어긴 행위 하나, 십일조를 떼먹은 행위 하나, 그 하나 하나에 대한 것이 인과관계로만 적용된다면 수도 없는 고통과 불행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구 하늘을 향해 하나님 욕을 그렇게 하고 살아도 도저히 인과관계가 있는 사건들이 전혀 없이 지나는 이들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마구 떠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약 교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인과관계로 직접 연결되는 일들이 발생되는 것은, 수많은 작고 큰 실수 중에 어느 하나입니다. 어느 하나를 하나님께서 골라서 결과를 발생시키고 우리에게 알립니다. 지난 번 주일을 어긴 것은 이번 다리 부러진 것의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똑똑하게 인식을 시킵니다. 그렇다면 지난 번 주일 어긴 것 외에도 작고 큰 수많은 실수와 잘못이 있었는데 그것들의 결과는?
목적이 우리를 길러가시는 것이어서 그 목적에 필요한 차원에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방법으로만 우리에게 '징계'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일일이 결과를 발생시키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주일을 범한 것과 그 다음날 다리 부러진 것은 얼른 보면 인과관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만 다른 잘못된 행위들에 대한 결과는 그렇게 인과관계로 사건을 발생시키지 않으시는 것을 볼 때,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식으로서의 인과관계로 발생되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식을 이해하지 못하여 한 가지 공식으로 풀 수 있는 10가지 문제를 다 틀렸을 때 그 공식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문제 한 둘을 골라서 다시 풀어보게 하고 설명을 하는데 이때 선생님의 목적은 공식을 이해시켜 어떤 문제든지 풀 수 있는 학생을 만들기 위해 그 한 두 문제를 골라서 설명하는 것이지, 그 문제 자체를 해결해서 답을 내야 하는 것은 목적이 아닙니다. 공식 자체를 이해케 해놓으면 이다음에 어떤 시험에서라도 그런 문제들을 전부 다 풀 수 있는 학생을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한 가지 공식으로 다 풀 수 있는 같은 성질의 문제 10가지를 일일이 다 풀어주는데 그 목적이 그 10 문제의 답을 맞추어 이번 시험 100점을 맞게하는 것이라면, 얼른 보면 시험문제를 설명하고 다시 풀어주는 모습은 같지만, 그 성질은 천지차이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그 공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 문제 10가지를 무작정 외워서라도 풀게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숫자를 바꾸어놓으면 또 다 틀릴 것입니다.
앞 주일 범한 것은 그냥 넘어가고 왜 하필이면 이번 주일 범한 것은 다리를 부러지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번에 다리가 부러진 것을 이번 주일 어긴 행위 하나에서만 인과관계를 가지고 해결하려면 전혀 해결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전부터 내가 주일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폭넓게 살펴보고 그리고 이번 주일을 특별히 다른 면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좋기는 주일뿐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모든 관계를 이 한가지 사고를 가지고 전반적으로 다 살펴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한 범죄에 대하여 발생한 한 사건을 그 둘 사이에서만 보면 헛일이라는 것입니다. 순서상 그 둘 사이를 인과관계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 세상이 말하는 차원의 인과관계로 일단 보고, 그다음 그런 인과관계가 아닌 합목적적 범위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라는 존재 자체를 세워놓고 이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는데 이 다리 부러지는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징계가 죄값과 본질적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징계의 문제는 한편으로 '복'을 가지고 대칭면을 살펴보면 보다 쉬워질 것입니다. 오늘 매 주일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행위 하나 하나에 대하여 그 결과가 이 땅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씩 돌이켜 보면, 또는 한번씩 큰 좋은 일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복은 앞에 행위 의로운 행위에 대한 인과관계로만 보게 되면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의로운 행위를 하고 그 결과로 받아가지는 복도, 자세히 분석해보면, 우리 자체를 길러가시려고 한번씩 위로로 주시고 또 격려로 주시는 것입니다. 복받을 의는 지난 한 주간에 10번을 했는데 10가지 의 중에 한 가지 의에 대하여만 '복'이라는 모습으로 오게 된 것은 다른 행위도 전부 이렇게 복으로 와야 하는데 이 땅 위에서는 다 줄 시간도 없고 또 그 복을 누릴 곳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행위로 온 그 복은 그 행위의 댓가 전부로 온 것도 아니고 하나의 맛배기라는 것입니다.
