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복잡했던 언행심사를 가지고 참고해 보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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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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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5 00:00
제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
내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교리-구원론-건설구원-기능구원-]/[-교리-구원론-기본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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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내용은 교리적으로 아주 민감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 뿐 아니라, 이 내용이 인용되어 다른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 많으므로 이곳과 교리적으로 반대되는 분들까지 염두에 두고 답변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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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앙문제에 있어 애매한 답변과 단호한 답변
①고난 때문에 단호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 교계를 향해 신사참배가 죄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그렇다는 답변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왜정말년에는 애매하게 답변한 분들이 거의 전부일 것입니다. 이 경우는 옳고 그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너무 크기 때문에 생의 애착욕이 교묘하게 인간 심리를 최면상태로 만들어 부인하게 만드는 경우입니다.
마치 불신자가 미안한 일을 당하면 술을 짐짓 실컷 먹고 취해버린 후 술김에 일을 다 추냅니다. 뻔히 알지만 술의 힘으로 우선 자신의 체면을 가리고 화급한 순간을 넘기고 나면, 반복이라는 기술로 마취를 시키는 악습이라는 묘한 재주꾼이 뒷수습을 해버립니다. 이때쯤 되면 미안한 것도 모르고 오히려 신사참배가 왜 죄가 되는지를 깜빡 잊어버리는 정도가 됩니다.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는 문제는 성경으로 너무 단호하게 해답이 나오는 경우입니다. 신사참배와 같은 문제는 죄냐 아니냐는 것을 두고 기도할 문제가 아닙니다. 무조건 죄라고 단정해놓고 나서, 그 단호한 답변 때문에 다가올 환란을 어떻게 이겨야 할지를 놓고 기도할 문제입니다.
②순수하게 몰라서, 단호하게 답변할 수 없는 문제도 있습니다.
주후 325년 직전까지만 해도 삼위일체교리가 과연 딱 부러지게 성경적이냐고 물으면서 확인을 위해 자필서명을 하라고 요구하면 거의 모든 분들이 주저했을 것입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전부 이단감입니다. 그러나 당시 초대교회의 어린 교리 수준에서는 삼위일체라는 교리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였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가 이단인지?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아다나시우스가 이단인지? 이쪽 말을 들으면 이쪽이 옳다고 쏠리고 또 저쪽 말을 들으면 저쪽으로 쏠려가고 있었습니다. 325년 니케아공회에서 삼위일체교리를 정통으로 공인하고도 그 교리를 주장한 아다나시우스는 몇 번이나 이단으로 몰려 또 다시 고난의 길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불신자 학생들도 세계사에서 이 교리가 기독교 정통교리라고 배우고 있습니다.
325년 직전까지는 초대교회가 이 문제를 가지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순수하게 깨닫지 못해서 머뭇거린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 체질상 말 바꾸는 것을 예사로 알고 심지어 예절바른 사람이라고 대우까지 하지만, 초대교인들은 말 한 마디에 생명을 걸었던 세상 문화를 가진 상태에다가 로마박해 시절 자기 신앙의 고백 한 마디에 순교를 당하느냐 아니면 피하여 목숨을 부지하느냐는 선택의 기로를 수도없이 지나왔기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 우리 한국인들처럼 이 말 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 말, 특히 교리에 대한 한 마디 신앙고백은 자기 목숨을 내대야 하기 때문에 당시 논란이 되고 있던 삼위일체를 인정하고 부인하는 일을 장난삼아 불쑥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③오늘 건설구원과 중생된 영의 존재 등을 두고 망설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사참배처럼 옳은지 그른지 뻔히 알면서도, 한국교회의 보수학설에 없는 이설이라고 비판을 받으면 괜히 교회나 신학교에서 본전을 찾지 못할까 해서 애매하게 말만 뱅뱅 돌리고 있는 분들이 많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여론이 이단으로 몰려가면 슬쩍 발을 뺄 수 있도록 무게 중심이 없는 쪽의 발만 디딘 정도로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면서, 별 문제가 없으면 특별한 교훈으로 이 교리를 전하다가 교계의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거북이 머리 넣듯 쏙 빠지고, 혹시 이 교리가 이 시대를 감당할 핵심교리로 부상하면 자신은 오래 전부터 이 교리를 미리 알고 있었던 선지자로 명함을 내밀 수 있도록 숟가락만 들고 다니는 식의 처세술을 가진 분들이 현재 이 교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언제 총공회 내의 운동권목회자들이 '예,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겁니다.'라고 유명한 표현을 유행시킨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상대로 정치를 할 때는 양발을 걸치면 되겠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상대하시기 때문에 속지 않습니다. 이번 질문 내용은 질문자와 답변자가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면 답변이 간단합니다. 그러나 교계에 생중계로 방송이 진행 중이므로 생소하게 이 문답을 듣는 분들을 고려해서 서론이 본론보다 길어짐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④다음 세대를 감당할 핵심 교리란, 그 초기 전달과정에 고난이 많습니다.