그 한 행위로 인하여 직결된 그 좋은 결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란 대저 지키면 '좋은 일이 생기는 법'이라는 총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가 어떤 결과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케 하느냐 하는 모든 각론은 전부 천국에 가서 알게 되고 누리게 됩니다. 오늘 이 땅 위에서는 의도 죄도 믿는 우리에게는 길러가시는데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몇 가지 선택적으로 골라서 그 결과를 우리에게 전시하는 정도입니다.
혹, 잘못된 행위와 뒤 따라 발생된 결과를 직접적이고 엄격한 인과관계로만 보게 되면 자칫 '징계'라고 이름만 붙여놓았지 실상은 '죄값'으로 우리에게 인식이 되고 또 그런 결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조심하셨으면 합니다. 이것이 혼돈되어 교리적으로는 죄값이 없다고 하는데 교인들의 현실 체감은 '죄 = 죄값의 두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질문자께서 애초 질문한 내용의 출처로 짐작되는 백목사님의 설교(1989.5.10.수전설교)는 참으로 그 도의 깊고 높음을 측량키 어렵습니다. 거저 입만 벌리고 그 설교 내용 한 표현 표현에 녹아들어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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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설교록 내용)
본문: 눅17:5-10
일시: 1989. 5. 10. 오전집회
............
이래서, 이번에 사람병 다 고침을 받아야 되겠는데, 기독자는 어떤 죄를 짓고 그 뒤에 어떤 병이 들었더란대도 죄 지은 죄값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요것도 단정을 지우십시오. 기독자가 금방 참 어떤 살인죄를 범해도 범하고 난 다음에 바로 그시에 자기에게 여러 종류의 어려움이 부딪혔으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이런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죄값을 받고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기 쉬운데 그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해도 그 죄는 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간 것이요 예수님이 그 죄를 다 정죄받아서 부담하신 것이요 또 죄에 대한 댓가를 치러서 우리에게 사죄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의 댓가를, 형을 주님이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거게서 해방시켜 사죄해 주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행동과 처지 가운데에서 어떤 어려움이 올지라도 요것은 죄값이라고 하면은 예수님의 대속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거 뭐인가? 보면 죄의 종류에 따라서 우리에게 오는 그 모든 어려움들이 그 죄의 결과로 오는 거와 비슷하게 그렇게 서로 관계성을 가지고 동질 동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값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죄를 범한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죄에서 그 사람을, 그런 죄를 범한 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구원하는 역사로 그런 방편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말해서 형과 비슷하지마는 징계라, 그래서 우리 택자들에게는 징계는 있어도 죄의 값은 없습니다.
요것도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것도 다른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요것도 총공회에서 독특히 쓰고 있는 교리와 신조입니다. 이래서 우리 총공회에 속해도 이렇게 요런 것을 받아들이지 안하고 그저 그렇단다 이렇게만 보고 지나갔기 때문에 오늘까지 그 효력이 없습니다. 물론 총공회 밖에도 총공회와 같은 그런 깨달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그 교파에 있을지라도 그 교파에서 많은 충돌이 있고 많은 대적과 해를 받는 그런 일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자기가 범죄했을 때에 거게서 주님의 대속을 깨달아야 됩니다. ‘내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죄가 예정되었고 나는 이런 죄를 범했으니까 이 죄를 주님이 담당하셨고 이 죄에 대한 정당한 그 형을 주님이 받으셨구나’ 하는 것을 그것을 자기가 깨닫고 자기는 주님에게 그만큼 형을 부담을 시켰으니까 그만큼 자기는 주님의 것이 됐습니다. 인제 주님의 것이 되었으니 그만큼 주님을, 대형했기 때문에 자기는 그만큼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아야 할 자기 십자가를 지금 찾아서 지는 그것이 그 양을 찾아, 자기 십자가의 양을 찾는 것이 옳고,
또 이것을 왜 하나님께서 내게 예정하시고, 그분이 달리 예정하면 되는 건데 왜 내게 이것을 예정하시고 또 이것을 예정하셨으니까 이루어지니 거게 대해서는 댓가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대신 정죄를 받아야 되고 대신 형을 받아야 되고 이렇게 하신 이 예정과 창조와 또 대속의 이 과정을 거친, 내게 유별스리 나에게 이와 같은 순서가 하나님에게 예정돼 있으니 이 이유가 뭐인가? 이것이 첫째 아담에게 속한 모든 과정들인데, 이것이 다 약한 것들이요, 또 욕된 것들이요, 또 이것이 다 더러운 것들이요, 혈육의 것들이라. 이게 다 병든 것들이요 모두 다 못쓸 것들이라.
그러면 이것이 있는 것은 성경에 말하기를 이것은 ‘이것을 심어 가지고 좋은 것으로서 다시 살아야 된다’ 이랬습니다. 이것을 심어 가지고 좋은 것으로 다시 살아야 된다. 약한 것을 심어 가지고 좋은 거로 살고, 또 욕된 것을 심어 가지고 또 좋은 것으로 살고, 이렇게 모든 나쁜 것을 심어 가지고 좋은 거로 살기 때문에 이것만큼 다시 살아나서 좋아지면은 그것이 존재의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죄 가운데 빠졌을지라도 하나님이 이것을 나에게 어짜라고 다른 사람 없는 내게 이런 예정이 있는가? 이 예정대로 성취되는 이런 일이 있는가? 다른 사람보다 주님에게 이런 대속을 또 요런 종류의 대속을 입게 됐는가? 이것은 전부가 내 구원을 위해서 있단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여게서 더듬어 찾아서 그것이 나에게 좋은 것, 그것이 들어서, 약한 것이라면은 강한 것, 또 욕된 것이라면 영광스러운 것, 또 하나는 뭐이요? 내가 그 하나를 잊어버렸네. 그러면 혈육의 것을 신령한 것으로, 또? 아, 썩을 것. 썩을 것 그게 내가 암만 해도 안 나오는구만요. 안 나와서 내가 지금 말했어.
이래 젊어도, 문장이 갈 지(之)자에 막힌다고 그런 일이 있어요, 사람은. 이런데도 나이가 많으면 또 더 그런 일 많아. 그러니까 설교록을 보든지 설교를 들을 때에 그런 것을 이해하고 어쨌든지 단어가 여간 틀리고 또 인용하는 무슨 성구가 틀리고 이렇게 돼도, 어떨 때는 모세를 뭐 엘리야라고 그렇게 말할 때도 있어요. 이러니까 그것은 이해를 하시고, 그것도 없으면 좋은데 이해를 하시고 저렇게 증거하는 것의 그 도가 뭐이냐? 우리가 걸어갈 길이 뭐이냐? 그 도를 찾으면 그 도는 아는 대로는 바로 증거가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아시고.
이래서, 우리에게 닥쳐지는 것은 어떤 순서에 우리의 불행이라는 그런 것이 닥쳐져 있든지 전부 불행으로 닥쳐져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심이 아니요 죄값도 아니요 나로서는 그것이 있어야 고치기 때문에 고치기 위하는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신 이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할당되고 해당된 고칠 부분 고것을 바로 찾아 가지고 고치면 그것은 없어집니다. 이 말을 간단한 시간에 그거는 어설피 해 놓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사람은 ‘그 아주 비합리의 말이다’ 이렇게 오해하기 쉬우나 그저 간단한 시간에 말하는 것입니다.
내용분류 : [-교리-신론-역사-예정-]/[-성경-성경일반-]/[-교리-말세론-심판-사심판-]/[-교리-교회론-신앙생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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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요약을 위해 질문을 다시 소개하고 답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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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사실상, '죄와 징계'는 직접적 인과관계는 없고 (그렇게 보여지도록 하셨지만)
2. '징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며 수단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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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1.징계가 과정이며 수단이라는 말씀은 맞고, 죄와 징계의 '인과관계'는 약간 설명이 필요합니다.