어떤 교리든지 교회가 자라감에 따라 좀더 깊고 높은 교리가 필요하여 하나님께서 역사교회를 통해 교리를 어떻게 주셨는지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지만, 한 가지 참고하실 것은, 한 교리가 자리를 잡으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다음 세대 교회를 그 면으로 의심없이 건설해 나가도록 신앙의 뼈대가 되는데, 그 교리를 이어 그 다음 세대를 감당할 새 교리가 나오게 되면, 항상 새 교리를 바로 깨닫고 따르는 그 시대 가장 앞서 있는 신앙가들 또는 하나님의 동향을 가장 민감하게 깨달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교회들은 별 어려움 없이 한 차원 높은 신앙으로 얼른 나아가지만, 대부분의 습관적 신앙가들은 단순히 과거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비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단도 이런 논리를 가지고 이단설을 촉발시키고 자기들을 가루지만 새로 자라가는 참 교회도 늘 이런 성장통에 고통을 겪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인으로는 새로운 이단인지 새로운 참 신앙의 전진인지 어떻게 구별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만, 세상 지식과 달리 진리는 성경이 명확하게 선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단의 탈선과 진리의 발전은 과거와 다르다는 것만 같지, 성경에 대조를 해보면 너무 쉽고 간단하여 혼동이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가 이 역사적 경험을 교리로 표현한 것이 바로 '성경의 명백성'입니다. 성경은 유무식 동서양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택자라면 아무 어려움 없이 혼동없이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⑤천국에 간 성도들의 영원한 상황
삼위일체교리가 비록 초기에 이해가 곤란한 부분은 많았지만 실은 인간 기존지식에 너무 강하게 집착을 하고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그냥 성경을 성경으로만 단순하게 읽고 믿는 이들에게는 왜 그 교리가 어려운지 모를 정도입니다. 모든 교리가 실은 다 그러합니다.
천국에 간 성도의 상황은 어떠하겠는가? 어떤 분들은 가보지 않고 누가 알겠느냐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해 준 만큼은 안 가봐도 아는 것인데도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세상 자기 지식과 주관으로 뱉는 말일 뿐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은 부분은 성경에 알려준 부분으로 짐작을 하는 정도에서 그치게 됩니다.
천국의 성도에게 기쁨과 평안과 영광이 있으리라고 성경이 말했고 그런 성구들은 너무 많아서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천국의 성도에게 세상 단어로 표현하자면 수치와 죄송함과 부끄러움과 고통이 있을 것도 성경이 확고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성경이 말한 대로 그대로만 알고 믿으면 됩니다.
이 두가지 표현이 모순이 된다면? 그것은 인간 주관으로 너무 강하게 선입관념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에 모순입니다. 성경이 말한 양쪽 표현을 성경 그대로 지식하고 그대로 믿어버리면 어떤 모순도 어려움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정교리, 주권교리, 하나님의 자존상태, 삼위일체 교리 등 모든 신학적 최고 난제와 어려운 교리들을 바로 해결해 버리는 첩경의 지혜입니다. 어떤 분들은 비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알고보면 무식한 시골 할머니라도 예수님 믿는 데는 지식이 없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성경을 그렇게 적어주셨으니 믿는 우리에게는 상식적인 논리입니다.
2.교리의 중요성 때문에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간단하게 답변한다면
(질문1에 대하여)
①천국 간 성도에게 슬픔과 기쁨, 수치와 영광이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히 이어지는가?
고전3:15,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마5:19,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런 성구를 두고 별별 신학자들이 별별 원어와 인간 논리로 설명을 이어가지만, 신학을 성경 그대로 간단하게 믿으면 이렇게 쉬운데 자기 인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탈피하지 못하는 학자들의 많은 인간적 학식이 들어서 일을 어렵게 만든다고 한탄하고 싶습니다.