인과관계라면 주일 어긴 행위가 원인이고 다리 부러지는 사고가 결과로 직결되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들이 인과관계로 연결되었다고 분명하게 보이도록 하나님은 하시지만, 주일 어긴 죄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고 말씀을 어기는 그 사람의 행위가 더 큰 문제이고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징계는 우리를 길러가시는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한 수단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아 가도록 하시려는 목적에 필요한 범위 안에서 필요한 정도로만 사용하십니다. 좁은 의미에서보면 죄와 징계는 분명 인과관계로 직접 연결이 되어 있는데 이 차원에서 다시 본다면 인과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면들이 너무 많습니다. 따라서 인과관계와 상관없이 우리를 기르시려는 목적에서 아주 다른 차원으로 징계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일을 어긴 행위 하나, 십일조를 떼먹은 행위 하나, 그 하나 하나에 대한 것이 인과관계로만 적용된다면 수도 없는 고통과 불행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구 하늘을 향해 하나님 욕을 그렇게 하고 살아도 도저히 인과관계가 있는 사건들이 전혀 없이 지나는 이들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마구 떠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약 교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인과관계로 직접 연결되는 일들이 발생되는 것은, 수많은 작고 큰 실수 중에 어느 하나입니다. 어느 하나를 하나님께서 골라서 결과를 발생시키고 우리에게 알립니다. 지난 번 주일을 어긴 것은 이번 다리 부러진 것의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똑똑하게 인식을 시킵니다. 그렇다면 지난 번 주일 어긴 것 외에도 작고 큰 수많은 실수와 잘못이 있었는데 그것들의 결과는?
목적이 우리를 길러가시는 것이어서 그 목적에 필요한 차원에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방법으로만 우리에게 '징계'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일일이 결과를 발생시키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주일을 범한 것과 그 다음날 다리 부러진 것은 얼른 보면 인과관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만 다른 잘못된 행위들에 대한 결과는 그렇게 인과관계로 사건을 발생시키지 않으시는 것을 볼 때,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식으로서의 인과관계로 발생되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식을 이해하지 못하여 한 가지 공식으로 풀 수 있는 10가지 문제를 다 틀렸을 때 그 공식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문제 한 둘을 골라서 다시 풀어보게 하고 설명을 하는데 이때 선생님의 목적은 공식을 이해시켜 어떤 문제든지 풀 수 있는 학생을 만들기 위해 그 한 두 문제를 골라서 설명하는 것이지, 그 문제 자체를 해결해서 답을 내야 하는 것은 목적이 아닙니다. 공식 자체를 이해케 해놓으면 이다음에 어떤 시험에서라도 그런 문제들을 전부 다 풀 수 있는 학생을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한 가지 공식으로 다 풀 수 있는 같은 성질의 문제 10가지를 일일이 다 풀어주는데 그 목적이 그 10 문제의 답을 맞추어 이번 시험 100점을 맞게하는 것이라면, 얼른 보면 시험문제를 설명하고 다시 풀어주는 모습은 같지만, 그 성질은 천지차이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그 공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 문제 10가지를 무작정 외워서라도 풀게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숫자를 바꾸어놓으면 또 다 틀릴 것입니다.
앞 주일 범한 것은 그냥 넘어가고 왜 하필이면 이번 주일 범한 것은 다리를 부러지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번에 다리가 부러진 것을 이번 주일 어긴 행위 하나에서만 인과관계를 가지고 해결하려면 전혀 해결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전부터 내가 주일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폭넓게 살펴보고 그리고 이번 주일을 특별히 다른 면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좋기는 주일뿐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모든 관계를 이 한가지 사고를 가지고 전반적으로 다 살펴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한 범죄에 대하여 발생한 한 사건을 그 둘 사이에서만 보면 헛일이라는 것입니다. 순서상 그 둘 사이를 인과관계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 세상이 말하는 차원의 인과관계로 일단 보고, 그다음 그런 인과관계가 아닌 합목적적 범위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라는 존재 자체를 세워놓고 이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는데 이 다리 부러지는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징계가 죄값과 본질적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징계의 문제는 한편으로 '복'을 가지고 대칭면을 살펴보면 보다 쉬워질 것입니다. 오늘 매 주일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행위 하나 하나에 대하여 그 결과가 이 땅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씩 돌이켜 보면, 또는 한번씩 큰 좋은 일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복은 앞에 행위 의로운 행위에 대한 인과관계로만 보게 되면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의로운 행위를 하고 그 결과로 받아가지는 복도, 자세히 분석해보면, 우리 자체를 길러가시려고 한번씩 위로로 주시고 또 격려로 주시는 것입니다. 복받을 의는 지난 한 주간에 10번을 했는데 10가지 의 중에 한 가지 의에 대하여만 '복'이라는 모습으로 오게 된 것은 다른 행위도 전부 이렇게 복으로 와야 하는데 이 땅 위에서는 다 줄 시간도 없고 또 그 복을 누릴 곳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행위로 온 그 복은 그 행위의 댓가 전부로 온 것도 아니고 하나의 맛배기라는 것입니다.
그 한 행위로 인하여 직결된 그 좋은 결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란 대저 지키면 '좋은 일이 생기는 법'이라는 총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가 어떤 결과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케 하느냐 하는 모든 각론은 전부 천국에 가서 알게 되고 누리게 됩니다. 오늘 이 땅 위에서는 의도 죄도 믿는 우리에게는 길러가시는데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몇 가지 선택적으로 골라서 그 결과를 우리에게 전시하는 정도입니다.
혹, 잘못된 행위와 뒤 따라 발생된 결과를 직접적이고 엄격한 인과관계로만 보게 되면 자칫 '징계'라고 이름만 붙여놓았지 실상은 '죄값'으로 우리에게 인식이 되고 또 그런 결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조심하셨으면 합니다. 이것이 혼돈되어 교리적으로는 죄값이 없다고 하는데 교인들의 현실 체감은 '죄 = 죄값의 두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질문자께서 애초 질문한 내용의 출처로 짐작되는 백목사님의 설교(1989.5.10.수전설교)는 참으로 그 도의 깊고 높음을 측량키 어렵습니다. 거저 입만 벌리고 그 설교 내용 한 표현 표현에 녹아들어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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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설교록 내용)
본문: 눅17:5-10
일시: 1989. 5. 10. 오전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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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이번에 사람병 다 고침을 받아야 되겠는데, 기독자는 어떤 죄를 짓고 그 뒤에 어떤 병이 들었더란대도 죄 지은 죄값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요것도 단정을 지우십시오. 기독자가 금방 참 어떤 살인죄를 범해도 범하고 난 다음에 바로 그시에 자기에게 여러 종류의 어려움이 부딪혔으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이런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죄값을 받고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기 쉬운데 그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해도 그 죄는 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간 것이요 예수님이 그 죄를 다 정죄받아서 부담하신 것이요 또 죄에 대한 댓가를 치러서 우리에게 사죄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의 댓가를, 형을 주님이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거게서 해방시켜 사죄해 주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행동과 처지 가운데에서 어떤 어려움이 올지라도 요것은 죄값이라고 하면은 예수님의 대속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거 뭐인가? 보면 죄의 종류에 따라서 우리에게 오는 그 모든 어려움들이 그 죄의 결과로 오는 거와 비슷하게 그렇게 서로 관계성을 가지고 동질 동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값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죄를 범한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죄에서 그 사람을, 그런 죄를 범한 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구원하는 역사로 그런 방편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말해서 형과 비슷하지마는 징계라, 그래서 우리 택자들에게는 징계는 있어도 죄의 값은 없습니다.
요것도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것도 다른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요것도 총공회에서 독특히 쓰고 있는 교리와 신조입니다. 이래서 우리 총공회에 속해도 이렇게 요런 것을 받아들이지 안하고 그저 그렇단다 이렇게만 보고 지나갔기 때문에 오늘까지 그 효력이 없습니다. 물론 총공회 밖에도 총공회와 같은 그런 깨달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그 교파에 있을지라도 그 교파에서 많은 충돌이 있고 많은 대적과 해를 받는 그런 일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자기가 범죄했을 때에 거게서 주님의 대속을 깨달아야 됩니다. ‘내게는 하나님께서 이런 죄가 예정되었고 나는 이런 죄를 범했으니까 이 죄를 주님이 담당하셨고 이 죄에 대한 정당한 그 형을 주님이 받으셨구나’ 하는 것을 그것을 자기가 깨닫고 자기는 주님에게 그만큼 형을 부담을 시켰으니까 그만큼 자기는 주님의 것이 됐습니다. 인제 주님의 것이 되었으니 그만큼 주님을, 대형했기 때문에 자기는 그만큼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아야 할 자기 십자가를 지금 찾아서 지는 그것이 그 양을 찾아, 자기 십자가의 양을 찾는 것이 옳고,
또 이것을 왜 하나님께서 내게 예정하시고, 그분이 달리 예정하면 되는 건데 왜 내게 이것을 예정하시고 또 이것을 예정하셨으니까 이루어지니 거게 대해서는 댓가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대신 정죄를 받아야 되고 대신 형을 받아야 되고 이렇게 하신 이 예정과 창조와 또 대속의 이 과정을 거친, 내게 유별스리 나에게 이와 같은 순서가 하나님에게 예정돼 있으니 이 이유가 뭐인가? 이것이 첫째 아담에게 속한 모든 과정들인데, 이것이 다 약한 것들이요, 또 욕된 것들이요, 또 이것이 다 더러운 것들이요, 혈육의 것들이라. 이게 다 병든 것들이요 모두 다 못쓸 것들이라.