천국에서 지극히 작고 큰 사람이 있다고 명확하게 말씀했고
구원받은 사람의 상태가 '해를 받으리니 ..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질문 내용은 전부 성경으로 바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질문자를 향해 반박하듯 표현이 계속 되고 있어 죄송스럽지만 언젠가 교리적으로 중요한 토론이 있게 될 때에 상대방의 반론을 미리 예상하고 또 그때 답변자가 탄식할 내용을 미리 적음으로 이 글을 읽는 상대방들이 섣불리 발표하다가 실수한다거나 아니면 한번 발언한 내용을 합리화 하려고 나가는 일이 줄어들 수 있도록 지금 가상의 반대 토론자를 향해 미리 하고 싶은 발언을 한다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일대 일로 실명 토론이 진행되면 많은 이들을 위해 옳은 내용은 옳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렇게 되는 경우 대개 반대 토론자 측에서 자신이 지게 된다는 세상식 생각을 하게 되면 토론 외적 문제까지 걸고 나오며 정치싸움으로 변질시키는 경우가 거의 전부였습니다.
②완전자 영원불변의 신성 하나님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히4:15에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굶주리고 매를 맞은 것은 우리 대신 당했으므로 상관할 것이 없지만, 예수님이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한 것은 히4:15에 의하여 전부 의로운 것이지 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실제 행동을 가지고 우리는 천국을 얼마든지 설명하고 그려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기도 했으나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그 슬픔이 오늘 우리가 가진 슬픔과 같은 슬픔이라면 예수님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없는 예수님이 죄없는 슬픔을 가졌으니 그 슬픔은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의 죄의 슬픔과 같은 슬픔으로 보이지만 실은 예수님의 슬픔은 죄가 아니고 우리의 슬픔은 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단일 인격체, 그것도 우리 인적 요소만 가진 것이 아니고 신적 요소와 한 분이 되신 신인양성일위로서 슬픔을 가졌고 분노를 가졌고 욕설을 했고 채찍으로 폭행을 했으며 탄식도 했습니다. 심지어 인적 요소를 가지기 이전 순수하게 하나님으로서만 존재하던 삼위 하나님께서 후회도 하고 미워도 했으니,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미움'이라는 단어를 우리들이 죄로 가지는 미움 외에 하나님으로서 죄가 아닌 미움, 죄와 상관없는 미움, 단지 인간이 인간의 눈르로 볼 때 미움처럼 보였을 뿐이지 실은 미움이 아닌 미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일성 영원불변성을 가진 하나님께서 미움과 사랑, 기쁨과 슬픔, 각오와 후회, 예정과 취소 .... 등 이중적이며 상호모순적인 언행심사가 한도 없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했으니 천국간 성도에게도 2가지 상황이 있다 해서 그것이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단지 천국에서 우리가 고통 슬픔 후회를 느끼는 그 느낌을 오늘 지옥갈 죄인들의 그런 감정과 꼭 같은 차원으로 봐서 이 교리를 비판하는 분들이 많은데 너무 좁고 인간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③천국간 성도와 지상의 성도 그리고 하나님의 심리 상황을 비교한다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옥으로 보내야 할 후회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의 성도들은 세상에서 대속으로 좀더 잘 살지 못한 후회심은 가지고 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못 일을 저질러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식을 잘못 길러 애비로서 고통을 많이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천국의 성도들이 지옥 간 자기 자식을 보며 자기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한 것이 있다면
그 천국간 성도가 천구에서 느끼는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심리를 천국의 고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말을 듣지 않아 아버지의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2)질문2에 대하여
질문자 설명이 옳습니다.
(3)질문3에 대하여
①하늘의 수치와 평강이 함께 존재하는 것은
'질문2'에서 질문자께서 설명하신 것처럼,
천국에는 시기 쟁투가 없는데 그 이유는 옛사람의 요소들이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서로의 실력과 과거 모든 것을 가림없이 다 알기 때문에 손양원목사님의 고위직이 우리처럼 저급에 있는 천국성도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수치와 평강이 천국에서 한 성도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지옥에 보내야 할 오늘 우리가 가진 수치가 아니라 천국의 성도가 참된 수치를 가진 그 수치 때문에 평강을 느끼는 것입니다. 설명에 반복이 많아 생략하겠으니 앞의 답변 내용으로 나머지 설명은 스스로 해보셨으면 합니다.