그러면 이것이 있는 것은 성경에 말하기를 이것은 ‘이것을 심어 가지고 좋은 것으로서 다시 살아야 된다’ 이랬습니다. 이것을 심어 가지고 좋은 것으로 다시 살아야 된다. 약한 것을 심어 가지고 좋은 거로 살고, 또 욕된 것을 심어 가지고 또 좋은 것으로 살고, 이렇게 모든 나쁜 것을 심어 가지고 좋은 거로 살기 때문에 이것만큼 다시 살아나서 좋아지면은 그것이 존재의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죄 가운데 빠졌을지라도 하나님이 이것을 나에게 어짜라고 다른 사람 없는 내게 이런 예정이 있는가? 이 예정대로 성취되는 이런 일이 있는가? 다른 사람보다 주님에게 이런 대속을 또 요런 종류의 대속을 입게 됐는가? 이것은 전부가 내 구원을 위해서 있단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여게서 더듬어 찾아서 그것이 나에게 좋은 것, 그것이 들어서, 약한 것이라면은 강한 것, 또 욕된 것이라면 영광스러운 것, 또 하나는 뭐이요? 내가 그 하나를 잊어버렸네. 그러면 혈육의 것을 신령한 것으로, 또? 아, 썩을 것. 썩을 것 그게 내가 암만 해도 안 나오는구만요. 안 나와서 내가 지금 말했어.
이래 젊어도, 문장이 갈 지(之)자에 막힌다고 그런 일이 있어요, 사람은. 이런데도 나이가 많으면 또 더 그런 일 많아. 그러니까 설교록을 보든지 설교를 들을 때에 그런 것을 이해하고 어쨌든지 단어가 여간 틀리고 또 인용하는 무슨 성구가 틀리고 이렇게 돼도, 어떨 때는 모세를 뭐 엘리야라고 그렇게 말할 때도 있어요. 이러니까 그것은 이해를 하시고, 그것도 없으면 좋은데 이해를 하시고 저렇게 증거하는 것의 그 도가 뭐이냐? 우리가 걸어갈 길이 뭐이냐? 그 도를 찾으면 그 도는 아는 대로는 바로 증거가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아시고.
이래서, 우리에게 닥쳐지는 것은 어떤 순서에 우리의 불행이라는 그런 것이 닥쳐져 있든지 전부 불행으로 닥쳐져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심이 아니요 죄값도 아니요 나로서는 그것이 있어야 고치기 때문에 고치기 위하는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신 이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할당되고 해당된 고칠 부분 고것을 바로 찾아 가지고 고치면 그것은 없어집니다. 이 말을 간단한 시간에 그거는 어설피 해 놓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사람은 ‘그 아주 비합리의 말이다’ 이렇게 오해하기 쉬우나 그저 간단한 시간에 말하는 것입니다.
[죄론/심판] 여러 가지 질문들 - '죄값과 징계' 외
제목분류 : [~교리~신론~역사~예정~]
내용분류 : [-교리-신론-역사-예정-]/[-성경-성경일반-]/[-교리-말세론-심판-사심판-]/[-교리-교회론-신앙생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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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안녕하십니까?
1. 죄값과 징계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시25:11>의 성구를 묵상하다가 죄악과 하나님의 징계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설교록 중 궁금했지만 그냥 가슴에 담아 두고 지나쳤던 부분이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집회 설교록인데 몇년도 설교록인지, 정확한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예정'에 연결된 질문인 것 같습니다. '환난'에 관한 설교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징계도 예정하셨는데 그것이 죄에 뒤따라 일어나서 죄 때문에 징계가 따른 것으로 보여지도록 하시는 것 뿐이다]
라는 의미의 말씀이었습니다.
정확한 문맥은 생각나지 않지만 확실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위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인간의 시각에서는 '죄 때문에 이런 징계를 주셨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 시각에서는 죄와 징계, 혹은 죄값은 상관관계없는 별개의 것들로 해석될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질문>
다른 설교록에서 불신자의 죄값과 믿는자의 징계의 차이점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위의 말씀에 비추어서 '징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죄'와 '징계'의 상관관계에 대한 말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2. 경건치 않은 행위에 대한 심판
다음 성구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주석에 의하면 거짓교사에 대한 말씀이라는데...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 유1:15'
이 성구에서 '뭇사람'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불택자 모두를 말씀하심입니까?)
택자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말씀이라면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도 이미 사함받은 '모든' 경건치 않은 행위도 심판의 대상(혹은 하나님의 노여움, 정죄의 대상)이 됩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고서도 내가 저지른 경건치 않은 모든 행위들에 가슴을 치며 두려운 심판을 받게 될까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7:18-19'
와 같은 말씀으로 위안을 받다가도 위와 같은 말씀을 대하게 되면 큰 죄인이라 두려운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3. 둘째 사망
계21:14에서 말씀하신 둘째 사망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둘째 사망'과 '사심판'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4. 주일 성수
혼자 생각해도 답을 얻을 수 있는 사안임에도 굳이 질문드립니다.
모든 세상적 불이익을 무릅쓰고 엄격한 기준으로 생명걸고 주일을 지키는 총공회 입장에서는 단호한 답이 나올 수 있겠다고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만...
신약시대에도 역시 주일을 지키지 않은 죄는 '사망'에 해당될 정도로 하나님을 노엽게 해 드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을까요?
아침부터 이것저것 (지적 수준이 의심되는 유치한 질문까지...) 질문드려서 죄송합니다.
많이 바쁘시리라 생각되어 간략하게 답변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 어떤 부분은 적절하지 않다 생각되시면 그냥 지나치셔도 상관없겠습니다.
언제나 영육간 강건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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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분류 : [-교리-신론-역사-예정-]/[-성경-성경일반-]/[-교리-말세론-심판-사심판-]/[-교리-교회론-신앙생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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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안녕하십니까?
1. 죄값과 징계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시25:11>의 성구를 묵상하다가 죄악과 하나님의 징계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설교록 중 궁금했지만 그냥 가슴에 담아 두고 지나쳤던 부분이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집회 설교록인데 몇년도 설교록인지, 정확한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예정'에 연결된 질문인 것 같습니다. '환난'에 관한 설교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징계도 예정하셨는데 그것이 죄에 뒤따라 일어나서 죄 때문에 징계가 따른 것으로 보여지도록 하시는 것 뿐이다]
라는 의미의 말씀이었습니다.
정확한 문맥은 생각나지 않지만 확실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위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인간의 시각에서는 '죄 때문에 이런 징계를 주셨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 시각에서는 죄와 징계, 혹은 죄값은 상관관계없는 별개의 것들로 해석될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질문>
다른 설교록에서 불신자의 죄값과 믿는자의 징계의 차이점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위의 말씀에 비추어서 '징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죄'와 '징계'의 상관관계에 대한 말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2. 경건치 않은 행위에 대한 심판
다음 성구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주석에 의하면 거짓교사에 대한 말씀이라는데...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 유1:15'
이 성구에서 '뭇사람'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불택자 모두를 말씀하심입니까?)
택자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말씀이라면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도 이미 사함받은 '모든' 경건치 않은 행위도 심판의 대상(혹은 하나님의 노여움, 정죄의 대상)이 됩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고서도 내가 저지른 경건치 않은 모든 행위들에 가슴을 치며 두려운 심판을 받게 될까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7:18-19'
와 같은 말씀으로 위안을 받다가도 위와 같은 말씀을 대하게 되면 큰 죄인이라 두려운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3. 둘째 사망
계21:14에서 말씀하신 둘째 사망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둘째 사망'과 '사심판'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4. 주일 성수
혼자 생각해도 답을 얻을 수 있는 사안임에도 굳이 질문드립니다.
모든 세상적 불이익을 무릅쓰고 엄격한 기준으로 생명걸고 주일을 지키는 총공회 입장에서는 단호한 답이 나올 수 있겠다고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만...
신약시대에도 역시 주일을 지키지 않은 죄는 '사망'에 해당될 정도로 하나님을 노엽게 해 드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을까요?
아침부터 이것저것 (지적 수준이 의심되는 유치한 질문까지...) 질문드려서 죄송합니다.
많이 바쁘시리라 생각되어 간략하게 답변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 어떤 부분은 적절하지 않다 생각되시면 그냥 지나치셔도 상관없겠습니다.
언제나 영육간 강건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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