(3)'질문3'에 대하여
기본구원은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의 건설구원이 어떻게 준비되었느냐에 따라 일단 천국에서 출발점부터 서로 다를 것이고, 그후 영원히 자라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들의 격차는 점점 더 크질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역전은 없습니다. 원한다면 오늘 살아있는 순간만이 기회입니다.
3.참고로
늦게 답변을 드려 죄송합니다.
집회 일정 때문에 미리 올려진 답변을 놓쳤습니다.
2가지 내용은 질문자께서 잘 요약해 주셔서 답변자도 참고했습니다.
1가지 내용은 질문 내용 때문에 장차 예상되는 격론을 미리 앞당겨 준비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질문자가 아니라 이 교리의 반론학자들을 이곳에 미리 초청하고 답변자가 이 교리를 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지나친 표현을 많이 했으므로 질문자께서는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실명으로 상대자가 나타나면 듣는 이들에게 여간 손해가 있어도 표현을 자유롭게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가상 토론일 때가 가장 편하고 좋습니다.
질문 마지막 부분에 대하여, 이곳은 옳은 것을 찾아가는 일을 두고는 신앙이든 육적으로든 연소와 연로를 가려 본 적이 없습니다. 이곳을 통해 하나님께서 안내하실 바가 있듯이, 이곳을 찾는 그 어떤 분을 통해서도 답변자가 경청하여야 할 일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시장 비유로 가르친 말씀입니다.
내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교리-구원론-건설구원-기능구원-]/[-교리-구원론-기본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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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내용은 교리적으로 아주 민감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 뿐 아니라, 이 내용이 인용되어 다른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 많으므로 이곳과 교리적으로 반대되는 분들까지 염두에 두고 답변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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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앙문제에 있어 애매한 답변과 단호한 답변
①고난 때문에 단호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 교계를 향해 신사참배가 죄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그렇다는 답변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왜정말년에는 애매하게 답변한 분들이 거의 전부일 것입니다. 이 경우는 옳고 그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너무 크기 때문에 생의 애착욕이 교묘하게 인간 심리를 최면상태로 만들어 부인하게 만드는 경우입니다.
마치 불신자가 미안한 일을 당하면 술을 짐짓 실컷 먹고 취해버린 후 술김에 일을 다 추냅니다. 뻔히 알지만 술의 힘으로 우선 자신의 체면을 가리고 화급한 순간을 넘기고 나면, 반복이라는 기술로 마취를 시키는 악습이라는 묘한 재주꾼이 뒷수습을 해버립니다. 이때쯤 되면 미안한 것도 모르고 오히려 신사참배가 왜 죄가 되는지를 깜빡 잊어버리는 정도가 됩니다.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는 문제는 성경으로 너무 단호하게 해답이 나오는 경우입니다. 신사참배와 같은 문제는 죄냐 아니냐는 것을 두고 기도할 문제가 아닙니다. 무조건 죄라고 단정해놓고 나서, 그 단호한 답변 때문에 다가올 환란을 어떻게 이겨야 할지를 놓고 기도할 문제입니다.
②순수하게 몰라서, 단호하게 답변할 수 없는 문제도 있습니다.
주후 325년 직전까지만 해도 삼위일체교리가 과연 딱 부러지게 성경적이냐고 물으면서 확인을 위해 자필서명을 하라고 요구하면 거의 모든 분들이 주저했을 것입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전부 이단감입니다. 그러나 당시 초대교회의 어린 교리 수준에서는 삼위일체라는 교리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였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가 이단인지?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아다나시우스가 이단인지? 이쪽 말을 들으면 이쪽이 옳다고 쏠리고 또 저쪽 말을 들으면 저쪽으로 쏠려가고 있었습니다. 325년 니케아공회에서 삼위일체교리를 정통으로 공인하고도 그 교리를 주장한 아다나시우스는 몇 번이나 이단으로 몰려 또 다시 고난의 길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불신자 학생들도 세계사에서 이 교리가 기독교 정통교리라고 배우고 있습니다.
325년 직전까지는 초대교회가 이 문제를 가지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순수하게 깨닫지 못해서 머뭇거린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 체질상 말 바꾸는 것을 예사로 알고 심지어 예절바른 사람이라고 대우까지 하지만, 초대교인들은 말 한 마디에 생명을 걸었던 세상 문화를 가진 상태에다가 로마박해 시절 자기 신앙의 고백 한 마디에 순교를 당하느냐 아니면 피하여 목숨을 부지하느냐는 선택의 기로를 수도없이 지나왔기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 우리 한국인들처럼 이 말 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 말, 특히 교리에 대한 한 마디 신앙고백은 자기 목숨을 내대야 하기 때문에 당시 논란이 되고 있던 삼위일체를 인정하고 부인하는 일을 장난삼아 불쑥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③오늘 건설구원과 중생된 영의 존재 등을 두고 망설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사참배처럼 옳은지 그른지 뻔히 알면서도, 한국교회의 보수학설에 없는 이설이라고 비판을 받으면 괜히 교회나 신학교에서 본전을 찾지 못할까 해서 애매하게 말만 뱅뱅 돌리고 있는 분들이 많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여론이 이단으로 몰려가면 슬쩍 발을 뺄 수 있도록 무게 중심이 없는 쪽의 발만 디딘 정도로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면서, 별 문제가 없으면 특별한 교훈으로 이 교리를 전하다가 교계의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거북이 머리 넣듯 쏙 빠지고, 혹시 이 교리가 이 시대를 감당할 핵심교리로 부상하면 자신은 오래 전부터 이 교리를 미리 알고 있었던 선지자로 명함을 내밀 수 있도록 숟가락만 들고 다니는 식의 처세술을 가진 분들이 현재 이 교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언제 총공회 내의 운동권목회자들이 '예,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겁니다.'라고 유명한 표현을 유행시킨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상대로 정치를 할 때는 양발을 걸치면 되겠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상대하시기 때문에 속지 않습니다. 이번 질문 내용은 질문자와 답변자가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면 답변이 간단합니다. 그러나 교계에 생중계로 방송이 진행 중이므로 생소하게 이 문답을 듣는 분들을 고려해서 서론이 본론보다 길어짐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④다음 세대를 감당할 핵심 교리란, 그 초기 전달과정에 고난이 많습니다.
어떤 교리든지 교회가 자라감에 따라 좀더 깊고 높은 교리가 필요하여 하나님께서 역사교회를 통해 교리를 어떻게 주셨는지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지만, 한 가지 참고하실 것은, 한 교리가 자리를 잡으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다음 세대 교회를 그 면으로 의심없이 건설해 나가도록 신앙의 뼈대가 되는데, 그 교리를 이어 그 다음 세대를 감당할 새 교리가 나오게 되면, 항상 새 교리를 바로 깨닫고 따르는 그 시대 가장 앞서 있는 신앙가들 또는 하나님의 동향을 가장 민감하게 깨달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교회들은 별 어려움 없이 한 차원 높은 신앙으로 얼른 나아가지만, 대부분의 습관적 신앙가들은 단순히 과거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비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단도 이런 논리를 가지고 이단설을 촉발시키고 자기들을 가루지만 새로 자라가는 참 교회도 늘 이런 성장통에 고통을 겪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인으로는 새로운 이단인지 새로운 참 신앙의 전진인지 어떻게 구별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만, 세상 지식과 달리 진리는 성경이 명확하게 선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단의 탈선과 진리의 발전은 과거와 다르다는 것만 같지, 성경에 대조를 해보면 너무 쉽고 간단하여 혼동이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가 이 역사적 경험을 교리로 표현한 것이 바로 '성경의 명백성'입니다. 성경은 유무식 동서양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택자라면 아무 어려움 없이 혼동없이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⑤천국에 간 성도들의 영원한 상황
삼위일체교리가 비록 초기에 이해가 곤란한 부분은 많았지만 실은 인간 기존지식에 너무 강하게 집착을 하고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그냥 성경을 성경으로만 단순하게 읽고 믿는 이들에게는 왜 그 교리가 어려운지 모를 정도입니다. 모든 교리가 실은 다 그러합니다.
천국에 간 성도의 상황은 어떠하겠는가? 어떤 분들은 가보지 않고 누가 알겠느냐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해 준 만큼은 안 가봐도 아는 것인데도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세상 자기 지식과 주관으로 뱉는 말일 뿐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은 부분은 성경에 알려준 부분으로 짐작을 하는 정도에서 그치게 됩니다.
천국의 성도에게 기쁨과 평안과 영광이 있으리라고 성경이 말했고 그런 성구들은 너무 많아서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천국의 성도에게 세상 단어로 표현하자면 수치와 죄송함과 부끄러움과 고통이 있을 것도 성경이 확고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성경이 말한 대로 그대로만 알고 믿으면 됩니다.
이 두가지 표현이 모순이 된다면? 그것은 인간 주관으로 너무 강하게 선입관념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에 모순입니다. 성경이 말한 양쪽 표현을 성경 그대로 지식하고 그대로 믿어버리면 어떤 모순도 어려움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정교리, 주권교리, 하나님의 자존상태, 삼위일체 교리 등 모든 신학적 최고 난제와 어려운 교리들을 바로 해결해 버리는 첩경의 지혜입니다. 어떤 분들은 비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알고보면 무식한 시골 할머니라도 예수님 믿는 데는 지식이 없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성경을 그렇게 적어주셨으니 믿는 우리에게는 상식적인 논리입니다.
2.교리의 중요성 때문에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간단하게 답변한다면
(질문1에 대하여)
①천국 간 성도에게 슬픔과 기쁨, 수치와 영광이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히 이어지는가?
고전3:15,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마5:19,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런 성구를 두고 별별 신학자들이 별별 원어와 인간 논리로 설명을 이어가지만, 신학을 성경 그대로 간단하게 믿으면 이렇게 쉬운데 자기 인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탈피하지 못하는 학자들의 많은 인간적 학식이 들어서 일을 어렵게 만든다고 한탄하고 싶습니다.
천국에서 지극히 작고 큰 사람이 있다고 명확하게 말씀했고
구원받은 사람의 상태가 '해를 받으리니 ..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질문 내용은 전부 성경으로 바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질문자를 향해 반박하듯 표현이 계속 되고 있어 죄송스럽지만 언젠가 교리적으로 중요한 토론이 있게 될 때에 상대방의 반론을 미리 예상하고 또 그때 답변자가 탄식할 내용을 미리 적음으로 이 글을 읽는 상대방들이 섣불리 발표하다가 실수한다거나 아니면 한번 발언한 내용을 합리화 하려고 나가는 일이 줄어들 수 있도록 지금 가상의 반대 토론자를 향해 미리 하고 싶은 발언을 한다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일대 일로 실명 토론이 진행되면 많은 이들을 위해 옳은 내용은 옳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렇게 되는 경우 대개 반대 토론자 측에서 자신이 지게 된다는 세상식 생각을 하게 되면 토론 외적 문제까지 걸고 나오며 정치싸움으로 변질시키는 경우가 거의 전부였습니다.
②완전자 영원불변의 신성 하나님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히4:15에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굶주리고 매를 맞은 것은 우리 대신 당했으므로 상관할 것이 없지만, 예수님이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한 것은 히4:15에 의하여 전부 의로운 것이지 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실제 행동을 가지고 우리는 천국을 얼마든지 설명하고 그려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기도 했으나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그 슬픔이 오늘 우리가 가진 슬픔과 같은 슬픔이라면 예수님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없는 예수님이 죄없는 슬픔을 가졌으니 그 슬픔은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의 죄의 슬픔과 같은 슬픔으로 보이지만 실은 예수님의 슬픔은 죄가 아니고 우리의 슬픔은 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단일 인격체, 그것도 우리 인적 요소만 가진 것이 아니고 신적 요소와 한 분이 되신 신인양성일위로서 슬픔을 가졌고 분노를 가졌고 욕설을 했고 채찍으로 폭행을 했으며 탄식도 했습니다. 심지어 인적 요소를 가지기 이전 순수하게 하나님으로서만 존재하던 삼위 하나님께서 후회도 하고 미워도 했으니,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미움'이라는 단어를 우리들이 죄로 가지는 미움 외에 하나님으로서 죄가 아닌 미움, 죄와 상관없는 미움, 단지 인간이 인간의 눈르로 볼 때 미움처럼 보였을 뿐이지 실은 미움이 아닌 미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일성 영원불변성을 가진 하나님께서 미움과 사랑, 기쁨과 슬픔, 각오와 후회, 예정과 취소 .... 등 이중적이며 상호모순적인 언행심사가 한도 없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했으니 천국간 성도에게도 2가지 상황이 있다 해서 그것이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단지 천국에서 우리가 고통 슬픔 후회를 느끼는 그 느낌을 오늘 지옥갈 죄인들의 그런 감정과 꼭 같은 차원으로 봐서 이 교리를 비판하는 분들이 많은데 너무 좁고 인간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③천국간 성도와 지상의 성도 그리고 하나님의 심리 상황을 비교한다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옥으로 보내야 할 후회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의 성도들은 세상에서 대속으로 좀더 잘 살지 못한 후회심은 가지고 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못 일을 저질러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식을 잘못 길러 애비로서 고통을 많이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천국의 성도들이 지옥 간 자기 자식을 보며 자기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한 것이 있다면
그 천국간 성도가 천구에서 느끼는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심리를 천국의 고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말을 듣지 않아 아버지의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2)질문2에 대하여
질문자 설명이 옳습니다.
(3)질문3에 대하여
①하늘의 수치와 평강이 함께 존재하는 것은
'질문2'에서 질문자께서 설명하신 것처럼,
천국에는 시기 쟁투가 없는데 그 이유는 옛사람의 요소들이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서로의 실력과 과거 모든 것을 가림없이 다 알기 때문에 손양원목사님의 고위직이 우리처럼 저급에 있는 천국성도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수치와 평강이 천국에서 한 성도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지옥에 보내야 할 오늘 우리가 가진 수치가 아니라 천국의 성도가 참된 수치를 가진 그 수치 때문에 평강을 느끼는 것입니다. 설명에 반복이 많아 생략하겠으니 앞의 답변 내용으로 나머지 설명은 스스로 해보셨으면 합니다.
(3)'질문3'에 대하여
기본구원은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의 건설구원이 어떻게 준비되었느냐에 따라 일단 천국에서 출발점부터 서로 다를 것이고, 그후 영원히 자라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들의 격차는 점점 더 크질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역전은 없습니다. 원한다면 오늘 살아있는 순간만이 기회입니다.
3.참고로
늦게 답변을 드려 죄송합니다.
집회 일정 때문에 미리 올려진 답변을 놓쳤습니다.
2가지 내용은 질문자께서 잘 요약해 주셔서 답변자도 참고했습니다.
1가지 내용은 질문 내용 때문에 장차 예상되는 격론을 미리 앞당겨 준비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질문자가 아니라 이 교리의 반론학자들을 이곳에 미리 초청하고 답변자가 이 교리를 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지나친 표현을 많이 했으므로 질문자께서는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실명으로 상대자가 나타나면 듣는 이들에게 여간 손해가 있어도 표현을 자유롭게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가상 토론일 때가 가장 편하고 좋습니다.
질문 마지막 부분에 대하여, 이곳은 옳은 것을 찾아가는 일을 두고는 신앙이든 육적으로든 연소와 연로를 가려 본 적이 없습니다. 이곳을 통해 하나님께서 안내하실 바가 있듯이, 이곳을 찾는 그 어떤 분을 통해서도 답변자가 경청하여야 할 일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시장 비유로 가르친 말씀입니다.
[건설구원] 행위에 대한 영원한 보응에 대하여
제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
내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교리-구원론-건설구원-기능구원-]/[-교리-구원론-기본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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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함을 입은, 예수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와 진리(하나님의 뜻)와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중생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우리 공회에서 가르치는 기본구원을 받은 자로 말입니다.
기본구원도 건설구원도 그 근거는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라고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다 믿음이 화합이 되어야 하는데요
여기서 왠지 기본구원은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이루어진 인간의 불순종이나 거부가 용납되지 않는 느낌을 받구요
건설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예정하시고 창조/섭리해 나가시지만 인간의 불순종이나 3가지를 벗고 사는 것으로 이 구원은 기본구원과 달리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하여 실패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져 왔고 이것을 힘주어 말하면 건설구원도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는 사람들과 대립이 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기본구원을 믿는 믿음(마치 여기서 기본구원에 대한 믿음은 순종없이도 갖게 되는 구원인 것으로 느껴지나 이 기본구원에 대한 실행단계의 믿음은 이미 건설구원으로 생각되어짐, 안그러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되므로...) 즉, 근본적인 회개의 바탕이 되는 이 구원과 평생회개로 교훈되어져 온 매 현실에서 3가지를 붙들고 살므로 쌓아가는 건설구원에 대한 믿음(실행의 단계가 반드시 요구되어지는 믿음)
또 혼동이 옵니다.
1) 이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에 대한 믿음관이 궁금합니다.
2) 건설구원이 행위구원으로도 표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행위구원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하늘로 부터 오는 영원한 처소를 덧입고 살아 영원 무궁세계로 가져갈 행위도 있을 것이고 영원한 지옥갈 처소로 덧입고 살아 영원멸망으로 빠질 행위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행위가 두 종류가 있다고 하여 그것에 대한 영원한 보응이 한 사람에게 대하여 동시에 영원한 상벌로 지속된다면 그것에 대한 그 사람의 상태(?)는 어떻게 될런지요?
불가운데서 얻은 구원이란 말씀처럼 행위구원이 하나도 없는 , 세상에서 이룬 모든 것이 구원하고는 상관없는 허사라고 하면 그 사람의 행위는 전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행위이겠으나 그 사람의 회개로 죄 용서함 받아 벌은 없으되 행한 의도 없으므로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행위구원은 없는 자가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그렇다면 영원 멸망할 행위는 다 회개 한 자인데 세상에서 하나님뜻대로 산것은 별로 없다면 그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기능이 별로 없는 자겠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수치와 무능과 활동영역의 협소함 등으로 슬픔이나 고통이나 괴로움등이 있겠습니까?
즉, 2종류의 행위에대한 영원한 보응이 동시에 이루어 진다면 그 사람이 느끼게 되어지는 것은 어떤지가 궁금합니다.
이 부분이 막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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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
내용분류 : [-교리-구원론-건설구원-]/[-교리-구원론-건설구원-기능구원-]/[-교리-구원론-기본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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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함을 입은, 예수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와 진리(하나님의 뜻)와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중생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우리 공회에서 가르치는 기본구원을 받은 자로 말입니다.
기본구원도 건설구원도 그 근거는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라고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다 믿음이 화합이 되어야 하는데요
여기서 왠지 기본구원은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이루어진 인간의 불순종이나 거부가 용납되지 않는 느낌을 받구요
건설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예정하시고 창조/섭리해 나가시지만 인간의 불순종이나 3가지를 벗고 사는 것으로 이 구원은 기본구원과 달리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하여 실패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져 왔고 이것을 힘주어 말하면 건설구원도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는 사람들과 대립이 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기본구원을 믿는 믿음(마치 여기서 기본구원에 대한 믿음은 순종없이도 갖게 되는 구원인 것으로 느껴지나 이 기본구원에 대한 실행단계의 믿음은 이미 건설구원으로 생각되어짐, 안그러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되므로...) 즉, 근본적인 회개의 바탕이 되는 이 구원과 평생회개로 교훈되어져 온 매 현실에서 3가지를 붙들고 살므로 쌓아가는 건설구원에 대한 믿음(실행의 단계가 반드시 요구되어지는 믿음)
또 혼동이 옵니다.
1) 이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에 대한 믿음관이 궁금합니다.
2) 건설구원이 행위구원으로도 표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행위구원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하늘로 부터 오는 영원한 처소를 덧입고 살아 영원 무궁세계로 가져갈 행위도 있을 것이고 영원한 지옥갈 처소로 덧입고 살아 영원멸망으로 빠질 행위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행위가 두 종류가 있다고 하여 그것에 대한 영원한 보응이 한 사람에게 대하여 동시에 영원한 상벌로 지속된다면 그것에 대한 그 사람의 상태(?)는 어떻게 될런지요?
불가운데서 얻은 구원이란 말씀처럼 행위구원이 하나도 없는 , 세상에서 이룬 모든 것이 구원하고는 상관없는 허사라고 하면 그 사람의 행위는 전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행위이겠으나 그 사람의 회개로 죄 용서함 받아 벌은 없으되 행한 의도 없으므로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행위구원은 없는 자가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그렇다면 영원 멸망할 행위는 다 회개 한 자인데 세상에서 하나님뜻대로 산것은 별로 없다면 그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기능이 별로 없는 자겠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수치와 무능과 활동영역의 협소함 등으로 슬픔이나 고통이나 괴로움등이 있겠습니까?
즉, 2종류의 행위에대한 영원한 보응이 동시에 이루어 진다면 그 사람이 느끼게 되어지는 것은 어떤지가 궁금합니다.
이 부분이 막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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